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계육

 

1. 개요
2. 알려진 낭설
3. 진실
4. 창작물


1. 개요


成桂肉(성계육). 20세기 초 일제강점기에 개성 덕물산 신상동 부락의 도당굿에서 나눠먹은 돼지고기 수육을 신상동 주민들이 일컬은 말.

2. 알려진 낭설


인터넷에선 성계탕으로 알려져 있다. 개성과 그 이북 지방에서 유행했다고 알려져 있는 국요리. 평안도 지방에서 원래부터 존재하던 돼지고기 사골국과의 차이점이 있다면, 성계탕은 밥 대신 좀 더 돼지고기 건더기를 풍성하게 넣었다는 차이점이 있다. 현재 이와 가장 비슷한 음식이라 한다면 부산광역시의 향토 음식 돼지국밥이 있다. 실제로 돼지국밥의 유래 중 이북 전래설이 있는데, 이쪽을 따르면 성계탕은 돼지국밥의 조상뻘 되는 음식.
일단 인터넷에 떠도는 성계탕의 유래에 대한 야사를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위화도 회군으로 요동 정벌이 좌절되고 최영 장군이 실각, 처형되고 고려 왕조가 멸망, 조선이 건국되면서 살아남은 개성 사람들과 최영의 지지자들이 은밀하게 최영의 제사를 올리면서, 제삿상에 올린 삶은 돼지고기에 이성계에 대한 증오를 가득 담아 '''성계육'''이라고 부르면서 먹던 게 바리에이션이 되면서 성계탕이라는 이름으로 민간으로 퍼져 나갔다.


이성계가 을해년인 1335년 출생으로 돼지띠라는 이유에서 돼지고기에 성계육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설도 있다. 아예 개성 지방에선 돼지를 성계라고 부르기도 했다는 설도 있다. 그 당시 보존기술의 한계와 요리의 편의성 때문에 삶은 돼지고기 수육인 성계육보다는 국물이 있는 성계탕이 좀 더 보존성이 좋고 적은 재료로 풍성하게 먹을 수 있어 민간 사이에서 유행할 수 있었다.

고려대학교 국문과 유영대 교수[1]

가 집필한 책 '이성계설화'에 보면, 개성 지방에서 떡국에 사용하는 떡인 조랭이떡도 이성계를 향한 디스용 음식이었다고 한다. 조랭이떡 특유의 누에 모양을 만들 때 대나무 로 떡을 비트는 행위나, 먹을 때 동그란 부분만 이빨로 끊어 먹는 행위를 이성계 을 비틀어 죽이는 것으로 비유했다고 한다.

이 음식 이야기에 조선왕조 내내 개성이 소외받았다는 이른바 개성소외론까지 따라 붙는다. 조선왕조 내내 과거에 붙어도 위험 지역 주민이라는 이유로 한직만 돌았고, 후기에는 사회 경제적 차별까지 당해서 막막해진 개성인들이 상업에 종사해 송상으로 알려진 개성상인이 되었다는 주장이다.[2][3]

