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치코 상황후/갖가지 시집살이 에피소드
1. 개요
일본 아키히토 상황의 아내인 미치코 상황후의 고된 시집살이 에피소드를 소개하는 항목. 평민 출신으로 1959년 아키히토 황태자와 결혼한 쇼다 미치코는 일본 황실 '''최초의 평민 출신 비(妃)'''가 되었다. 이 때문에 출신 신분의 차이로 인해 시어머니 고준 황후(나가코)를 비롯한 많은 황실 사람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게 된다. 다음은 세간에 드러난 사건들. 당연하지만 이 외에도 여러 기상천외한 에피소드들이 있었을 것이며,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사건들이 더 많았을 것이다.[2]
2. 장갑[3]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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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1월, 약혼 발표 기자회견 때의 일이다. 쇼다 가문에서는 비상이 걸렸다. 덴노를 알현한 역사가 없던 쇼다 가문은, 시아버지될 쇼와 덴노에게 첫 인사를 드리러 황궁에 가야 하는 미치코에게 무슨 옷을 입혀 내보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들은 심사숙고하여 의상을 골라 미치코에게 입힌 후,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궁내청에 보내어 문의했다. "이 차림으로 괜찮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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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원은 '''"짧은 장갑이 예의에 어긋납니다."'''라고 했지만 평민인 쇼다 가문은 황실에서나 쓰는 긴 장갑을 구할 수 없었고, 결국 직원이 보내 준 긴 장갑을 끼고 미치코는 무사히 알현과 기자회견을 마쳤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처음에 직원에게 보낸 위의 사진이 언론에 보도되었고, 옛 황족들과 화족들은 바리바리 쇼다 일가에 전화를 걸어 불같이 항의했다. '''"이래서 평민은 안 된다!!"'''라는 식으로. 쇼다 가문은 해명하지도 못하고 일일이 정중하게 사과하느라 혼이 났다. 이 사연은 30여 년 후, 친정어머니 후미코에 의해 진상이 밝혀진 것이었다. 외손자 히로노미야 나루히토 친왕과 아야노미야 후미히토 친왕, 외손녀 노리노미야 사야코 공주가 딸을 오해할까봐 걱정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3. 이세신궁 사건
결혼식 전, 미치코는 아키히토 황태자와 함께 이세신궁[4] 에 참배하러 갔다가 이세신궁의 신관인 기타시라카와 후사코(北白川房子)[5] 로부터 홀대를 당했다. 후사코는 바로 미치코에게 밀려 황태자비 후보에서 탈락한 기타시라카와 하츠코[6] 의 할머니이다. 그러니 '''자신의 손녀를 제치고 황태자비가 된 미치코'''가, 후사코의 눈에 곱게 비칠 리 없었던 것이다.
4. 시숙부와 시숙모로부터 부녀(父女)가 당한 모욕
본인만이 아닌 '''친정아버지도 모욕을 당했다.''' 히데사부로는 대기업 회장에 처가인 소에지마(副島) 가문이 옛 화족이고, 아버지 데이이치로가 귀족원 칙선 의원을 역임했던 경력이 있었던 만큼 황족들과도 친분이 있었다. 큰딸 미치코를 황실에 시집보낸 후였다. 히데사부로는 큰사위 아키히토 황태자의 숙부인 다카마츠노미야 노부히토 친왕[7] 을 만나자 정중하게 인사했지만, 이전까지 인사를 잘 받아주었던 노부히토 친왕은 히데사부로를 싹 무시했다. 한마디로 '''평민과 인척 관계가 되어 불쾌하다는 시위.''' 전쟁을 반대할 정도의 개념인인 사람이 이러한 행동을 무례하지 않은 행동이라고 생각하였을 리는 없으니, '''진심으로''' 불쾌했다는 표시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미치코 황태자비가 2번째 임신을 했다가 유산했을 때, 노부히토 친왕의 아내 키쿠코 비는 '황실의 후사' 운운하며 미치코 황태자비를 비난하기도 했다. 정작 키쿠코 비는 임신조차 한 번도 하지 못했음[8] 을 생각해 보면,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그나마 지치부노미야 세츠코 비와 다카마츠노미야 키쿠코 비는 형님 나가코 황후나 마츠다이라 노부코(松平信子)와 달리 시간이 지날수록 차츰 마음이 누그러져, 미치코 황태자비와 친하게 지냈다. 특히 자녀를 낳지 못한 세츠코 비와 키쿠코 비는 미치코 황태자비의 아이들을 손주처럼 귀여워했다. 키쿠코 비는 후미히토 친왕에게 서예[9] 를 가르치기도 했고, 노리노미야 사야코 공주의 약혼도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다.
