소련 루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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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삽입 이미지는 1947년에 발행된 1루블권 지폐의 앞면으로 15개 공용어로 1루블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1. 개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에서 사용되던 통화이다. ISO 4217코드는 SUR. 보조 단위로 코페이카가 있으며, 100 코페이카는 1 루블에 해당한다. 기호는 그냥 단순하게 앞글자만 따서 루블은 руб, 코페이카는 к.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에서 루블을 발행한 소비에트 연방 국가은행(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банк СССР)은 모스크바에서 1922년부터 1991년까지 영업했다.
소련 루블과 미국 달러의 환율은 제2세계의 법정 환율(프랑스미국에서 소비에트 연방으로 여행할 때에 쓰이는 환율)과 제1세계의 시장 환율(소비에트 연방에서 프랑스미국으로 여행할 때에 쓰이는 환율)이 있었다. 소비에트 연방에서 영업하는 소비에트 연방 국가은행에 따르면 1980년대에 모스크바의 특수은행에서 거래하는 소련 루블과 미국 달러의 법정 환율을 [ 1 : 1 ]로 유지했지만, NAFTAEFTA에서 영업하는 상업은행들에 따르면 1980년말에 뉴욕런던파리로마의 외환시장에서 재평가한 소련 루블과 미국 달러의 시장 환율이 [ 10 : 1 ]에 이르렀다. 소련 장관회의가 결정한 법정 환율로 거래하는 계획경제의 특성을 고려하면, 소비에트 연방에서 식량과 소비재의 가격은 저렴한데, 사치품(주로 제1세계제3세계에서 수입한 재화들)의 가격이 하늘을 찌르는 이유가 바로 제1세계의 시장 환율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고르바초프 정권 시절에 이런 괴리감을 해소하기 위해 경제개혁을 실행했지만, 변변치 못한 성과를 거두었고 공식환율과 상업환율, 여행자 환율간의 격차가 커지자 이 격차를 메울려고 1991년에 50루블과 100루블권 지폐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식으로 개혁을 시행했으나 역시 성과는 변변치 않았다. 결국 8월 쿠데타와 그 여파로 고르바초프는 통치력을 상실하며 허수아비 신세가 되었고 보리스 옐친이 사실상의 최고지도자 자리에 등극했는데 옐친은 소비에트 연방을 해체하면서 전면적인 가격자유화를 시행했지만 가격자유화의 여파로 물가가 수십배 이상 폭등하여 화폐가치가 땅바닥으로 떨어졌고 결국 옛소련을 구성한 공화국들 모두가 새로운 화폐로 바꾸고 말았다. 소련의 완전 해체 이전에 소련에서 이탈한 발트3국도 당초에는 여건이 안되고 해서 소비에트 루블을 그대로 썼지만 루블화의 가치가 급속히 떨어지자 새 화폐로 바꾸었다.

2. 명칭


소련 당시 널리 통용된 명칭은 러시아어에서 따온 '''루블(рубль)'''이었지만, 루블은 엄밀히 소비에트 연방의 법정통화였던 만큼 각 공화국마다 통화를 부르는 별도의 이름이 있었다.

2.1. 인도유럽어족



2.2. 튀르크어족



2.3. 카르트벨리어족


  • 조지아어: მანეთი(마네티), კაპიკი(카피키)