3. 진실


두문동 72현 전설과 궤를 같이한다. 두문동 72현 전설이 여말선초 소극적으로 저항한 소수 유신들의 행적을 개성 사대부들이 턱없이 부풀려서 만들어낸 역사라면 성계탕은 아무리 올려잡아도 조선 후기에 최영을 섬기는 소규모 신앙공동체가 향유한 풍속을 현대 대한민국 매체가 여말선초까지 끌어올려 개성 전체의 풍속으로 왜곡한 결과물이다.
개성소외론은 1648년(인조 26)에 편찬된 김육의 <송도지(松都志)>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는 야사다. 이게 진실이면 두문동 72현도 진실이다.
태조 3년 한양천도를 단행했을때 한양 백성들은 원래 한양에 살던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적지 않은 수가 개성에서 이주시킨 개성사람들이다. 한양에서 돼지고기 씹으며 타도 이성계를 외쳤단 말인가? 1차 왕자의 난으로 태조가 왕위에서 쫒겨나자 정종은 개성으로 환도를 단행했다. 개성이 정말 이씨에 대한 원한으로 부들부들 떨었다면 쿠데타로 정권을 잡아 불안한 정국에 선뜻 돌아가는 조치가 가능했을까?
정종실록에는 정종이 어머니 신의왕후의 묘인 제릉 참배를 위해 개성을 방문했을 때, 수창궁 북원(北苑)에 행차해 고려 태조 왕건이 도읍을 세운 뜻에 감탄하며 도읍을 도로 옮길 결심을 굳혔다고 적고 있다.[4] 이 기록이야 명분을 위해 가져다 붙인 기록이고, 실제론 어수선한 한양에서 토목공사를 한동안 중지하고 한양 도성안에 안장된 계모 신덕왕후의 권위와 도성을 건설한 정도전의 흔적 지우기가 목적이었지만 신덕왕후와 정도전의 영향력을 지우기 위해 선뜻 개성 환도를 결정했다는데서 현지 민심에 대해선 별 우려가 없었음을 알수 있다.
태조가 개성에서 과거를 실행하였으나 태학생들이 이를 거부하였다는 이야기는 용의 눈물, 정도전 등의 사극에서 여러번 재탕해서 널리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에는 여기에 격분한 태조가 개성인들에게 과거를 금지시켰다가 성종대에서야 해제되었으며 그후로도 계속 차별을 받아 개성인들은 주로 상업에 뛰어들었다는 뒷이야기까지 붙었다.
기록을 보자. 1393년(태조 2년) 5월, 조선 건국 후 처음으로 실시된 식년시에서 5월 3일에 감시(監試, 생원진사시)를, 6월 13일에 문과 전시를, 6월 24일에 성균관에서 생원시를 치렀다.[5] 6월 13일의 문과 전시에서 선발된 33명의 이력은 방목에서 확인되는바 전원 생원(生員) 혹은 진사(進士)이니 이들 중 다수는 태학생일 것이다. 피를 토하는 야사의 주장은 이렇듯 기록 한줄로 무너진다.
그보다 앞서 치뤄진 감시(생원진사시)에서는 박안신(朴安信) 등 99명을 아무탈없이 선발했는데 개중에는 우현보이색의 당여로 지목되어 유배갔던 유정현의 두 아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유정현은 아들들의 합격을 계기로 직첩을 돌려받는다.[6] 이때는 한양천도 이전이다. 6월 24일에 치뤄진 성균관 시험에선 132명을 선발했다. 과거 거부는 고사하고 온건파 관료의 자제들까지 참여해서 모자람없이 충분한 인원을 선발했다.
물론 성균시에 응시해 합격하고도 입학은 거부한 고약해(高若海) 같은 사람도 있었으나 그조차 1413년(태종 13)에 천거받아 관직에 나선 이후론 꾸준히 봉직했다. 건국된지 1년된 왕조이니 만큼 고약해처럼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거나 관망하는 사람은 있었지만 이성계를 비롯한 집권자들은 그런 사람들 충분히 감안하고 유화책을 폈지 뭘 어떻게 해석해도 개성인들에게 불이익을 줬다는 기록은 없다.