반면 나가코 황후와 노부코는 죽을 때까지 끝끝내 변하지 않았다. 노부코는 세츠코 비의 친정어머니인데, 황실의 사돈이라는 배경으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고, 가쿠슈인 동창회장을 지내는 등 황족들과 화족들의 우두머리로 군림했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노부코는 쇼다 미치코가 황실로 시집올 때 황족들과 화족들을 선동하여 반대운동의 선봉에 섰으며, 1969년에 향년 만 82세로 죽을 때까지 미치코 황태자비를 두고두고 미워했다.
5. 창문 사건 및 자녀교육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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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2월 23일, 결혼한 이듬해에 미치코 황태자비는 궁내청 병원에서 황위계승권자 첫아이 히로노미야 나루히토 친왕을 낳았다. 병원에서 퇴원하여 자동차를 타고 궁으로 돌아가는 길, 기자들이 갓난아기의 사진을 찍으려고 몰려들었다. 미치코 황태자비는 그들을 배려하여 '''창문'''을 살짝 열어주었는데, 이 일로 시어머니 나가코 황후 및 여러 사람들로부터 호되게 꾸중을 들었다. '''귀한 아기가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창문을 열었느냐고!!'''
또한 얌전했던 첫째 나루히토 친왕과 달리 말썽꾸러기였던 둘째 후미히토 친왕이 심한 장난을 쳐서 미치코 황태자비가 훈육하려고 하면, 나가코 황후 및 황실 사람들은 '''(미천한 평민 출신 주제에) 감히 귀한 황자에게 손을 대다니!!''' 라며 미치코 황태자비를 꾸짖었다. 대략 이해가 가겠지만, 우리나라(조선시대)에서도 이 비슷(친모가 자녀보다 신분상 아랫사람 취급)한 경우가 역사 속에 있었는데, 바로 왕의 후궁이 자기가 낳은 자녀를 대할 때이다.[11] 그 때도 그나마 세자나 원자를 대할 때 정도에 해당하지 예의는 갖춰도 이 정도로 대놓고 아랫사람 취급하진 않는다. 즉 황족들과 화족들은 끝까지 미치코 황태자비를 첩처럼 어쩌면 그보다 아래로 취급한 것이다. 미치코 황태자비는 엄연히 아키히토 황태자와 법률혼으로 맺어진 정실부인이자 유일한 아내이며, 손주들인 나루히토와 후미히토의 친어머니였는데도 불구하고.
그리고 이런 행동은 후미히토가 올바르게 자라날 수 없게 만드는 결과가 되었고, 그 결과 후미히토와 그의 처자식들이 저지른 사고들로 약 40년 후인 현재 일본 황실이 뒤집어지는 나비 효과가 발생하는 원인이 되었다
6. 토카 악당 사건
천황이 거처하는 궁전인 고쿄(皇居, 황거)에는, 나가코 황후의 환갑을 기념하여 지은 '토카 악당(桃華樂堂)'[12] 이라는 건물이 있다. 오페라 하우스 같은 시설인데, 여기에 황족 및 화족들이 초대되었다. 그들은 자신들끼리만 반갑고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으며, 미치코 황태자비는 못 본 것처럼, 마치 '''투명인간'''이라도 되는 것처럼 무시했다고.
7. 공항 사건
'''시집 온 이래 최대이자 최악의 모욕.''' 미치코 황태자비가 시집온 지 17년이나 된 1976년, 시부모인 쇼와 덴노와 나가코 황후 내외가 미국 순방을 떠날 때였다. 황족들은 모두 공항까지 따라 나가서 인사를 했다. 그런데 나가코 황후는 자신에게 '''인사하는 큰며느리를 싹 무시'''하고, 옆에 있던 큰아들과만 인사를 나누고 비행기에 올랐다. 문제는 이 장면이 '''일본 전역에 생중계'''되고 있었다는 것. 그야말로 전국적으로 개망신!! 일본인들도 말로만 듣던 궁중 이지메를 직접 눈으로 확인한 사건이었다.
