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제르바이잔/역사

 




1. 개요
2. 고대
3. 중세
3.1. 튀르크화
4. 근세
5. 근대
6. 현대
7. 둘러보기


1. 개요


캅카스 남동부에 위치해있는 아제르바이잔의 역사를 다루는 문서. 이란 고원과 캅카스 산맥, 북쪽의 스텝 지대, 남쪽의 평야 지대로 이어지는 요충지이기 때문에 주변 세력의 흥망성쇠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2. 고대


만나이, 키메르 및 스키타이 등 캅카스는 여러 국가들의 지배를 받은 지역이었다. 여기에는 코카서스 알바니아라고 불렸던 캅카스어족의 캅카스제족들이 살기도 했다. 기원전 9세기 무렵에는 스키타이 유목민들이 해당 지역에 정착하였고, 기원전 678년부터 인도유럽어족 계열의 부족들이 건국한 메디아 왕국이 들어선다. 메디아 왕국은 아시리아가 멸망한 이후 이집트, 바빌로니아(칼데아), 리디아와 더불어 오리엔트에서 주요 지역강국 중 하나로 부상했다. 그러다가 기원전 550년, 키루스 2세에 의해 이란 서남부에 건국된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가 등장하면서 오리엔트는 통일되었고, 메디아 역시 페르시아에게 점령당했다. 스키타이 및 메디아 및 페르시아 점령 기간동안 페르시아를 비롯한 이란계 제족들의 문화가 여기서 정착했다. 이 시기 전파된 조로아스터교는 중세까지 아제르바이잔 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석유와 가스가 많은 아제르바이잔 특성상 이 지역은 조로아스터교의 성화 숭배의 중심지로 떠오르기도 했다.
기원전 4세기 마케도니아 왕국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페르시아가 마케도니아에게 멸망되면서 이곳은 마케도니아 왕국의 영토가 되었다. 페르시아의 메디아 지역 사트라프였던 아트로파테스(Aτρoπάτης)는 항복하여 사트라프 자리를 무사히 유지했는데, 알렉산드로스 3세가 사망한 후 디아도코이들이 제국을 갈라먹을 때 아트로파테스가 다스리던 메디아를 둘로 쪼개서 빼앗으려 하자 아트로파테스는 메디아 북쪽 구석을 차지하고 독립해 버렸다. 이 일대를 아트로파테스의 땅이라 하여 고대 그리스어로 아트로파테네(Ἀτροπατηνή), 사산 왕조 시절의 중세 페르시아어로 아투르파타칸(Āturpātākān)이라고 했다. 이 아투르파타칸이 아다르바드간(آذربادگان‎, āδarbādgān)과 아다르바예간(آذربایگان, āδarbāyegān) 같은 식으로 점차 발음이 변하여 현대 페르시아어의 어재르버이전(آذربایجان, Âzarbâyjân)이 되었다는 설명이 일반적이다.
이후 아투르파타칸 세력은 독립을 유지하다가 BC 2세기 경 카스피해 동부 일대의 다하이족이 남하하여 파르티아를 건국하자 파르티아의 봉신국이 되었고, 서기 253년 사산 왕조 시대 정복되어 확고한 페르시아령이 되었다. 이웃 조지아와 아르메니아가 로마 제국의 영향으로 기독교로 개종하는 동안에도 아투르파타칸은 조로아스터교가 번성하였다. 중세 아르메니아인 역사가들에 의하면 일부 코카서스 알바니아인들이 아르메니아의 영향으로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남겼으나 알바니아인들의 절대다수는 무슬림이었다.[1] 특히 이 지역은 로마 제국과의 분쟁지역인 아르메니아에 가까운데다 북방 튀르크계 유목민들이 카스피해 일대에서 남하해오는 길목에 위치하여 군사적 요충지였다. 로마 제국의 역사가 마르켈리누스 암미아누스에 따르면 아미다 공방전에 나선 샤푸르 2세의 왼쪽에는 히온족 부족장 중 하나인 그룸바테스가 있었고, 오른쪽에는 알바니아의 왕이 서 있었으며, 에프탈족 기병과 마찬가지로 알바니아 기병들도 페르시아 기병 전력의 핵심을 구성하였다고 한다. 사산 왕조에서는 데르벤트 일대에 요새를 구축하여 국경 지대를 방어하고 정예군을 육성했는데 일례로 까디시야 전투 당시 아랍 무슬림 군대에 맞섰던 페르시아 총사령관 로스탐 파로흐자드( رستم فرخزاد / Rostam Farrokhzad, ‎? ~ 636) 역시 아제르바이잔 출신이다.