정종이 개성으로 천도한 후에 치러진 1399년(정종 1)의 식년시, 1401년 (태종 1) 태종 즉위를 기념한 증광시, 1402년(태종 2)의 식년시까지 3차례의 과거가 개성에서 모두 정상적으로 실행되었다. 1402년의 식년시에서는 처음으로 무과가 실시되기까지 하였다.
기록이 이런데 개성인들이 설화에서처럼 새 왕조에 대해 적대적인 분위기를 유지했다는게 말이 되는가? 적대적인 도시에서 수많은 인파를 불러모으는 과거, 그것도 병장기를 합법적으로 휴대할수 있는 무과(武科)까지 실행이 가능했을까?
성종대에 개성인의 과거응시를 허용했다는 주장도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 성종이 개성인들을 위한 알성시를 열어달라는 요청을 현지 유생들의 청을 받았으나 개성이 한양과 워낙 가까워서 한양 유생들이 개성가서 시험을 치를수 있다는 우려로 거부되고 개성유수 주관하에 도회(都會 지방유생의 학업장려를 위해 치르는 특별시)를 치뤄 4명을 선발하는데 머무른 적이 있었다. 연산군 시기에 역시 개성에서 알성시를 치뤄달라는 요구가 있었으나 성종대의 전례를 거론하며 거부되었다.
낙후된 조선시대 지리관념으로도 개성은 한양에서 엎어지면 코닿을 거리라서 성종은 "강릉이나 평양같이 먼 지방 유생들이 받아야 할 특전을, 왜 한양 지척에 사는 너희들이 받으려고 하냐"며 언짢아 했다.[7]
실제로 개성인들이 한양에 와서 수학하고 과거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예를들어 월산대군성종을 가르쳤던 김구지(金懼知)는 남대문 밖에 세들어 살던 개성사람으로 과거합격에는 실패했지만 가르치는 실력이 좋아서 세조도 이름을 기억하고 칭찬할 정도였다. 성종~연산군 연간에 당대 인식이 개성에서 난다기는 사람들은 전부 한양에 와있어서 개성에 남은 사람중에는 쓸만한 인재가 별로 없고 거리가 가까워 상호 왕래가 자유로운 개성에 특전을 베풀 필요가 없다 였으니 어디에도 차별의 흔적은 없다.
개성소외론을 주장하는 학술 논문들은 조선 전기의 정사는 무시한채 김육의 송도지 같이 17세기 이후 개성 문인들의 시각을 반영한 읍지[8]나 여지도서 같은 17세기 이후 지방지[9]를 근거로 들고 있다.
하필 17세기에 개성소외론 같은 야사가 등장한 이유는 16세기 이후 개성의 위상변화 때문이다. 개성은 한양에 가까워 접근성이 좋은데다 고려시대부터 수도라 학문교육과 전승을 돕는 시설들이 밀집해 있어서 개성문인들은 맘껏 혜택을 누리며 스스로 자부심을 가졌다.
하지만 16세기들어 조선의 중앙집권적 행정체계가 완전히 정착하고[10] 사화와 당쟁으로 중앙의 관인층이 각 지방으로 흩어져 서원을 통한 자체적인 교육과 전승 체계를 마련하면서 중앙에 비해 낙후되었던 지방의 학문적 역량이 향상되면서 개성과 타 지방의 차이는 줄어들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이란 미증유의 재난으로 도시가 쑥밭이 되면서 학문교육 시설도 재가 되버리니 개성의 이점은 완전히 사라졌다. 서경덕(徐敬德), 차천로(車天輅), 최립(崔岦) 같은 걸출한 문인들을 배출한 15~16세기의 영예는 끊어져 버렸다. 과거 누려온 메리트가 모두 사라지고 자부심을 드높일 문인들도 배출되지 않은 상실감과 박탈감, 피해의식이 개성소외론이란 가공의 역사를 만들어내기에 이른 것이다. 개성의 떨어진 자존심은 18세기에 도성 방어체제가 정비되는 과정에서 개성의 위상이 크게 상승하고 노론 낙론 종장들에게 수학한 유학자들이 속속 등장하고 나서야 회복된다.
