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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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외교관계를 설명하는 문서이다.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은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독립했던 자캅카스 민주 연방 공화국 시기와 소련 치하 자캅카스 SFSR 시기에 연방 구성국으로 함께 가맹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1991년 소련 해체 이후에는 양국간에 공식적으로 수교하지 않고 있으며 수 차례 전쟁을 벌이면서 국민 감정은 더욱 악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즉 양국은 영토 문제로 이를 가는 데다가 맞닿은 국경 역시 군사분계선 형식으로 통제되어 있고 공식적인 외교관계조차 개선되지 않고 있으므로 '''불구대천의 원수'''라고 할 수 있다.
2. 역사적 관계
2.1. 현대
아제르바이잔의 수도인 바쿠에 가면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 당시에 아르메니아군이 저지른 학살로 인해 희생된 아제르바이잔인들의 사진과 24시간 내내 꺼지지 않은 가스불을 켜놓은 거대 추모비가 있다. 특히 아르메니아군이 아제르바이잔계 민간인을 대상으로 학살을 저지른 정황이 명확한데다가, 아제르바이잔 및 터키와 사이가 나쁜 그리스나 불가리아, 이라크, 시리아, 키프로스 같은 다른 주변 국가들도 뭐라고 딱히 반론을 하지 못해 아르메니아로서는 화가 나는 상황. 하지만 아제르바이잔도 이 전쟁 당시 자국내에 살던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자행한 대한 전쟁범죄 논란이 있기 때문에 아르메니아도 아제르바이잔에게 징징대지 말라며 맞불을 놓는다. 이런 이유가 맞물려 아제르바이잔에서는 마찬가지로 정황 증거가 명백한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애써 무시한다. 그리고 아르메니아가 유엔결의안을 주도해 내놓으려 하면 제1차 나고르노 카라바흐 전쟁 당시에 아르메니아군이 아제르바이잔계 민간인들에게 자행한 호잘르 학살(Xocalı soyqırımı)을 언급하면서 매번 결의안을 방해한다.
아르메니아는 특히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 당시 호잘르를 비롯한 아제르바이잔 곳곳에서 민간인을 학살했기에 비난을 받고 있다. 물론 학살은 아제르바이잔 숨가이트 학살(아르메니아 주장으론 200명 이상 학살)을 먼저 벌였지만 분풀이성으로 학살도 벌인 건 맞는 사실이고 학살 규모에서 군대로 학살한 호잘르 학살 규모(공식적으로도 360명 이상 학살, 아제르바이잔은 613명 학살 주장)가 더 크다. 국제 사회에서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 당시 학살 여부에 대해서 아르메니아나 아제르바이잔 어느 한쪽의 입장만을 일방적으로 들어주지는 않으며 양국 모두 가해행위를 한 당사자로 판단하면서 되도록 중립을 견지하고자 한다.[1] 터키의 유럽 연합 가입을 지지한 영국에선 아제르바이잔인 학살에 대해서도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아르메니아와 아르메니아를 지지한 프랑스와 그리스를 윽박지르기도 했다. 하지만 영국이 아제르바이잔에게 호의적인 것만은 아니다. 특히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이후 벌어진 쿠르드인 독가스 학살 주범인 윈스턴 처칠을 비롯한 영국이 저지른 학살에 얽매이기 때문에 소극적으로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거론하는 것도 있다.
