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로마 제국/군관구
이하는 동로마 제국의 테마 목록에 대한 서술이다.
테마는 군사적 목적이 함유된 행정구역인 고로 그 수가 일정하지 않고 시간의 흐름과 동시에 제국의 영토 변화에 따라 신설되는 테마가 있는가 하면 사라지는 테마가 존재하였다. 또한 상대적으로 중세 시대의 자료, 특히 동로마 제국 등 동유럽 국가들의 역사에 관한 자료가 많이 부족하여 제국이 설치한 테마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파악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 문단에서는 명확한 시대구분보다는 설치된 지역별로 테마를 구분하며 그 테마들에 대한 간략한 설명만 하고자 하다. 이는 테마 간의 폐치분합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황제 콘스탄티노스 7세가 저술했던 '동방 및 서방의 테마에 대하여'[1] 라는 저술에는 테마들이 동방(소아시아)과 서방(발칸 및 이탈리아의 유럽)으로 분류되어 있다. 영어 위키백과에서도 이를 따라, 각 테마 문서의 맨 밑에는 제목이 'Themes of the Byzantine Empire according to De Thematibus (ca. 950)'인 틀이 붙어 있다.
콘스탄티노플 천도 이전부터 이집트와 더불어 제국의 경제를 책임지던 곳으로 7세기 이후 이집트를 비롯한 제국의 동부가 이슬람 세력에게 넘어가자 제국의 경제를 담당하는 핵심 지역이자 이슬람 세력과의 최전선 지역이 되었다. 최초 5개의 테마가 설치된 지역으로 이후 수세기 동안 제국의 일부로서 그 역사를 함께 하였으나 만지케르트 전투를 계기로 소아시아 내륙을 상실하고 14세기 중반 튀르크에 의해 소아시아에서 완전히 축출당하면서 제국은 회생 불가능한 타격을 입게 된다.
1. 테마 목록
테마는 군사적 목적이 함유된 행정구역인 고로 그 수가 일정하지 않고 시간의 흐름과 동시에 제국의 영토 변화에 따라 신설되는 테마가 있는가 하면 사라지는 테마가 존재하였다. 또한 상대적으로 중세 시대의 자료, 특히 동로마 제국 등 동유럽 국가들의 역사에 관한 자료가 많이 부족하여 제국이 설치한 테마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파악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 문단에서는 명확한 시대구분보다는 설치된 지역별로 테마를 구분하며 그 테마들에 대한 간략한 설명만 하고자 하다. 이는 테마 간의 폐치분합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황제 콘스탄티노스 7세가 저술했던 '동방 및 서방의 테마에 대하여'[1] 라는 저술에는 테마들이 동방(소아시아)과 서방(발칸 및 이탈리아의 유럽)으로 분류되어 있다. 영어 위키백과에서도 이를 따라, 각 테마 문서의 맨 밑에는 제목이 'Themes of the Byzantine Empire according to De Thematibus (ca. 950)'인 틀이 붙어 있다.
1.1. 아시아
콘스탄티노플 천도 이전부터 이집트와 더불어 제국의 경제를 책임지던 곳으로 7세기 이후 이집트를 비롯한 제국의 동부가 이슬람 세력에게 넘어가자 제국의 경제를 담당하는 핵심 지역이자 이슬람 세력과의 최전선 지역이 되었다. 최초 5개의 테마가 설치된 지역으로 이후 수세기 동안 제국의 일부로서 그 역사를 함께 하였으나 만지케르트 전투를 계기로 소아시아 내륙을 상실하고 14세기 중반 튀르크에 의해 소아시아에서 완전히 축출당하면서 제국은 회생 불가능한 타격을 입게 된다.
