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연쇄 분신 파동
1. 개요
1991년의 대한민국을 잇달아 뒤흔든 연쇄 분신자살 사건이자 민자당 공안통치 분쇄투쟁. 일명 '분신정국' 혹은 '1991년 5월 투쟁'이라고도 한다.
2. 사건의 배경
1987년 대선에서 당선되어 1988년 취임한 노태우 대통령은 자신을 "보통 사람"이라 선전하면서, 군부 정권 출신이라는 자신의 약점을 커버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과정에서 과거의 구태가 번복되고 제주MBC에서 리허설 사고까지 터지며 민정당이 참패하고 민주, 평민, 공화당의 야 3당이 과반 의석을 넘게 차지하는 여소야대의 결과가 벌어졌다.
여소야대 구도가 되면서 민정당과 군부정권 출신들은 잇다른 12.12, 5.18 청문회와 5공비리 청문회에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민주화 흐름을 타고 4.19 혁명 이후와 마찬가지로 남북통일에 대한 논의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1989년 문익환 목사와 대학생 임수경 양, 소설가 황석영의 잇단 방북, 평민당 서경원 의원 방북 사건은 노태우 정권을 긴장시켰다. 이에 따라 재야와 운동권에서 일던 통일 논의도 공안정국을 조성해서 눌러버렸으며 더욱이 노태우 대통령은 선거 공약으로 중간평가를 제시한 상황이라 그야말로 정권은 위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으로 치달았다.
결국 노태우 정권은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꼼수로 인위적 정계개편을 시도한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바로 민주자유당을 출범시킨 3당 합당이었다.[1] 3당 합당에 대한 비난이 거세지자, 노태우 정권은 그동안 끌려다니던 것에서 벗어나 초강경 자세로 돌변했고, 5공 청산은 유야무야 되어버렸다.
그해 4월에는 골리앗 크레인 위에서 농성하던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을 헬기까지 동원해 무자비하게 진압하는가 하면, KBS 서영훈 사장 해임을 시작으로 언론통제에도 나서는 모습을 보였으며[2] 이에 항의한 KBS 노조에 대해서는 공권력을 투입해 짓밟고 언론 민주화운동을 제도적으로 저지하기 위해 방송법을 날치기 통과시킨 뒤 6월에는 복직서명을 주도한 전교조 교사 1천여 명을 중징계시켰다. 또 7월 20일 노태우가 '민족 대교류의 날' 특별성명 발표 후 23일에 제1회 범민족대회를 허용했지만 막상 8월 15일에 개최된 범민족대회는 아예 봉쇄해버렸다. 또 강영훈 총리 대신 노재봉이 총리가 되면서 탄압이 더 격화되었다.
상황이 이리되자 노태우 정권의 공안통치가 다시 일상화되었다. 노동쟁의 현장에는 으레 공권력과 구사대가 투입되었고, 대학 역시 경찰병력이 수시로 진격했다. 이에 따라 시국 관련 구속자(양심수) 숫자도 나날이 증가했는데, 노태우 대통령은 구미권 순방 때마다 한국 인권상황을 묻는 현지 기자들에게 누누이 "한국엔 양심수는 하나도 없다"고 밝혔지만,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측 발표에 따르면 1990년 11월 10일 기준 양심수 숫자는 1,295명이었다.