2.4. 우랄어족




3. 소비에트 연방 국가은행과 1920년대의 화폐개혁


1917년 11월에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러시아 제국 국가은행을 접수하여 러시아 소비에트 인민은행을 개업했다. 1917년 12월에 국민경제최고회의와 전러시아 반혁명 태업단속 비상위원회를 설립하면서 은행증권보험을 국유화하고, 도시와 시골에서 동산과 부동산을 매매하는 거래를 중단했다. 1918년에 외국채의 상환을 거부하면서 내국채를 모두 탕감하고, 주식회사를 구성하는 모든 주식을 무효라고 선포하면서 자연인법인동산부동산을 국유화하고, 사유 재산의 상속권을 폐지하면서 산업과 자원 및 수송과 통신을 국유화했다. 곧이어 1918년에는 1000명을 초과한 노동자들이 일하는 대기업의 국유화를 완료하고, 1919년에는 100명을 초과한 노동자들이 일하는 중기업의 국유화를 완료하고, 1920년에는 10명을 초과한 노동자들이 일하는 소기업의 국유화를 완료했다. 1919년에 러시아 소비에트 인민은행을 제외한 금융업종 회사들을 모두 폐업하고, 본점과 지점의 다양한 금고를 모두 열어 금은동괴, 금은동화, 사금, 보석, 장식품, 귀금속, 복권, 지폐, 동전, 외환, 수표, 어음, 주식, 국고채, 회사채, 영구채, 승차권, 상품권, 태환권, 우표, 인지, 엽서를 몰수해 관공서유지비로 할당했다.[1][2]
1917년부터 1924년까지 러시아 소비에트의 국민경제를 무너뜨린 초인플레이션공산주의 혁명의 주역들이 일부러 실현한 것이다. 모스크바의 정치인들은 화폐 제도를 빨리 폐지할 필요성을 고려한 구상에 따라 돈의 구매력을 잃어버릴 만큼 돈다발을 무제한으로 찍어내는 술책으로서 화폐의 가치를 땅바닥으로 추락시켰다. 1920년에 국민경제최고회의가 러시아 소비에트 인민은행과 국고출납국을 통합하는 방식으로 재무인민위원회를 통제하면서 돈을 마구 찍어내기 시작했다. 국유기업들은 총지출의 전액을 국고에서 대출하면서 총수입의 전액을 국고에서 대납했는데, 당정군경이 명령하는 문서에 따라 특정한 고객들에게 상품을 제공하면서 노동자들에게 균등한 기본급(박사연봉=석사연봉×2=학사연봉×2×2)을 농산물, 임산물, 축산물, 수산물, 공산물, 광산물, 지폐, 국채, 수표, 어음, 우표, 인지로 지불했다. 1918년부터 1920년까지 소련 장관회의가 이른바 '전시 공산주의'를 내세워 세금을 폐지하면서 강제노동과 현물징발과 지폐인쇄를 독려했는데, 온나라의 인민들에게 식량과 소비재를 매일 배급하면서 무현금유통(장부상의 거래)을 장려한 덕택에 상하수도와 도시가스와 대중교통 및 전기설비와 우편택배와 전신전화는 공짜가 되었지만, 도시와 시골에서 다양한 사람들은 물물교환밀수집단농장텃밭으로 먹고 살았다. 이러니 거지조차 고액권 지폐를 조심스럽게 거절했다.[3][4] 그러나 이러한 초인플레이션 상황은 너무 이상주의에 입각했던데다가 내전이 벌어지던 상황속에서 초인플레이션이 지속되는것이 손해였기 대문에 나중에 포기를 하게 되었다.
1921년에 신경제정책의 실행에 대하여 어렵게 합의한 소련 장관회의가 현물세의 방식으로 징수하는 식량세를 도입하면서 러시아 소비에트 국가은행을 개업했다. 레닌은 '국가자본주의'를 '국가의 통제에 바탕한 사영 자본의 이용'으로 정의하면서 임대와 협동조합 및 무역과 이권협정을 장려했는데, 외국자본의 투자와 산업기술의 연수를 바탕으로 경영하는 민영 임대공장과 민영 협동조합 및 국영 트러스트와 국영 이권기업이 사업소를 재건하면서 국민경제를 부흥했다. 민영 사업소와 국영 사업소는 노동의 품질과 생산의 수량을 테일러 체계와 포드 체계로 꼼꼼하게 평가하면서 노동자들에게 화폐로 기본급성과급을 지불했다.[5][6]
1922년에 농산물과 임산물 및 축산물과 수산물의 자유로운 거래를 허용한 소련 장관회의가 식량과 소비재의 배급을 폐지했다. 토산물(성냥, 담배, 소금, 설탕, 후추, 커피, 꿀, 차, 소주, 맥주, 포도주, 사과주, 브랜디, 보드카, 과일주스, 먹는샘물)에 대하여 화폐세를 징수한 재무인민위원회는 화폐개혁의 기반을 마련하는 수단으로서 1922년 12월 1일부터 1923년 1월 31일까지 상환을 약속한 당일에 맞추어 호밀의 완전한 시장가격에 따르는 현금으로 지불하거나 호밀의 특정한 수량을 현물로 지불하는 무이자 곡물 국채를 발행하면서 연이율 6% 1억 금루블(러시아 제국의 금루블 기준)을 발행했다. 재무인민위원회는 1922년의 총예산을 구성하는 재정수입에 대하여 화폐세의 징수와 현물세의 징수와 은행권의 발행을 통해서 각각 1/3만큼 충당했다. 재무인민위원회가 금은보석과 외국화폐와 국채증권을 자유로운 가격으로 매매하는 증권거래소들을 설립하면서 조세개혁을 실행했는데, 1923년 1월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러시아 소비에트 국가은행을 접수하여 소비에트 연방 국가은행을 개업했다. 1924년에 다양한 현물세의 폐지와 함께 화폐세의 방식으로 징수하는 농업세를 도입한 소련 장관회의의 재정수입의 대부분은 국유기업들의 순이익에서 공제하여 국고로 송금한 것이다. 1922년의 [ 10000 : 1 ] 화폐개혁과 1923년의 [ 100 : 1 ] 화폐개혁과 1924년의 [ 50000 : 1 ] 화폐개혁을 차례로 완료한 소련 장관회의가 외환환전이 가능한 금본위제 태환권( 체르보네츠 )을 지폐로 인쇄하거나 금화로 주조하면서 [ 1체르보네츠 = 10루블 ]로 규정했다.[7][8]
[ 1921년의 5조 루블 = 1922년의 5억 루블 = 1923년의 500만 루블 = 1924년의 100루블 = 1925년의 10체르보네츠 ]
  • 1924년부터 1933년까지의 환율: [ 1[[미국 달러|달러]] = 2루블(0.2체르보네츠 ]
  • 1937년부터 1950년까지의 환율: [ 1[[미국 달러|달러]] = 5.3루블(0.53 체르보네츠) ]

