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러시아
러시아어: Великороссия, Великая Русь
영어: Greater Russia
혈통적 및 문화적 의미의 러시아 민족과 이들이 세운 나라의 영역으로 오늘날의 러시아 및 러시아 거주 러시아 겨레보다 더 넓은 범위의 뜻이 있다.
국가로써의 러시아와 러시아의 민족은 수 세기에 걸쳐 상당한 변화와 이민족과의 상호교류를 하며 정의되고 발전된 개념이기 때문에 "진정한 러시아인이란 누구인가?"는 러시아 역사학계와 인류학계에서 첨예한 논쟁 거리이다. 이 와중에서 근현대의 제정러시아, 소련, 러시아연방사람을 가리키는 '러시아인'과 달리, 전근대적 의미에서 16~17세기 러시아계 공국들이 모스크바 대공국의 통치 아래 통합되기 이전, 중세의 현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러시아 등지에 사는 동방정교회를 믿으며 키예프 공국과 직간접적으로 연관을 맺고 있는 동슬라브족 전반을 의미할 때는 그냥 루스인, 혹은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맹 측에서 쓰던 용어인 '루테니아인'으로 칭한다. 영어와 라틴어에서는 이를 Ruthenian이라 표기하는데, 사실 각종 역사적 문서에서도 엄격한 구분 없이 Russian, Rus, Ruthenian 등의 단어를 막 혼용하기 때문에 특정 역사서에서 루스인, 루테니아인 소리를 한다면 골치아프게 머리 굴리며 이게 모스크바 대공국을 의미하는지, 그냥 전반적인 문화, 언어적 집단을 의미하는지 하나 하나 문맥을 따지면서 판단할 수 밖에 없다. 연구자들이 참고해야 할 점은 이러한 역사적 구분과 분화가 본격화 되기 시작하는 16~17세기 문맥에서 언급되는 표현인 Muscovite는 현대 러시아 지역에 기반한 모스크바 대공국과 루스 차르국만을 개별적으로 의미한다는 점이다.
이 구분이 왜 생겼냐 하면 키예프 공국이 분열되고, 킵차크 한국의 지배를 받으며 중세의 소규모 공국들로 쪼개졌다가 다시 모스크바 대공국 아래 근대적인 의미에서 러시아가 되는 과정에서 동슬라브인들의 민족적, 사회문화적 구분이 서로 혼동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현대 서부 우크라이나, 서부 벨라루스, 동부 벨라루스 등의 광활한 정교회 동슬라브 민족들이 살던 땅이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이어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지배를 받으며 루스 민족 전체 (Всея Руси) 의 지배권을 주장했던 모스크바의 대공들의 권역 밖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했다. 이 모스크바 권역 외의 루스인들의 땅이 적러시아(갈리치아 등을 포함한 서부 우크라이나 지역), 백러시아(벨라루스 지역), 흑러시아(현 벨라루스의 서부지역[1] ), 소러시아(현 우크라이나 중동부 지역) 등으로 따로 발전했기 때문에 키예프 루스의 직계 후손을 자처한 모스크바 대공국과 이를 이은 루스 차르국의 신민들을 따로 지칭하기 위하여 현대적 의미에서의 고대-중세 '루스인'과 구별 된 '러시아인'이란 호칭과 정체성이 발전한 것이다. 표기학적으로도 17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이반 뇌제의 공문서 등을 보면 대부분 알파벳 s(키릴 문자로는 с) 하나만 쓴 '루스'로 자국과 그 민족을 지칭하였으나, 로마노프 왕조 설립 전후로 현대처럼 s를 두 개로 표기하고 표트르 대제 시절 두 표기를 공식화해 그 정체성의 변화와 승계 과정을 볼 수 있다.
따라서 동유럽 역사학에서는 신화적으로 러시아에 처음 왕조를 설립했다던 바이킹의 분파인 루스족을 의미하든, 키예프 공국 사람들을 의미하든, 트베리, 스몰렌스크, 랴쟌, 프스코프, 노브고로드 공화국 등 수 십개의 분열된 중세 루스계 공국 중 하나의 사람을 의미하든, 현대 러시아인들을 의미하든 영어로는 전부 다 'Russian'으로 번역되어 생기는 의미의 혼돈을 피하기 위하여 '대러시아'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했다.
정치적 관점에서 평가하였을 때 유로마이단 사태도 이런 중세적 의미의 '루스인' 및 근대적 의미의 '러시아인'과도 관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현대 우크라이나인들은 본인들이 전자, 즉 '중세 키예프 공국의 후손의 의미에서 루스인'이란 사실에는 토를 달지 않고 이를 인정하며 계승하지만, 후자의 근대적 러시아 제국의 국민이란 의미에서의 '러시아인'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허나 블라디미르 푸틴을 비롯한 대러시아 민족주의적 관점에서[2] 현대 러시아 국가는 모든 루스인을 대표하는 국가이므로, 우크라이나인 또한 역사적으로 '소러시아 (Малороссия)'인으로 일컬으며 러시아에 편입되어야 할 대상으로 평가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면 모든 슬라브인들이 통합해야 한다는 범슬라브주의로 치닫는다. 이 사상은 러시아 제국 시기부터 존재했었으며, 훗날 소련 시기에도 통용되었었다.
