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치코 상황후

 


[image] '''아키히토 덴노의 황후 | 現 일본국 상황후'''
'''(((
미치코
'''
<colcolor=#fff> '''출생'''
1934년 10월 20일 (90세)
일본 제국 도쿄부 도쿄시 분쿄구 도쿄제국대학 의학부 부속병원
'''재위'''
'''황후'''
1989년 1월 7일 ~ 2019년 4월 30일
(30년 113일)
'''상황후'''
2019년 5월 1일 ~ 현재
'''즉위식'''
1990년 11월 12일 (도쿄 고쿄)
[ 펼치기 · 접기 ]
<colcolor=#fff> '''휘'''
((((미치코)[16]
'''부모'''
부친 쇼다 히데사부로(正田 英三郞)
모친 쇼다 후미코(正田 富美子)
'''형제'''
2남 2녀 중 둘째 (장녀)
오빠 쇼다 이와오(正田 巌)
여동생 안자이 에미코(安西 恵美子)[17]
남동생 쇼다 오사무(正田 修)
'''배우자'''
아키히토 상황
'''자녀'''
2남 1녀
나루히토 덴노, 후미히토 친왕, 구로다 사야코
'''학력'''[18]
덴엔초후 후타바(田園調布雙葉) 여학원 유치원
덴엔초후 후타바 여학원 초등과
세이신 여학원 중등과
세이신 여학원 고등과
세이신여자대학 영문과
'''십이지'''
개띠 (갑술년)
'''오시루시'''[19]
자작나무

[image]
결혼하기 3달 전인 1959년 1월, 고후리소데(小振袖)[1]를 입고 집에서 포즈를 취한 만 24세의 미치코. 미치코의 친정아버지는 독일유학한 경험이 있어, 그 옛날에 집 또한 벽난로와 피아노 등을 들여놓고 서양식 저택으로 꾸몄다고 한다.
[image]
1971년 10월, 만 37세 생일을 며칠 앞둔 미치코 황태자비.
1. 개요
3. 미치코 상황후/결혼 후
4. 남편 아키히토와의 관계
5. 자녀
7. 남편 아키히토의 양위
8. 특이 사항


1. 개요


아키히토 상황의 아내로 현 일본상황후. 또한 '''일본 황실 최초의 평민 출신 황후이기도 하다.'''[2] 사실 후술하겠지만 말이 평민이지 일본에서 손꼽히는 재벌가의 딸이고, 친정어머니는 구 화족 가문 출신이다. 평민이라는 단어에서 연상될 수 있는 일반 서민과는 다분히 거리가 먼, 명백히 상류층의 일원이었다. 물론 반대로 말하면, 부모 중 하나는 (고셋케는 아니지만) 귀족 혈통이고, 집안이 엄청나게 부유했으니 평민임에도 황후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쇼와 덴노(히로히토)와 고준 황후(나가코)의 큰며느리이며, 나루히토, 후미히토, 구로다 사야코의 어머니, 마사코 황후키코 비의 시어머니이자, 아이코 공주, 마코 공주, 카코 공주, 히사히토의 친할머니이기도 하다.
2019년 5월 1일, 아키히토가 '''상황(上皇)'''으로 물러나면서 미치코 황후 역시 황실전범에 따라 '''상황후(上皇后)'''가 되었다.

2. 미치코 상황후/결혼 전


친가인 쇼다 일족은 '''일본 재계 20위 안에 드는 아시아 최대의 제분회사인 닛신(日淸) 제분[3]을 경영하는 굴지의 재벌가''', 외가 소에지마(副島) 가문은 '''옛 화족(백작) 가문'''으로 재벌가 영양이였다.
이외에도 미치코는 빼어난 외모에 공부, 운동, 요리, 음악, 미술 등등 못 하는 것이 없는 엄친딸 중 엄친딸에 모범생이며, 가정과 학교에서 두루 사랑받았다.

