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정치

 




1. 개요
2. 정계 입문 이전
2.2. 정치 보복 논란
2.3. 재산 사회 환원
3.1. 출마 선언 상세 사항
3.2. 후보직 사퇴
4. 제19대 국회 국회의원
5.1. 2016년의 행보
5.2. 2017년의 행보
6.1. 2018년의 행보
6.2. 2019년의 행보
7. 안철수와 문재인, 문재인과 안철수
7.1. 개요
7.2. 두 사람의 성격 탓?
7.3. 상세
7.4. 그래서, 결국 진검승부
8. 안철수와 유승민, 유승민과 안철수
8.1. 개요
8.2. 연합의 계기
8.3. 연합 정당을 창당했으나...
8.4. 다른 정당 소속이 되다
8.5. 안유 동맹 시즌 2?
9. 루머
10. 외교적 성향
11. 위기: 연이은 낙선
12. 정계복귀


1. 개요


안철수의 정치적 행보를 서술한 문서. 안철수 문서의 방대한 분량과 이로 인한 가독성 저해로 문서가 분리되었다.
'''중도진보'''에서 시작해 중도를 거쳐 '''중도보수'''에 정착한 인물. 다만 안철수의 행동 혹은 정치적 구호에서 진보적이라고 할 만한 것이 무엇이 있는지 의문이기에, 진보에서 시작했다고 보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그는 단 한 번도 정의당과 유사한 정치적 스탠스를 취한 적이 없었으며, 민주당에 있었을 당시에도 당내 인사 중에서도 보수적인 경향을 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철수가 살아남은 것은 일반 대중의 정치혐오 정서덕분이라고 해도 다름 없다.
실제로 안철수가 정계에 입문하기 전, 안철수 신드롬을 일으킬 당시 많은 2, 30대의 정치 성향은 '보수는 지지하기 싫고, 진보는 형편없고'라는 생각이 자리잡아 있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새로운 정치로 떠오른 게 안철수다. 진보적 성향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는 젊은 정치인, IT 기업인, 기업 경영 당시 모범적인 모습 등. 따라서 안철수를 강력하게 지지했던 많은 사람들은 기존 정치에 환멸을 느낀 진보적 성향을 가진 젊은 2, 30대였다. 따라서 지지 기반은 중도 진보였다고 볼 수 있었다. 이 당시 보수진영은 기성 보수정당이자 보수 빅텐트 정당이라고 해도 다름 없는 새누리당에 대한 지지세가 높았었다. 하지만 이후에 점점 보수정당(새누리당)이나 민주당 내부 보수파와 영합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진보 유권자들이 안철수에 대한 지지 철회가 많았다.
물론 정치에 처음 입문했을 때에는 거대한 신드롬을 일으키며 유력 대선후보로 수많은 국민들의 지지를 얻었으나 위에 나온 사유들로 인해 시간이 지날수록 국민들의 신임을 잃어가고 있다. 분명 처음 돌풍을 일으킨 이후, 무소속이였던 박원순 후보에 대한 서울시장 양보와 이후 대선 출마 선언 후 문재인과의 단일화 과정까지만 하더라도 중도진보 진영은 물론 중도보수 진영까지 지지하는 엄청난 인기를 구가했었다. 그러나 2014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의 참패가 안철수-김한길 지도부의 실책임이 밝혀진 이후엔 중도진보 층의 지지세를 잃었다가, 다시 20대 총선에서 국민의당 돌풍을 일으켜서 다시 살아났다. 문제는 제19대 대통령 선거 때의 여러 논란 떄문에 홍준표에게도 밀려 최종 3위를 기록하여, 본인 입장으로서는 참패를 당했고 많은 호남 지지층을 잃게 되면서 본격적인 위기가 시작된다.
그리고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도 바른미래당 후보로 서울특별시장 선거에서 또 3위로 참패함으로써 안철수의 위기는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국민의당 창당 후 일부 고소득층[1]과 2030대 남성[2]을 중심으로 지지세를 모은 것이 21대 총선에서 확인 됨으로써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2021년 재보궐선거에서 서울시장 선거를 하는 데, 이것이 안철수의 정치적 생명이 살아나냐 꺼지냐게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2. 정계 입문 이전



안철수에 대한 정계의 러브콜은 끊이지 않고 있었다. 참여정부 시절 정보통신부 장관직을 제의받았고 2006년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으로부터 서울시장 후보직을 제의받는 등 여야 모두로부터 정계 입문 권유를 받았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
2009년 6월 MBC 예능 무릎팍도사에 출연한 것이 안철수 인기 급상승의 굉장한 기폭제가 되었다. 무릎팍도사에서 안철수는 일반 서민들과는 다른 먼치킨 중에 먼치킨이라는 의식이 남아있던 시절. 무릎팍도사에서 보여준 따뜻하면서도 순수한, 하지만 이 시대의 문제점과 나아가야 할 길을 분명히 알고 지적하는 그의 모습이 방영되자, 그를 잘 몰랐던 20대, 30대 젊은 층에서 폭발적인 환호를 받으며 엄청난 신드롬을 일으켰다. 관심도 없고 맨날 지들끼리 싸움만 하는 정치판 사람들의 말은 안 믿어도 꾸밈없이 소신을 얘기한 먼치킨의 예능방송이 더 큰 파장을 일으켰다. 2011년 MBC에서는 안철수를 메인으로 한 다큐멘터리까지 제작이 되었고, "안철수를 국회로!"라는 말이 여기저기서 나오게 되며 정치계 입문이 급물살을 타게 된다.
뛰어난 실적과 도덕성(?) 등으로 시골 의사 박경철 씨와 함께 "젊은이들이 가장 존경하며 닮고 싶은 리더십의 소유자"라고 알려졌기에 정치권에서 그의 이미지를 사기 위해 국회의원이나 장관직 제의가 끊임없이 들어오지만 그때마다 끊임없이 고사한다고 한다. 개인의 가치관과 판단의 문제이겠지만, 정치란 것은 개인의 실력과 청렴함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믿는 모양. "정치가 아니어도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일들은 많다"
벤처기업을 비롯한 기술 혁신 기업 위주의 정책이 필요하다는 말을 많이 하긴 하지만, 특정 정책에 대해 정치적인 발언을 하진 않았다. 하지만 2008년부터 2011년까지 국가 정보화 전략위원회 위원, 미래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실무 정치에 참가했고 이후 꾸준히 정치 행보를 걸을지 모른다는 예상이 나와, 단박에 화제의 인물이 된다. 안랩의 주식이 정치 테마주로 분류된 시점도 이쯤이라고 한다.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10년김태호 당시 전 경남지사 등과 함께 국무총리 후보로 하마평에 올랐던 적이 있었지만, 실현 가능성이 낮다는 대중들의 판단에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고 묻힌 바 있다. #

