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태신앙

 

1. 개요
2. 종교생활의 특징과 문제점
2.1. 세뇌 논란
3. 종교별 사례
3.1. 모태신앙을 인정하지 않는 종파
3.2. 모태신앙을 인정하는 종파
4. 관련항목


1. 개요


'''Cradle'''[1] Catholic/Anglican/Lutheran/Presbyterian/Methodist, etc 출처
어머니(胎) 안, 다시 말해 뱃속에 있을 때부터 종교를 접해 신앙을 가지는 것. 자기 의지나 결정권과 무관하게 태어나면서부터 부모나 보호자에게서 전수받은 신앙을 가리킨다. 일반적으로는 모태신앙이라 하면 모든 종교가 다 해당이 되나 주로 유일신교(특히 기독교)에서 모태신앙이라 많이 하며 타 종교들의 경우에는 모태신앙이라고는 잘 하지 않는다.
기독교 기준으로, 모태신앙을 가진 신자들 거의 대부분은 유아세례[2]를 받았으며, 가톨릭의 경우 10살 전후로 첫 영성체를 했을 것이며, 부모로부터 성당에서의 복사 활동을 권유받 경우도 있다.
종교의 특성상 인간의 인격형성이나 경험, 지식의 축적 이전에 선입관을 주입, 형성시켜 두는 것이 교세확장에 유리하므로 은연중에 이런 모태신앙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만연해 있다. 그 때문에 일부 모태신앙으로 종교생활을 시작했다는 것에 대한 부심형성되는 경우도 다소 있다. 자기가 먼저 '나는 모태신앙인데~' 식으로 언급을 하는 경우는 상당수가 자부심을 가지고 은연중에 입에 붙은 경우다. 일부 막장스런 교회에서는 목사 자녀, 장로 자녀, 집사 자녀 서열로 똥군기를 잡는다는 오싹한 괴담(?) 같은 이야기도 돈다지만, 이것도 사실 모태신앙 여부와는 좀 거리가 있는 문제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보통 모태신앙들은 교회에서 주변 사람들에게 유독 과도한 기대를 받기 때문에 청소년 시절에 "이건 내 진짜 모습이 아닌데..." 하면서 방황하기도 하며,[3] 한편 아무개 권사 아들, 아무개 장로 딸이라면 당연히 이 정도는 해야지 하면서 신앙페이(…)를 강요받기도 한다. 게다가 교회 어른들이 죄다 자기 갓난아기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고 자기 부모님하고도 친한지라 상당히 나이를 먹고서도 어린애 취급당하는 등 오히려 또 다른 부담스러운 면이 있다.
하지만 위의 모태신앙에 대한 자부심과는 반대로 종교 안팎에서 모태신앙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많다. 종교결정권을 뺏긴 피해자라고 여기는 것인데, 반종교주의자나 무신론자들 위주로 그렇게 생각할 것 같지만, 일부 기독교 교단이나 신자들도 그렇게 여기기도 한다. 신자들은 여러 개인적 경험과 사고로 신앙을 갖게 되는 길이 있는데, 모태신앙은 이 단계를 거치지 못하기 때문에 깊은 종교 생활을 할 수 없다고 믿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갖는 부모들은 보통 자식이 10대 후반이 될 때까지 종교를 강요하지 않는다.
일부 선진국들에서 관찰되는 폐쇄적인 종교공동체 (ex. 아미쉬) 혹은 하레디 공동체 탈출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전체 모태신앙으로 잘못 일반화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폐쇄적인 공동체의 경우, 모태신앙으로 인해 인간관계가 얽힌 경우 벗어나고 싶어도 그 공동체에서 벗어나기가 힘들어지며, 이들을 위한 심리치료나 쉼터 등 도움을 주는 단체들이 선진국들을 중심으로 널리 퍼져 있다. 국내 천주교와 개신교계, 유럽권 기독교계는 자녀가 모태신앙임에도 교회출석률이 저조하여 교세가 쇠퇴하고 있거나 쇠퇴가 예상되는 상황이다.
모태신앙과는 다르지만, 사춘기 이전에 자발적으로 신앙을 가진 경우가 흔치 않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이런 경우에는 아동기에 자발적으로 신앙을 가진 경우라 종교 정체성이 뿌리 깊게 박히는 편. 부모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신앙을 가지게 된 모태신앙인보다 그 정도가 더 할 수도 있다. 예컨데, 초등학생 시절에 자발적으로 개신교에 입교한 사람이 훗날에 천주교로 개종했어도 그 사람 마음속 뿌리 깊은 곳에 개신교 정체성(의 잔재)이 남아있는 식으로.