이와 비슷한 개념으로는 독일인을 가리키는 말인 '''도이치 (Deutsch, Deutschen)''' 가 있다. 오늘날 이 단어는 보통 현대 독일연방공화국 시민을 말하나, 2차대전 이전까지 "도이치"라는 말은 독일어를 쓰는 인구, 즉 독일과 오스트리아 및 그 외의 영토에 거주하는 인구를 가리키는 말로써 쓰였다. 허나, 제2차 세계 대전에 패전하고, 범게르만주의를 선전했던 나치당이 몰락하면서, 오늘날은 출신 등을 나타낼 때 독일인 (Deutschen) 과 오스트리아인 (Österreichern) 이라는 말로 별도로 구별해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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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정 러시아와 소련 시절 러시아가 직접적/간접적 영향력을 미치던 지역.[3]
정치외교적 관점에서의 대러시아는 러시아가 루스 차르국에서 제정 러시아, 더 나아가 소비에트 연방에 이르기까지 넓혀온 땅이자 이를 복원하려는 이념이다. 현대 중국의 패권주의적 중화사상과도 비교될 수 있는데, 대러시아는 단순한 국가적 팽창 정책이 아닌, 현대 중화사상처럼 민족적, 역사적, 지정학적 함의를 가진 개념이기 때문이다. 민족적 개념으로 보자면 러시아식 범슬라브주의의 연장선상에 있는 이념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러한 개념은 현재 모든 러시아의 정치 세력에 뿌리 깊게 박혀 있으며, 통합 러시아당, 공산당, 자유민주당마다 각각 유라시아 연합, 소련 부활, 러시아 제국의 부활(...)[4] 이라는 방식으로 추구한다. 오늘날 러시아 외교 정책의 알파이자 오메가라고도 할 수 있다.
보다 더 외교적인 용어로써는 옛 소련 국가들을 가리키는 '''가까운 해외''' 또는 '''가까운 외국'''(Ближнее зарубежье)라는 말이 있다. 이는 1996년 러시아 초대 외무장관이었던 안드레이 코지례프가 이들 국가를 가리키면서 처음 쓴 말이다. 하지만 러시아에서 일상적으로 보통 이들 국가들을 지칭할 때는 주로 '''옛소련 국가(Постсоветское пространство)'''나 '''독립국가연합(СНГ)'''이라는 말을 더 많이 쓰는 편이다.
러시아의 역사를 루스 차르국 시절부터 보면 다음과 같은 국가가 있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소련을 러시아 제국과 비슷한 패권주의 강대국으로써 평가하고 있지만 적어도 소련은 러시아 역사에 있어서만큼은 전례없는 국가였다. 특히 러시아 혁명과 적백내전을 거쳐 소련이 설립된 초창기의 경우, 국제주의적 성격을 갖는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아 '''한때는''' 탈민족주의적인 성향이 강했다. 특히 러시아 혁명을 이끈 블라디미르 레닌은 종종 '대국적 쇼비니즘(Великодержавный шовинизм)'이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할 정도로 러시아 민족주의에 비판적이었다. 레닌은 러시아어를 공용어로 삼는 것에 반대했으며[6] 러시아 제국 치하에서 정교회로 개종을 강요당했던 (주로 중앙아시아) 민족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용해 자치를 보장했다.
레닌이 집권하던 시절 소련 정부는 중앙아시아 지역 및 옛 러시아 제국 내 비러시아계 민족이 거주하고 있던 지역에서 현지화(Коренизация) 정책을 시행, 각 공화국 또는 자치주, 자치구별로 민족어를 교육할 수 있도록 허용했으며, 이 시기 중앙아시아 등지에서 아랍 문자 등 외래 문자로 표기되던 현지어들을 키릴 문자로 재정리하고 보급해 문맹률을 해소하는데 크게 기여했다.[7]
아울러 러시아 제국이 보유하던 영토 주권에 크게 집착하지 않아서 옛 러시아 제국의 영토였던 핀란드와 발트 국가, 폴란드의 독립을 허용하고, 1921년 카라한 선언을 통해 러시아 제국이 만주에서 가지고 있던 영향력을 포기하면서 여러 모로 탈민족주의적인 성향을 보였다. 물론 적백내전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이들 국가에 개입할 만한 여력이 없기도 했다.[8]
어쨌든 소련이 보인 이러한 모습은 당시 식민지 치하에서 독립을 추구하던 지식인들[9] 에게 큰 인상을 주었고, 이후 사회주의 운동을 키워내는 밑거름이 되었다.
하지만 레닌 시기에도 소련이 이렇게 탈민족주의적, 반패권적 경향만 보인 것은 아니었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체결 당시만 해도 굴욕적이라는 비판이 거셌고, 이에 대해 레프 트로츠키가 "곧 독일은 망하고 국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서 지금 내주는 땅 다시 러시아로 돌아올 거임!"이라고 할 정도로 대러시아주의적 경향은 잔존해 있었다. 하지만 기대했던 국제 사회주의 혁명 따위는 없었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독일 제국이 망하자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파기했지만 적군의 안습 그 자체였던 전투력과 미비한 지휘체계 및 열악한 보급, 그리고 서방의 백군 반공세력 지원이 겹쳐 조약으로 내준 영역 중 대부분을 되찾지(?) 못했다. 그나마 적백내전을 통해 캅카스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일부는 되찾을(?) 수 있었고, 여기에 중앙아시아에 수립한 괴뢰국인 부하라와 호라즘까지 총 6개국을 구성국으로 하여 소비에트 연방을 건국한다.
1924년 이오시프 스탈린이 집권하면서 당시 소련이 표방했었던 국제주의적인 성향은 점차 일국사회주의로 대표되는 '''국가중심적인 사회주의'''로 대체되었다. 소련의 국제적인 성향은 자신의 정적이었던 트로츠키가 중심적으로 주장하던 논리였다. 스탈린은 대숙청 등을 통해 당시 다양한 조류를 이루고 있던 트로츠키 등의 공산주의자들을 숙청하고 국제사회주의 역시 금기시했다. 그리고 공산주의의 해석을 사실상 코민테른으로 대표되는 중앙 통제 하에 두어 급격히 보수화되었다.