- 옵시키우, 옵시키온(Ὀψικίου, Ὀψίκιον): 소아시아 북서부 마르마라 해에 접한 지역인 미시아 일대에 설치된 테마로 최초로 설치된 다섯 테마 중 하나. 수도는 니케아. '옵시키온'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수행원'을 뜻하는 라틴어 '옵세퀴움(Obsequium)'으로 '옵시키온'은 제국의 원정 시 황제를 수행하는 일종의 수행원 부대였다. 황제를 따르는 수행원 부대이니 만큼 원래 부대는 수도 콘스탄티노플 안에 있었으나 7세기 이슬람군의 침공으로 병력이 부족해지자 옵시키온 부대를 소아시아 북서부에 배치시킨 것이 이 테마의 기원이다. 설치 당시에는 수도를 안키라에 두고 소아시아 북서부 전역을 담당했으나 다른 테마 등이 분리되어 나가면서 수도도 옮기고 담당 지역이 미시아 일대로 한정되게 된다. 설치 이후 수백 년간 제국의 지배를 받아오다 1078년 룸 술탄국에 의해 함락되었고 1095년 알렉시오스 1세 황제 및 십자군이 수복하였으며 1204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자 망명 정부인 니케아 제국의 초기 중심지[2] 였다. 라틴 제국에 의해 상당부분을 빼앗기기도 했지만, 요안니스 3세가 등장하면서 완전히 수복하였다. 이후 소아시아 서부까지 튀르크 세력이 침입해 온 1331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상실하였다.
- 옵티마티, 옵티마톤(Ὀπτιμάτοι, Ὀπτιμάτων): 8세기 중반에 옵시키온 테마로부터 분리설치된 테마로, 콘스탄티노플에서 보스포루스 해협 건너 지척에 위치한 비티니아 일대에 설치된 테마. 수도는 니코메디아. 이름의 유래는 '정예 부대'를 뜻하는 라틴어 '옵티마테스(Optimates)'이다. 다름아닌 벨리사리우스와 나르세스가 멸망시킨 동고트 왕국 정규군들의 직속 후예로서, 포로로 잡아 아나톨리아 일대에 사민시켜 '고소그라이키'로 명명한 부대가 이 부대의 시초였다. 이 부대는 훗날 옵티마테스로 개명되는데, 옵티마티로도 불렸지만 동로마 황제들 중엔 상당한 고대 로마 애호가들이 많았던 탓에 명명 의도는 그냥 옵티마테스에 있었다고 보는 게 옳다. 걸핏하면 항명해서 이슬람 쪽으로 넘어가던 불가르족 포로들과는 달리 이들은 로마 제국측에 대단한 충성을 바쳤으나, 대신 여러 차례 반란에 가담해서 황제 시해에 기여하는 독특한 전통이 있었다. 떄문에 이후 시기로 가면 전투 의무를 빼앗기고 단순 사역 부대로 전락하게 된다. 지중해 전체에서도 비옥한 비티니아 지역을 차지하고 있어서 부유하였고, 팔레올로고스 왕조 시대에도 분지평야가 많아 파플라고니아와 함께 기병을 제공하는등 중요 테마였다.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튀르크 세력이 들어오면서 니코메디아를 포함해 일부 해안의 소규모 고을과 요새들을 제외한 전역을 상실하였으나 알렉시오스 1세가 1차 십자군의 도움을 얻어 되찾았으며 이후 라틴 제국과 제국을 복구한 니케아 제국의 수중을 거쳐 최종적으로 오스만 제국에 의해 1337년 니코미디아가 함락당하면서 상실하였다.
- 키비레오테, 키비레오톤(Κιβυρραιῶται, Κιβυρραιωτῶν): 소아시아 남부 해안 일대에 설치된 테마. 수도는 안탈리아였고 그 영역은 밀리티스 남부부터 이슬람 세력과의 경계를 이루는 킬리키아까지로 카리아와 리키아, 팜필리아, 도데카니사 제도까지를 포함하는 테마였다. 최초 5개의 테마 중 하나로 육군을 담당한 나머지 4개의 테마와 달리 해군 테마였다. 설치 목적은 제국의 제해권을 위협하는 이슬람 세력의 해군에 대항하기 위한 목적. 처음에는 테마가 아닌 제국 해군의 함대인 카라비시아니(Καραβισιάνοι)였으나 8세기 초반 카라비시아니가 폐지되면서 그 담당 지역인 소아시아 남부 해안이 독립 테마로 자리잡게 되었다. 키비레오톤 테마의 도시들은 아랍 해적들의 주요 표적이 되어 많은 도시들이 약탈로 인해 인구가 크게 감소하였다. 설치된 이후 수세기 동안 제국의 제해권 확보에 힘을 써왔으며 9세기 초에는 70여척의 군함을 전력으로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11세기에 이르러 아랍 해적들의 위협이 감소하면서 제국 해군의 중요성이 떨어지자 키비레오톤 테마도 쇠퇴하였고, 11세기 중엽에 이르러 테마는 전투력을 상실하였다.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소아시아로 튀르크족이 밀려올 때 상실되었으나, 알렉시오스 1세와 요안니스 2세가 일부를 수복하여 테마를 재건했다. 키비레오톤 테마는 1150년 마누일 1세에 의해 최종적으로 폐지되어 밀라사-멜라누디온 테마에 편입되었다.