2. 종교생활의 특징과 문제점


문제는 종교라는 것이 세습, 상속되는 신분이나 재산같은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이다. 아무리 어릴 때 부터 종교적으로 교육되어 온다 할지라도 종교의 핵심 교리들은 난해하거나, 가치관이 엇갈리는 교리가 많다. 종교를 처음부터 가지고 있다고 해서 종교 자체를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보장은 없으며, 종교가 바라는 인간상이 이루어지지도 않는다. 오히려 십중팔구 종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관습적인 모습만을 몸으로 습득해서 의미도 모른 채로 표출하게 된다.[4][5]요컨대 '''종교적 "의례"에는 익숙할지 몰라도 진정한 "신앙"을 갖게 될지는 의문이고, 그 "신앙" 이 100% 동일하게 전수될지도 보장할 수 없다.''' 개중에는 정반대로, 자신의 모든 도덕윤리의 잣대를 세속과는 한참 동떨어진 혼자만의 종교적 관점으로 삼는 경우도 있다지만, 이 역시 자신이 믿는 바에 대해 충분한 지적인 깊이를 갖고 고찰하지 않은 이상에야, 자기 종교의 가르침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해 본 것에 불과하다. 모태신앙이어도 인격형성의 중요과정인 '''사춘기'''라는 과정이 있기에, 이 단계에서 떨어져나가 원래 부모가 원하던 종교상에서 반대되는 종교관을 가지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20대 중후반이 넘어가게 되면 모태신앙들은 본격적으로 "내가 믿는 것이 내가 처한 현실에 비추어 볼 때 과연 어떤 의미를 갖는가" 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는데,[6] 이러한 내면적인 투쟁을 종교심리학에서는 종교중립적 단어로서 종교적 분투(religious struggle)라고 부른다. 그 결과 기존의 신앙이 강화되거나 체계화될 수도 있지만 많은 경우는 냉담자의 길로 접어들곤 하며,[7] 개종이나 무신론자로 전향하는 사례도 나온다. 세속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모태신앙은 썩 "수지맞는" 장사는 아닐 수 있는 것이다.
모태신앙이 신자간의 계급적 격차 같은 것으로 인식되는 경우에는 도덕적 해이로 이어지기도 한다. 다시말해 정말 의미도 모르고 맹목적으로 '해왔으니 한다' 식의 종교관이 형성되거나, 거짓되거나 비뚤어진 형태의 믿음이나 숭배로 이루어진다는 것. 전자의 경우 시간, 세대가 좀 지나면 전통이나 관습 정도로 순화되기도 하지만 후자의 경우 주변 사람에게 피해를 주거나 기반이 되는 종교 자체가 변질되어 전승되는 형태로 나타난다.
여러 심리적 악영향이나 종교적 의의 때문에 종교인들 사이에서도 모태신앙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내는 경우가 많다. 현직 목사가 쓴 한국교회 모태신앙에 대한 비판서 하지만 그러면서도 모태신앙을 부추기는 행위(유아축복, 유아캠프 등)가 이루어지는 이유는 실질적, 잠재적인 교인의 확보 및 그로 인한 수익, 교세, 전도수단이 확보되기 때문이다. 모태신앙이었다가 냉담자나 무신론자가 되는 경우들이 있다고는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이미 모태신앙인 사람이 믿음을 유지하도록 하는 것과 비신자인 성인들에게 새로운 믿음을 전도하는 것 중에 어느 쪽이 더 쉬울런지는 명백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봐도 교세확장에 유리한 쪽이 어느 쪽인지는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메이저 종교에서 모태신앙이란 개념을 포기하는 일은 일어나기 힘들다고 봐야 할 것이다.

