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마즈 하츠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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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속에서 하츠코가 입고 있는 세일러복은 가쿠슈인의 교복이다.
일본의 前 황족. 1939년생(만 85살).
신적강하로 평민이 되기 이전의 이름은 기타시라카와노미야 하츠코 여왕(北白川宮肇子女王).[1] 신적강하 후부터 결혼 전의 이름은 기타시라카와 하츠코(北白川肇子). 결혼 후의 이름은 시마즈 하츠코(島津肇子).
한때 아키히토 상황의 유력한 신붓감으로 거론됐던 인물이기도 하다.
도쿄학예대학 부속초등학교, 가쿠슈인 여자 중등과, 가쿠슈인 여자 고등과를 거쳐 가쿠슈인 대학 문학부 철학과에 진학했으나, 결혼하면서 대학은 중퇴했다.
하츠코는 방계 황족인 아버지 기타시라카와노미야 나가히사(北白川宮永久) 왕과 화족 출신인 어머니 도쿠가와 사치코(德川祥子)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친할머니는 메이지 덴노의 7녀[2] 인 카네노미야 후사코(周宮房子) 내친왕이며, 고모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사와코(北白川宮佐和子)[3] 여왕은 의친왕의 아들인 이우의 신붓감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던 인물이다.
즉, 하츠코는 철저하게 황족&화족의 혈통으로 태어나 [4] 좋게 말하면 유서 깊고 전통적인, 나쁘게 말하면 보수적이고 구시대적인 분위기에서 자라난 규수로, 전형적인 황실의 신붓감으로 적합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하츠코는 '''태어났을 때부터''' 6촌뻘이자 6살 위인 아키히토 황태자의 장래 황태자비 후보로 유력하게 거론되었다.
1947년, 다이쇼 덴노의 직계 자손들을 제외한 모든 방계 황족들과 화족들은 평민 신분으로 격하되었다. 하츠코와 그녀의 집안도 이때 평민이 되었다. 그러나 옛 황족들과 화족들의 드높은 콧대는 하루아침에 꺾이지 않았고, 그들은 하츠코가 장래 황태자비가 되리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아키히토 황태자는 1957년부터 평민[5] 쇼다 미치코와 연애하다가, 결국 주변의 온갖 반대들을 다 뿌리치고 미치코를 신붓감으로 택했다. 이는 수천 년의 전통을 깬 어마어마한 사건이었다.
하츠코는 미치코에게 밀려 황태자비 후보에서 탈락한 후, 시마즈 타다히로(島津忠広)에게 시집갔다. 다만 일본 위키백과의 서술에 의하면 하츠코와 기타시라카와 가문은 "황태자비로 내정되면 거부하지는 않겠다." 정도의 수준이었다고 하며, 하츠코와 타다히로는 아키히토와 미치코가 만나기 전부터 서로 어느 정도 호감을 갖고 교제하던 사이였다고 한다.
아키히토 황태자와 쇼다 미치코는 결혼식 전에 이세신궁을 참배했는데, 이때 이세신궁의 신관은 하츠코의 할머니 후사코였다. 물론 자신의 손녀를 제치고 황태자비로 책봉된 미치코가 곱게 보일 리 없으니, 후사코는 미치코를 홀대했다.
결혼 후로도 미치코 황태자비는 황실에서 매운 시집살이를 당했다. 평민 출신의 큰며느리를 몹시 미워한 나가코 황후는 하츠코의 고모할머니인 호시나 다케코(保科武子)[6] 를 자신의 시녀장(侍女長)으로 두었으며, 다케코가 퇴임한 후로는 하츠코의 어머니인 사치코를 시녀장으로 두었다.
나가코 태후는 2000년에 자신이 죽을 때까지도 미치코 황후를 미워하여 호되게 시집살이를 시켰으니, 다케코와 사치코가 옆에서 어떻게 했을지는 충분히 짐작이 간다.
2005년부터 하츠코는 야스쿠니 신사에서 헌화회장 등의 직책을 맡았다.