- 트라키(케)시이, 트라키(케)시온(Θρᾳκήσιοι, Θρᾳκησίων)[3] : 소아시아 서부 해안에 설치된 테마. 담당 영역은 이오니아와 리디아, 카리아 북부와 프리기아의 일부. 최초 다섯 테마 중 하나로 이름의 유래는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아랍과의 전쟁 초반, 초기 제국군의 부대 중 하나인 트라키아군의 일부가 이 지역에 배치된 사실로부터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제국의 경제적 중심지인 소아시아, 그중에서도 가장 비옥한 소아시아 서부를 담당한 테마였으므로 그 중요성은 이미 알려진 바, 제국의 최정예 테마 중 하나였다. 초반에는 소아시아로 쳐들어오는 이슬람 세력을 막아내었으며 10세기 경부터 이슬람의 확장이 상대적으로 정체된 이후에는 크레타 원정의 주력을 담당하는 등 제국의 반격에 일조하였다. 이 테마 역시 만지케르트 전투로 튀르크족에 의해 상실하였으나 1090년대 후반 콤니노스 왕조의 명장 요안니스 두카스#s-2가 수복하였다. 1204년 제국이 1차로 멸망했을 당시 망명 정권인 니케아 제국의 핵심 영역으로 남아 수도권이 되기까지 했었다. 소아시아 서부의 다른 테마들과는 달리 14세기 말까지 로마제국에 남아있엇는데 1337년 로마령 니코메디아가 함락되며 모든 아나톨리아의 테마가 소멸한 이후에도 50여년간 빌라델비아가 남아 로마의 마지막 테마로 존속하다가 1390년 4차 내전이자 요안니스 7세와 요안니스 5세의 내전을 도와준 대가로 오스만 베이국에 점령당해 소멸한다. 로마의 마지막 아시아 영토.
- 아나톨리코스, 아나톨리콘(Άνατολικῶν, Άνατολικόν): 아나톨리아 고원 일대에 설치된 최초의 다섯 테마 중 하나로, 후일 룸 술탄국의 수도가 되는 이코니온이 위치해있었다. 수도는 아모리온. 이슬람 세력과의 최전선을 담당하던 테마로 역대 황제들이 가장 중요시한 테마 중 하나였다. 이름의 유래는 원래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일대의 동방 관구(Dioecesis Orientis/Ἑῴα Διοίκησις)를 방어하던 부대인 동방군(Άνατολή). 이슬람과의 전쟁 초반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상실하면서 상당수가 전사하고 살아남은 동방군 부대 일부를 아나톨리아 고원에 배치시킨 것이 시초다. 초반에는 아나톨리아 고원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7 ~ 8세기의 위기에는 이슬람 세력과의 경계 대부분을 담당하면서 그들의 침공을 온몸으로 버텨내었고, 수도였던 아모리온도 아랍인들이 자주 쳐들어와서 838년에는 기어코 함락시켰다.[4] 이후 이슬람 제국의 공세가 약해진 이후에도 아나톨리콘 테마는 지속적인 아바스 왕조의 공격을 받아 아나톨리콘의 도시들은 죄다 파괴되었다(...) 이후 9세기 들어서 여러 테마들이 분리되면서 영역이 아나톨리아 고원 서부 일대인 프리기아 남부, 피시디아, 리카오니아 일대로 축소되면서 국경으로부터 상대적으로 멀어지게 되었다. 만지케르트 전투의 결과 테마가 소멸되었으며 그 영역에는 튀르크족이 눌러앉게 되었다. 1077년에는 절도사였던 니키포로스 3세가 남아있는 아나톨리콘 테마군을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켜 황제에 오르기도 했다. 이후 콤니노스 왕조는 아나톨리콘 테마를 포함한 아나톨리아 내륙을 수복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고 일부를 수복하는데는 성공하였으나, 1176년 미리오케팔론 전투의 결과 끝내 튀르크족의 영토로 확정되었고 아나톨리콘 테마는 부활하지 못했다.