3. 중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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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캅카스의 관문' 데르벤트 성채
한 편 아시아 서북부에 페르시아가 있었던 동안 서남부 아라비아 반도에서는 아라비아의 부족들이 통일되면서 아랍 제국 또는 이슬람 제국이 되면서 페르시아와 동로마와 전쟁을 벌였고, 사산 왕조는 내분 및 외부의 침입으로 멸망하였다. 종주국 사산조 페르시아가 붕괴하자 서기 7세기 북방의 하자르 칸국이 아제르바이잔 일대를 침공하여 페르시아인 통치자 자반시르를 격퇴하고 알바니아로부터 조공을 받기 시작했다. 알바니아인들은 이슬람 우마이야 왕조의 원조를 요청하였고, 이를 계기로 알바니아 일대는 7세기 후반부터 8세기 내내까지 하자르 칸국과 우마이야 왕조 사이의 전쟁터가 되면서 초토화되었다.
이 때 이슬람을 받아들이면서 이슬람화가 진행되어 아제르바이잔 내 여러 민족들은 이슬람을 믿게 되었다. 하지만 아제르바이잔 일대는 조로아스터교의 성지였던 데다가 아랍인들의 정착 빈도도 낮았기 때문에 조로아스터교도들의 저항이 더 극심한 편이었다. 명목상으로는 이슬람으로 개종했더라도 실질적으로 조로아스터교 신도인 경우도 적지 않았는데, 서기 9세기부터 발흥한 호람딘이 대표적인 경우였다.
중세 당시 아제르바이잔은 오늘날 시아파 주류 국가인 것과 다르게 시아파는 소수였으며 순니파가 더 많았다. 이른바 코카서스 페르시아인이라 불리던 타트인, 다게스탄의 주요 민족 레즈긴인, 터키와 이란, 시리아 각지에 퍼져있던 쿠르드인, 아르메니아 문화와 밀접한 우디인, 카스피해 서부 산악지대에 거주하던 탈리시인 등은 원래 순니파 이슬람을 믿던 민족이었으며, 아제르바이잔에 들어온 오우즈 튀르크인들은 오늘날 투르크멘, 터키인들과 언어학적으로 같은 기원을 가진 민족이었다. 잠시 시아파 부와이흐 왕조가 아제르바이잔 일대를 장악하기도 했으나 튀르크계 셀주크 제국에게 축출당했다.

3.1. 튀르크화


하자르 칸국이 멸망한 이후 하자르 귀족이었던 셀주크는 트란스옥시아나로 도망쳐서 그곳에 유입된 오우즈 튀르크족들을 규합하여 셀주크 제국을 건설했다. 셀주크 제국 건설 이전 압바스 왕조 시절 이미 많은 튀르크인들이 서아시아에 맘루크라는 용병으로 유입되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셀주크 제국은 같은 튀르크계 지방 군벌들을 규합하여 수월한 영토 확장을 할 수 있었다. 호라산 지역을 정복한 이후 페르시아와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장악하게 된 셀주크 제국은 바그다드에서 시아파 부와이흐 왕조를 축출하고 아바스 왕조 칼리프를 보호하는 동시에 튀르크 문화를 진흥하며 번영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며 여러 토후들의 국가로 분열된다. 셀주크 제국 이전 튀르크어족 언어들은 수준낮은 야만인들의 언어로 무시를 당하던 형편이었으나, 셀주크 튀르크에서 후원한 학자들이 아랍어, 페르시아어 언어학과 문학을 바탕으로 튀르크어를 개량하면서, 중세 튀르크어의 위상도 상승하였다. 아제르바이잔 일대의 튀르크인들을 중심으로, 엘디귀즈 왕조(쉬르반샤 왕조)가 나타났으며, 일부는 호라즘 왕조의 영역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아제르바이잔인들은 점차 페르시아어(타트어) 대신 오우즈 튀르크어를 쓰게 되며 튀르크화 되었다.
훗날 몽골제국이 중동으로 처들어오면서 멸망했던 호라즘 왕조와 더불어 엘디귀즈 왕조 역시 무너지고 말았다. 몽골의 침입 과정에서 아제르바이잔 일대의 농민 상당수가 학살당했으며 몽골 제국의 구성국 중 하나인 일 칸국이 아제르바이잔 일대를 다스렸다. 몽골 제국의 침략 이후 이란 동부의 주민들이 이란계 농민에서 튀르크계 유목민(투르크멘)으로 대거 교체된 것과 마찬가지로 13세기 이후 아제르바이잔도 이란계 인구가 급감한 반면 튀르크계 인구는 감소 폭이 적었다. 일 칸국의 몽골인들은 시간이 지나며 이슬람으로 개종되었다. 일 칸국이 망하면서 추판 왕조가 들어섰고, 나중에 티무르가 서아시아를 통일하면서 티무르 제국에게 흡수되었다. 1507년 티무르 제국이 붕괴되자 흑양 왕조(카라 코윤루)와 백양 왕조(아크 코윤루)가 들어섰는데, 이 둘은 튀르크계 왕조였으나 흑양은 시아파, 백양은 수니파 국가였다. 훗날 타브리즈에서 독립되어 흑양 왕조를 통합했던 백양 왕조에서 사파비 왕조가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페르시아는 시아파의 국가가 되었다. 사파비 제국을 세운 이스마일 1세를 위시한 키질바시들은 처음에 아제르바이잔 근처에서 발흥하였다.

