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근/야구 스타일

 



1. 개요
2. 김성근 야구 비판 기사
3. 모략과 비매너로 점철된 경기 운영
3.1. 사례 - 다른 팀의 훈련 염탐
4. 팀과 선수의 수명을 희생시키는 무리한 운영
5. 일본 야구 숭상과 미국 야구 폄하
6. 전권과 최고수준의 지원 요구
7. 육성보다는 즉전감 구입을 선호하는 스타일
7.1. 선수 육성 실적
7.2. 베테랑 선호
7.3. 구설많은 트레이드 및 선수 영입
7.4. 선수 군입대 억제
8. 구시대적 야구 이론 맹신
8.1. 웨이트 트레이닝 경시 및 체중 감량 강요
9. 역대 최악의 투수 혹사
10. 투수 운용의 대가?
11. 비과학적인 지옥훈련의 폐해 - 체력 저하와 부상자 속출
11.1. 야수의 경우
11.2. 투수의 경우
11.3. 오대산 극기훈련의 실상
12. 스몰볼, 작전야구의 허실
13. 수비를 향상시키는 감독?
14. 좌우놀이의 명암 - 위장타순, 위장선발, 이중오더
15. 외인들과의 관계
16. '야구는 감독이 한다'의 허상


1. 개요


김성근의 야구 스타일을 정리한 문서.
김성근 감독의 경기 스타일을 총정리한 기사 2015년 아주경제 (기획) 마음처럼 되지 않는 ‘김성근 야구’

2. 김성근 야구 비판 기사


2015년 하반기부터 김성근 감독의 지도 방식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기사들이 쏟아져 나온다.
김성근 감독의 야구관을 '야구는 감독이 한다'로 정의하고 이는 전형적인 동양식 야구관이라 하며 그 문제점을 분석한 기사도 나왔다.
역시 2015년 9월 MBC 경제매거진M에 김성근 감독의 인터뷰가 나오는데 아직도 세간의 혹사 논란에 대해 인정하지 않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참고로 이 보도는 올 한화 이글스의 경제 효과[1] 및 김성근 리더십의 명과 암 등을 다룬 것이다.
아직도 변하지 않는 김성근 감독의 야구관 및 이에 따른 한화 선수들의 불만을 나타낸 기사도 나왔다.
시사인이 2015년 10월 16일에 3회에 걸친 김성근 감독 야구관을 비롯한 2015년 총정리 기사를 냈다. 시사인 원사이트가 네이버 링크보다 로딩 시간이 더 걸리지만 도표 등을 확대해서 볼 수 있다.
샤브샤브뉴스가 2015년 10월 5일과 10월 7일에 역시 김성근 감독 야구관 및 그에 따른 문제점 분석 기사를 올렸다. 10월 12일에는 팬심에 관한 내용도 실었다.
2016년 들어서는 더 많은 비판 기사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2016년 하반기 이후 김성근을 비판하는 수많은 기사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그 기사들을 일일이 여기에 수록하기에는 여백이 부족하다.

3. 모략과 비매너로 점철된 경기 운영


"깨끗한 야구를 해 달라." - 신영철 SK 사장

"'''세상 사람들은 아주 내 야구 가지고 드럽다, 일본식이다, 이리저리 비난도 많이 했어요.''' 하지만 그런건 전혀 신경도 안썼고 오히려 선수들에게는 바깥에서 뭐라고 얘기하던간에 신경쓰지 말아라, 걔네들 야구가 뭔지도 모르는 애들이라고. 이런식으로 말한 경우가 많았어요."

- 2012년 4월 18일 '꼴지를 일등으로' 강연

한화 이글스에서 혹사가 부각되기 전까지 김성근의 야구는 '''비열한 야구, 더러운 야구로 악명 높았다.''' 위장타순, 위장선발, 사인훔치기, 상대팀의 컨디션 좋은 타자를 맞추는 악의적인 빈볼, 스파이크를 높이드는 거친 플레이, 능욕적인 투수교체, 내로남불의 언론 플레이로 상대팀 도발하기, 상대팀의 투수의 흐름 끊어놓기 위한 억지 항의, 방망이 색깔 항의, 마운드 높이 시비, 타격폼 시비, 투구폼 시비, 로진 과다 사용 항의, 상대방 선수 기용 비판 등 수많은 비매너 플레이와 트집잡기용의 집요한 항의로 도발하면서 끊임없이 전구단 야구팬들을 분노케 했다. 더욱더 야구팬들을 열받게 한 건 먼저 도발을 한 후 상대팀이 열받아 맞대응을 하면, 노리타들을 동원하여 그걸 트집잡아 상대팀을 나쁜 팀으로 만들어버리는 수법이었다. 이러한 야비한 야구로 김성근은 감독 커리어 내내 무수한 비난을 받았었다. 시즌 내내 끊이지 않고 갖은 수법으로 도발되는 비열한 야구의 임팩트가 너무 커서 당시에는 김성근의 선수 혹사 등의 다른 문제는 별로 문제거리로 언급되지도 않을 정도였다. 노리타들은 과거에는 다른 감독들도 혹사를 많이 했다고 주장하지만, 김성근의 혹사는 혹사가 보편적이었던 과거에도 심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80, 90년대에도 김성근의 혹사가 유독 정도가 심함을 비판하는 기사들이 발굴되어 있다.
김성근은 본인도 여러차례 말했듯이 '''더러운 야구'''로 수없이 많은 비난을 받았다. 그런데 김성근의 인성이 놀라운 점은 이러한 비판을 받았을 때 반성하고 시정하려는 노력은 전혀 없고, 오히려 자신을 비판한 사람들이 잘못된 사람들이라고 몰아가고 자신은 피해자라고 적반하장식 코스프레를 한다는 점이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정당한 비판이 가해진다면 이를 받아들여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고쳐야 하고, 고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부끄러워하고 수치스러워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비난한다면 분명히 본인에게 잘못이 있다고 생각해야 정상인데, 김성근은 비난하는 모든 사람들이 잘못되었고, 자신은 떳떳하는 것이 김성근이 평생을 살아오면서 취한 일관된 태도였다.
게다가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안면몰수식 행태가 자신에게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까지 이러한 비열한 야구, 내로남불 야구를 정당화하며 따를 것을 강요한다는 점이다. 자신의 야구를 따르지 않은 선수는 벌투와 2군 강등 등의 혹독한 처벌이 내려졌다. 대표적으로 다른 팀 선배에게 빈 볼을 던져서 미안하다고 했다가 벌투 및 2군 강등이라는 혹독한 처벌을 받아 논란이 된 조영민 사건이 있다. 때문에 김성근 감독 밑에 있던 선수들은 어쩔 수 없이 김성근이 지시하는 더러운 플레이를 할 수 밖에 없었고 때문에 김성근의 팀에 있던 선수들은 현역 시절 더러운 플레이를 한다고 욕먹은 선수들이 많다. 단적으로 SK 시절 정근우, 윤길현, 채병용, 나주환, 김강민 등 주축 선수들의 상당수가 더티 플레이로 타팀 팬들에게 무수한 비난을 받았다.
특히 사인훔치기와 관련해 많은 일화가 있다. 사인훔치기 자체는 다른 팀도 할 수 있다면 시도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그 자체로 비난할 수는 없다는 입장도 있으나, 김성근은 사인훔치기 그 자체보다 근거도 없이 상대팀이 사인을 훔쳤다고 주장하면서 상대팀을 흔들고 나쁜 놈으로 만드는 행위를 많이 했다. 2002년과 2009년 한국시리즈에서 패했을 때 우승팀인 삼성과 기아가 사인을 훔쳐서 우승했다고 주장하면서 잔치집에 찬물을 뿌리는 행위를 하기도 했다.
비매너 플레이의 수많은 사례들은 김성근/구설 항목 참조. 사실 김성근/구설 항목에 기록된 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것이다. 인터넷이 없고 스포츠신문이라곤 단 두개 밖에 존재하지 않던 1980~90년대 상황을 감안하면 현재 기록으로 남은 것은 김성근의 수많은 비열한 행위 중 정말 일부에 불과하다. 80년대 TV 중계로 야구를 보던 사람들에 따르면 김성근의 팀과 붙으면 거의 한 경기에 한번씩은 열받아서 뒷목잡는 경우가 생겼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에는 인터넷이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전혀 공론화되지 않았다.

정진영: "(상대가) 기분 나쁠 수 있겠어요. 감독님"

김성근: "'''사람들이 기분 나빠도 난 상관없어요.''' 이긴다는 것 자체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겨야 해요.'''" - MBC 스타로드토크 명사십리 김성근

"승부세계에는 '''모략도 하나의 전술'''이에요." - 한국 현대사 증언 TV자서전 야구의 신 김성근 2부

2015년 한화 감독으로 부임하자마자 개막 직후인 4월 12일 또다시 이동걸 빈볼 사건을 일으키며 김성근 특유의 더러운 야구의 부활을 알렸다. 그러나 전구단 야구팬들이 맹렬하게 비난하고 각종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지상파방송 메인뉴스에까지 보도되는 등 사회문제 수준으로 사태가 커져버렸다. 덤으로 김성근이 그토록 싫어하는 벌금 징계를 받기도 했다. 이 사건의 후폭풍이 너무 거세었던 나머지 이후 김성근 야구의 상징과도 같았던 빈볼 등 비매너 플레이는 크게 줄었다. 하지만 대신 그동안 가려있었던 혹사와 마구잡이식 기용, 유망주 유출, 특타(벌타) 등 다른 문제들이 크게 부각되고 있다.
위장선발도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는 선발예고를 해도 되고 안해도 된다. 그러나 보통 감독이 왠만하면 누가 선발로 나올지는 예고는 해주고 있지만 만약 포스트 시즌 같이 신경전이 날 경우 안 알려주는 경우가 있다. 내일 누구 낼거라는 식으로 인터뷰를 해서 예고하는데, 여기서 입 다물어도 아무도 뭐라하는 사람 없고 여기서 일부러 예고한 선발과 다른 투수를 내기도 하는데, 이는 오히려 변칙전략의 일종으로 평가되지 비열하다고는 아무도 하지 않는다.[2] 당장 2018년부터 템파베이에서 내세운 오프너 전략이 유행이 일었고 여러구단서도 시행에 옮긴 전술이다 이런 처음보는 용병술에 메이저리그 팬들은 위장선발이냐 아니냐로 갑론을박이 벌어졌고 당시 템파베이를 위시한 여러팀서 오프너 누구 내고 다음투수는 누구라고 예고하면서 한 타자만 상대하고 내려가는 위장선발과는 다른 개념으로 보고 있다.
이전 서술에는 김성근이 일본에서 정통 미국야구를 전수받았다는 듯이 적혀있었지만 일본은 1872년에 야구가 전파되었고 일반인들을 통해 전파되어 1934년 일본프로야구를 창설하였다. 김성근 학창시절에는 일본식 문화가 녹아든 야구가 전파되었기에 팔은 쓰면 쓸수록 강해진다라는 일본에서 시작된 엉터리 이론을 믿게 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게다가 미국 야구가 몸에 바짝 붙는 위협구에 쫄기는 커녕 칭찬한다고 서술했는데 미국이 마초이즘을 상당히 좋아하는 경향이 있지만 명분없는 고의 빈볼[3]에 칭찬은 커녕 상당히 분노하며 대판 싸울려고 덤벼들뿐이다. 게다가 김성근이 비판받는 이유는 이기기 위해서 언플을 하든 이동걸 고의 빈볼 사건처럼 비매너를 저지르고 이를 정당화 하려는 태도를 보이다가 상대팀에 유사한 상황이 나오면 저쪽이 반칙을 썼다는 등 비판하는 내로남불적인 태도도 있지만 한화 이글스 논란의 태반이 왜 김성근 시절에 다 적혀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3.1. 사례 - 다른 팀의 훈련 염탐


김성근은 과거 자신을 데이터 야구의 창시자라고 스스로 말하고 다니면서 각종 강연에서 엄청나게 강조하곤 했다. 언론 기자들은 김성근이 마치 통계와 데이터마이닝의 대가인양 기사를 써내려갔다. 김성근에게 통계 분석의 비결을 묻는 질문이 쇄도하였으나 김성근은 이에 대한 구체적인 답변을 한적이 한번도 없으며, 데이터보다는 감이 더 중요하다는 엉뚱한 얘기를 했다. 더 가관인 것은 데이터 야구의 사례로 든 것인데, 김성근은 몰래 사람을 보내 다른 팀의 훈련 장면을 엿보고 정보를 빼온 것을 데이터 야구의 사례라고 자랑스럽게 말하곤 했다. 이런 방법으로 고교 감독 시절 우승을 차지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곤 했다. 물론 이는 시대상을 감안하면 충분히 데이터 야구가 맞다. 지금이야 방구석에서 유튜브로도 불펜피칭 영상을 볼 수 있어서 일반인들도 클릭 몇번으로 접할 수 있는 데이터지만 데이터는 커녕 프로야구가 생기기도 전인 당시로서는 저정도만 되어도 고급 데이터로 저런 상황에서 나름 초창기 데이터야구의 터를 닦은 감독이고 한국에서 저런 데이터마이닝(?)을 한 감독이 이전에 별로 없었음을 고려할 때 최소한 한국내에서는 창시자라고 해도 무방하고 김성근 본인의 말은 맞다. 다만 문제는 김성근이 선도한 40년전 데이터야구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통계와 흔히 생각하는 머니볼에 나오는 세이버를 이용한 00~10년대의 데이터야구와는 꽤 차이가 있고 김성근은 10년대 들어서까지 저 수준을 벗어나질 못해서 뒤쳐져서 그렇지 선구자는 맞긴 맞다.
김성근이 고교 감독 시절 4대 메이저 대회[4]에서 한 번도 팀을 우승으로 이끌지 못했던 점은 논외로 치고, 이것은 반칙은 아니지만 페어플레이 정신에 위배되긴 한다.
최근 영국에서는 리즈 유나이티드 직원이 망원경으로 몰래 상대 팀 훈련을 훔쳐보다가 적발되어 벌금 2억9천만원이 부과되는 중징계를 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벌금이 문제가 아니라 이 사건은 영국에서 '스파이 게이트'라 불리며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리즈 유나이티드 구단 명예가 심각하게 실추되었다
프로야구 감독 시절에는 매일 경기를 하면서 전력이 사실상 다 노출된 상황이라 몰래 훈련을 살펴볼 필요는 없었지만, 김성근은 상대팀의 선발 투수를 미리 알아내기 위해 야구장에 몰래 사람을 미리 보내 누가 일찍 출근해서 몸을 풀고 있는지를 알아내곤 했다. 동시에 자신의 팀은 수시로 위장오더, 이중오더를 써서 상대팀을 기만하곤 했다. 놀랍게도 김성근은 이런 사실들을 수치스럽게 생각하긴 커녕 자서전과 강연에서 당당하고 자랑스럽게 말하곤 했다. 당시 세이버는 존재하지도 않았고, OPS가 뭔지도 잘 모르며 대충 이름값으로 1번부터 4번 적어서 내던 시절에 전력분석팀은 없었기에 상대 투수 주력 구종이나 훈련방법을 통해 플레이스타일 정도만 알아내서 저격용 라인업만 낼 수 있어도 꽤 질좋은 데이터였다. 그리고 야구는 타자가 공을 못 치게 기만하기 위해 공에 변화를 주며 디셉션을 넣는 투수들과 주자는 그런 투수로 부터 도루로 한 베이스 더 훔쳐내고 포수는 프레이밍이란 기술을 통해 심판의 눈을 속여서 벗어난 공을 스트라이크로 만드는 게임이다. 대표적으로 부정투구 그 자체를 심리전으로 몰고간 게일로드 페리 등. 부정투구는 선수가 맞고 죽는 바람에 금지된 것이다. 그러나 야구의 근본이 속고 속이는 것이라 옛날에는 통했지만 현재는 많이 달라졌다. 야구의 근본국인 미국에서도 이제는 부정행위가 발각되면 대서특필 되어 커리어가 박살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 유명한 레전드 투수 로저 클레멘스와 알렉스 로드리게스가 도핑논란으로 명예의 전당에 들어갈 확률도 매우 적어질 정도로 비판받고 있다. 걸리지만 않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자체가 어찌보면 현실적이고 정직하게 하는 것이 이상적에 가깝다고 보일 수도 있지만 이제 세간의 인식은 많이 달라졌고 부정행위를 통한 치팅은 하지 말아야 할 영역이 되었다. 하물며 위장선발이나 위장오더는 상대방의 매너에 맡기는 행위이기 때문에 반칙은 아니지만 비매너 행위이다. 그리고 위장오더보다 이중오더가 더 악질인데 이중오더는 선발 예고제가 없던 당시 누가 나올지 예측해서 라인업을 짠 뒤 제출하는 방식인데 김성근 논란 중 하나인 이중오더는 메이저리그, 일본프로야구 리그에서도 발각된 적이 없는 전무후무한 사건은 명확한 사실이다. 게다가 이중오더 사건은 해태 타이거즈가 낼 패를 알게되자 그 패를 상대하기 위한 라인업을 제출한 행동이기에 더더욱 비판받아도 마땅하다.
애초에 위장오더는 일본에서는 아테우마오더라는 일명 정찰 멤버라 불리는 오더가 존재했었다. 그러나 일본도 이런 부정행위 및 공정성 강화를 위해 퍼시픽리그는 1994년부터 센트럴리그는 2012년부터 예고선발 제도를 지정하여 이를 방지하였다. 당시 위장오더의 효과를 본 선수들이나 베테랑 감독들은 위장오더에 관대한 입장이겠지만 이제 반칙이라는 입장이 강화되면서 일본도 위장오더는 칭찬보다 비난을 받는 추세다.
'''애초에 위장오더는 반칙이 아니다.''' 미리 슬쩍 떠보고 유리한 라인업으로 제출하는 게 좀 치사해서 그렇지 룰북에 이를 금지하는 조항은 없다. MLB에서는 위장오더 논란이 잘 일어나지 않는 이유가, 동양야구에서 선발예고제가 시행되기 전부터 어지간하면 전날 예고한 대로 선발을 내는, 실질적 선발예고제인 관습이 자리잡았기 때문이며, 무엇보다 이도 전략의 일부이며 반칙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2018년 템파베이 레이스에서 선보인 오프너가 한때 위장선발이라며 논란이 되었지만 나름 고효율을 보이면서 여러팀에서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위장선발 문서를 보다시피 오프너는 위장선발이라기에는 보기 힘들다. 위장선발인 경우에는 그냥 한 타자를 더 상대하기 전에 내려버리는 행위이고 메이저리그에서는 정말 뾰족한 수단이 없을때 한 번쯤 사용하는 전술이지 자주 사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위장오더를 막기위해 미국에서 일단 선발예고제도 먼저 도입하고 일본 한국순으로 도입되었다.
그리고 축구와 같은 팀단위로 하는 단체 스포츠에서도 위장오더를 처벌하는 조항이 없으며 이는 상대방측 페어플레이 정신을 믿고 하는 것이다. 물론 위장오더로 지면 당한 선수들과 감독들은 관례상 허를 찔린 전술이었다라고 일단 칭찬하고 그 다음에 블랙유머 방식이나 직설로 비판한다.
애초에 본래 야구에는 타순이란 게 없었고 해당 이닝에 출루하지 않은 타자는 아무나 타석에 설 수 있었는데, 경기 진행 중 하도 좌우놀이를 해대다 보니 기록이 미비하던 시절 출루했다가 아웃된 놈이 또 타석에 스리슬쩍 서기도 하고 감독이나 기록원도 헷갈리는 등 경기진행에 지장을 줄 정도였기 때문에 어느정도 정리를 위해서 18세기 말에 생겨난 것이 배팅오더다. 타순을 정해놓는 것 자체가 게임진행의 편의를 위해서 생겨난 룰이지 스포츠맨십을 위해서 생겨난 룰이 아니지만 그러나 시간이 지날 수록 전 세계 모든 스포츠에서도 페어플레이 정신을 중요시하면서 위장오더는 금기시 하는 전술로 되어가고 있다.
여튼 그렇기 때문에 훈련 염탐은 어떤 팀단위 스포츠든 전력을 분석하기 위해 행하는 전략으로 인정되어 가는 추세이고 위장선발은 은퇴식과 같이 오래 뛰어온 선수를 예우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이벤트성은 눈 감아주긴 한다. 그러나 옛날에는 안 그랬으니 문제없다 라는 방식은 큰 문제이다. 현재는 사람들의 인식도 많이 바뀌며 페어플레이라는 스포츠맨십을 상당히 중요히 여기게 됨으로써 김성근이 행한 행동들이 스포츠맨십에 상당히 뒤틀려져 있음을 알았기에 이에 대한 비판이 일어난 것이다.[5]

4. 팀과 선수의 수명을 희생시키는 무리한 운영


감독 김성근. 구단 모기업 부도로 존속 자체가 불투명했던 쌍방울을 제외하고는 모든 팀이 김 감독이 떠난 1~2년 후 '''암흑기'''를 맞아 선수단 리빌딩 과정을 거쳐야 했다. 그리고 당시 김 감독 야구의 '투수 총아'들은 (혹사로 인한 부상 때문에) 쉽지 않은 야구 인생을 걸었고 또 걷고 있다. - 김성근 야구 '에이스' 총아인가 제물인가

성적을 내기 위해 구단을 최대한 쥐어짜내는 스타일이다. 문제는 단순히 있는 전력을 최대한 쥐어짜는 수준이 아니라 선수가 망가지도록 혹사시키거나 미래에 팀 전력에 큰 보탬이 될 수 있는 유망주를 팔아서 1~2년 쓰다 버릴 노장을 영입하는 식으로 팀과 선수의 미래를 망가뜨린다는 점이다. 김성근 자기자신을 위해 팀의 미래, 선수들의 인생을 희생하는데 주저함이 없다는 점이 문제다. 때문에 '''김성근이 지나간 자리에는 풀한포기 안남는다'''라는 말이 널리 퍼졌다. 김성근의 팀을 쥐어짜내고 나가면 그 후유증으로 팀이 황폐화되고 암흑기에 빠지기 때문에 '''김성근의 저주'''라 불리기도 한다. 김성근이 떠난 후 그 후유증으로 팀이 암흑기에 빠지면 노리타들은 야신 김성근님이 떠나니까 팀 성적이 하락한다는 잘못된 인과관계를 주장하면서 김성근을 추켜세우기에 여념이 없었다.
김성근이 어떻게 구단과 선수들을 쥐어짜는 지에 대해서 아래 전권행사, 선수 혹사, 군입대 억제와 유망주 유출, 노장 수집 등의 항목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자세한 건 김성근의 저주 참조.

5. 일본 야구 숭상과 미국 야구 폄하


커리어 내내 일본 야구를 항상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일본보다 야구 선진국이 미국의 야구는 항상 폄하해왔다. 이는 자신이 일본 야구 출신이라는 점을 내세워 한국 야구계에서 세일즈를 하려는 의도가 다분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는 일본 출신으로서 한국에서 실력 이상으로 대접을 받아왔다.
반면 미국 야구는 항상 비판적으로 바라봐 왔다. 대표적으로 롯데에 로이스터 감독이 부임했을 때 메이저 야구에 질 수 없다. 롯데에 지면 한국이 미국에 굴복하는 것과 같은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김성근이 항상 투수라는 말을 쓰지 않고 피쳐라는 영어 표현을 쓴다는 점에서 미국 야구에 대한 존중이 있다고 옹호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영어가 아니라 일본어다. 김성근이 말하는 '''핏쨔'''는 영어가 아니라 일본어다. 일본에서 투수를 지칭할 때 보통 핏쨔라는 재플리시를 사용한다.

6. 전권과 최고수준의 지원 요구


구단을 최대한 쥐어짜내기 위해서 구단에 전권을 요구한다. 이를 위해 평소에 '야구는 감독이 한다'라는 지론을 강조하고 다닌다. 야구중심 9회에 따르면 한화 시절 구단 유니폼 구매까지 김성근 감독이 관여했을 정도니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감독으로서의 전권을 아득히 넘어선 수준이다.

프런트는 견제만 하고, 전권을 감독한테 맡기는 조직이 돼야지. 내 뜻이 그래요. 내 성격이 그러니까. 전권을 주고 3년이면 3년 계약을 하고. 목적 달성을 했느냐 못했느냐로 판단하면 돼요. 2009년에 SK가 한국시리즈에서 투수 한 명 모자라서 기아한테 졌어요. 아니면 이겼다고. 그런데 그 다음에 투수 보강 안 해줬어요. 프런트 있으나 마나라고. 그랬다면 SK는 4연패, 5연패 했을 거에요. 한국야구 역사에 남을 일을 할 수 있었는데. 그런건 생각 안하고 훈련비가 많다고 하잖아. 미국이나 일본에선 안 되면 당장 데려온다니까. - 과거 발언

위의 발언을 읽어 보면 알겠지만, 김성근이 말하는 전권이란, 사실 '''감독이 원하는 선수를 다 사달라'''는 뜻이다(...)
프런트는 감독이 원하는 선수와 코치를 다 사주고, 감독이 원하는 모든 지원을 다 해주면 감독이 모든 것을 총괄해서 성적을 낼 테니 프런트는 이에 전적으로 따르라는 방식이다. 본인 스스로 "프런트는 견제만 하라"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상은 프런트의 견제조차도 불허하고 프런트와의 파트너쉽을 철저히 거부하며 일방적인 종속을 요구했다. 때문에 각 구단 프런트와 수없이 갈등을 빚어온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노리타들의 망상과 달리 김성근 감독이 여러 구단을 전전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바로 프런트와 조화를 추구하지 않는 이러한 독선적인 태도가 가장 크다. 당장 한화만 봐도 전권을 쥐어주자 외국인 선수 선발, FA 영입, 심지어는 신인지명은 물론이고 프런트가 반대하는 선수의 트레이드까지도 거침없이 행하다가, 2016 시즌 후 프런트가 전권을 가져가자마자 작심 발언을 쏟아놓는 등 구단과의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이러한 전권과 더불어 최고 수준의 지원을 요구한다. 김성근은 자서전이나 강연 등에서 자신은 항상 가난한 약팀에서 감독을 맡아왔다고 말해왔다. 심지어 삼성, LG도 자신이 감독으로 있을 때는 약팀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실상은 대기업 구단에서는 물론 김성근 본인이 '''가난한 구단'''이라고 강조했던 태평양과 쌍방울에서도 리그 최고급의 지원을 요구했다. 김성근의 요구를 최대한 수용해서 '''구단이 전폭적인 지원을 해준 덕분에 성적을 올리고 나면 그 공로는 모두 자기에게 돌렸다.'''
쉽게 말해서, 독재자에게나 볼법한 그 것이다. '''잘 되면 내 덕분, 안 되면 니 때문'''이라는 이기적인 심성이다.