- 아르메니아키, 아르메니아콘(Ἀρμενιάκων, Ἀρμενιακόν): 소아시아 중북부 흑해안에 설치된 군관구로 수도는 아마시아. 설치 당시에는 폰토스 해안 전체와 할리스 강 유역의 카파도키아까지 뻗어있었고, 이 때문에 관구 자체가 이슬람 세력과의 최전선을 담당했다. 최초의 다섯 테마 중 하나로, 이름의 유래는 아르메니아 지역을 담당하던 구 아르메니아 야전군에서 왔다. 7세기 이슬람 세력과의 전쟁 중 아르메니아 일대에서 살아남아 아나톨리아로 후퇴한 군인들이 이 지역에 배치된 것이 시초다. 9세기경 아르메니아콘 테마는 9천여명의 병력을 상시동원시킬수 있었다. 상술했듯 창설 초창기에는 담당 지역이 상당히 넓었으나, 이 테마의 중요성으로 인해 아르메니아콘 테마를 기반으로 반란을 일으키는 경우가 허다했고, 9세기 들어서 하르시아누, 카파도키아, 할디아, 콜로니아 등의 테마들이 분리되면서 폰토스 해안 일부와 할리스 중하류 지역으로 한정되었다 분리되었다. 아르메니아콘 테마는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의 혼란 속에서도 제국의 행정력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1073년 제국에 고용됐던 프랑크인 용병 루셀 드 바이욀이 독립을 시도하면서 제국의 통제를 벗어났다. 이후 당시 제국 동부군 총사령관(Stratoperdakhes)였던 알렉시오스 콤니노스의 원맨쇼로 제국의 행정력이 잠시 복원되었지만, 곧 들이닥친 튀르크인에 의해 테마가 완전히 붕괴된다. 다만 시노피 등 일부 해안의 요새 도시들은 여전히 제국의 통제 하에 있었으며, 알렉시오스 1세 재위기 동안 요르요스 타로니티스 등의 원정으로 해안 지역이 모두 수복되었다. 이어 요안니스 2세와 마누일 1세 재위기에 내륙 상당부분도 수복된 바 있다. 하지만 끝내 아르메니아콘 테마는 루셀의 반란 이래로 다시는 재건되지 못했다.
- 파플라고니아(스)(Παφλαγονίας): 9세기 초반 아르메니아콘 테마로부터 분리설치된 테마. 수도는 강그라(Gangra). 소아시아 중북부에 위치한 테마로서, 부켈라리온과 아르메니아콘 사이에 위치했다. 카스트라 콤니니(Kastra Komneni)로 알려진 콤니노스 가문의 영지 카스타모뉘(Kastamonu)가 위치해있는 콤니노스 왕조의 선산격인 지역이기도 하며, 이들 외에도 테오도라 섭정 태후, 파플라고니아 왕조의 창건자인 미하일 4세, 두카스 가문, 달라시노스 가문, 케카우메노스 가문 등의 출신지이기도 하다.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상실하였다가 알렉시오스 1세가 해안가를 수복한 이후, 요안니스 2세가 가한 수차례의 원정으로 거의 수복되었다. 4차 십자군 사태 이후 트라페준타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가 테오도로스 1세에 의해 니케아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팔레올로고스 왕조시대 초기까지 국경지대이자 주요한 기병 공급처로 남아있었으나, 이후 튀르크족이 서진하면서 유명무실해졌고 14세기 말 잔다르 베이국에 의해 소멸하였다.