3. 미치코 상황후/결혼 후



3.1. '''평민''' 출신 황태자비의 파격


미치코 황태자비는 혹독한 시집살이를 당하면서도, 황실 생활의 여러 면에서 천년 동안 전해져 온 '''전통을 깨고 파격적인 면모''', 즉 평범하며 가정적이고 인간적인 행보를 많이 보였다. 고쿄 내의 산전(産殿) 대신에 궁내청 병원에서 출산했고,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친부모의 품에서 떼어내 신하들에게 양육을 맡기는 전통을 깨고 2남 1녀를 직접 자신의 품에서 젖을 먹여 길렀다. 시어머니 나가코 황후도 직접 모유 수유를 했지만 유모도 두었다. 하지만 미치코 황태자비는 아예 유모를 두지 않고, 직접 수유하다가 모유가 부족하면 분유를 먹였다고. 또한 가족들을 위해 직접 요리를 했고, 아이들의 도시락도 직접 만들었다.
결혼 전 연애하던 시절, 쇼다 미치코는 아키히토 황태자로부터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 들었다. "황실의 전통에 따라 나는 아주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품에서 떨어져 자라났고, 어머니가 손수 만들어 주신 음식[4]을 먹은 적도 없다."하는 말을 듣고 미치코는 아키히토 황태자에게 깊은 연민을 느꼈다. 그래서 미치코는 따뜻하고 단란한 가정, 보통 사람들의 평범하고 소소한 행복을 누리는 가정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결혼 전부터도 미치코는 "결혼하면 아키히토 황태자에게 손수 카레라이스 요리를 해주고 싶다." 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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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토구고쇼 주방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손수 요리를 하는 미치코 황태자비.
미치코 황태자비는 자녀교육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는데, 미국소아과 의사벤저민 스포크 박사의 저서 《The Common Sense Book of Baby and Child Care》를 영어 원서[5]로 읽으며 육아에 대해 공부하여 나름의 육아 지침을 세웠다. 공무(公務) 때문에 시종에게 아이를 맡길 때면 이 지침대로 돌보게 했다. 이는 '''나루 짱[6] 헌법(ナルちゃん憲法)'''이라고 불리며 많은 일본 부모들의 공감을 샀으며, 《The Common Sense Book of Baby and Child Care》는 일본어로 번역되어 일본에서 더 많이 팔렸다고 한다. 훗날 차남 부부가 낳은 두 손녀 마코 공주카코 공주도 '나루 짱 헌법'에 따라 양육되었다.

3.2. 미치코 상황후/갖가지 시집살이 에피소드


결혼 전의 쇼다 미치코는 그야말로 팔방미인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아키히토 당시 황태자와 만나 '일본 황실 최초의 평민 출신 비(妃)'가 되면서 인생이 참 험난해졌다. 시어머니 고준 황후 및 여러 황족들과 화족들로부터 수십년간 혹독한 시집살이에 시달려야 했고, 특히 고준 황후는 40여 년 동안이나 미치코 상황후를 괴롭혔다.
고준 황후너무나 귀한 큰아들을 빼앗겼다는 생각 때문인지[7], 아니면 딸들의 불행한 삶과 죽음에 대한 화풀이였는지[8], '''정말 죽기 직전까지도 계속 큰며느리 미치코 상황후를 인정하지 않고 괴롭혔다.'''

4. 남편 아키히토와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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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엘리자베스 2세필립 마운트배튼처럼, 남편 아키히토 상황과는 금슬이 좋기로 유명하다. 황실에서 시집살이하면서 온갖 푸대접을 받았음에도 남편을 내조했다는 점에서도 대단하다고 볼 수 있다. 황실에 시집와서 모든 걸 잃었던 미치코 황후에게 있어 늘 자신의 곁에 있어주는 마음씨 좋은 남편이 의지할 수 있는 세상의 전부나 다름없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함께 공무하는 영상이나 사진을 보면 서로를 자연스럽게 바라보면서 짓는 미소가 잘 어울린다. 이는 현재 천황인 장남 부부 나루히토마사코 황후의 사이에서도 잘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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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니스를 통해서 처음 만난 것 때문인지, 지금도 남편 아키히토 상황과 테니스를 치기도 한다.