"심하게 말해 나 혼자 노력해서 팀을 4강에 올려 놓기도 했다." - 김성근 SK 감독

구단이 하나라도 자신의 요구사항을 제대로 들어주지 않으면 그때부터 구단과 각을 세우고 마찰을 빚기 일쑤였다.
태평양 돌핀스 감독으로 부임할 때 김성근은 일본어로 쓰여진 21개 요구사항을 구단에 전달했다. 이 때문에 신동관 태평양 부회장은 김성근과의 계약 철회를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지만, 야심차게 청보 핀토스를 인수하여 야구단에 투자할 것을 결심한 만큼 김성근의 요구조건을 모두 수용했다. 김성근 뿐만 아니라 김성근 사단 코치들과 전부 계약했다. 게다가 막대한 선수영입 자금을 풀어 김성근이 요구했던 이충우, 정영기, 천창호, 김한근, 이광길 등을 현금 트레이드 또는 자유계약으로 영입했다. 시즌 중에도 김성근의 요구대로 지속적인 트레이드로 선수층을 보강했다. '''1989년 태평양이 돌풍을 일으키고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것은 새로 야구단을 인수한 태평양 그룹의 대대적인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989시즌 태평양이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자 구단 내부의 지원 등에 대해서 잘 알기 어려운 외부 언론 등에서는 김성근의 지도력만으로 태평양이 성공한 것처럼 포장해줬고, 그 결과 김성근의 주가가 치솟아 삼성, 롯데 등 여러 구단에서 그를 감독으로 원한다는 풍문이 나돌았다. 이미 부임 직후부터 혹한기 훈련 지원비 등을 트집잡아 구단과 마찰을 일으키던 김성근은 주가가 치솟자 대기업 팀으로 옮기기 위해 임호균 각서 파동을 일으켜 신동관 사장과 극한의 대립각을 세우다가 결국 원하는 바대로 경질되고 며칠 후 삼성 감독에 취임한다.
김성근을 영입한 삼성 라이온즈는 1991시즌을 앞둔 겨울, 김성근이 요구했던 7명의 선수를 전부 현금 트레이드로 영입하고 그 외에도 8명의 선수를 확충하는 등 선수단 규모가 15명이나 증가했다. 이에 1991년 2월 다른 KBO 구단들이 삼성의 무분별한 선수 확충을 비판, 성토하고 KBO에서 대책회의를 가졌을 정도였다.
쌍방울 레이더스에 부임하면서도 김성근은 '''전해보다 네 배나 많은 15억원을 스카우트 비용으로 배정받는 파격'''적인 지원을 받으며 원했던 선수들을 마음껏 영입할 수 있었다. 이러한 영입 때문에 김성근 2년차인 1997년 쌍방울은 전체 8개 구단 중 '''연봉총액 1위'''를 기록했다. 즉 당시 부자구단으로 불렸던 삼성이나 현대보다도 '''연봉 총액이 높았다.''' 이로 인해, 쌍방울은 1997년 외환위기 당시 망할 뻔 했다.
이처럼 김성근은 지도자 생활 내내 최고 수준의 권한과 지원을 받으며 지냈다. 가난한 하위권 구단이었다고 말했던 태평양과 쌍방울에서도 사실은 전임감독들과는 차원이 다른 파격적인 지원을 받았다.

이렇게 전권과 최고 수준의 지원을 요구한 뒤 성적이 오르면 프런트의 공을 인정하면서 프런트의 지원 덕에 팀이 성과를 거두었음을 인정해야 하는데, 그러기는 커녕 모든 공을 본인 덕으로 만든다. 프런트가 김성근의 요구를 지원하다가 지쳐서 한두가지 거절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구단과 마찰을 일으키기 시작하고 구단의 지원이 부족하다면서 구단을 비난하는 언플을 한다. 이것이 결국 기나긴 프런트와의 반목의 원인이다. 노리타들이 반박하는 예로 드는 것이 SK 시절 선수가 부상을 입을 경우 타팀이 선수 치료비에 1~2천만원을 쓸 때 자신은 8~9천만원을 아낌없이 사용했다며, 그 돈을 이의 없이 지출해 준 것은 구단의 공로라고 언급한 적이 있긴 하다. 하지만 이 발언도 결국 김성근 자신이 8~9천만원을 사용하도록 했다는 자화자찬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
SK 와이번스 감독이던 2009년에는 KIA 타이거즈에 강한 강윤구를 무려, '''김광현'''과 바꿔먹으려고 했었던 듯 하다.[와글와글] 조범현의 선발 질문에 김성근 "강윤구라고 해" 팀의 미래는 생각지도 않은 채, 당장의 성적에 급급하며, 기자들에게 이 걸 굉장히 자랑스레 생각하고 얘기한다. 그 트레이드는 실제로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만약 성사가 되었다면, 김성근은 시즌 중에 경질됐을지도 모른다.''' 그 와중에도 투수가 없다며, "이 게 바로 SK의 현실"이라고 프런트를 또 깐 건 덤.
김성근은 가성비를 따지거나 구단사정 봐 가며 지출하는 감독이 절대로 아니다. 무조건 최대의 지원을 요구한다. 그 가난한 쌍방울이 페이롤 1위를 찍게 만들었고[6] 다른 대기업 구단에서도 프런트로부터 최대한 전권을 끌어간 뒤 말 그대로 엄청난 금액을 쓰면서 프런트가 세우던 플랜을[7] 다 헝그러뜨리고 팀의 미래를 희생해가며 전력을 쥐어짜냈다. 그럼에도 프런트에 대한 인정은 턱없이 부족하고 모든 것을 본인의 공로로 돌린다. 이에 프런트가 반발하거나 조금이라도 본인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프런트가 제대로 지원을 해주지 않는다, 프런트가 문제다, 프런트가 현장을 제대로 지원해 주지 못해서 성적을 못냈다, 본인이 비주류라 핍박받는다며 언플을 해온 것이다. 결국 이러한 태도는 김성근에 대한 각 구단 프런트의 반감으로 이어졌고, 암묵적으로 김성근을 보이콧하는 상황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김성근이 SK에서 경질된 후, 일부러 마산에 내려와 언플하던 김성근을 NC가 시원하게 무시하고 14시즌 후에 한화팬들의 선임운동으로 한화에 부임하기 전까지 프로구단 어느 곳에서도 불러주지 않았던 사실이 이를 잘 보여준다. 김성근은 이러한 상황을 오히려 주류로부터 핍박받는 아웃사이더의 이미지로 언플하기도 했다. 결국 2015년 한화로 현장에 복귀했지만, 복귀 후 전권을 가진 감독이 팀에게 얼마나 큰 해를 끼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SK 시절 성적이란 결과치로 들에게 합리화되고 정당화되었던 김성근식의 전권 행사는 한화 부임 이후 그 폐해와 문제점이 여실히 드러나면서 완전히 재평가되고 있다.
한화 이글스 역시 김성근 체제 2년간 '''전권 행사의 폐해'''를 뼈져리게 체감한 후, 박종훈 단장을 새로 선임하고 1군 운용을 제외한 다른 모든 권한을 김성근 감독에게서 박탈하여 프런트로 가져왔다. 그러자 김성근 감독은 마무리 캠프 도중 구단 '''"내 모습이 초라해 연말 시상식도 참석하지 않을 것"'''이라며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고 있다. 이후 시즌에 들어가기도 전부터 단장과 끊임없이 싸우다 끝끝내 자진사퇴 형식의 경질로 자신의 지도자 경력을 사실상 마감했다.
확실히 한평생 야구만 하다 보니, 구단경영적인 면에서는 확실히 영 어두웠던 감독. 프로야구에는 선수를 사줄 수 있는 모기업이나 프런트의 사정도 중요한데, 이를 고려치 않고 자기의 야구를 하기 위해 무조건 전권을 요구한 인물이었다. 어느 쪽이 옳은지는 개인의 판단에 따라 다르겠으나, 마찬가지로 초창기인 80년대에는 김성근 같은 감독도 흔했다.
8~90년대까지만 해도 감독은 하늘이 내려준 자리라고 해서 단장, 사장이 와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을 정도로 구계의 정점이자 '야구 장인' '윗어른', '감독님'으로서 대접받았고 그게 당연했는데, 2000년대가 되더니 FA선수를 사기 위해 프런트에게 명령이 아닌 '부탁' 을 하고 몇몇 감독은 프런트와 기 싸움을 벌이는 등 프런트의 권력이 커지기 시작하더니 2010년대 후반에는 장정석, 허삼영 등 아예 프런트에서 감독을 임명을 하는 등 프런트가 현장을 장악한 상황. 이게 옳다 그르다가 아니라 대체적으로 현장의 분위기가 그렇게 흘러갔다는 이야기이다. 좋게 보면 전문가들이 여럿 모여 효율적인 야구를 하게 되는 것이고, 나쁘게 표현하자면 정수근의 말처럼 '소신있게 자기 야구를 하는 놈이 아니라 손바닥 잘 비비는 놈이 지문 없어지면 감독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또한 프런트야구의 우수성이라고 하는데 그건 메이저리그 이야기고 KBO에서는 그런 것은 없다. 프런트야구는 말 그대로 현장은 현장야구인들이 게임내의 일을, 프런트는 데이터나 경영 전문가들이 프런트의 일을 나눠서 하고 그 와중에 프런트가 약간 더 주도권을 잡아가는 정도의 철저한 분업화 야구인데, 한국은 그게 아니기 때문. 프런트 직원들이 미국처럼 대학 나와서 대기업 입사하듯 입사한 인물들이 아닌 대부분이 은퇴선수들인데다(일본도 주로 선출인데, 일본은 젊은 나이에 은퇴하는 선수 중 명문대 출신, 특히 경영학과 나온 고학력 선수들을 주로 프런트로 영입한다.) 코치 하던 사람이 전력분석하고, 단장 하던 사람이 감독하는 구조로 이름만 다른 또 하나의 현장이라 말이 프런트 야구지 미국의 프런트야구와는 전혀 다르다. 그쪽이 말 두 마리가 끄는 마차라면 이쪽은 몸통은 하나에 머리만 두 개인 것.
그냥 코치나 감독 등의 지도자 자리는 티오가 너무나도 적으니 이름만 바꾼 은퇴선수 일자리를 하나 더 만들어낸 것. 감독이라고 해서 단장보다 야구를 더 잘 알거나, 단장이 운영을 더 잘 알거나 등 프런트야구가 더 효율적일 이유는 한국에서는 아무것도 없다. 프런트나 현장이나 어차피 작년에 감독하던 사람이 단장이고 전력분석하던 사람이 코치하고 있는 등 구성원이 다 똑같으니까. 이런 상황에서 전권을 감독이 쥐느냐, 프런트가 쥐고 감독은 그에 따르느냐는 딱히 어느 쪽이 효율적이라고 할 것도 없다. 어차피 둘다 구단 경영은 전문적이지 않은, 한평생 야구만 한 사람들이니까. 이런 점에서 김성근의 현장감독에의 전권요구가 굉장히 극단적이고 지금은 드물어진 옛날 스타일이긴 하지만 김성근의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감독야구에 비해 한국의 프런트야구는 딱히 효율적이지도 않기 때문에. 김성근의 문제는 그 과정에서 굉장히 독선적인 인물답게 프런트 등 주변인물과 마찰을 많이 빚은 과정의 문제이지 감독야구라는 지향점이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결과적으로 프런트야구가 옳으냐 효율적이냐를 떠나 어쨌든 구단운영의 주도권이 감독에서 프런트로 넘어가는 흐름 속에서 김성근은 마찬가지로 SK에서도, 한화에서도 80년대처럼 전권을 지닌 말 그대로 옛날식 감독이었으며 변화하지 않으려 했고 덕분에 변해가는 시대에 혼자 역행하는 인물로 마찰이 많았고, 변화하지 않은 채 감독 생활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7. 육성보다는 즉전감 구입을 선호하는 스타일



7.1. 선수 육성 실적


"야구감독으로서 시합에 이기는 것 다음으로 중요한 목표는 '''선수 육성'''이다. '''리더는 한 선수가 가지고 있는 잠재능력을 개발시켜줘야 하는 것이다.'''" - 김성근 감독, "좋은 선수 없으면 좋은 팀 만들라"

'2017 아시아 프로야구 챔피언십'에 출전할 42명의 예비엔트리를 살펴보면 각 팀들의 미래를 엿볼 수 있다. 넥센과 NC는 최다인 6명이 태극마크를 달았고, 반대로 '''한화는 1명의 대표 선수를 배출하는 데 그쳤다.''' (중략) 올해 처음 열리는 아시아 프로야구 챔피언십은 출전 자격이 24세(이번 대회 기준 1993년 1월 1일 이후 출생) 이하, 프로 입단 3년차 이하로 제한되는 것이 특징이다. - 예비엔트리 살펴보니…넥센·NC 6명 최다-한화는 1명으로 최소

김성근 감독은 강연이나 인터뷰 등에서 항상 선수는 키워써야 한다고 강조해왔다. 또한 그의 팬덤과 일부 기자들에 의해 선수 육성의 대가로 포장되어 왔다. 하지만 실상은 이와는 정반대로, 지도자 시절 내내 선수를 키워 쓴 사례는 거의 없고, 프런트를 졸라서 외부에서 즉전감으로 쓸 수 있는 노장 선수를 대거 영입하는 방식으로 전력을 보강해왔다. 반면 팀내에서 잠재력이 있는 유망한 젊은 선수들은 대부분 트레이드로 다른 팀으로 보내버렸다.
김성근이 실제로 신인선수를 발굴해서 육성한 예는 그럭저럭 있다. 다만 확연히 타 감독에 비해서는 적은 편인데, 여러가지 요인이 있다. 첫 번째로 김성근 감독의 베테랑 선호 취향.
왕조라 불렸던 SK 시절에는 유망주, 신인 선수가 발굴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았다. 실제로 김성근 시절 SK에서는 김광현최정이 김성근이 경질된 2011시즌 중반까지 투수조와 야수조 막내였다. 김성근 개인팬들은 김광현이야 말로 김성근 감독님이 키워낸 대표적인 선수라고 얘기하고 있다. 하지만 김광현은 김성근 감독이 부임하기 전인 2006년 봄부터 이미 연고구단 SK가 1차 지명했었던 자원으로, 고교 3학년 시절인 2006년 쿠바 청소년 세계선수권에서 MVP를 받으며 그 기량을 세계에서 인정받은 선수였다. 시즌이 시작되기 전에 각 언론들도 김광현이 류현진에 비견될 만한 괴물 신인급 활약을 펼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좀처럼 신인을 믿지 못하는 김성근조차 시즌이 개막되기 석달전인 1월에 이미 김광현을 개막전 선발감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렇게 원래부터 완성되어 있었던 선수인 김광현을 김성근에게 기회를 받아서 컸다, 김성근이 키웠다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김인식 감독이 류현진을 키웠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SK에서 김성근이 감독으로 재임했던 시절 선수단에서 김광현을 제외하고 최정 이하 SK 주전 선수들은 대부분 전임 조범현 감독 시절에 육성된 선수들이다. 특히 최정은 조범현 감독 재임 시절이었던 2006년에 '''김재현-이승엽-김태균''' 이후로 10대 나이에 두 자릿수 홈런을 칠 정도로 타격에서는 이미 충분히 입증을 받은 상태였다. 남을 칭찬하는데 극도로 인색한 김성근도 이 사실 만큼은 인정했다. 김성근은 SK 첫해 우승을 이루고 나서 “조범현 전 감독이 이미 세대교체를 염두에 두고 틀을 만들어놨다. 나는 거기에 마음을 넣은 것뿐”이라고 말했다. 물론 김성근과 조범현이 충암고 시절 스승-제자 사이였고 보통 사이가 아니라 아주 각별한 사이였던지라 더 그런것도 있을것이다. 2009년 한국시리즈에서 싸인 훔치기 논란으로 조범현 감독과 사이가 벌어진 이후에도 김성근은 SK 시절 세 번이나 우승할 수 있었던 이유로 "'''조범현 감독이 선수들을 잘 조련해놓은 덕분'''에 내 강훈련을 소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밝힌 바 있었다. 한화 감독 시절에도 김성근은 "'''선수 육성은 조범현이 최고'''지 싶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김성근이 신인을 못키운다는 비판에 대해 노리타들은 SK 스카우터가 무능해서 감독님이 키울 신인이 아예 없었다면서 모든 책임을 스카우터에게 떠넘겼다. 웃긴 것은 스카우터 임명권을 가진 사람도 당시 전권을 휘두르던 김성근 감독 본인이었다는 것이다.
김성근이 키운 선수가 하나도 없다고 말하면 노리타들은 LG 감독 시절 김성근이 박용택을 키웠다고 말한다. 하지만 박용택은 입단 직후 김성근의 혹독한 송구 훈련 때문에 치명적인 어깨부상을 당하고 남은 선수 생활 내내 '''소녀어깨'''라는 비웃음을 당하게 된 비운의 선수이며 정작 박용택의 타격 포텐이 터진 건 30대에 접어들기 시작한 2000년대 후반이다. 자세한 내용은 박용택 항목 참조.
김성근은 기본적으로 신인, 유망주에게 기회를 많이 주지 않는다. 김성근은 성적에 대한 집착이 심하기 때문에 검증되지 않은 자원인 신인들에게 거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신인은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선수라 하더라도 루키 시즌부터 포텐이 터지는 경우는 드물고 대부분 1군에 적응하는데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린다. 당장 성적이 나오지 않더라도 꾸준히 1군 출장 기회를 부여받으면서 1군에 적응해 나가면서 기량을 만개하는 것이 대부분의 선수들이다. 신인을 중용하면 대박이 터지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 당연히 당장 성적을 내기는 어렵다. 하지만 팀의 미래를 위해선 점점 기량이 하락세에 접어드는 노장들에게 체력안배를 해주면서 신인급들도 꾸준히 출전시켜서 경험을 쌓게 해야 한다. 그러나 팀의 미래를 위해서 가능성이 보이는 신인을 성적에 관계없이 꾸준히 1군에 내보내면서 경험을 쌓게 하는 것은 김성근 체제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예외가 있다면 김성근의 21년 감독 경력을 통틀어 SK의 김광현, 태평양 신인 3인방인 박정현, 최창호, 정명원, OB의 윤석환이 전부다. 이들은 애초에 리그 정상급의 뛰어난 기량을 가진 선수들이어서 리그 적응 기간 없이 데뷔 시즌부터 바로 1군을 씹어먹는 실력을 보였다. 애초에 이렇게 리그 정상급 실력을 가진 선수들이 아니면 김성근은 신인들에게 기회를 주는 일이 없다.
이렇게 정상급 실력을 가진 신인들이 나타나면 김성근은 데뷔 시즌부터 가혹하게 혹사시켜 바로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박정현, 최창호, 정명원, 윤석환 모두 데뷔 시즌 혹사의 여파로 2년차부터 바로 부상과 부진의 후유증에 빠진다. 태평양 3인방인 박정현, 최장호, 정명원은 김성근 경질 후 정동진 감독이 1992년 수술대에 올려 모두 미국에서 수술을 받고 2시즌을 재활한 끝에 복귀할 수 있었다. 윤석환은 안타깝게도 김성근이 OB 부임하던 해 데뷔했기 때문에 1984시즌 혹사 후에도 5년간 김성근 밑에서 제대로 된 재활이나 관리를 전혀 받지 못하면서 선수생명이 크게 단축된 케이스다. 윤석환은 1988시즌에야 부활에 성공했지만 임기 마지막해였던 김성근에 의해 다시 한번 혹사당한 후[8] 망가져 더이상 회복하지 못하고 은퇴하고 말았다. SK의 김광현은 당장 혹사의 후유증은 나타나지 않았지만 손등 부상으로 조기 마감한 2009년을 제외하곤 휴식 없이 선발 로테이션을 풀로 굴려진 결과 김성근 경질 직전부터 어깨 부상에 시달리다가 겨우겨우 복귀해 SK의 에이스로 어찌어찌 부활에 성공했으나 최절정기였던 2008년-2010년의 포스만큼은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이 것도 모자라, 김광현은 강윤구랑 트레이드 될 뻔 했다.
세간에는 김성근이 신인을 잘 키운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우선 위에서 언급한 다섯 선수의 임팩트가 너무도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신인시절부터 애초에 리그 정상급 실력을 가진 선수들이어서 내보낼 만한 선수를 내보낸 것이었고, 김성근이 당장 성적이 나오지 않는 신인을 꾸준히 기회를 주며 중용하면서 육성한 것은 아니다.
또 김성근이 신인에게 기회를 많이 주는 편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착시현상이 발생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김성근 체제 하에서 2군 선수들이 기회를 받는 경우는 주로 1군에서 부상자가 발생하여 대체 선수가 필요한 경우다. SK나 한화에서 볼 수 있듯이 김성근의 팀에서는 혹독한 훈련량과 마구잡이식 운용 때문에 1군에서 크고 작은 부상자가 자주 많이 발생한다. 때문에 2군 선수들이 급히 호출되어 1군에서 기회를 받는 경우가 실제로 적지 않다. 그러나 이것은 임시 방편일 뿐, 주전선수들이 부상에서 회복되면 이들 신인들은 거의 대부분 어김없이 바로 2군으로 내려간다. 기본적으로 선수를 잘 믿지 않는 김성근의 성격상 한두번 반짝한다고 해도 언제 다시 기량이 떨어질지 모르는 신인들은 잘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2군에서 땜빵용으로 잠시 콜업되는 선수들도 생소해서 신인인 것처럼 착시효과를 일으키지만 사실 2군에서 수년 내지는 10년 이상 있었던 '''노망주'''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런 2군에서 수년 내지는 10년 이상 있었던 '''노망주'''들은 과거 김성근이 각광을 받았을 때는 무명선수를 키워낸 사례로 포장되었다. 김성근이 얼마나 언론의 지원을 많이 받았느지를 알려주는 경우다.
그나마 신인들도 활용하더라도 투수는 불펜, 야수는 플래툰이나 백업으로만 기용하여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다. 윗 문단에서 설명한 경우처럼 김성근이 신인을 올리는 경우는 대부분 주전의 부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기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투수의 경우 긴 이닝 동안 완급조절하면서 던져야 하는 선발투수를 키우는 것이 1이닝만 집중해서 던지는 불펜투수를 키우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때문에 김성근은 당장 가능성이 보이는 젊은 투수가 나오면 즉전감으로 활용하기 쉬운 불펜으로만 굴리는 것이다. 신인야수는 좌우놀이용 대타, 아니면 대수비, 대주자 요원으로만 활용한다. 물론 1군 시즌 운영을 위해선 주전 이외에도 대타, 대수비, 대주자도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자리는 치열한 주전 경쟁에서 밀려난 선수들한테 돌아가는게 일반적이다. 반면에 김성근은 주전 자리는 노장들로 무조건 채워놓고, 신인급 선수들한테는 아예 기회 자체를 주지 않는다. 그래놓고 당장 눈에 띄는 능력 한두가지를 활용하기 위해서 대타, 대수비, 대주자 요원 등 백업으로만 쓰는 것이다.
다만 위의 비판은 일리가 있는 측면도 있지만, 다소 지나친 측면들도 있다. 고교 시절 스타플레이어들 중에서 프로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추락한 경우도 많기 때문에 원래 될 선수였다는 식의 주장은 결과론적인 주장일 뿐이다. 당장 그 천재라던 강혁 어떻게 됐는가? 그리고 고교 시절에 스타급 플레이어가 아니었다면 거의 대부분의 선수들이 길고 긴 2군 생활을 할 수 밖에 없다. 당장에 박정권만 보아도 2004년도에 OPS 0.412 정도 수준의 타자였다가 군복무후에 김성근을 만난 2007년부터 경기수와 OPS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박정권이 OPS 0.412를 기록했다는 2004년은 그의 데뷔 시즌이었다. 2004시즌 박정권에게 주어진 기회는 24경기 28타석에 불과했다. 사실상 대타로만 기용되었다는 이야기다. 데뷔 시즌이 끝나고 박정권은 2005년부터 2007년까지 상무에서 군복무를 한 후 2007시즌에 복귀했다. 데뷔 시즌 후 군복무 트리는 어느 정도 포텐이 있는 선수들이 일반적으로 밟는 커리어 중 하나다.
즉 분명히 포텐은 있지만 아직 주전으로 쓰긴 힘든 경우 바로 상무나 경찰청에 보내 실력을 쌓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구단에서 전략적으로 조기에 군대에 보낸 후 제대하여 포텐을 터트린 선수들이 많다. 그러나 박정권이 아무리 상무에서 기량을 쌓아 왔더라도, 이제 한 시즌 보내고 제대한 3년차 새파란 박정권에게 타석에 기회를 주면서 2009년 1루수로 정착하게 만들었다. 그 외에도 그전까지 백업이었으나 김성근 취임 후 수비력에 마음에 든 뒤 주전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한 김강민이나 김강민의 동기면서 김성근이 직접 주전 좌익수로 점찍어 기회를 준 박재상 등 물론 다른 감독보다야 적을지라도 기회를 줘서 경험을 쌓게해 포텐셜을 폭발시킨 케이스도 엄연히 있다.
실제로 박정권 외에도 백업이었다가 김성근 부임 후 기회를 받아 주전으로 발돋움한 김강민과 박재상, 조동화까지 SK 외야 3인방은 전부 김성근의 작품이며, 두산에서 잉여 자원으로 분류되었다가 트레이드되어 와서 SK에서 유격수로 자리잡은 나주환과 김성근 부임 이후 자리잡은 정상호, 아직도 김성근을 최고의 스승으로 꼽는 송은범, 항목에 들어가보면 알 수 있지만 김성근이 직접 널 중용하겠다고 찍어 최상급 스윙맨으로 활용한 고효준 등 SK시절 말은 많아도 그래도 기용하면서 어떻게든 성적을 냈다.
그 어느 누구도 최정 이후 주전선수인 박재상, 박정권, 김강민, 고효준 등은 엄연히 기회를 준 김성근의 공적이 맞으며 당시 왕조를 세운 업적이 있다. 이런 논리라면 류현진을 기른건 김인식, 오승환을 기른 건 선동열이란 논리도 성사되고 그게 맞다. 김강에게 기회를 안 주어서 나름 대형 유망주였던 김강을 망친 것이 김인식의 책임으로 회자되고, 좋은 볼을 가지고 있음에도 박희수를 믿지 못해 기회를 주지 않아 박희수를 늦은 나이에 이만수 감독 아래에서야 만개하게 만든 것이 김성근의 잘못이 맞듯이 선수에게 과감하게 기회를 주어서 터트린 것도 감독의 공이 맞다. 선수의 성장에는 시기적절한 기회의 부여도 굉장히 큰 부분을 차지하고 선수의 출장 권한을 가지고 라인업을 짜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감독이기 때문이다.
'원래 될 놈이었다'는 논리는 결과론적이고 사실 말도 안 된다. 아무리 원래 될 놈이었어도 몇년동안 2군에 쳐박아버리고 기회를 안 주면 될 놈도 안 되기 때문이다. 고교시절 천재타자였지만 뒤늦게 프로에 뛰어든 탓에 출장하고 경험을 쌓아야 할 시기에 경험을 못 얻어 그저 그런 선수가 된 강혁이나 상술한 김강, 해외로 눈을 돌리면 타다노나 해밀턴, 부시 등 그런 사례는 차고 넘친다. 특급 선수는 선수의 능력과 감독의 적절한 기용이 버무러져서 만들어지는 것이지 이 중 어느 하나만 갖춰져서는 태어나지 않는다.
한화 이글스 감독으로 부임하고 나서도 그렇게 많은 노장 선수들을 사줬음에도 불구하고, 시즌 내내 선수가 없다, 포수가 없다, 투수가 없다는 타령을 하면서 구단에게 더 사달라고 징징거리기만 할뿐 본인이 직접 키워서 쓴 사례는 한 명도 없다.

