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계급
1. 계급장
2. 기타 특징
일본군의 계급은 타국과 달리 아래와 같은 특징을 가진다.
- 한국군의 병 계급은 현재에도 구 일본군과 동일하지만 계급장을 작대기로 통일했다. 작대기 한 개에서 네 개까지.
- 장교와 하사관/사병 사이의 격차가 타국 군 대비 매우 컸다. 병사/수병이 장교가 되기는 매우 힘들었는데, 특히 해군이 유달리 심했다. 이는 장교부터는 원칙상 천황을 알현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정식 관료이므로, 부정(不淨)한 아래 계급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존재라는 의미가 있다.
이런 관점은 매우 뿌리가 깊은 것으로, 쇼군이 지배하던 시절에도 치안을 담당하던 도신은 부정한 관리라고 해서 쇼군을 알현할 수 없으며, 오메미에라고 해서 쇼군 알현 자격이 있는 직책과 없는 직책을 나누는 구분이 있었을 정도였다.
덕분에 하사관과 병사/수병은 아무리 공을 세워도 장교가 되기 힘들었다. 육군은 그나마 종전시까지 사병의 장교 임관 기회가 있었고 인사상 암암리에 불이익을 받거나 혹은 부대 분위기상 좀 무시당했다는 점은 있어도 일단 임관하면 정규 장교로 대우했으나, 해군은 아예 전쟁 중에 기존에 하사관에게 장교가 될 기회를 줬던 특무사관 제도마저 없애버렸는데, 이는 이들 특무사관들이 정식 루트(일본해군병학교 등)를 거치지 않고 온 이들이라 하여 실무에서 장교나 하사관 양쪽에서 무시당해 제대로 된 장교 역할을 수행 못했기 때문이다. 계급 명칭도 특무소~대위로 아예 달랐고 계급장도 수장 밑에 사쿠라 세 개를 부착하고 견장 및 금장도 금선이 일반 위관장교보다 폭이 좁은 걸 쓰는 등 대놓고 차별했다. 어쩌다 드물게 소좌 이상으로 진급[4] 하면 특무라는 접두사가 빠지고 계급장이 일반 사관과 동일해지지만, 인사기록이 발목을 잡아 역시 차별을 받았다. 다만, 이렇게 진급한 소수의 특무 출신 좌관급 사관들은 "사병 출신이 여기까지 올 정도면 나름대로 인정은 해 줘야 한다."는 분위기가 있었고, 덴노로부터 군도도 직접 하사받았기 때문에 다른 의미로 무시당하지는 않았다. 즉, 정상적인 좌관급 사관이 받을 대우는 못 받지만, 이를 일부 상쇄할 제도적, 암묵적 특혜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워낙 극소수만 이렇게 진급했기에, 그냥 병조장으로 머무르는 게 차라리 나았다. 결국 1942년 기존에 임관한 특무사관들을 전부 일반 해군 사관으로 편입시키고 제도 자체를 폐지했다. 앞서 언급한 사카이 사부로도 전쟁 말기에 가서야 소위가 되었는데, 그 때까지 이런 식으로 진급한 경우는 해당인을 포함해서 단 2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덕분에 하사관과 병사/수병은 아무리 공을 세워도 장교가 되기 힘들었다. 육군은 그나마 종전시까지 사병의 장교 임관 기회가 있었고 인사상 암암리에 불이익을 받거나 혹은 부대 분위기상 좀 무시당했다는 점은 있어도 일단 임관하면 정규 장교로 대우했으나, 해군은 아예 전쟁 중에 기존에 하사관에게 장교가 될 기회를 줬던 특무사관 제도마저 없애버렸는데, 이는 이들 특무사관들이 정식 루트(일본해군병학교 등)를 거치지 않고 온 이들이라 하여 실무에서 장교나 하사관 양쪽에서 무시당해 제대로 된 장교 역할을 수행 못했기 때문이다. 계급 명칭도 특무소~대위로 아예 달랐고 계급장도 수장 밑에 사쿠라 세 개를 부착하고 견장 및 금장도 금선이 일반 위관장교보다 폭이 좁은 걸 쓰는 등 대놓고 차별했다. 어쩌다 드물게 소좌 이상으로 진급[4] 하면 특무라는 접두사가 빠지고 계급장이 일반 사관과 동일해지지만, 인사기록이 발목을 잡아 역시 차별을 받았다. 다만, 이렇게 진급한 소수의 특무 출신 좌관급 사관들은 "사병 출신이 여기까지 올 정도면 나름대로 인정은 해 줘야 한다."는 분위기가 있었고, 덴노로부터 군도도 직접 하사받았기 때문에 다른 의미로 무시당하지는 않았다. 