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일생
1. 어린시절과 학창시절
1962년 2월 26일, 경상남도 밀양시에서 아버지 안영모와 어머니 박귀남 슬하 2남 1녀 중 첫째로 출생했다.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범천동에서 병원을 운영하는 의사인 아버지 밑에서 어머니와 다른 형제들과 함께 아버지의 병원 건물[1] 에 있는 방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화초 심는 것을 좋아해서 건물 옥상에다가 갖가지 종류의 꽃을 심어, 옥상은 이미 어린 안철수만의 화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학교 앞에서 사온 병아리를 곧 죽을 것이라는 모두의 우려와는 달리 닭까지 키워내기도 하는 등, 뭔가를 키우는것에 굉장히 능했다고 한다.[2]
동식물을 키우는 것 외에도 기계를 분해하여 재조립하는 것을 즐겨 했다고 한다. 한번은 친척집 괘종시계를 망가뜨리기도 했다고. 그래서 그를 잘 아는 친척들은, 그가 집에 오는 날이면 중요한 기계는 모조리 숨겼다고 한다.
의외로 중학생 시절까지는 그다지 우등생이 아니었다고 한다. 반에서 중간 정도 하는 성적이었으나[3] 대신 독서광이었다고 한다. 학교 도서관에서 매일 책을 빌렸고 빌린 책은 몇 권이든 하루 만에 다 읽어서 바로 다음날 반납했는데, 사서교사가 이를 보고 '얘가 일부러 장난 치는 거 아닌가'하고 의심하기도 했다고. 어릴 때 꾸준히 독서를 한 결과인지, 부산고등학교 재학 때부터는 성적이 일취월장해왔다고.
그 결과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고 한다. 무릎팍도사 안철수 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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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오른쪽이 안철수다.
2. 가정사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재학시절 진료봉사 동아리에서 만났던 1년 후배 김미경과 1988년 결혼하였다. 그리고 딸 하나를 두었다. 부인은 병리과 전문의로 성균관대학교 의과대학 교수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를 지냈다.
3. 군복무
3.1. 대한민국 해군 군의관
좌측 이미지는 육군3사관학교 산하 화산유격장 산악교장으로 추정. 3사관학교 부대마크와 사관후보생 번호표를 군복에 부착하고 있는 걸로 봐서, 육군3사관학교 의무사관 후보생 기초군사교육 과정 중 찍은 사진이다. 특수사관후보생들은 기초군사훈련은 육군에서 받고 임관 전 최종적으로 임관할 군종이 정해진다. 현재는 육군학생군사학교로 양성과정 교육기관이 바뀌었다.
1991년 2월 부터 1994년 4월 까지 해군에서 군의관으로 복무했다. 장기복무를 지원해 합격하고 원에 의한 전역을 하여 최종 계급은 대위[4] . 해군 의무병과 인원들의 특성상 해병부대에서도 근무했기 때문에, 해병대와도 인연이 있다.
3.1.1. 육방부식 억지비난과 반론
해군 군의관 시절, 주말마다 근무지인 진해에서 서울로 비행기를 타고 왕래한 것을 두고 위수지역 이탈 문제가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육군 위주의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오해이며, 위수지역 개념이 없는 해군은 규정상으로는 문제 없었다. '''오죽하면 해군 관계자마저도 열불날 일이란 걸 애써 참으며''' '이것은 문제없다'고 답변했을 정도이다. 애초 해군은 육군과 달리 지역이 아니라 시간제이다. 예컨대, 제2함대 함정 근무자의 경우 30분 내 부대 복귀 가능한 거리에 대기해야 한다. 참수리급 고속정은 아예 5분대기라 반쯤 영내생활이나 다름없다. 참수리 BOQ도 부대 내에 있다.
4. 의사, 백신개발자
원래 직업은 의사로 임상의학 대신 기초의학 연구를 택하여 생리학교실에서 대학원생으로 공부를 계속하였다. 하지만 기계에 관심을 보이는것은 여전하여 컴퓨터를 장만했는데 그 당시 컴퓨터의 가격은 대학원생인 안철수가 감당해내기에는 상당히 비쌌다. 그래서 그는 정말 돌아갈수있는 최소한의 부품만 갖춘 컴퓨터를 겨우겨우 구매했고 이후 컴퓨터에 빠졌다고 한다.
1988년 어느날 본인의 컴퓨터에 바이러스가 침투한 적이 한 번 있었는데 '''이는 안철수의 인생을 바꾼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거의 밤새 바이러스 걸린 컴퓨터와 씨름을 했다고... 그리고 그때부터 독학으로 백신개발에 몰두하였는데 결국 의사를 그만두고 나중에는 안랩까지 설립하게 되었다. '''사람을 고치는 의사에서 컴퓨터를 고치는 의사가 된 셈.'''