1991년 봄 '수서비리'[3] 과 함께 국보법과 경찰법 개정안 등 각종 법안 날치기, 내각제 개헌을 둘러싼 당내 3대 계파 간[4] 갈등, 그리고 1988 서울 올림픽 직후부터 고삐가 풀린 물가가 지속적으로 올랐으며[5] 특히 80년대 후반기 이후로 3저호황으로 유동성이 넘치게 되면서 유동자금들이 대거 부동산으로 쏠린 바람에 부동산 광풍이 불면서 부동산 값이 연 20% 이상 폭등하고 있었던데다가 1990년 4월 4일 '경제활성화 종합대책'으로 인해 전월세비가 하늘로 치솟고 물가상승률도 90년에 8.6%로 1981년 이후로 9년만에 최고치를 기록했으며, 높이 뛰는 전세값을 견디다 못한 서민들이 비관 자살하는 일이 터질정도로 사회불안이 심각해졌다. 거기에 낙동강 페놀 유출사건까지 터지며 민심 또한 6공정부를 떠나고 있었다. 이에 따라 합당 이후 1990년 2차례 치러졌던 재보궐선거에서도 모두 민자당이 패배했을 정도로 민자당의 지지율은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었으며 이로 인해서 6월 지방선거에서 부진할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이었다.[6]
이런 가운데 1991년 4월 26일, 명지대학교 학생이던 강경대 열사[7] 가 데모를 막으려 출동한 서울시경 제4기동대 94중대 소속 전경대원들에게 집단으로 구타당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8] 이 때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거의 죽고 죽이는 살벌한 분위기였기 때문에, 당시 전투경찰에 복무하던 박석진 일경이 시위 진압 현장을 이탈하여 양심선언을 하고 복귀를 거부하여 이슈가 되기도 했다. # 또 강경대 치사사건에 대해 옥중 단식농성하던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 노동자가 5월 6일에 안양병원 마당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채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기도 했다.
강경대 군의 죽음은 1987년 6월 항쟁을 정점으로 치닫게 한 이한열 군의 죽음과 오버랩 되면서 대학가와 운동권은 크게 격앙되기 시작했다. 이에 운동권에서 정권에 대한 항의로 선택한 수단이 바로 분신자살이었다. 다른 한편 재야 단체들은 '고 강경대 열사 폭력살인 규탄 및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대책회의(이하 범대위)'를 결성해 대정부 투쟁에 돌입하게 되었다.
3. 정부의 대응
강군 치사사건에 대한 파장에 놀란 노태우 정부는 여론을 의식하는 듯 돌파구를 마련코자 했다. 강군 사망 후 4월 27일에 노태우 대통령은 안응모 내무장관을 경질시키고, 검찰이 강군 살해전경 5명을 잡아들였다. 노 대통령은 당일 성명에서 강군 사망에 대해 유감을 밝히면서도 "과거와 달리 민주화된 세상에서 폭력시위를 하는 건 용납못한다"고 언급했다.
이후 당월 29일에에 노재봉 총리가 치안장관회의에서 사과 의사를 밝혔다. 5월 2일에 노 대통령은 김영삼 민자당 최고위원과의 정례회담에서 사과 의사를 밝혔지만, 하루 뒤 청년회의소 다과회에서 "강경대 사망은 과거 민주화투쟁 중 희생과는 다르다"는 식으로 발언했다. 같은 날 국무회의에서도 전경 및 백골단 해체는 없다고 하며 '최루탄 발사 예고제' 및 백골단의 진압복 착용, 경찰의 교내진입 자제 등을 시사했다.
이상연 내무장관도 5월 4일 기자회견에서 무술경관 대체, 경찰서 집회허용 심사위원회제 도입 등을 등을 담은 '집회/시위 안전관리개선대책'을 발표했지만, 시사저널 5월 16일자 기사에선 '미봉책'이라며 달가워하지 않았다.
4. 잇따른 분신 자살
'''분신자살 관련자 명단'''[9][10][11]
명지대생 강경대의 죽음은 1991년 5월을 그야말로 피로 물들였다. 강경대가 죽은 지 사흘 뒤인 4월 29일, 전남대학교 학생 박승희가 강경대 사망을 규탄하는 집회현장에서 분신했다. 이어 5월 1일에는 안동대학교 학생 김영균, 5월 3일에는 경원대학교 학생 천세용, 5월 8일에는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이 서강대학교 옥상에서 유서를 남기고 분신 후 투신자살하는 사태가 일어났다.[13] , 거기에 5월 12일에는 서울직장민주화청년연합 회원 윤용하가, 5월 18일에는 연세대학교 학생 이정순, 전남 보성고등학교 학생 김철수, 광주의 운전기사 차태권[14] 이 분신을 택했다. 이때까지 무려 8명이 분신자살을 택하는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15] 결국 24일에는 노재봉 총리가 물러나고 정치적 성향을 가지지 않은 정원식이 총리가 되었지만 시위는 멈출 줄 몰랐다.