덧붙여 생각해봐야 할 점은 개성소외론은 한양의 관료, 문인들이 개성문인들과 교류하며 편찬한 읍지가 확산시키고 조정에서 공식적으로 편찬한 지리지에 실림으로서 공인되었다. 개성아이들이 이성계의 이름을 부르고 다녔다는 기록은 남 보여주려고 출간한 문집인 성호사설에 실려있다. 이게 다 무슨 뜻일까? 왕실에서 개성이 그들의 역사를 비극적으로, 역동적으로 윤색하는걸 '''허락'''해줬다는 뜻이다. 왜? 개성인들이 조선 왕실에 지닌 충성심에 의심의 여지가 없으니까. 진짜로 차별받은 청천강 이북 지방에 대해 국가 공식 지리지에 차별을 명시하고 한양 문인들이 이를 공론화시킨 적이 있는지 생각해보면 전혀 다른 사안임을 알수있다.
'''성계육의 진원지는 최영신앙의 본산격인 개성 덕물산이다.''' 개성에는 고려 중기부터 국가에 여러 환란이 닥쳤을때 기원을 드리는 기은처(祈恩處), 쉽게말해 기복의례 올리는 신사(神祠)들이 여럿 건립되어 있었다. 이 신사들은 조선 개국후에도 그대로 남아서 지역민들은 물론 왕실도 치성을 올렸고, 조선 전기부터 유생들이 자추 찾는 유람명소이기도 했다.[11]
특히 '안산'이라 불린 송악산(松嶽山)과 '밖산'이라 불린 덕물산(德勿山)의 신사가 유명했는데 이중 덕물산은 태조 5년 최영이 신원되면서부터 최영을 섬기는 신사로 전국 무속인들이 모이는 장소였다. 한국전쟁으로 지역 공동체가 완전히 박살이 나버려 지금은 조사할 길이 없지만 20세기 전반 덕물산 자락 신산동이라는 마을은 부락 전체가 최영을 받드는 무속신앙과 관련되어 있였다.
일제시대 조선의 민속과 무속을 조사해 자료로 남긴 일제시대 민족학자 아키바 다카시(秋葉隆, 1888-1954)의 덕물산을 방문해 조사하고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산정의 부락을 신산동이라 하는데 거기에는 높고 낮게 돌로 쌓은 담과 울툭불툭한 소로가 상하로 돌아가고, 40호 초가집이 있다. 그리고 부락이 들어갈 사이도 없는 곳에 장군당 즉 최영사의 문이 있다. 신전(神殿)은 삼칸사면의 기와지붕으로 이어져 있는 본옥에 자리 잡았다. 건물에 얹은 몇 장의 청기와는 당시의 화려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본당 정면 구석에는 최영장군 및 그의 첩이라고 하는 여인의 큰 소상이 있고, 그우측에는 장군의 한 딸과 두 아들 그리고 군웅이 모셔지고, 좌측에는 용상을 받고 있는 별상이 있다. 별상의 딸은 천연두신 호구별상이라 하고, 별상은 소위 뒤주대왕이라 불리는 장헌세자(莊獻世子)를 이르는 말이다. 또 옆벽에는 삼불제석·칠성신·송악산신·가망님·사방천왕·임경업장군, 좌측벽에는 감악산천총대왕·가망부인·용왕·용왕부인·송악산신·삼불제석의 화상이 걸려 있고, 대소 볼록거울이 함께 걸려 있고 장군의 장남이 청룡도와 삼지창을 가지고 서있다. 한 구석에는 연기에 그슬린 촛대가 있으며, 신기는 무녀가 굿할 때 사용한다. 촛대는 굿이 끝난 밤에 그 당번 무녀가 반드시 장군당에 촛불을 켜도록 되어있다. 아마 그 옛날 무녀는 신처(神妻)로서 신을 모시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부락의 중앙에는 장군의 부인을 모신 부인당이 있다. 장군당에 비해 규모는 떨어지지만 역시 기와집으로 지었고 당 안에 부인의 소상을 안치하고 뒤로는 큰 신경을 걸었고 그것과 나란히 좌우로 삼불 등을 모시고 외랑에는 부인의 하졸의 화상 및 수광대(首廣大) 두 개를 걸어두었다. 취지로 보아 임장군당과 같다고 할 수 있다. - 아키바 다카시 저, 심우성 역, 1993, 「조선민속지」, 동문선, p.283