경제적으로 나고르노카라바흐는 곡창지대와 여러 지역에서 나오는 농작물 덕분에 굶주리는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세계은행을 비롯한 국제자본 투자가 완전히 막혀있기에 아르메니아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상태이다. 아르메니아 본국은 경제적으로 그다지 풍족한 나라가 아니며, 나고르노 카라바흐로 가려면 육상으로만 가야하기에(터키와 아제르바이잔은 여길 인정하지 않기에 비행기로 절대로 못 간다. 아제르바이잔은 비행기로 간다면 격추시킨다고 이를 갈고 있다.) 인프라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며, 해외에 진출한 아르메니아인들이 본국에 송금하는 투자금으로 겨우 버티는 실정이다. 오히려 아르메니아 문제 덕분에 이웃한 조지아가 유라시아 철도 및 운송과 자원 파이프 라인을 주워 먹어 덕을 봤다. 나아가 아르메니아로선 경제적으로 국제 투자가 부진한데 터키와 유라시아 튀르크권 나라들이란 막대한 시장을 외면할 수도 없기 때문에 다국적 기업들이 아르메니아에 투자하지 않고 있다.[2]
2020년 7월 12일에는 국경지역에서 아르메니아 군인들과 아제르바이잔 군인들이 교전을 벌인 바있다. # 12일에 시작된 교전은 계속되었다. # 아제르바이잔 수도인 바쿠에선 수천명의 시위대가 국기를 흔들며 아르차흐 공화국을 탈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 그리고 이는 동년 9월 말부터 양국간의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으로 이어졌다.
전쟁이 격화되자 양국 모두 외부세력의 지원을 받으려 하고 있다. 일단 아제르바이잔의 경우 터키, 이스라엘의 지원을 더욱더 요구하고 있으며 전세가 불리해져가는 아르메니아는 미국정부에 아르차흐에 평화유지군 파병과 주둔을 요청하는 방안을 미국정부에 보냈다. 하지만, 미국이나 러시아나 구경만 하는 편이었고 결국 아르메니아는 연전연패에 시달려 2020년 11월 10일 패전 선언이나 다를 거 없는 평화협정에 서명해 아르차흐 상당수 지역을 다시 아제르바이잔이 차지하게 되었다.
2020년 11월 11일 램지 테이무로프(Rəmzi Teymurov) 주한국 아제르바이잔 대사는 인터뷰에서 이번 전쟁 이후로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양국의 국민들이 평화와 공존을 가지기 바란다고 밝혔다.#
2.1.1. 나고르노카라바흐 영토 분쟁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간의 관계가 최악인 주된 이유는 소련 치하에서의 무리한 민족분리 행정구역 편성이 가장 큰 이유이며, 이는 곧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을 불러 일으켰다. 나고르노카라바흐는 국제법상 아제르바이잔 영내에 속한 영토 분쟁 지역이며, 아제르바이잔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은 국제 사회는 물론 아르메니아로부터도 국가로서 승인받지 못한 미승인국이다. 이후 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은 2017년에 아르차흐 공화국으로 공식 명칭을 변경하여 오늘날에 이른다.
소련 치하에서 민족 월경지이자 자치주로 편성된 나고르노카라바흐는 본디 오랜 역사 동안 아르메니아계와 아제르바이잔계가 뒤섞여 있었기에 민족간 경계선이 확정되지 않은 지역이었다. 1918년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양국은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을 벌이며 서로가 영토 확장 및 보전에 열을 올리고 있는 상황이었고, 볼셰비키 계열의 붉은 군대가 남캅카스 지방을 다시 무력 침공하면서 소모적인 전쟁은 일단락되었다. 소련의 개입과 이오시프 스탈린의 승인에 의하여 전쟁의 주된 원인이 된 나고르노카라바흐는 1923년 7월 7일에 아제르바이잔 SSR의 자치주로, 나흐츠반은 1924년 2월 9일에 아제르바이잔 SSR의 자치공화국으로 편입되었다. 아제르바이잔계가 다수였던 나흐츠반과 달리, 나고르노카라바흐는 제정 시기에 대규모로 정착한 아르메니아계가 다수였기에 이러한 행정구역 책정은 큰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후 1930년에 아르메니아 공산당 제1서기를 역임한 아가시 한잔(Աղասի Խանջյան, 1901년 1월 30일 ~ 1936년 7월 9일)[3] 을 비롯한 아르메니아계 주요인사들은 나고르노카라바흐와 아르메니아 SSR와의 통일을 일방적으로 주장하였다. 하지만 모스크바 중앙정부에 의해 아르메니아 측의 강경한 요구들은 일방적으로 묵살되었다. 