즉, 정상적인 좌관급 사관이 받을 대우는 못 받지만, 이를 일부 상쇄할 제도적, 암묵적 특혜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워낙 극소수만 이렇게 진급했기에, 그냥 병조장으로 머무르는 게 차라리 나았다. 결국 1942년 기존에 임관한 특무사관들을 전부 일반 해군 사관으로 편입시키고 제도 자체를 폐지했다. 앞서 언급한 사카이 사부로도 전쟁 말기에 가서야 소위가 되었는데, 그 때까지 이런 식으로 진급한 경우는 해당인을 포함해서 단 2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 준사관 제도가 현재 국군과 다르다. 부사관이 지원하여 시험쳐서 되는 게 아니고, 육군 조장과 해군 상등병조에서 준위/병조장을 진급시키는 영연방군의 방식이었다. 준사관 신분이 있고 법령상으로 위관급 장교와 동일한 대우를 받았지만, 실무에서는 당연히 장교 취급을 받진 못했다. 물론 이 계급 자체가 진급하기 힘든 편이라 주임관이나 장교에게 해당되는 연봉제 대상자가 되었다던가, 군도 패용과 장교의 의복 착용을 했다거나, 장교들 휴게실 같은 곳에 들어갈 수 있었다거나 하는 등 나름대로의 우대는 받았다. 사병들 사이에선 충분히 왕노릇 할 수 있었고, 장교들도 이들의 경력 자체는 무시하지 못했다. 애시당초 준위나 병조장이라는게 한국의 준위와는 또 다른 면이 있어서 저 계급을 가진 경우라면 뭔가 특별한 능력이 있거나 특별한 공적이 있거나 한 경우라서 웬만한 병사, 수병들은 평소엔 보기도 어려웠다. 육군 기준 중대 하나에 1인의 준위를 두고 인사계 일을 했는데, 아예 따로 준위실이 있어서 얼굴 볼 일도 없었다고 한다. 혹은 수의나 의무, 군악, 기술, 회계 등의 능력이 있는 사람들과 관련해서는 위에서 설명한 장교와 사병의 차이와도 관련된 문제인데, 흔히 장교가 해야 될 보직이거나(조종,군의 등), 장교가 될만큼 큰 공을 세우고 경력도 있는 인원을 장교로 임관하거나 진급시키기 뭐해서 주는 계급인 경우가 있다보니 주로 해군의 비행병조장 등의 예에서 많이 보이고, 실제로 나이도 30전후로 한국의 준위를 생각하면 좀 의외로 여겨질 정도로 젊은 편이었다. 애시당초 준위의 정년이 40세였고, 거기까지 가지 않고 퇴임하는 사람도 많았다. 당장 저 위에 나오는 사카이 사부로가 해군비행병조장에서 소위로 승진한 케이스다.
- 준장 계급이 없다.
이것은 유럽에서도 1차대전 이전에는 공통된 현상이었고, 1차대전때부터 규모가 커지니 장성도 4단계가 된것이다.
독일군만해도 상급대장이 있었는데, 원래는 준장 없이 소장-중장-대장이었다가, 대장 위에 상급대장을 신설한 것이다.
독일군만해도 상급대장이 있었는데, 원래는 준장 없이 소장-중장-대장이었다가, 대장 위에 상급대장을 신설한 것이다.
- 원수가 존재한다. 하지만 원수는 일종의 명예 호칭으로 부여받았다고 해도 정식 명칭은 원수 육군대장, 원수 해군대장 하는 식으로 계급은 대장으로 유지된다. 따라서 실질적인 계급이 아닌 형식적인 계급이다. 그래서 원수 계급의 표시는 일본 육군과 해군이 공통으로 쓰는 문양을 따로 제정한 후, 기존 계급장에 추가하는 형식으로 운영된다. 원수라는 호칭은 각 군의 계급과 다른 것으로 여겨졌기에 육군원수대장, 해군원수대장 등의 호칭은 잘못된 호칭이다. 일테면 '원수육군대장 데라우치 마사타케' 라던가 '데라우치 마사타케 원수'는 옳은 호칭이지만 '육군원수대장 데라우치 마사타케'라는 호칭은 잘못된 것... 무조건 원수라는 호칭은 육해군 구분에 우선하거나 단독으로 쓰여야 했다. 그리고 계급이 대장으로 유지되기는 해도 대장은 정년이 65세였지만 원수는 종신직이라는 차이도 있었다. 참고로 일본군 통틀어 원수 칭호를 받은 자는 육군 17명에 해군 13명이었고 그 중 황족을 제외하면 육군 12명에 해군 10명, 또 저 중에서 사후추서자를 제외하면 해군은 6명으로 더 줄어든다. 저런 의미에서 초 레어한 칭호였던건 사실...
다만 계급으로서의 원수가 존재했던 적이 있기는 했는데 1872년에 사이고 다카모리가 최초이자 최후의 원수계급에 취임했다가 1년만에 대장으로 환원되었다.