특히 1941년 독소전쟁이 발발한 이후 조국(Отечество, Родина)[10] 으로 대표되는 애국주의적인 이념[11] 을 강화했으며, 이후 1945년 소련이 독소전쟁 승리를 통해 패권국가로 거듭나면서 초창기에 꿈꾸었던 사회주의 국가들의 연합에서 탈피해 새로운 러시아 제국으로써 영향력이 더욱 커지게 되었다.[12]
이 시기부터 소련은 본격적으로 대러시아적인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특히 1956년 헝가리 혁명, 1968년 프라하의 봄 등 같은 사회주의 국가에서 너지 임레, 알렉산데르 둡체크로 대표되는 개혁파 지도자들의 개혁을 좌절시키고 무력으로 진압해버렸다. 이러한 모습은 옛 러시아 제국이 폴란드 봉기를 진압한 것과 별 다를 바가 없었고, 특히 1979년 인도양에 진출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소련의 이러한 패권주의적 모습에 실망한 서구 좌파 정치세력은 소련의 주이념이던 마르크스-레닌주의 대신 사회민주주의, 유럽공산주의(Eurocommunism), 제3의 길 등을 통해 대안을 모색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후 경제가 피폐해진 상황에서 무리하게 미국과 경쟁하려 하면서 촉발된 군비경쟁은 소련 경제에 지속적으로 막대한 지출을 강요했고, 설상가상으로 1980년대 중반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체르노빌 사고 등 재정적으로 부담이 가중된 상황에서 페레스트로이카 등을 통해 그동안 소련 내부에 잠재해 있던 문제가 폭발했다. 이후 소련은 급속도로 영향력을 잃기 시작해 1991년 완전히 해체되었다.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면서 현재의 러시아 연방은 '''역사적으로 쌓아온 대러시아 지역을 모두 상실했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직후와 거의 같은 상황, 혹은 더 심각한[13]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를 감정적 차원에서 수많은 러시아인들이 못 받아들였으며 소련 붕괴 이후 서방은 러시아의 경제 지원에 생각 외로 뜨뜻미지근하게 나오고, 오히려 옛 소련이 영향력을 미치던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했는데, 이는 1990년대 경제적으로 극심한 빈곤 상황을 겪고 있던 러시아인들에게 반감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2004년 우크라이나와 조지아같이 제법 중요한 국가들이 민주화 혁명을 통해 친러 정부를 무너뜨리고 서방과 친하게 지내려 하고, 구 공산권 국가는 물론 자기네 영토 코앞인 발트 3국마저 NATO에 가입하자, 러시아 입장에서는 과거 자신의 영토이던 지역들이 자신을 향해 총구를 들이미는 것과 다름없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물론 러시아 입장에서는 상당히 고까웠겠지만, 당시 러시아는 자국의 경제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불필요한 충돌을 삼가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14]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빅토르 유셴코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노골적인 제스처만 안 취했을 뿐이지 아무것도 안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던 중 2008년 압하지아, 남오세티야 등과 분쟁을 겪고 있던 조지아의 사카슈빌리 대통령은 (당시에는 자국 영토였던) 남오세티아를 공격했다. 압하지아와 남오세티아는 조지아 독립 후인 1991년부터 자치권을 두고 조지아 정부와 분쟁 관계였고[15] , 1995년 러시아군이 분쟁에 개입한 이후에도 관할권을 두고 자잘한 분쟁이 있었다. 이에 당시 대통령이었던 미헤일 사카슈빌리는 이라크 전쟁 등을 통해 미국과 가까워진 외교관계, 강화된 군사협력 등을 바탕으로 압하지아와 남오세티아를 무력으로 제압해 러시아의 반발을 무력화하고 이들 분쟁지역을 조지아 정부 통제 아래 두려고 계획했다.
그러나 조지아군이 공격한 압하지아와 남오세티아에는 공식적으로 러시아군이 주둔해 있었다. 러시아는 이를 자국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했고, 결국 조지아와 전쟁을 통해 사실상 압하지아와 남오세티아를 합병했다.
러시아는 이 사건으로 주변국에 경고를 주려 했지만, '''이 사건으로 가장 크게 영향을 받은 것은 서방'''이었다. 미국과 유럽연합은 구소련권에서 벌이는 확장정책이 러시아를 자극할 수 있다고 판단했고, 러시아를 크게 자극하지 않기 시작해 오바마 집권 이후 MD 계획을 철회하고 관계 개선 메시지를 보내는 등, 러시아에 더 이상 자국의 영향력을 확장하지는 않겠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서방 국가들은 이후 구소련권에서 영향력 확대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러시아를 크게 자극하지 않으려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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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외무장관인 세르게이 라브로프에게 '리셋' 버튼을 선물한 미국 국무장관이었던 힐러리 클린턴)
당시 회동을 다룬 AP통신 뉴스.
'''하지만...'''
2014년 채무협상 과정에서 친러 성향의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있던 우크라이나가 러시아가 구상하던 유라시아 연합의 일원으로 관세동맹(Таможенный союз)에 관련된 경제지원협약을 체결한다. 하지만 이는 그동안 부패와 무능으로 점철된 빅토르 야누코비치 정권에 대한 불만을 폭발시킨 계기가 되었고, 결국 야누코비치는 2014년 2월 유로마이단으로 파면되었다.
이렇게 우크라이나에서 민중혁명이 발생하자, 러시아 입장에서는 큰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우크라이나가 다른 국가들처럼 러시아와 심하게 대립해왔던 것은 아니었고[16] 러시아 또한 무조건적으로 타국의 민주화 시위에 개입하려 하지는 않았다. 2010년 키르기즈스탄에서 민중혁명이 일어나자, 러시아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아키예프에 대한 지지를 철회해 사실상 현 정권을 몰아내도록 '''방조'''했다.
하지만 야누코비치가 물러난 우크라이나는 반러 친서방 국가가 될 것이 뻔했는데, 그렇게 두기에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 너무 가까웠고, 푸틴 입장에서는 정권에 대한 불만을 돌리고 자신의 정치적 자산인 러시아 민족주의를 자극할 필요가 있었다. 장래 우크라이나에 반러 친서방 정부가 등장할 것이라고 판단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거주하던 러시아계의 국민감정을 자극해 크림 반도를 군사적으로 병합했고, 우크라이나 동부지역에 군사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남오세티아 전쟁 당시 조지아 내에 주둔하던 평화유지군이 먼저 공격당한 상황과는 달리,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선제공격을 가한 만큼 서방에서는 러시아의 이러한 행동에 가만히 보고 있지는 않았다.