세계 최초의 백신은 1987년에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데# V3이 88년 6월에 처음 배포된 것을 생각하면 안철수의 백신 배포 시기도 굉장히 빠른 축에 속한다. 당시의 소스 코드
군의관 전역 이후 의과대학 교수직을 내놓고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 개발 연구에만 전념하다가 1995년 3월 '안철수컴퓨터바이러스연구소' 를 창업한다. 이 회사가 오늘날의 안랩이다.
IT 회사를 창업까지 한 이력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키보드를 보고 타이핑을 한다는 모양.
5. 경영인
1995년 3월 안철수컴퓨터바이러스연구소를 창업했다. 하지만 초반에는 직원도 4명 뿐이었고 사무실 구할 돈이 없어 자신의 집에서 직원들이 일을 했다고 한다. 직원들 줄 월급이 모자라 부모님에게 돈을 빌릴 정도였다고. 그렇게 4년을 어렵게 보냈는데, 1998년부터 본격적으로 안철수의 모범 경영과 멕카피의 인수 제의를 거절한 내용이 보도되며 안철수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고, 1999년에 터진 CIH 바이러스, Y2K 문제를 잘 극복하면서 IT 기업 1위 자리에 오르며 한국판 빌 게이츠로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다.
2000년 9월 안철수연구소로 사명을 변경하고 2005년까지 대표 이사를 역임했으며, 2003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취임식에 국민대표 8인 중 경제인 대표로 참석하였다.
경영자로서 모범적인 경영을 하였다. '''안철수연구소'''의 대표이사로서 재직중인 당시에 절대 차입경영[5] 을 하지 않았다. 이를 두고, 모범적인 벤처기업 경영의 사례로 손꼽는 이들이 많다. 또한 안철수연구소에서 채용을 할 때 학력, 외모, 성별 등을 따지지 않는다. 이게 당연한 듯 보여도, 아직도 많은 기업들은 학력을 대졸 이상으로 못박는다. 관련 내용[6] 물론 위에서 부채가 적으므로 좋은 회사라 표현했으나 부채가 있는 회사라고 하여 부실한 회사를 뜻하지 않는다. 부채가 없는 회사는 외부의 압력을 받지 않기 때문에 내부의 붕괴로 자멸한다는 것과, 부채가 없으면 공격적인 전략을 취하지 못한다는 점 때문에, 현대 회계에서는 일정량의 부채가 있는 것을 중요시하기도 한다. 단, 당시 안철수연구소는 이렇다 할 수익모델이 없이 필요성만 보고 백신을 개발하던 회사라, 누군가 투자하지 않는 한 애초에 돈을 빌려올 능력이 안되는 회사였을 수도 있다. 결국 금융권에선 회수 가능성과 수익 가능성을 볼 수밖에 없으니.
연구소를 나오면서 초창기부터 일했던 직원 100명에게 무상으로 주식 1.5%를 나누어주었다(안철수의 주식 1.5% 무상분배에 대하여)고 했지만 전부는 아니었는지 안철수는 현재 안철수연구소의 지분 37.1%를 보유 중이다. 이는 3,350억원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그리고 2011년 어느 기사에는 연구소에서 일하지도 않는데 주식이 있다고 부르주아 인텔리 좌파라고 까는 무개념 댓글이 베플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직원들과 간담회에서 한 직원이 "회사에 노조가 생기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질문하자 "회사 접어야죠"라고 대답해 분위기가 얼어붙었다는 일화가 정치계 입문 후 인터넷에 소개돼 노동관 논란이 일었던 적이 있었다. 기사 이에 대해 새정련 대변인을 지냈던 금태섭 변호사는 "(저서인) <안철수의 생각>부터 여러 차례 노동 문제를 다뤘고 대선 캠프에서 노동 분야도 따로 있었다.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과거 회식 자리 비슷한 발언에 대해 당장 사실 관계를 확인할 수 없다. 이상한 전언을 가지고 이렇게 쓴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반박하였다.
위 기사의 원 소스는 물뚝심송의 블로그 게시글. 2015년 12월에 이 논란이 다시 불거졌고, 결국 안철수 의원실에서 물뚝심송과 기사를 받아쓴 <미디어오늘>을 상대로 법적조치를 검토 중이라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물뚝심송문서 참조.