- 대원수는 천황 전용으로 타인에게 부여되지 않으며, 천황은 국가원수라는 의미로 대원수를 부여받기 때문에 실질적인 군대 계급으로 작동하지는 않는다. 다만, 원수와는 달리 확실하게 편제상으로는 군대중 최고위를 인정받으므로 원수와 같이 명예 호칭으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육군 대원수와 해군 대원수 계급이 따로 부여되며, 천황은 양 계급을 모두 부여받지만, 육군을 방문할 때는 육군 대원수 복장으로, 해군을 방문할 때는 해군 대원수 복장을 착용한다. 그리고 일본 육군과 해군은 각각 자신들의 대원수 복장을 입은 천황의 초상화를 걸어놓고, 설명할 때도 각각 "육군 대원수인 천황께서는", "해군 대원수인 천황께서는"하는 방식으로 다르게 부른다. 이렇게 어이없는 사태가 발생하는 이유는 뿌리깊은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 때문이라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2차대전 종전시까지 황실 남자들은 육사나 해병 중 하나에 진학하는 게 관례였고, 히로히토는 육사를 졸업한 육군 장교이나 국가원수인 천황이 되면서 해군 계급도 자동으로 받은 것이다. 유럽 왕국들의 국왕들도 육, 해, 공군 원수 계급을 각각 보유하고 각 군 행사때면 그 군의 군복으로 갈아입고 참석한다. 영국의 필립 공이나 찰스 왕세자는 실제 군복무를 해군에서 해서 중년기까지는 해군복으로 공식 행사에 참석했지만 나이가 든 후에는 육군 원수 예복으로 공식 행사에 나오는 일이 더 늘어났다.
- 육군 병에서부터 장성에 이르기까지 계급장의 심볼이 모두 별이다. 그래서 일본군 계급장을 처음으로 보는 사람들은 어딜 봐도 일본군 병사인데 별을 달고있는 모습을 보면서 의아함을 느끼는 경우가 많은데, 일본군 계급장은 별의 개수와 함께 붉은 배경에 쳐진 노란줄의 개수를 따져야 계급을 알수있다. 황색은 황제의 색깔로서 천황을 상징하므로[5] , 황색 면적이 넓어질수록 더 고위직이라는 원리.병은 그냥 붉은 배경만 있지만 병장에서 하사관부터 노란줄이 1개가 되고, 위관은 3줄, 좌관은 4줄, 장성은 배경이 모두 노란색이다. 다만 별이 없으면 신분이 하나 아래로 내려간다. 병장은 하사관처럼 노란줄이 1개지만 별이 없어서 병사고, 준위 역시 위관처럼 3줄이지만 별이 없어서 준사관이다. 장교의 계급장은 조선인민군/계급장과도 비슷하다.[6] 영향을 받았는지는 알수 없지만 국민혁명군의 계급장과도 유사했다. 이쪽은 심볼이 정삼각형이다.
- 육군의 경우, 중일전쟁 전까지만도 대부분은 이등병으로 입대해 일병으로 전역하며, 중대의 상위 1할정도인 소위 A급 병사만 상등병으로 진급할 수 있었다. 병장계급이 생긴건 중일전쟁 이후인 1940년 9월.... 그러다보니 상등병으로 전역한게 시골에서는 꽤나 자랑거리가 되었던 모양이다. 오장 출신이면 지역에서 꽤나 대접도 받았다고 한다. 또한 상등병 전역자는 선별된 엘리트라는 인식이 강해 전역 후 취업이나 결혼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했다. 일등병으로 오랫동안 복무 후 전역할 때 간혹 명예계급 차원에서 상등병으로 진급과 동시에 전역시켜줬는데, 이런 병사들을 '영문(營門) 상등병'이라고 비웃었다. 즉, 영문 밖으로 나가야만 상등병이 된다고 해서, 제대로 진급한 상등병들과 다르게 대우받았다.
- 해군의 수병들은 진급을 위해선 수병전용 훈장 비슷한 선행장(善行章)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근무성적에 따라 선행장 없이 진급하기도 하고, 있어도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계급별로 인원 수가 제한이 있다 보니, 매년 기준이 조금씩 바뀔 수 밖에 없었다.
- 이 독특한 계급체계 중에서 한국인 일반에게도 어느정도 익숙한 계급이 있다면 육군의 오장이다. 보통 일제강점기 초기 헌병통치 시기 때 일본군 헌병이 공포의 대상으로 통할 때, 지금도 나이드신 분들은 보통 헌병 오장(켄페이 고쵸) 운운하면서 치를 떤다. 또한 서정주의 친일시 <오장 마쓰이 송가>에서 나온 레이테 만 해전의 마쓰이라고 창씨한 조선인도 오장인 데, 시에서 나온대로 육군항공대이기 때문인 듯. 해군에는 위의 표에서 보듯 오장이라는 계급 대신 이등병조가 이에 상응한다. 애초부터 해군은 엘리트주의라 조선인들 및 외지인들은 군에 잘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특히 장교 임관은 사실상 원천봉쇄했다. 물론 해군 기지, 비행장 건설 및 유지/탄약제조(보통 설영대라는 명목으로) 및 각종 지원 업무를 하는 군속은 조선인이 꽤 많았고, 1943년부터 조선인도 수병 입대가 가능해졌으며, 전쟁 말기엔 카미카제 특공대원으로 쓸 일본 해군 항공대의 조종사로 장교를 소수 뽑으려 하기도 했다. 김재규가 이 과정에 입교했다 일본 항복으로 임관 못하고 귀국했다. 한국 해군에선 "오장"이라는 단어를 한 때 소규모 인원들의 인솔자 등을 뜻할 때 쓰기도 했고(위병오장 등등), 공식 사용은 오래 전에 금지했지만 습관적으로 쓴 경우가 조금 있다.