8. 종교 문제
미치코 황태자비의 친정 쇼다(正田) 일가는 가톨릭 집안이며, 그래서 미치코 황태자비는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쭉 가톨릭 미션스쿨을 다녔다. 생 모르 수녀회[13] 에서 운영하는 후타바(雙葉) 여학원[14] 에서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졸업했고, 성심수녀회[15] 에서 운영하는 세이신 여학원[16] 중등과와 고등과를 거쳐, 동(同) 학원의 세이신여자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시동생 히타치노미야 마사히토 친왕은 그리스도교에도 관심을 가져[17] , 이러한 성장 배경을 가진 형수에게 그리스도교에 관하여 몇 가지 질문을 했다. 미치코 황태자비는 당연히 대답해 주었다. 그런데 이것을 시어른들에게 들켜, 미치코 황태자비만 또 호되게 꾸중을 들었다고 한다.
아키히토 황태자는 어린 시절 개신교 신자인 미국인 바이닝 부인으로부터 교육받은 적이 있고, 나가코 황후와 그녀의 딸들도 그리스도교에 대해 배운 적이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일본 황실의 종교는 신토이며, 패전 이전 천황과 그 일가는 신으로 숭배되었다. 그러니 며느리의 그리스도교 신앙은, 좋은 트집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사실 미치코 황후의 종교 문제는 이전에도 거론되어왔다.
1993년 9월, 유럽 순방 중 바티칸을 방문하여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알현한 것도 미치코 황후의 요청이었는데, 이를 트집 잡히며 너무나 시달린 나머지 미치코 황후가 한동안 실어증을 얻은 사건이 있었다. 일본은 세속적인 면이 강하지만, 일본 황실은 '''그런 거 없다.''' 때로는 신사의 신관을 맡아야 할 천황의 가족으로써 신토를 제외한 타 종교, 특히 유일신교인 기독교는 딱 좋은 공격거리였다.
현재는 더 이상 거론되지 않을 뿐, 미치코 상황후는 아직까지 가톨릭 신앙을 버리지 못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9. 아랫동서 하나코 비와의 비교
참고로 시동생 마사히토 친왕의 아내 하나코 비는 옛 화족 츠가루(津輕) 가문의 딸이며, 전통적 황족ㆍ화족 학교인 가쿠슈인 출신이다.[18] 평민 출신의 큰며느리 미치코 황태자비를 못마땅하게 여긴 시어머니 나가코 황후가, 작은며느리는 화족 가문 출신으로 직접 고른 것. 평민 출신이며 가쿠슈인 졸업생도 아닌 미치코 황태자비는, 아마 아랫동서 하나코 비와 비교당하며 더욱 괄시를 받았을 것이다. 다만 하나코 비는 자식을 낳지 못했다는 약점이 있어[19] , 자식 셋(2남 1녀)[20] 을 출산한 미치코 황태자비보다는 여러모로 열악했다.
하지만 마사히토 친왕과 하나코 비 부부가 자녀를 출산하였다고 해도, 아키히토 황태자와 미치코 황태자비 부부를 앞질러 일본 황실 내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했을지는 불확실하다. 미치코 황태자비가 딸만 낳고 하나코 비만이 유일하게 아들을 낳는 상황이었다면 모를까. 장남이자 천황 승계 서열 1위에 황태자 지위를 갖고 있던 아키히토와 달리, 마사히토는 차남에다가 쇼와 시대였던 1960~80년대 당시에는 천황 승계 서열 2위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21]
자식 문제와 천황 승계 문제 등으로 사이가 험악한 형 나루히토 천황&마사코 황후 부부와 동생 후미히토 친왕&키코 비 부부와 달리, 아키히토 상황&미치코 상황후 부부와 마사히토 친왕&하나코 친왕비 부부의 관계는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은 편이라고 한다. 쇼와 덴노가 살아 있었던 시절까지는 자식 문제와 아내들의 출신 성분 문제로 사이가 미묘하긴 했었으나, 1989년 쇼와 덴노가 사망하고 아키히토가 새 일본 천황이 된 이후에는 어느 정도 많이 좋아진 편.