2.1. 세뇌 논란


주입받은 교리로 인한 구속력이 상당하다는 견해도 있다. 모태신앙은 선택권없이 주입되어 어릴 때부터 평생동안 ‘교육’, 나쁜말로하면 ‘세뇌’를 받았기 때문에 상당히 벗어나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개 다음과 같은 이유들을 들면서, 모태신앙자들이 비종교인 혹은 무신론자로 각성(?)하게 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첫번째로 "의심하지 말라"는 구절 때문이다. 이 구절 때문에 모태신앙인들은 현대인이라면 당연히 갖추어야 할 비판적인 사고방식을 애초에 정상적으로 갖지를 못한다고 한다. 어떤 종교집단이든 일평생 다니다 보면 문득 드는 의문점과 세속의 비판으로부터 '''절대로''' 자유로울 수 없는데, 이 구절이 주박이 되어 기독교에 대해서 의문을 품고 다시 생각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모태신앙인들은, 때로 의문을 품을 때도 있지만 ‘의심하지 말라’라는 구절이 자꾸 귓가에 맴돌아 거기서 더 나아가지 못한다고 한다. 모태신앙으로 자라면, 이런 식으로 합리적으로 생각할 줄 아는 능력을 상실한다. 의심이 죄라도, 한번 해보고 회개하면 되지 않냐?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거기에 대한 대책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부 교회에서는 ‘죄를 지으면 회개하였더라도 그 행동 자체는 지옥에 간다’ 라는 형이상학적인 논리를 내세운다. 회개에 대한 모순을 이 논리로써 대응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 모태신앙이 벗어나기 힘든 또다른 이유는 '공포심'이다. 신앙인으로 남으면 달콤하고 행복한 미래가, 벗어나면 고통만이 있다는 두려움이다. 모태신앙인들은 평생을 자신들이 특별하고 선택받은 축복받은 사람이라고 주입받으며 자라왔다. 그렇게 태어났을 때부터 들어왔고 믿어왔던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 완전히 생소한 길을 걷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 너무 불안하고 절망적인 것도 있고, 혹여 벗어나고 싶어지더라도 "죽고 보니 진짜 하나님이 있으면 어떡하지?"하고 두려워져서 더 이상 생각하기를 거부하기도 한다.
셋째는 모태신앙인들은 어렸을 때부터 믿고 따라왔던 주변 사람이 대부분 신실한 기독교인이다. 모태신앙인들은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자라왔기 때문에 믿고 의지하는 지인 대부분이 기독교인인 경우가 많기에, “이때까지 내가 믿고 따라왔던 신뢰하던 어른들이 틀린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감히 하기가 어렵다. 또한 신앙을 버렸다가, 혹시라도 그간 알고 지내온 다른 신앙인들과 인간관계가 끊겨서 사회적으로 매장될까봐 두려워 용기를 내기 어려워한다.