이후에도 아르메니아계는 아제르바이잔 SSR령 자치주 지위에 반대하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1980년대 미하일 고르바초프 정권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에 의해 소련 구성 공화국의 자치권이 대거 향상되었다. 이런 상황 가운데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 소비에트는 1988년 2월 20일에 아르메니아와의 통합을 결정하였고, 이는 무력 충돌을 야기하여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이 발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1989년 12월 1일, 아르메니아 최고 소비에트는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아르메니아에 합병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1991년 9월 2일에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의 아르메니아계가 아제르바이잔 SSR로부터의 독립과 '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에 반발한 아제르바이잔은 동년 11월 26일에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자치주 지위를 폐지하였다. 동년 12월 10일에는 아제르바이잔계가 보이콧한 가운데에서도 국민 투표를 통해 나고르노카라바흐의 독립이 결정되었다. 해당 투표는 아제르바이잔 측의 동의 없이 강행되었기 때문에 UN으로부터 합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1988년 2월 20일부터 발발한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은 소련 해체 이후에도 이어져 1994년 5월 12일에 비로소 정전 협정을 맺었다. 전쟁의 결과로 아제르바이잔은 기존의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 영역 대부분과 기존의 아제르바이잔령 행정구였던 아그담(Ağdam), 재브라이을(Cəbrayıl), 퓌줄리(Füzuli), 캘배재르(Kəlbəcər), 라츤(Laçın), 구바들르(Qubadlı), 잰길란(Zəngilan)의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아제르바이잔으로부터 무력 점령한 영토는 아르메니아계 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이 실효 지배하게 되었다. 이후에도 영토를 수복하기 위한 아제르바이잔과 이를 필사적으로 저지하려는 아르메니아 간의 갈등 상황이 계속되어 왔다.
그 외의 소규모 월경지로는 아르메니아 게가르쿠니크주의 월경지인 '아르츠바셴(Արծվաշեն) / 바슈캔드(Başkənd)', 아제르바이잔 아그스타파구의 월경지인 '야라둘루(Yaradullu / Յարադուլլու)', 가자흐구의 월경지인 '바르후다를르(Barxudarlı) / 바르후다를루(Բարխուդարլու)' 및 '소풀루(Sofulu / Սոֆուլու)' 그리고 '유하르애스키파라(Yuxarı Əskipara) / 베린보스케파르(Վերին Ոսկեպար)', 나흐츠반 새대래크구의 월경지인 '캐르키(Kərki) / 티그라나셴(Տիգրանաշեն)'이 있다.
2.1.2. 아르메니아군 장교 피살사건
2012년 8월 31일, 헝가리 당국이 아제르바이잔 정부로부터 처벌한다는 약속을 받았다면서 2004년에 나토가 주최한 유럽 군사 교류행사로 열린 헝가리 부다페스트 군사학교에서 같이 언어 연수를 받던 아르메니아군 장교인 구르겐 마르가랸(Գուրգեն Մարգարյան)을[4] 도끼로 살해한 죄로[5]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던 아제르바이잔군 대위였던 라밀 새패로프(Ramil Səfərov)를[6] 수형자 이송 협약에 따라 아제르바이잔으로 이송했다. 문제는 이송된 뒤 교도소에 넣었으면 문제될 게 전혀 없었을 것이고, 가석방한 뒤 불명예 전역을 시켰어도 일단 벌은 줬다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제르바이잔 정부는 그가 이송되자마자 아르메니아인을 죽인 영웅으로 대접하여 훈장도 수여하고 살인죄로 복역한 것을 군 복무로 인정해 8년간 못 받은 급료와 아파트까지 수여한 뒤 소령으로 진급까지 시키는 막장짓을 해 버려 전 세계를 경악시키고 아르메니아의 여론을 크게 자극했다. 거기에 2년 뒤에는 중령으로 진급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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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메니아 시위대가 들고 있는 저 사진에서 왼쪽이 가해자 새패로프. 오른쪽은 피해자 마르가랸.