2.1.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


2011년 9월 1일 서울시장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할 가능성이 있다는 기사가 뜨면서 정치권, 언론, 대중 모두에게 큰 화제가 되고 있다. 기사가 뜨기 전부터 선거 테마주로 분류되어 있던 안철수연구소의 주식은 포텐이 터져 주 내내 상한가를 기록했고, 안철수 본인에게 있는 주식 가치도 1000억 이상 올랐다. 9월 4일 34650원, 2012년 1월 3일 167,000원이며 약 5배 뛰었다.
안철수 출마설에 여야 모두 우려 반, 기대 반이었다. 자기들 쪽으로 오기만 한다면 굉장한 아군이 될 것이기 때문. 그래서 특정 정당의 기관지처럼 되어버린 작금의 언론들은 조심스럽지만 호의적으로 접근했으나 "한나라당도 바뀌어야 하지만 민주당도 '역사의 물결'의 대표가 아니다"라는 비판적인 발언을 하고 한나라당에 대해서도 "건전한 보수 정당으로 거듭나고 많은 사람의 어려움을 풀어주면 나도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지지 못할 이유가 없다" 발언 이후 '우리 편 아니구나 그럼 까야지'라는 식으로 적대적으로 변한 언론도 있다.
윤여준한나라당 의원이 자신이 안철수 씨와 밀접한 관계라고 주장했으나 안철수는 서울시장 출마에 대해 9월 4일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이 인터뷰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면, '''본인은 현 집권 세력이 역사를 거스르고 있으며, 역사의 물결을 거스르는 결정을 내리진 않을 것이라고 하며, 이를 위하여 자신이 출마할 경우 야권 단일화에 참여하는 것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출마를 머뭇거리게 하는 이유로는
  • 첫 번째로는, 자신이 박원순 변호사를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3] 하고 있기 때문에 그에게 양보해야 할지에 대해서,
  • 두 번째로는, 자신이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서울대 대학원 원장직을 그만두게 되면[4] 출처 서울대와의 신의를 깨는 행동이 되는데 이렇게 신의를 깨면서까지 출마해야 할지,
  • 세 번째로는 자신이 정치를 한다면 10년 정도는 꾸준히 해야 할 텐데 자신이 그럴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고 밝혔다.
전체적인 인터뷰의 내용 상당수가 윤여준 전 의원의 인터뷰와 상당한 차이가 있다.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출마 의지가 상당히 커서 출마하겠다고 발표를 했지만 나흘 만에 다시 못하겠다고 했다더라. 이유는 아버지가 결사 반대를 하신다고. 어쩔 수 없이 사퇴를 해야 하는데 그냥 하면 장난하냐는 소리와 시민의 비난이 오니 박원순 변호사에게 양보하고 빠지는 모양새와 명분을 만들라고 조언을 했다고 한다.
결국 서울시장 보궐선거에는 출마하지 않기로 발표하면서, 사실상 희망제작소 상임이사 '''박원순 변호사에게 양보(?)했다'''. 이를 단일화라 부르는 언론이 있는데, 일반적인 단일화는 선거에 출마한 후보 둘 이상이 경선 등의 방법으로 나머지 후보가 모두 사퇴하고 어느 한 후보에 대한 지지를 하기로 한 경우인데, 안철수 원장은 애초에 출마를 하지도 않았다가(고민은 했다지만) 나중에 박원순 변호사에 대한 지지를 선언한 것일 뿐이므로, 엄밀하게 말해서 단일화한 건 아니다.
그러나 안 원장이 서울시장 출마를 포기한 9월 6일 오후 뉴시스가 긴급하게 실시한 대선 여론조사에서 안철수 원장이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를 누르는(42.4% vs 40.5%) 대 이변이 일어났다. 비록 오차범위 내에서의 근소한 우세지만 그간 박근혜 대세론이라는 독주체제에 제동을 걸 만한 야권 인사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점에서 놀라운 결과로 봐야하며 차기 총선과 대선에 좋든 싫든 영향을 줄 인물이 되어버렸다. 그야말로 '''안풍(安風).'''
이후엔 박원순 후보의 선거에 크게 지원을 하진 않았고 선거 나흘 전인 22일까진 학교 일에 전념한다며 두문불출하고 있다는 기사가 났지만, 하루 뒤인 23일엔 박원순 후보의 선거를 지원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기사에 따르면 이미 21일에 단독 회동을 하고 30여 분간 선거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그리고 23일 저녁, 안 원장은 박 후보 측에 전화를 하여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지 내일까지 생각해 다시 연락을 주겠다는 말을 남겼다고 박 후보 측의 측근이 밝혔다. 그야말로 초박빙이던 상황이기 때문에 안철수 원장의 구원 등판이 서울시장 선거의 판도에 큰 영향을 줄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인 상황. 그리고 24일 오후 1시 박원순 선거사무소를 방문하고 선거참여를 독려하는 편지를 전달하면서 또 한번 선거운동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얻었다. 결국 결과는 박원순 후보의 압승. 안 원장의 영향력이 다시 한번 입증되었다는 평가다.