김 감독은 '선수가 없다'는 말을 싫어한다. "선수가 없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없으면 만들어야 한다.''' 승부의 세계에서 선수가 없다는 말은 곧 지는 것이다"는 것이 김 감독의 말이다. 설령 선수가 부족하더라도 하소연해서 면죄부를 만드는 것보다 어떻게든 만들고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 김성근 감독, "선수가 없다? 프로에선 말이 안 돼"

2017년 8월 28일 발표된 '2017 아시아 프로야구 챔피언십' 42명의 예비엔트리에 한화 선수가 단 1명만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김성근의 육성 능력이 최악'''이었음을 보여준다. 이 대회는 만24세 미만 또는 프로야구 입단 3년 이내의 선수들만 참가할 수 있다. NC와 넥센은 6명, 기아, 롯데, 두산은 5명이 선발된 반면, 한화는 단 1명만 선발된 것이다. 이는 지난 2년반 동안 한화 감독을 역임했던 김성근의 선수 육성 실적이 최악임을 수치로 다시 한번 보여준 사례다.
결국 2016 시즌이 끝나고 한화 구단은 '육성 전문가'로 불리는 NC 다이노스 육성이사 박종훈을 신임 단장으로 영입하면서 선수 육성 부문을 포함하여, 1군 운영을 제외한 모든 권한을 김성근 감독에게서 가져왔다. 한화 구단은 특히 선수 육성을 구단의 중장기 최우선 목표로 삼고, 이정훈을 신임 육성팀장으로 임명하여, 선수 육성을 구단이 주도적으로 이끌겠다는 의지를 확실하게 나타냈다.
이는 그럴 수밖에 없다. 김성근 감독의 베테랑 선호 스타일과 겹치는 또 하나의 이유로, 실제로 키워볼만한 자원이 한화에서는 많지 않았던 점도 중요하다. 한화가 한창 꼴찌를 찍던 그때 그 시절, 한화는 09년 드래프트까지 6라운드 이후는 걍 패스해버리는 막장팀이었고, 10년도 이후로는 그나마 꽉꽉 채워 뽑았지만 하필 이 때부터 전면 드래프트가 부활해 연고지 내의 1픽감인 신정락을 LG에 빼앗겼고, 역시 상위 픽에서 뽑은 선수들이 김용주, 안승민 등 실링을 높게 평가받지 못한 자원들이었다.
그나마 12년부터는 신구단 NC다이노스, kt위즈의 창단으로 신구단 우선지명으로 인해 진짜 우수한 유망주들은 특별지명으로 NC다이노스, kt위즈가 다 쓸어가버려서 성적은 낮게 나오는데도 막상 드래프트로 우수한 유망주도 얼마 끌어모으지 못한 팀이었다. 그나마 끌어모았다는 놈들도 유창식이었고. 이게 한화의 암흑기가 그토록 긴 이유.
여튼 결론적으로 타 감독에 비해 절대적인 선수 육성 실적은 그저 그런 편이나 이는 김성근의 베테랑 선호 성향도 있지만 당시 그가 맡았던 팀인 한화의 상황이 참작되어야 하며, 실제로 유망주 풀이 좋았던 팀에서는 김성근도 육성실적이 꽤 좋았다.
과감히 기회를 준 김광현을 필두로 그가 완성시켰다고 말할 수 있는 박정권, SK 외야 3인방 조동화 박재상 김강민, 노망주였던 나주환 정상호나 투수파트에서도 고효준 송은범 등 많은 육성 실적이 있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선수 본인이 나는 김성근 감독의 작품이라고 말하는 LG의 이동현이나 신윤호, 최동수,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쌍방울의 마지막 톱타자 윤재국이나 이연수, 더 더 거슬러 올라가면 김성근의 애제자 1순위로 꼽히는 조범현까지. 선수 잘 키워내기로 유명한 감독에 비할 바는 아니라도, 비난받는 것에 비하면 좋은 선수를 많이 키워낸 육성실적이 제법 좋은 감독으로 육성실적이 좋으냐 나쁘냐를 꼽으면 좋은 쪽에 속한다. 선수가 없다고 말을 하면 안 된다고 말해놓고 나중에 가서 선수가 없다고 하는 그런거야 뭐...콘적콘은 일상이니깐.(...)

7.2. 베테랑 선호


"노장이라는 것은 1년 토탈 쓸 생각은 안 한다고. 예를 들어 작년에 최돌... 그.... 누구야... 음... 최전.... 누구지 글마... 어.... 안치용이라든지... 그.. 최동수 같이 SK에서, '''버리기 일보 직전 아이들'''이 일하는 거에요. '''노장이라는 것은 1년 토탈 쓰는 건 아니에요'''. 그러니까 필요한 거에요. 위기 때, 어려울 때 걔네들이 한다니까. 경험 갖고." - KBO 특별기획 야구를 말하다 - 김성근

김성근 감독은 지도자 시절 내내 본인이 직접 선수 육성보다는 외부로부터 즉전감으로 쓸 수 있는 노장 선수를 사서 쓰는데 열을 올렸다. 이렇게 영입된 노장 선수들의 대부분은 몇개월 반짝 활약을 한 후 기량 저하로 2군에 내려가 있다가 은퇴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싹쓸이 수준으로 워낙 많은 노장 선수들을 영입했기 때문에 이들 노장들 개개인의 활약은 미미해도 팀 전체적으로는 단기적으로 전력을 짜내는데 큰 효과를 내는 것이 사실이다. 김성근은 보통 감독 부임 1년차에 성적을 반짝 올린 후 2년차에 성적 하락을 겪는데, 이것은 부임할 때 구단에 강력하게 요청하면서 싹쓸이로 영입한 노장선수들에 기인한 바가 크다.
평소에 구단에 수시로 선수 영입을 요청한다. 또 타팀에서 방출된 선수들을 적극적으로 영입한다. 특히 즉전감으로 활용하기 위해 노장 선수들 위주로 영입한다. 일단 새로 부임할 때 구단에게 강력히 요청해서 은퇴기로에 있는 타팀 노장선수들을 자유계약 또는 현금트레이드로 싹쓸이 수준으로 영입한다. 어차피 김성근 본인의 돈이 아니라 구단 돈이 들어가는 일이기 때문에 방출 선수가 나왔다 하면 무조건 영입을 요청하는 수준이다. 문제는 자기 돈이 아니기 때문에 가성비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마구 지른다는 점이다. 노장 선수들의 경우 연봉이 높은 편이라 가성비가 매우 떨어져 구단 경영에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 그렇게 비싼 돈을 들여 노장들을 수집하면 김성근이 또 주전으로 박아놓고 기용하는 것도 아니다. 위의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김성근은 애초에 노장을 풀 주전으로 사용할 생각이 없다. 그저 필요할 때 한번 해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비싼 돈을 들이고 유망주들을 팔아가면서 그들을 영입하는 것이고, 실제로 이 노장들로 구멍을 잘 메웠고 꽤 쏠쏠하게 활용했으며 크게 터지는 선수도 종종 있었다. 그러나 확실히 가성비는 떨어지기 때문에 구단이 김성근의 이런 묻지마식 영입 요구를 거절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구단이 지원을 안해준다고 하면서 마찰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김성근의 집착적인 노장선수 영입은 태평양 감독으로 부임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8년 3월 9일 청보 핀토스를 인수한 태평양 그룹은 그해 겨울, 대대적인 투자를 감행하여 김성근 영입을 필두로 청보 핀토스 시절의 코칭 스태프들을 전부 물갈이하고, 대대적인 전력 보강에 들어갔다. 이때 신임 감독으로 임명된 김성근은 구단에 일본어로 된 21개 요구사항을 모두 들어줄 것을 요구했는데 그 결과 태평양은 1989 시즌에 앞서 비시즌 기간 동안 이충우(1989년 은퇴), 정영기(1990년 은퇴), 천창호(1990년 은퇴), 김한근(1990년 은퇴), 이광길(1992년 은퇴) 등 은퇴를 앞둔 노장 선수들을 대거 영입했다. 이들 뿐만 아니라 김성근의 태평양은 시즌 중에도 지속적인 트레이드를 통해 젊은 선수들을 내주고 노장 선수들을 영입했다. 당시 야구판에 처음 들어왔던 태평양 그룹이 의욕적으로 많은 지원을 해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대부분 급격한 기량 쇠퇴를 겪으면 김성근 경질을 전후로 은퇴 수순을 밟았다.
1990년 11월 삼성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김성근은 우승을 공약으로 내세우면서 구단에 강력히 요청하여 1991시즌을 앞두고 무려 일곱명의 노장선수들을 현금 트레이드로 영입했다. OB의 윤석환(1991년 은퇴), 조범현(1992년 은퇴), 신경식(1995년 은퇴), 태평양의 이광길(1992년 은퇴), LG의 최일언(1992년 은퇴), 최홍석(1991년 은퇴), 롯데의 허규옥(1992년 은퇴)이 그들이었다. 이들 노장 선수들은 대부분 삼성에서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하고 김성근 경질될 때 동시에 은퇴 수순을 밟게 된다.
쌍방울 감독 시절에는 더 많은 노장 선수들을 영입했다. 쌍방울은 김성근을 영입하면서 '''전해보다 네 배나 많은 15억원을 스카우트 비용으로 배정하는 초강수'''를 두면서 당시 '''페이롤 1위'''를 찍을 만큼 전력 강화에 박차를 가했다. 즉, 당시 엄청난 현금 트레이드를 진행해오기로 유명해 부자구단이라고 불리던 '''삼성, 현대'''는 물론이고 리그를 지배하던 최강팀이었던 해태보다도 페이롤이 높았다는 것. 결론적으로 김성근 지지자들이 주장하는 쌍방울 시절의 재정 부족 등으로 인한 가난 투혼은 모두 부풀려진 셈.
이처럼 풍부한 실탄을 지원받은 김성근은 노장 선수들을 줄줄이 영입했고 8개 구단 중에서 유독 평균연령이 높은 팀으로 유명했다. 때문에 선수 연봉 지출액도 수직상승했고, 그 결과 김성근 체제 2년차인 1997년에 쌍방울 레이더스는 그렇게 가난했다는 김성근 본인의 주장이 무색하게 전체 8개 구단 중에서 연봉 총액이 가장 높은 팀이 되었다.[9]
LG 감독 시절에는 쌍방울 시절 같이 한솥밥을 먹었고 당뇨병으로 인해 고생하던 심성보를 영입했고 그 외에도 장재중이나 재일교포 이일의를 영입한 바 있다.
SK 감독 시절에도 타 팀에서 방출된 가득염, 안경현, 윤재국을 자유계약으로 데려왔고, 최동수, 권용관, 안치용, 이재영을 트레이드로 영입하는 등 노장 선수를 열심히 수집하고 젊은 선수들은 딴 팀에 내줬다. 노장 선수만 트레이드해 온다는 비판이 이어지자 "노장 선수들을 SK로 데려왔지만 이제부터 젊게 만들 것"이라는 면피성 해명을 내놓기도 했다.
한화 이글스 감독에 부임하고 나서도 곧바로 권용관, 임경완, 오윤 등 타 팀에서 풀린 방출 선수를 영입하고 FA로 송은범배영수를 영입, 시즌이 시작되고 나서도 트레이드로 30줄에 들어선 이성열허도환을 데려오는 등 여전히 노장 선수 영입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화가 10개 구단 중 연봉총액 1위를 찍은 것은 덤이다. 2016년에도 2차 드래프트를 통해 장민석, 차일목, 송신영을 데려왔고, FA 자격을 얻은 정우람심수창을 영입했으며, 두산의 코치직을 뿌리치고 나온 이재우를 영입한 바 있다. 방출되거나 2차 드래프트로 노장 선수를 주워 오는 것만이라면 구단의 돈만 나갈 뿐 유망주 유출은 없기 때문에 그나마 다행인 상황이지만, 노수광, 오준혁처럼 트레이드로 보내버리거나 임기영, 박한길, 조영우처럼 보상선수로 내주거나 해서 젊은 선수 유출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확실히 베테랑들은 그 나이까지 야구판에서 살아남은 만큼 기본 실력들이 있어서, 돈 쓴 값은 대부분 해 주었다. 살려조로 활약한 정우람과 심수창은 말이 필요없고, 성적은 별로였지만 어쨌든 한화의 3선발로 이닝은 먹어주었던 배영수, 18년 리그 최상급 불펜으로 리바운딩하고 지금도 불펜의 한 축을 맡은 송은범에 30홈런타자로 한화의 주포가 된 이성열, 최재훈 영입 전까지 한화의 포수진을 어찌어찌 버티게 한 조인성 차일목에 쏠쏠한 백업 허도환까지. 물론 이재우 임경완 등 안 터진 선수도 많지만, 그 반대급부로 나간 유망주들 지금 뭐 하고 있는지 생각해보면 노장들은 성공한 비율이 훨씬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많은 유망주를 내보냈지만 터진 것은 노수광 단 하나고 나머지는 임기영 양훈처럼 반짝활약 후 망하거나 아예 반짝활약도 못하고 그냥 망했다. 결론적으로 내보낸 유망주는 한명빼고 다 망했는데 영입한 베테랑들은 대부분 쏠쏠히 써먹었고, 크게 터진 선수도 몇 있다.
노장을 기용해 미래를 팔아넘긴다는 비판은 가능할지언정, 김성근의 노장 영입은 당장의 구멍을 메꾼다는 목적으로서는 대성공이고 성공하는 선수의 비율도 높아서 영입 자체는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은퇴를 앞둔 선수를 영입하는 것은 현역 생활을 연장하고자 하는 선수 입장에서는 참 고마운 일이라 상당수가 은퇴 후 김성근을 지지하는 친 김성근 세력이 되는 경우가 많다. 안치용과 안경현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그 안경현조차도 '''상대편조차도 아니다 싶을 정도로 투수가 혹사당한 사례''' 같은 경우에는 감독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7.3. 구설많은 트레이드 및 선수 영입


김성근은 강연 등에서 선수 육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리더는 가능성 있는 선수들의 잠재능력을 개발시켜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본인의 말과는 달리 현실에서의 김성근은 젊고 가능성 있는 유망주들은 대부분 즉전감으로 활용할 수 있는 노장 선수들을 영입하기 위한 트레이드 카드로 써서 다른 팀으로 보내버렸다.
앞서도 언급되어 있지만, 김성근의 이런 밑지는 트레이드를 하는 이유는 김성근 본인의 임기는 제한되어 있는데 반해, 이들 유망주들은 본인 임기 내에 써먹을 가능성이 적을 뿐만 아니라 뒤늦게 포텐을 터트려 봐야 후임 감독 좋은 일만 시키는 꼴이라는 계산이 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지극히 이기적인 트레이드는 팀 입장에서는 당연히 미래를 갉아먹는 일이다.
한화 시절에도 몇 차례가 트레이드가 있었다. 당장 15년에 즉전감 확보를 위해 과 20대 중반 '''군필 외야수'''인 오준혁, 노수광을 트레이드했고 양훈도 20킬로 이상이나 체중을 감량하라고 지시한 후 구위가 나빠지자 트레이드했다. 결과적으로 양훈은 반년 반짝하고 방출되었는데, 바꿔 온 이성열은 한화 4번타자가 되었다. 백업포수로 쏠쏠히 써먹은 허도환은 덤. 그야말로 김성근이 넥센을 등쳐먹은 트레이드. 유창식 또한 승부조작으로 제명되었는데 바꿔온 임준섭은 군제대후 불펜의 한 축을 맡았다.
김성근은 트레이드로 유망주들을 타팀에 보내면서 "'''(타팀에서 성공해서) 내가 틀렸음을 보여라.'''"라고 호기롭게 말하기도 했는데 실제로 김성근이 트레이드로 타팀으로 보낸 유망주들은 반짝 활약 후 가라앉은 반면 김성근이 건져오면서 터진 선수가 더 많다.
KIA와의 트레이드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기아로 보낸 노수광, 오준혁이 팀에서 좋은 활약을 보이고 있는 반면에 즉전감으로 데려온 임준섭, 박성호, 이종환 모두 당시엔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만 메인칩이었던 유창식이 기아에 가서도 망하고 승부조작으로 제명되며 잠시나마 눈썰미 있는 판단력을 되찾았다는 이야기도 들었었다. 임준섭은 본래라면 김성근 재임 시절에 불펜 전력으로 잠시 뛰었으나 팔꿈치 부상이 생기며 결국 재활 겸 병역의무를 보냈고 나름 추격조~좌완 원포인트를 오가며 팀의 주축 불펜으로 활약중이다.
기아측의 메인 칩이었던 유창식은 제명, 노수광은 활약하고 있었으나 다시 재트레이드, sk에서 기량을 만개시켰으며 오준혁은 잠깐 반짝 후 부진에 빠졌다가 KT로 재트레이드되었으나 kt에서도 여전히 부진하고 1군에 거의 올라오지 못하고 있으며, 임준섭은 18년 가을야구에 힘을 보탰으며 19년도 그럭저럭 불펜의 한 축을 맡아주어 주전으로 자리잡아서 나름 재평가라며 윈윈이라 주장하는 것은 감독 사생팬 주장에 불과하다. 이 트레이드의 목적은 당시 나름 돌풍을 일으키며 5위권 이내에 한화가 정착해있었고 전력보강을 원한 감독의 의중에 따라 보강하였는데 임준섭, 박성호, 이종환은 부상으로 뛰지 못하고 나가떨어졌고 임준섭은 병역 미필이였다. 그리고 마진으로 따지면 한화의 패배가 맞다. 일단 당시 눈밖에 나서 트레이드 보낸 김광수는 정상급 셋업맨으로 활약하였고 노수광은 활약하다가 와이번스로 트레이드 되면서 이명기, 김민식으로 바꿔먹었기 때문에 3명중 1명만 건진 한화의 패배가 맞다.
또 FA로 송은범을 영입하면서 보상선수로 KIA에 내준 임기영은 초기에는 기아의 완승이였다. 송은범은 김성근의 자기 식구 감싸기만 아니었다면 진작에 2군으로 내려갔어야 할 성적인 반면, 임기영은 제대하고 복귀한 이후 전반기에 헥터-양현종에 이은 실질적인 3선발로 매우 뛰어난 피칭을 보여줬다. 반년 뛴 임기영이 한화에서 2년 이상 뛴 송은범보다 승수가 많다는 것도 함정. 후반기에 체력이 떨어져 부진하나 싶더니 한국시리즈에 부활해 팀의 V11에 한몫 단단히 했다. 다만 송은범은 2018년 리그 최상급 불펜으로 부활해서 한화의 가을야구를 이끌었으며, 이후 2019시즌 롤코를 탔지만 불펜으로 활약하다 LG트윈스로 트레이드 되었으며 현재는 나름 마당쇠 불펜으로 뛰고 있다. 이후 임기영은 꾸준히 부진하다가 2020년 들어 터질락말락하는 정도의 성적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송은범의 불펜으로서의 부활은 김성근이 노린 바도 아니었고 김성근 임기가 끝나고 나서야 이뤄지긴 했는데, 소 뒷걸음치다 쥐 잡은 격이긴 해도 어쨌든 결과적으로 송은범도 결코 임기영에게 뒤지는 투수는 아니었다.
그 외에 KIA출신으로는 2차 드래프트로 차일목을 데려와서 2년간 주전으로 쏠쏠하게 써먹었다. 그러나 이는 당시 한화의 포수 뎁스가 매우 안 좋았고 오죽하면 한화팬들로부터 조인성, 정범모, 허도환, 차일목 포수 라인업을 암타스틱4라고 했겠는가. 차일목이 잘 해준 건 아니지만 차일목이라도 없었으면 최재훈 영입 전까지 한화 포수진은 어땠을까를 생각하면 나름 구멍막기 용으로 잘 써먹은 케이스.
넥센과의 트레이드는 부정할 수 없이 그 사기꾼 넥센을 이겼다. 양훈은 16년 하반기 넥센의 상승세를 이끌었으나 이후 2년간 8점, 7점대의 방어율을 기록하고 방출되었고, 반대급부로 데려온 허도환은 쏠쏠한 백업포수로 잘 써먹었고 이성열은 무려 30홈런 타자가 되며 반년반짝 투수를 주고 20홈런 이상 쳐주는 타자를 얻어온 한화 재임시절 김성근 주도의 트레이드중 가장 고평가 되는 트레이드가 되었다.
SK 시절에도 박희수를 트레이드 카드로 쓰려고 시도했고 2차 1번으로 입단한 대졸 신인이었던 의 1군 안착이 더디자 트레이드했는데 박현준은 LG로 트레이드된뒤 곧바로 선발진에 안착하고 2011년 13승을 따내며 LG 에이스로 자리잡았'''었'''다. 이듬해 박현준이 승부조작을 저질러 제명되었으니 망정이지 안그랬으면 역대급으로 정신나간 트레이드였다. 야만없이지만, 승부조작에 연루되지 않고 2011년의 포스를 박현준이 계속 보여줬더라면 아마 리그를 대표하는 사이드암 에이스로 활약했을 것이라는 의견이 주류. 아 물론 조작범이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고 야구에 만약은 없다. 게다가 이 트레이드는 박현준의 반대급부로 데려온 2011년 이재영이 불펜분식을 자주 범했지만 11년~14년까지 불펜에서 쏠쏠히 활약해 주었으며 최동수, 안치용이 나름 활약을 해 주었기에 오히려 이겼다고 봐도 무방하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박현준이 조작범이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고 야구에 만약은 없다.
정리하자면, '''팀 차원에서의 장기적인 플랜 따위는 안중에 없이 팀의 미래를 희생해서 본인의 임기 내에 성적을 내기 위해''' 최대한 많은 자원을 갖춰놓으려는 스타일. 윗 항목에 나와있는 노장 수집에 집착하는 것도 결국 본인의 임기 내에 최대한 쥐어짜낼 많은 자원을 갖춰놓으려는 욕심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는 '미래를 팔아 당장의 구멍을 메꾸는' 방식을 취했다. 그래도 나름 대박을 치는 경우도 종종 있어서 박현준-최동수, 안치용과 양훈-허도환 이성열이 대표적으로 김성근 주도의 성공적인 트레이드이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유망주라는 것이 게임처럼 딱딱 경험치만 먹인다고 터지지 않는다. MLB에서도 요 몇년간 연속으로 전체 1픽이 MLB 입성도 못하고 마이너에서 은퇴를 했는데 육성능력이 더 떨어지는 KBO에서는 오죽하랴. 한 해에 신고선수까지 10명이 훌쩍 넘는 선수를 뽑지만, 개중 2~3명 이상만 1군급 자원으로 성장시킬 수 있어도 성공한 드래프트로 평가받는 것이 KBO의 육성으로 기본적으로 유망주란 성공확률이 20~30%도 안 되는 복권인 것이다. 게다가 안 그래도 유망주란 성공확률이 낮은 복권인데 개중에서 거의 확실히 성공할 것 같은 자원은 KBO에서는 절대 시장에 내놓지 않아서, 결과적으로 터질 가능성이 낮은 유망주를 전성기 나이를 지난 베테랑과 바꾸는 셈인데 베테랑은 이미 검증된 자원으로 어쨌든 1군에서 써먹을 수 있으며 오히려 일시적으로라도 베테랑이 폼을 회복할 확률은 성공확률 낮은 유망주가 터질 확률에 비해 KBO에서는 결코 낮지 않아서 김성근의 트레이드가 성공적인 트레이드가 많았던 것.
단적으로 한화 부임 시절 트레이드 중 결국 김성근이 보낸 유망주 중 터진 것은 노수광이 대표적이고 임기영과 양훈은 반짝활약을 보여줬지만 부진하고 있다. 그 노수광도 돌고돌아 트레이드로 몇 년 후 한화로 다시 돌아왔다.
이를 두고 김성근이 영입한 노장들을 나름 쏠쏠하게 써먹었다고 하는데 확실하게 파헤쳐보자. 한화 감독시절 김성근 전권 행사하던 2015년도와 2016년도에 트레이드 및 드래프트, 방출선수 줍기로 데려온 노장은 차일목, 이성열, 허도환, 송신영, 장기영, 이재우, 오윤, 임준섭, 박성호, 이종환, 임경완, 권용관, 황선일, 윤중환으로 총 14명 있는데 그나마 써먹은 선수는 차일목, 이성열, 임준섭이며 허도환은 후일 2억원 주며 이적하였기 때문에 총 4명이다. 그 외에는 권용관은 1군에서 활동했지만 처참한 수비임에도 중용받아서 양아들로 비판받았을 정도여서 써먹었다고는 못 한다. 한마디로 성공률은 28% 소수점 1자리를 반올림 쳐도 29%. 대략 10명 넘게 뽑는 드래프트에서 1군급 자원을 2~3명 정도 건지면 대풍작이라고 하는데, 29%면 드래프트 대박친 것과 맞먹는 성공률인 것. 29%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말하는데 29%는 굉장히 높은 성공률이다. 단적으로 반대급부로 보낸 선수들은 노수광 단 한명만이 1군에서 유의미한 성적을 남기고 있으며, 1군에서 터질듯 말 듯 하는 임기영까지 1.5명 정도만이 살아남아 있어서 29%는 커녕 10퍼센트도 안 된다. 김성근의 트레이드는 방향성이 문제지,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객관적으로 트레이드 자체는 굉장히 성공적인 트레이드다.
물론 이는 단기적으로 통용되는 방식이며 팀의 페이롤과 선수단 나이를 급증시키는 부작용이 있기야 한데, 야구단으로 돈을 버는 것이 아닌 KBO이기에 페이롤은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까놓고 페이롤 좀 올라가도 기업 윗선에서 쿠사리나 먹는 수준으로 끝나지, 그것 때문에 구단이 망할 일은 없기 때문이다. MLB야 구단이 자생을 하므로 페이롤이 치솟으면 외부에서 빚 내서 선수 월급 줘야 하고, 그러다 보면 아예 구단주가 못해먹겠다고 구단 경영에서 손을 떼기도 하는데, KBO는 원년구단들은 30년 가까이 적자경영을 하며 모기업 지원금으로 굴러가고 있지만, MLB에서는 30년은 커녕 10년만 KBO식으로 경영하래도 할 구단주가 없다. 현대가 망한 것은 모기업이 기울어서 구단까지 망한 것이지, 구단이 모기업을 망하게 한 것이 아니다. 모기업이 건재한 이상 KBO에서는 페이롤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나마 문제가 되는 것은 팀의 연령대 문제 정도. 물론 영원히 젊은 팀은 없으니 전성기가 있으면 암흑기도 오지만, 김성근의 이런 방식은 전성기를 더욱 강력하게 보낼 수 있는 대신 팀의 암흑기도 더욱 빨리 찾아오게 만든다.