5. 자녀


  • 장녀 구로다 사야코 : 1969년 4월 18일 출생(55세). 2005년 11월 15일, 작은오빠 후미히토 친왕의 오랜 친구이자 도쿄도청 직원인 구로다 요시키와 결혼했다. 결혼 후 황족의 신분을 잃고, 남편을 따라 평민이 되었다.
자녀들이 어렸을 때엔 칭호나 휘(이름)의 앞글자를 따서 만든 아명으로 불렀다. 나루히토 황태자는 휘 '나루히토'의 앞글자 '나루', 후미히토 친왕은 칭호 '아야노미야'의 앞글자 '아야', 사야코 공주는 이름 '사야코'의 앞글자 '사야'라고 했다.
이제 일본화족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2남 1녀 모두 일반인과 결혼했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일본의 화족들은 신적강하로 공식적으로 지위가 무효화되었기에, 현대 일본에 화족은 사실상 없다. 그런데도 1959년 쇼다 미치코가 황실로 시집올 때 옛 방계 황족들과 화족들이 그 난리를 떨었으니, 참으로 시대착오적인 일이다.

6. 루머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조.

7. 남편 아키히토의 양위


2016년 8월부터 아키히토 덴노의 양위가 거론되고 있다. 미치코 황후 역시 이에 대해 찬성이며, 두 아들(나루히토, 후미히토)과 상의하고 있다고 한다. 2017년 6월 9일 일본 국회에서 "천황의 양위 등에 관한 황실전범특례법"이 통과되었는데, 양위 후 아키히토의 칭호가 과거의 태상천황을 줄인 상황이 아니라 그냥 '''상황(上皇)'''으로 결정됨에 따라, 미치코 본인의 칭호는 '''상황후(上皇后)'''가 되었다. 만약 아키히토가 미치코보다 먼저 서거한다면 그 때부터 '''미치코 황태후'''로 불릴 수도 있다.
2019년 6월 13일자로 사실상 생전퇴위 관련 공식 일정이 끝났다. 미치코 상황후는 6월 중에 백내장 수술이 예정되었다. 현재 심장에도 문제가 있다 보니, 최대한 신경쓰면서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고쿄에서 임시 거처로 이사할 준비를 할 것으로 보인다.
양위 이후, "미치코 상황후는 백내장 이외에도 여러가지 방면에서의 건강 상태가 계속해서 안 좋아졌다"는 보도들이 나왔다. 결국 8월 9일, 궁내청은 "미치코 상황후가 초기 유방암으로 확정[9]되어 9월 중 수술을 받을 예정"이라고 발표한다. 유방암 발표 전에 "상황/상황후가 7월 말 요양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9월에 다시 요양을 할 것"이라는 궁내청 발표가 있었는데, 아마 수술 후 휴양을 가는 것으로 보인다.
9월 7일, 미치코 상황후는 도쿄대학병원에 입원하여 다음날인 8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까지 약 4시간 정도 수술을 받았다. 한동안 입원할 예정이라고 한다. 남편 아키히토 상황과 딸 구로다 사야코가 병원에 방문해, 미치코 상황후가 수술실로 올라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9월 11일에 퇴원했다. 이날은 공교롭게도 작은며느리 키코 비의 53세 생일이었기에, 오후에 키코 비의 생일기념행사에 참석했다.
2019년 10월 주간지 보도에 의하면, 막대한 양의 이삿짐을 정리하는 건 미치코 상황후 혼자라고 한다. 아무리 초기 암이라 호르몬 치료로 다스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연달은 수술로 건강이 안 좋아진 상태에서 약 120톤에 달하는 막대한 양의 짐을 혼자서 정리하는 것은 어렵다. 그래서 시종들이 도우려고 하지만 미치코 상황후는 혼자서 하겠다고 도움을 사양하고 있다. 덕분에 미치코 상황후는 아침 일찍 기상해서 밤 늦게까지 혼자서 짐 정리에 몰두한다고 한다.
2019년 10월 15일, 궁내청에서 미치코 상황후의 생일 행사에 대해 발표했다. 미치코 상황후는 10월 20일에 85세 생일을 맞이한다. 하지만 생일축하행사는 대폭 간소화되었다. 태풍 19호의 영향도 있고, 생일 2일 후인 10월 22일에 열리는 큰아들 나루히토 덴노의 즉위 행사에 지장을 주지 않게 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그래서 대부분 행사들을 취소하고, 대신 간단히 가족들과 식사하는 것으로 대체했다고 한다.
2019년 10월 한 주간지 보도에 의하면, 미치코 상황후는 작은며느리 키코 비로부터 인터넷 사용법을 배워, 인터넷으로 일본 황실 관련 뉴스를 보고 있다고 한다. 그러던 중에 '미테코(ミテコ)'라는 단어를 보고, 미치코 상황후는 시종들에게 "이게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았다. 시종들은 '미테코'라는 단어가 미치코 상황후를 비하하는 용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차마 사실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그냥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회피했다. 그러나 미치코 상황후는 시종들의 그러한 태도에서 눈치를 챈 듯하다고 한다.
2019년 10월 23일, 큰아들 나루히토 덴노의 즉위 축하 궁중차회에 남편 아키히토 상황과 참석할 예정이다. 미치코 상황후는 직접 큰며느리 마사코 황후를 대외 귀빈들에게 소개시켜줄 예정이라고 한다. 원래 이때 미치코 상황후가 노래를 부르려고 했으나, 건강상의 문제로 취소했다고 한다. 한편 이날은 맏손주 마코 공주의 28세 생일이기도 하다.