2.2. 정치 보복 논란


시장 선거 이후인 2011년 10월 25일, 서울대 융합과학기술 대학원장은 유지하고 차세대 융합기술 연구원장직을 사임했다. 사임의 이유를 놓고 설왕설래가 나오고 있지만 대체적으로는 자신으로 인해 차세대융합기술연구원에 피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라는 분석이다. 사실 서울대는 경기도와 함께 차세대융합기술연구원 관련 사업을 추진 중이었는데 안 교수의 정치행보에 경기도 의회 한나라당 의원들은 교수직을 내놓고 정치하라고 성명을 발표했다. 그리고 안 교수가 원장직을 사임하자 경기도 의회 한나라당 의원들이 계속되는 문제의 발언을 내놓아 더더욱 문제가 커지고 있다.
새누리당 소속인 경기도 지사와 경기도 의회 한나라당 의원들이 차세대융합기술연구원에 대한 예산지원삭감 압박을 가했고, 안 교수의 원장직 사퇴후 내놓은 논평에서 "상식적으로 당연한 사임이다"라고 한게 문제가 되었다. 거기에 '''안 교수의 정치행보를 놓고 서울대 총장이 안 교수를 호출해 지적'''을 했다는 정황 등도 흘러나와서 안 교수에 대해 무자비한 정치보복이 가해지고 있다는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상황이 되고 있다. 안 교수도 선거가 끝난뒤 27일에 '''"자신이 가진 생각과 다른 세상 모든 사람들을 적으로 돌리는, 그런 것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발언한 뒤 서울대 총장과 면담하고 다음날 원장직을 내놓아서 이런 상황에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성추행 발언으로 한나라당에서 쫓겨나고 무소속으로 활동하던 18대 국회의원 '''강용석'''은 카이스트에 안철수 교수와 그의 아내에 대한 카이스트 임용 과정과 세부 내용이 포함된 자료 요청을 7차례나 했다고 한다. 그러나 카이스트에서는 목적이 맞지 않는다고 거절. 이외에도 안철수 교수가 직원들에게 주식을 나눠준 것에 대해 '겨우 1.5% 나눠주고 생색낸다', '출근도 안 하는 주제에 배당금만 챙긴다', '주식을 팔아 미국에 주택 구입을 했다'라는 식의 발언까지 한 것으로 알려졌다. 안철수 공격의 선봉장은 강용석.
안철수 원장에 대한 압박뿐만 아니라 안철수 연구소에 가해지는 압박도 상당하다. 정부 측에서도 정부 산하기관과 금융기관들에 최근 5년간의 바이러스 백신 프로그램 사용기간, 구입 경로, 계약방식을 조사하고 결과제출을 요구하고 이에 프로그램 공급을 담당하던 중간 판매상들이 불안감을 느끼고 제품 구매를 꺼리게 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안 연구소 측에서는 엄청난 압박감을 느끼고 있다고 한다.
그 밖에 지식경제부 산하 산업기술평가관리원(산기평)으로부터 정부 지원과제 연구 성과에 대한 특별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 안연구소가 주도하는 컨소시엄은 2010년부터 3년간 지식경제부의 지원을 받는 '모바일 악성코드 탐지 및 방어 기술 솔루션 개발' 프로젝트를 맡았다. 통상 이런 지원사업은 연 1회 '연차 평가'를 하는데,1년차 사업에 대한 지난 9월 연차평가에서 합격점인 '계속 수행' 평가를 받았음에도 불과 2달만에 재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다. 재평가를 요구한 것도 '''강용석'''이 주도했고 평가위원 7명중 '''강용석''' 의원 추천 인사 2명이 포함됐다고 알려져 있고 안 연구소에 대한 현장 실사 때도 '''강용석'''의 보좌관들이 동행했다. 그러면서 예산도 깎아주는 건 보너스.
2011년 11월 10일 정영모에게 공금횡령으로 고발당했다. 아름다운 재단의 박원순 서울시장을 포함한 주요 이사진들에 대한 고발인데 안철수 교수 역시 이사로 참여중이므로 함께 고발당한 것이다.
또한 2012년 자유청년연합 대표 장기정에게 국보법 위반으로 고발당했다. 안철수연구소(안랩)가 2000년 4월 정부의 승인 없이 무단으로 북한에 백신 프로그램을 제공했다는 것. 해명

2.3. 재산 사회 환원


2011년 11월 14일 자신이 보유한 안철수 연구소 보유 주식 절반 (약 1500억 가치)을 사회에 환원하기로 했다고 안철수 연구소 임직원들에게 전자우편을 통해서 밝혔다. 전문 확인은 여기서. 이 재산 환원을 놓고 설왕설래가 일고 있는데 안철수 본인이 부인하더라도, 이명박 대통령이 자신의 전 재산을 사회 환원하여 설립된 청계재단과 비교[5]될 수밖에 없어보인다. 참고로 청계재단은 이 대통령이 자신의 사재 395억 원을 출연하여 설립된 재단으로, 안철수 교수가 환원하겠다는 재산은 청계재단 출연금의 약 5배가 더 많은 수치이다. 물론 안철수 교수의 경우는 지금도 왕성한 IT회사의 대주주이니 당연히 더 많긴 하겠지만.
청계재단은 이사진 구성부터 재단에서 내놓은 장학금 규모에 대해서도 말이 많은 만큼 안철수 교수가 어떤 방법으로 환원하는가에 따라 청계재단과 더더욱 비교가 될 가능성이 커보인다. 청계재단을 만들면서 자신의 사위를 이사장으로, 자신의 인맥들은 이사로, 그리고 장학금으로 내놓는 금액이 재단을 안만들었을때에 발생하는 소득세 부과액과 정확히 일치. 기부가 아니라 절세일 뿐이며 또한 이 방법은 빌딩을 여러 채 소유한 부자들이 잘 써먹는 그들 사이에서는 널리 퍼져 있는 절세기법이라고 한다.
이를 놓고 현 정권에서 가해지는 정치 보복에 대한 대응이라는 관측이 있는가 하면 정치 참여를 위한 사전 준비과정이라는 관측도 있지만, 아직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다. 그리고 11월 15일 박원순 시장과 조우하기로 하여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한편 기자들은 역시나 집에 가 깽판 놓는 중.
이후 2011년 12월 1일 기자회견에서 출마 안 한다고 이것들아 포 발사. 관련 일문일답도 일관되어 있다. 당연히 기자들과 많은 이들은 대선으로 고고할 거라는 얘기. 2015년부터는 '''동그라미 재단'''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

2.4.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투표 독려


제19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다시 정치 관련 행보가 늘어나고 있다. 서울 도봉 갑의 인재근 민주통합당 후보, 경기 과천ㆍ의왕의 송호창 민주통합당 후보에 대한 지지를 공식적으로 선언한 상태이다.
2012년 4월 9일 유튜브를 통해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투표독려 동영상을 게시했다. 안철수 교수는 투표율이 70%가 넘으면 율동과 함께 노래를 하겠노라고 공약을 걸었다. 또한 4월 9일부터 공개되는 민주통합당의 선거광고에 안철수 교수가 박원순 서울시장지지선언 동영상장면이 포함된다고 하는데 이에 대해 별 다른 태클을 걸지 않아 암묵적 동의를 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그리고 70%가 안 넘어 이런 공약은 실현되지 않았다.하지만 총선에서 예상을 뒤엎고 새누리당이 과반수를 차지하고, 민주통합당이 예상에 못미치는 의석수를 얻으면서 안철수 대안론이 급 부상하고 있는 상황이다.