만약 하나코 비가 남편 마사히토 친왕과의 사이에서 임신에 성공해 자녀를 낳았다고 해도, 나가코 황후는 장남 소생과 차남 소생의 손주들을 서로 차별하거나 위해를 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비록 미워하는 며느리가 낳았다 해도 손주는 할머니로서 끔찍이 아끼며 싸고돌았으니.[22] 하지만 2000년 노환으로 병사할 때까지 미치코 황후를 미워한 나가코 태후로서는, 자식 교육 문제 등으로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서 미치코 황태자비를 괴롭혔을 가능성이 크다.
10. 의상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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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황족 여성들은 기모노를 입었는데, 혼자만 양장을 입고 있다. 물론 중간에 양복을 입은 남편 아키히토 황태자와 시동생 마사히토 친왕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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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유치한 짓인데, 공식 석상이나 행사에 참석할 때면 미치코 황태자비만 쏙 빼놓고 자신들끼리만 무슨 옷을 입을지 미리 짰다고도 한다. 옛날 사진들을 보면 미치코 황태자비 혼자서만 다른 색상의 옷을 입고 나오거나, 다른 사람들은 기모노를 입었는데 미치코 황태자비만 원피스나 양장을 입고 나온 모습들이 있다. '''혼자만 튀어 보여서 무안해지게 하려는 고도의 이지메.''' 게다가 '''혼자 튀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일본인들의 문화'''[23] 를 생각하면, 미치코 황태자비가 느꼈을 무안함과 황족들이 품은 악의는 현대 한국인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이었을 것이다.
11. 황후가 된 뒤에도
1989년 시아버지 쇼와 덴노가 사망하고 남편 아키히토 황태자가 125대 천황(헤이세이 덴노)로 즉위하자, 미치코 황태자비도 황후가 되었다.
1989년에는 나가코 태후의 남편 쇼와 덴노뿐만 아니라 나가코 태후의 사촌 언니 이방자 비, 여동생 오오타니 사토코(大谷智子), 3녀 다카쓰카사 가즈코가 줄줄이 사망했다. 나가코 태후에게는 정신적인 충격이 꽤나 컸을 시기였다.
그러나 시어머니 나가코 태후는 꼬장꼬장 정정하게 살아서 계속 미치코 황후를 괴롭혔고, 나가코 태후와 함께 하는 세력들은 그 후로도 언론 등을 동원하여 미치코 황후를 향해 "미치코 황후 때문에 쇼와 덴노가 생전에 아끼던 궁성의 숲이 파괴되었다", "연회 등 각종 행사도 미치코 황후의 승낙이 없으면 진행되지 못한다", "한밤중에도 과일을 깎으라거나 라면을 끓이라는 주문을 하기 때문에, 시종들이 쉴 틈이 없다"는 등등 '''갖가지 말도 안 되는 비난들'''을 퍼부었다. [24]
결국 미치코 황후는 만 59세 생일인 1993년 10월 20일에 쓰러져 '''실어증''' 증세를 보였으며, 이듬해인 1994년에야 회복. '''2000년 6월 16일'''에 나가코 태후가 죽은 후에야, 40여년 이어 오던 미치코 황후의 지옥 같은 시집살이는 끝났다.