7.4. 선수 군입대 억제


제대로 기회도 안주면서 어린 선수들의 군입대는 막을 수 있는데까지 막는다. 중간중간 공백이 생기면 쓸지도 모른다는게 그 이유. 김성근의 반대로 제때 군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가 결국 경찰청이나 상무 야구단 지원 가능 나이를 넘기 버리고 김성근 경질 후에야 현역이나 공익으로 군대를 다녀오는 비극이 상당히 자주 발생한다. 여기서도 자신의 커리어를 위해서 선수들의 야구인생 따위는 안중에 없는 김성근의 일면이 잘 드러난다.
당장 SK 시절만 해도 고효준, 이영욱, 조영민이 김성근 감독의 반대로 제대에 군에 입대하지 못하고 붙잡혀 있다가 결국 군 야구단 입단 가능 시기를 넘어서까지 남아있다가 결국 공익 등으로 병역을 해결했다. 모창민이재원[10], 나주환도 김성근의 반대로 입대를 못하고 계속해서 붙잡혀 있다가 결국 김성근의 동의 없이 구단 프런트가 상무와 경찰청 입대를 허락해서 병역을 해결한 적이 있다. 이 사건 때문에 김성근은 격노했고 프런트와의 갈등이 더욱 심화되었다.

8. 구시대적 야구 이론 맹신


'''"확신에 사로잡혀 변화할 생각이 없는 지도자가 실패한다."'''

- 실패학의 대가 시드니 핑켈스타인 다트머스 대학교 경영대학원 교수

김성근 개인팬들은 김성근이 현재 크게 비판받고 있는 혹사지옥훈련이 90년대까지의 다른 감독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스포츠의학과 트레이닝방법론이 후진적이고 '''정신력 제일주의'''가 금과옥조처럼 받아들여지던 과거에는 극소수를 제외하곤 모든 지도자들이 혹사와 지옥훈련을 당연하게 여겼다. 하지만 80~90년대 당시 기준으로도 김성근의 혹사와 지옥훈련은 독보적인 수준으로 이를 비판하는 언론 기사를 지금도 쉽게 찾을 수 있다. 만 35세[11]불펜 투수를 선발 3경기 완투를 포함헤서 무려 52경기(14선발) 188이닝을 던지게한 1991년 김성길이나 오로지 중간계투로'''만''' 70경기 157과 2/3이닝을 등판시킨 1997년 김현욱(야구)의 사례는 사회적으로도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야구계에서 2000년대 들어 보다 개선된 야구이론과 훈련법을 적극 수용하면서 '''기존의 잘못된''' 야구 이론들에 대해 반성과 수정이 있었지만, 김성근은 과거부터 행해왔던 구식 야구이론과 훈련법을 아직도 고수한다는 점이다.
물론 과거 이론이라고 무조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김성근의 문제점은 당시 배운 오래된 야구이론을 변화없이 신봉했던 점이지, 야구를 제대로 못 배운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알려진 김성근은 밑바닥부터 시작했음을 강조하기 위해 학창시절 강에서 피칭자세로 돌멩이를 던져서 훈련하였으며 만약에 실력이 있었다면 프로에 갔겠지만 동아리 수준 야구팀에 본격적인 야구는 어느 실업팀서 몇개월 던진 것 뿐이다. 전 서술자는 김성근이 실업야구 선수 시절 투수로 뛰며 시즌 20승과 노히트노런 등을 올린 인물이라며 야구를 배운 사람이라 서술했는데 엄연히 못배운게 맞다.
나중에 LG 감독 경질 이후 일본에 직접 유학하여 발렌타인 감독에게 많이 배웠다곤 하는데 대체 뭘 배우고 왔는지 감이 안잡히는 경우가 많다.

8.1. 웨이트 트레이닝 경시 및 체중 감량 강요


김성근이 주장하는 야구이론으로는 대표적으로 '''웨이트 트레이닝 경시'''를 들 수 있다. 김성근은 선수들의 웨이트 트레이닝에 대해 극히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김성근이 웨이트 트레이닝에 부정적인 이유는 과거 일본에서 투수의 웨이트 트레이닝에 부정적이었다는 것인데, 당시 일본에서는 '''쓸데없는 근육이 붙으면 투구 밸런스가 망가진다'''는 속설이 있었다. 물론 이것은 과거의 속설이고, 현재 일본 야구에서는 웨이트 트레이닝을 어느 정도는 중요시하고 있다. 다만 이것도 이젠 2000년대 초중반의 이야기고 2010년대 후반은 과도한 웨이트의 부작용을 겪는 투수가 속속 등장함에 따라 무조건 증량보다는 투수 본인에게 맞는 밸런스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결론으로 돌아가는 모양새. 김성근의 경우 웨이트로 인한 근육 증강이 꼭 필요한 경우에도 웨이트를 권하지 않는다는 단점은 있으며 대표적으로 벌크업의 대명사 이지풍 코치 밑에서 벌크업을 한 타자들 중 박병호, 강정호, 김민성 김하성, 유한준 등 더 발전한 타자들도 있다 .

"폼 이외에 '''우리 투수들에게 문제가 되는 건 웨이트 트레이닝에서 지나치게 무게가 높은 것을 들고 있다는 점'''이다. 쓸데없는 근육을 너무 많이 붙인다. ... 근육은 던질수록 단련되는 거지, 안 던지면 약해지는거다. 약해진 상태에서 던지니까 아픈 거다. 그건 우리나라 야구가 지나치게 미국화된 데서도 원인을 찾을 수 있다." - 김성근 인터뷰

"요즘 젊은 선수들이 웨이트 트레이닝에 지나치게 시간을 쏟는다. 그래서 유연성이 없다." - 김성근, 선수들 몸 관리에 탄식

"이치로의 예를 들어보자 ... 몇 억짜리 웨이트 트레이닝 시설을 집에 설치했다가 금세 버렸다. 이유는 야구에 도움이 안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 김성근 인터뷰

"또 하나는 (이치로가) 일본시절보다 웨이트 트레이닝을 줄였다는 거다. 웨이트 트레이닝이 야구선수에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걸 메이저리그에 가서 느꼈을 거다. 웨이트 트레이닝을 시작했던 이치로가 원했던 건 이소룡 같은 몸매였다. 하지만 실제 경기에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걸 확인한 뒤로 줄였다고 들었다." - 김성근 감독이 본 이종범, 이승엽, 그리고... 이치로

"이대호류현진을 맡게 되면 살을 빼게 할 것이다." - •2010년 11월 9일 KBS 승승장구에서

김성근은 2015년 유희관을 빼면 배 나온 투수중에 잘 던지는 투수가 없다고 말했다. '''"투수는 배가 나오면 끝이다. 공을 던질 때 허리가 안 넘어와서 팔이 벌어지게 되어있다"'''라며 뚱뚱한 메이저투수들을 본 잘 모르는 야구팬들을 갸웃하게 만드는 특유의 이론을 주장했다.
물론 과체중의 투수들은 나중에 나이가 들어 무릎에 문제가 빨리 오는 경우가 있고 김성근의 이론은 비만이 되면 허리가 안넘어 오고 팔이 벌어지기 때문에 좋은 투구를 할 수 없다는 것인데, 메이저리그에서 멀쩡히 공 잘 던지는 배나온 투수들이 있다. 물론 이는 야구를 해본 사람이라면 단박에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다. 넘어오다, 벌어지다는 야구의 관용적 표현인데 야구를 잘 모르니 김성근의 말을 문자 그대로밖에 이해할 수 없고 그렇다보니 이해를 못하는 것. 외국인이 뜨거운 국물을 '시원하다' 고 칭하는 것을 이해 못하고 왜 한국인은 뜨거운 것을 cool이라고 부르냐며 비웃는 것과 비슷하다.
기본적으로 공은 상반신으로만 던지는 투수도 있지만 주로 피지컬이 좋은 MLB투수들이 그렇고 동양투수의 경우 하체까지 전신을 이용하여 던지는데, 허리에 지방이 많이 생기면 회전력이 감소하고 과도한 지방을 척추가 지탱해야 하니 줄어든 몸통의 회전력에 의해 릴리스 포인트가 자연스레 불안해지거나 구속이 줄어드는 등 여러 고장이 나게 된다. 주로 공은 팔을 휘둘러서 던지는 것일 거라 생각하는데, 그렇게 되면 100구씩이나 던질 수가 없다. 공을 던지는 힘은 지면을 박차고 몸통의 회전력을 가해서 만들어내는 것이고 팔은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휘둘러지는' 것인데 몸통에 지방이 끼면 이 팔의 동작에도 자연스레 문제가 생기게 된다. 주로 몸통의 회전력을 크게 이용하는 사이드암 투수가 겪는 증상으로, 대표적으로 살이 쪄서 배가 나오고 구위와 제구력이 하락한 한현희가 있다. 그래서 사이드암은 체중관리가 굉장히 중요하다. 물론 사이드암이 가장 큰 영향을 받지만 사이드암만 체중증가의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니고 자기가 지탱할 수 있는 밸런스 이상으로 살이 찌게 되면 어느 투수나 겪는다. 허리가 안 넘어온다는 이야기는 허리가 충분히 돌지 못해 회전력을 충분히 싣지 못한다는 얘기고 팔이 벌어진다는 얘기는 그 상태에서 본래 꽉 죄여줘야 할 릴리스포인트가 불안해진 채 릴리스된다는 이야기다. 웨이트로 근육이 늘면 구속이야 증가하겠지만 본인 허리가 감당할 수 있는 무게 이상의 과도한 근육의 증량은 지방과 마찬가지로 밸런스에 영향을 끼쳐 릴리스에 악영향을 준다.
물론 미국 넓은 만큼 전신을 활용하는 투수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주로' MLB투수가 그렇다고 썼다. 한국에서도 상체위주의 투구를 하는 선수가 없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상반신 위주의 피칭만으로 사바시아가 호투를 한다고 쓴 것도 아니고 뚱뚱한 투수들은 그만큼 배가 나와도 감당이 되는 유연성과 아예 거기에 맞춘 신체의 밸런스, 허리에 의존하지 않는 상반신 위주의 투구 등으로 지탱을 하니까 그래도 되는 것이라고, 단순히 상반신 위주의 투구만이 아닌 몸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유연성, 거구에 맞춰진 밸런스 등 여러 가지 요인을 함께 적어놓았다. 보고싶은 것만 보는가? 여튼 투수가 본래 좋았던 공을 잃어버리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과도한 증량(근육이건 지방이건)으로 인한 밸런스 상실은 예로부터 많은 투수들이 겪어왔던 문제로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라고 꼽기에 부족함이 없다.
과도한 웨이트를 금기시하는 것도 그런 이유로, 웨이트로 근력이 늘면 구속이야 증가하겠지만 과도한 근육의 증량은 지방과 마찬가지로 밸런스에 영향을 끼쳐 릴리스에 악영향을 주기 때문. 아무리 95마일 던져 봤자 전부 볼이면 무엇하겠는가? 김성근은 웨이트도 싫어했지만 그냥 살찐 것도 싫어했다. 밸런스를 저해하는 요소는 어쨌든 근육이건 지방이건 싫어했던 것.
김성근의 특유의 이론으로 망가진 사례로는 최근의 양훈 사례를 들 수 있다. 한화에 부임한 김성근은 몸무게가 100Kg가 넘는 선수들에게 예외없이 혹독한 체중 감량을 지시했다. 김성근은 190이 넘는 장신에 110킬로의 거구의 양훈에게도 20킬로가 넘는 다이어트를 지시했고, 아울러 투구폼을 개조시켰다. 그러나 그 결과 양훈의 투구밸런스가 무너졌고, 직구구속이 120킬로대로 떨어지면서 망가져 버렸다. 양훈이 김성근의 잘못된 훈련 방법으로 망가졌다는 사실을 간파한 넥센 염경엽 감독은 한화에 양훈의 트레이드를 먼저 요청했고, 이에 김성근은 양훈을 넥센으로 트레이드해 버렸다. 넥센 염경엽 감독과 이지풍 트레이닝코치는 양훈의 구속이 떨어진 것은 체중 감량 때문이라면서 양훈에게 몸무게를 불릴 것을 지시했다. '''웨이트 트레이닝'''과 '''근력 운동'''을 통해 근육을 늘리는데 신경썼고 양훈에게 '''밸런스에 대해 편안하게 던지라''' 했다. 결국 양훈이 몸무게를 일부 회복하자 구속이 살아나는 신기한 일이 발생했는데, 이는 결국 반 시즌짜리 반짝 리바운딩에 지나지 않았다. 오히려 과도한 근력운동으로 인한 제구력의 상실로 양훈은 전보다 못 한 성적을 기록하고 은퇴에 이르게 된다. 무조건적인 감량도 좋지 않지만 밸런스를 고려하지 않은 무조건적인 증량은 더 무서운 것이라는 실제 사례.
김성근은 타자들에도 웨이트 트레이닝을 자제하고 체중을 감량할 것을 강조했다. 2008년에는 이승엽에게 완벽하지 않은 몸상태로 무리하다가 더 큰 부상이 올 수 있다는 이유로 웨이트 트레이닝을 자제하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기사에 따르면 김성근은 선수들이 과도한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몸집을 부풀리는 것에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 근육이 커지면 그동안 쌓아왔던 스윙 궤적이나 중심이동, 허리회전 속도 등이 부정적인 영향을 받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김성근은 종합적인 밸런스가 중요하며 파워 하나에만 의지해서는 안된다고 늘 말해왔다.
김성근이 SK 감독으로 있던 시절 이호준은 무리한 체중 감량을 요구받았다가 체력 저하에 시달리며 타율이 곤두박질 친 적이 있었다. 이호준은 2009년 무릎 수술 직후 10Kg 이상 체중을 빼라는 지시를 받고 체중을 101Kg에서 89Kg로 12Kg나 체중을 감량한 적이 있었다. 이호준의 무리한 체중 감량에 대해서 당시에도 우려하는 시각이 많았다.

거포에게 기본적인 체격과 몸무게는 타구의 비거리를 늘리는데 필수라고 생각된다. 그런만큼 이호준의 다이어트는 우려의 시선이 있기도 했다. #

체중을 감량한 후 이호준은 예전에는 30개를 쳐도 힘들지 않던 것이 살을 빼고 난 후 10개를 쳐도 힘들었다고 한다. 타율도 2할 4푼대로 곤두박칠치고 말았다. 이호준 인터뷰
2015년 김성근이 한화로 부임한 후 한화 야수들도 줄줄이 체중을 감량할 것을 강요받았다. 김태균은 2015년 스프링캠프에서 5Kg를 감량했다. 그러나 체중 감량의 결과 부진으로 이어졌다.

김태균은 사실 김성근 감독 부임 후 체중 감량 논란에 직면했다. 어느 정도 몸무게가 나가야 장타력도 따르는데 체중을 줄여야 하는 팀 분위기 속에 고전을 면하지 못한다는 얘기가 돌았다. 여기에 마음고생도 심했다.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주포로서 팀의 반등을 이끌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컸다. #

김성근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타자들의 웨이트 트레이닝을 쓸모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그때마다 수시로 이치로의 예를 들곤 했다. 그러나 김성근의 말과 달리 실제 이치로는 호텔에 개인 트레이닝 공간을 설치할 정도로 웨이트 트레이닝에 적극적인 선수이다.

이치로는 비시즌 겨울 일본 호텔에서 묵을 때 호텔 창고를 개인 트레이닝 공간으로 탈바꿈시킨 뒤 특수제작된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훈련한다. 일반 웨이트 트레이닝 기구는 기구별로 특정 부위만 강화되게 설계돼 있으나 이치로가 사용하는 특수 트레이닝 기구는 야구를 할 때 사용되는 어깨, 골반, 엉덩이 쪽 근육을 한꺼번에 단련시킬 수 있다. 일본 기업인 월드윙 엔터프라이즈에서 제작한 이치로만을 위한 맞춤 설계용 트레이닝 기구라고 한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이 트레이닝 기구는 근육의 이완과 긴장을 반복시키면서 '''유연성'''을 증가시켜 몸의 동작 반경을 넓혀준다”고 했다.

이치로는 “한때는 몸무게에서 힘이 나온다고 믿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나의 잠재된 힘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방법을 이제는 안다”며 “나는 유연성이 나에게 힘을 준다고 믿는다. 유연성이 나의 무기”라고 했다. “ . - 스즈키 이치로는 철학자다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으로 처음에는 기사에서 김성근을 까기에 유리한 부분만 발췌되어 있었다. 그 다음 문장을 읽어보면 오히려 이치로는 맹목적인 과도한 벌크업보다 자신에게 필요한 유연성을 높이기 위해 자기 전용 웨이트 트레이닝을 구비해 다뤘다.
게다가 이치로가 제작한 저 기구는 말이 웨이트 트레이닝 기구이지 기사에도 뻔히 근육의 펌핑을 위한 것이 아닌 유연성을 위한 것이라는 설명이 되어 있다. 실제로 이치로 또한 유연성을 중시하고 웨이트를 경시하는 타자 중 하나로 마이애미 말린스 시절 '''웨이트 그런거 하나도 쓸모없다'''는 인터뷰를 남긴 적이 있다. 이전 서술에는 골반엉덩이는 유연성에 관련되어있지 펌핑하고 무슨 상관이냐 하는데 웨이트 트레이닝은 펌핑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해당 사이트와 같이 무리한 펌핑으로 거대해 진 근육이 걸리적 거리는 것이지 오히려 웨이트 트레이닝을 안 한 사람보다 유연성이 더 뛰어난 증명사진도 있다. 애당초 웨이트 트레이닝이 펌핑 이미지만 있어서 그렇지 일본에서는 초동부하 운동 이론을 따르는 신경발달 및 유연성 강화 전문 웨이트 트레이닝 센터가 있다. 웨이트한 근육은 딱딱하기 보다는 말캉말캉하여 유연성이 더 있으며 오히려 근육 활성화를 안 한 근육이 오히려 매우 딱딱하다. 그러나 야구현장에서 흔히 말하는 '웨이트' 란, 찬성측도 반대측도 일반적으로 근육 펌핑을 이야기한다. 실제로 이치로도, 근육 증량을 위한 웨이트를 했다가 본인이 이건 아니라고 판단, 저런 유연성을 기르는 식으로 방향을 튼 것. 이는 김성근뿐만 아니라, 장훈이나 아라이 타카히로 등 여러 야구 관계자들 입에서 공통적인 말(근육 트레이닝을 시도했다가 쓸모없다고 판단, 유연성 위주의 훈련으로 방향을 선회했다)이 나오고 있다.
웨이트 트레이닝을 경시하는 김성근의 태도는 한화 감독에 부임한 2015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2015년 고치 캠프에선 지옥 펑고와 수비훈련 때문에 시간이 없어서 웨이트 트레이닝를 거의 하지 못했다고 한다. 웨이트 트레이닝을 경시한 이런 훈련법은 살려조와 시즌중 원정경기 특타와 야간훈련과 더불어 후반기 한화 이글스 성적이 급전직하하는 원인으로 꼽힌다. 웨이트 트레이닝은 부상 방지에도 탁월한 효과가 입증되고 있는데, 한화에서 많은 선수들이 부상을 겪고 있는 것도 웨이트 트레이닝 부족과 연관된다는 지적이다.
김성근 감독이 일본에서 배워왔다는 이런 특유의 훈련 기법과 이론은 일본에서도 조금씩 다른 시선이 보이고는 있고, 웨이트를 하는 투수와 안 하는 투수가 반반 정도다. 노장선수의 경우 근력 유지와 부상 방지를 위해서 웨이트 트레이닝이 필요하다고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과거처럼 타자는 방망이, 투수는 볼보다 무거운 것을 들지 말라는 정도까지는 아니고 체력을 유지하기 위한 가벼운 운동은 권장하지만(김성근도 이정도는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 웨이트를 하면 늘어나는 근력으로 구속이 빨라지니 좋다는 파와 밸런스를 유지하는 것이 좋다는 파가 반반 정도로 나뉘고 있다.
다르빗슈 유가 메이저리그 와서 웨이트를 경험하고 했던 말이 '''"이 좋은 걸 왜 여태 안 했을까."''' 라며, 후회했을 정도의 웨이트파. 또한, 오타니 쇼헤이는 웨이트와 함께 먹는 양도 늘렸고, 구속을 더 '''증가(!!!)'''시키는 쪽으로 가고 있을 정도.
오타니도 지나친 벌크업으로 투구와 타석 양쪽에서 완전히 그 폼을 잃었다. 일본 야구계의 거장 장훈 또한 저건 야구선수의 몸이 아니라는 일침을 날렸다. 투수와 타자, 그것도 장타자의 밸런스는 분명 다르다. 둘 사이에서 적절한 타협점을 찾아야지 과도한 웨이트는 타자도 타자지만 투수에게는 독이나 다름없다. 타자 쪽에서도 과도한 웨이트로 인해 흔들리는 정확성이 보이고 있는데, 기사 내에서 전문가들은 공통적으로 투구에 맞추어 멈추었다가 나온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데, 과도해진 상반신의 근육을 힙턴만으로는 충분히 지탱할 수 없어서 한번 멈추었다가 나누어서 회전하는 것. 이 점을 해소하려면 타격폼 수정으로 인위적으로 한번에 회전시키던가, 하반신이 지탱할 수 있을 정도로만 근육을 맞추던가(하반신을 증량하느냐 상반신을 감량하느냐 어느 쪽이든) 둘 중 하나다. 그런데 인위적으로 골반과 무릎이 지탱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 한번에 회전을 시키려 들면 결국, 다친다. 장훈이 다친다고 말하는 게 허슬플레이시의 부상도 있지만, 이 부상을 말하는 것. 오타니가 고질적인 무릎부상으로 하반신의 웨이트가 상대적으로 힘든 것을 감안하면, 결국 정답은 명백하며, 과도한 웨이트가 독으로 돌아온 셈이다.
현대 야구에서 웨이트 트레이닝의 효과와 중요성이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입증되자 이제 김성근 감독팬들은 말을 바꿔 김성근 감독이 웨이트 트레이닝을 경시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노리타들은 김성근 감독이 한화에서 웨이트조까지 짜서 운영했다는 기사를 들이대면서 반박했다. 물론 야구가 머리로 하는 공부도 아니고 근육을 쓰는 운동인 이상 웨이트 트레이닝 자체를 완전히 무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분명한 사실은 현재 프로야구 10개 구단 중에서 김성근 감독의 한화 이글스가 가장 웨이트 트레이닝을 적게 하는 팀이라는 점이며, 김성근 감독은 지금도 여전히 10개 구단 감독 중에서 웨이트 트레이닝에 가장 부정적인 감독이라는 점이다.
웨이트 트레이닝을 무시하는 김성근의 태도는 2017년에도 변하지 않았다. 심지어 김성근은 한화 투수들이 유독 많이 부상당하는 원인이 웨이트 트레이닝 탓이라고 말했다.