3. 제18대 대통령 선거


안철수 대안론이 힘을 얻어가자 <안철수의 생각>을 출간한다, 저서에서 그는 자신의 지지율이 자신을 향한 지지율이 아니라 기존 정치에 대한 실망감에 막연하게 거는 기대라고 생각한다면서, 자신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밝히고 자신의 생각을 지지해주는 사람이 많으면,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나서겠다고. 하지만 직접적으로 '나서겠다'고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위에 적힌 것이 전부. 그러니까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다는 말이 전부다. "시민들의 열망을 무시할 수도 없지만 이를 온전히 정치하라는 뜻으로 착각하는 것도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저를 지지하시는 분들의 뜻을 정확히 파악해야 진로를 결정할 수 있다, 제가 감당할 능력이 있는지 냉정하게 판단하는 게 중요하다" 라고 했으니, 대선 출마 의지를 밝혔다고 볼수 있지만...
홍사덕이 비웃은 안철수의 생각은 일단 50만권 이상 판매된 것으로 집계된다. 52쇄까지 인쇄됐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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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제18대 대통령 선거 출마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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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회견장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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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선 출마 기자회견 동영상. 연합뉴스.
2012년 9월 19일 오후 3시 기자회견에서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슬로건은 "국민이 선택하는 새로운 변화가 시작됩니다"기자회견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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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도 국회도 초미의 관심으로 지켜보았다. 참고로 국회는 본회의에 참석한 의원들이 5분 자유발언이 진행되는 동안 선언이 되었다.
기자들과의 질답이 장난이 아니었는데 안랩 이사회 의장, 서울대학교 융합과학기술대학원 원장직 '''출마 선언 직후로 전격 사임''', '''대통령 취임 시 안랩 나머지 주식 모두 사회환원''', '''불법사찰 발본색원''' 등등. 말 그대로 대파란을 일으켰다.

3.1. 출마 선언 상세 사항


구세군 아트홀에서 "국민보고대회"라는 형식으로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전까지의 모호한 태도와는 달리 여러 국민들과 다양한 인사들을 만난 결과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를 결심했다고 선언했으며 대선에서 낙선하더라도 정치인으로 남을 것이라고 밝혀 권력 의지를 확실히 드러냈다는 평이다. 다만 문재인 후보와의 단일화에 대해서는 기성 정치권이 변화와 혁신을 수행하고 국민이 그것을 인정한다면 단일화에 응하겠다는 다소 추상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3.2. 후보직 사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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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보 사퇴 기자회견
기자회견 후 질문받는 안철수

▲ 대선 후보 사퇴 기자회견 동영상. 안철수 의원실.
단일화 협상을 이어가 토론회를 2012년 11월 21일 오후 11시 개최하는 등 단일화를 위한 작업을 이어갔다. 그러나 단일화 방식이 계속 합의되지 않아 1987년 대선 정국이 재현되는거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기도 했다. 이 당시에 일부 시각에서 안철수가 너무 간본다는 비판이 일기도 했다. 정치 출마때부터 하는지 마는지 애매한 입장표현을 지속했는데, 단일화에서도 그 것이 마찬가지로 진행되어 결론을 내지 못했기 때문.
이에 문, 안 양측에 단일화를 하라는 압력이 거세지고 11월 23일 대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지지자들에게 문재인을 지지할 것을 호소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너무나 늦은 후보사퇴였지만 문재인 후보는 물론 민주당은 큰 빚을 지었다고 감사를 표했다. 내부 여론조사에서 안철수가 문재인에 뒤지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린 결정이기도 했다. 이후 문재인 후보와 당시 '광화문대첩'이라고 불렸던 선거유세 등을 같이 하다 2012년 12월 19일 미국으로 출국한다.[6]

4. 제19대 국회 국회의원



4.1. 2013년 노원 병 국회의원 재보선


대선 후보직에서 사퇴한 후 2012년 12월 19일 미국으로 출국했다가 2013년 3월 10일 귀국했다.
귀국 전부터 선거에 출마해, 본격적인 정치 행보를 걸을 것이란 소문이 돌았으며, 귀국 후 2013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 출마 의사를 밝혔다.
출마한 선거구는 서울특별시 노원구 병(丙). 이곳은 원래 당시 진보정의당의 공동대표였던 노회찬 전 의원이 출마해 당선된 지역구로, 노회찬 전 의원이 '삼성 X파일' 사건으로 의원직을 잃자 재보궐선거를 치르게 됐다.
선거는 민주통합당이 후보를 내지 않은 채 새누리당, 통합진보당, 진보정의당, 무소속 2명의 다자 구도로 치뤄졌고 안철수 후보는 총 득표수 42,581표(60.46%)로 당선되었다. 새누리당의 허준영 후보는 23,090표(32.78%)를 차지하는 데 그쳤고, 노회찬 전 의원의 아내인 진보정의당의 김지선 후보는 4,036표(5.73%)를 차지하였다. 선거운동 초반 안 후보는 여론조사(다자구도)에서 1위를 달렸지만, 투표율이 낮은 재보궐 선거이고, 허준영 후보가 의외로 선전(안 후보와 큰 차이가 나지 않는 여론조사도 있었다.)하여 혹시 이러다 낙선하는 것 아니냐 했지만, 막상 투표함을 까보니 다자 구도임에도 60% 이상의 압도적 득표율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의원직을 상실한 노회찬 전 의원은 안철수에게 부산 영도에 출마하라고 했으나 안철수는 노원 병에 출마하고, 진보정의당은 노회찬 후보의 부인 김지선 씨를 공천해 맞붙는다. 이 때문에 안철수는 야권 대권 후보까지 했던 사람이 왜 야권 성향이 강한 노원 병에 출마하느냐는 일부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노회찬에게도 바로 전 18대 대선 야권의 대선 후보이자 당시 차기 대선 후보 1위를 달렸던 안철수에게 리스크가 큰 결정[7]을 하라고 부추긴다 혹은 (억울하게) 의원직을 상실했더라도 지역구 세습이 말이 되냐는[8] 등의 비판이 있었고 안철수 당시 후보 역시 선거 기간 내내 대권을 넘보는 사람이 쉬운 곳에 출마한다고 많은 비아냥을 들었다. 정치적 도의가 없다는 평도 있었다.
노회찬에 따르면 안철수가 노회찬과의 통화 내용을 왜곡하여 언론플레이를 했다. http://shindonga.donga.com/Library/3/06/13/111932/1

4.2. 정치 세력화 노력


국회에 입성하고 나서는 새정치를 표방한 중도적 성향의 신당 창당에 공을 들였으나, 그의 기대와 달리 현역 정치 세력의 반응은 미지근하였고 스스로도 힘에 부쳤는지 민주당과의 합당을 통해 제3지대에 새정치민주연합을 창당한다.

홈페이지. 안철수 의원의 싱크 탱크로 분류된다.