4. 근세


오늘날의 아제르바이잔에 해당하는 지역에는 호람딘이라 불리는 조로아스터교도 반이슬람 세력이 적잖이 분포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13세기 무렵 수피교단으로 개종하였고, 15세기 사파비 수피 교단은 다시 시아파로 개종한다. 아제르바이잔의 튀르크계 전사 집단이었던 키질바시들은 사파비 교단의 중추를 담당했다. 키질바시들은 순니파 백양 왕조에 대항해 봉기하여 타브리즈를 점령하면서 사파비 왕조가 본격적으로 흥기하였다.
키질바시들은 사파비 왕조의 초대 왕이자 즉위 당시에 소년이었던 이스마일 1세를 신성시하였는데, 이스마일 1세를 비롯한 사파비 왕족들은 자신들이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직계 후손이자 7대 이맘으로서 일리와 후세인의 복수를 위해 모든 순니파를 쓸어버려야 한다는 믿음을 가졌다. 사파비 왕조의 왕족들은 정기적으로 이슬람 초창기 4명의 칼리파 중 알리를 제외한 나머지 3명(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스만 이븐 아판)을 참칭자라며 저주하는 예배를 근행했으며, 키질바시들은 활쏘기를 연습할 때 “이 화살이 우마르의 심장에 꽂히기를”이라는 말을 구호로 외쳤다 한다.
이스마일 1세가 이끄는 군대는 1501년 바쿠를 정복하고 바쿠의 순니파 통치자를 처형한 것을 기점으로 1502년까지 다게스탄과 아제르바이잔 일대를 장악해나가기 시작했다. 이스마일 1세와 타흐마습 1세의 제위 시기까지 페르시아인들은 대부분 순니파 이슬람을 믿고 있었다. 사파비 왕조가 순니파들을 강제 개종, 학살, 추방하는 과정에서 페르시아 전역에서 순니파들의 봉기가 일어나자 키질바시들은 아제르바이잔 인근 조지아, 아르메니아, 체르케스, 다게스탄 일대의 기독교인 및 순니 무슬림들을 납치해 쉬아 12이맘파로 강제 개종시킨 후 맘루크로 만들어 이란 각지에 주둔시켜 순니파들의 봉기를 차례로 진압하였다. 이 과정에서 페르시아인 순니 무슬림 상당수가 이웃한 오스만 제국부하라 칸국 등으로 탈주하였으며 이로서 이란은 시아파 다수 지역이 되었다.
오스만 제국과 사파비 제국은 아제르바이잔 일대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주도권을 놓고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으며 이 와중에 아제르바이잔인들이 사는 지역들도 여러차례 오스만 제국에 점령되었다. 또한 사파비 왕조에서도 키질바시들과 페르시아인들 간의 갈등이 심해지자 아랍권의 시아파 12이맘파 성직자들을 초빙하여, 사실상 국교를 사파비야 대신에 12이맘파 자파리파로 변경하였다. 키질바시들이 믿는 사파비야 교단은 소수정예 병력을 운용하기에는 적합했을 지 몰라도 구세주 사상과 신비주의 신앙이 강해서 제국의 국교로는 부적합했다. 사파비 제국은 점차 아제리인 키질바시들의 권한을 축소하고 조지아인 노예 군인들에게 병권을 주고, 수도 역시 오늘날 이란 중부에 해당하는 이스파한으로 천도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제르바이잔인들도 사파비야 교단 대신 좀 더 온건한 성향의 12이맘파로 개종하였으며, 터키의 알레비파 수피 교단과 접촉을 이어나갔다. 그 결과 오늘날 아제르바이잔인들은 시아파이되 이란과 달리 터키인들과도 상당히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5. 근대