잇단 분신자살에 노태우 정권은 크게 당황해 4월 26일부터 5월 6일까지 열흘에 한 번 꼴로 각 언론사 정치부장(4.26 점심), 주필(4.30 저녁), 편집부장(5.2 저녁), 경제부장(5.3 점심), 사회부장(5.6 점심)들을 불러 회동을 가졌다. 청와대에 다녀온 언론사 간부들의 지시였는지[16] 이런 회동으로 인해 모 신문의 데스크는 경찰 기자들에게 <공부 좀 합시다>라는 제목의 면학 분위기 촉구 기사를 쓰도록 지시했다. 이에 경찰기자들이 이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지만, 방송은 여전히 노태우 정권에 충성해왔다. (원 출처 : <언론노보> 1991년 5월 8일자.)
각 방송사[17] 도 학생들을 비난하는 뉴스를 내보냈다가 노조의 반발에 직면했고, 이렇게 되다가는 1991년 6월 20일에 치러질 광역의원 선거에서 부동층들이 대거 신민당이나 민주당, 무소속으로 쏠려서 민자당이 대패할것이라는 위기감이 감돌았다. 특히 KBS 노조는 1991년 5월 6일자 <언론노보>에 낸 성명서에서 "노 정권의 말기적 폭력성에 규탄의 소리가 드높은 시점에 태평성대인 양 청와대에 충성스런 몸짓을 취하는 게 부끄럽다"면서 "더 이상 KBS를 공영방송이라 부를 수 없게 됐다"고 비판했다. 거기에 MBC 노조도 같은 날 나온 특보에서 "MBC가 돌 맞기 일보 직전에 처해 있다"고 비판했다.
5. 김지하와 박홍 신부의 카운터 어택
이러한 상황 와중에 분위기를 반전시킨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김지하 시인과 박홍 루카 신부의 발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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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정권에 맞서다가 감옥에 갔다온 뒤 김지하는 1991년 5월 5일에 조선일보에 칼럼을 게재해서 분신자살을 맹비난했다. 이 때의 칼럼 제목이 <젊은 벗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 :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 임팩트가 워낙 컸던지라 아직까지도 김지하 하면 회자되는 칼럼이다. 김지하의 이 칼럼이 신문에 발표된 이후, 사회 각계에서는 이를 둘러싼 맹렬한 논쟁이 일어났다. 어쨌든 이 칼럼 제목은 꽤 임팩트가 컸고, 그 후로도 상당히 회자되었다. 그리고 민주화 투사이던 김지하는 이 때부터 점점 보수화되어 간다.
김지하의 맹비난 이후 노태우 정권은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이어 서강대 총장 박홍 루카 신부는 5월 8일 서강대 메리홀 강당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죽음을 선동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라며 매카시즘적인 종북 간첩 음모론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그 카운터 어택을 조선일보가 나서서 협공해주면서, 사태는 점점 운동권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전개되어 갔다.
이들은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인물들로 간주되었던 인물들이라, 국민들의 눈에는 '''"민주화 선배들이 저렇게 말하는걸 보니 이건 문제가 많구나"'''라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 또한 사람의 생명에 대한 한국인들의 정서[18] 에 죽음이 어울리지 않다 보니, 여론이 점점 운동권쪽에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또한 시위가 장기화되면서 운동권 정파소속이 아닌 일반 시위참여자들이나 일반 시민들로 하여금 매주 주말 도심이 마비되는 시위에 대해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다.
어쨌건 이 비판은 생명에 대한 존중심에서 나온 것이지만,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선 노태우 정부를 돕는 결과를 낳아 많은 이들을 분노하거나 불편하게 만들었다. 대학가의 일부 사회과학 서점에서는 김지하 책 불매운동이 퍼졌고, 김지하가 소속된 '민족문학작가회의'[19] 에서는 김지하에게 제명 처분을 내리기까지 했다. 작가회의 청년위원회 부위원장인 김형수 시인은 5월 8일자 한겨레신문에 실린 <우리 그것을 배신이라 부르자 - 젊은 벗이 김지하에 답한다>라는 칼럼을 통해 "김지하는 지금 세상을 두 눈이 아닌 한 눈으로 보고 있다."고 공개 비판했다.