5.1. 안철수 재직 중 V3
대표적 안티 바이러스 브랜드는 V3이 있다. 컴퓨터용 안티바이러스 제작에 뛰어들게 된 계기는, PC 통신 초기이던 1980년대 말에 출현한 브레인 바이러스를 수동으로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어 이것을 프로그램화하여 최초의 한국산 안티 바이러스인 'Vaccine'을 만들게 되면서부터였다. 이것을 VT에 뿌렸을 땐 많은 사람이 환호했다. 차차 버전을 올려가면서 미켈란젤로 바이러스 퇴치기능을 추가할 때 '''Vaccine 3''', 줄여서 V3로 명칭이 굳어졌고, 이것이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V3부터는 버전 넘버를 따로 매겼는데, 그 버전 넘버가 곧 V3가 잡을 수 있는 멀웨어의 개수였다. V3 Ver. 100이라면 100개의 바이러스를 잡아낼 수 있었단 얘기. V3의 영향은 한국의 많은 이들이 컴퓨터용 안티 바이러스 프로그램을 가리켜 '컴퓨터용 바이러스 백신'이라고 부르고 있는 데서도 찾아볼 수 있다. 본 문서도 마찬가지.
국내에서 경쟁할 프로그램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백신을 사업화하지 않고 있다가 윈도우 시대로 넘어와서 백신을 유료화하자, 뭇 초딩들에게 '''"바이러스를 고치는 백신을 돈 받고 팔다니, 아저씬 나빠요"'''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 한다. 이때 언론들 역시 백신의 사업화를 부정적으로 보도한 바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막 까대도 실질적으로는 V3+Neo를 계속 버전업했다.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지 문제는 v3+neo는 실시간 감지 기능이 없었으며[7] 이미 당시의 백신의 대세는 무료백신으로 DB를 확보하고 부가기능이 추가된 유료백신을 사업자 & 코어사용자용으로 판매한다는 것이었다. 2000년대 이후의 V3는 무료백신(과 데이터 수집, 이미지 관리) 부분에서 시대에 많이 뒤떨어졌고, 그 여파를 회복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려야 했다.
5.2. 안철수 퇴직 후 V3
안철수가 공부를 이유로 회사를 떠난 후, 안철수연구소는 무수한 논란을 터뜨렸다. 안철수가 떠난 뒤의 안랩은 '무료 백신은 세계의 대세가 아니다' 등의 헛소리를 했고, 무료 V3 역시 V3+Neo 같은 도스 버전만 지원하다가 국내에서도 어베스트 등의 한글화 무료백신이 나오면서 밀리고 밀린 끝에 출시했다. 물론 유료로 전환한 것 자체는 필요한 조치였으나, 당시 안랩 대표가 '무료 백신은 세계의 대세가 아니다'라는 얘기를 한 시점의 보안업계 뉴비들의 사업모델은 개인 사용자들에게 무료로 안티바이러스 / 방화벽을 뿌리고 개인 사용자들의 피드백을 통해 DB를 확충한 다음, 법인 시장을 노리는 것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세계의 대세를 읽지 못한 것은 당시의 안랩이었던 셈. 심지어 초창기 V3는 시대를 앞선 무료백신이었는데 그걸 활용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가장 심각한 것은, V3의 성능 부족을 '한국 토착화' 같은 소리로 무마하려고 하며 개선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때는 V3는 카스퍼스키가 잡아내는 거 절반 밖에 못 잡는다는 등의 온갖 흉흉한 평들이 돌아다녔으며, 이 때 생긴 V3의 나쁜 이미지를 극복하는 데는 꽤나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지금은 윈도우용 무료 백신 V3 Lite를 배포하며 괜찮은 반응을 얻고 있다. 2015년 즈음부터는 해외의 벤치마크에서도 괜찮은 성적을 보여주고 있다.
6. 교육인
만 28세였던 1990년 3월 단국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로 임용되었다. 20대에 최연소 교수, 그것도 '''학과장'''이 된 것이다.(…) 여기에는 좀 속사정이 있는데, 안철수 본인이 임상의학보다 기초연구쪽에 관심을 두고 인턴, 레지던트 과정 대신 기초의학인 생리학을 전공하였는데 신설 의대 증가로 전국적으로 의대 교수 자리, 특히 기초의학 교수가 매우 부족하게 되면서 이례적으로 빠르게 교수를 달았던 것이다.[10] 당시 안철수는 군 미필에 박사학위 미소지 상태라 28세에 교수가 된 것이 가능했고, 그 정도로 기초의학 교수가 부족했던 시절이다. 그리고 학과장을 맡게 된 것은 다른 교수들에 비해 젊다는 이유로 귀찮은 일이 많은 학과장을 떠맡게 된 사정도 있다.[11] 임용 1년 후인 1991년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단국대를 휴직하고 군 복무에 들어갔다. 군 전역 후에 복직하여 잠시 교수생활을 이어갔으나 1년 뒤 그만두고 회사를 설립했다.