사파비 왕조가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의 아프간족(파슈툰족)에게 망하면서 페르시아는 아프가니스탄의 호타키 왕조의 지배를 받았고, 아제르바이잔은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페르시아에서 나디르 샤가 들어서면서 페르시아를 지배하고 있었던 아프간인들을 쫓아내고,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이기면서 아제르바이잔을 수복했다. 나디르 샤의 아프샤르 왕조가 무너지자 이란 서부와 아제르바이잔은 잔드 왕조가 들어섰고,[2] 훗날 다시 튀르크계 아제르바이잔인들에 의해 카자르 왕조가 들어섰다.
한 편 러시아는 중앙아시아 및 캅카스 등 아시아 중서부에 팽창하려 했었고, 인도를 통해서 발루치스탄과 아프가니스탄 국경 지역에서는 대영제국이 들어서면서 이란은 서구 열강의 각축장이 되었다. 이로 인해 중앙아시아와 카자르 왕조의 본거지 아제르바이잔을 비롯한 캅카스, 이란 북부 등 서북부 아시아는 러시아가 점령되었고, 남동부는 영국에게 빼앗겼다.
19세기 초 러시아가 캅카스를 점령하면서 아제르바이잔과 이란 및 이란 서북쪽의 남아제르바이잔이 분리되었다. 이 영향으로 오늘날 아제르바이잔 말고도 이란 북서부 아제르바이잔 접경지역에 동/서 아제르바이잔 주(州)가 따로 있다. 오늘날 이란 북부에는 아제리인들이 많이 거주한다. 그냥 많이 거주하는 게 아니라 1,000만 명 넘게 거주한다! 그래서 아제르바이잔에서는 본국을 북 아제르바이잔(Şimali Azərbaycan), 이란령 아제르바이잔을 남아제르바이잔(Cənubi Azərbaycan)이라 부른다. 이란의 라흐바르(최고 지도자)인 알리 하메네이아제리인이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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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제국의 점령 이후 러시아인들이 이주해오기도 하면서 일부 문화는 러시아화가 진행되기도 했었다.[4] 러시아에게도 저항한 적이 있었는데, 러시아 제국의 붕괴 이후인 1918년 4월말에 자캅카스 민주 연방 공화국의 일원으로 조지아, 아르메니아와 함께 러시아로부터 독립하였으며 같은 해 5월 28일 자캅카스 연방에서 탈퇴하여 '매햄매드애민 래술자대(Məhəmməd Əmin Rəsulzadə)'와 '패탤리한 호이스키(Fətəli xan Xoyski)'를 각각 초대 대통령과 초대 총리로 하는 '아제르바이잔 민주공화국(Azərbaycan Xalq Cümhuriyyəti)'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이 세 나라들은 다시 분열되었고, 1920년 4월말 소련군에 의해 수도인 바쿠를 점령당하면서 아제르바이잔은 소련에 편입되었고, 래술자대는 유럽 곳곳을 떠돌다 1955년 터키에서 죽었다.[5] 아제르바이잔은 1920년 이후 1922년까지 소련의 창설국에 가맹하면서 자캅카스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의 일원이 되었다가 나중에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들어섰다. 사회주의 체제인 소련의 지배가 들어선 영향으로 아제르바이잔은 이란과 다르게 도회지 뿐만 아니라 농촌 지역까지도 상당한 수준의 세속화가 진행되었다.