- 신병이 입대하면 한국이나 타국 군대처럼 별도의 훈련소나 신교대를 거치지 않고 막바로 자대 배치를 받고 자동으로 이등병이 된다. 이등병의 기본 복무기간은 6개월이고, 자대에서 내무생활을 하면서 동시에 6개월간 신병으로서 교육훈련을 받는다. 6개월 기초교육을 마친뒤 성적에 따라 일등병 진급을 결정하고, 웬만한 고문관이 아니고서는 한번에 진급한다. 탈락해도 2차진급때는 100% 진급시켜준다. 훈련병이란 신분이 있다기 보다는 이등병은 주로 신병교육이 하루 일과 인 병사라고 보면 된다. 상등병으로는 1년 근무 후 진급여부가 결정된다. 수병의 경우 일등수병이 되면 실무부대에서 배정된 임무에 맞는 직별 교육을 받을 수 있는데, 이를 이수하면 급여 및 진급에서 우대받았다.
- 병 상호간에는 계급보다도 입대일자 짬순이었고, 월별 동기제가 아니라 연간 상반기/하반기 동기제였다. 같은 계급이라도 선임병에게는 원칙상 '일등병님(一等兵殿, 잇토헤이도노)' 등으로 호칭했다. 부대에 따라선 상등병 등으로 진급해도 입대일이 빠르고 계급이 낮은 이를 선임으로 대하기도, 계급이 오르면 계급 순으로 선후임을 나누기도 하는 등 증언에 따라 이야기가 다르다. 이렇게 1년후 진급하지 못하고 머무르는 일등병들을 이년병, 삼년병, 사년병이라고 비공식적으로 호칭하였고, 실제로도 '이년병님 '등으로 불렀다. 1년차는 초년병이라고 불렀는데, 우리가 흔히 쓰는 "사회 초년병"에서 그 초년병 맞다.
- 2차대전 이전에는 지역별로 연대가 있었고, 대부분 입대자들은 해당 거주지의 연대로 입대했다. 그러다보니 친인척, 선후배들이 섞여있었고, 사회서의 서열과 군대서의 서열이 일치하지 않아 통제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계급이나 짬순에 의한 폭력과 내무부조리를 하사관들이 오히려 조장한 면이 많다. 이것도 지역마다, 부대마다 달라서, 북해도나 동북지방의 부대에서는 구타나 가혹행위가 그다지 많지 않았다고 하니, 케바케라고 할 수 있다.
- 내무반장은 군조 급의 하사관이 맡았고 별도의 공간에서 거주하였다. 따라서 고참 상등병들이 내무반의 실세였다. 내무반장이나 분대장도 하사관이기에 가급적 근무시간 외에는 내무반의 운영이나 실태에 대해 터치하지 않는 편이었기에, 고참 상등병들이 내무반의 실세여서 '밤의 내무반장'이라고 불리워졌다. 다만, 일부 군조, 오장들은 무시하고 24시간 내내 병들을 통제하고 괴롭히기도 했는데, 조선 출신 육군 입대자가 죽어라 버텨서 오장을 달고 난 뒤 밤마다 일본인 병사들을 줘패며 복수했다는 회고도 꽤 있다.
- 내무반장을 일본어로 혼쵸(班長)라고 하는데, 미군의 일본군 포로수용소에서도 '반장'들이 역시나 내무반장 행세를 하고 포로인 병사들을 지휘했다. 또한 6.25때에 한국군도 일본어의 잔재가 많이 남아서 내무반장을 일본식으로 '혼쵸'라고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미군의 기록에 남아있다. 여기에서 동아시아식의 권위있는 소그룹 리더를 'honcho'라고 하는 영어 차용어가 등장하게 된다.
- 한국군과 달리, 일본군은 하사관들도 내무생활을 하였다.(이 원칙은 현재 자위대에서도 동일하다.) 병들은 14-16인실의 내무반을 사용했고, 내무반들 사이에 작은 하사관실이 따로 있었다. 하사관들은 통상 4-6명이 한 내무반을 사용했고, 조장급은 독실을 사용했다.
나이가 있는 조장 이상의 기혼자는 영외거주가 가능했다. 이런식으로 한두명씩 상급 하사관들이 빠져나가면, 운좋게 고참 군조가 독실을 쓰기도 했다.