넷째는 '''교리에 대한''' 양심이다. 모태신앙인들은 비종교인에게는 없는 또 하나의 양심이란 것이 형성되는데, 교리에 대한 양심이 그것이다. 이 또한 어렸을 때부터 교육(혹은 '세뇌'라고 비판받던 그것)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교리를 어겼을 시[8] 양심이 찔리는 것이다. 여기서 어렸을 때부터 교육받아온 모태신앙인들은 누구보다 양심의 가책이 강하게 작용된다. 모태신앙인들은 양심의 가책이 ‘하나님 존재의 증거’라고 주장을 하기도 하는데, 사실 양심이란 것은 교육에 의해 작용하는 감정일 뿐이다. 어렸을 때 어른들이 잘못된 것과 옳은 것의 기준을 정해 주입하고 나면, '잘못된 행동'을 했을 시 양심이란 감정이 작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역설적이게도 마귀의 존재가 기독교에 있어 최대의 방어막이다. 조금이라도 기독교에 비판적이면 마귀의 역사[9]라고 교육하는 것이다. 비종교인 친구가 마귀가 든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이 글마저 마귀의 역사라고 생각한다면 성공적으로 세뇌받은 모태신앙인이다. 심한 경우, 기독교에 반대되는 의문과 생각과 유혹이 들어도 그 모든 것을 '마귀가 나를 현혹하여 이런 생각을 들게 하는 중이다!'라고 여기고 더 이상 생각하기를 거부하고 원천차단하기도 한다. 이 단계까지 왔다면 그냥 개독 그 자체라, 벗어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런 종교비판적 관점은 실제로 응집력이 강한 컬트 같은 종교공동체의 아동 및 청소년들을 설명하기에는 적절할 수 있으나, 그 이외의 경우에는 설명의 타당성이 떨어진다는 한계가 있다. 물론 가기 싫은 교회에 억지로 보내는 것이 '''대단히 큰 문제인 것은 맞지만''' 그것이 종교적 양육의 본질은 아니며,[10][11] 성인이 된 한 개인이 종교를 버릴 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내적인 갈등도 물론 있지만 부모와의 언쟁과 같은 외적인 갈등이 훨씬 큰 경우가 많다. 사실 이런 문제들은 종교적 양육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자녀의 의사를 무시하고 부모에게 절대 복종할 것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권위주의적 양육방식이, 종교에 헌신적인 국내 중노년층에게 만연해 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당장 십계명 중에서 사람을 향한 계명 중 가장 먼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구절이 나오고, 같은 모세오경레위기 19장 3절에는 한발 더 나가 '''부모를 경외하라'''는 구절이 나온다. 성경에서 하나님 이외의 대상을 경외하라고 기록된 유일무이한 구절이다. 또한 사무엘상에서는 사울 왕이 아말렉 족속들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소와 양들을 남기자 사무엘이 사울에게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사무엘상 15장 22절)고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많은 기독교인 부모들이 이 구절들을 악용하여 자녀들에게 부모의 신앙, 사상, 이념, 직업을 이어받을 것을 강요한다.[12] 그 이외에 '''종교의 세뇌 효과 드립은 대한민국이 정교일치 사회이거나(...) 아니면 극도로 폐쇄적인 밀교 공동체가 아닌 이상에야 큰 의미는 없다.'''
반드시 유의해야 할 것은, 세속사회와의 접촉을 어른들이 최대한 차단하는 아동학대에 준하는 상태에서 각종 종교적 협박과 으름장으로 세뇌의 효과를 최대한으로 달성한 사례들만을 가지고 모든 모태신앙자들의 경험을 일반화할 수 없다는 것이다. 상기됐던 바- 의심에 대한 거부감, 새로운 시각에 대한 불안, 인적 네트워크, 교리를 어길 때의 양심의 가책, '마귀의 역사' 운운은 전부 위 문단에서 설명한 원인으로 인해 나타난다. 이와 같은 종류의 사회화는 비단 종교뿐만 아니라 '''권위주의폐쇄성'''을 드러내는 사회적 공동체 내에서라면 어디서든 나타날 수 있다. 이를 뒤집어서 말하면, 똑같이 모태신앙인데도 부모 및 주변 환경으로부터 '''개인의 사상의 자유를 보장받으면서 세속 사회와 전방위적으로 접촉했던''' 모태신앙자들은 위의 문제점을 거의, 혹은 전혀 드러내지 않는다. 꼭 장대익 교수처럼 신앙을 버리지 않더라도 김용민이나 진중권처럼 합리적인 차원의 종교비판을 하는 사례도 있다.
또한 모태신앙이 그처럼 개인의 의식형성에 결정적이라면 어째서 21세기 대한민국 개신교계가 소위 '''다음세대'''(next generation) 문제로 인해 골머리를 앓고 있는지 전혀 설명할 수 없다. 개신교계 언론사의 한 기고에 따르면 장년부 대비 청소년부 비율이 6~7%에 불과하다고 하며, # 한국갤럽 종교인구 실태조사에 따르면 2014년 기준 50~60대 연령층에서 개신교 인구가 23.5%이고 무교인이 36%인 반면, 2030세대의 개신교 인구는 19%이며 무교인은 무려 '''65.5%'''에 달한다. # '세뇌' 논리대로 정말로 모태신앙이 개인으로 하여금 교회에서 떠나지 못하게 한다면, 세대별 종교인 비율에서 세대 간에 그 비율이 유지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모태신앙으로 자라난 젊은층이 도리어 그들의 독실한 부모님에 비해 종교생활에 더 무관심한 것으로 나타난다.'''
엄밀한 고찰을 원하는 위키러들을 위해서 밝히자면, 사실 여기에는 개신교 가정이 비개신교 가정과 비교했을 때 출산율에 통계적으로 차이가 없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또한 부모가 개신교인이면서 본인이 무교인인 1020세대의 인구, 부모가 무교인이면서 본인이 개신교인인 1020세대의 인구까지 전부 파악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전제들이 큰 의미를 갖지 못하는 이유는, 근본주의 개신교계일수록 다자녀에 집착하기 때문에 1020세대에서 개신교인의 비율이 오히려 더 높으리라고 기대해야 한다는 점, 부모와 자신의 종교관이 달라지는 두 가지 1020 인구가 상호간에 상쇄될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개신교 가정의 자녀들이 부모들보다 더 종교생활에 무관심하다고 추정하더라도 큰 문제가 없다. 허나 이에 대해서는 불교와 가톨릭을 제외한 상태로 개신교계 내부에서 실태조사를 엄밀하게 진행할 필요가 있는데, 불행히도 국내 개신교계에는 가용한 사회과학적 데이터가 사실상 전혀 누적되어 있지 못하므로 조사가 더 필요하다.
모태신앙이 개인에게 결정적이라고 주장하는 논리에 암묵적으로 '신앙을 버리느냐 버리지 못하느냐' 를 교묘하게 깔고 있는지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위에서 김용민이나 진중권을 소개했듯이, 모태신앙을 통해 갖게 된 신앙을 버리지 못했다고 해서 전부 '사탄의 역사' 를 운운하며 일체의 의심을 거부하는 '꼴통' 이 된다는 보장이 없다. "신앙을 버리지 못한다" 는 말은 "기독교에 대해 건전한 비판의식을 갖지 못한다" 는 말과는 전혀 다른 의미다. 설령 모태신앙이 자녀들을 백 퍼센트 교회로부터 떠나지 못하게 한다고 극단적으로 가정하더라도, 그들 모두가 '꼴통' 이기 때문에 신앙을 버리지 못했다고 주장하려면 별도의 강력한 근거를 새로 내밀어야 한다. 모태신앙이 세뇌라는 주장 속에는, 꼴통이 아니라면 누구나 당연히 교회를 떠나게 될 거라는 이상한 전제가 포함된 경우가 많다.