8. 특이 사항


  • 초등학교 시절 담임교사는 미치코 황후에 대해 "성실하고 활동적이었지만 지기 싫어하고 신경질적인 성격이었다."라고 회고했다.
  • 세이신여자대학 재학 시절, 미시마 유키오와 선을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유키오와 미치코는 결혼까지 이어지지 못했고, 유키오는 일본화가 스기야마 야스시(衫山寧)의 장녀인 스기야마 요코(衫山瑤子)와 결혼했다. 근데 이 인간이 후에 뭔 짓을 하며 살았는지를 생각한다면, 안 된 것이 다행이다. 적어도 아키히토는 아내에게 여러모로 잘 대해줬으니.
  • 미치코 황후가 황후가 된 지금은 이미지가 무척 좋지만, 황태자비 시절에는 지금의 며느리들(마사코 황후, 키코 비)처럼 이미지가 무척 안 좋았다. 상술했던 내용처럼 나루히토 친왕이 아키히토 덴노의 아들이 아니라거나, 미치코 황후가 시집오자마자 첫째 시누이 히가시쿠니 시게코가 죽은 것을 두고 "여자가 잘못 들어와서 그렇다!!"라고 어처구니 없는 비난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그리고 지금의 며느리들처럼 아랫동서 히타치노미야 하나코 비[10]와의 신경전도 꽤 구설수에 올랐다고 한다.[11] 하지만 지금은 이미지가 무척 좋은 걸 보면, 마사코 황태자비가 황후가 되거나, 히사히토 친왕이 덴노가 되어 키코 비가 덴노의 어머니가 된다면 이들의 이미지도 바뀔지도 모른다. 그리고 현재 마사코 황태자비는 시이버지 아키히토 덴노의 생전퇴위 발언과 딸 아이코 공주의 우수한 성적을 기점으로 이미지가 점차 좋아지기 시작하더니 2019년 5월 1일자로 황후가 된 지금 부정적 시선은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이미지가 180도 달라졌다.
  • 미치코 황태자비는 시어머니 나가코 황후, 마츠다이라 노부코(松平信子)[12], 나시모토 이츠코(梨本伊都子)[13] 등 옛 황족&화족 부인들로부터 일거수일투족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비난을 받았다. 또한 당시 20세기 후반에 세계 각국의 왕실제도가 혁명으로 무너져, 결혼식 퍼레이드 즈음에도 폭도가 마차를 습격하는 사건이 일어나는 등,[14] 고난의 나날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미치코 황태자비는 당시 측근인 쿠로키 동궁시종에게 "어떠한 때라도 황태자비로서 의무를 최우선으로 하고, 개인적인 일은 그에 다음하는 것"이라는 말을 할 정도로, 아키히토 황태자의 내조에 최선을 다했다. 1984년(쇼와 59년) 은혼식인 결혼 25주년 회견에서, "부부로서 서로 몇 점을 매기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아키히토 황태자는 "점수를 매길 순 없지만 노력상이라는 걸로"라는 대답을 했고, 미치코 황태자비는 "나도 매겨 드린다면 점수는 없고 감사장을"이라고 답해, 기자들이 감탄했다.(두 사람의 결혼 생활을 생각하면 잘 맞는 대답이다.)