- 부켈라리이, 부켈라리온(Βουκελλάριον, Βουκελλαρίων): 8세기 중후반 콘스탄티노스 5세가 옵시키온 테마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옵시키온 테마로부터 분리설치한 테마. 수도는 앙키라. 이름의 유래는 고대 로마 제국 시절 고트족의 정예 기병대인 부켈라리(Bucellarii)이다. 부켈라리온 테마는 설립 초기에 8000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흑해 해안가를 상당수 차지하고 있었으나, 9세기에 파플라고니아 테마가 분리되면서 해안가는 이라클리아 폰티카(Heraclea Pontica) 일대만을 관할하게 되었다.(11세기 중반에 내륙테마가 되었다고도 한다.) 제국의 주요한 기병 공급처중 하나 이기도 했다.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튀르크족이 침입하면서 테마가 소멸하였다가 콤니노스 왕조 시기 관할 지역이 상당수 수복되었다. 이름만은 1263년까지 남아 있었으나 튀르크족이 서진하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 할(칼)디아(Χαλδία,Χαλδίας): 9세기 중반 아르메니아콘 테마로부터 분리설치된 테마. 아나톨리아의 북동부 흑해 연안, 즉 트레비존드와 그 주변지역이다. 발음이 비슷한 메소포타미아의 '칼데아(Chaldea)'와는 전혀 관련이 없으며, Anthony Bryer에 의하면 그 지방의 고유어(Uratian Language)로 태양신을 의미하는 말이 'Haldi'라 거기서 온 지명이라고 한다. 10세기 경에 할디아 테마는 4천여명의 병력을 거느렸다. 10세기 후반에 제국의 동부 국경이 확장되기 전까지 할디아는 최전선의 테마중 하나였다. 테마의 남쪽 방면을 폰토스 산맥이 지켜주어서 11세기말 셀주크 제국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다. 이후 가브라스(Γαβρᾶς) 가문이 장악하여 제국 정부에 충성하는 형태로 장기간 자치를 누렸다. 4차 십자군 사태 즈음 탈출해서 정착한[5] 콤니노스 왕조의 일파[6] 가 정착해서 트라페준타 제국을 세우고, 접근하기 어려운 지형 및 외교력을 잘 활용해서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된 후인 1461년까지 존속하다가 오스만 제국에 의해 트라페준타가 함락되며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했다. 1461년 트라페준타가 함락된 이후에도 할디아의 요새 도시들은 저항했으나 1479년에 이르러 모두 오스만 제국에게 정벌되었다.
- 사모스
- 카르시아논, 하르시아누(Χαρσιανόν, Χαρσιανοῦ): 9세기 중후반 아르메니아콘 테마로부터 분리, 설치된 테마. 이름은 할리스 강 유역에 위치한 요새인 동부 아나톨리아의 카르시아논(Charsianon) 요새에서 유래했다. 설치 당시에는 클리수라(κλεισούρα)[7] 로서 나중에 정식 테마로 승격되었다. 9세기 말 카르시아논 테마는 4000여명의 병력을 거느렸다. 수도는 카르시아논이었으나, 10세기 즈음 동쪽으로 세바스티아 테마가 분리되어 나가면서 중심지에 가깝고 규모도 큰 도시인 케사리아로 옮겨갔다. 카르시아논 테마는 군사 귀족들의 주요 거점중 하나였다. 11세기 말 셀주크 제국의 공세로 1067년 케사리아가 함락되어 위태위태한 모습을 보이다가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밀고들어온 튀르크인들에 의해 1072년에 테마가 소멸되었으며 그 자리에는 다니슈멘드 왕조가 들어섰다.
- 카파도키아(스)(Καππαδοκίας): 830년경 아나톨리콘 테마로부터 분리, 설치된 테마. 서로는 타타 호(, 북으로는 할리스 강, 남으로는 타우로스 산맥이라는 대놓고 깡촌에 위치한 테마이다. 수도는 초기에는 코론(Koron), 후기에는 티아나(Tyana)로 추정된다. 설치 당시에는 클리수라(κλεισούρα)로서, 시리아 지방에서 아나톨리아로 들어오려면 십중팔구 거치게 되는 킬리키아 관문(Cilician Gates)를 비롯한 관문요새들을 지키는 역할을 했다. 아바스 왕조의 계속된 공격으로 카파도키아는 완전히 황폐화되었으나 카파도키아 테마가 설립될 즈음부터 제국의 반격이 시작되면서 어느 정도 복구되었다. 9세기경 4000여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카파도키아는 이슬람 세력과의 전쟁에서 최전선을 맡았기에 포카스 가문등 군사 귀족의 주요 거점이였다.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에도 워낙 험한 곳이다보니 잔여 병력들이 저항을 이어나갔으나 1081년에 이르러 완전히 셀주크 제국에게 빼앗겼다.
- 셀레브키아
- 콜로니아
- 세바스티아
- 리칸두
- 메소포타미아
- 데르제니
- 아르체
- 아스모사톤
- 하르피지키온
- 하브지진
- 호자논
- 에데사
- 유프라테스 도시들
- 이베리아(Ιβηρίας): 이베리아 반도의 이베리아가 아니다! 그러나 어원은 같다.
- 만지케르트
- 멜리티니
- 사모사타
- 타론
- 테프리키
- 세오도시오폴리
- 바스프라카니아
1.2. 유럽
- 트라키,스라키(Θράκη,Thrake):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와 주변 지역이다.