3. 종교별 사례


한국 천주교주교 대부분은 모태신앙 출신이지만, 유수일 하비에르 현 군종교구장은 모태신앙이 아니다.

3.1. 모태신앙을 인정하지 않는 종파



3.2. 모태신앙을 인정하는 종파


'''유아세례'''를 인정하는 대부분 종파들이다.

4. 관련항목



[1] 모태신앙인을 가리키는 형용사. 원래 뜻은 요람.[2] 단,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는 침례회 등 일부 교단은 제외[3] 꼭 방황이 아니더라도 교회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며 생겨난 이미지 내지는 프레임에서 벗어나기가 굉장히 힘들기 때문에, 교회에서 자신의 자연스러운 모습이 아닌 "남들이 기대하는 모습"에 맞춰줘야 하는 부담이 생긴다. 칼 융의 "페르소나" 개념이 떠오르는 부분. 일부 심한 경우, 어릴 때 감수성 풍부한 성격 때문에 눈물이 많았다면 대학교 들어갈 때까지 "어이쿠 저 울보가 어느새?" 소리를 듣기도 한다(...).[4] 교회를 그냥 '''친구들과 만나서 밥과 간식 먹고 노는 곳'''쯤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5] 천주교의 경우 기도문은 달달 외울 줄 알지만 정작 기도문의 의미를 잘 모를 수 있다.[6] 이 정도로 나이를 먹을 즈음이면 인생의 여러 중대한 실패나 고통, 누군가와의 사별, 어른의 사정과 그로 인한 사회의 부조리 등을 처음으로 "나의 일"로서 겪어보게 되기 때문에 악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뼈저리게 절감하게 되는 시기인 경우가 많다. 여기에 대자면 청소년들이 생각하는 악의 문제란 어디까지나 관념적인 입바른 소리에 불과하다고 느껴질 정도. 특히 대한민국과 같이 안정적이고 안전한 사회 속의 청소년들에게는 더욱 그렇다.[7] 그렇다고는 해도 이런 과정을 거친 세속적 개인은 그렇지 않은 비종교적인 개인에 비해서 종교에 대한 이해와 통찰의 정도가 좀 더 깊다고 간주할 수 있다.[8] 예: 주일날 돈을 쓴다던지 술을 마신다던지 [9] 마귀의 행위를 기독교에서 저렇게 지칭하기도 한다[10] 예컨대 교회에 가는 것이 왜 싫은지 침착하게 파악하여 자녀의 불만을 줄여주고 자녀에게 공감하고자 노력하는 것 역시 얼마든지 종교적 양육의 모범적 사례에 해당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일부 사람들은 모태신앙 양육이라고 하면 "주일날 교회 안 나가면 지옥 유황불에 떨어진다 이 사탄아!"라며 일요일 아침마다 자녀에게 윽박지르는 막장부모의 이미지를 떠올리고, 실제로 그런 사례들이 적지 않으니...[11] 2021년 벽두부터 이슈화된 이른바 정인이 사건도 목사의 자녀들끼리 맺어진 부부가 자신들이 입양한 영아에게 신앙교육을 빙자하여 말로 다 못할 무자비한 학대를 저질러 결국 그 아이를 숨지게 한 사건이다.[12]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기독교인 가정에서 자녀(특히 아들)에게 '''"너는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이니 꼭 목사가 되어야 한다."'''며 '''자녀의 의사와 상관없이''' 강제로 신학대학을 보내는 경우이다. 자녀가 신학대학에 가기 싫다고 하면 상술한 성경 구절들을 들먹이며 이래도 아빠 엄마 말 안 들을 거냐며 윽박지른다. 그리고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은 가정에서 부모와 자녀가 격의 없이 지내는 현재의 세태가 자녀들이 학교에서 교사를, 직장에서 상사를, (남자의 경우) 군대에서 선임을 무시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주장하며 가정에서 부모가 자녀에게 체벌 위주의 훈육을 하는 것을 당연시한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발생한 사건이 '''목사이자 신학대학 교수가 자신의 딸에게 저지른''' 부천 여중생 백골 시신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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