4.3.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민주당김한길 대표와 '전격적으로 제3지대 신당 창당'을 선언하여 3월 26일 새정치민주연합을 창당하고 공동대표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안철수 의원이 민주당 김한길 대표와 철야 회담을 하는 동안 같은 시간 측근이었던 김성식 전 의원은 방송 토론 프로그램에 나가 "민주당과의 합당은 절대 없다"는 뜻을 분명히 말했는데 안철수 의원이 덜컥 민주당과 함께 신당을 만들겠다는 발표를 해버려 난감해졌다. 이 때문에 안철수 의원과 함께 새로운 정치 세력을 만들려고 했던 사람들이 대부분 떠나가 버렸다는 에피소드가 최측근이었던 금태섭 변호사를 통해 공개되었다. 당시 새정치연합 쪽과 민주당 쪽의 의사결정 과정이 얼마나 비밀주의에 빠져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
창당한 지 3개월도 안 되어서, 제6회 지방선거2014년 7.30 재보선을 당대표로서 진두지휘했다. 그러나 2014년 7월 재보선에서 참패(새누리당 11석 : 새정치민주연합 4석)했으며, 이후 7월 31일 대표직을 자진 사퇴하였다. 이 재보선의 패배로 인하여 안철수의 차기 대권 주자로서의 동력이 많이 떨어지게 되었다.[9]
안철수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세월호 문제(세월호 특별법 등)를 매듭짓지 못한게 가장 아쉽고, 큰 선거(제 6회 지방선거)를 앞둬 자신이 생각한 정치, 당 개혁행보를 뒤로 미룬 것을 후회한다고 하였다. 이후 자신의 이름을 내건 안철수의 '공정성장론[10]'등의 정책개발에 몰두한다.

4.3.1. 6.4 지방선거


세월호 참사 정국에서 치러졌던 6.4 지방선거에서 김한길 & 안철수 공동대표는 광주시장 자리에 안철수의 사람이었던 윤장현 후보를 전략공천했다. 안철수 공동대표의 최측근이었다가 사실상 결별한 금태섭 전 새정련 대변인이 김어준의 파파이스에서 회고한 바에 따르면, 광주시장 전략공천에 대해 말이 돌긴 돌았지만 지도부에서 끝까지 별 말이 없어 후보들은 경선으로 최종 선출할 줄 알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막바지에 갑작스럽게''' 윤장현 후보를 전략공천한다고 발표해 일찍부터 준비 중이었던 강운태 후보와 이용섭 후보가 이 결정에 크게 반발해 새정치민주연합을 탈당해 버린 것이라고 한다. 이로 인해 광주 민심도 극도로 악화돼 명색이 호남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제1야당 대표들이 민주화 세력의 심장인 광주를 방문하는데 경찰의 신변 보호를 요청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윤장현 후보는 이런 반발 속에서도 당선은 되었으나 이건 어디까지나 안철수 공동대표가 전략공천한 윤장현 후보가 광주에서 낙선한다면 안철수 대표의 정치 생명은 치명상을 입게 되므로 안철수를 버리면 안된다는 광주 민심이 반영됐다는 해석이 있다.[11] 게다가 도의원 등 기초의원을 뽑는 선거에서는 새정연의 근거지인 호남에서 무소속 후보가 대거 당선되는 사태까지 벌어졌으며 총 226명의 기초단체장을 뽑는 선거에서는 새누리당 후보가 117명, 새정련 후보가 80명(나머지는 무소속 당선)이 당선되었다. 기초 단체장 선거에서 12석을 잃었으나 광역자치단체장 선거에서 두 군데를 가져왔고, 교육감 선거에서 진보 진영 후보들을 대거 당선시키는 등 전반적으로 무승부였다는 게 일반적인 평이다. 살아남은 김한길 & 안철수 공동대표 체제는 다음 달에 치러질 7.30 재보선에서 재기의 기회를 노릴 수 있게 됐다.

