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청교체기
明淸交替期
1. 개요
후금이 명나라를 공격한 1618년부터 명나라가 멸망한 1644년, 또는 남명이 멸망한 1662년까지,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 있었던 일련의 패권다툼을 이르는 말. 직후 벌어졌던 삼번의 난과 정씨 왕국 등 한족의 반란을 포함하여 1681년 또는 1683년까지로 보기도 하는 편. 명청전쟁(明淸戰爭), 혹은 이 시기를 포함하여 크게 명말청초(明末淸初)로 부르기도 한다.
2. 사건의 경과
2.1. 명나라의 쇠퇴
1368년 건국된 명나라는 활발한 대외원정과 내정개혁으로 발전해 나갔으나 명 4대 암군의 등장으로 점점 쇠퇴하기 시작하였고 여진족에 대한 통제가 해이해졌다.
2.2. 후금의 성장
1588년 건주여진을 통일한 누르하치는 임진왜란이 발발한 시점에는 이미 거대한 세력으로 커진 뒤였다. 당시 누르하치는 조선에게 원군파병을 제안하는 등 명과 조선을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 세력확장을 시도하고 있었으며, 명이 요동지역 군대를 조선으로 파병한 사이 해서여진을 장악하는 등 점차 위협적인 세력으로 커졌고 1616년 후금 건국을 선포하며 본격적으로 명나라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2.3. 전쟁의 시작
1618년 4월, 후금군이 명나라 푸순성을 공격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후 1619년 사르후 전투의 대승과 함께 마지막 남았던 해서여진의 예허부까지 복속시키며 여진을 완전히 통일한다.
2.4. 명군의 반격
1626년 요동원수 원숭환이 이끄는 명군이 영원성 전투에서 승리하여 산해관 북쪽의 요동 방어선을 구축하는데 성공하였고, 이 전투에서 누르하치가 부상을 당해 사망하게 만드는 성과를 거둔다.
2.5. 몽골과 조선의 복속
몽골의 부족들은 누르하치의 여진족이 만주지역을 휩쓸자, 당시 몽골의 칸이었던 릭단 칸을 버리고 차례로 투항하기 시작했다. 이에 여진은 몽골의 코르친(호르친) 부와 손을 잡고 몽골 대칸의 차하르 부를 공격하였고, 1635년 릭단 칸의 아들인 에제이 칸이 옥새를 바치고 항복하면서 1636년 대청국을 선포한다.
또한 청은 조선을 침공해 정묘호란을 일으켰으나 만족스러운 답을 듣지 못하자 병자호란을 일으키며 조선을 완전한 조공국으로 두게 된다.
2.6. 이자성의 난과 명의 멸망
한편 명나라에서는 1627년 이자성의 난이 일어났고 같은 해에 즉위한 숭정제는 기울어진 명조를 되살려보려 노력했으나 때는 너무 늦었다. 결국 1644년 4월 25일 이자성군이 북경을 함락하였고 숭정제가 자결하면서 명나라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설상가상으로 1642년 명군이 송산 전투에서 패배하여 산해관을 제외한 북방 방어선이 붕괴되어 청군이 산해관 앞까지 도달하였다.
2.7. 오삼계의 투항과 청나라의 북경 입성
산해관을 지키고 있던 오삼계가 청에 투항하였고, 곧바로 청군과 오삼계 연합군은 북경을 공격하였다. 이자성은 이에 대항했으나 참패하였고 자금성에 불을 지르고 도주해버렸다. 이후 청나라는 이자성의 잔존세력을 정리하고 본격적인 중국 통치를 시작하였다.
2.8. 남명의 멸망
남부지역에서 잔존해있던 남명 세력은 1662년 강희제에 의해 멸망한다.
2.9. 부록 : 삼번의 난과 정씨 왕국
오삼계를 비롯한 한족은 이후에도 부흥운동을 벌였지만 결국 진압된다. 삼번의 난 과 정씨 왕국 참조.
3. 영향
3.1. 중국
청은 원나라에 이어 중국 역사상 두 번째로 중국대륙 전체를 정복한 이민족 왕조가 되었고 한족들은 몽골족에 이어 만주족을 섬겨야만 했다.
청나라가 중국대륙을 장악하고 나서 한족들을 통제하기 위해 자신들의 풍습인 변발을 하도록 강요하였고 저항하는 한족들은 탄압하였다. 반대로 가혹한 통치로 인해 북쪽으로 쫓겨난 원나라의 교훈을 참고했는지 한족도 과거를 볼 수 있게 해주는 등의 유화책도 실시하여 중국을 200년 넘게 통치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족들의 반란을 우려하여 성장을 억누르기 위해 화약무기 개량에 소극적이었고 외국과 최소한의 교류를 제외한 쇄국정책을 고수한 결과 근대화에 뒤쳐져 나중에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문자의 옥 등 한족 탄압정책도 지속적으로 실시하면서 한족들이 겉으로만 청에 충성하고 속으로는 멸만흥한의 사상을 품으면서 백련교도의 난과 태평천국의 난 등 대규모 반란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한편 청나라는 명을 정복하고 나서도 지속적인 영토확장을 실시하여 동쪽으로는 연해주, 서쪽으로는 티베트와 위구르, 북쪽으로는 몽골을 장악하여 현재 연해주일대[1] 와 외몽골[2] 을 제외한 오늘날 중국 영토의 원형을 확정시켰다.
3.2. 조선
명청교체기는 조선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임진왜란의 피해를 수습하던 광해군은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한 후금과의 마찰을 피하려 중립외교를 취했고 이것이 명과의 재조지은을 중시하던 서인 정권이 인조반정을 일으키는 명분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친명배금 정책을 취하던 인조정권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게 되고 삼전도의 굴욕을 받는 동시에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등 왕자들과 수많은 조선인들이 청으로 끌려갔다.[3]
1644년 명이 멸망하자 이제는 조선이 유일한 중화임을 자처하는 이른바 소중화사상이 조선 전역에 팽배하게 되고 청을 정벌하자는 북벌론까지 등장하게 되었다.
하지만 북벌론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효종이 승하하고 현종, 숙종 치세를 거치면서 북벌론은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이후 청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추구해야 한다는 북학론이 등장하였다.
4. 여담
애기공룡 둘리를 패러디한 애기명나라 둘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