6. 현대


이후 1922년 자캅카스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을 거쳐 1936년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분리되었다. 아제르바이잔은 반소적인 성향이 강하였다. 80년대 말부터 반소 시위가 벌어졌고 1990년 1월 19일20일에는 소련군에 의해 131~170명에 이르는 시민이 희생당한 '검은 1월(Qara Yanvar)'이라는 유혈사태를 겪었다. 이후 1991년 8월 30일에 독립을 선언하였고, 10월 18일소련으로부터 사실상 독립하였다.
옆나라인 아르메니아와는 1988~1994년 동안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을 놓고 자주 무력 충돌을 벌였다. 이 무력 충돌은 결국 1992년 겨울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이라는 전면전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 전쟁의 여파로 인해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은 앙숙이 되었다. 이 와중에서 양쪽 다 천여 명 가량의 민간인 사망자가 발생했는데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이거 가지고 아르메니아에게 니들도 똑같은 학살자라고 주장하고, 아르메니아인은 300만명 학살과 천여 명 학살이 동등한 범죄냐고, 그리고 학살은 니들도 했다고 받아치고 있다. 어차피 규모도 미미한 수준이기에 국제사회에서는 별 관심도 없다. 사실 이 당시 아르메니아는 미국의 엄청난 지원을 받았다. 1992년만 해도 아르메니아는 102억 달러라는 엄청난 미국의 지원을 받았는데, 이는 이스라엘과 비슷한 상황이다. 즉 미국에 이민간 아르메니아인들이 미국에 로비를 해서 이런 결과를 얻어낸 것. 사실 아르메니아인들은 유태인 다음가는 해외에서 성공을 이룬 민족 중 하나이다. 그런데 아르메니아인들이 이렇게나 외국에서 성공한 이유 중 하나가 터키의 아르메니아 대학살 떄문에 뿔뿔이 흩어졌기 때문이고, 아제르바이잔은 아르메니아 학살을 부정하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몹시 미묘하다. 그리고 후술하는 대로 이스라엘이 이젠 아제르바이잔과 매우 친해져서 아르메니아를 견제하고 있으며, 아르메니아는 반대로 이스라엘이 숙적으로 여기며 견제하는 이란과 아랍국가들과 친하게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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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아제르바이잔은 제대로 준비를 갖추지 못하여 아프가니스탄 무자헤딘들에게 이슬람 형제로서 도와달라고 애원할 정도였다. 독소전쟁 때나 쓰였을 인해전술이 부활한 것도 이 때. 연이은 패배에 아제르바이잔은 미국의 배후 탓이 크다며 반미 여론이 크게 일어나 아르메니아와 전쟁 중이던 1993년에 수래트 휘세이노프(Surət Hüseynov) 대령의 군부 쿠데타로 2대 대통령이자 친미 및 서구 정책을 취하던 애뷜패즈 엘치배이(Əbülfəz Elçibəy)가 퇴진한 이후 아제르바이잔 KGB 의장과 공산당 서기장을 지냈던 헤이다르 알리예프(Heydər Əliyev)가 대통령이 취임하여 2003년까지 장기집권을 하게 된다. 앨리예프 정권이 수립되면서 전열을 가다듬고 아제르바이잔은 뒤늦게 반격하여 아르메니아군을 물리치며 20% 정도나마 빼앗긴 영토 일부분을 되찾긴 했다. 그 뒤 헤이대르 알리예프가 건강악화로 물러난 이후 그의 장남인 일함 알리예프(İlham Əliyev)가 집권하고 있다. 관련 기사.
알리예프 정권 수립으로 러시아는 이제 아제르바이잔 눈치도 봐야 했고 아제르바이잔의 패배에 터키 국경지대 나흐츠반까지 위험할 지경에 이르자 터키군도 참전할 분위기를 보이면서 자칫하면 세계대전급으로 규모가 커질 수 있기에 러시아와 미국이 중재하며 일단 전쟁은 멈췄다. 그리고 아르메니아의 비호를 받은 나고르노 카라바흐가 독립을 선언했지만 국제적으로 전혀 인정을 못 받고 있으며, 아제르바이잔에서는 2008년에 무력으로 영토를 되찾을 것을 다짐하는 등 아직 평화 정착과는 거리가 멀다. 덕분에 터키와 혈맹이면서도 터키가 아르메니아와 화해하려고 하면 가장 결사반대하여 두 나라를 낭패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2010년 두 나라의 화해적 제스처에 알리예프 대통령이 터키 대사를 소환해 혈맹인 터키가 이러면 실망이라고 아쉬움을 나타냈을 정도이다. 게다가 2008년 코소보가 독립을 선언하자 터키는 코소보를 독립국가로 공식승인하고 코소보의 입장을 지지하지만 코소보 독립을 인정하지 않는 아제르바이잔은 터키에 비판적일 수밖에 없다. -