  • 목소리가 매우 곱고 부드럽다. 1993년 큰아들 나루히토 황태자의 결혼식 영상의 댓글들을 보면 알겠지만(3분 53초 경), 미치코 황후의 아름답고 자애로운 목소리에 외국인들도 감탄할 정도. 다만 이후 4개월 뒤 실어증에 걸렸다는 걸 생각하면… 장남인 나루히토 황태자 또한 어머니의 영향으로 남성치고는 목소리 톤이 부드럽다.
  • 어머니 후미코는 1988년에, 아버지 히데사부로는 1999년 사망으로, 시부모들보다 1년 일찍 사망하였다. 정확히는 쇼와 덴노 사망 1년 전에 후미코가, 고준 황후의 사망 1년 전에 히데사부로가 사망한 것. 황실에서는 친정 부모들의 제삿날에도 친정에 못 가게 했다고 한다. 안습. 아버지 히데사부로가 사망하고 나온 어마어마한 유산을 장녀로서 받아야 했지만 상속받지 않았다고 한다. "이제 일반인이 아니라 황족이기 때문"이라며 거절했다고.[15] 히데사부로가 사망한 후 닛신제분은 남동생 오사무가 물려받아 이어지고 있다.
  •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40대부터 원래 눈썹을 깎고 이마 쪽에 눈썹 문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나이가 더 들어보이게 되었다. 실제로 40대부터 눈에 띄게 급노화가 진행되었다. 혹독한 시집살이로 인해, 일찍부터 나이보다 심하게 늙어버린 것이다.
  • 그동안 주간지에서 "미치코는 황태자비가 된 이래로 직원들에게 갑질하는 것으로 유명해서, 궁내청에서는 미치코를 '여제'라고까지 부른다!!"라고 보도했다. 이때까지는 많은 일본인들이 그런 주간지 보도에 대해 "시어머니 나가코 황후 및 나가코 황후에게 동조하는 구 황족 및 구 화족들의 수작이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가코 태후, 옛 황족, 옛 화족들이 사망한 이후에도 '미치코의 갑질'이라는 이야기가 주기적으로 들려왔다. 그리고 유독 황태자 일가에 대한 홀대 등이 제기됨에 따라, 그동안 주간지에서 보도한 '미치코의 갑질' 이야기가 사실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참고로 2020년 9월, "미치코 상황후가 장기간의 칩거생활 및 코로나19에 대한 걱정 때문에 시종들에게 험한 말을 했다"는 주간지 보도가 나오자, 많은 일본인들은 "역시 제 버릇 남 못 준다"고 평가했다고.