하츠코의 남편 타다히로는 타마사토 시마즈가(玉里 島津家, 前 공작가)의 4대 당주로, 시마즈 히사미츠(島津久光) 공작의 후손이다.
한편 하츠코와 동갑이며 고준 황후(나가코)의 막내딸인 스가노미야 타카코 공주도 시마즈 가문으로 시집갔다. 다만 타카코의 남편 시마즈 히사나가(島津久永)는 분가인 사토와라 시마즈가(佐土原 島津家)의 아들로, 사토와라 시마즈가는 2만석 규모의 영지를 가진 사토와라(佐土原) 번주가였으며 원래는 자작이었다가 1891년에 백작으로 승작했다.
히사나가는 히사미츠의 차남 시마즈 히사하루(島津久治)의 후손인데, 이유는 원래 가문을 잇기로 했던 시마즈 타다요시(島津忠義)가 종가로 입적되었기 때문이다. 타다요시는 여러 명의 측실들 사이에서 수많은 자녀를 낳았고, 이 중에서는 고준 황후의 친정어머니인 치카코(俔子)도 있었다.
키타시라카와노미야 가문은 초대 당주 사토나리 친왕이 17세에 요절하고, 2대 당주인 요시히사 친왕은 대만에서 말라리아에 걸려 객사했으며, 3대 당주 나루히사 왕은 자동차 사고로 사망, 하츠코의 친정아버지인 4대 당주 나가히사 왕은 군용기 추락으로 사망하는 등 불행이 겹쳐, 비극의 가문이라 불렸다.
5대 당주 미치히사(1937-2018)는 하츠코의 오빠이다. 부친 나가히사가 요절하는 바람에 고작 3살에 당주가 되었다.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패전 당시 존재하던 14개 미야케#s-3(宮家)의 당주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군인이 아니었다. 일본을 점령한 미국이 일본 황실에다 전범재판의 칼날을 들이댈 것을 우려한 인사들이 그를 숨겨뒀다가 유사시 '미치히사 덴노'로 옹립하려던 계획도 있었다고. 그런데 모두 알다시피 미국이 히로히토에게 아량을 베풀어서, 그냥 얘깃거리로만 남았다.
미치히사는 81세까지 살아 천수를 누렸으나(2018년 사망), 딸만 낳아서 후사를 잇지 못해 6대 및 그 이후 당주를 배출하지 못하고 가문이 문을 닫고 말았다는 걸 생각하면(…) 그 또한 비극을 피할 수 없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츠코는 근친혼 중심 일본 상류층답게 진외증조할아버지가 천황, 할머니는 공주, 아버지는 왕(王) 작위를 가진 황족이며, 어머니는 화족 도쿠가와 가문의 영애라는, 뼛속까지 순수배양 황족 + 화족 영애였다.
시대의 격동에 휘말려 전세계 왕조들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던 시절에 '''제2차 세계대전의 만악의 근원이자 원흉'''이던 일본 황실은 패전 직후 당장 모든 재산을 국고로 환수당하고 몰락할 위기에 처해졌고, 맥아더 장군에게 사정해 가까스로 황실을 전범 리스트에서 빼낸 쇼와 덴노는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친삼촌들과 친형제들을 뺀 나머지 방계 황족 11가문과 화족 가문들을 한꺼번에 신분 박탈해서 평민으로 만드는 구조조정을 단행하고, 이어 일본 민심을 잡기 위해 꾸준히 지방순회를 했다.[7]
숙박시설과 식당이 불충분한 지방도 마다하지 않고 방문했고, 식사는 자동차 안에서 도시락으로 해결하며, '황족이 친히 고생하며 전국을 모두 찾는다'는 선거운동 비슷한 작전을 수행할 정도로 황실의 민주화에 필사적이였다.