4.3.2. 7.30 재보선


7.30 재보선 당시 세월호 특별법 정국 때문에 온 사회가 시끌시끌했다. 뿐만 아니라 박근혜정부의 잇다른 국무총리 후보 낙마와 세월호 참사의 주범 중의 한 명인 유병언 세모그룹 회장 검거 실패 등 박근혜정부와 새누리당에게 불리한 이슈가 워낙 많아 새누리당 또한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했는데 김한길 & 안철수 공동대표의 처참한 공천 실패와 전략 부재로 인해 7.30 재보선 항목에 쓰여있듯,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재보궐선거에서 역사상 최악의 참패'를 맛보게 된다. 총 15명의 국회의원을 뽑기로 되어 있었던 이 선거에서 '11:4'로 완패한 것이다. 이 4명 중 3명은 호남에서 당선된 후보들이었고, 박광온 후보를 제외하면 비호남 지역에 출마한 후보들이 다 떨어졌다. 이 후보들 중에는 '김두관, 손학규'라는 대선 후보급 거물들도 있었는데 모두 새누리당의 정치 신인들에게 패하는 굴욕을 맛봤고, 이 때문에 손학규 전 고문은 정계 은퇴를 선언해야 했다.
근데 가장 뼈아픈 패배는 정작 호남에서 일어났다. 새정련 최강세 지역인 호남의 전라남도 순천 곡성에서는 역사상 최초로 새누리당 후보인 이정현 전 청와대 홍보수석이 당선되는 대이변이 일어났다. 사실 이건 비리 전력이 있었던 친노 계열 서갑원 후보에 대한 지역 여론의 반감이 큰 탓도 있었지만 새누리당이 경선에서 뽑혔던 한상률 전 국세청장을 비리 전력 때문에 공천 취소한 것을 감안하면 지도부의 책임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게다가 이정현 의원은 청와대 홍보수석을 지내기도 했던 친박계 핵심 인물이라 더욱 충격이 컸다.[12]
광주 광산 을에 전략공천을 받아 출마한 권은희 전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은 60%가 넘는 득표율로 당선되긴 했다. 하지만 광산을 지역 투표율이 고작 20%대(...)에 불과했던 것을 감안하면, 말 그대로 ''''마음에 안 든다만 새정련 후보라니까 어쩔 수 없이 뽑아줬다''''는 여론이 고스란히 드러나 당선되었어도 기뻐할 수 없는 처지가 됐다. 정확하게는 새정연 후보라서가 아니라 '''새누리당 후보가 아니라서''' 투표했다고 보는 게 옳을 듯. 그리고 원래 이 지역은 지금 국민회의를 창당한 천정배 전 법무부 장관이 출마를 준비하던 곳이었다. 천정배 의원은 이듬해인 2015년 4.29 재보선에 광주 서구을 후보로 출마하려고 했다가 '경선을 거쳐 후보로 나서라'는 문재인 지도부의 방침에 반발하고 탈당해 문재인 당시 대표가 전폭적으로 지원한 새정연 후보를 20%가 넘는 격차로 누르고 당선된 후 국민회의를 창당해 2016년 2월, 김한길 & 안철수 두 공동대표가 당을 떠나 새로이 창당한 국민의당과 당을 합쳤다.
최대 격전지로 꼽혔던 서울 동작을에서는 원래 광주 출마를 결심하고 광주로 이사까지 갔던 기동민 전 서울시 정무부시장을 급작스럽게 서울 동작을로 전략공천했다. 가타부타 말도 없이 결정된 전략공천 때문에 10년 넘게 동작을 지역에서 살면서 국회의원 출마를 준비해왔던 허동준 새정치민주연합 동작을 지역위원장이 극렬히 반발하였는데, 더욱이 이 두 사람은 김근태 열린우리당 고문을 보좌해왔던 23년 막역지우이기도 했다. 허동준 위원장은 기동민 후보가 서울 동작을 전략공천을 받아들이자 기자회견장에 난입해 난동을 부리는 등 극도의 분노와 억울함을 감추지 않았다. 결국 허동준 위원장이 지도부 결정에 승복해 기동민 후보를 도왔지만 기동민 후보도 정의당 노회찬 후보 지지를 선언하며 후보 단일화를 해버렸다. 결과는 새누리당 나경원 후보가 49.9%의 득표율을 얻어 새정련 - 정의당 단일 후보였던 노회찬 후보(48.7%)와 노동당 김종철 후보를 꺾고 당선돼 정치적 부활을 이루게 됐다.
사실 재보궐선거는 전통적으로 투표율이 낮아, 보수 정당이 이기기 쉬운 선거로 불린다. 게다가 이 7.30 재보궐선거는 여름 휴가 시즌에 치러졌기 때문에 청년층의 적극적인 투표 참여를 기대하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이 선거는 사회적 관심이 뜨거운 편이었고, 유병언 검거 실패와 국무총리 낙마 등등 정부 여당의 잇다른 병크가 있었으며 4.29 재보선 때처럼 야권이 심하게 분열된 곳도 없었다. 김한길 & 안철수 공동대표는 자기들 스스로도 마지노선을 5석으로 잡았지만, 해도 해도 너무한 헛발질과 무능함 때문에 이 마지노선 5석도 얻지 못하고 말았다. 특히 새정련 후보는 무혈 입성할 수 있는 호남 지역 선거구가 4곳이나 있었고, 후보들 중에는 대권 주자급들도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게다가 호남에 '친박계 핵심 인사'가 당선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 때문에 김한길 & 안철수 공동대표는 결국 '사퇴'를 표명할 수밖에 없었으며 공천관리위원장을 맡았던 주승용 사무총장도 자리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원래 김한길 의원은 자신만 물러나고 안철수 의원은 대표직에 남겨두려고 했었지만 안철수 의원이 동반 사퇴를 하면서 무산됐다. 김한길 대표는 기자회견을 열어 대표직 사퇴를 밝혔고, 안철수 의원은 공개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문자메시지로 공동대표직 사퇴 의사를 밝혔다.#

4.4. 2015년의 행보




5. 제20대 국회, 제19대 대통령 선거



5.1. 2016년의 행보




5.2. 2017년의 행보




6. 국민의당에서 바른미래당으로



6.1. 2018년의 행보




6.2. 2019년의 행보




7. 안철수와 문재인, 문재인과 안철수


[image]
이랬던 두 사람이
[image]
이렇게 됐다.
안 의원 탈당 이후의 사진들

''''화성' 재인, '금성' 철수'''[13]


7.1. 개요


'''21세기의 양김.''' 비슷한 듯 다르다.[14]
넓게 보면 노무현 대통령 사망, 좁게 보면 18대 대선으로 대한민국 민주당계의 대표주자로 떠오른 2명의 정치인의 관계에 대해 서술하는 항목.

7.2. 두 사람의 성격 탓?


현직 정치인이며 두 사람 모두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박영선 의원은 자신의 저서인 <누가 지도자인가>에서 안철수 의원은 꼭 필요한 말만 에둘러 표현하는 편으로, '''"대화 중 자신의 생각이 잘못 이해되는 듯 해도 곧바로 지적하지 않는다."'''고 설명했고 문재인 의원은 '''"상대가 반론을 제기하지 않으면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에 동의한 것처럼 결론을 내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설명했다. 이 내용을 신뢰할 수 있다면 '''굵게''' 표현한 내용은 '''서로 상극'''이라고 할 수 있을만하다. 따라서 두사람의 이러한 기본적인 성격차로 인해 나타난 불신 등이 오늘날의 사태를 만들었다는 말도 있다.
물론 반박도 있다. 바로 두 사람 모두 '''현실 정치인'''이라는 것. 정치인이다보니 자신이 대표하는 지지층, 세력이 서로 융화하기 어려워 사태가 이렇게까지 되었다는 반박의견이다.[15]

7.3. 상세


2015년 12월 초, 둘 사이에서 펼쳐지는 끝모를 일종의 핑퐁 게임은 2012년 대선의 '''불완전했던 단일화의 앙금'''을 해소하지 못한 탓에 나온 공산이 크다. 비록 단일화가 불완전했더라도 18대 대선 야권 단일 후보였던 당시 문재인 후보가 승리했으면 '자동으로 안철수 차기 1순위 후보'가 되어서 이 정도로 심각한 분란은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하지만 문재인은 대선에서 패배했고 그 결과로 양측의 앙금이 곪아터지다 못해 이 지경에 이르렀다. 대선이 끝난지 한참 지났음에도
  • 대선 당시 친노 지도부 2선 후퇴
  • 문재인의 안철수 자택 방문 시 문전박대 논란
문재인 측과 지지자 일부는 안철수의 협량함을 비난했으나 안철수 측은 자신이 자택에 없음을 사전에 알렸는데도 불구하고 이미지 메이킹을 위해 그런 행동을 했다고 반박한다.
  • 유세, 선거지원 논란
    • 안철수의 대선 날 미국 출국
      문재인의 지지자(문재인, 민주통합당 공식반응 아님.) 일부는 '안철수가 미국으로 도망쳤다!'는 등 행보에 대한 비판을 제기 했다. 이에 대해 안철수는 자신이 문 후보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서 문후보측에 사전에 통보하고 미국으로 출국했던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사후에 당시 문 후보와 민주통합당측이 고마워했다고 밝혔다. 당시 민주통합당의 박영선 의원은 기존 정치인과 다른 순수함이 드러났나고 말하기도 하였다.
      • 안철수는 당시 문재인이 대통령에 당선될 줄 알았다고 밝혔다. 당시 인터넷의 여론도 마찬가지였으나(특히, 투표율 75%가 넘자 더욱 그랬다.) 현실은...
        물론 인터넷의 주 이용층이 10대~30대이고 40대 이상의 이용자들은 상대적으로 10대~30대 이용자들보다 적은비율을 차지한다. 더불어 정치사회 갤러리일베저장소등 보수적인 성향의 유명한 사이트가 있다 해도 20~30대 젊은 유권자는 중도 내지 진보 성향이 다수를 차지한다는 것이 중론이다. 세대별로 대통령과 정권에 대한 선호도의 차이가 있다.[16]
  • 앞의 내용을 종합한 18대 대선 책임론
일부의 문재인 측과 지지자는 '안철수가 제대로 도와주지 않아서 대선해서 패배했다!'라고 주장하고 그에 대한 반박으로 일부의 안철수 측과 지지자는 '더 높은 지지율에도 대선후보를 양보했음에 불구하고 대선 패배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7.4. 그래서, 결국 진검승부