김성근 감독은 이 상황에 대해 크게 세 가지 이유를 꼽았다. 우선 상체 위주로 던지는 투수들이 많아진 게 잦은 부상의 첫 번째 원인이다. ... 김 감독은 “러닝이나 유연성이 아닌 '''웨이트트레이닝'''으로 근력을 키우는 선수들이 많다. 하체 밸런스가 잡혀있지 않은 상태에서 (상체의) 힘으로만 던지다보니 내구성이 떨어지지 않나 싶다”고 말했다. - 스포츠서울 2017년 1월 17일 장강훈 <

이 문제로 김성근을 비판하는 주된 이유가 2010년대 이지풍 트레이너의 넥센을 필두로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장타력을 길러서 성공하는 타자가 많은데 김성근은 왜 안 그러냐는 이유에서 비판이 많은데, 결론적으로 성공한 선수도 많지만 실패한 선수도 많다.
대표적으로 상술한 오타니가 있고 추신수 또한 웨이트 유행을 타서 웨이트를 했다가 가슴근육의 방해로 자기 스윙이 안 되어 자기의 장점을 살릴수 있는 만큼 밸런스를 조정한 뒤 이를 유지할 수 있는 웨이트만 한다는일화 교타자로서 포텐을 어느정도 터트렸다가 장타력을 기르겠다고 무리하게 웨이트를 했다가 밸런스를 잃고 완전히 몰락한 김문호나 마찬가지로 파워피쳐가 되어보겠다고 섣불리 웨이트를 했다가 몰락해서 투구폼 조정으로 부활 전까지 몇 년간 2군 붙박이였던 심수창이나 무리한 체중 감량으로 급속하게 구속저하로 떨어진 뒤 당시 히어로즈로 트레이드 된 양훈은 이지풍 코치 지도 아래 웨이트 트레이닝을 통해 매우 적합한 밸런스를 찍었을때 호투를 벌였으나 또 지나친 증량으로 이 밸런스가 무너지자 제구 난조로 방출되었다. 이 외에도 실패사례도 많다.
결국 종합적인 밸런스가 가장 중요하다는 어떤 스포츠 인이든 알고 있는 사실이며 과한 운동은 오히려 독인 사실도 다 인지하고 있다. 물론 이 밸런스가 깨지지 않는 선에서 근육을 키우면 좋지만 자기 몸이 이를 어느 정도까지 버틸 수 있는지는 운동을 하는 자신도 모른다. 오버클럭을 시도 안 하면 최소한 망가지진 않는 것과 비슷하다. 신체를 오버클럭을 하면 결국 어딘가 망가진다. 물론 대부분의 선수들은 운동선수인 만큼 어느 정도의 증량에는 버틸 수 있는 우수한 신체를 갖고 있으니 적당한 벌크업은 나쁘지 않지만 대표적으로 홍현우처럼 웨이트로 성공하자 더더욱 호성적을 노리고 행한 과도한 벌크업이 결국 밸런스를 무너뜨리고 올라가는 장타력과 구속에 취해 계속해서 웨이트를 하다가 오버 밸런스로 무너진 선수가 한둘이 아니다. 결국 야구는 종합적인 신체의 밸런스가 가장 중요한 것이 맞는데 이 밸런스를 위해 웨이트를 무조건 금지한 김성근의 방식은 융통성이 없었다. 실제로 양훈처럼 무조건적인 체중감량을 요구해서 망한 선수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밸런스를 가장 중시하는 방향성 자체는 옳긴 옳다. 밸런스를 유지하는 내에서는 적당한 근육의 증량은 분명 효과가 있는데도 무조건 금지하는 등 방식이 좀 이상해서 그렇지.

9. 역대 최악의 투수 혹사


“'''투수 어깨는 쓸수록 강해진다'''” - 김성근

'야구는 감독이 한다'고 주장하는 김성근식 야구의 가장 큰 한계는 바로 선수를 감독의 소유물이나 부속품 정도로 취급한다는 점이다. ... 김 감독은 자신의 지도자 인생 동안 혹사로 인하여 야구인생의 기로에 섰거나 은퇴의 길에 내몰린 수많은 선수들의 희생에 대하여 한 번도 진심으로 반성이나 유감을 표시한 적이 없다. 아예 혹사라는 개념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바로 자신이 잘못한 것이 없으니 책임져야할 것도 없는 것이다. 김 감독의 시각에서 모든 문제의 근원이란 혹사당하고 지쳐도 '똑바른 폼으로 공을 던지지 못했거나 근성이 부족한' 선수들이며 '제대로 지원을 해주지 않고 감독의 권한을 침범하는' 프런트와 고위층, '현장 사정을 모르고 외부에서 비판하는' 언론과 팬들이다. - 고장난 야신, 김성근 감독이 최악의 리더인 이유

불펜 투수들을 가능한 한 많이 돌려가며 상대팀 타자들을 막는 스타일의 '''벌떼야구'''로 유명하다. 김성근 본인은 정말 불펜야구를 선호해서라기보다는 제대로 긴 이닝을 소화하는 선발투수가 없고 구위 좋은 중계투수도 부족했던 현실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나온 것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그냥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다. 삼성에서도 스몰볼을 했다. '''종목을 불문하고 감독의 고유한 성향은 한번 굳어지면 변하지 않는다.''' 시대의 변화에 맞춰 보다 정교해질 순 있어도 스타일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종목은 다르지만 무리뉴가 팀 바뀌었다고 공격축구하던가? 펩 과르디올라가 팀 바뀌었다고 티키타카 버리던가? 단점을 보완해 갈뿐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무리뉴 휘하 첼시가 골 많이 넣었다고 공격축구 한다고 하는 사람있던가? 펩 휘하 뮌헨이 수비 탄탄히 했다고 수비축구한다고 하는 사람이 있나? 야구라고 다르지 않다. 유능하고 무능하고를 떠나서, 인간은 그렇게 쉽게 변하는 생물이 아니다.
김성근 감독의 지지자들에 따르면 그의 투수 교체는 다른 감독들의 단순한 불펜 교체와는 달리 체계적인 관리를 더한 것이라고 한다. SK와이번스 재임시절 당시 더그아웃에서 김성근 감독의 가까운 자리에는 경기 내용을 기록하는 구단 기록원 안교훈씨가 함께 했는데 기본 임무는 경기 내용 기록과 야구규약의 확인, 투수교체와 관계 있는 타임의 횟수, 그리고 투구수의 확인이며, 투구수는 감독이 직관적으로 알 수 있도록 명확하게 표시되었다. 벽에 붙어 있는 양 팀 라인업 카드에 투수들의 최근 3경기 투구수가 색깔별로 다르게 적힌다. 2경기 전 투구수는 빨간색,직전 경기 투구수는 파란색이다. 이 방식을 채택한 것은 감독이 투수 교체를 고려할 때 보다 빠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경기 전 김성근 감독 자리에는 또 하나의 투구수표가 자리잡는데,투수들이 불펜에서 공을 던진 횟수와 투구수가 포함된 숫자가 경기별로 적혀 감독은 이들 숫자들을 바탕으로 마운드를 운용한다. 관련 기사 그러나 한화 이글스 감독을 맡은 후 드러난 실제 투수 운용에서 이러한 관리는 온데간데 없었다. 불펜 투수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연투시키면서도 자신은 3연투시키지 않는다며 금방 들통날 거짓말을 하기도 했고, 어느날은 "아차"했다고 말하여 야구팬들의 실소를 자아내기도 했다.
일부 김성근 팬들은 김성근이 항상 불펜 위주의 벌때, 혹사 야구를 한 것은 아니라고 항변한다. 태평양 돌핀스 시절에는 정명원, 최창호, 박정현 3명의 선발투수를 확실한 주축으로 삼았으며 타자가 벌떼였다는 것. 또한 2009년 SK 와이번스의 경기당 투입한 투수 수는 3.9명으로 8개팀 중 6위였고[12] 2010년에는 8개팀 중 7위였다. 당시 김성근 감독의 성향은 선발이 길게 못 가더라도 불펜 투수 한사람 한사람의 이닝소화율을 높여 투수진 전체의 부담을 더는 것이었다. 잦은 등판과 불펜 투구 자체가 팔에 부담을 주는 만큼 혹사에서 자유로울 순 없지만 최소한 한화에서처럼 투수를 쏟아붓는 막장 운용은 아니었다는 것. 허나 예로 든 2009년과 2010년의 SK 와이번스의 선발진은 KBO 역사를 통틀어도 정말 손꼽을 만큼 풍족한 자원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2009년에는 송은범-카도쿠라 켄-김광현-고효준-게리 글로버로 방어율 1.97의 외국인투수가 5선발을 맡을 만큼 선발 자원이 풍부했고, 2010년에는 다승왕 김광현, 커리어 하이의 송은범, 카도쿠라 켄, 게리 글로버로 이어지는 막강한 선발진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SK를 제외하면 이렇게 5선발이 제대로 굴러가는 팀은 없었다. 그럼에도 2009년의 전병두는 11번의 선발 등판과 불펜 등판을 합쳐서 글로버의 105.2이닝보다 많은 133.2이닝을 던졌고, 2010년의 고효준은 10번의 선발 등판을 합쳐서 106이닝을 던졌던 것이다.
이렇게 KBO에서 매우 여유없는 불펜 운용을 처음 시작했기에 예전부터 혹사 논란이 무척 많은 감독이었다. 태평양 돌핀스 시절의 박정현[13],삼성 라이온즈 시절의 김성길, 쌍방울 레이더스 시절의 김현욱[14], 박노준[15], LG 트윈스 시절의 이동현, 장문석신윤호, SK 와이번스 시절 정우람, 전병두,[16] 이승호, 고효준, 채병용 등등. 80~90년대 일본식 단련법[17]을 신봉하며 100년 역사의 MLB에서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확립된 투수 로테이션과 휴식일에 대해서는 무시하는 경향을 보인다. 물론 본인의 부임시기에는 혹사로 부상당하지 않도록 나름 투수를 관리하는 노하우가 있다고 하지만 길지 않은 재임기간이 끝난 후에는 망가지는 투수도 많다. 2016년 한화에서 선수단 부상 사실에 대해 은폐와 거짓 발표를 했음이 확인되면서, 실은 이미 김성근 시절에 망가져있었던 걸 김성근이 알려지지 않게 막고 있다가 후임감독때 드러난것 아니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김성근의 팬들은 그의 재임기간 동안 시즌아웃당하는 투수가 거의 없다면서 혹사가 아니라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대부분의 선수들이 김성근 경질된 후에 부상을 겪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성길이나 전병두, 정명원처럼 김성근 부임 중에 망가진 투수도 적지 많다. 현재 한화 이글스에서도 여러 투수들이 수술과 재활과정을 거치고 있다. 투수의 어깨는 쓸수록 소모된다는 초크 이론과 100년 이상 역사의 메이저리그에서 취하는 운영방식을 봤을 때 김성근의 불펜 운용은 충분히 혹사로 볼 수 있다. 또 혹사 후의 관리 노하우가 뛰어나다는 견해도 있으나 실제 김성근이 맡았던 팀의 성적을 보면 SK 시절 딱 한번을 제외하고 그가 있던 모든 팀에서 첫해가 가장 성적이 좋고 둘째 해 셋째 해가 될수록 점점 성적이 떨어지는 공식이 있는데[18]이러한 성적 하락 현상도 혹사와 무관하다고 볼 수가 없다. 김성근이 지시하는 과중한 연습투구를 견뎌내면 괜찮지만 못견디면 애먼 투수하나 버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리고 당시에는 견뎌내서 괜찮아 보일지 몰라도 나중에 김성근이 경질되고 몇년 지나면 언젠가 탈이 되어 부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또 한화에서의 투수 운용에서 잘 드러나듯이, 김성근의 투수 기용의 중요한 문제점 중 하나는 보직이 따로 없이 없이 그때그때 마구잡이로 기용한다는 점이다. 선발로 등판했던 대부분의 선수들이 임시로라도 불펜 등판을 한 적이 있으며, 불펜을 뛰던 선수들이 땜빵 선발로 뛰기도 한다. 팀의 상황에 따라 투수의 보직이 일시적으로 바뀌는 것은 타팀에서도 일어나지만 김성근 감독의 한화는 유난히 이러한 현상이 심하다. 라루사리즘이 현대 야구의 대세가 된 건 이유가 있다. 선발 투수와 불펜 투수의 보직을 시즌 전 몸을 만들 때부터 미리 알려 투수가 자신의 보직에 맡게 몸을 만들게 하고, 시즌 중에는 투수의 보직을 어지간하면 바꾸지 않아 몸상태를 유지시키는 것은 어느덧 당연시 되고 있다. 결국 이러한 보직 파괴 역시 혹사와 전혀 무관할 수 없다. 이러한 보직 파괴식 마구잡이식 기용은 한화 이전에도 발견되는 김성근의 특징적인 투수 운용 방식이다. 투수진, 특히 선발 자원이 풍부했던 SK 시절과 삼성 시절에는 상대적으로 이런 경향이 적은 편이지만, 그랬던 삼성 시절에도 김성길처럼 선발, 불펜 가리지 않고 마구잡이로 혹사시키는 사례는 여전히 있었다. 태평양이나 쌍방울 시절에는 이런 보직 파괴식 마구잡이식 기용이 심했는데, 태평양 3총사나 쌍방울의 김현욱 등의 사례에서도 이런 마구잡이 기용 현상이 잘 나타나고 있다.

과거는 물론 지금의 한화까지 선수들은 개성을 잃은 채 공장 기계의 부품 마냥 돌아가기 일쑤였다. 하물며 기계도 무리하게 가동하다 보면 마모가 되고 닳아 결국 고장 나기 마련이다. - ‘송창식 혹사논란’ 김성근 감독 벌투의 추억

한화 이글스 부임 후 팀 성적을 올리기 위해 살려조로 대표되는 불펜 혹사와 2015년 하반기 시즌 선발, 불펜 투수의 보직 파괴와 투수들의 출장 후 일반적인 휴식일도 지켜주지 않는 변칙적인 투수 로테이션 운용을 하여 투수들의 부상 및 구위 저하에 DTD급 성적 급하락으로 김성근 감독의 경기운영 스타일이 10개구단 144경기의 장기 레이스를 펼치며 타자들의 벌크업과 타격기술 향상속도가 투수들의 구위 향상을 앞지르고 와일드카드로 인해 중위권팀들이 막판까지 이전투구하는 현 상황에는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노리타들은 대신, 김성근의 투수조련법과 관리능력으로 오히려 무명선수들이나 노망주들에게 절실함을 부여해 S급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써먹을 만한 A급, B급 선까지 끌어올린 역사는 많다고 말하고 있다. 쌍방울로 트레이드 되고 야구 그만둘 생각을 했다가 김성근 감독 부임으로 1년만 더 노력해보자고 마음 바꾸고 이후 리그 최강 슈퍼 미들맨으로 바뀐 김현욱이나, 신나게 혹사당하고 끝나버리긴 했지만 그 혹사 이전에는 아예 멘탈이 막장이라 구단에서조차 포기했었던 신윤호가 그랬다. 하지만 이 두 사례가 전부다. 김성근이 근 30년 동안 7개 팀에서 감독 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선수들을 지도했지만, 그가 키워내거나 부활시킨 선수들은 의외로 정말 적다. 고양 원더스 감독시절 외국인 선수였던 대럴 마데이의 상위리그로 올라가고자 하는 절실한 심리를 이용하여 무지막지한 혹사를 시켜 다음 해 부상을 당하게 한 반대 사례도 있다.관련 기사
김성근 본인은 혹사에 대해 철저한 부인과, 변명으로 일관하고 있다. 김성근과 그의 추종자들은 선수들이 혹사당했다고 분개하기보다는 중용해준 것을 고마워하는 경우가 많다고 변명하고 있다. 다만, 우리나라에서 그렇다고 혹사당한 선수가 이를 비판하고 지적할 수는 없는 게 현실이므로, 그 선수들이 감독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고 해서 이를 순진하게 믿을 수만은 없다. 누구나 혹사라고 인정하는 최동원, 염종석에게 강병철에 대한 의견을 물었을때도 이들은 감독에게 인정해줘서 고맙다는 똑같은 말을 했다. 또한 어쨌든 강병철은 그렇게 투수를 굴리면 본인이 혹사시켰다는 걸 인정한다. 어쩔 수 없었다라고 포장할 뿐. 최동원과의 대화 중 '우짜노, 여까지 왔는데.'가 그런 맥락이고, 염종석이 혹사당한 후 차년도에 염종석에 대한 재활을 주장했다. 구단에서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
그리고 30년간 감독생활 하다보니 한가지로 정리하긴 힘들고 같은 선수에게도 전혀 다르게 대한 측면이 있는지라 이런걸로 논쟁이 벌어지곤 한다. 예를들어 09년 김현수의 타구에 맞아 부상당한 김광현을 빨리 올리자는 의견을 거부하고 김광현 없이 한국시리즈를 치뤘다. 그동안 김성근 감독 혹사 예를 생각하면 이례적이긴 해도 그 김광현은 바로 이듬해인 2010년 다소 무리하게 이닝먹고 2011년 147구 벌투 등 무리한 운용끝에 어깨 부상을 당해 2013년까지 고생했다.
대체적으로 말하면 혹사를 많이 시키는 감독이 맞다.
2015년 9월 투수진의 혹사 논란에 대해 비판이 쏟아지는 가운데 김성근 감독은 혹사가 아니라는 인터뷰를 했다. 2015년 9월 5일 네이버-중앙일보 [사람 속으로] ‘야신’ 김성근 한화 감독-상대가 질릴 만큼, 지더라도 끝까지 싸워야 다음엔 이긴다 김성근의 저런 신념은 현재 한화 이글스 팀이 처한 상황과 대다수의 여론을 볼 때 비현실적이고, 납득하기 힘든 관점일 수 있다. 다른 팀의 지도자들과 선수, 그리고 구단 자체까지 시대에 따라 발전하고 있지만, 자신의 시계는 멈춘 채로 변화를 거부하며, 역량 역시 발전되는 것을 포기하는 자충수 같은 신념이자 자기 자신을 반박하는 모순적인 모습이 되어버렸다.
앞에도 인용된 코리아볼닷컴 인터뷰를 다시보면

“근데 혹사라고 하는 거는 부상자를 그냥 억지로 쓴다던지 ... 사람이 그 순간에 넘어가야 되는 선이 있어요, 라인이 있어요. 이 라인 넘어감으로서 그 사람이 갈 길을 찾아요. 이 순간에 아이가 무리시키지 말아야 한다 뭐 한다 이러면 사람을 못 만들어요. 그니까 여기 스타트해서 여기 결과를 목적진데 요기 스타트해서 여기 갈 동안 이 과정에서 '''불쌍하다, 가혹하다, 혹사시킨다 의식하는 리더는 다 실패에요.''' (선수를) 못 만들어요. 줄을 때까지 (선수를) 못 만들어요. 여기 스타트 그러면 여기(목적지) 가아돼. 요기(목적지) 갈 때 힘이 들 때 '''혹사하니까 불쌍하다고 의식을 가지는 사람은 얘(선수)를 망가뜨리는 사람이이에요.''' 이것을 요즘 리더가 착각하는 부분이에요. 여기로 가아해. 불쌍한 거는 어디서 불쌍하냐면 여기(목적지)에 못 갈 때 불쌍한 거에요. 이런 '''프로세계 속에서 불쌍함이라는 건 하나도 없어요.'''" - 김성근 "혹사 의식하는 리더는 실패한 리더!"

김성근은 '''혹사하니까 불쌍하다고 생각하면 선수를 못 키운다'''고 말했지만 위의 항목에서 알 수 있듯이 김성근은 혹사는 혹사대로 시키지만 그러면서 제대로 키워낸 선수는 거의 없다. 또 본인의 입으로 직접 "혹사라고 하는 거는 부상자를 그냥 억지로 쓴다던지" 하는 걸 말한다고 했는데, 김성근은 실제로 자신의 혹사 때문에 부상당한 선수를 억지로 써서 더 망가뜨린 경우가 많다. 부상당한 박노준을 무리하게 기용하다가 결국 은퇴 수순에 돌입하게 만들었고, 구원투수로 20승을 달성하게 하는 막장운용으로 부상을 얻은 김현욱도 결국 그해말 수술을 받았지만 미쳐 회복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다시 투입했고 결국 그는 남은 선수생활 내내 부상과 씨름하면서 보내야 했다.

10. 투수 운용의 대가?


세간에는 김성근이 투수 조련과 운영의 대가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우선 투수 육성 부문을 보면 윗 항목들에 나와 있듯이 김성근은 투수를 키워내지 못한다.
또한 투수진 운용에 있어서도 김성근의 능력은 크게 과장되어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김성근의 투수 운용 능력은 리그 평균 이하다. 현재의 한화 이글스에서의 막장 운용으로 김성근의 투수 운용 능력이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다. 일부 야구팬들은 김성근 감독이 일흔을 넘으면서 예전 같지 않지만 예전에는 투수 운용을 잘했다고 항변하기도 한다. 그러나 팀방어율 데이터를 살펴보면 과거에도 항상 김성근의 투수 운용 능력은 별로 좋지 않았다.
김성근이 맡았던 팀들의 팀방어율을 보면 김성근이 부임한 이후 팀방어율이 낮아진 경우도 있지만 높아진 경우도 있다. 태평양, 쌍방울, SK, 한화의 경우 김성근 감독 부임 후 팀방어율이 낮아졌으나, 삼성과 LG에서는 김성근 감독 부임 후 팀방어율이 높아졌다. 태평양, 삼성, 한화 등에서 김성근이 감독으로 부임할 때 구단이 선수들을 대거 현금트레이드로 사다주었던 점을 고려한다면 팀방어율이 낮아진 경우라고 해서 김성근의 지도력 때문만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아이러니한 것은 김성근 감독 부임과 더불어 무려 15명의 선수를 새로 영입했던 삼성 라이온즈의 경우 김성근 부임 후 팀방어율이 더 높아졌다는 사실이다.
김성근 퇴임 이후 기록을 보면 김성근의 투수 운용 능력이 수준 이하였다는 사실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흔히 일반적으로 "김성근이 맡았던 팀은 그가 경질당한 다음해 투수들이 줄부상당하면서 팀방어율이 오른다"는 이미지가 널리 알려져 있다. 이말은 처음에 김성근 팬들이 명장 김성근이 떠나면 후임 감독들의 평범한 지도력 때문에 팀방어율이 오른다는 잘못된 정보를 퍼뜨리면서 시작되었다. 나중에 일반 야구팬들은 이것을 김성근의 혹사로 투수진들이 망가지면서 팀방어율이 오르는 것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록을 살펴보면 김성근 경질 후에도 팀방어율은 별로 달라지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김성근 경질 이후 가장 방어율 크게 올라간 팀은 태평양으로 김성근 2년차인 3.68(1990시즌)보다 0.34 높아진 4.02(1991시즌)를 기록했는데, 1991~1992시즌 당시 태평양 투수진이 줄부상을 당하고 연이어 수술대에 올랐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김성근의 후임인 박영길과 정동진 감독이 대단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심지어 삼성의 경우 김성근이 경질된 후 팀방어율이 4.55(1992시즌)에서 2.95(1993시즌)으로 대폭 낮아졌다. OB 베어스도 김성근 경질 후 팀방어율이 소폭 낮아졌다. 후임 감독들이 혹사 후유증으로 신음하는 투수진을 가지고도 김성근과 별차이 없는 팀방어율을 기록하거나 오히려 팀방어율이 낮아졌다는 사실은 뒤집어 말해 김성근의 투수 운용 능력이 평균 이하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김성근이 투수 조련과 운용의 대가라는 인식은 완전히 허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가지 주목할만한 사실은 김성근 감독의 부임 첫해에 팀방어율이 가장 낮고 이후 계속 팀방어율이 높아진다는 점이다. 1986년 단한번의 예외를 제외하면 한번도 전년도보다 방어율이 낮아진 적이 없다. 이는 김성근 첫해에 노장 선수들을 대거 영입한 후 전력을 쥐어짜내 혹사시키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팀방어율이 내려가지만 이후 그 후유증으로 투수진이 줄부상을 겪으면서 김성근 임기 후반으로 갈수록 팀방어율이 높아지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11. 비과학적인 지옥훈련의 폐해 - 체력 저하와 부상자 속출


“나는 강한 훈련만이 훌륭한 선수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 리더는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 中

지옥훈련을 거쳐야만 천국에 올라갈 수 있어요.”

- JTBC 야구의 신 김성근

혹독한 지옥훈련은 김성근의 트레이드 마크 중 하나로, 김성근 야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80년대 OB 시절부터 강훈련으로 유명했고, LG 감독 시절에도 '''훈련 중독자'''라고 불렸다.

서경석: 저런 수장을 둔 선수들은 얼마나 행복하겠어요.

마해영: 제가 볼 땐 행복하진 않아요.

김성근: (웃음)

서경석: 밑에 안있어 보셔서 그런거 아니에요?

마해영: 음 간접경험이라는 게 있고요. 얘기를 들어보니까 쉬는 날도 없고, 너무나 훈련량이 많고 그런 부분, 과정은 너무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 MBC 스타로드토크 명사십리 김성근


"나이 먹은 아이들 연습 많이 시키는 거 비난이 많아요. 그면 야구 그만두면 돼요." - 김성근 감독, 연습이 힘들면 야구 그만해라

"연습 시키는데 힘이 드니까 (선수들이 나한테) 막 욕하더라고" - KBO 특별기획 야구를 말하다 - 김성근 편


"죽자사자 뛰는 걸 그렇게 많이 시켰어요. 완전 실미도 야구단이지. 야구단이 아니었어요." - 유지훤

"너무나 힘든거에요. 야 이건 해도해도 진짜 너무한다. 이건 인간이 할 수 있는 운동이 아니다. 그정도로 해요." - 김재현

"훈련할 때는 정말 욕도 하고 '이 영감, 빨리 안 죽나' 그런 생각도 사실 한대요" - 장강훈 기자

그러나 비과학적인 지옥훈련 때문에 선수들이 부상을 겪거나 시즌 후반 급속도로 체력이 저하되는 경우가 많다. 강훈련에다가 혹사까지 맞불려 김성근이 맡았던 팀에서는 부상자가 속출했다. 김성근 감독이 재임하던 시절 SK에서도 많은 부상자가 속출했다. 특히 김성근 3년차인 2009년에는 2년간의 강훈련과 혹사의 후유증이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아래에도 나오지만 김성근은 2009시즌은 부상자와의 싸움이었고 없는 전력으로 싸웠다고 스스로 말했을 정도였다. 2015년 한화 이글스 감독으로 부임하고 나서도 부상자들이 속출하고 있다. 특히 2015시즌부터 경기수가 크게 늘어난 여파로 한화에서 체력 저하와 부상 문제가 더욱 심각하게 드러나고 있다.
하지만 아래 인용구절에서 나왔듯이 김성근은 '''부상자가 많이 발생할수록 부상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는 구실로 훈련량을 더 늘리는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했다.'''
김성근은 자신의 과중한 훈련 때문에 부상이 생긴다는 지적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억울함을 토로했다.