크림 병합 이후 서방 국가들이 러시아에 본격적으로 경제제재를 걸기 시작하면서 러시아와 대립각을 세우기 시작했고,[17] 생각 외로 반군이 호전하지 못하면서[18] 우크라이나와 어정쩡한 상황을 이어가게 되었다. 물론 러시아의 선제공격으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잔재를 완전히 청산하면서까지 대립각을 세웠다. 하지만 푸틴 입장에서는 기존 러시아 정치와 푸틴의 독재를 향하던 국민들의 불만을 외부로 성공적으로 돌린만큼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91년 소련 해체로 러시아는 과거 자신들이 수백년 걸쳐 확장했던 영토를 상실했다. 러시아 입장에서 보았을 때 지정학적으로 매우 불리한 위치에 처해버렸고, 경제, 정치적으로 모든 면에서 약화되었다.[19] 이러한 상황이기에 러시아는 옛 소련 공화국들을 어떻게 해서든 자국의 영향권으로 편입시키려 하고 있다. 특히 소련에서 독립한 여러 국가 중 비교적 친러 성향에 가까운 몇몇 국가들은 러시아와 협력해 유라시아 연합으로 재통합을 모색 중이다.
2015년 리투아니아군에서 분리주의자[20] 들의 소요사태에 대비해 실시한 진압훈련
반면 이러한 러시아의 움직임은 러시아의 주변에 위치한 국가들, 특히 동유럽의 구 공산권 국가와 발트 3국에는 거의 '''경기를 일으킬 정도의 공포'''를 주고 있다. 러시아나 소련과 역사적으로 관계가 좋을래야 좋을 수가 없는 옛 동구권 공산국가와 발트 3국은 러시아의 군사적 개입을 막기 위해 적극적으로 NATO나 유럽 연합에 가입했거나, 가입하려고 한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영향권이 경쟁자에게 넘어가는 상황이었고 이를 방지할 순 없었다.
영어: Greater Russia
Союз нерушимый республик свободных
Сплотила навеки Великая Русь!
자유로운 공화국들의 굳건한 단합을
대러시아가 영원토록 결속시켰도다!
소비에트 연방 찬가 1절 中
1. 역사, 민족적 의미
혈통적 및 문화적 의미의 러시아 민족과 이들이 세운 나라의 영역으로 오늘날의 러시아 및 러시아 거주 러시아 겨레보다 더 넓은 범위의 뜻이 있다.
국가로써의 러시아와 러시아의 민족은 수 세기에 걸쳐 상당한 변화와 이민족과의 상호교류를 하며 정의되고 발전된 개념이기 때문에 "진정한 러시아인이란 누구인가?"는 러시아 역사학계와 인류학계에서 첨예한 논쟁 거리이다. 이 와중에서 근현대의 제정러시아, 소련, 러시아연방사람을 가리키는 '러시아인'과 달리, 전근대적 의미에서 16~17세기 러시아계 공국들이 모스크바 대공국의 통치 아래 통합되기 이전, 중세의 현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러시아 등지에 사는 동방정교회를 믿으며 키예프 공국과 직간접적으로 연관을 맺고 있는 동슬라브족 전반을 의미할 때는 그냥 루스인, 혹은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맹 측에서 쓰던 용어인 '루테니아인'으로 칭한다. 영어와 라틴어에서는 이를 Ruthenian이라 표기하는데, 사실 각종 역사적 문서에서도 엄격한 구분 없이 Russian, Rus, Ruthenian 등의 단어를 막 혼용하기 때문에 특정 역사서에서 루스인, 루테니아인 소리를 한다면 골치아프게 머리 굴리며 이게 모스크바 대공국을 의미하는지, 그냥 전반적인 문화, 언어적 집단을 의미하는지 하나 하나 문맥을 따지면서 판단할 수 밖에 없다. 연구자들이 참고해야 할 점은 이러한 역사적 구분과 분화가 본격화 되기 시작하는 16~17세기 문맥에서 언급되는 표현인 Muscovite는 현대 러시아 지역에 기반한 모스크바 대공국과 루스 차르국만을 개별적으로 의미한다는 점이다.
이 구분이 왜 생겼냐 하면 키예프 공국이 분열되고, 킵차크 한국의 지배를 받으며 중세의 소규모 공국들로 쪼개졌다가 다시 모스크바 대공국 아래 근대적인 의미에서 러시아가 되는 과정에서 동슬라브인들의 민족적, 사회문화적 구분이 서로 혼동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현대 서부 우크라이나, 서부 벨라루스, 동부 벨라루스 등의 광활한 정교회 동슬라브 민족들이 살던 땅이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이어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지배를 받으며 루스 민족 전체 (Всея Руси) 의 지배권을 주장했던 모스크바의 대공들의 권역 밖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했다. 이 모스크바 권역 외의 루스인들의 땅이 적러시아(갈리치아 등을 포함한 서부 우크라이나 지역), 백러시아(벨라루스 지역), 흑러시아(현 벨라루스의 서부지역[1] ), 소러시아(현 우크라이나 중동부 지역) 등으로 따로 발전했기 때문에 키예프 루스의 직계 후손을 자처한 모스크바 대공국과 이를 이은 루스 차르국의 신민들을 따로 지칭하기 위하여 현대적 의미에서의 고대-중세 '루스인'과 구별 된 '러시아인'이란 호칭과 정체성이 발전한 것이다. 표기학적으로도 17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이반 뇌제의 공문서 등을 보면 대부분 알파벳 s(키릴 문자로는 с) 하나만 쓴 '루스'로 자국과 그 민족을 지칭하였으나, 로마노프 왕조 설립 전후로 현대처럼 s를 두 개로 표기하고 표트르 대제 시절 두 표기를 공식화해 그 정체성의 변화와 승계 과정을 볼 수 있다.