위의 모든 사항이 합쳐져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 둘의 승부가 벌어졌다. 그리고 이후 사항은 제19대 대통령 선거/지역별 결과제19대 대통령 선거/정당별 결과 내용 참조.

8. 안철수와 유승민, 유승민과 안철수


[image]
↑ 창당 당시.
[image]
↑ 바른미래당의 사실상 삼분할이 확정된 사진.

8.1. 개요


안철수가 문재인과 결별한 후, 2018년부터 개혁보수 계열의 핵심 인물로 떠오른 유승민바른미래당을 통해 연합을 했기에 이 관계도 지금도 주목받고 있다.

8.2. 연합의 계기


2017년 후반부터는 유승민과 연대를 하기 시작하면서 이 두 사람의 관계 또한 주목받기도 한다. 본래 2012년까지 유승민은 대권주자로서는커녕 잠룡으로도 거론이 되지 않았으나,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정부와의 대립, 소신 발언 등으로 사이가 나빠지면서 "개혁 보수"와 비박계의 대표 주자로 떠오른 인물이었다.
2017년 후반 들어 두 사람의 경우 당내외에서 여러모로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다. 국민의당은 19대 대선 때 3위로 패배한 이후 여러 사건사고가 터지면서 지지율이 나빴고, 바른정당은 2차에 걸친 탈당 사태로 당세가 크게 위축되었기 때문. 그러한 관계로 이 두 사람의 연대설 혹은 연대론이 본격적으로 흘러나오게 된다. 애당초 두 당의 스펙트럼이 어느정도 겹치는 편이었던 것도 컸다.

8.3. 연합 정당을 창당했으나...


그러다가 2018년 2월 13일 바른미래당을 창당하면서 동료가 된다. 지금 안철수는 2선으로 후퇴하긴 했으나, 향후 서울시장, 부산시장 등의 광역지자체장 선거에 출마하거나, 당내에서 선대위원장 등 요직을 차지할 것이라는 관측도 제기된다. 심지어 바른미래당 지역위원장들이 안철수 출마 요청 성명을 발표했을 정도. 특히 구 국민의당, 바른정당의 민주계를 형성하는 박주선 공동대표와 정병국 전 대표도 안철수에 호의적이니... 일부에서는 바른미래당이 창당 직후의 지지율이 저조한 것이 안철수라는 이름이 전면적으로 나서지 못했던 것도 있다는 견해가 있다. 다만 바른미래당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사실상 확정되었다 하더라도 너무 일찍 출격한다면 일찍이부터 양념(...) 당하거나 견제당할 수 있으니 최대한 늦추는 것도 방법이라는 견해도 존재한다.
다만 사실상 안철수 전 대표가 출마한다 해도 서울시장에 당선되는 것이 극도로 어려운 상황이라, '''바른미래당 지역위원장들이 안철수 출마 요청을 한 것은 안철수를 보내버리기 위함'''이라는 견해도 있다. 대선 패배와 서울시장 패배는 후폭풍의 정도가 다르며 사실상 서울시장에 출마했다가 낙선하면 안철수 측에서는 강제 정계은퇴가 되어버리기 때문. 오히려 이 해석이 지지를 얻고 있는데 구 바른정당 측에서 안철수의 서울시장 출마를 요청하자 구 국민의당 측에서는 유승민의 경기도지사 출마를 요구하고 나섰기 때문. '같이 죽기 싫으면 그만하자'는 뉘앙스로 읽힌다.
하지만 막상 선거 결과 안철수는 김문수에게 밀려 3위로 낙선하게 되면서 잠시 정계에서 손을 떼게 된다. 이후 호남계와 친안계의 등을 업은 손학규가 바른정당계인 하태경을 꺾고 당 대표가 된 이후로는 한동안 별도의 문제가 없다가...
2019년 재보궐선거에서 바른미래당이 대참패를 하면서 손학규의 사퇴 여론이 친안, 친유 모두에서 불거지게 된다. 그러나 손학규는 여기에 노욕에 가까운 거부 반응을 보이면서 당이 와해되기 시작했다. 이 때 강경보수 계열인 이언주가 탈당했고, 당의 구도는 호남계+손학규계 당권파 vs 친안계+바른정당계의 구도로 바뀌게 된다. 특히 김관영 당시 원내대표의 강제사보임 사건으로 친유계 법사위원인 오신환과 친안계 법사위원인 권은희가 반발할 정도로 당권파와 비당권파의 갈등은 더 심해지게 된다.
이 때 안철수계와 유승민계는 변화와 혁신을 위한 비상행동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손학규 및 당권파의 독재적 행태를 비판하고 사퇴를 요구하였으나, 정작 호남계+당권파가 강경하게 나오면서 더더욱 갈등이 심해지게 되었고, 결국 2020년 1월, 바른미래당 분당으로 이루어지게 되며. 바른정당계가 1차 탈당, 안철수계가 2차 탈당을 하면서 바른미래당은 사실상 사망선고를 받게 된다. 그럴 법도 된게 '''안철수와 유승민이라는, 당내 유력 주자이자 창당 주역 2명을 손학규가 동시에 내친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8.4. 다른 정당 소속이 되다


이후 국민의당새로운보수당미래통합당으로 둘 다 탈당하게 되면서 사실상 갈라졌으나, 정작 바른미래당 내 변혁으로 활동했던 친안철수계친유승민계 20대 의원들이[17] 정기적으로 회동하고 있다고 하여, 향후 만일 국민의힘과 국민의당이 합당하거나 연대를 하게 될 경우 가교 역할을 할 가능성도 있다. 심지어 김수민, 이동섭, 김철근 등 일부 친안계 인사들은 미래통합당 소속으로 지역구 출마를 했기에 더더욱 가능성이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친안계인 김철근 전 대변인이 유승민계 지지자 모임에서 활동하고 있고, 김수민 홍보위원장이 실질적으로 유승민계 + 오세훈, 원희룡 등 소장파 계열 빅텐트 모임 HOW's의 이름과 디자인까지 책임질 정도.