그러나 작가회의의 제명 처분에 대해 회원들 사이에서 논쟁이 일기도 했다. 제명 처분이 46:1이라는 압도적인 다수로 결정됐는데, 이에 이의를 제기한 쪽이 적었음에도 말미암은 것이다.
특히 소설가 이창동은 5월 19일자 중앙일보 기고문을 통해 "한쪽으로는 양심수 석방을 외치면서 어떻게 동료 문인의 양심을 단죄한단 말입니까?"라고 하여 재야 문인들의 김지하에 대한 부정적 매도에 대해 반발했다.
반면 아동문학가이자 시인인 이오덕은 3일 뒤 동 신문 기고문에서 "한 사람이 한 말은 표현과 양심의 자유가 되고, 더 많은 사람의 말은 표현도 양심도 아니란 말인가"라고 하여 재반박했다.
해당 사태는 11년 뒤 문부식의 '동의대 사태' 관련 조선일보 칼럼 기고파문 때도 재현되었다.
6. 필살기,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
이런 상황에 결정적인 필살기로 등장했던 것이 바로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이었다. 검찰은 "5월 8일 분신자살한 김기설은 자기 의지로 분신자살한 게 아니라, 운동권에서 온갖 협박과 감언이설로 분신자살하라고 내몰았으며, 그 증거가 강기훈이 김기설의 유서를 대필한 것이다."라고 주장해 파문이 일었다.
이런 검찰의 발표는 김지하와 박홍 신부의 카운터 어택과 일치하는 맥락이라서 국민들의 시선은 운동권에 급속도로 싸늘해지기 시작했다. 강기훈은 자신은 김기설의 유서를 대필하지 않았다고 항변했으나 국과수 감정인 김형영은 강기훈의 필적이 맞다고 감정했고 결국 이것이 결정적 증거로 채택되어 강기훈은 징역 3년에 자격정지 1년 6개월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2014년 2월, 재심 끝에 강기훈 씨가 무죄 판결을 받으며 사건 자체가 조작의 결과였다는 점이 인정되었다. 2015년 5월 14일 대법원 무죄 확정판결했다.
7. 운동권의 자멸, 정원식 계란세례 사건
이런 가운데 유서 조작 사건에 이어, 운동권이 반전된 여론에 쐐기를 박는 사건을 터트리는데, 바로 1991년 6월 3일의 정원식 총리에게 밀가루 셰례와 계란, 짱돌 세례를 퍼부은 사건이었다.
당시 한국외대 시간강사였던 정원식은 1988년 말부터 1990년까지 문교부 장관으로 재직했는데, 그는 부임하자마자 사학분규 등 각종 학내 문제에 대해 무자비한 강경대응으로 일관하여 1989년 초에 '학원안정 4단계 방안', '5.6 조치' 등의 학생운동 탄압 조치를 실시했고, 그 해에 전교조가 결성되자마자 교사는 노동자가 아니라면서 전교조에 가입한 교사들을 대량해직시키고 전교조에 가입한 인사들을 상대로 인신공격을 하거나, 1990년 세종대 학원자주화투쟁에 집단유급으로 대처하는 행보를 보였기에 운동권에서는 꽤나 악명이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러다가 1990년에 문교부 장관을 그만두고 나서는 1991년 3월부터 덕성여대, 외대 대학원 등지에서 시간강사를 맡다가, 노재봉 총리 사임으로 새 국무총리로 임명되어 6월 3일 오후 6시 30분경에 시간강사로서 마지막 강의를 하던 차였다.
그러나 정원식의 총리직 수락에 불만을 품은 운동권 학생들은 정원식이 문교부 장관을 하면서 전교조를 탄압했다는 과거 이력을 겨냥해 '''"학우 여러분, 전교조 선생님들을 학살한 정원식이가 지금 우리 학교에 와 있습니다."'''라고 교내방송을 통해 부르짖었고 이에 정원식이 당초 90분으로 예정된 강의를 50분만에 중단하고 나오자 어느새 강의실 복도는 2백여 명의 학생들로 가득 찼다.