“SK에게 2009년은 그야말로 부상자와의 싸움이었다. 2년 연속 우승 의 휴유증이 몰려왔다. 없는 전력으로 싸웠지만 선수 보급은 없었다. 알아주는 곳은 한 군데도 없고, 부족한 부분을 채우려고 훈련량을 늘리면 그게 또 문제가 됐다. 밖에서는 훈련 때문에 선수들 부상이 왔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게 사실처럼 받아들여졌다. 모든 훈련은 부상을 방지하기 위해서 하는 건데, 팀이나 언론에서 그런 식으로 인식하니 너무하다 싶었다."

- 김성근이다: 감독으로 말할 수 없었던 못다한 인생 이야기 p.59

사실의 인과관계를 전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모습이다. 이미 2년 동안 혹독한 훈련과 혹사로 부상자가 속출했음에도 불구하고, 선수가 없는데도 구단이 선수를 사다주지 않는다고 비판하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오히려 훈련량을 더 늘렸다는 것이다. 또 저런 상황에서 훈련량을 더 늘리면 부상자가 더욱 늘어날 것이라고 우려하는 구단과 언론이 잘못되었다며 비난하면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또 위에서 볼 수 있듯이 김성근은 자신의 과도한 훈련과 혹사로 인해 선수들이 부상으로 줄줄이 나가 떨어지고 나면 '''선수가 없다'''고 타령하고, '''선수가 없는데, 구단이 더이상 선수를 안사준다, 지원을 해주지 않는다'''라고 타령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불과 몇 페이지 뒤에 과도한 훈련 때문에 시즌 중반에 체력이 떨어져 힘든 상황을 맞이한다고 스스로 인정하기도 했다.

“내가 SK에 있을 때 우리는 다른 팀보다 훈련을 더 일찍 시작해서 더 오래, 더 많이 했다. 당연히 시즌 초반에 이미 컨디션이 올라와 있었고, 이때부터 치고 나갔다. 그러다가 5월 말에서 6월 초가 되면 힘든 상황을 맞았다. 그동안 주적된 피로 때문에 힘을 못 쓰는 것이다. 거의 한 달 내내 피로가 몰려서 온다."

- 김성근이다: 감독으로 말할 수 없었던 못다한 인생 이야기 p.66


11.1. 야수의 경우


야수들의 경우 시즌, 비시즌 구분없는 압도적인 강훈련을 실시했다.
특히 비시즌 기간에 혹독한 강훈련 때문에 타자들이 부상을 입는 경우가 많다.
김성근의 혹독한 비시즌 훈련 때문에 치명적인 부상을 당한 예로 박용택을 들 수 있다. 김성근 감독이 야신으로 한창 추앙받던 2009년 박용택은 KBS 이광용의 옐로우카드에 출연하여 LG 트윈스 입단 직후 마무리캠프에서 김성근 감독의 지시로 과도한 훈련을 하다가 어깨를 다쳤다고 밝혔다.

'''박용택''': 계약하고(프로입단 후), (마무리) 캠프[19]

가서 그때 감독님이 김성근 감독님이었죠. 마무리 캠프갔는데... (허탈한 웃음) 외야수가 공을 보통 하루에 많이 던져야 50개씩 던지는데, 많이 던져야! '''하루에 500개 이상 씩을 던졌어요.'''

'''이광용 캐스터''': 하필이면 또 김성근 감독이셨네요.

'''박용택''': 예. '''그러니깐 팔이 떨어지죠'''. 근데 감독님은 '''"그걸 이제 안 쓰던 근육을 써서 그렇다."'''(중략.)[20]

그래서 많이 던졌어요. 그러다보니 적응도 하고 이겨내려는 방법을 알아지고 점점. 그래서 이제 시즌 들어가고 했는데 한 2년 정도는 잘 던졌어요 그래도. 뭐 꾸역꾸역? (이하 생략)

- KBS 옐로우카드 79회, 박용택 “아내도 울고 나도 울었다” (26분 40초부터)

당시 오키나와 캠프에서 김성근은 박용택에게 노발대발하면서 훈련태도가 태만하다, 선수도 아니다라고 질책하고 짐을 싸서 한국으로 돌아가라고 지시했고, 결국 박용택은 약 한달간 2군에 쳐박혀 있어야 했다.
박용택은 입단 직후 마무리 캠프에서 김성근의 혹독한 훈련 때문에 프로 데뷔하면서부터 어깨 통증을 참으면서 선수생활을 해야만 했다. 이런 통증 속에서도 박용택은 2003년 보살 1위를 기록할 정도로 뛰어난 송구능력을 보였다. 그러나 결국 박용택은 프로 입단 3년만인 2004년시즌 어깨부상이 심해져 시즌 후에는 공을 못 던질 정도가 되었다. 이후 박용택은 꾸준한 재활을 거쳐야 했다. 이후 외야수로서 박용택은 중견수나 우익수로는 더이상 나서기 힘들어졌고, 좌익수로만 포지션이 국한되었다. 어깨부상 이후 박용택은 '''소녀어깨'''라는 오명을 듣고 있지만 자신의 송구능력을 커버하기 위해 넓은 수비 범위와 빠른 타구 판단 등 다른 부분으로 이를 만회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비시즌 뿐만 아니라 시즌 중에도 김성근의 훈련을 그칠 줄을 모른다. 시즌 중에는 경기 후 야간 특타를 자주 실시한다. 야간 특타 훈련은 자정 가까이, 때때로 자정 넘어서까지 계속한다. 한화 이글스 부임 후 이런 특타가 선수들에 대한 체벌성, 질책성 특타가 아니냐는 벌타 논란이 일었다. 또 야간 특타를 실시했을 때보다 하지 않았을 때 성적이 더 좋게 나타나는 경우가 많아서 특타의 효용성을 놓고 논란이 일기도 했다. 시즌 중에도 계속되는 강훈련은 야수들의 체력을 저하시킬 뿐만 아니라 선수들의 직접적인 부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일례로 1999년 5월 수비 훈련 도중 부상을 입은 쌍방울 조원우를 들 수 있다. 팀 타선의 주축이었던 박경완김기태가 차례로 빠져나간 후 쌍방울 타선은 조원우가 이끄는 상황이었다. 당시 조원우는 3시즌 연속 3할 타율을 유지하는 등 절정의 기량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1999년 5월 수비 '''훈련 도중''' 왼쪽 고관절 인대에 부상을 입고 시즌아웃되었다. 경기 중 부상을 입은 것도 아니고 어처구니 없게 훈련 중 부상으로 조원우가 시즌아웃된 후, 시즌 초 승률 3할 달성을 위해 전력 투구하고 있던 쌍방울[21]은 조원우가 시즌아웃된 후 급격히 추락하여 한달만에 2할 초반대까지 승률이 떨어졌다. 조원우는 부상에서 회복한 후에 이때 입은 부상의 후유증에 고질적으로 시달리면서 2할대의 평범한 타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베테랑 선수나 재능이 있는 선수들도 김성근의 훈련량을 제대로 쫒아오지 못하면 게으르다고 질책하면서 라인업에서 빼버리는 등의 조치를 취하며, 결국 뒷끝이 좋지 않게 되는 경우가 잦다. 예전부터 유명했던 한대화의 케이스가 대표적이다. OB 시절 한대화는 간염 환자였기 때문에 체력문제가 있어서 김성근의 훈련량을 따라갈 수 없었다. 하지만 김성근은 한대화의 사정을 봐주기는 커녕 게으르다면서 한대화를 질책하기만 하다가 결국 트레이드로 해태로 보냈다. 김응용 감독은 한대화의 건강 문제를 이해하고 그를 훈련에서 빼주는 등의 편의를 봐줬고, 한대화는 김응용의 관리 덕분에 해태의 레전드급 선수로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애초에 김응용 감독은 한대화 뿐만 아니라 팀 전체적으로도 훈련을 세게 시키는 감독은 아니었다. 실제로 평소에도 훈련시간이 타팀의 절반수준이라 외부에서 트레이드돼서 온 선수들은 해태의 훈련에 대해 "벌써 끝나요??" 하면서 놀랐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이렇듯 김응용 감독 당시 해태는 프로팀 중 훈련을 가장 적게 하는 팀이었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점을 전성기 해태가 소수의 인원으로도 운용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로 꼽기도 한다. 훈련으로 인한 체력소모가 적었기에 그만큼 경기에 집중할 수 있다고 보는 것.
김재현도 한때는 기용을 두고 마찰이 생겨 굉장히 껄끄러운 관계였다고 하며, 박용택이나 김광현, 최정같은 재능형 신예들에게도 굉장히 엄하게 대하는 편.

11.2. 투수의 경우


“'''팀에 투수가 수십명이다. 몇 명 다치는 건 어쩔 수 없다.'''”

- 스프링캠프 때의 과도한 투구 개수로 인한 부상에 관한 질문에 대한 김성근의 답변

많이 연습할수록 익숙해지는 게 당연한 말 아니야? 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말이 통하려면 '''평소에 운동을 별로 하지 않는 일반인''' 정도에나 가능하다. 최대한 관대하게 봐도 야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청소년들이나 해당된다. 그러나 프로 선수들은 운동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다. 즉 현역에서 뛴다면 이미 이런 수준은 넘어선 상태가 기본이다. 그러므로 선수들에게는 무작정 연습량을 늘리는 것보다 '''개개인의 특징과 포지션, 몸 상태에 맞춘 적절한 관리'''가 더 필요하다.
하지만 김성근 감독은 어깨는 던질수록 단련된다는 말도 안되는 쌍팔년도 논리를 가지고, 훈련을 빙자한 혹사를 하고 있는 현실이다. 투수의 경우에도 스프링캠프 때 과도한 투구를 시키는 것으로 유명하다. 메이저리그 기준으로 스프링캠프에서 100개 이상 투구하는 것은 미친 짓에 해당한다. 한화 이글스의 경우에는 김성근 감독 부임 이전 스프링캠프에서 하루 50개 내외의 투구를 했었다. 그러나 김성근 감독은 스프링캠프에서 하루에 무려 500개의 이상의 공을 던지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밝혔다. 실제로 한화의 스프링캠프에서 선수들은 하루에 최소 200개 이상에서 300개 이상에 달하는 투구를 했다. 이렇게 이미 스프링캠프에서 부터 과도한 투구로 지친 투수들은 시즌 중에는 혹사와 마구잡이식 기용에 직면하게 되고 결국 부상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한 프로야구단 단장이 김성근 감독에게 스프링캠프 때의 과도한 투구 개수에 대해 묻자, “그 정도를 못 시키면 지도자 자격이 없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단장이 “부상 관리라는 면도 있지 않느냐”라고 재차 묻자, 김성근 감독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팀에 투수가 수십명이다. 몇 명 다치는 건 어쩔 수 없다.

11.3. 오대산 극기훈련의 실상


"그때 마침 아는 사람, 도사같은 사람(변도사)이 있어가지고 오대산에 산행(훈련)을 갔어요." - 한국 현대사 증언 TV자서전 야구의 신 김성근 2부

김 감독의 판단을 좌지우지하는 B라는 사람이 김성근에게 오대산 극기훈련을 권유했다. 만약 그가 우악스런 훈련 대신 리듬체조를 권했다면 태평양 선수들은 따뜻한 실내체육관에서 겨우내 리듬체조를 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B를 ''''변도사'''’ 라고 불렀다. … 김성근 감독은 신통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존경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그의 말을 절대 신봉하는 스타일이다. ... 그런 김성근에게 오대산 극기훈련을 권한 것은, 이제 누구나 다 눈치챘겠지만 바로 변도사였던 것이다. - 이종남 기자의 [인천야구 이야기] 中

김성근은 태평양 감독에 부임한 직후, 평소 신통력을 가졌다고 믿고 따르던 '변도사(본명 변영호. 실제 직업은 한의사)'가 오대산에서 훈련을 하라고 하자 이를 정말 실행에 옮겼다. 위에 나오지만 김성근 본인이 직접 도사같은 사람이 하라고 해서 오대산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그런 말을 하기가 민망했는지 다른 데서는 과거 학생들을 지도하던 시절에 썼던 방법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훗날 오대산 극기훈련은 김성근의 정신력 강조를 보여주는 예로 포장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극기훈련에서 많은 선수들이 크고 작은 부상을 얻게 되어 시행 2년만에 조용히 그만두었다.
원래부터 강훈련으로 유명했던 김성근은 태평양 돌핀스 감독으로 부임하자마자 1989년 1월 6박7일 간의 오대산 극기훈련을 실시했다. 따뜻한 곳에서 전지훈련을 할 수도 있었지만, 오대산을 장소를 정한 것은 오대산으로 가라는 변도사의 말한마디 때문이었다. 김성근이 이런 유례없는 엉뚱한 훈련을 실시하겠다고 하자 태평양 구단은 "웬 미친짓이냐"는 반응을 보였다. 태평양 구단은 오대산 훈련의 실효성에 대해 회의적이었고 극기훈련을 허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김성근은 구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겨울 극기훈련을 추진했다. 구단이 비시즌 기간 훈련비용 지급 금지 방침 때문에 비용 지원을 해줄 수 없다고 하자 김성근은 선수들에게 '''참가비+일주일간의 식사 준비물+취사도구를 낼 것을 강요'''했다. 선수들이 직접 훈련비를 내는 것은 전례없는 일이기에 선수들이 반발했지만, 반발하는 선수들은 2군으로 보내겠다고 말하자 반발은 수그러들었다. 또 김성근은 구단이 오대산 훈련 비용을 지원해주지 않은 것을 구실로 첫시즌을 시작하기도 전에 프런트와 대립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당시 오대산은 밤에는 영하 15도 이하로 기온이 내려갔고, 눈이 1미터 이상 쌓여 있었다고 한다. 새벽 네시부터 시작해 한밤 중이 될 때까지 선수들은 오대산에서 극기훈련에 임해야 했다. 특수부대원처럼 눈밭에서 포복자세로 기어갔고, 웃통을 벗고 영하의 칼바람을 맞으며 30분간 기수련을 했다. 알몸으로 얼음물에 입수기, 맨발로 눈밭을 뛰어가는 구보도 이어졌다. 극기훈련 내용 중에는 동물행동 흉내내기도 있었다. 10km 산악구보와 50km 행군도 이어졌는데 새벽 6시에 출발해 그 다음날 새벽까지 걸어가는 강행군이었다. 행군 때는 사과가 얼어서 못 먹고 땅콩만 먹으면서 걸어야 했다. 버너를 가지고 직접 밥을 해먹었다.
당시 선수들은 이런 지옥훈련의 성과에 의문부호를 붙이며 거부반응을 보였다. 눈길을 달리고, 얼음물에 들어가는 것이 도대체 야구 잘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냐는 불만이 터져나왔다. 주장 김일권이 "과연 이렇게 훈련하는 것이 시즌때 야구를 하는 것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라고 반발하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반발하거나 훈련에서 낙오하면 2군으로 보낸다는 방침에 별 수 없이 이를 악물고 참아내야만 했다. 당시 얼마나 고생스러웠는지 김동기는 "칼이라도 있으면 (김성근을) 찔러 버리고 싶은 심정이다."고 말했고, 재일교포 김신부는 "연봉 1억원을 줘도 싫다. 당장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다."라고 말했다. 당시 선수들은 대놓고 "야 이 개새꺄", "이거 끝나면 죽여버리겠다"며 김성근을 욕했다고 한다.
선수들이 이렇게 대놓고 김성근 감독을 욕했던 것은 김성근 감독 본인만 지옥훈련에 따라가지 않고 다음 시즌을 구상한다는 이유로 따듯한 숙소에 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성근 감독이 지옥훈련 내내 혼자서 숙소에 틀어박혀 있었기 때문에 선수들은 불공평하다고 생각했지만 누구도 감독에게 성토하고 나서지는 못했다고 한다. 때문에 오히려 팀워크에 문제가 생길 판이 되자 주치의 주인욱 박사가 나섰다. 김성근은 가족병력상 간이 나쁘기 때문에 평소 간 건강에 무척 신경을 쓰고 있었고, 간에 좋다는 것이라면 어떤 투자도 아끼지 않았다. 이런 김성근에게 주인욱 박사는 "얼음물 찜질이 간에 그렇게 좋다"면서 얼음물에 들어갈 것을 설득했고, 오대산 훈련 막판에야 김성근은 숙소를 나와 얼음물에 들어갔다고 한다.

해가 질 무렵, 선수들은 오대산을 올랐다.

얼음 속에 들어가고,

허리만큼 쌓인 눈밭을 맨발로 걸었다.

깜깜한 밤에 짐승 소리를 함께 들었다.

그리고 한 팀이 되어 내 눈앞에 돌아왔다.

- 김성근이다: 감독으로 말할 수 없었던 못다한 인생 이야기 p.103

김성근 자서전인 "김성근이다"에 나와 있는 위의 시를 음미해보면 김성근 본인은 지옥훈련에 따라가지 않고 혼자 숙소에 남아있다가 밤이 되어 선수들이 돌아오는 것을 맞이하는 상황이 묘사되어 있다.
오대산 극기훈련은 1983년부터 연재되어 큰 인기를 끌고 1986년 영화로까지 제작되어 공전의 히트를 쳤던 공포의 외인구단에 나오는 실미도지옥훈련의 실사판이었다. 공포의 외인구단이 당시 국민적 인기를 끈 만화이자 영화이기도 했기에 이런 무지막지한 극기훈련에 대한 환상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한겨울 극기훈련 때문에 적지 않은 선수들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 때문에 김성근 감독은 이듬해인 1990년에는 소리소문도 없이 극기훈련 일정을 3박4일로 대폭 축소해서 형식적으로 실시했고, 그 다음해(1991년)부터는 더 이상 이런식의 극기훈련을 실시하지 않았다.
김성근은 SK 감독 시절 인터뷰에서 이런 식의 극기훈련은 부상위험이 높기 때문에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김성근)는 “사실 야구선수에게는 '''말이 안되는 훈련'''이었지. 자칫 행군 때 눈밭에서 발이라도 헛디뎠다면 어떻게 됐겠어. 지금 생각하면 '''다시는 하지 못할 훈련'''이야”라며 웃는다. - 잡초 승부사 김성근을 말한다 25

1989년 태평양이 극기훈련을 실시한 후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자, 김성근의 극기훈련도 높이 평가받았다. 하지만 1989년 시즌 태평양이 좋은 성적을 거둔 것은 '''태평양 그룹의 대대적인 투자'''와 박정현, 최창호, 정명원 등 '''신인 투수 3인방''' 덕분이라는 것이 주요한 평가다. 1988년 3월 9일 태평양 그룹이 청보 핀토스를 인수했는데, 시즌 시작 직전에 인수했던 만큼 1988년 시즌은 전력 보강을 비롯해 별다른 조취를 취할 수 없는 상태에서 그대로 시즌에 임해야 했다. 하지만 그해말 태평양은 대대적인 투자를 시작했다. 임신근 감독대행을 경질하고 김성근을 신임감독으로 영입한 것을 필두로 김성근이 요구한 코칭 스태프를 모두 영입했다. 기존 청보 핀토스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인적쇄신 차원이기도 했다. 또 태평양은 김성근이 요구했던 이충우, 정영기, 천창호, 김한근, 이광길 등을 영입하는 등 대대적으로 전력을 보강했고 또 시즌 중에도 활발한 트레이드를 통해 전력을 보강했다. 이렇게 태평양 그룹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던데다가 1989시즌 혜성처럼 나타난 신인 투수 3인방이 그해 평균자책점 2, 3, 4위를 차지하는 놀라운 활약을 펼친 덕분에 포스트시즌에 진출할 수 있었다는 것. OB 베어스 감독 시절, 강한 전력을 가지고도 5년 내내 중하위권을 전전했던 김성근 감독이 태평양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갑자기 기적 같은 지도력을 발휘해서 태평양을 포스트시즌에 진출시켰다는 신화는 말그대로 허상에 불과한 것이다.
어쨌거나 당시 김성근의 쌍팔년도식 극기훈련은 당시 다른 구단의 높으신 분들에게 깊은 인상을 줬다. 특히 삼성그룹 수뇌부는 삼성 라이온즈가 강력한 전력에도 불구하고 우승을 하지 못하는 이유를 '''정신력 부족''' 때문이라고 보고 있었는데, 태평양의 극기훈련을 보고는 김성근이야 말로 삼성의 정신력을 개조할 적임자라고 판단하여 그를 후임 감독으로 내정했다는 풍문도 있었다.
김성근이 오대산 극기훈련을 실시한 후 그해 태평양이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자 혹한기 극기훈련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곧바로 그해 겨울인 1990년 삼성, OB, 롯데 등이 태평양과 유사한 혹한기 극기훈련을 실시했다. OB는 태평양처럼 오대산에서, 롯데는 해병대에 의뢰해 한겨울에 유격훈련을 했다. 삼성 구단은 김성근의 지옥훈련에 크게 감명받았는지 그해 겨울에 2차례나 극기훈련을 실시했다. 우선 1월 6일부터 3박4일산 팔공산에서 극기훈련을 한 후 2월 3일 다시 선수들을 소집해 서울 근교의 한 공수부대에 입소해서 극기훈련을 치뤘다. 혹독한 훈련 속에서 막 현역을 은퇴하고 코치로 부임했던 권영호 실신하여 앰뷸런스에 실려가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원조 태평양은 3박 4일로 일정을 대폭 축소했고, 훈련 내용도 훨씬 완화되어 거의 형식적으로 실시했다.
그리고 그해 '''혹한기 극기훈련을 실시한 4개팀은 공교롭게도 그해 시원찮은 성적을 거두었다.''' 삼성은 전년도와 같은 정규시즌 4위에 그쳤고[22], OB는 5위에서 최하위인 7위로 떨어졌다. 극기훈련의 원조인 김성근의 태평양도 3위에서 5위로 떨어졌다. 전년도 꼴찌(7위)였던 롯데만이 6위로 겨우 최하위를 면했을 뿐이었다. '''반면 혹한기 극기훈련을 실시하지 않은 나머지 3개팀은 그해 정규리그 1~3위를 독식했다'''. 정규리그 1위인 LG, 2위 해태, 3위 빙그레 등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상위 3팀은 모두 동계 극기훈련과 무관했다. 때문에 1990년 열병처럼 퍼졌던 동계 극기훈련 붐은 한해 반짝하고 사그러들었다.
훗날 삼성 류중일 감독은 1990년 반짝 유행했던 김성근식 동계 극기훈련은 아무런 효과도 없었고 선수 부상만 발생시켰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김성근은 태평양 이후 더이상 혹한기 극기훈련은 실시하지 않지만, 선수들의 정신력을 바로잡기 위해 수시로 정신교육을 실시한다.

12. 스몰볼, 작전야구의 허실


항상 일본야구를 신봉하고, 메이저리그 야구를 비판해 왔던 김성근은 감독 시절 내내 일본식 스몰볼을 매우 신봉하는 모습을 보였다. 투수 부문에서는 잦은 투수 교체를 통해 '벌떼야구'를 구사했고, 공격부문에서는 특히 번트를 자주 이용해 한 점씩 쌓아가는 야구를 매우 선호하며, 수시로 작전을 걸고, 대타도 자주 기용한다. 번트와 작전야구를 선호하기 때문에 작전수행능력이 뛰어난 기동형 교타자를 우선적으로 기용하는 경향이 있고, 야수의 수비력을 공격력보다 절대적으로 우선한다.[23] 그래서 정근우. 이용규 등의 재간 좋고 기동력 좋은 야수들을 아끼는 성향을 보인다.
김성근의 스몰볼 야구는 김성근 특유의 비매너 플레이와 시너지(?) 작용을 일으키며 야구팬들에게 많은 반감을 불러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번트 위주의 재미없는 야구는 자팀 팬들에게도 많은 비판을 받았는데, 특히 막강한 공격력을 자랑했던 삼성 시절과, 호쾌한 신바람 야구가 캐치프레이즈였던 LG 감독 시절에 팬들의 반발이 많았다. 혹자는 이를 두고 다른 감독들이 장기를 둘 때 김성근 감독은 바둑을 두고 있다고 비유하기도 했다.
오늘날 세이버매트릭스를 이용한 각종 지표와 보고서들은 일관되게 '''번트가 강공보다 득점 확률을 떨어뜨린다'''는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때문에 현대 야구에서는 몇몇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강공이 번트보다 득점 확률이 높다고 보는 인식이 보편화되고 있다. 실제로 아랫 부분에 설명되어 있는 한화 이글스의 각종 지표들을 보면 김성근의 번트와 작전 남발 때문에 오히려 팀 성적이 더 나빠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객관적인 데이터에도 불구하고 김성근 감독은 예나 지금이나 번트를 매우 자주 구사한다. SK감독 시절인 2007년에 한 기자가 김성근 감독에게 대놓고 번트가 강공보다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지적한 적도 있었다.

'''기자''': 지난해 기록을 분석하니 '''번트는 강공보다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결과가 나왔다.