2016년 4월,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양측이 나고르노 카라바흐 공화국 지역에서 전투를 벌여 아제르바이잔은 아르메니아에 큰 타격을 입히고 몇 지역을 점령한 상태이다. 과거에 비해 이번 전투에서 아르메니아군을 약 120명 이상이나 사살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국경전체에 걸친 전면전을 선포한 상태이다. 그나마 국제 사회 중재로 전쟁은 장기전이나 대규모로 커지지 않고 국경분쟁으로 끝나게 되었지만 아르차흐를 되찾는데는 실패했다.
20여년 전과 달리 이번 분쟁에 대해 미국은 은근히 아제르바이잔을 지지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르메니아는 친러 정책이 강화되었고 러시아가 강력하게 지지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아제르바이잔은 20여년 전과 달리 반미적인 분위기를 많이 거두고 러시아어를 배제하고 미국에게 우호적인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아르메니아계 미국 정치인들이 로비하려고 해도 아르메니아에 러시아군이 주둔하고 러시아가 경제 및 군을 여러 모로 장악한 현실에서 더 이상 친아르메니아적인 미국의 지원은 무리이기 때문이다. 남오세티야 전쟁 당시 아르메니아는 침묵했고 아제르바이잔은 러시아의 침략과 학살이 들어간 전쟁이라고 강력 비난했던 걸 봐도. 게다가 미국 정치, 경제, 문화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 유태인들과 이스라엘이 이젠 아제르바이잔을 배려하고 있기에 아르메니아계 미국 정치인들로서는 한숨쉬고 있는 상황이 되었다.
2009년에 3선 금지 조항을 폐지한 이후, 2016년에 대통령 임기를 연장하는 개헌투표가 통과되면서 대통령의 권한 강화에 따른 권력집중 우려도 나오고 있다.# 투표에서는 29개 조항을 수정했는데, 단어를 좀 더 쉽게 수정하거나 구체화하는 정도의 개헌안 (2, 7, 8번 등)에서도 반대표가 7~9% 정도 나온 반면, '''대통령 연령제한 제거, 임기연장과 부통령제 신설 조항''' (각각 20, 21, 22번)만 반대표가 5~6% 정도 나왔다. 더군다나 대통령이 초안을 헌법재판소에 제출한 것이 7월 18일인데 투표를 '''단 73일 후인''' 9월 26일에 실시했다.
2020년 9월 28일, 아르메니아와 본격적인 국경 분쟁이 또 다시 벌어져 아르차흐 공화국 측은 15명 이상 전사자가 나왔다고 한다.
이후 아르메니아와의 국경 분쟁이 심화되어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이 발발하였고 결국 승리하였다.
종전협정 결과 빼앗긴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의 대부분을 되찾았다.

7. 둘러보기



[1] 고대 코카서스 알바니아인 후손 중 우디인아르메니아 사도교회의 영향을 받아 오늘날에도 독자적인 (코카서스) 알바니아 사도 교회를 믿고 있다.[2] 아프가니스탄과 발루치스탄 일대는 무굴 제국 또는 두라니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3] 아래 지도를 보면 아제르바이잔인(아제리인)이 거주하는 지역 사이에 아르메니아가 구멍 뚫린 듯 있는데, 실제로 소련 붕괴 이전만 하더라도 아르메니아에도 아제리인이 많이 거주했으나 소련 붕괴 이후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관계가 극악으로 흐르면서 아제리인들이 아르메니아를 떠났다.[4] 본격적인 러시아화는 소련 편입 이후 진행되었다.[5] 그는 죽기 2년 전에도 '미국의 소리'와의 인터뷰에서 아제르바이잔인들에게 조국의 독립에 대한 희망을 가질 것을 호소했다. 평생 조국의 독립을 염원했던 듯한데, 그가 죽은 후 36년이 지나서야 아제르바이잔은 독립을 되찾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참 안타까운 부분. 사후 래술자대의 시신은 앙카라의 한 공동묘지에 묻혔고 현재도 그곳에 매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