정원식은 경호원들에 의해 가까스로 현장을 탈출했지만, 결국 학생들은 '''계란, 밀가루 세례를 퍼부었다.''' 단순히 계란만 던진 정도가 아니라 15명이 주도적으로 가방으로 머리를 때리고 강제로 교실에서 끌고나와 운동장으로 끌고가서 폭행하는 등 육체적인 폭력 행위도 있었다. 정원식의 수업을 듣던 대학원생들과 운동권 학생들간의 격렬한 몸싸움도 벌어졌다.
그런데 현장에는 새 총리 지명자를 인터뷰하려는 기자들이 몰려있던 터라 이 광경은 고스란히 전파와 사진으로 전국에 '''생생히 중계되었다.''' 이 광경에 국민들은 스승에게 저런 짓거리를 하는 놈들이 어디있느냐며 '''운동권을 패륜적인 집단으로 규정'''하여, 운동권은 스스로의 평판을 깎아내리는 멍청하기 짝이 없는 최악의 실책을 범하게 되었다.
원래 주요 언론에선 사건 당일엔 정원식 총리서리가 봉변을 당했다는 정도로 가볍게 넘어갔으나 방송이 나간 후 즉각 전국에서 "스승에게 저런 패륜적인 짓을 할 수가 있냐"는 시청자들의 항의 전화가 빗발쳤고 다음날부터 매우 대대적인 보도를 하게 되었다. 이 사건에 대해 75%의 국민들이 반인륜적, 반도덕적이라 하였고 83%의 국민들이 충격적이었다고 운동권에 매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거기에 정부는 다음날 대책회의를 소집하여 이 사건을 '인륜을 저버린 패륜아적 범죄', '공권력과 정부 권위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자 반인륜적 행동'으로 규정했다. 또 정부는 "이번 사건의 배후에는 조직적 반체제 좌경 용공세력이 있다."며 "현 시점을 법질서 확립의 마지막 기회로 삼아 체제 도전세력을 철저히 추적/색출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정구영 검찰총장도 정원식 폭행사건을 공권력에 대한 중대한 도전으로 간주해 엄단할 것을 서울지검에 지시했다. 이어 경찰은 오후 외대 주변에서 검문검색을 실시해 학생 310명을 연행해 이중 64명을 철야조사했고, 외대 총학생회장 정원택, 부학생회장 김경하, 학보 편집장 홍용희, 문화부장 백경인, 상경대 학생회장 박상우 등 5명을 수배했다.
8. 결말과 평가
운동권은 6월에 대대적인 저항을 하려 했으나 국민들의 시선은 이미 싸늘해질대로 싸늘해진 뒤였다. 80년대에는 데모하던 학생들을 숨겨주던 국민들은, 이때는 '''오히려 물을 끼얹거나 소금을 뿌리면서 내쫒고, 더 나아가 경찰에 신고까지 하는''' 정도였다니 말 다했다. 5월 25일에 열린 '공안통치 민생파탄 노태우 정권 퇴진 제3차 국민회의' 도중 성균관대학교 학생 김귀정이 토끼몰이식 시위진압 도중에 최루탄 속에서 구타당한 뒤 압박/질식사하면서[20] 6월 2일 노태우 정권 퇴진 제4차 국민대회까지 발생했지만 이 사건이 정국을 반전시키는데 끼친 영향은 별로 없었다. 6월 29일에 범대위 측은 명동성당 농성을 해제했다.
오히려 재야 운동권은 6월 5일에는 '민족해방활동가조직 사건', 6일 문익환 목사 재수감, 8월 3일 박성희-성용승 방북사건, 8월 26일 '반제반파쇼 민중민주주의혁명그룹 사건' 등의 민주인사 구속과 공안사건으로 타격을 입었고, 구속 시국사범(양심수) 숫자도 늘어나 1991년 한 해 동안에만 무려 1,352명이 되었으며 국보법 위반자는 전체의 40%에 달했다.