회사를 설립한 후 1995년 부터 1997년 까지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EMTM[12] 을 취득했다. 중간관리직~임원 정도에 있는 사람들이 주중에는 회사를 다니고 주말에는 학교를 나가서 2년만에 석사학위를 취득하는 과정이다.# 간혹 이를 컴퓨터과학 석사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는데 전혀 관계 없다. 제조업이나 IT산업 쪽 회사를 경영하는 방법에 대한 석사학위다.[13]
이것도 모자라다 생각했는지, 2005년에는 회사 대표를 사임하고 나이 마흔이 넘어 또 다시 유학길에 올라 펜실베이니아 대학교[14] 와튼비즈니스스쿨[15] 에서 EMBA를 취득했다.
2008년 귀국하여 카이스트 경영과학과 석좌교수에 임용됐다. 정문술 미래산업 창업주의 적극적인 추천이 있었다는 후문이 있다. 실제로 안철수의 보직 이름은 '''정문술 석좌교수'''. 처음 1년간은 주로 학부 학생들을 가르치다 그 다음해 부터는 대학원생들을 가르쳤다. 여담이지만 학부생을 가르칠 때의 수업인 <기업가적인 사고방식>은 명강의로 소문이 자자했다. 수업 자료로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 케이스들을 사용했는데, 원본 뿐 아니라 학생들에게 배부할 자료들도 복사를 하지 않고 '''각 부에 해당하는 저작권료를 모두 자비로 냈다.'''
2011년 서울대학교의 러브콜을 받고 이적, 서울대학교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을 맡고 있었고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 출마선언을 하며 모든 직위에서 물러났다.
교육자로서의 길을 요약하자면 의대 교수 생활을 접고 창업해 잘 나가던 벤처기업 CEO였지만 또 다시 접고(…) 유학생활을 거쳐 경영학과 교수를 지냈다.
7. 정치인
[1] 1963년 개원하여 한 자리에서 50년간 운영하는 것이 목표였으나 하도 많이 취재가 들어오는 바람에 1년 모자란 49년간 운영하고 2012년에 폐업했다. 구 범천의원 터[2] 결국 그 닭은 집 어른들이 잡아다가 삼계탕을 했다고 한다. 그 닭이 단번에 자기가 키운 닭임을 알아본 안철수는 어린 마음에 꽤나 상처를 받았다고.[3] 30등이 지금으로 치면 하위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당시 대도시에는 한 반 학생이 60명인 경우가 보통이어서, 30등 정도면 딱 중간 정도의 성적[4] 군의관이라 중위로 임관하였다[5] 돈을 빌려와서 회사를 꾸려가는 경영형태. 다만 그렇다해도 다른 기업과 비교하면 거의 없는 수준. 15년 12월 기준 자산 1,900억, 부채 330억 원. 웬만한 대기업들도 자기자본 대비 부채가 100%가 넘어가는 걸 생각하면, 정말 적은 것 맞다. 은행에서 돈을 빌리거나 회사채를 발행하여 자금을 조달하지 않아도 회계상 부채는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직원들 퇴직금만 해도, 실제로 지급되기 전까지 부채로 쌓여 있다.[6] 입사지원 자격요건에 관한 내용을 클릭하면 된다.[7] 도스시절, 램에 상주하는 실시간 감지체계는 함께 배포되던 V3 RES의 몫이었다.[8] Executive Master of Technology Management, 기업임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최고경영자 '''기술경영학''' 석사과정'이다.[9] Executive-Master of Business Administration. 기업임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최고경영자 '''경영학''' 석사 과정'이다.[10] 여담으로 90년대에 나온 생리학 교과서를 보면 교수 안철수의 이름을 찾아볼 수 있다.[11] 실제로 많은 대학, 많은 학과에서 정규직 교수(정교수, 부교수, 조교수)가 여러명이 재직 중이지만 꼭 경력이 많은 정교수만이 학과장을 맡는다는 법은 없다. 부교수, 조교수도 학과장을 맡는다. 오히려 대부분의 정교수들은 이미 학과장 경력이 있어서 학과장을 하면 귀찮아 지고, 학과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책임을 져야하는 걸 알기 때문에 학과장 맡기를 꺼려한다. 더구나 정교수까지 승진이 끝났기 때문에 인사고과에 신경 쓸 필요도 없다.[12] 관리직을 위한 기술경영 석사[13] 이를 우리나라의 최고위과정과 비슷하게 오해하는 경우도 있는데, 전혀 다르다. 그쪽은 학위가 나오지 않는 친목단체이고 돈만 내면 들어갈 수 있다. 반면 이쪽은 학위가 나오는 석사과정이고 GMAT나 GRE 등 미국 대학원 입학시험 성적 제출이 필수적이다. 또한 정규 학술석사(M.S.)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는데, EMTM은 논문을 쓰고 연구를 하는 과정은 아니다.[14] 아이비리그에 속한다.[15] 세계 최고 수준의 경영대학 중 하나이나 그건 그거고, 켈리포니아에서 수업받았다고 한다. 돈 있는 기업가들의 학위를 위한 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