헌병은 군대 밖의 업무가 많은 관계로 병사들도 영외거주를 하였다.
헌병은 군대 밖의 업무가 많은 관계로 병사들도 영외거주를 하였다.
- 공식적으로는 일등병으로 1년을 채우면 상등병으로 진급할 기회가 있었으나, 중대 당 10%(태평양전쟁 중반부터는 25%로 증가)만이 상등병 진급이 가능해서 고참 일등병들과 신참 상등병들간의 갈등이 심했다. 고참 일등병들에게는 하급자들이 '일등병님'이라고 부르는것 보다는 '고병님(古兵殿, 고참병님)' 또는 일병 연차에 따라 '2년병님', '3년병님'으로 부르는것이 예의였다. 왜냐하면 이런 고참 일병들의 동기가 이미 상병들이기에 상대의 진급 누락에 따르는 열등감을 자극할 수 있기 때문에...... 상등병에게는 그냥 '상등병님(上等兵殿, 죠토헤이도노)'으로 호칭했다.
- 나이에 무관하게 계급, 짬순이었으나, 너무 늦은 나이에 입대한 경우에 고참들과 동기들은 그냥 '~~상'이라고 불렀다. 예컨대 33세에 입대한 어느 병사의 성이 다나카(田中)라면 '다나카상'이라고 고참병들이 우대해주었다. 하급병들에게는 그냥 성만으로 부르거나, 성과 계급명 만으로 호칭했다. 야마모토(山本) 일병이라는 하급병에게는 '야마모토' 또는 '야마모토 일병'이라고 원칙적으로 불렀다. [7]
- 내무반은 한국군과 동일하게 중간에 복도가 있는 좌우침상형이었고, 통상 2개 분대가 한 내무반을 썼다.
- 명목상 군법으로는 구타, 사적 제재가 금지되었으나 실제로는 엄청난 병영 폭력이 발생하였다. 장교들이 근절하려 해도 일본군 영내문화 특성상 장교들이 가급적 내무반 출입을 삼가고 병 자치에 맡겼기에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비단 군대 만이 아니라 일본 사회 전반에 학생 때부터 가정, 학교, 사회, 직장 등에서 폭력이 만연하였기에 영내 가혹행위도 그 연장선으로 보는 수준이었다.
지휘관들과 하사관들은 가급적 상처가 나지 않게 구타하고, 너무 심하게 하지는 않을것을 음성적으로 주문하였다. 원칙은 구타 금지니까.......
만약 사망, 자살, 탈영 사고가 나면 헌병대가 출동하고, 이렇게 되면 간부들의 인사고과에 그대로 반영되기 때문이었다.
만약 사망, 자살, 탈영 사고가 나면 헌병대가 출동하고, 이렇게 되면 간부들의 인사고과에 그대로 반영되기 때문이었다.
- 취사병을 따로 두지 않았고, 취사당번을 두었다. 돌아가면서 취사를 하는게 원칙이나, 요리에 소질이 있거나 훈련에 적응을 못하면 그냥 붙박이로 취사당번이 보직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되면 적절한 교육훈련을 받을수 없어서 상병 진급은 포기해야 했었다.
영내에 사병식당이 따로 없었고, 각 내무반별 당번들(주로 쫄병들)이 취사장에 와서 식사를 타가서 내무반에서 먹었다. 쫄병들은 하사관실로도 식사를 배달했었고, 하사관과 병졸 간의 메뉴는 다르지 않았다. 병졸은 식비가 무료였으나, 하사관들은 일정 금액의 식비를 급여에서 공제하였다.
장교들은 자비로 장교식당을 두었고, 민간업자들이 주로 운영하였다.
2차대전 이전에는 일본군 짬밥이 꽤 맛있고 양도 많았으나, 실전으로 가면서 쌀만 지급하는 등의 병크로 영양실조가 만연하였다.
장교들은 자비로 장교식당을 두었고, 민간업자들이 주로 운영하였다.
2차대전 이전에는 일본군 짬밥이 꽤 맛있고 양도 많았으나, 실전으로 가면서 쌀만 지급하는 등의 병크로 영양실조가 만연하였다.
- 장교 휴게실, 하사관 휴게실이 따로 있었고, 병사들은 PX를 이용했다. 그러나 항상 고참병들이 득실대고 있어서 쫄병은 감히 들어가기가 애매해서... 관행상 이등병들에게는 고참병들이 이불속에 몰래 과자를 넣어주었다.
- 신병들과 고참병을 1대1로 맺어주었는데, 이를 '침대전우'라고 한다. 고참병은 신병을 책임지고 가르쳤고, 때로는 패고 굴리고, 다른 고참들의 가혹행위를 막아주기도 하였다. 침대전우를 누구로 만나느냐에 따라 군생활이 피기도 꼬이기도 했다.
- 의외로 외출은 자유로왔다. 사고치지만 않았으면 주말에 외출이 가능하였고, 외박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금지되었다. 그러나 하사관들은 주중에는 자유롭게 외출했고, 주말에는 당직근무만 없으면 외박도 가능했다. 물론 전시에는 그런거 없다.