신산동 주민들은 최영은 물론 첩과 두 아들, 딸까지 일가족 5명을 모두 신으로 받들어 섬겼다. 그리고 마을 중앙에는 최영의 부인 소상에 부인의 하인 화상까지 별도로 모신 부인당이 마련되어 있어 마을 전체가 철저한 무속신앙 공동체인 유별난 곳이었다.
경성제국대학에서 법문학부 교수를 지낸 민족학자 아키바 다카시는 제국학사원의 연구비 지원을 받아 조선의 전국각지를 답사하고 1935-36년 복부공보회라는 사회단체로부터 편찬, 출판비를 지원받아 1938년 책으로 출간했다. 그와 동료학자 아카마쓰 지죠는 1928년 5월 말, 1931년 2월, 5월 세차례에 걸쳐 덕물산 방문조사했는데 1931년 5월 조사에서 성계육에 대한 기록이 등장한다.

한편으로 땅을 파서 부뚜막을 만들어 여기에 큰 솦을 걸고 와정(瓦井)의 신수(神水)를 부어, 화주(化主)의 집도로 분배된 생생한 희생의 소, 돼지를 큰 솥 속에 넣고 삶는다. 이렇게 날이 저물고 황혼 무렵에 제물을 익히는 부두막의 연기가 산기슭을 따라 길게 뻗치면, 굿의 대단원인 향연이 시작된다. 사람들은 제물의 성찬을 에워싸고 앉아 신주(神酒)를 마시며, 신의 은총에 안겨 남녀노소할 것 없이 모두 한껏 즐기고 있었다. 우리들도 화주와 함께 최초의 성스러운 식사를 할 수 있는 영광을 얻었다. 조선 제일로 치는 '''덕물산 성계고기(成桂肉)'''의 맛을 즐길 수 있었던 것이다. - 아키바 다카시, 아카마쓰 지죠 저, 심우성 역, 1991, 「조선무속의 연구」 下, 동문선, p.211

여기서 아키바 다카시와 아카마쓰 지죠가 1931년 덕물산 도당굿을 조사하며 찍은 사진들을 열람할수있는데 6번째 사진이 바로 성계고기다.
덕물산 성계고기라는 다키시의 지칭으로 성계고기가 개성에서도 덕물산 명물임을 알수 있다. 다카시가 붙여둔 주석을 봐도

덕물산에서는 고려의 충신 최영을 숭배한 결과, 고려를 멸망시킨 조선의 태조 이성계의 이름을 장군의 영령에 올리는 돼지고기의 호칭으로 하고, 이것을 성계고기라 한다. - 아키바 다카시, 아카마쓰 지죠 저, 심우성 역, 1991, 「조선무속의 연구」 下, 동문선, p.325