이런 마당에 아키히토가 전근대적 사고방식의 황족+화족 출신 영애와 결혼했다간, 당대에 황실폐지론이 득세했을 것이다. 쇼다 미치코를 황태자비로 맞이한 것은 일본 황실에도, 심지어 하츠코가 황태자비가 되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서운해 했던 화족들에게도, 매우 다행인 일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쇼다 미치코는 1959년 황실에 시집온 이후 '''<개혁황실>'''이라는 정책 아래, 역대 황실 문화에 반하는 행동을 많이 한 비(妃)로 일컬어지고 있다. 미혼 시절 '신여성'으로 불렸던 인물답게 개성있고 멋진 패션감각은 물론, 유모를 두지 않고 자녀들에게 직접 모유 수유를 하다가 모유가 부족하면 분유를 먹이고 스스로 육아 서적[8] 을 읽고 공부하며 나름의 육아 지침[9] 을 세워 육아를 하는 등, 그 당시로써는 꽤나 파격적이면서 약자를 배려하고 국민과 눈높이를 맞추는 행보를 보여줬다. 덴노의 증손녀이자 방계 황족의 딸로서 구시대적인 분위기에서 자랐을 하츠코를 황태자비로 택했더라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다.
사진 속에서 하츠코가 입고 있는 세일러복은 가쿠슈인의 교복이다.
1. 개요
일본의 前 황족. 1939년생(만 85살).
신적강하로 평민이 되기 이전의 이름은 기타시라카와노미야 하츠코 여왕(北白川宮肇子女王).[1] 신적강하 후부터 결혼 전의 이름은 기타시라카와 하츠코(北白川肇子). 결혼 후의 이름은 시마즈 하츠코(島津肇子).
한때 아키히토 상황의 유력한 신붓감으로 거론됐던 인물이기도 하다.
2. 생애
2.1. 학창 시절
도쿄학예대학 부속초등학교, 가쿠슈인 여자 중등과, 가쿠슈인 여자 고등과를 거쳐 가쿠슈인 대학 문학부 철학과에 진학했으나, 결혼하면서 대학은 중퇴했다.
2.2. 유력한 황태자비 후보
하츠코는 방계 황족인 아버지 기타시라카와노미야 나가히사(北白川宮永久) 왕과 화족 출신인 어머니 도쿠가와 사치코(德川祥子)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친할머니는 메이지 덴노의 7녀[2] 인 카네노미야 후사코(周宮房子) 내친왕이며, 고모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사와코(北白川宮佐和子)[3] 여왕은 의친왕의 아들인 이우의 신붓감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던 인물이다.
즉, 하츠코는 철저하게 황족&화족의 혈통으로 태어나 [4] 좋게 말하면 유서 깊고 전통적인, 나쁘게 말하면 보수적이고 구시대적인 분위기에서 자라난 규수로, 전형적인 황실의 신붓감으로 적합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하츠코는 '''태어났을 때부터''' 6촌뻘이자 6살 위인 아키히토 황태자의 장래 황태자비 후보로 유력하게 거론되었다.
1947년, 다이쇼 덴노의 직계 자손들을 제외한 모든 방계 황족들과 화족들은 평민 신분으로 격하되었다. 하츠코와 그녀의 집안도 이때 평민이 되었다. 그러나 옛 황족들과 화족들의 드높은 콧대는 하루아침에 꺾이지 않았고, 그들은 하츠코가 장래 황태자비가 되리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2.3. 그 이후
아키히토 황태자는 1957년부터 평민[5] 쇼다 미치코와 연애하다가, 결국 주변의 온갖 반대들을 다 뿌리치고 미치코를 신붓감으로 택했다. 이는 수천 년의 전통을 깬 어마어마한 사건이었다.
하츠코는 미치코에게 밀려 황태자비 후보에서 탈락한 후, 시마즈 타다히로(島津忠広)에게 시집갔다. 다만 일본 위키백과의 서술에 의하면 하츠코와 기타시라카와 가문은 "황태자비로 내정되면 거부하지는 않겠다." 정도의 수준이었다고 하며, 하츠코와 타다히로는 아키히토와 미치코가 만나기 전부터 서로 어느 정도 호감을 갖고 교제하던 사이였다고 한다.