4. 1947년의 화폐개혁


1947년 12월에 소련 장관회의가 [ 10 : 1 ] 화폐개혁을 단행하면서 '체르보네츠'를 폐지했는데, 자연인현금은 그냥 [ 10 : 1 ]로 교환했지만, 소비에트 연방 저축은행예금 통장을 미리 개설해 돈을 저축한 사람들에게 3000루블까지는 [1:1] 3000~10000루블까지는 [1:1.5], 10000루블 이상은 [ 2 : 1 ]로 교환하는 특혜를 베풀었으며, 예전에 발행한 모든 국채들은 매년 2% 이자율로 지급하는 통일 국채와 [ 5 : 1 ]로 교환했다. 곧이어 소련 장관회의가 식량과 소비재를 배급하는 조례를 하루아침에 폐지하면서 임금임대의 금액 및 퇴직금연금의 금액에 대하여 [ 1 : 1 ]로 변경하라고 규정했지만, 식량과 소비재의 가격에 대하여 미리 2배만큼 인상한 다음에 [ 10 : 1 ]로 변경하라고 규정했으며, 당사자가 사업소에서 받은 월급을 기준으로 2월만큼의 임금을 할당해 국채의 매입에 바쳐야 했으니, 1948년 12월에 '소비에트 연방 저축은행'을 방문한 사람은 자연인 1명당 새로운 화폐를 100루블만큼 저축할 수가 있었고, 소비에트 연방의 전역에서 1억 명이 100억 루블만큼 저축할 수가 있었다.
  • 1950년부터 1960년 12월까지의 환율: [ 1[[미국 달러|달러]] = 4루블 ]
    • 1950년부터 1960년 12월까지의 여행자용 환율: [ 1[[미국 달러|달러]] = 10루블 ]

5. 1961년의 화폐개혁


1960년 5월에 소련 장관회의의 결과, 화폐개혁의 실시를 예고했으며, 1961년 1월1일부터 이를 적용해서 [ 10 : 1 ] 화폐개혁을 단행하면서 현금수표어음의 금액에 대하여 모두 [ 10 : 1 ]로 교환했고, 예금국채주식의 금액에 대하여 모두 [ 10 : 1 ]로 교환했다, 게다가 퇴직금연금의 금액에 대하여 [ 1 : 1 ]로 변경하라고 규정한 소련 장관회의가 임금임대의 금액에 대하여 [ 10 : 1 ]로 변경하라고 규정했다.
  • 1961년 1월부터 1990년 12월까지의 환율: [ 1[[미국 달러|달러]] = 0.63~ 0.9루블 ]
    • 1961년 1월부터 1970년대까지의 암시장 환율: [ 1[[미국 달러|달러]] = 3.5~ 5루블 ]
  • 1989년부터 1990년까지의 여행자용 환율: [ 1[[미국 달러|달러]] = 6.3루블]
    • 1980년대 후반의 이후의 암시장 환율: [ 1[[미국 달러|달러]] = 10~15루블 ]