그럼에도 국민들의 반감은 그대로 선거로 나타났다. 6월 20일에 치뤄진 광역의회 선거에서 투표율이 크게 저조하게 나왔고 이 투표율 저조현상이 신민련-민주당간의 후보분열과 함께 시너지 작용을 하면서 민자당은 득표율이 상당히 낮았음에도 (40.6%) 전국의석 564석(총 의석수 868석)을 확보하며 압승을 거두었고 호남과 제주를 제외한 전 지역의 도의회, 시(특별시, 직할시)의회를 민주자유당이 장악하는 결과를 낳았다.[21]
결과적으로 여름방학과 2학기가 되어서도 학생운동세력은 크게 위축되었고 심지어 1991년 9월 서울대학교 인근 고시촌에서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총에 맞아 대학원생 한국원이 사망[22] 했을 때에도 그해 봄과 같은 대규모 시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23] 그나마 다음해 치러진 총선에서 민자당이 과반수 확보를 못한게 위안이라면 위안이라려나...[24]
그후 20년이 흐른 2010년대에 와서도 그 때의 분신정국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노태우 정권에 대한 정당한 항의였다는 평가가 있는가 하면, 아무리 옳은 투쟁이었다고 해도 분신이란 수단은 잘못되었다는 평가[25] 가 공존하는 상황.
윤이상은 이 소식을 접하고 말년의 걸작이라 불리는 "화염속의 천사"라는 곡을 작곡했다. 이 곡은 한국에서 그야말로 한두 번 정도밖에 공연되지 않았을 정도인데, 처음 이 곡이 초연되었을때는 정치적 논란을 감수한 과감한 행동이었다고 평가받을 정도였다.
한편 이 사건의 원인이 되었던 강경대, 분신을 선택해 항쟁의 도화선이 된 박승희를 비롯한 8명의 학생과 시민들, 경찰의 강경진압 도중 사망한 김귀정, 그리고 분신정국 도중 의문사한 박창수는 나중에 '''모두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다.'''[26]
또한 이 사건은 초원복집 사건과 더불어 신문과 방송의 여론 규정과 의제 설정 기능이 강력하게 작동한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386세대의 세대 구분에서 80년대 학번이 아닌 90, 91학번을 넓은 의미의 386세대로 보는 의견이 있는데 바로 이 사건을 전후로 해서 대학가 학생운동의 위세가 많이 차이나기 때문이다.[27]
[1] 1990년 5월. 물론 합당 당일 서울역 앞에서 대규모 시위가 있었다.[2] 다만 KBS를 제외하면 대개 기자들이나 언론사 간부들에게 돈을 뿌려주는식으로 언론통제를 하는 방식이었다고 한다. 그 외의 이야기는 KBS 사태 문서를 참조.[3] 강남구 수서동 수서지구 택지분양 과정에서 일어난 6공화국 최대 비리사건. 수서지구 택지를 한보그룹에 특별분양하는 과정에서 정, 재, 관계의 지도층 인사들이 거액의 뇌물을 수수한 혐의가 드러나 구속되면서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관련자들이 무더기로 구속됐지만 관련 피고인 9명 중 6명이 집행유예로 풀려나 단순 독직사건으로 축소된 채 마무리돼 6공의 대표적인 의혹사건으로 남았다.[4] 민정-민주-공화파로 일컬어짐.[5] 물론 지금 기준에서야 당시가 호황기였던 사실이었지만, 사실 그렇다고 해도 물가상승률이 상당하다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6] 사실 한국갤럽의 여론조사를 보면, 집권 첫해에 40-50%대를 기록한 걸 제외하면 노태우 정부의 지지율은 내내 낮은 수준이었다. 물론 무응답층의 비율이 상당하긴 하지만 부정평가 역시 무시할 만한 수준이 아니다.[7] 현재 민주열사로 인정을 받았다.[8] 94중대는 전경사복중대로 소위말하는 백골단이었다. #[9] 수록 순서는 분신한 날짜 순으로 하였음[10] 각 인물 정보는 당대의 신문과 2015년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가 편찬한 <민주화운동 백서(인명편)>를 종합함[11] '관련자'라고 한 이유는 생존자도 있기 때문이다.