'''성계고기는 결코 개성 전체의 풍속이 아니다.''' 최영을 숭배하는 덕물산 산상동 부락에서 2년에 한 번 음력 3월에 여는 도당굿에 올리는 돼지고기를 일컫는 말이었다.
17세기 역사적 진실이 자리잡아버린 개성소외론은 18세기 두문동 72현 설화가 진실로 굳어지게 만들었다. 지역 여론을 주도하는 사대부들이 100년 넘게 저리 아우성인데 지역주민들이 과연 동조하지 않았을까? 지역 주민들의 의식 또한 그와 함께하며 고려의 구도라는 역사성을 강하게 의식하게 되었고 개중 그 어느곳보다 최영에 대한 신심이 유별났던 개성 덕물산 신앙공동체에서 성계육이란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추정할수 있다.
성계육이란 명칭이 조선 전기부터 있었거나 덕물산 밖에서 쓰여졌을 가능성은 낮다. 덕물산도당굿만해도 선상동 부락에서만 조용히 지내는 굿이 아니다. 외지에서 온 유랑예인들까지 참여해 불특정 다수의 인원의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신명나게 벌이는 일종의 축제다. 개성의 신사들은 지역 유생은 물론 한양 문인들도 곧잘 방문하던 명소였다. 조선 전기부터 혹은 덕물산 밖에서 쓰였다면 중간에 기록에 남지 않을 수가 없다. 이중환의 택리지, 박지원의 연암일기 같이 개성의 무속신앙을 언급한 기록들은 상당히 많지만 그 어디서도 성계육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게다가 조선 전기 최영 신앙은 국가의 시선 아래 있었다. 최영을 신원시키고 종로에 사당을 세워 화상을 봉안케한 사람이 태조 이성계로 덕물산 최영 신당도 이 무렵 정비되었다. 태종 시기까진 양경 체제로 개성이 도읍지로서 위상을 유지했고 세종 시기까지 그 관성이 이어져 역사적 사실을 도외시한 개성소외론이 대두하지 않았다.
개성 문인들이 이에 동조했을 가능성은 아예 없다. 영조 16년 승정원일기 기록에서 두문동 72현 전설에 대해 이미 조사해서 알고 있었음이 확인되는 영조가 재위 20년에 개성을 방문해 마치 처음듣는다는 듯 쇼를 하자 두문동 이야기에서 충절 부분은 더욱 강조하고 비극적으로 죽었다는 부분은 알아서 뭉개 영조 보기 좋게 편집한게 개성 사대부들이 조선에 적개심을 품고 돼지고기를 씹었을 가능성은 없다. '''개성은 조선 후기 성리학 중흥의 수혜지로 19세기 이후 지역 유교전통이 확립되며 성리학의 영향력이 한층 강해졌다.'''
그럼 덕물산 무당과 주민들은 언제부터 돼지고기를 성계고기라 불렀을까? 신상동 부락이 한국전쟁과 분단으로 소멸하여 정확한 시기 특정은 불가능하다. 다카시는 주민 300명 가량의 마을에 7명의 무당과 2명의 고수가 있었고 무당이 늙으면 어린 소녀에게 전승하는 방식으로 신앙을 이어갔다고 설명했는데 전승내용도, 무당도 남아있지 않고 기억을 간직한 다른 생존자도 없다.
거칠게 추정은 해볼수 있다.

내가 이전에 송도를 지나는데, '''마을 거리의 어린 아이들이 아직도 태조(太祖)의 등극하기 이전의 휘(諱 성계(成桂)라는 이름을 이름)를 마구 부르기에''', 이는 전조(前朝 고려를 이름)의 남은 습관으로, 우리와는 원수가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당시 고려가 망하자, 끝내 옛 송도에서 늙은 자는 다 백성에 편입되어, 지금도 노인들이 두문동(杜門洞)이니, 팔판동(八判洞)이니 하는 동명을 전하니, 이는 그 유신(遺臣)들의 숨어 살던 곳이라 하여 개연히 길이 탄식하는 뜻에서이다. - 이익, 「간발왕씨」, 『성호사설』 권12.