따라서 동유럽 역사학에서는 신화적으로 러시아에 처음 왕조를 설립했다던 바이킹의 분파인 루스족을 의미하든, 키예프 공국 사람들을 의미하든, 트베리, 스몰렌스크, 랴쟌, 프스코프, 노브고로드 공화국 등 수 십개의 분열된 중세 루스계 공국 중 하나의 사람을 의미하든, 현대 러시아인들을 의미하든 영어로는 전부 다 'Russian'으로 번역되어 생기는 의미의 혼돈을 피하기 위하여 '대러시아'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했다.
정치적 관점에서 평가하였을 때 유로마이단 사태도 이런 중세적 의미의 '루스인' 및 근대적 의미의 '러시아인'과도 관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현대 우크라이나인들은 본인들이 전자, 즉 '중세 키예프 공국의 후손의 의미에서 루스인'이란 사실에는 토를 달지 않고 이를 인정하며 계승하지만, 후자의 근대적 러시아 제국의 국민이란 의미에서의 '러시아인'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허나 블라디미르 푸틴을 비롯한 대러시아 민족주의적 관점에서[2] 현대 러시아 국가는 모든 루스인을 대표하는 국가이므로, 우크라이나인 또한 역사적으로 '소러시아 (Малороссия)'인으로 일컬으며 러시아에 편입되어야 할 대상으로 평가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면 모든 슬라브인들이 통합해야 한다는 범슬라브주의로 치닫는다. 이 사상은 러시아 제국 시기부터 존재했었으며, 훗날 소련 시기에도 통용되었었다.
이와 비슷한 개념으로는 독일인을 가리키는 말인 '''도이치 (Deutsch, Deutschen)''' 가 있다. 오늘날 이 단어는 보통 현대 독일연방공화국 시민을 말하나, 2차대전 이전까지 "도이치"라는 말은 독일어를 쓰는 인구, 즉 독일과 오스트리아 및 그 외의 영토에 거주하는 인구를 가리키는 말로써 쓰였다. 허나, 제2차 세계 대전에 패전하고, 범게르만주의를 선전했던 나치당이 몰락하면서, 오늘날은 출신 등을 나타낼 때 독일인 (Deutschen) 과 오스트리아인 (Österreichern) 이라는 말로 별도로 구별해 쓰고 있다.
2. 정치, 외교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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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정 러시아와 소련 시절 러시아가 직접적/간접적 영향력을 미치던 지역.[3]
정치외교적 관점에서의 대러시아는 러시아가 루스 차르국에서 제정 러시아, 더 나아가 소비에트 연방에 이르기까지 넓혀온 땅이자 이를 복원하려는 이념이다. 현대 중국의 패권주의적 중화사상과도 비교될 수 있는데, 대러시아는 단순한 국가적 팽창 정책이 아닌, 현대 중화사상처럼 민족적, 역사적, 지정학적 함의를 가진 개념이기 때문이다. 민족적 개념으로 보자면 러시아식 범슬라브주의의 연장선상에 있는 이념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러한 개념은 현재 모든 러시아의 정치 세력에 뿌리 깊게 박혀 있으며, 통합 러시아당, 공산당, 자유민주당마다 각각 유라시아 연합, 소련 부활, 러시아 제국의 부활(...)[4] 이라는 방식으로 추구한다. 오늘날 러시아 외교 정책의 알파이자 오메가라고도 할 수 있다.
보다 더 외교적인 용어로써는 옛 소련 국가들을 가리키는 '''가까운 해외''' 또는 '''가까운 외국'''(Ближнее зарубежье)라는 말이 있다. 이는 1996년 러시아 초대 외무장관이었던 안드레이 코지례프가 이들 국가를 가리키면서 처음 쓴 말이다. 하지만 러시아에서 일상적으로 보통 이들 국가들을 지칭할 때는 주로 '''옛소련 국가(Постсоветское пространство)'''나 '''독립국가연합(СНГ)'''이라는 말을 더 많이 쓰는 편이다.
2.1. 역사
러시아의 역사를 루스 차르국 시절부터 보면 다음과 같은 국가가 있다.
- 1547년~1721년의 루스 차르국
- 1721년~1917년의 러시아 제국
- 1917년 3월~1917년 11월의 러시아 공화국
- 1917년~1922년의 러시아 내전 시기
- 1922년~1991년의 소비에트 연방 및 소비에트 러시아
- 1991년~ 현재까지의 러시아 연방
2.2. 소련
10월 혁명으로 러시아 공화국이 무너지고 소비에트 러시아를 세운 블라디미르 레닌은 더는 독일 제국과의 전쟁을 수행할 수 없음을 알았다. 이 때 이미 러시아 제국에 대한 불만이 잔뜩 쌓여 있었던 우크라이나는 독립을 선언했고, 발트 3국, 벨라루스, 폴란드, 캅카스, 핀란드같은 지역도 비슷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독일 제국은 이들을 지원하면서 소비에트 러시아에 대한 공세를 강화해 나갔고 소비에트 러시아는 혁명 이후의 혼란으로 약체화되어 번번히 패했다. 결국 소비에트 러시아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하고 현재의 발트 3국, 벨라루스, 폴란드, 우크라이나, 캅카스, 핀란드 지역을 포기했다.그루지야 쪽의 일들은 진정으로 프롤레타리아적인 입장에서 접근한다면 극도로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며, 사려깊음과 준비성을 가지고 필요사항에 대해 절충안을 이끌어내야 한다. 하지만 그루지야인은 이런 문제에 대해 무지한 모습을 보여줬고, 마구잡이로 남들을 '국수주의적 사회주의자'라며 비난하면서(사실은 그 자야말로 진정한 국수주의적 사회주의자이며, 대러시아주의에 물든 천박한 깡패 놈이다.), 사실상 노동자 계층의 단결을 저해하고 있다. '''노동자 계층의 단결을 가장 크게 해치고 무너뜨리는 요소는 국가의 부당함'''이며, 피해를 본 민족들은 평등하다는 느낌과 그 평등에 대한 침해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할 것이다. 특히 그게 과실이나 기만, 그것도 바로 그들의 노동자 동지들에 의한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소련을 러시아 제국과 비슷한 패권주의 강대국으로써 평가하고 있지만 적어도 소련은 러시아 역사에 있어서만큼은 전례없는 국가였다. 특히 러시아 혁명과 적백내전을 거쳐 소련이 설립된 초창기의 경우, 국제주의적 성격을 갖는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아 '''한때는''' 탈민족주의적인 성향이 강했다. 특히 러시아 혁명을 이끈 블라디미르 레닌은 종종 '대국적 쇼비니즘(Великодержавный шовинизм)'이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할 정도로 러시아 민족주의에 비판적이었다. 레닌은 러시아어를 공용어로 삼는 것에 반대했으며[6] 러시아 제국 치하에서 정교회로 개종을 강요당했던 (주로 중앙아시아) 민족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용해 자치를 보장했다.