- 하사관이 부족하여 고참 상등병 중에서 분대장이나 하사관의 보직을 맡아야 할 병력들을 '오장근무 상등병'으로 따로 뽑았고, 약식 하사관 교육을 거쳐 하사관으로 활용했다. 후에 병장 계급이 탄생하자 사라졌다가, 전쟁 말기에 역시나 하사관 부족현상으로 '오장근무 병장' 제도가 재탄생한다.
- 한국군처럼 장교, 준사관, 하사관은 모두 '간부'였다. [8] 이것 역시 하사관 부족현상으로 인해 무관 대우를 한 것. 그러나 지금의 자위대에서 간부는 오직 위관급 이상의 장교만을 의미한다.
- 일본군에서 하사관은 병 계급의 연장선이 아닌 장기 복무하는 직업군인으로 보았다.[9]
원래는 병 계급의 연장선이었으나, 1차세계대전 이후 호황을 누리고 경제력이 상승하면서 3D업종으로 구분되는 하사관 지원을 기피하는 풍조가 만연하여 별도의 하사관 입대제도를 만들었다. 우선 1년간 병 생활 후, 육군교도학교(하사관학교)에서 1년간 교육받고 임관하면 4년 동안 의무 복무를 해야 했으며, 이 기간이 지나면 재심사에 통과해야지만 계속 복무 할 수 있었다. 상술한 대로 하사관의 제일 윗 계급인 준위의 정년이 40세다 보니 하사관들의 진급 속도가 빨랐는데 보통 20대 후반이면 조장(상사)을 달았다. 따라서 한국군처럼 40대 이상의 상,원사나 준위가 나올 수 없었다.[10]
다만 하사관으로 복무하는 현역들, 그리고 이 신분으로 전역한 예비군역들에게 혜택이 없지는 않았다. 우선 현역 하사관들은 병들과는 따로 공간을 쓰고[11] 준위쯤 되면 장교들도 무시하지 못했으며, 전역자들의 경우 12년 이상 복무하면 소정의 은사금이 나왔는데 이게 액수가 꽤 커서 시골에 땅 살 정도는 되었다고 한다. 설렁 그 정도까지 복무하지 않아도 하사관 출신이라면 경찰같은 공무원 시험에서 직접적인 혜택을 받았으며, 군국주의 일본 제국이었던 만큼 다른 일자리를 구하기도 쉬웠다. 다만 8~90년대 이전의 한국군처럼 하사관들을 무시하는 풍조는 존재하였는데, 육군의 경우 시골 출신들이 많고, 아무래도 배우거나 부유한 집의 자제들이 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은근슬쩍 하사관 무시하는 말들도 떠돌고는 했다. 그 예시로 '멍청한 놈은 하사관 지원하는 놈,' '근데 더 멍청한 놈은 그걸 또 한번 하려고 하는 놈(즉, 4년 연장 복무를 하려는 이들)' 이라는 식의 말들도 사회에서 떠돌았다고 하고, '복숭아나무 밤나무는 3년, 감나무는 8년, 바보 조장(상사)은 12년' 이라는 말도 있었을 정도로 사회에서 할 일 없는 놈들이 저기서 말뚝박고 있는다더라.' 등의 인식도 있었다. 다만 일본 해군은 이러한 풍조가 덜했다. 애초에 일본 해군은 엘리트주의를 추구했기 때문에 입대 자체가 육군에 비해 힘들었다. 게다가 기술군인 해군의 특성상 고학력자들이 많이 필요했기 때문에 육군처럼 시골 출신 소학교 졸업자 출신의 하사관은 존재하기 힘들었다.[12]
다만 하사관으로 복무하는 현역들, 그리고 이 신분으로 전역한 예비군역들에게 혜택이 없지는 않았다. 우선 현역 하사관들은 병들과는 따로 공간을 쓰고[11] 준위쯤 되면 장교들도 무시하지 못했으며, 전역자들의 경우 12년 이상 복무하면 소정의 은사금이 나왔는데 이게 액수가 꽤 커서 시골에 땅 살 정도는 되었다고 한다. 설렁 그 정도까지 복무하지 않아도 하사관 출신이라면 경찰같은 공무원 시험에서 직접적인 혜택을 받았으며, 군국주의 일본 제국이었던 만큼 다른 일자리를 구하기도 쉬웠다. 다만 8~90년대 이전의 한국군처럼 하사관들을 무시하는 풍조는 존재하였는데, 육군의 경우 시골 출신들이 많고, 아무래도 배우거나 부유한 집의 자제들이 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은근슬쩍 하사관 무시하는 말들도 떠돌고는 했다. 그 예시로 '멍청한 놈은 하사관 지원하는 놈,' '근데 더 멍청한 놈은 그걸 또 한번 하려고 하는 놈(즉, 4년 연장 복무를 하려는 이들)' 이라는 식의 말들도 사회에서 떠돌았다고 하고, '복숭아나무 밤나무는 3년, 감나무는 8년, 바보 조장(상사)은 12년' 이라는 말도 있었을 정도로 사회에서 할 일 없는 놈들이 저기서 말뚝박고 있는다더라.' 등의 인식도 있었다. 다만 일본 해군은 이러한 풍조가 덜했다. 애초에 일본 해군은 엘리트주의를 추구했기 때문에 입대 자체가 육군에 비해 힘들었다. 게다가 기술군인 해군의 특성상 고학력자들이 많이 필요했기 때문에 육군처럼 시골 출신 소학교 졸업자 출신의 하사관은 존재하기 힘들었다.[12]
사관학교 2학년을 마치면 6개월간 상등병으로(병장제도가 생긴 후로는 병장으로) 병 체험실습을 해야 했고, 그 후 2년간 더 수학한 뒤 졸업하면 막바로 소위를 다는게 아니라, '견습사관'이라 하여 조장/병조장으로 6개월을 견습생활 한 뒤(준위/병조장 제도 생긴이후는 준위/병조장으로), 해당 부대 장교단의 승인을 얻어 임관하였다. 즉, 사관학교 입학후 4년뒤 장교가 되는게 아니라, 5년뒤 장교가 되는것이었다. 그러나 포병, 공병 병과는 5년제여서 소위 신분의 생도가 되기도 했다.