18세기 중반 저작인 이익의 성호사설에 마을 아이들이 태조의 즉위전 휘를 마구 불렀다는 언급이 등장한다. 그리고 두문동 설화가 개성인들에게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음도 확인된다. 유학하는 사대부들이야 왕실이 연주하는 장단에 알아서 맞췄지만 평민들은 그럴 필요가 없고, 조정에서도 평민들의 행실 하나하나까지 가혹하게 대하지 않았기에 가능했다.
고려의 구도라는 사실에서 자부심을 얻는 개성인의 역사인식이 18세기 이후 더욱 심화되어 18세기에 이르러 마을아이들이 이성계의 휘를 마구 부를정도였다. 이런 인식이 더욱 심화되어 올려잡으면 18세기 후반, 내려잡으면 구한말쯤 전국에서도 가장 신실한 최영 신앙 공동체인 덕물산 무속인들이 제에 쓰는 돼지고기를 성계고기라 부르게 되었다고 추정해 볼수 있다.
물론 이렇다고 덕물산 주민들이 조선 왕조에 적개심을 가졌다고 주장하는건 형편없는 비약이다. 양반들 비꼬는 내용으로 가득한 봉산탈춤을 두고 민란 획책으로 보는 사람은 없다. 경주사람들이 신라고도임을 자랑스러워 하듯이 지역의 역사와 위인을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이 전근대 시대식으로 나타났을 뿐이다.
그리고 개성의 역사성은 고려의 수도에만 있지 않다. 개성인들은 자신들의 고향이 고려의 수도라는 점 못지않게 '''조선왕실의 어향, 태조가 즉위하고 태종이 성장한 풍패지향이란 점을 진심으로 자랑으로 여겼다.''' 인터넷에선 성계육 따위만 기억하지만 훨씬 중요한 목청전에 대한 인식은 없다. 1418년 개성의 태조 잠저에 사당을 짓고 어진을 봉안한 목청전은 임진왜란때 소실되자 200년이 넘게 이어진 개성인들의 요청끝에 대한제국 시기인 1901년 재건되어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했다.
사대부들이 열심히 강조했던 두문동 72현 전설과 달리 지역 무속 공동체에서 시작되어 덜 알려졌던 성계고기 이야기는 분단 이후 신문기사나 구전을 통해 간간히 언급되다 1970년대 최고작가 황석영이 1974년부터 10년간 연재한 베스트셀러 장길산[12]에 실림으로서 대중들에게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2014년 KBS 사극 정도전을 통해 젊은층의 역사 인식에도 들어가 박혔다.
훨씬 유명했던 두문동 72현 전설은 지금은 만들어진 역사임이 널리 알려지기라도 했지 이건 KBS에서 확대재생산하는 바람에 답도 없다.

4. 창작물



정도전에서 등장했다. 변장하고 궁 밖으로 나온 이성계이지란이 주막에서 음식을 시키는데, 거기서 성계탕이란 것이 유행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최영이 처형당한 뒤 이런저런 이유로 개경 내 많은 사람들이 이성계 세력에게 살해당한 데다가 결정적으로 왕씨 몰살로 무고한 수많은 백성들이 학살당한지라 개경 민심이 굉장히 좋지 않다는 걸 알게 된 이성계는 눈물을 흘리며 성계탕을 먹었고, 이후 수도 천도를 결심한다.
여기서 성계탕은 시래기국 비슷한 모습으로 나왔다. 사실 잔인한 시대 상황을 배경을 하고 있지만, 드라마에서는 극적 연출과 이성계를 연기한 유동근의 연기력으로 잘 포장되어 명장면으로 회자되는 장면이다. 참고로 이 장면은 이지란을 연기한 선동혁해피투게더에 출연했을 때 정도전을 촬영하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으로 꼽았던 장면이다. 이는 이성계를 연기한 유동근의 놀라운 감정 이입 능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
여담으로 작중에서 성계육과 대비되는 음식으로 이팝이 있다. 드라마에서 이팝을 이성계가 내려 준 밥이란 의미로 해석하는데, 진실여부는 제쳐놓고, 이는 고려 민심이 이성계로 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요소였다. 그런데 조선 건국 과정에서 정몽주, 고려 왕씨 등 수많은 회생이 벌어지면서 개성의 민심이 급격히 돌아섰고 이를 보여주는 요소가 성계육인 것이다. 음식을 이용해 여말선초 이성계를 대상으로 한 민심의 변화를 연출한 제작진의 재치를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SNL 코리아에서도 이 장면을 패러디했다. 배역은 정상훈이성계, 신동엽정도전이고 유세윤이방원, 정성호이지란이다. 거기에 정도전(煎)이방원할머니 족발도 같이 나오는데, 마지막에 이것들을 주막에서 키우는 강아지이성개(犬)에게 주는 것이 압권. 해당 영상.
단순히 해당 장면 자체를 패러디한 차원에서 벗어나 의외로 실제 역사에서의 훗날 이들의 관계를 SNL 식으로 적절히 버무렸는데, 정도전과 이방원이 서로 상대방의 이름을 딴 음식을 갈기갈기 찢으며 잘근잘근 씹어먹는 것은 훗날 벌어질 이들의 권력 투쟁을, 이성개(犬)가 이방원할머니 족발만 먹고 정도전(煎)은 먹지 않는 것은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죽인 이방원에 대한 이성계의 미움을 묘사한 것. 드라마의 해당 장면에서는 이성계와 이지란만 등장했지만, SNL 패러디에서는 정도전과 이방원까지 등장시킨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아프리카TV 먹방 버전(브금주의)으로 만든 것도 있다. 아이디와 닉네임들이 깨알같다.