아키히토 황태자와 쇼다 미치코는 결혼식 전에 이세신궁을 참배했는데, 이때 이세신궁의 신관은 하츠코의 할머니 후사코였다. 물론 자신의 손녀를 제치고 황태자비로 책봉된 미치코가 곱게 보일 리 없으니, 후사코는 미치코를 홀대했다.
결혼 후로도 미치코 황태자비는 황실에서 매운 시집살이를 당했다. 평민 출신의 큰며느리를 몹시 미워한 나가코 황후는 하츠코의 고모할머니인 호시나 다케코(保科武子)[6] 를 자신의 시녀장(侍女長)으로 두었으며, 다케코가 퇴임한 후로는 하츠코의 어머니인 사치코를 시녀장으로 두었다.
나가코 태후는 2000년에 자신이 죽을 때까지도 미치코 황후를 미워하여 호되게 시집살이를 시켰으니, 다케코와 사치코가 옆에서 어떻게 했을지는 충분히 짐작이 간다.
2005년부터 하츠코는 야스쿠니 신사에서 헌화회장 등의 직책을 맡았다.
3. 시가
하츠코의 남편 타다히로는 타마사토 시마즈가(玉里 島津家, 前 공작가)의 4대 당주로, 시마즈 히사미츠(島津久光) 공작의 후손이다.
한편 하츠코와 동갑이며 고준 황후(나가코)의 막내딸인 스가노미야 타카코 공주도 시마즈 가문으로 시집갔다. 다만 타카코의 남편 시마즈 히사나가(島津久永)는 분가인 사토와라 시마즈가(佐土原 島津家)의 아들로, 사토와라 시마즈가는 2만석 규모의 영지를 가진 사토와라(佐土原) 번주가였으며 원래는 자작이었다가 1891년에 백작으로 승작했다.
히사나가는 히사미츠의 차남 시마즈 히사하루(島津久治)의 후손인데, 이유는 원래 가문을 잇기로 했던 시마즈 타다요시(島津忠義)가 종가로 입적되었기 때문이다. 타다요시는 여러 명의 측실들 사이에서 수많은 자녀를 낳았고, 이 중에서는 고준 황후의 친정어머니인 치카코(俔子)도 있었다.
4. 친정
키타시라카와노미야 가문은 초대 당주 사토나리 친왕이 17세에 요절하고, 2대 당주인 요시히사 친왕은 대만에서 말라리아에 걸려 객사했으며, 3대 당주 나루히사 왕은 자동차 사고로 사망, 하츠코의 친정아버지인 4대 당주 나가히사 왕은 군용기 추락으로 사망하는 등 불행이 겹쳐, 비극의 가문이라 불렸다.
5대 당주 미치히사(1937-2018)는 하츠코의 오빠이다. 부친 나가히사가 요절하는 바람에 고작 3살에 당주가 되었다.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패전 당시 존재하던 14개 미야케#s-3(宮家)의 당주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군인이 아니었다. 일본을 점령한 미국이 일본 황실에다 전범재판의 칼날을 들이댈 것을 우려한 인사들이 그를 숨겨뒀다가 유사시 '미치히사 덴노'로 옹립하려던 계획도 있었다고. 그런데 모두 알다시피 미국이 히로히토에게 아량을 베풀어서, 그냥 얘깃거리로만 남았다.
미치히사는 81세까지 살아 천수를 누렸으나(2018년 사망), 딸만 낳아서 후사를 잇지 못해 6대 및 그 이후 당주를 배출하지 못하고 가문이 문을 닫고 말았다는 걸 생각하면(…) 그 또한 비극을 피할 수 없었다고 볼 수도 있다.
5. 하츠코가 황태자비가 되지 못한 이유
하츠코는 근친혼 중심 일본 상류층답게 진외증조할아버지가 천황, 할머니는 공주, 아버지는 왕(王) 작위를 가진 황족이며, 어머니는 화족 도쿠가와 가문의 영애라는, 뼛속까지 순수배양 황족 + 화족 영애였다.