이런 연유때문에 일본 애니메이션 등에서는 사관학교를 졸업하면 준위나 상사가 되는것들이 나오는데, 실제로 일본인들 다수가 사관학교 나오면 준위로 임관한다고 알고 있다.
학사장교에 해당하는 갑종간부후보생제도도 일본군에서 유래했는데, 이것 역시 일단 병졸로 입대, 일정기간후 장교 양성교육, 그 후 2-6개월간 하사관으로 견습복무 후 정식 장교가 되었다.
이런 연유때문에 일본 애니메이션 등에서는 사관학교를 졸업하면 준위나 상사가 되는것들이 나오는데, 실제로 일본인들 다수가 사관학교 나오면 준위로 임관한다고 알고 있다.
학사장교에 해당하는 갑종간부후보생제도도 일본군에서 유래했는데, 이것 역시 일단 병졸로 입대, 일정기간후 장교 양성교육, 그 후 2-6개월간 하사관으로 견습복무 후 정식 장교가 되었다.
- 해군 비전투병과 장교로 복무하는 것은 전쟁 당시 유력자 집안의 학력 높은 사람들이 가는 전형적인 유사 병역 면탈 코스였다. 특히 주계 병과(해군에서 보급과 행정, 경리를 맏는 병과)의 경우에의 경우 육군과는 다르게 군항 도시에서 근무가 가능했고, 시작부터 소위 대우를 받는 것이 가능했으며(이는 해군의 다른 비전투병과도 마찬가지였다.)[13] , 당시 해군 내의 학벌만능주의 풍조로 인해 우수한 대학을 나온 이들이 고참 수병들이나 하사관들에게 무시당할 가능성도 적었다. 이는 해군이 기술군인지라 업무 분화가 육군보다 더 심했던 것도 큰 영향을 미쳤다. 설령 군함에서 근무한다고 해도 전투배치시 함교에서 전투 일지를 작성하고, 함선이 공격을 받아 침몰하기 시작했을 때 히로히토의 사진과 일지들을 가지고 군의관과 함께 승조원들 중 가장 먼저 퇴함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보통 장교들은 사병들보다 늦게 퇴함한다는 사실로 볼 때, 이는 엄청난 생존률을 보장해주는 것이다.
- 일본의 관료제 및 군국주의 문화의 특성상 군인우위정책이 시행되다보니, 군인들이 여타 공무원들 위에 군림하는 현상이 심각하였다. 장교는 주임관이었는데, 이는 고등문관시험 출신과 비슷한 대우였다. 당시 일본육사를 예로 들자면 우리나이로 고3에 해당되는 19세의 봄에 입교하면 2년의 교육을 받고 21세 되는 해에 견습사관으로 임용되어 6개월을 실무수습으로 보낸 후 21세 되는 겨울에 정식 소위로 임용이 되는 식이었는데, 우리나이 21세, 만20세에 주임관 대접을 받는다는건 대단한 일이었다. 경찰에 비해 군인들의 직급이 우위였고, 이는 일본군 헌병이 경찰을 무시하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경위는 흔히 장교의 중, 소위와 비교되지만, 한국 경찰의 경위에 해당되는 일본 경찰계급은 경부, 경부보인데, 이들은 주임관이 아니고 판임관이다. 판임관은 하사관이다. 순사는 병 계급과 같이 보았다.