[1] 이 사람은 사학과 교수가 아니라 고전문학과 판소리 연구하는 국문과 교수다.[2] 완전히 역으로 간 왜곡이다. 개성은 대도시지만 한양과 달리 주변에 경작지 면적이 협소해 많은 인구를 부담할 식량을 자족할수 없어 일찍부터 상업이 발달했다. 박평식, 1998 「조선전기 개성상업과 개성상인」, 『한국사연구』 102, pp.189~190.[3] 경작지가 부족으로 상업에 의존하는 약점은 전근대시대에 해결할 방법이 없어 개성은 대대로 기근에 굉장히 취약했다. 1656년(효종 7)의 가뭄과 장마로 인한 쌀값의 앙등으로 이듬해 봄 개성 주민들이 주려 죽을 지경이 되어 가까운 황해도의 비축곡을 급히 운송해 기근을 구제하도록 조처했고(『효종실록』 권18, 효종 8년 2월), 수년이 지난 현종 1년(1660)에도 개성부에 유민 410명이 발생해 4월 초부터 6월 초까지 두 달간 진휼하는 등(『현종실록』 권3, 현종 원년 6월) 기근피해가 타 지역에 비해 매우 잦았다.[4]정종실록』 권1, 정종 원년 2월 15일[5] 『태조실록』 권3, 태조 2년 5월 3일, 6월 13일, 6월 24일[6]태조실록』 권3, 태조 2년 5월 3일[7]성종실록』 권47, 성종 5년 9월 27일[8] 양정필, 2017, 「조선시대 開城 지역에 대한 차별과 개성인의 정체성」, 중앙사론 권46[9] 노영구, 2016, 「조선후기 개성의 도시 발달과 지역의식의 성장」, 서울학연구 권63[10] 속현, 소 같은 고려시대의 차별적 행정구역은 조선개국후에 바로 사라진게 아니라 점진적으로 사라지다 16세기에 가서 완전히 사라졌다.[11] 개성은 조선 전기부터 관광명소였다. 고려때 중수된 사찰들이 많아 숙박 걱정이 없고, 한양에서 겨우 이틀거리에, 고려 중기부터 남경(한양)일대가 개발되고 중국 사신의 사행로도 개성에서 한양으로 이어져있어 교통이 편리했기 때문이다. 고관대작뿐 아니라 평범한 유생들도 쉽게 방문할수 있는 관광지로 유명했고 박연폭포나 송악산 신사는 지역 명물로 통했다.[12] 10권에 대놓고 덕물산 큰굿에서 성계육을 씹는다는 언급이 나온다. 덕물산 풍속을 전해듣고 소설을 쓴것. 황석영은 이걸 덕물산 뿐아니라 개성과 북쪽 전역의 풍속인냥 묘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