- 마케도니아스(Μακεδονίας): 수도는 아드리아누폴리. 현대의 마케도니아 지역이 아닌 북트라키아 지역이다. 바실리오스 1세가 마케도니아인이란 별명이 붙은 이유도 이 테마 출신이어서 나온 것.
- 에게 해 제도(Αιγαίο Αρχιπελάγους)
에게 해 테마는 843년에 설립되었고, 이 테마의 절도사는 다른 테마들과 달리 행정적인 업무를 보지 않고 오로지 해군의 양성만 담당했다. 설립 당시에는 에게 해의 모든 섬을 담당했으나, 이후에 여러 테마로 분화되었다가 12세기에 다시 합쳐졌다. 1204년 4차 십자군 원정으로 제국 정부가 무너지면서 사라졌다.
- 디라키움
9세기 초 니키포로스 1세에 의해 그리스가 수복될 즈음에 설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담당 지역은 명확하지 않지만 남으로는 니코폴리스 테마와 접했고 북으로는 달마티아 테마와 접했다. 10세기 후반에서 11세기 초까지의 대불가리아 전쟁 기간동안 디라키움 테마는 불가리아의 지배를 받았다. 11세기 후반 남이탈리아를 완전히 뺏기면서 발칸 반도가 서방 세력의 위협에 그대로 노출되면서 디라키움 테마의 중요성은 급속히 늘어났다. 알렉시오스 1세 시기의 노르만족과의 전쟁에서도 디라키움은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디라키움 테마의 절도사는 발칸 반도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가졌다. 1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으로 제국 정부가 붕괴되어 테마가 소멸했다.
- 헬라스(Ελλάς)
7세기 말에 유스티니아노스 2세에 의해 슬라브족에게서 제국의 남은 그리스 영토를 수복하기 위해 설립된 테마다. 수도는 테베였으나, 10세기경 라리사로 옮겨졌다. 헬라스 테마의 도시들은 지속적인 슬라브족의 테살리아 공격을 막기위해 요새화되었고, 덕분에 헬라스보다 더 남쪽에 있는 펠레폰네소스가 슬라브족에게 장악되었음에도 헬라스 테마는 살아남았다. 하지만 슬라브족의 계속된 침공으로 헬라스의 주민들은 에게 해의 섬으로 도망쳤다. 초기 설립 당시에는 제국 해군의 통제력이 닿는 해안가에만 통제력을 미쳤으나, 8세기부터 서서히 내륙으로 세력을 확장하다가 제국이 그리스를 완전히 수복하는 9세기부터 제대로 아케아 지방과 테살리아를 통치하게 되었다. 헬라스 테마는 과거 해안가만을 다스리던 시기의 영향을 많이 받아 육군은 2000여명에 불과했고 해군에 중점을 두었다. 9세기 부터 10세기 동안에는 사리센 해적들과 불가리아 제국에게 큰 피해를 입었고 심지어 테베가 불가리아 제국에게 점령당하는 일도 있었다. 이는 각각 10세기 중반과 11세기 초반에 격퇴되었고, 헬라스는 제국의 영토로 번영하였다. 11세기 말에 이르러 헬라스 테마는 소규모 행정 단위로 쪼개지기 시작했고, 테살리아는 테살로니카 테마에 편입되었다. 11세기 부턴 헬라스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주요 무역 거점으로 활용되었고 더욱 번영했다. 그러나 지역의 번영과는 별개로 헬라스 테마는 유명무실 해져갔고, 결국 12세기 말 제국이 막장테크를 타던 시기에 해체되었다.
- 크리티(Κριτή)
961년 제국이 크레타를 수복한 후 크레타 섬에 설치된 테마이다. 10세기에 테마는1000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크레타의 무슬림들을 상대로 적극적인 포교 활동을 벌였다. 1204년 4차 십자군 원정이 일어날 때까지 제국의 영토로서 번영하다가 1205년 섬의 소유권이 베네치아 공화국으로 넘어가면서 테마도 소멸되었다.