시대의 격동에 휘말려 전세계 왕조들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던 시절에 '''제2차 세계대전의 만악의 근원이자 원흉'''이던 일본 황실은 패전 직후 당장 모든 재산을 국고로 환수당하고 몰락할 위기에 처해졌고, 맥아더 장군에게 사정해 가까스로 황실을 전범 리스트에서 빼낸 쇼와 덴노는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친삼촌들과 친형제들을 뺀 나머지 방계 황족 11가문과 화족 가문들을 한꺼번에 신분 박탈해서 평민으로 만드는 구조조정을 단행하고, 이어 일본 민심을 잡기 위해 꾸준히 지방순회를 했다.[7]
숙박시설과 식당이 불충분한 지방도 마다하지 않고 방문했고, 식사는 자동차 안에서 도시락으로 해결하며, '황족이 친히 고생하며 전국을 모두 찾는다'는 선거운동 비슷한 작전을 수행할 정도로 황실의 민주화에 필사적이였다.
이런 마당에 아키히토가 전근대적 사고방식의 황족+화족 출신 영애와 결혼했다간, 당대에 황실폐지론이 득세했을 것이다. 쇼다 미치코를 황태자비로 맞이한 것은 일본 황실에도, 심지어 하츠코가 황태자비가 되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서운해 했던 화족들에게도, 매우 다행인 일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쇼다 미치코는 1959년 황실에 시집온 이후 '''<개혁황실>'''이라는 정책 아래, 역대 황실 문화에 반하는 행동을 많이 한 비(妃)로 일컬어지고 있다. 미혼 시절 '신여성'으로 불렸던 인물답게 개성있고 멋진 패션감각은 물론, 유모를 두지 않고 자녀들에게 직접 모유 수유를 하다가 모유가 부족하면 분유를 먹이고 스스로 육아 서적[8] 을 읽고 공부하며 나름의 육아 지침[9] 을 세워 육아를 하는 등, 그 당시로써는 꽤나 파격적이면서 약자를 배려하고 국민과 눈높이를 맞추는 행보를 보여줬다. 덴노의 증손녀이자 방계 황족의 딸로서 구시대적인 분위기에서 자랐을 하츠코를 황태자비로 택했더라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다.
6. 관련 문서
[1] 오늘날 천황의 딸과 손녀까지는 내친왕, 증손녀부터는 여왕이라 한다. 단 1947년 이전에는 4대손까지를 내친왕, 5대손부터를 여왕이라 했다. 남자는 친왕/왕.[2] 측실 소노 사치코의 소생[3] 덕혜옹주의 여자 가쿠슈인 동기이기도 하다.[4] 간단히 말하자면 메이지 덴노의 진외증손녀이자 공주의 친손녀, 화족 도쿠가와 영애를 어머니로 둔 귀한 아가씨.[5] 말이 평민이지, 친가인 쇼다 가문은 대 재벌가이며 외가는 옛 화족이라는, 어마어마한 부와 명예를 누리고 있는 집안이다. 게다가 미치코 본인의 미모와 재능도 비현실적이다 싶을 정도로 뛰어났다.[6] 메이지 덴노의 사위인 다케다노미야 츠네히사(竹田宮恒久) 왕의 여동생이다.[7] 이는 일본 만화 맨발의 겐에서도 다뤄지는 장면이다. 주인공 나카오카 겐은 "천황이 왔다!!"며 감탄하는 친구들과는 달리 "나라 꼴이 이 모양이 됐는데, 천황이 오는 게 무슨 소용이야?!"라며 울분을 터뜨린다. 이와 같이 그 당시 천황의 지방순회를 못마땅하게 보는 일본인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8] 벤저민 스포크 박사의 저서 <The Common Sense Book of Baby and Child Care>. 미치코 황태자비는 이 책을 영어 원서로 읽고 공부했는데, 이 사실이 널리 알려져 <The Common Sense Book of Baby and Child Care>는 일본어로 번역되어 일본에서 더 많이 팔렸다고 한다.[9] 공무 때문에 아이들을 시종에게 맡길 때면, 시종들에게도 "내가 세운 육아 지침에 따라 아이들을 돌봐 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