새패로프는 헝가리군 심문에 계획적으로 살인한 게 맞다고 밝히면서도 "만약에 상대가 아르메니아 민간인이었다면 난 건드리지 않았을 겁니다. 적어도 난 군인이니까요. 하지만, 두 놈 다 아르메니아군이니까요. 그 새끼들은 전쟁을 일으켜 내 동족들을 죽이고 우리나라 땅까지 빼앗아갔지요. 그런 군복입은 놈들이라 이 일을 벌인 겁니다. 난 후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한 놈만 죽이고 한 놈을 못 죽인게 아쉽네요."라고 발언했다.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소리였고, 애초에 군인이라도 저항하지 못하는 자를 죽이는 건 전시에도 금지되었다는 점에서 그의 궤변을 합리화할 그 어떤 명분도 없었다. 결국 무기징역이 확정되어 헝가리 교도소에서 복역하다가 헝가리와 아제르바이잔의 거래로 8년만에 석방된 것이다.
새패로프를 석방시킨 오르반 빅토르 헝가리 총리는 당연히 국내외로부터 온갖 비난을 받았는데 새패로프를 석방하면 아제르바이잔이 석유 수입가를 낮춰주겠다고 약속했다라는 아르메니아 비난을 헝가리 야당이 인정하기도 했다. 이에 대하여 지금도 헝가리의 현역 총리 오르반은 침묵을 유지하고 있다. 분노한 아르메니아의 세르지 사르키샨 대통령은 즉각 헝가리와의 외교 관계를 단절했으며, 두 나라 사이에 또 전운이 감돌고 있다.
아제르바이잔은 여전히 나고르노 카라바흐 전쟁 당시 아르메니아군의 전쟁범죄에 대해 따져들고 터키나 주변 나라들은 편들어주지 않아도 모른 척 하거나 별 반응이 없다. 게다가 유로마이단 같은 훨씬 크나큰 주변 상황 때문에 미국이나 유럽 나라들에서는 이 사건이 묻혀지고 있다. 아르메니아계 미국인들은 항의시위를 벌였고 미국 정계도 일단 비난했다. 백악관안전보장회의 대변인 토미 비에터(Tommy Vietor)는 오바마 대통령은 일함 알리예프 아제르바이잔 대통령이 라밀 새패로프가 본국으로 귀환하자마자 그를 사면해 준 것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했다며, 새패로프에 대한 사면 결정은 역내 긴장 완화와 화해를 증진시키기 위한 현재의 노력에 반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미국 측의 실망을 아제르바이잔 측에 전달하였다고 언급하였다. 또한 토미 비에터는 “미국 측은 헝가리 정부가 새패로프를 아제르바이잔으로 송환한 조치에 대한 해명을 요청한 상태” 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산하 민스크그룹의 공동 대표인 러시아와 프랑스는 이 사안을 두고 아제르바이잔과 협약한 자원 개발에 피해가 갈까 그리 비난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며 곧 미국에서도 유로마이단과 다에시 같은 문제로 묻혀져 버렸다. 이란도 비난했지만 가해자 새패로프가 시아파 무슬림이라 시아파 무슬림이 다수인 이란으로서도 난감해했고, 아르메니아와 사이좋은 우방이면서도 이란도 아제르바이잔 인구 다수인 아제리인들이 아제르바이잔 본국보다 훨씬 더 많은 1000만명이 넘게 사는 나라인만큼 아제르바이잔을 적국으로 돌리기도 어려운 상황이라 강력하게 따지진 못했다. 결국 사건은 흐지부지 잊혀져 아르메니아나 해외 아르메니아계 반발 및 시위를 빼면 이제 해외 언론에서도 관련 기사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피해자 마르가랸은 아르메니아에서 소령으로 2계급 추서되고 명예로운 전사자로 기려졌으며 흉상이 만들어지고 국장으로 장례가 치뤄졌다. 유족들도 전사자 가족으로 대우받아 보상금 및 보훈 혜택을 받았고 헝가리 정부도 관리소홀에 대한 책임으로 유족에게 사과 및 손해배상을 했다. 그러나, 헝가리는 2020년 터진 전쟁에서 아제르바이잔을 지지했다.