레닌이 집권하던 시절 소련 정부는 중앙아시아 지역 및 옛 러시아 제국 내 비러시아계 민족이 거주하고 있던 지역에서 현지화(Коренизация) 정책을 시행, 각 공화국 또는 자치주, 자치구별로 민족어를 교육할 수 있도록 허용했으며, 이 시기 중앙아시아 등지에서 아랍 문자 등 외래 문자로 표기되던 현지어들을 키릴 문자로 재정리하고 보급해 문맹률을 해소하는데 크게 기여했다.[7]
아울러 러시아 제국이 보유하던 영토 주권에 크게 집착하지 않아서 옛 러시아 제국의 영토였던 핀란드와 발트 국가, 폴란드의 독립을 허용하고, 1921년 카라한 선언을 통해 러시아 제국이 만주에서 가지고 있던 영향력을 포기하면서 여러 모로 탈민족주의적인 성향을 보였다. 물론 적백내전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이들 국가에 개입할 만한 여력이 없기도 했다.[8]
어쨌든 소련이 보인 이러한 모습은 당시 식민지 치하에서 독립을 추구하던 지식인들[9] 에게 큰 인상을 주었고, 이후 사회주의 운동을 키워내는 밑거름이 되었다.
하지만 레닌 시기에도 소련이 이렇게 탈민족주의적, 반패권적 경향만 보인 것은 아니었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체결 당시만 해도 굴욕적이라는 비판이 거셌고, 이에 대해 레프 트로츠키가 "곧 독일은 망하고 국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서 지금 내주는 땅 다시 러시아로 돌아올 거임!"이라고 할 정도로 대러시아주의적 경향은 잔존해 있었다. 하지만 기대했던 국제 사회주의 혁명 따위는 없었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독일 제국이 망하자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파기했지만 적군의 안습 그 자체였던 전투력과 미비한 지휘체계 및 열악한 보급, 그리고 서방의 백군 반공세력 지원이 겹쳐 조약으로 내준 영역 중 대부분을 되찾지(?) 못했다. 그나마 적백내전을 통해 캅카스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일부는 되찾을(?) 수 있었고, 여기에 중앙아시아에 수립한 괴뢰국인 부하라와 호라즘까지 총 6개국을 구성국으로 하여 소비에트 연방을 건국한다.
1924년 이오시프 스탈린이 집권하면서 당시 소련이 표방했었던 국제주의적인 성향은 점차 일국사회주의로 대표되는 '''국가중심적인 사회주의'''로 대체되었다. 소련의 국제적인 성향은 자신의 정적이었던 트로츠키가 중심적으로 주장하던 논리였다. 스탈린은 대숙청 등을 통해 당시 다양한 조류를 이루고 있던 트로츠키 등의 공산주의자들을 숙청하고 국제사회주의 역시 금기시했다. 그리고 공산주의의 해석을 사실상 코민테른으로 대표되는 중앙 통제 하에 두어 급격히 보수화되었다.
특히 1941년 독소전쟁이 발발한 이후 조국(Отечество, Родина)[10] 으로 대표되는 애국주의적인 이념[11] 을 강화했으며, 이후 1945년 소련이 독소전쟁 승리를 통해 패권국가로 거듭나면서 초창기에 꿈꾸었던 사회주의 국가들의 연합에서 탈피해 새로운 러시아 제국으로써 영향력이 더욱 커지게 되었다.[12]
이 시기부터 소련은 본격적으로 대러시아적인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특히 1956년 헝가리 혁명, 1968년 프라하의 봄 등 같은 사회주의 국가에서 너지 임레, 알렉산데르 둡체크로 대표되는 개혁파 지도자들의 개혁을 좌절시키고 무력으로 진압해버렸다. 이러한 모습은 옛 러시아 제국이 폴란드 봉기를 진압한 것과 별 다를 바가 없었고, 특히 1979년 인도양에 진출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소련의 이러한 패권주의적 모습에 실망한 서구 좌파 정치세력은 소련의 주이념이던 마르크스-레닌주의 대신 사회민주주의, 유럽공산주의(Eurocommunism), 제3의 길 등을 통해 대안을 모색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후 경제가 피폐해진 상황에서 무리하게 미국과 경쟁하려 하면서 촉발된 군비경쟁은 소련 경제에 지속적으로 막대한 지출을 강요했고, 설상가상으로 1980년대 중반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체르노빌 사고 등 재정적으로 부담이 가중된 상황에서 페레스트로이카 등을 통해 그동안 소련 내부에 잠재해 있던 문제가 폭발했다. 이후 소련은 급속도로 영향력을 잃기 시작해 1991년 완전히 해체되었다.