- 케팔로니아
8세기 중후반에 설립된 테마로 이오니아 일대의 섬들과 이피로스 지역을 담당했다. 이 섬들은 7세기 슬라브족의 남하로 인한 피해를 겪지않았고, 이후 제국이 그리스를 수복하기 위한 거점 역할을 수행하였다. 또한 케팔로니아 테마는 남이탈리아에서의 작전을 위한 주요 기지의 역할도 수행하였고, 아드리아 해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해상 거점이였다. 9세기에 케팔로니아 테마는 2000여명의 병력을 거느렸다. 또한 이 테마는 정치범들의 유배지로도 자주 쓰였다. 11세기 후반 제국이 남이탈리아를 상실한 이후에는 테마의 중요도가 감소하였고, 1185년 시칠리아 왕국에 의해 코르푸 섬을 제외한 모든 섬들을 영구히 상실하면서 사라졌다.
- 케르손
케르손은 원래 제국의 지배를 받다가 7세기 경에 들어서 하자르의 지배를 받았는데, 이후 840년 테오필로스 황제에 의해 수복되어 테마가 설립되었다. 수도는 당연히 케르손. 케르손 테마는 군사적인 의미보다는 루스와 페체네그족과의 외교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케르손은 키예프 루스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9 ~ 11세기 동안 흑해 무역의 중심지로 번영하다가 11세기 후반 쿠만족의 침공을 받아 쇠퇴했다. 1204년 4차 십자군 원정으로 제국 정부가 붕괴되며 테마도 사라졌지만, 트라페준타 제국에 의해 수복되었다. 이후 트라페준타 제국이 쇠퇴하며 이 지역은 사실상 테오도로 공국이 통치하게 되었다. 1461년 트라페준타 제국이 멸망한 뒤 1475년 테오도로 공국마저도 멸망하며 케르손은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게되었다.
- 달마티아
달마티아는 870년 바실리오스 1세 때 정규 테마로 제정되었고, 달마티아의 제국령을 담당했다. 설립 목적은 프랑크 제국을 비롯한 서방 세력 견제. 이후 제국 본토와 동 떨어진 달마티아를 차지하기 위한 베네치아 공화국과 크로아티아, 노르만족의 난전이 벌어졌고 최종적으로 베네치아 공화국이 승리하여 달마티아의 일부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달마티아 테마의 핵심 도시인 라구사는 여전히 제국령으로 남아 있었다. 이후 제국의 달마티아에서의 지배는 두클랴 공국과도 경쟁하게 되었다. 1054년 동서 교회 대분열 이후 제국의 달마티아에서의 영향력은 더욱 악화되었고, 1060년대에 이르러 거의 모든 영역에서 제국의 통치가 붕괴되어 테마가 소멸했다. 이후 12세기 말 마누일 1세의 시기에 잠시 달마티아에서의 제국 지배가 회복되긴 하지만 그의 사후 제국은 달마티아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했고, 달마티아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영토로 남게되었다.
2. 관련 문서
[1] 그리스어 Περί θεμάτων Άνατολῆς καί Δύσεως, 라틴어 De Thematibus, 영어 On the themes of East and West. 이 책과 '민족 및 국가에 대한 통치론' 이라는 책을 합한 것이 '제국의 통치론' 이라는 책이다. 그리스어 원어는 '아들 로마노스에게'로 되어 있어, 아들을 위한 매뉴얼의 성격임을 드러낸다.[2] 이후 요안니스 3세가 천도하면서 니케아 제국의 수도는 오늘날 이즈미르 인근의 님페온(Nymphaion)이었다.[3] 영어로는 Thracesian Theme. 유럽 쪽의 트라키아 테마와는 다르다!(이쪽은 영어로 Thrace(theme)) 어원은 당연히 같지만, 충분히 헷갈릴 법하고, 저 영어 위키백과의 양 문서에도 맨 위에 'Not to be confused with ~~' 즉 서로 헷갈리지 말라고 주의시키고 있다.[4] 당시 로마의 왕조는 아모리온(프리기아) 왕조였기 때문에, 아모리온은 왕조의 발상지 비슷하게 여겨지고 있었고, 이 점을 알았던 아바스가 일부러 발상지를 무너뜨려서 제국 전체를 멘붕시키려는 계획이 있었다.[5] 여기에 정착한 이유는 외가가 조지아 왕가라서.[6] 정확히는, 폭군 안드로니코스 1세의 가계이다.[7] 아나톨리아로 들어오는 관문 역할을 수행하는 요새화된 고갯길들을 중심으로 고갯길들과 그 인근 지역을 방어하는 독립된 행정구로 테마보다는 작은 규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