[1] 45식 군복 및 5식 군복은 견장형 계급장을 이용해 계급을 표시하고, 98식 군복은 카라(옷깃)장 형식으로 부착해 계급을 표시한다.[2] 소매에 자수를 놓는 수장(袖章) 형식의 계급장이다.[3] 우측에 있는 원수 계급장은 일종의 지휘관 휘장 비슷한 것이다. 일본군의 원수는 칭호라는 점을 감안해 보면 저 계급장(?)의 형태가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알 수 있을 것이다.[4] 해군 창설 이래 해체시까지 특무사관 출신 소좌는 겨우 수십 명, 중좌 진급자는 한 자릿수에 불과했고 대좌 이상 진급자는 전무했다.[5] 그래서 일본제국군을 황군이라고도 부르며, 일본제국 육군의 군복 색도 황색인 것.[6] 단 조선인민군/계급장은 소련군의 영향을 받았다.[7] 나중에 예비역, 후비역들이 무수히 들어오자 엉망진창이 되었다고 한다.[8] 대부분 국가에서 부사관은 간부로 인정받지 못한다.[9] 참고로 이전에는 어째 이런것만 본받냐고 취소선이 그어져 있었는데, 현대적인 군대에선 이게 맞는 것이다. 당장 서방의 국가들이 군사 강국이 된 이유 중에 하나도 엄격한 선발을 거쳐 뽑은 부사관들에게 상당한 권한을 주어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여 군의 허리를 탄탄하게 함과 동시에, 장기 복무하는 부사관들에게 제대로 된 대접을 했기 때문이다. 반면 구 공산권 국가들은 부사관들을 대개 2년 이내로만 복무하는 징집병 계급의 연장선으로 보고 제대로 된 교육 없이 짬만 좀 차면 부사관 계급을 달아주었는데, 이는 계급에 비해 떨어지는 숙련도와 장교 업무의 가중화를 불러왔고, 곧바로 전투력 하락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현상은 지금까지도 계속되어 구 공산권 국가들의 고질적인 단점이 된 동시에, 이들 국가들이 서방 국가들에 비해 떨어지는 군사력을 가지는 원인이 되었다.[10] 하지만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징집률과 소집률이 몇 배로 뛴 결과 예비역 내지 후비역(민방위)였다가 다시 현역으로 복귀한 경우에는 그런 경우가 종종 있었다.[11] 허나 이는 큰 단점이 되었는데 일본군 하사관들은 자신들을 장교만큼은 아니지만 병들과는 다른 간부로 인식하게 되어 병들과의 간극이 커져버리고, 따라서 이들의 주요 역할인 병과 장교 사이를 연결하는 허리 역할을 제대로 해주지 못했다. 따라서 장교와 병사 상호 간에 간극이 심한 일본군에서 또 다른 갈등만을 낳게 되었다. 이는 대한민국 국군에서도 그대로 재현되고 만다.[12] 육군 하사관의 자격은 사칙연산을 할 수 있고, 한자를 자유자재로 읽거나 쓸 수 있는 수준에 불과했지만, 해군 하사관은 최하 중학교 졸업이었다. 당시 중학교는 지금과 달리 5년제여서 중고등학교 통합과정이었다. 애시당초 글씨 겨우 읽을 수 있을 정도의 지식수준으로는 해군에 지원해 봐야 합격할 수도 없었다.[13] 반면 육군은 훈련받는 동안의 계급은 병이다 보니 간부후보생이라도 할 지라도 몇 개월 동안 병, 하사관 계급으로 군 생활을 해야 하는데 여기서도 가혹행위가 발생했다.[14] 천황이 친히 임명하는 관직. 친임관 임명시에는 천황 주재 임명식이 거행되었다.[15] 천황이 칙명을 내려 총리가 임명하는 관직. 칙명서 교부를 통한 임명식이 이루어졌다. 또한 칙임관까지는 천황이 임명하는 고위관료이므로 '각하'라는 호칭을 붙여야 했으며, 이들의 몸에 해를 가하는 것은 곧 이를 임명한 천황에 대한 불경이자 권위에 대한 도전과 마찬가지로 받아들여졌으므로 계급 고저 상관없이 구타가 일상이던 일본군에서도 공식적으로 구타가 면제되는 특권(?)이 보장되었다. 실제로 주임관인 대좌만 하더라도 군 계급상으로는 상위 10%내에 속하는 높은 계급이지만 장관급에게 맞는 것은 다반사였다.[16] 계급상으로는 칙임관이지만, 보임 직책에 따라 친임관인 경우도 있었다. 사단장급 이상의 지휘관은 계급 무관히 친임관이었고, 주요 참모들도 그러했다. 사단장에서 타 참모보직으로 이동시 친임관의 지위를 잃는데, 꼼수를 써서 겸직 등으로 친임관이 되기도 했다. [17] 총리가 천황에게 상주하여 임명을 허락받는 관직. 주임관까지는 고등관이라하여 고위직으로 분류되었다.[18] 비 고위공무원단[19] 당시 구제중학교와 동급이었던 사범학교의 교두도 동급…[20] 총리가 판단하여 임명하는 관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