'''김성근''': 타순을 봐야지. 4번 타자 앞의 3번 타자에겐 나도 번트를 지시하지 않는다. 번트에 대해서라면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 ‘번트는 한 점을 내는 작전’이라고 하지만 '''번트로 대량 득점이 가능'''한 때도 있다. '''상대 실수'''를 이끌어낼 수도 있다. 주자가 2루에 가면 '''흔들리는 투수'''도 있다. 번트는 여러 목적을 갖고 하는 작전이다. - 김성근에게 SK 야구를 묻다

데이터 야구의 선구자라고 주장했던 것과 모순되게, 이 인터뷰에서 김성근 감독은 번트로 대량 득점이 가능하다는 식의 근거없는 본인의 주관적인 생각을 데이터보다 훨씬 우선시하는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이 인터뷰에서 기자는 잦은 투수 교체와 마구잡이식 기용에 대해 요즘 야구 추세와는 거꾸로 가는 것이 아니냐고 의문을 제기도 하고, '우리 야구는 깊이 파고들수록 맛이 있을 것이다.'라는 김성근의 말에 '깊이 파고들기 좀 어려운 야구 아닌가'라며 반박하는 등 오늘날 김성근 감독이 비판받는 문제점들에 대해 직설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고양 원더스 감독 시절이었다면 야신에게 딴지를 거는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겠지만 2007년 여름 당시 김성근은 아직 우승 경력도 없는 평범한 노장 감독이었을 뿐이었다.
번트 위주의 스몰볼이 오히려 득점 확률을 떨어뜨리는 구시대적 야구 방식이라는 사실을 지적할 때마다, 김성근의 추종자들이 곧잘 하는 레퍼토리가 김성근의 스몰볼은 팀 사정상 어쩔 수 없이 하는거고 강타자들을 많이 보유한 팀이었다면 2010년 롯데 같은 공격야구를 했을 것이라는 소리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김성근이 항상 약팀을 맡아왔다는 약자 프레임 자체도 거짓일 뿐만 아니라, 타선에 있어서도 김성근이 맡아왔던 팀들은 대부분 상위권 타선을 보유한 팀들이었다. '''김성근이 맡았던 팀 중에 태평양 돌핀스을 제외한 나머지 팀들은 모두 김성근이 맡기 직전 성적을 기준으로 할때 리그 상위권 타선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 좋은 타선을 가진 팀을 가지고도 항상 스몰볼 야구를 구사해 왔던 것.
OB 베어스는 원년에 투수력도 뛰어났지만 타선 역시 팀타율 1위를 찍었던 막강한 타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김성근 감독 부임 이후 번트 위주의 스몰볼 야구를 펼친 결과 팀타율은 점차 떨어졌다. 과도한 번트로 인해 '''팀홈런 순위는 5년 내내 최하위권'''을 기록했다. 김성근 감독이 재임했던 기간 동안 OB의 팀홈런 갯수는 충격적이게도 5년 내내 삼미 슈퍼스타즈, 청보 핀토스, 그리고 원년의 태평양 돌핀스보다 아래였다. 김성근 감독 마지막해인 1988년에는 팀타율도 태평양을 제치고 최하위를 기록했다.
태평양 돌핀스 시절에는 김성근 감독 부임과 동시에 김성근 감독이 원했던 선수를 다섯명이나 자유계약이나 현금트레이드 등으로 영입하였고 지속적인 트레이드로 선수를 보강하여 선수층이 두터워졌다. 그러나 선수 보강에도 불구하고 김성근 감독 부임 후 스몰볼 야구를 펼친 결과 팀공격력 지표는 나아지기는 커녕 그전보다 오히려 다소 떨어지는 모습을 보였다.
삼성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삼성은 이만수, 장효조를 비롯하여 리그 최강의 핵타선을 보유한 타격의 팀이었다. 김성근은 이런 삼성의 호화타선을 거느리고 스몰볼 성향의 번트야구를 했다. 삼성 시절 김성근의 번트야구는 호쾌한 야구를 선호했던 삼성팬들의 반발을 불러왔을 뿐만 아니라 삼성의 성적도 시원찮게 나오면서 실패로 귀결되고 말았다. 김성근 감독이 부임하기 직전인 1990년 삼성은 131개의 홈런으로 압도적인 리그 1위를 달성했지만, 김성근 감독 부임 이후 번트 위주의 야구와 주포였던 이만수 길들이기 등으로 팀 홈런 개수가 감소하였다. 그 결과 김성근 감독 재임기인 1991년과 1992년 삼성은 2년 연속으로 팀홈런 3위로 내려앉았다. 하지만 김성근 감독이 경질되자 이듬해인 1993년 삼성은 다시 133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팀홈런 1위를 되찾았다.
쌍방울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김성근은 자신이 맡기 전 쌍방울은 형편없는 팀이었다고 말해왔다. 하지만 김성근이 오기 전에도 쌍방울은 생각보다 괜찮은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타선의 경우 김기태, 박경완, 조원우 등 장타력을 갖춘 선수들을 갖추고 있었고, 세부 지표를 봐도 리그 중상위권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타격 지표를 보면 김성근 감독이 부임하기 직전인 1995년 쌍방울은 93개의 홈런으로 리그 4위를 기록했는데 이것은 팀홈런 2위였던 빙그레 이글스의 96개와 근소한 차이였다. 팀타율 등 다른 타격 지표도 4위 내외의 중위권을 기록하고 있었다. 1996년 김성근 감독이 부임하고 나서 쌍방울도 예외없이 극단적인 번트야구를 펼치게 되었다. 김성근 감독 부임 이후 '''팀홈런은 급감'''했다. 1995년 93개의 홈런을 때려냈던 쌍방울은 김성근 감독 1년차인 1996년 58개 홈런을 생산하며 리그 최하위를 기록하고 말았는데 이것은 팀홈런 7위였던 롯데 자이언츠의 72개와도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이었다. 다만 97년에는 리그 1위의 연봉총액을 기록할 만큼 돈질을 하며 대대적으로 선수를 보강한 덕분에 김성근의 번트야구는 계속되었지만 쌍방울의 팀홈런 순위도 3위로 올라왔다.
신바람 야구가 캐치프레이즈였던 LG 시절에도 지독할 정도로 번트를 대고 잦은 투수교체를 시도했다. LG 역시 김성근 감독이 부임하지 전해까지 8년간 7차례나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여 한차례 우승과 두차례 준우승을 했던 강팀으로 괜찮은 타선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런 김성근의 번트야구에 반발한 LG 팬들은 2002시즌 내내 김성근 감독 퇴진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결국 2002시즌 종료 후 김성근 감독이 직접 구본무 구단주를 찾아가서 연임해 줄 것을 통사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LG의 야구가 아니다"라는 이유로 경질되었다.
김성근 팬들은 그가 처음 SK 감독으로 부임했을 당시 확실한 스타플레이어, 4번 타자가 없고 전체적으로 타격이 약한 팀이었기 때문에 작전 야구로 갈 수 밖에 없었다고 주장한다. 물론 핑계다. 김성근 감독 당시 SK는 김성근 본인이나 노리타들의 말과 달리 타격이 약한 팀이 결코 아니었다. 당시 SK는 이호준, 김재현, 박재홍최정을 거느린 강력한 타선을 갖춘 팀이었다. 김성근이 부임하기 직전해이자 조범현 감독의 마지막해였던 2006년 SK는 팀홈런 2위, 팀OPS 3위를 기록한 준수한 장타력을 갖춘 팀이었다.
추가로 중심타자에게 번트를 시키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위의 SK 감독 시절 인터뷰 발언과는 상반되게 김성근은 팀의 중심타자였던 최정에게 엄청나게 많은 번트 지시를 했다. 특히 2010년 최정의 보내기 번트는 16회로 리그 전체 3위에 달하는 기록인데, 2위는 17회의 이현곤, 1위는 22회인 팀 동료 정근우였으니 SK를 제외한 전체 7개 팀에서 최정보다 많은 번트를 댄 선수는 단 한 명밖에 없었다는 의미이다. 당시 기록은 타출장 0.300/0.396/0.533, OPS 0.929, 20홈런, 80타점으로 클래식 기록으로 보나 세이버 기록으로 보나 최정은 팀 내 최고의 타자였다. 2011년 커리어 최초로 타출장 3-4-5를 기록하며 wRC+로는 리그 전체 3위였던 최정의 보내기 번트는 전년보다 다소 적은 13회였지만 여전히 데이터 야구를 한다는 말에 실소가 나올 정도로 많은 횟수였다. 사실 이 시즌에도 김성근이 40경기를 남기고 시즌 도중 경질되는 덕분에 전 시즌보다 적은 번트 기록으로 끝났지만, 경질 이전까지는 16회인 2010년의 기록 경신이 가능한 페이스였다.
최정은 김성근 sk 재임 기간인 07-11 시즌 간 무려 '''54개'''의 번트를 대서 통산 번트가 '''63개'''에 달하는데, 비슷한 통산 타격 성적의 다른 선수들과 비교하면 이게 얼마나 많은 것인지 알 수 있다. 최정을 제외한 ops 20위권 선수들 '''19명'''의 통산 번트 '''총합이 75개'''이고 20위권 선수 중 번트 기록이 2위, 3위인 양준혁과 김기태가 각각 14개, 11개인데 이는 최정의 2010년 단일 시즌 기록인 16개보다도 적다. ops 30위권으로 확장해도 27개인 박석민의 2배가 넘고 최정보다 많은 번트를 댄 선수를 찾으려면 ops 50위권까지 범위를 넓혀야 하는데, 50위권 내에서도 최정보다 많은 선수는 90개의 송지만 단 한 명밖에 없다.[24][25] 참고
김성근의 스몰볼은 그의 커리어 내내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세이버 매트릭스 등 데이터를 근거로 경기력 측면에서 번트와 작전이 팀에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마이너스가 된다는 비판에서 부터, 과도한 번트와 작전으로 재미없는 야구를 한다는 자팀팬들의 비난과, 작전으로 상대팀을 도발한다는 타팀팬들의 비판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김성근 감독은 커리어 내내 자신의 번트와 작전 야구에 대한 의지와 집착을 이어나갔다.
번트와 작전 야구에 대한 김성근 감독의 지론은 고양 원더스 감독이 된 후에도 바뀌지 않았는데, 한 인터뷰에서는 메이저리그도 최근 스몰볼을 추구한다고 주장하면서 "내 야구가 세계적 추세"라고 말하기도 했다.

“메이저리그 야구도 많이 바뀐 것 같다. 저번에 보니 초반부터 '''번트'''를 대고 '''작전'''도 많이 쓰고 있다. 마무리투수도 8회부터 등판하는 경우도 있다. '''내가 그렇게 야구할 때 얼마나 많은 욕을 들었나.''' 그런데 지금 메이저리그도 그런 야구를 한다. 내 야구가 세계적인 추세가 됐나보다”라며 껄껄 웃었다. - 고양 김성근 감독 "내 야구가 세계적 추세"

그러나 현실은 김성근의 주장과는 정반대다. 원래부터 미국 메이저리그는 한국, 일본 야구보다 번트의 비중이 낮았는데, 세이버메트릭스가 퍼지면서 번트의 비중은 더욱 줄어들었다. 결국 위 발언은 김성근이 현실을 고의로 왜곡해서 말했거나, 아니면 김성근이 야구를 보는 눈이 없거나 둘 중의 하나로 귀결된다.
김성근의 스몰볼과 작전야구는 한화 시절 완전한 실패를 겪으면서 야구팬들의 조롱거리로 전락한 상황이다. 김성근의 한화 이글스는 KBO리그에서 가장 많은 번트를 시도한 팀이었지만, 번트 이후 한화의 득점 성공률은 43.2%로 리그 8위에 그쳤다. 대타 역시 한화의 대타 성공률은 리그 7위에 불과했다. 때문에 '''김성근의 작전이 오히려 한화의 득점 확률을 떨어뜨렸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사실 타격 생산성 나쁜 타자가 나왔을때는 번트가 1점을 확실히 얻는데는 강공보다 확률이 높다는 것은 사실이며[26] 따라서 경기 종반인 8,9회에 1점으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상황이라면 메이저리그에서도 주저없이 번트를 하기도 하고, 세이버 매트리션들도 나쁘게 보지 않는다. 하지만 희생 번트를 성공해도 무사 1루라는 다득점 찬스를 1사 2루로 바꾸기 때문에 다득점을 낼 확률은 강공보다 크게 떨어진다는 점이다.
그런데 특히 문제는 김성근이 한화감독을 맡기 바로 전인 2014년부터 KBO리그는 엄청난 타고투저리그가 되었다는 점이다. KBO리그의 평균 팀당 득점은 2015년 5.46점이고, 2016년은 5.65점이니 다득점 포기하고 번트로 1점 뽑아봐야 역전당하기 일쑤다. 때문에 2010년대 중반부터 상식적인 KBO리그의 각 팀들은 희생번트를 줄이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2015년 한화의 희생번트 수는 139개의 압도적인 1위로 NC 다이노스(68개)와 넥센 히어로즈(61개)의 두 팀을 합친것 보다 많다. 갈수록 희생 번트 수가 줄어드는 2017년 기준이라면 넥센 히어로즈(21), 두산 베어스(48), KIA 타이거스(55) 세 팀을 합친 것보다도 많다. 엄청난 투고타저 시즌인 2012년 최다 희생번트수가 KIA의 133개였는데 이보다도 많다는 건 타고투저고 나발이고 신경안쓰고 무조건 번트만 하겠다는 거다. 참고로 김성근이 맡은 2010, 2011년 SK와이번스의 희생번트는 147개였다.
이러한 처참한 지표에도 불구하고 김성근 감독이 계속 번트와 작전, 대타에 집착하는 이유는 자기 과시욕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번트나 작전, 대타가 경우 실패할 경우, 보통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선수가 비난을 받는 경우가 많고, 또 운이 없었다고 치부되는 경우가 많다. 반면 작전이나 번트, 대타가 성공하면 감독의 작전과 용병술의 승리라는 찬사를 받게 된다. 작전이 여러 번 실패하더라도 한번 성공하여 그날 경기를 이기게 되면 실패한 여러 차례의 작전은 묻히고 성공한 단 한 차례의 작전만 주목받게 된다. 언론은 감독의 작전 덕분에 승리한 경기라는 식의 기사를 내보내게 된다. 때문에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를 좋아하는 김성근 감독이 저조한 성공률에도 불구하고 계속 작전과 번트, 대타에 집착한다는 것.
홈런 스윙을 하면 야단치는 감독이다. 그가 '''20년이 넘는 세월동안 감독을 했지만 그 팀에서 홈런 3위 안에 든 타자가 아무도 없고''' 최고기록이 2016년 홈런 4위로 33개를 친 윌린 로사리오이니 말 다했다. 로사리오는 어쨌든 메이저 리그 올스타전에도 나가본 거포 기질이 있는 포수다. 메이저 올스타 포수를 감독이 뚝딱 키웠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 사실 로사리오가 워낙에 지독한 슬로우 스타터 기질을 KBO에서 보인지라 그를 만들어준 건 김성근이 아니라 쇼다 코우조 코치라고 보는 견해가 많다.
김성근의 경질 이후 그 로사리오가 그 전해보다 많은 홈런 수를 기록하고 있고 2군 내려갔다왔다는데 마찰이 있어서 그랬을 가능성도 있다. 아마 로사리오가 계속 자기 스윙으로 2군을 가지 않고 홈런을 쳤으면 '''최정과 홈런왕경쟁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10년대 후반 들어 메이저리그에서도 불펜을 쏟아붓는 식의 벌떼야구로 다시 트렌드가 옮겨가며 투수운용에서만큼은 재평가의 여지가 생겼다는 주장이 있는데 '''헛소리다.''' 그딴 논리면 불펜야구가 김성근 발명품이다. 90년대 후반 양키즈 전성기 야구스타일도 적당히 강력한 타격에 리베라를 중심으로한 불펜으로 틀어막는 스타일로 '''마리아노 리베라는 포스트시즌에서 8회 등판 여러번 했는데 그럼 그때 양키스도 김성근식 투수운용 한 구단인가?''' 마무리 땡껴쓰기 메이저리그에서 드물지 않았고 메이저리그라고 불펜 짜먹는 감독이 없었던게 아니다. 단지 김성근처럼 효율 떨어지는 불펜 야구 고수하면서 명장 소리 듣는 사람이 없을 뿐 이지. 어떻게 불펜 운용 적극적으로 한단 거 하나로 이 팀들이 다 김성근식 운영을 하는 팀이 된단 말인가?

13. 수비를 향상시키는 감독?


김성근 감독을 따라다니던 여러 그릇된 믿음 중 하나는 그가 수비력을 향상시킨다는 것이었다. 펑고로 상징되는 강훈련을 통해 팀의 수비력이 일취월장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믿음 역시 사실과 거리가 있다.
현시점에서 김성근 감독이 수비력을 향상시켰는지 여부에 대해 평가가 엇갈릴 수는 있지만, SK 왕조 시절 김성근 감독이 수비를 야수의 제 1기준으로 삼다시피 한 것은 분명하다. 김성근 본인이 수비를 향상시키는 데 성공적이었냐고 묻는다면 결과적으로 고개를 저을 수도 있지만, 김성근 본인 나름대로 일본 출신 후쿠하라 코치를 선임하는 등 수비를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고 수비력을 중점적으로 향상시키려는 노력을 하였다는 것 하나는 분명한 사실이긴 하다. 실제로 왕조시절 SK는 NHK에서도 일본식 수비를 도입한 야구의 성공사례라며 국뽕(...)사례로서 취재해 갈 만큼 높은 수비율로 가시적인 성과를 보인 팀이기도 하였고. 그 수비를 향상시킨 게 김성근의 공이던, 그런 야수를 발굴하고 키워낸 전임 감독의 공인가는 차치하고서라도 말이다.
김성근 감독팬들은 그가 맡은 팀의 수비력이 대체로 향상되었다고 주장한다. 그 대표적인 예로 SK 시절 정근우, 최정을 들곤 한다. 그러나 정근우와 최정은 김성근 부임 당시 2년차의 신인이었기 때문에 프로 경력이 쌓이면서 수비력이 향상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때문에 정근우와 최정 사례는 김성근 감독이 수비력을 향상시켰다는 주장을 충분히 입증할 만한 근거가 되지 못한다. 김성근 감독이 SK의 수비력을 향상시킨 것이 사실이라고 전제하더라도, SK의 수비력 향상이 순수한 의미의 수비능력 그 자체의 향상인지에 대해서는 되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당시 정근우를 비롯한 SK의 내야수들은 김성근 감독이 부임한 2007년 이후 갑자기 스파이크를 드는 거친 수비를 행하여 다른 팀으로부터 크게 비난을 받은 바 있다. 강병철, 김재박, 김경문, 선동렬, 로이스터 등 여러 감독들이 SK 선수들의 거칠고 비신사적인 수비행태를 비난했다. '''다른 팀 선수들은 SK 선수들이 거칠게 수비하기 때문에 부상이 염려되어 적극적인 주루 플레이를 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실제 SK와 경기 도중 주루플레이 과정에서 부상자도 많이 발생했다. 이대수(두산), 이종욱(두산), 이대형(LG), 민병헌(두산), 양준혁(삼성), 김주찬(롯데) 등이 당시 SK 수비진, 특히 정근우의 거친 수비로 부상을 당했다. 특히 당시 SK와 치열한 순위싸움을 했던 두산에서 많은 부상자가 속출했고, 이에 김경문 감독이 "받은 만큼 돌려주겠다."며 분통을 떠뜨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 발언 때문에 김경문 감독은 노리타들로부터 스승에 대한 예의도 없는 놈이라고 가루가 되도록 까였고, 결국 김경문 감독이 삭발을 하고 나서야 노리타들의 비난이 수그러들었다. 이처럼 SK의 수비력 이면에는 당시 크게 논란이 된 SK의 거친 수비가 있다. 즉 '''다른 팀 선수들이 SK 선수들의 거친 수비로 인한 부상을 두려워 하여 적극적인 주루 플레이를 하지 못했고 그것이 SK가 뛰어난 수비력을 가진 것으로 착시 효과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2015년 한화 이글스에 부임한 후에도 역시 수비력 강화를 위한 엄청난 강훈련을 실시했다. 하지만 김성근이 한화감독으로 부임한 이후 한화의 수비력은 나아지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16년 한화의 수비력은 더욱 나빠졌다. 실책 퍼레이드를 펼쳤고, '''2016년 한화의 수비는 김성근 감독이 부임하기 전인 2013년, 2014년 보다 더 악화되었다'''. 기사가 쓰여진 2016년 5월 12일 현재 2016시즌 한화의 경기당 1.34개의 실책을 범했는데, 이는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삼미 슈퍼스타즈가 기록한 1.46개에 이은 역대 2위의 기록이다. 원년의 삼미는 감사용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회사에서 야구 좀 하는 직원을 선수로 뽑았을 정도의 약체로 유일하게 국가대표 선수가 없었을 정도로 수준 미달의 구단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김성근의 한화가 기록한 수비실책율은 '''실질적으로 역대 최악의 기록'''이나 다름없다.
'''김성근이 경질되고 나자 한화의 수비력은 일취월장했다'''. 한화는 2017년 8월 '''월별 최소실책 1위'''를 기록하고 있다. 그것도 2위와 두 배 차이나는 압도적인 수치로. 노리타들이 김성근 감독님께서 수비훈련을 시킨 효과가 이제서야 나타나는 것이라고 아전인수격 해석을 하겠지만 이것이 말이 안되는게, 17년 8월 한화는 주전 선수들의 부상 릴레이로 인해 반강제적으로 리빌딩 모드에 들어간 상태였고 다음 시즌을 준비하는 차원에서 사실상 2군에 가까운 라인업으로 경기에 임하였기 때문이다. 즉 김성근의 지도를 받아보지 못한 2군 출신 야수들이 기록한 수치라는 점. 거기에 기존 1군 선수들도 김성근이 매일 같이 하던 의미없는 특타와 펑고가 사라지면서 체력낭비 없이 경기에 임하게 되자 집중력이 상승한 것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18시즌 들어 5월 13일 기준 한화의 수비율은 0.684로 리그 전체 1위(!)를 달리고 있다. 물론 외야에서 새로 영입된 호잉이 기대 이상으로 잘해주면서 이용규가 강제 라면수비를 맡을 정도로 부담이 줄어든 것이 가장 큰 요인이지만...
삼성 감독 시절에 수비 시스템을 놓고 삼성 코치 및 선수단과 마찰을 빚은 것은 유명하다. 삼성은 1985년부터 해마다 LA 다저스 캠프에서 전지 훈련을 하면서 다저스로부터 직접 전수 받은 수비 시스템을 팀에 이식했다. 류중일 감독은 현재 삼성의 수비 시스템도 기본적으로 LA 다저스의 시스템과 똑같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김성근 감독이 그때 이미 팀에 깊숙히 뿌리내린 선진 수비 시스템을 갈아 엎으려고 하자 팀내부에서 반발이 일어났던 것. 삼성이 당시 수비력에서 문제를 노출한 것도 아니었다. 또 김성근 감독은 삼성이 매년 LA 다저스 캠프에서 치루던 전지훈련 일정도 대폭 축소하자고 구단에 건의하기도 했다. 김성근 감독이 삼성의 수비 시스템을 고치려고 했던 것은 경기력 측면 때문이 아니라 메이저 리그식 야구에 대한 김성근 개인의 거부감 때문이 아닌가 하고 보는 이들도 있다.
결론적으로 그가 수비를 유의미하게 향상시켰느냐고 묻는다면 의견은 갈릴 수 있지만, 야수를 보는 스타일에 있어서 수비를 중요하게 여기고 특히 수비력을 끌어올리려는 노력을 집중적으로 했다는 사실 자체는 부정할 수 없다. 그 노력이 메이저리그식인지, 일본 올드스쿨 식인지, 혹은 그래서 성과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차치하고. 요약하자면 수비를 향상시키'''려고 노력하는''' 감독 쯤 되겠다.

14. 좌우놀이의 명암 - 위장타순, 위장선발, 이중오더


김성근은 80년대부터 타자, 투수 가릴 것 없이 가장 적극적으로 좌우놀이를 사용하던 감독 중 하나였다. 이것이 도가 지나쳐서 위장타순(위장오더), 위장선발, 이중오더 등의 비신사적이고 편법적인 방법들을 남발하며 지속적으로 야구팬들과 언론의 비판을 받아왔다. 90년대 중반까지는 선발투수예고제가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편법들이 가능했다. 김성근 개인팬들은 90년대에는 다른 감독들도 위장오더, 위장선발을 많이 사용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당시 언론 기사들을 살펴보면 당시 김성근이 지나치게 위장오더, 위장선발을 사용했기 때문에 이를 잘 사용하지 않는 김영덕 등 다른 일본야구 출신 감독들까지 싸잡아 욕을 먹고 있다는 기사가 나온다. 굳이 김성근 외에 위장타순을 즐겨 썼던 감독을 들자면, 백인천 정도가 대표적이었다. 백인천은 "훈련은 정직해야 하지만, 실전에서는 얼마든지 사기꾼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말까지 하며 위장타순을 정당화했을 정도였다. 물론 포스트시즌에서는 몇몇 감독들이 총력적을 하면서 위장오더를 사용한 경우가 있지만, 시즌 중에서는 김성근의 팀에 맞대응 및 보복으로 행하는 경우가 아니면 다른 감독들은 위장오더를 사용하는 일은 드물었다고 한다.
또 김성근이 강연 등에서 해온 말들을 보면 선발투수예고제가 생기기 전인 80~90년대에 김성근은 경기장에 미리 첩자를 잠복시켜 상대 선발투수가 누구인지 미리 알아내는 방법을 빈번하게 사용해 온 것으로 보인다. 좌타순오더와 우타순오더를 미리 작성해 둔 후 상대 선발투수가 누군지 미리 알아낸 후 이에 따라서 오더를 제출하는 방식이었다. 김성근은 첩자를 이용해서 정보를 얻어낸 자신의 방식을 '''데이터 야구'''의 예라고 말했다. 물론 이는 시대상을 감안하면 충분히 데이터 야구가 맞다. 당시 세이버는 존재하지도 않았고, OPS가 뭔지도 잘 모르며 대충 이름값으로 1번부터 4번 적어서 내던 시절에 좌우타선 나눠서 플래툰이면 그야말로 시대를 초월한 데이터야구의 선봉장 맞다. 저 시절엔 미국에서도 플래툰이 스텡겔이나 얼위버등 쓰는 감독만 쓰는 전략 정도였고 저시절 얻을 수 있는 데이터라고는 클래식스탯이 전부인 상황에서 저정도면 나름 초창기 데이터야구의 터를 닦은 감독. 10년대 들어서까지 저 수준을 벗어나질 못해서 그렇지.
해태-삼성전에서 벌어진 그 유명한 이중오더 사건도 이러한 김성근식 편법야구의 연장선상에 발생한 일이다. 물론 얼마 후 김성근이 삼성 감독에서 경질되면서 한동안 야구계에서 위장오더, 위장투수 문제는 한동안 잠잠해졌지만, 96년 김성근이 다시 쌍방울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위장투수를 내는 일이 빈번해지면서 야구판이 다시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그 결과 마침내 선발투수예고제가 정식으로 KBO에서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김성근의 트레이드 마크 중 하나였던 위장오더는 더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대신 위장선발은 계속해서 써먹었다.
SK 시절에는 타자의 플래툰 기용을 즐겨했다. 이것은 치바 롯데 인스트럭터로 있던 시절 바비 발렌타인 감독에게 배운 것이라고 한다. 발렌타인 감독이 치바 롯데에서 플래툰을 잘 써먹었는데, 그 대표적인 선수가 이승엽이었다. 이승엽의 개인 인스트럭터 자격으로 치바 롯데에 들어갔던 김성근은 필연적으로 발렌타인의 플래툰을 배울 수 밖에 없었다.
물론 발렌타인 감독의 운용을 보면서 세부 운용 측면에서 여러가지를 배우고 진일보한 측면은 있겠지만, 사실 이러한 플래툰 기용은 김성근에 예전부터 즐겨해오던 타순의 좌우놀이의 연장선상에 있다. 다만 김성근 덕분에 선발투수예고제가 시행된 이후였기 때문에, 위장타순이나 이중오더처럼 대놓고 하는 기만행위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SK 시절 김성근의 플래툰 기용은 도가 지나칠 정도여서 당시에 비판을 받았는다. 이는 외야진에서 이진영, 박재홍, 박재상, 조동화, 김강민 등 주전급 선수들도 대부분 플래툰 대상이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당시 야구팬이나 언론으로부터 팀의 미래를 갉아 먹는다는 비판을 받았다. 특히 당시 일본에서 이승엽이 플래툰 기용 방식 때문에 크게 고생했던 터라 그걸 잘 알고 있는 김성근 감독이 오히려 플래툰을 남발하느냐는 여론의 따가운 시선이 있었다. 물론 2020년 현재 오타니도 플래툰도는 메이저리그를 보면 그야말로 시대를 앞서간 데이터야구.
타자의 좌우놀이, 위장오더, 이중오더와 함께 투수 입장의 좌우놀이를 악용하는 위장선발도 김성근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즉 1회 1아웃 직후 다른 팔 투수로 투수를 교체하는 행위를 말한다. 이 역시 김성근이 80년대부터 빈번하게 사용했던 일이었고, 90년대인 삼성, 쌍방울 감독시절에는 위장선발을 너무 남용하여 이를 비판하는 언론 기사들이 보도될 정도였다. SK 시절에도 빈번하게 위장선발을 이용했다. 한화 감독으로 부임한 이후에는 부임 초기에 이동걸 빈볼 사건으로 김성근식 더러운 야구에 대한 비판의 강도가 거세지자, 1회 1아웃에 대놓고 교체하는 행위는 줄었지만 2회 전에 다른 팔 투수로 교체하는 방식은 여전히 빈번하게 사용하고 있다.
물론 상술했듯, 이 위장오더, 위장타순 위장선발은 2020년 현재 미국에서는 간간히 비겁하다고 욕 먹더라도 치밀한 신경전이 벌어질때 쓰는 경우가 많고 왠만해서는 서로의 스포츠맨십을 존중하여 예고대로 내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위장오더 활용도는 줄어들고 있고 대신 오프너 전략을 쓰는팀도 생겼다. 그러나 이중오더는 문제가 있다.