2.3. 소련 해체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면서 현재의 러시아 연방은 '''역사적으로 쌓아온 대러시아 지역을 모두 상실했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직후와 거의 같은 상황, 혹은 더 심각한[13]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를 감정적 차원에서 수많은 러시아인들이 못 받아들였으며 소련 붕괴 이후 서방은 러시아의 경제 지원에 생각 외로 뜨뜻미지근하게 나오고, 오히려 옛 소련이 영향력을 미치던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했는데, 이는 1990년대 경제적으로 극심한 빈곤 상황을 겪고 있던 러시아인들에게 반감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2004년 우크라이나와 조지아같이 제법 중요한 국가들이 민주화 혁명을 통해 친러 정부를 무너뜨리고 서방과 친하게 지내려 하고, 구 공산권 국가는 물론 자기네 영토 코앞인 발트 3국마저 NATO에 가입하자, 러시아 입장에서는 과거 자신의 영토이던 지역들이 자신을 향해 총구를 들이미는 것과 다름없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물론 러시아 입장에서는 상당히 고까웠겠지만, 당시 러시아는 자국의 경제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불필요한 충돌을 삼가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14]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빅토르 유셴코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노골적인 제스처만 안 취했을 뿐이지 아무것도 안한 것은 아니었다.
2.4. 남오세티야 전쟁
그러던 중 2008년 압하지아, 남오세티야 등과 분쟁을 겪고 있던 조지아의 사카슈빌리 대통령은 (당시에는 자국 영토였던) 남오세티아를 공격했다. 압하지아와 남오세티아는 조지아 독립 후인 1991년부터 자치권을 두고 조지아 정부와 분쟁 관계였고[15] , 1995년 러시아군이 분쟁에 개입한 이후에도 관할권을 두고 자잘한 분쟁이 있었다. 이에 당시 대통령이었던 미헤일 사카슈빌리는 이라크 전쟁 등을 통해 미국과 가까워진 외교관계, 강화된 군사협력 등을 바탕으로 압하지아와 남오세티아를 무력으로 제압해 러시아의 반발을 무력화하고 이들 분쟁지역을 조지아 정부 통제 아래 두려고 계획했다.
그러나 조지아군이 공격한 압하지아와 남오세티아에는 공식적으로 러시아군이 주둔해 있었다. 러시아는 이를 자국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했고, 결국 조지아와 전쟁을 통해 사실상 압하지아와 남오세티아를 합병했다.
러시아는 이 사건으로 주변국에 경고를 주려 했지만, '''이 사건으로 가장 크게 영향을 받은 것은 서방'''이었다. 미국과 유럽연합은 구소련권에서 벌이는 확장정책이 러시아를 자극할 수 있다고 판단했고, 러시아를 크게 자극하지 않기 시작해 오바마 집권 이후 MD 계획을 철회하고 관계 개선 메시지를 보내는 등, 러시아에 더 이상 자국의 영향력을 확장하지는 않겠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서방 국가들은 이후 구소련권에서 영향력 확대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러시아를 크게 자극하지 않으려 애썼다.
[image]
(러시아 외무장관인 세르게이 라브로프에게 '리셋' 버튼을 선물한 미국 국무장관이었던 힐러리 클린턴)
당시 회동을 다룬 AP통신 뉴스.
'''하지만...'''
2.5. 유로마이단
2014년 채무협상 과정에서 친러 성향의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있던 우크라이나가 러시아가 구상하던 유라시아 연합의 일원으로 관세동맹(Таможенный союз)에 관련된 경제지원협약을 체결한다. 하지만 이는 그동안 부패와 무능으로 점철된 빅토르 야누코비치 정권에 대한 불만을 폭발시킨 계기가 되었고, 결국 야누코비치는 2014년 2월 유로마이단으로 파면되었다.
이렇게 우크라이나에서 민중혁명이 발생하자, 러시아 입장에서는 큰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우크라이나가 다른 국가들처럼 러시아와 심하게 대립해왔던 것은 아니었고[16] 러시아 또한 무조건적으로 타국의 민주화 시위에 개입하려 하지는 않았다. 2010년 키르기즈스탄에서 민중혁명이 일어나자, 러시아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아키예프에 대한 지지를 철회해 사실상 현 정권을 몰아내도록 '''방조'''했다.
하지만 야누코비치가 물러난 우크라이나는 반러 친서방 국가가 될 것이 뻔했는데, 그렇게 두기에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 너무 가까웠고, 푸틴 입장에서는 정권에 대한 불만을 돌리고 자신의 정치적 자산인 러시아 민족주의를 자극할 필요가 있었다. 장래 우크라이나에 반러 친서방 정부가 등장할 것이라고 판단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거주하던 러시아계의 국민감정을 자극해 크림 반도를 군사적으로 병합했고, 우크라이나 동부지역에 군사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남오세티아 전쟁 당시 조지아 내에 주둔하던 평화유지군이 먼저 공격당한 상황과는 달리,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선제공격을 가한 만큼 서방에서는 러시아의 이러한 행동에 가만히 보고 있지는 않았다.
크림 병합 이후 서방 국가들이 러시아에 본격적으로 경제제재를 걸기 시작하면서 러시아와 대립각을 세우기 시작했고,[17] 생각 외로 반군이 호전하지 못하면서[18] 우크라이나와 어정쩡한 상황을 이어가게 되었다. 물론 러시아의 선제공격으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잔재를 완전히 청산하면서까지 대립각을 세웠다. 하지만 푸틴 입장에서는 기존 러시아 정치와 푸틴의 독재를 향하던 국민들의 불만을 외부로 성공적으로 돌린만큼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6. 결론
1991년 소련 해체로 러시아는 과거 자신들이 수백년 걸쳐 확장했던 영토를 상실했다. 러시아 입장에서 보았을 때 지정학적으로 매우 불리한 위치에 처해버렸고, 경제, 정치적으로 모든 면에서 약화되었다.[19] 이러한 상황이기에 러시아는 옛 소련 공화국들을 어떻게 해서든 자국의 영향권으로 편입시키려 하고 있다. 특히 소련에서 독립한 여러 국가 중 비교적 친러 성향에 가까운 몇몇 국가들은 러시아와 협력해 유라시아 연합으로 재통합을 모색 중이다.