[1] 미혼 여성의 예복인 후리소데 중에서 가장 소매가 짧은 것인데, 소매 길이가 85cm 정도이다.[2] 반대로 시어머니 고준 황후(나가코)는 마지막 황족 출신 황후 및 태후가 되었다.[3]대선제분 영등포공장 건물이 일제 때 이 회사 공장이었다.[4] 쇼와 덴노, 고준 황후, 그들의 2남 5녀가 모두 한자리에 모이는 것은 주말뿐이었다. 고준 황후는 큰아들 아키히토 황태자가 좋아하는 두부 요리를 직접 만들기도 했지만, 아키히토 황태자가 이 음식을 직접 먹은 적은 없다고 한다.[5] 미치코 황후는 세이신여자대학 영문과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영어회화도 잘 했다고.[6] 맏이 나루히토 황태자의 이름에서 딴 것.[7] 히로히토천황이었을 당시의 일본 사회는 자식을 부모가 소유하는 것이 당연시되던 시대였다.(1960년대의 한국도 비슷했다.) 게다가 아키히토고준 황후가 딸만 넷 낳다가 얻은 귀한 아들이었다. 아키히토가 태어나기 전까지 고준 황후는 딸만 낳는다고 엄청난 압박과 비난을 받았고, 심지어 후궁 제도를 부활하는 것까지 심각하게 거론되곤 했다. 실제로 신하들이 후궁 후보로 몇몇 규수들을 정하여 쇼와 덴노에게 규수들의 사진까지 제출했다. 그러나 쇼와 덴노가 후궁 들이는 것을 매우 거부하여 실현되지는 못했다고. 후에 두 아들 아키히토마사히토가 태어나, 간신히 후궁 제도의 부활 여론이 잠잠해졌다.[8] 쇼와 덴노고준 황후의 장녀 히가시쿠니 시게코는 패전 후 신적강하로 황족의 신분을 잃고 고생하다 병을 얻어 어린 3남 2녀를 두고 요절했고, 차녀 히사노미야 사치코 공주는 생후 6개월에 요절했다. 3녀 다카쓰카사 가즈코와 4녀 이케다 아츠코는 아이를 낳지 못했다. 가즈코의 남편 다카쓰카사 도시미치(鷹司平通)는 간통하다가 불륜녀와 함께 죽었고, 과부가 된 카즈코는 강도에게 부상까지 당했다. 아츠코도 부부 관계가 역시 원만하지 못했고, 병으로 오랫동안 고생했다. 단지 막내딸 시마즈 타카코만이 유일하게 행복한 결혼 생활을 보내고 있다. 차남 마사히토 친왕은 조용히 살고 있지만, 어릴 적 앓은 소아마비로 자녀를 낳지 못했다.[9] 7월 12일 건강검사에서 이상이 발견되어 15일 도쿄대학병원에서 MRI를 찍어보니 이상이 확실시되었고, 이후 8월 2일 궁내청 병원에서 조직검사를 한 결과 유방암 초기임이 확정되었다고 한다.[10] 평민 출신인 형님 미치코 황후와 달리, 옛 화족 가문 출신이다. 평민 출신의 큰며느리를 미워한 고준 황후가, 작은며느리는 화족 가문 출신으로 직접 고른 것이다. 단 하나코 비는 (남편 마사히토 친왕의 문제로) 아이를 낳지 못했다.[11] 미치코 황후가 자신에 대한 근거 없는 중상을 일체 비난하는 일 없이 침묵을 지키는 기품 있는 자세를 보여주자, 많은 일본인들이 감명을 받았다. 덕분에 주간지 등의 비방 기사가 종식되기도 했다고 한다.[12] 이방자 비의 친정어머니인 나시모토 이츠코의 여동생. 즉 이방자 비의 이모가 된다. 또한 노부코는 다이쇼 덴노의 차남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의 장모이자, 가쿠슈인 동창회장을 지내는 등,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며 황족들과 화족들의 우두머리로 군림했다.[13] 이방자 비의 친정어머니. 평민 출신인 쇼다 미치코가 황실로 시집온다는 사실에 몹시 분개하여, "이제 일본도 다 끝나 버렸구나!!"라는 글까지 남겼다.[14] 마차습격 장면이 찍힌 퍼레이드 영상.(1분 4초 경) 이때 미치코 황후는 깜짝 놀라 쓰러지듯 몸을 움츠리며, 마차의 마부들과 경호원 및 경관들이 황태자 부부를 필사적으로 보호하며 폭도를 떨어뜨려 놓는다. 여담으로 마차를 습격한 폭도는 19살의 청년으로 평소 천황제에 반대해왔고, "황족의 결혼식에 3억엔에 가까운 세금을 쓰는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불경죄 같은 건 패전 이후 법에서 삭제되었기 때문에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구류 50일 처분을 받고 석방되었지만, 근왕의식이 잔존하던 당시 일본의 사회 분위기 탓에 누나가 파혼당하고 형이 직장에서 해고당하는 등의 불이익을 받았다고 한다.[15] 물려받은 유산은 미치코 황후의 친정인 쇼다 가문의 소유이기 때문에, 황실비처럼 황실로 흡수되지 않고 사인 대 사인으로 상속되었을 자산이어서 미치코 황후 개인의 재산이 된다고 한다. 만약 유산상속을 받았더라면 영국다이애나 스펜서 왕세자비처럼 자녀들에게 재산을 물려줄 수 있었을 것이다.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친정 스펜서 백작가문의 재산은, 다이애나의 두 아들 윌리엄 왕세손해리 왕자가 물려받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