15. 외인들과의 관계


김성근은 외국인 선수들과 잦은 불화를 일으켜왔다. 예외적으로 일본인 투수 카도쿠라 켄이나 2009년 후반기 연승행진의 주역이었던 게리 글로버 등은 김성근 감독과 원만한 관계를 이어갔으나, 대부분의 경우 외국인 선수들과 기싸움을 벌이며 숱하게 트러블을 일으켜 왔다. 다만 하술하듯, 당대에는 한국야구를 우습게 보는 외인도 많았고 자유분방하게 행동하는 외인도 많은데, 김성근과 성격이 잘 맞지 않았다. 김성근 잘못 반 외인 잘못 반 정도였다. 특히 타자들의 경우 거의 대부분이 악연으로 끝났다. 투수력을 중시한 김성근 감독이 타자용병을 상대적으로 천시하기도 했고, 특타, 펑고, 강훈련에 특유의 권위적인 성격이 골고루 버무려진 결과. 매일매일 이어지는 강훈련에 한국 선수들보다 적응이 훨씬 어렵다는 점도 부진의 원인.
1999시즌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쌍방울 구단이 나름 큰 맘 먹고 영입한 외국인 선수인 마이클 앤더슨, 제이크 비아노는 김성근의 외국인 용병 잔혹사의 첫 주자들로 다사다난한 시즌을 보냈다. 쌍방울은 본격적인 해외 스프링캠프를 떠나기 전 일단 제주도에서 1차 캠프를 했었는데, 비아노는 거기서 술판을 벌이다가 걸려서 시즌이 시작되기도 전에 스프링캠프에 제외되었다. 이후 투수폼 교정을 두고 마찰을 빚기도 했고 시즌 시작 후에도 두 투수들은 2군 강등과 1군 복귀가 반복되며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앤더슨의 경우 전년도에 LG 트윈스에서 주로 마무리로 뛰며 20세이브를 돌파하며 그럭저럭 성적을 냈던 투수였다. 그러나 쌍방울에서 초반에 호투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성근 감독이 이유없이 2군 강등과 1군 복귀를 반복하자 납득할 수 없다며 훈련에 불참하며 김성근에게 항명했다. 그러자 김성근 감독은 앤더슨의 퇴출을 지시했고, 앤더슨은 구단 사장에게 전화로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했다. 결국 구단의 중재로 앤더슨이 김성근 감독에게 사과하며 사태는 표면적으로 수습되었지만 이후 앤더슨의 성적은 급격히 나빠졌다. 비아노 역시 2군 강등과 1군 복귀를 반복했다. 이는 당연히 비아노와 앤더슨의 잘못이며, 초창기 외인들은(사실 지금도 종종 있지만) 한국야구 수준을 낮잡아보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선수가 많았던 그 시절의 방증이다.
2001시즌 LG 트윈스의 외국인 타자 댄 로마이어는 LG로 영입되기 전 한화에서 1999~2000년 2시즌 동안 74홈런을 치며 99년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던 검증된 용병이었다. 적극적인 성격에다 팀의 대한 애착과 베테랑으로서의 책임감이 강했던 로마이어는 동료들의 타격 폼을 교정하는데 조언을 해주는 등 훈수두거나 설교하기를 좋아했다. 심지어 로마이어는 코치들에게도 조언과 잔소리를 주저하지 않았던 성격이었다. 그래서 플레잉코치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그런데 로마이어의 행동은 좋게 말하면 프로의식이 뛰어난 것이었지만, 당시 코칭스태프에게는 월권 행위로 비춰졌다. 훈수두기를 좋아하는 로마이어의 성격이 김성근 이하 코치들과 마찰을 빚게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고, 결국 김성근 감독대행은 로마이어의 퇴출을 지시했다. 로마이어는 김성근 감독 앞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지만 김성근 감대는 끝내 퇴출 지시를 거두어 들이지 않았다. 퇴출 당시 로마이어의 성적은 60경기 0.268에 11홈런 47타점으로 팀내 타점1위였다. 그러나 4번이라는 포지션상 타점이 많았을 뿐 성적자체는 한화 시절에 비해 OPS가 1할이 내려간, 기대에 못미치는 성적이기도 했다.wrc+도 103으로 평균보단 조금 위라도 외국인 타자에게 기대하기엔 아쉬운 성적이었던건 분명하다. 그리고 로마이어의 경우는 김성근만의 문제는 아니고, 당시 국내 코치들은 김성근 사단뿐만이 아니라 모든 코치들이 다 로마이어의 저런 훈수를 싫어했다. 애초에 한화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음에도 재계약에 실패하고 LG로 온 이유가 한화 코치들도 로마이어를 싫어했기 때문.
2002년 LG의 외국인 투수였던 라벨로 만자니오 역시 김성근 감독과의 갈등을 일으켰다. 만자니오의 경우 원래 악동의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본인만의 잘못으로 갈등이 초래된 것으로 오해되고 있기도 하다. 시즌 전 일본 스프링캠프에서 이미 김성근 감독과의 대립각이 형성되면서 개막까지는 등판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말았으나 양상문 투수코치의 중재로 상황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7월20일 SK전에서 4⅔이닝 동안 8실점(7자책)으로 강판당했을 때 만자니오가 불만을 표출하자 김성근 감독은 2군행을 지시했다. 이때까지 만자니오는 7승6패로 나름 좋은 활약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2군으로 내려갔다고 1군으로 복귀 후 김성근 감독과의 갈등을 이어가며 부진한 모습을 보였고 결국 남은 시즌 동안 고작 1승을 더한 8승으로 시즌을 마감하고 말았다.
2002년 LG의 외국인 타자 톰 퀸란은 KBO 역대급 공갈포로, 2000년 현대 우승의 주역이었다. 뛰어난 3루 수비에 2시즌간 65홈런을 친 장타력이 있었다. 다만 점차 노쇠화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2002시즌 김성근은 퀸란을 단 13경기만에 방출시키고 말았다. 노리타들은 노쇠화가 진행된 퀸란을 물어온 LG 구단을 일방적으로 비난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KBO에서 일정 성과를 냈던 퀸란을 13경기만에 조기 퇴출한 것은 외국인 선수 관리를 프런트와의 싸움의 연장선상으로 이끌었던 김성근의 전략이라 보는 시각도 있다.
본래 퀸란은 유니콘스 시절에서도 정확도는 매우 떨어지는 선수측에 속했으나 퀸란의 이 당시 성적은 '''13경기 21타수 무안타 10삼진 0.000.''' 아무리 원래 정확도가 떨어지고, 표본이 적다고 하려고 하더라도 최소한 1안타라도 치고 정상적인 야구선수의 수준을 보일 때 얘기지, 13경기 0할 0푼이면 대략 2주일간을 지켜본 셈인데 이 정도 기간동안 무안타인 선수를 지켜봤으면 오히려 오래 지켜본 것. 비슷하게는 가르시아도 개막 15타수 무안타쯤부터 퇴출설이 돌았다. 19타수만에 기적적으로 그 유명한 8점홈런을 치고 롯데에 남을 수 있었다. 여튼 요점은 퀸란의 방출은 김성근의 조급증이 아니라, 당연한 처사라는 것.
퀸란의 대체선수로 영입된 외국인 투수 제프 케펜은 김성근 사단 코칭스태프와 불화로 LG 입단 한 달 만에 구단에 스스로 퇴단을 요청하며 미국행 비행기 티켓까지 끊었다. 결국 프런트의 중재로 갈등은 봉합되었지만 이후에도 시즌 내내 케펜과 LG 벤치의 갈등의 골은 줄어들지 않았다. 포스트시즌 때도 김성근 감독은 준플레이오프 엔트리에 케펜을 제외하는 수모를 줬다가 플레이오프부터 기용하는 등 갈등은 시즌 끝까지 지속되었다.
2002년 LG의 매니 마르티네스는 메이저리그 출신으로 2001년 삼성에서 이승엽과 마해영을 이기고 팀내 타점왕을 차지한 25홈런 28도루 호타준족이였다. 김성근과 함께하며 0.279 15홈런 69타점 22도루의 무난한 성적을 기록해 타자 용병으로서는 김성근의 커리어에 몇 안되는 성공사례로 남았다.
SK 와이번스 감독 시절 김성근 감독은 2008년 부진했던 투수 쿠비얀을 단 3경기 만에 퇴출시켰고, 대체 투수 케니 레이도 5경기 만에 방출했다. 2009년 마이크 존슨과 C.J, 니코스키도 각각 2경기와 9경기 만에 퇴단 조치시켰다.
김성근 감독의 외국인 용병 잔혹사는 한화 이글스 감독 시절에도 계속된다.
나이저 모건은 메이저 리그 출신이지만 지나치게 개성강한 성격때문에 시즌 개막 전부터 궁합을 놓고 걱정이 많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10경기 41타석 이후 2군에 내려간 후 퇴출된다. 다른 이유로는 실력 때문이라고 하는데 0.273에 출루율도 4할이었다. 그리고 일각에서는 안타만 쳐도 T를 그리는 화려한 세리머니에 눈밖에 났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결국 2군에서 폼이 올라오지 않아 퇴출되었다.
제이크 폭스는 나이저 모건의 대체로 들어왔는데 KBO 스타일에 적응도 하기전에 특유의 강훈련으로 굴렸다. 아침부터 특타 30분간 156스윙을 시켰다고 한다. 부상 복귀 후 어찌어찌 적응이 되나 싶으니 어느새 시즌이 끝났다고...38경기 108타수 0.278 홈런7개 25타점 출루율 0.339를 기록했다.
윌린 로사리오는 포수와 1루수를 모두 소화할 수 있는 선수였다. 김성근은 그가 빅리그에서 3루수로 3경기 나선 것을 보고 3루수로 밀고나갈 계획이었으나 표본이 극히 적은 데는 다 이유가 있었고, 결국 1루수로 돌아왔다. 또 2016 시즌 초반 로사리오가 타격 슬럼프에 빠졌을 때 김성근의 지도 방법이 맞지 않아 마음고생을 했다. 타격시 왼 디딤 발의 위치와 활용법을 놓고 드러나지 않은 갈등이 있었다는 것. 겉으로 쉽게 보이지 않는 반 족장 차이였지만 로사리오의 타격 밸런스가 깨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쇼다 고조 타격코치가 전담을 맡고 난 뒤 로사리오 본연의 타격 스타일을 존중하고 살리는 쪽으로 서포트하며 살아났다.
이렇듯 김성근은 외인들과 마찰도 잦았으나, 성공사례도 적잖이 있다. 특히 07년의 레이번, 로마노 듀오는 아예 KBO의 용병 선발 메타를 바꿔놓을 정도로 강력했으나 이 둘과도 2군강등이나 퀵후크에 대한 불만으로 항명하긴 했다. 반대로 카도쿠라나 글로버 등등 잘 맞았던 외인도 있다. 외인에게 좀 강압적인 경향은 있었으나, 그건 김성근의 팀 운영 방식이고 그게 무조건 나쁘다고 보기는 힘들다. 실제로, 후임 이만수는 정반대 성향이었는데, 김성근과는 정반대로 매우 자유로운 분위기를 추구하다 보니 스캇이나 울프, 레이예스 등 외인들이 줄줄이 항명하는 등으로 거의 팀이 와해되다시피 했다. 뭐 세든같이 좋은 궁합을 보인 선수도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전반적인 외인관리에 실패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너무 선수를 강압적으로 옥죄는 것도 좋지 않고 너무 풀어주는 것도 좋지 않은데, 어느정도 외인관리 경험이 쌓인 SK 시절 김성근 정도면 나름 성공적인 외인관리를 보여주었다.
아예 외인이 태업을 해버리거나 감독 욕을 하고 짐을 싸서 탈주해버리고, 본국으로 째서 안 돌아오는 등 트러블이 많았던 이만수, 선동열, 류중일 등 진짜 외인관리에 실패한 감독에 비하면 양반 수준. 로저스와 같이 외인 선수 기죽이기 등 타 감독보다 조금 까다롭긴 했으나 말 그대로 조금 까다로운 수준이지, 마치 외국인 기를 다 죽여놓아서 죄다 실패한 것처럼 써놓는 것은 악의적인 서술이다.
외인제도 초창기에는 한국프로야구가 외인을 다룰 줄 몰라서 숀헤어나 루이스 안두하 등 정말 어처구니없는 실패사례가 많았고, 타이론 우즈처럼 한국선수 패듯이 외인을 뒤지게 팬다던가 하는 웃지못할 사례도 많았고 그래서 실패도 많이 했는데 김성근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런 시행착오를 겪으며 짬밥이 쌓인 이후 SK시절에는 외인과 나쁘지 않은 케미스트리를 보여주며 외인선발 트렌드를 주도하는 등 선진적인 면모까지 보였다. 김성근은 외인에게 확실히 까다롭긴 했으나 악의적인 서술처럼 외인들을 도저히 못 견디게 괴롭힌 수준은 절대 아니었고 말 그대로 까다로운 정도이다.
마지막까지 타 감독에 비해 고쳐지지 않았던 점이라면 조급증. 외인이 못해도 끝까지 살아나리라 믿는 감독이 있는 반면 김성근은 외인이 못하면 조금 기다려주기보단 바로바로 내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또한 장점이자 단점이기도 한데, 조금만 더 두고 보면 살아날 지도 모르는 것을 내쳐서 실패하는 경우도 있는데, 결국 끊어야 할 때 못 끊어서 1년을 망치는 경우도 있다. 김성근의 경우 조급증으로 모건-폭스같은 실패사례도 있고, 전반기의 뽕에 취해 대놓고 태업을 하던 히메네스를 시즌끝까지 교체 못 해서 팀의 추락에 일조한 14롯데 등 반대사례도 많다.
결론적으로, 권위적인 스타일이었고 실제로 외인들에게도 까다롭긴 했으나 결과적으로 실적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던, 오히려 외인의 성공적인 운용으로 우승까지 차지했던 감독 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다.

16. '야구는 감독이 한다'의 허상


김성근 감독은 기본적으로 '야구는 감독이 한다.'라는 전제를 가지고 팀을 운영하는 감독으로 단순한 경기 운영뿐만 아니라 팀 재정 등 갖가지 상황에 관여해 전권을 쥐는 스타일의 감독이다. 하지만 이런 스타일의 감독은 서서히 사장되어가는 추세이다.
메이저리그의 경우 감독은 작전보다는 선수단의 사기와 부상자 관리 등 선수단 관리에 중점을 두는 것이 현재추세이고, 작전은 내는 경우에도 경기 후반부 승부처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최근에는 감독 이하 코칭스태프가 경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장면이 투수교체 정도로 한정되는 경우도 많다. 이로 인해 메이저리그 감독의 연봉은 그리 높지 않으며 마이크 소시아, 브루스 보치, 벅 쇼월터 정도를 제외하면 팀에 큰 영향을 미치는 감독은 찾기 힘들다.
오히려 최근 메이저리그는 전문적 경영 지식과 야구 지식을 갖춘 단장들이 팀을 이끄는 추세이며 빌리 빈, 테오 엡스타인 등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단장 중심의 프런트들은 장기적/전략적 차원에서 팀을 운영하면서 리빌딩 타이밍을 잡고, 타팀의 가능성있는 유망주들을 눈여겨 보다가 트레이드 등을 통해 데려오는 등 팀에 큰 기여를 한다.
국내에서도 최근 넥센 등 프런트 주도형 야구를 하는 팀이 생겨났으며 SK, 한화 등 야구인을 단장으로 앉히며 현장과의 소통을 꾀하는 팀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성근 감독식의 '모든 것을 감독이 관리한다.'의 형태는 과거와 다르게 복잡한 육성 시스템, 스카웃 시스템을 갖춘 현재에는 어울리지 않으며 구시대적 야구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장 김성근도 트레이닝 파트의 지식을 갖췄다고 자부했지만, 시대에 뒤쳐진 지식 덕에 오히려 큰 시행착오를 낳았다.

[1] 한편 방송 3분 30초경에 포브스가 산정한 2014년 한국 프로야구단 가치평가도 나오는데 1위 LG(1,265억 원)와 2위 두산(1,247억 원)이 유이하게 1,000억 원을 넘기고 있으며-3위 SK가 878억 원-, 한화는 꼴찌에서 두 번째인 8위(2014년 9구단 체제)로 653억 원으로 되어 있다. 전반적으로 한화의 매출 및 인기도가 상승한 것이 나온다.[2]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다음날 선발로 나올 선수는 지금 쓸 수 있는 투수 중 가장 잘 던지는 투수다. 가장 잘 던지는 투수 대신 다른 투수를 낸다는 것은 의외성을 위해 실력이 떨어지는 카드를 이용한다는 이야기이고 다른 선수들의 휴식 일정도 꼬이는 셈이니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에야 그다지 득 될 게 없다.[3] 홈런 후 상당히 오버액션하며 들어오거나 상대팀을 향해 어그로를 바짝 끌어올리는 올드 스쿨파 혹은 메이저리그 데뷔 타자에게 일부러 고의 빈볼을 던지는 투수들이 대표적인 사례다.[4]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 청룡기 전국고교야구대회,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5] 전 서술자가 야구의 근본을 적으면서 야구는 반칙은 안걸려도 그만에 위장오더도 롤 밴픽처럼 심리전 중 하나라고 하는데 이는 아니라고 본다. 어떠한 스포츠도 부정행위는 규탄 받아야 하는 행위이며 이는 반칙해도 안 걸리면 그만이란 방식은 시대착오적인 생각이다. 아무리 규정에 제재내용이 없다 한들 현대의 스포츠는 서로 상호간의 스포츠맨십을 믿고 하고 있으며 현재는 이에 위배되는 행위를 하면 전술적 감탄보다는 비난이 많아지는 추세이다. 물론 승리를 중시하는 사람들은 프로라면 무슨 수단을 써도 이겨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를 위선적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그거야 말로 잘못된 생각이다.[6] 타팀에서 방출된 연봉 높은 선수들을 수집해서 페이롤이 높았다.[7] 그 플랜이 얼마나 합리적인가, 그리고 실제로 장기적인 안목에서 세웠는가는 차치하고[8] 1988년 거둔 13승이 전부 구원승이었다. 1997년 김현욱은 구원 20승은 이때부터 싹수가 보였다.[9] 여담으로 고참 선수들이 많아 해태 타이거즈 다음으로 팀내 군기가 강했다고 한다. 게다가 훈련량까지 많아 쌍방울 고등학교라고 자조했다고 한다. [10] 오죽하면 '''부모가 찾아와 제발 군대 보내달라고 통사정까지 했다.'''[11] 이때는 지금보다 선수수명이 훨씬 짦았기 때문에 만35세면 지금으로는 은퇴직전의 40대에 해당한다. 이광환 감독이 1994년 투수분업체계와 현대적인 체력훈련을 통해 우승을 차지하면서 리그 전체적으로 투수의 수명이 거의 10년 가까이 늘어나게 된다.[12] 1위는 LG 트윈스, 2위는 두산 베어스[13] 전형적인 언더핸드 폼이라 허리에 무리가 많이 가는 편이었던 박정현을 억지 연투시키는 바람에 포스트시즌에서 허리가 완전히 무너지며 마운드에서 말그대로 실려나갔다. 물론 이후에는 자발적 등판이었다고 포장했다.[14] 1997년 구원투수로 뛰며 157이닝의 혹사를 당하고 삼성 가서도 100이닝 혹사를 당한 끝에 은퇴.[15] 부상중 경기출전을 강행시켜 은퇴를 앞당겼다.[16] 투수혹사가 얼마나 심했냐면 5년 동안이나 재활만 하다가 2016년 10월 8일 시즌 마지막 날 가진 은퇴경기에 등판했을 때 팔을 아예 아래로 내려야만 했고 5개의 공을 던지는 동안 이를 악물고 투구를 하는 모습이 찍혔고 타자를 상대한 후 마운드에서 내려올 때 팔을 제대로 들지 못할 정도였다.[17] NPB도 2000년대에 들어서 혹사를 당한 투수를 찾기가 매우 어렵고 투수 로테이션이 체계화 되었다. 또한 고시엔도 요즘 혹사당하는 투수들을 찾아보기가 어렵다.[18] 정규시즌 기준 OB: 3→4→4→4→5, 태평양: 3→5, 삼성: 3→4, 쌍방울: 2→3→6→17승 59패에서 경질, LG: 중도취임 49승 42패 → 66승 61패 4위로 SK시절 1→1→2→1→3에서 09년 2위 이후 10년 1위를 한 SK시절을 제외하고는 김성근은 단 한번도 첫해 올린 성적 이상의 성적을 낸 적이 없다.[19] 정규시즌 끝나고 11월 쯤. 다음 해부터 뛸 신인선수도 범주에 포함되며, 이때는 아직 대학재학 시절이었다.[20] 내용은 아픈 이유를 말한 것으로 추정.[21] 1999시즌에 앞서 KBO는 김기태와 김현욱의 현금 트레이드를 승인하는 대신 쌍방울이 전반기에 승률 3할 이상의 경기력을 유지할 것을 조건으로 내세웠다.[22] 이후 코시 진출[23] 물론 공격을 우선하는 닥공야구를 했던 로이스터의 타선도 프로로써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수비력은 있었듯이. 공격을 우선한다고 수비를 아예 안 보지는 않는다. 대표적인 예가 잠시 1루수를 보다가 끔찍한 수비로 바로 다시 포수로 돌아갔던 홍성흔.[24] 다만 김성근이 최정처럼 언제나 중심타자에게도 번트를 적극적으로 지시했던 것은 아니다. 쌍방울의 김기태는 김성근 재임 시기인 3년간 단 한 번의 번트도 대지 않았으며, 한화 감독 시기에는 김태균이 번트를 딱 한 번만 댔을 뿐이다. 슬러거 타입이 아닌 이병규도 김성근이 LG 감독이었던 2002년 번트는 단 한 번이었다. 최정 문서를 보면 최정에게 다운스윙을 강조한 것이 장타능력을 억제한 것이 아니라 최정을 호타준족으로 키우기 위함이었다는 꿈보다 해몽 같은 주장을 하는 감독팬도 있지만, 김기태와 김태균 그리고 이병규의 사례로 보면 김성근은 최정의 기량과 잠재력을 완전히 오판한 것뿐만 아니라 기록으로 나타난 최정의 생산성을 제대로 인지하지도 못했다는 것이 더 정확해 보인다.[25] 이것은 김성근이 데이터를 제대로 이해하는 능력도 없고 데이터를 확인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실이기도 하다. 김태균은 말할 것도 없고 김기태와 이병규도 김성근과 선수 생활을 시작했던 때에는 이미 연차가 꽤 쌓여 팀의 간판으로서의 평가가 완료된 시점이었다. 반면 최정은 데뷔 초기부터 '소년 장사'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장타 포텐을 인정받았지만, 김성근이 SK에 부임하기 전인 06년까지는 아직 이렇다 할 실적을 올리지 못한 상태였고, 김성근의 SK 첫 시즌인 07년에도 강타자라 불릴만한 성적은 아니었다. 최정의 성적은 08년부터 크게 상승했으나 그에 반해 번트 횟수는 김성근 부임 기간 동안 09년을 제외하면 매년 10개 이상으로 오히려 올라갔다. 09년에는 최정의 번트는 6개로 예전보다 조금 줄었지만 이때는 웃기게도 최정이 포텐이 터진 이후에 보낸 시즌 중 커리어 로우였다. 다시 말하면 김성근의 마구잡이 기용 방식은 타격 성적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고, 성장한 최정의 생산성이 어느 정도인지도 전혀 몰랐던 것처럼 보인다는 의미다. 만약 김성근이 최정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이미 강타자로 평가가 완료된 2010년 시즌 즘에 부임해 만났다면 저렇게 많은 번트를 지시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26] 이것도 생산성이 평균 이상의 타자라면 그냥 안타를 노리는게 차라리 1점을 낼 확률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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