[12] 차태권은 복부와 손에 2도 화상을 입고 병원에 옮겨져 2시간 만에 퇴원했다.[13] 김기설의 분신자살은 또 다른 사건을 불러 일으켰다.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 참조.[14] 그는 김철수의 분신 소식을 듣고 "고등학생이 분신하는 마당에 우리가 살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며 분신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그는 죽지 않고 가벼운 화상으로 끝났다.[15] 이 중 분신자살한 8명 중 4명이 '고운(고등학생운동)' 세대 출신이었으며, 2006년 당시 성균관대학교 석사 이수 중이던 양돌규 씨는 <민주주의 이행기 고등학생운동의 전개과정과 성격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을 쓰면서 당시 투쟁의 핵심은 고운 세대가 죽음으로 항거했다고 해석했다.[16] 이상할 것도 없는 게, 이때는 아예 정부차원에서 명절 때마다 기자들에게 떡값도 돌리기도 했다라는 후문도 나올 지경이었다. 일단 전두환 때처럼 대놓고 탄압을 하기에는 좀 뭐하니까 돈을 뿌려대는식으로 선회한것.[17] KBS, MBC, CBS, PBC, TBS, BBS. 사건당시 SBS는 AM라디오밖에 없고 수도권 방송사였다. 나머지 4개 방송사는 당시 신문사로부터 뉴스를 제휴받아 방송하고 있었다.[18] 1991년 3월부터 산발적인 시위가 있었지만, 사태가 이처럼 커진 데에는 보수, 중도, 진보를 막론하고 '''"어떠한 이유로도 사람이 죽어서는 안 된다"'''라는 한국적 정서가 있었다. 즉 경찰의 쇠파이프에 대학생이 '''죽었다'''는 것에 정치적 관점과 상관 없이 많은 시민들이 분노해서 마치 87년 6월 항쟁을 연상할 정도로 대규모 시위로 발전했으며, 동시에 분신자살이라는 극단적 방법으로 의견을 표출하는 것 또한 똑같은 이유(생명의 소중함)로 일반 시민들에게 분신정국이 점차 거부감을 느끼게 된 것. 즉 죽음 때문에 시위가 커졌고, 죽음 때문에 상황이 반전된 것.[19] 현 사단법인 한국작가회의[20] 즉 방법만 달랐지 경찰에 의해 학생이 사망한 것은 동일하다.[21] 참고로 1991년 광역의원 선거 투표율이 58.9%로 1991년 기초의원 선거때보다(55.0%) 다소 높긴했지만, 당시 대통령 선거 투표율이 80%를 넘고 국회의원 총선 투표율이 70%를 넘던 시절이라는걸 생각해보자.[22] 경찰의 '''총탄'''에 의한 사망이다. 쇠파이프와는 차원을 달리한다. 물론 조준사격이 아닌 위협사격이였지만 공포탄이 아닌 실탄을 장착했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 맞다.[23] 그러다보니 운동권 세력은 늦가을에 있을 각 학교 총학생회 선거에 주력함과 동시에 이듬해(1992년)에 있을 제14대 대통령 선거정국을 위해 일단 한발 물러선다. 전민련 역시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전국연합)'으로 바꾸어 새 진용을 짜게 되었다.[24] 다만 이건 반감이 완화되어서라고 보기에는 뭐하고, 집권당인 민자당에서 공천과정에서 사고를 너무 많이 터트려서 민자당 후보 상당수가 무소속으로 출마해버린데다가 선거과정에서 흑색선전 유인물 배포나 부재자 투표에서 부정선거 등 대놓고 막장짓을 한 영향때문이었다. [25] 백번 양보해서 분신이라는 수단이 옳더라도 전체적인 정국흐름에 둔감해서(즉 민중의 생각을 파악하지 못해) 결국 역풍을 맞게 되었다는 평가[26] 이들 중 박창수를 제외한 모두가 2000년대 초에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되었다. 박창수는 2014년에야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되었다.[27] 1992년은 위에서 언급한 대선정국 이 있었고 1993년 문민정부 이후부터 2000년대까지 과격시위는 멈추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