[1] 장갑에 대한 에피소드(?)는 미치코 황후의 시어머니 고준 황후와 작은며느리 키코 비에게도 있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2] 물론 신체적 폭력은 없었지만, '''이쪽은 정신적으로 말려 죽이는 형태라 더더욱 공포스럽다.'''[3] 장갑에 대한 에피소드(?)는 미치코 황후의 시어머니 고준 황후와 작은며느리 키코 비에게도 있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4] 일본 황실의 조상신인 아마테라스를 모신 신궁.[5] 메이지 덴노와 측실 소노 사치코의 7녀로, 결혼 전 이름은 카네노미야 후사코(周宮房子) 내친왕. 방계 황족 기타시라카와노미야 나루히사(北白川宮成久) 왕에게 시집가 1남 3녀를 낳았고, 1947년의 신적강하 때 황족의 지위를 잃고 평민이 되었다.[6] 황태자비 후보에서 탈락한 후, 나가코 황후의 외가인 시마즈 가문으로 시집갔다.[7] 다이쇼 덴노의 3남. 다만 남동생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과 함께 일본의 전쟁을 반대한 사람이라, 일본군/인물에는 정상인으로 분류되어 있다.[8] 이는 노부히토 친왕이 동성애자였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9] 키쿠코 비의 외가인 아리스가와노미야 가문(방계 황족)은 서예를 가업으로 삼아,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는 서예 기법이 있었다. 키쿠코 비는 친정어머니 미에코(實枝子)로부터 이를 배웠다.[10] 스미코는 미치코 황태자비의 일거수 일투족을 나가코 황후에게 고자질해서 이간질을 부추겼다거나, 나루히토 친왕이 어렸을 때에도 지나치게 엄격하게 대해서 황태자 부부와 나루히토 친왕으로부터 '''악마 아줌마'''로 불렸다는 등, 좋지 않은 소문이 많다. 다만 유독 저 사진에서 심술궂게 찍힌 건지, 저때 찍힌 다른 사진들을 보면 그냥 평범한 표정이다.[11] 효종의 후궁인 안빈 이씨가 자신의 친딸인 숙녕옹주에게 한 번 "너"라고 반말을 한 적이 있었는데, 효종이 노발대발 화를 냈다. 오히려 효종의 정실 인선왕후 장씨 등이 말려서 겨우겨우 좋게 넘어갔다.[12] 나가코 황후의 오시루시(お印)인 복숭아(桃)에서 따온 명칭이다. 오시루시란 일본 황족에게 주어지는 개인 표식인데, 주로 식물이며, 사용하는 물건 등에 붙는다. 단 식물이 아닌 다른 사물이 오시루시인 경우도 있다.[13] 아기 예수의 애덕 교육 수녀회. 아직 한국에는 진출하지 않은 수도회이다.[14] 미치코 황후의 큰며느리 마사코 황태자비 및 그녀의 친정어머니 오와다 유미코(小和田優美子), 쌍둥이 여동생 이케다 레이코(池田禮子), 시부야 세츠코(澁谷節子)도 후타바 여학원 출신이다.[15] 1956년 한국에도 진출, 한국에서도 성심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자세한 것은 성심수녀회 참조.[16] 시어머니 고준 황후의 친정 구니노미야 저택이 있던 터에 세워졌다.[17] 교황 바오로 6세를 알현한 적도 있다.[18] 가쿠슈인 여자단기대학(現 가쿠슈인 여대) 문과(영어 전공) 졸업. 넷째 시누이 이케다 아츠코도 가쿠슈인 여자단기대학 출신이다(문과 → 가정생활과).[19] 사실 하나코 비 본인보다, 남편 마사히토 친왕 쪽에 문제가 있어 아이를 낳지 못했다는 의혹이 있다.[20] 나루히토 친왕, 후미히토 친왕, 노리노미야 사야코 공주.[21] 현재 아키히토 덴노의 장남, 차남 내외와 대조되는 모습이다. 아들이 없고 무남독녀밖에 없는 천황 승계 서열 1위 장남, 딸 둘은 물론 천황의 대를 이을 수도 있는 늦둥이 아들을 출산한 천황 승계 서열 2위 차남.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이쪽은 장남 내외와 차남 내외 모두 자식을 낳았다는 것이다.[22] 둘째 손자 후미히토 친왕이 어린 시절, 미치코 황태자비가 훈육하려던 것을 트집을 잡아 야단치며 후미히토 친왕을 싸고 돌았던 일화가 있다.[23] 물론 요즘에는 개인주의가 많이 퍼져서 훨씬 나아졌다. '''하지만 저 시대는 집단주의가 아직 심했다.'''[24] 키코 비의 경우에도 비슷한 소문이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키코 비의 경우는 어느정도 사실이라는 게 정설이다. 궁내청 직원들마저도 그녀의 시종이 되는 걸 꺼릴 정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