6. 1991년의 화폐개혁


1991년 1월에 소비에트 연방의 대통령은 1980년대 후반부터 가시화되기 시작한 물가상승 문제와 위폐문제등을 해결하려고 [ 1 : 1 ] 화폐개혁을 단행하면서 1961년의 화폐개혁으로 발행되었던 50루블과 100루블 지폐를 무효화 시키고, 자연인 1명당 교환이 가능한 액수를 [ 1000루블 = 1000[[미국 달러|달러]] ] 이하로 제한하는 대통령령을 발효했는데, 이 사업은 독립을 선언한 발트3국의 경제력을 마비시켰다는 점 이외에는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물가상승은 이어져내려오며 실패로 끝났다. 이어서 8월 쿠데타 이후로 고르바초프를 제치고 러시아를 통치하기 시작한 옐친이 소련을 해체시키면서 동시에 전면적인 가격자유화를 시행했으나 물가가 수십배 이상 폭등하며 가파르게 치솟은데다가 예금동결 조치로 인해 국민들의 구매력이 폭락하고 산업생산이 마비되며 이 또한 실패로 돌아갔다. 1991년 12월에 해체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을 대신하여 1992년 3월에 러시아 소비에트의 공화국 최고회의굴라크에서 석방해 복권한 사람들에게 몰수한 재산을 반환하는 특별법을 입법했는데, 매월 180루블(당시의 법률에 바탕한 매월 최저임금의 75%)을 수감한 기간만큼 곱해 지불하면서 최다 액수를 25000루블 이하로 규정하고 있으며, 소련 장관회의가 복권한 사람들의 의식주에 대하여 아파트와 버스표와 무상 의료 혜택을 제공했다. 1992년 10월에 소련 장관회의가 1억 명의 국민들에게 민영화기업 주식상환권을 평등하게 지급했는데, 러시아 연방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자연인 1명당 민영화기업 주식상환권을 [ 1만 루블 = 100[[미국 달러|달러]] ]만큼 지급했다.

7. 1993년의 화폐개혁


1993년 7월에 보리스 옐친 러시아 연방 대통령이 [ 1 : 1 ] 화폐개혁을 단행하면서 자연인 1명당 교환이 가능한 액수를 [ 10만 [[러시아 루블|루블]] = 100[[미국 달러|달러]] ] 이하로 제한하는 대통령령을 발효했으며, 1996년 6월에 옐친 대통령이 1990년 12월 31일까지 '러시아 연방 저축은행'에 예금 통장을 미리 개설해 돈을 저축한 사람들 가운데 아무리 늦어도 1915년 12월 31일까지 러시아 제국영토에서 출생한 만80세 이상의 노인에게 당시에 저축한 금액의 1000배만큼 환불하면서 자연인 1명당 환불이 가능한 액수를 [ 100만 [[러시아 루블|루블]] = 1000[[미국 달러|달러]] ] 이하로 제한하는 대통령령을 발효했다.
1992년 이후 루블의 고정환율제도를 포기한 관계로 이 시기엔 시기별 변동이 극심했다.

8. 소련 해체 이후


1991년 소련이 해체된 이후 새로 독립한 공화국들은 독립된 화폐를 재정했다.
국가
대체 화폐
도입 시기
현재 화폐
도입 시기
러시아
루블
1993년
루블
1998년[9]
우크라이나
카르보바네츠
1991년
흐리브냐
1996년
벨라루스
루블
1993년
루블
2000년
우즈베키스탄

1993년

1994년
카자흐스탄
텡게
1993년
텡게
옆과 동일
조지아
쿠폰 라리
1993년
라리
1995년
아제르바이잔
마나트
1992년
마나트
2006년
리투아니아
탈로나
1992년
유로
2015년
몰도바
쿠폰
1992년
레우
1993년
라트비아
라츠
1992년
유로
2014년
키르기즈스탄

1993년

옆과 동일
타지키스탄
루블
1995년
소모니
2000년
아르메니아
드람
1993년
드람
옆과 동일
투르크메니스탄
마나트
1993년
마나트
2009년
에스토니아
크론
1992년
유로
2011년

[1] 알렉 노브, 소련경제사, 50쪽~64쪽[2] 따찌야나 미하일로브나 찌모쉬나, 러시아 경제사, 259쪽~269쪽[3] 알렉 노브, 소련경제사, 70쪽~77쪽[4] 따찌야나 미하일로브나 찌모쉬나, 러시아 경제사, 269쪽~279쪽[5] 알렉 노브, 소련경제사, 93쪽~101쪽[6] 따찌야나 미하일로브나 찌모쉬나, 러시아 경제사, 283쪽~293쪽[7] 알렉 노브, 소련경제사, 102쪽~108쪽[8] 따찌야나 미하일로브나 찌모쉬나, 러시아 경제사, 293쪽~300쪽[9] 리디노미네이션을 거친 현재의 러시아 루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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