하지만 아들이 이렇게 날벼락 같이 억울하게 참살된 것에 충격을 받은 아버지 아르투쉬 마르가랸은 2013년 구르겐 추모관이 설립된 뒤에 아들을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살해한 작자가 영웅 취급당하는 것에 항의하며 자살까지 시도했다가 겨우 응급조치를 받아 목숨을 구했다. 하지만 아제르바이잔은 보란듯이 2017년에 새패로프를 대령으로 진급시키며 아르메니아에 강한 도발을 시전했다. 거기다가 그해 4월 1일에는 아르메니아에 기습 공격을 가했다. 하필 그날이 만우절이었기에, 외신은 만우절 장난인 줄 알고 보도를 안 했다가 진짜인 것을 뒤늦게 알고 4월 3일에 보도했다.
어이없게도 이 살인범은 정작 온 나라가 전쟁상태로 돌입한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에는 참전하지 않았다. 진짜 애국자라면 오히려 이럴 때 자진해서 전선에 나가야 했다는 점에서 이 자가 실제로는 애국 코스프레를 했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요 살인범은 인스타그램과 유튜브를 통해 "전쟁은 나빠요" 이러면서 '''자신과 가족들[7] 사진이랑 자기가 살고 있는 바쿠 근처의 관광지 인증샷만 인스타에 열심히 올리고 있다.''' 하지만 정치적인 문제도 있기에 그런 그를 꼭 보내라는 것도 아니었고 전쟁이 아제르바이잔에 유리해진 상황이라 처음에 아르메니아에게 고전할 때만 해도 그에 대한 부정적 인식(아제르바이잔에서)은 많이 사라졌다. 결국 이 전쟁에서 아르메니아가 사실상 항복을 해버리고 아제르바이잔이 나고르노 카라바흐를 다시 얻으면서 그에 대한 비난 여론은 사라지게 되었다.
3. 관련 문서
- 아르메니아/외교
- 아제르바이잔/외교
- 독립국가연합
- 나고르노카라바흐
-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
-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
-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
- 아르메니아/역사
- 아제르바이잔/역사
- 대국관계일람/아시아 국가/캅카스 국가
[1] 특히 아제르바이잔은 터키와 관계가 좋은데, 터키가 나토 가입국이라 아르메니아 편을 들기에는 미국과 유럽 모두에게 꺼림칙한 구석이 있다.[2] 미국에서 꽤 큰 기업이 아르메니아에 공장을 짓고 투자하려고 했는데 오너가 아르메니아계 미국인이었다. 하지만 회사 간부들은 그러다간 유라시아권 투자와 이전에 유라시아 나라들에 세운 공장까지 보복당한다고 결사반대했고 상업성이란 명목에서 결국 없던 일이 된 적도 있다고 한다.[3] '아가시 한잔(Агаси Ханджян)'으로도 알려져 있다.[4] 사망 당시 중위로 만 25세. 소령으로 추서됐다.[5] 구르겐 마르가랸이 잠자고 있는 사이에 도끼로 20번 이상 난도질해 살해했다고 한다. 마르가랸의 룸메이트인 헝가리군 장교인 쿠르티 발랴즈스 중위의 증언에 따르면 "자고 있는데 뭔가 퍽퍽 소리가 나서 보니 이미 죽은 마르가랸을 도끼로 난도질하고 있었다. 마르가랸의 목이 잘려져 뒹굴고 있었고 확 잠이 깨서 비명지른 나를 보더니 '걱정 마, 자넨 아르메니아 그 찢어죽일 새끼들이랑 무관하니까, 전혀 건드리지 않겠어.'라고 느긋하게 말했다. 난 침대에서 나와 그 자리에서 달아났다." 새패로프는 마르가랸을 죽이고 나서 다른 아르메니아 장교의 방에 가 그를 죽이려 했지만 쿠르티 중위가 깨워 우르르 뛰쳐 나온 여러 국가 장교들에게 어떤 저항도 없이 순순하게 붙잡혔다. 헝가리 측 조사에서도 처음부터 아르메니아 장교들을 노리고 도끼를 준비했다고 말했다. 새패로프의 룸메이트인 우크라이나군 대위는 어머니 장례 때문에 귀국해서 새패로프는 도끼를 방에 숨겨와서 준비를 했다.[6] 1977년생. 당시 27세. 석방 당시 35세.[7] 결혼하여 아내랑 자식인 1남 1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