2015년 리투아니아군에서 분리주의자[20] 들의 소요사태에 대비해 실시한 진압훈련
반면 이러한 러시아의 움직임은 러시아의 주변에 위치한 국가들, 특히 동유럽의 구 공산권 국가와 발트 3국에는 거의 '''경기를 일으킬 정도의 공포'''를 주고 있다. 러시아나 소련과 역사적으로 관계가 좋을래야 좋을 수가 없는 옛 동구권 공산국가와 발트 3국은 러시아의 군사적 개입을 막기 위해 적극적으로 NATO나 유럽 연합에 가입했거나, 가입하려고 한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영향권이 경쟁자에게 넘어가는 상황이었고 이를 방지할 순 없었다.
3. 관련 문서
[1] 독소불가침조약으로 스탈린이 뜯은 벨라루스 서부의 영토를 말한다.[2] 이 대목에서 의미하는 대러시아는 단순히 큰 러시아가 아닌, 폴란드 및 리투아니아나, 오스만 제국이나 스웨덴 등의 지배를 받은 적이 없는 현대 모스크바와 그 일대의 블라디미르, 야로슬라블, 수즈달, 프스코프, 벨리키 노브고로드, 니즈니 노브고로드, 트베리 등의 도시 국가에 역사적 기원을 두는 루스인들의 분파를 의미하며, 현대적 및 민족 국가적 관점에서의 러시아인이라고 정리된다. 이는 레닌이 비난했던 대러시아 쇼비니즘의 대목이기도 하며, 정치적 및 외교적 의미의 대러시아와는 의미가 다르다 (후술 참조).[3] 다만 여기서 구 식민지던 알래스카와 소련 말기에 위성국화한 아프가니스탄이 빠져있다. 뤼순과 다롄 일대도 1898년에서 러일전쟁 이전까지 조차한 바 있고, 1945년 일본 제국 패망 이후에도 10년 동안 뤼순 일대를 통치했다.[4] 자유민주당(러시아)은 사실 진지한 정당은 아니다.[5] 당시 레닌은 그루지야에서 스탈린이 강압적으로 내세운 소수민족 정책을 비판하며, 스탈린이 자신의 후계자 자리에 부적합하다는 평가를 내렸다. 하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이후 스탈린이 펼칠 강압적인 소수민족 정책과 이로 인해 대러시아주의에 물든 소련의 미래를 '''예언'''한 셈이 되었다.[6] 초창기에 인공어였던 에스페란토가 소련에서 잠깐 인기를 끌었던 이유가 이 때문이었다.[7] 이러한 문자 개혁에는 문맹률 해소 및 언어 보급률을 높이려는 시도 외에도 당시 중앙아시아 등지에서 유행하던 바스마치 운동 등 중앙아시아가 전통적으로 문화적 접점을 가지고 있던 이슬람, 튀르크계 민족주의 운동과 유대감을 줄이려는 목적도 있었다. 비슷한 사례로 터키에서 아타튀르크가 추진한 세속화, 아랍 문자를 라틴 문자로 바꾼 터키어 개혁 등이 있다.[8] 소련 내에서 영토에 대한 인식은 "같은 소련인"이라는 인식 때문이었는지 상당히 자유로웠다. 소련은 명목상 자치적인 여러 공화국, 자치공화국, 자치주로 이루어져 있지만 어차피 스탈린 이후 소련에서 해당 지역의 주민 자치권이란 사실상 없는 것이었고, 그래서 소련 내 수많은 공화국들에 존재하던 자치공화국(ASSR)과 자치주(AO)에서는 소속이 바뀌는 일이 빈번했다. 특히 1936년 러시아 공화국에 소속되어있던 중앙아시아 영토를 5개 연방 공화국(SSR)으로 별도 설립시킨 것이나, 1954년 러시아 공화국 소속이었던 크림 반도를 우크라이나 소속으로 편입시킨 것 역시 이러한 인식의 일부였다. 물론 각 공화국들이 주권국가로 독립해버린 오늘날에는 커다란 골칫거리가 되었다.[9] 대표적으로 쑨원, 호치민 등.[10] 재미있게도 이러한 단어들은 독소전과 그 이후 소련에서는 거의 밥 먹듯이 쓰였지만, 독소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소련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았다.[11] 오늘날 러시아 연방 공산당이 기존 서구권의 전통적인 좌파 정치세력과는 달리 보수적이며 애국적인 성향을 띄는 이유이기도 하다.[12] 이러한 과정은 조지 오웰이 쓴 동물 농장에서 잘 드러난다.[13] 중앙아시아 지역도 상실하였다. 카자흐스탄만 해도 전세계에서 9번째로 넓은 나라이다.[14] 이 때는 푸틴이 서방에서 '''친서방'''적이라고 평가되던 시절이었다.[15] 1993년에는 한국에서 평화유지군을 파병했던 적이 있다.[16] 물론 잠가라 밸브와 같이 경제적 이권을 두고 다툼이 꾸준히 있었지만, 대놓고 NATO에 가입한 발트 3국이나 미국 무기로 재무장한 조지아에 비하면 비교적 큰 충돌 없이 잘 지내는 편이었다.[17] 공식적으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군사적으로 개입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는데, 만약 러시아가 적극적으로 우크라이나군과 교전할 경우 이는 명백히 UN 회원국에 대한 '''침공'''이다. 왜 미국이 이라크 전쟁 이후 평판이 극도로 나빠졌는지 생각해보자. 특히 이럴 경우 우크라이나의 동맹인 미국과 유럽이 군사 개입을 할수 있기에 러시아로선 더욱 할수가 없는 상황이다..[18] 크림 위기 이후 오데사, 하르키우 등지에서 지역 청사 점거 시도가 있었으나, 대부분 우크라이나 군과 경찰에 진압되었다.[19] 소련 시절 3억에 육박, 세계 3위이던 인구가 러시아 연방에서는 그 절반밖에 안 되며, GDP는 시대적 차이를 감안하고 봐도 '''5분의 1''' 이하로 줄었다.[20] 리투아니아군이나 정부는 친 Udija(가상의 국가) 진영의 분리주의 소요사태라고 하지만 리투아니아에서 이런 일을 일으킬 만한 세력이라면 소련 때 건너온 이민자(러시아인 포함)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