8.5. 안유 동맹 시즌 2?


그리고 2020년 12월, '''안철수가 서울특별시장 출마 선언을 하면서 사실상 재회할 가능성이 높아지게 되었다'''. 국민의힘-국민의당 연대가 논의되는 상황인 데다가 유승민, (부산시장 출마를 선언한) 박형준 등이 "만일 안철수가 서울시장에 출마한다면 그를 중심으로 도와야 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이었기 때문. 특히 국민의힘에 합류한 친안계 인사들이 주로 친유계 인사들과 같이 활동했다는 점을 본다면 적어도 안철수가 서울시장에 출마한다면 큰 역할을 할 가능성도 있다.

9. 루머


  • 가장 유명한 간첩 발언
"요즘 세상에 간첩이 어딨습니까?"라고 발언했다는 것이다. 근데, 출처는 전혀 없다. 심지어 이 '발언'을 비판하는 극우 언론인 뉴데일리조차 간첩의 유무에 치중할 뿐, 발언의 실재 여부는 넘어간다(...). # 이에 대해선 부친인 안영모 원장이 박원순 서울시장에 관해서 "박원순 시장이 빨갱이 같은 인상을 준다는 평이 세간에 나온다."라고 한 것에 대해 "그런 거 아니다. 요즘 세상에 빨갱이가 어디 있느냐"라고 한 것이 와전된 것이 시작인 듯 하다. 단순히 박원순 시장을 옹호하다가 나온 말이 확대 해석된 듯. 안 의원의 변론
  • "내가 민주당을 먹었다"
정치인이라면 당연히 자중해야 할 공당을 사유화한다고 여겨질 수 있는 발언을 한 적도 있다 카더라. 기사# 과거 이 문서에서도 한 동안 있었을 정도.
하지만 기사라고는 뷰스앤뉴스 기사 하나뿐이며 《김어준의 파파이스》에서 증언하는 기자도 '그런 식'으로 얘기하는 걸 '건너 들었다' 정도 이상의 증언은 하지 못하고 있다. 노유진의 정치까페에서는 이 말을 윤여준과 통화에서 했던 말이라고 한다. (위의 기사에서는 원로 정치인이라고 나옴) 심심할 때 마다 이 말을 언급하면서 안철수를 깐다.
  • 2017년 4월 대선 국면에서 박근혜를 사면시켜준다는 루머#가 돌았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국민의 요구가 있을 경우엔 사면 위원회를 구성해 논의를 거친 후 사면의 유무를 가린다는 지극히 원론적인 뜻으로 집권 이후 무조건적인 사면을 해준다는 뜻은 아니다. 어차피 대선에서 낙선했으므로 큰 의미는 없다.

10. 외교적 성향


IT업계에서 강세를 보이는 국가라는 이유로 묘하게 '''친이스라엘''' 행보를 많이 보인다. 보통 한국 정치인들은 팔레스타인이나 중동 국가들과의 관계를 생각하여 이스라엘에서 방한한 정치/경제인들과 회담하는 경우는 있다. 하지만 이스라엘을 “찾아가서” 회담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반면, 안철수는 국민의당 대표인 2017년 10월 이스라엘 수상의 요청을 받고 '''바로''' 이스라엘, 특히 '''서예루살렘'''을 방문하여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수상과 회담하고 텔아비브로 이동하여 텔아비브에서 시행되는 제4차 산업혁명 관련 포럼 참석, 이스라엘 경제인과의 면담 등을 진행하기도 했다. 정치 연설을 할 때에도 경제 정책 관련하여 이스라엘 사례를 상당히 비중 있게 언급하며, 정책 연구에서도 이스라엘 사례를 적극 연구하는 등 한국 정치인 중에서 친이스라엘적인 행보가 많다. 기사1 기사2 기사3 기사4 이스라엘 대사와 회견

11. 위기: 연이은 낙선


안철수는 19대 대선에서 문재인이 큰 격차로 당선된 가운데 홍준표에 선거 막판에 역전당해 3위로 끝났고, 2018 서울시장을 노려 재기를 시도했으나 박원순이 가볍게 3선에 성공한 가운데, 도지삽니다 사건과 극단적인 친박 극우 행보로 인하여 박근혜 옹호층을 제외한 절대 다수의 사람들에게 반감을 사고 있는 김문수에게도 밀려 3위의 초라한 성적을 거두었다.
혹자는 안철수가 20%에 육박하는 나름 콘크리트 지지율이 있고, 3위도 거두지 못하는 수많은 정치인들과 비교해서 그가 앞으로 더 클 수 있는 가능성이 높지 않겠느냐는 주장, 이른바 일희일비하지 말자는 입장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대상이 한창 인지도를 키워나가는 신입 정치인도 아니고, 정치계에 발을 담근 초기부터 모두에게 기대를 받았던 '''먼치킨 안철수 박사'''라는 것. 게다가 '''1위만 당선'''되는 선거의 세계에서 3위는 당선까지의 거리가 너무 멀다.
사실 안철수는 인지도적인 면에서 홍준표 김문수는 두말할 것도 없고, 문재인 박원순보다도 우위였던 정치인이었고, 국민들에게 존경을 받는 유리한 상황에서 정치를 시작했다. 초기에 안철수 신드롬이라는 말이 있었을 만큼 다른 사람들보다 출발이 좋았던 안철수에게 있어 대선 3위, 지선 3위라는 성적은 매우 초라한 결과이다. 게다가 과거를 보더라도 한때 이름 꽤나 날린 노련한 정치인들인 김종필, 이회창, 정동영 등도 만년 2인자에 머무르며 대통령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조용히 떠났는데, 안철수는 그보다도 못한 3위만 연속적으로 거두고 있으니 앞으로 그의 정치적 입지를 다져나가는 데에도 크게 불리할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2018년의 안철수는 콩라인보다도 아래인 셈. 이건 심각한것이 인지도가 있어도 3위라는건 인지도도차 없었으면 어느정도인지도 알 수 없을 정도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세부적으로 분석해보면 어느 세대, 어느 지역에서도 최대 2위만 거둘 뿐 1위를 하지 못한다는 게 문제다. 19대 대선에서도 21.4%라는 절대적인 수치로만 보면 상당한 득표율을 올렸는데도 광역자치단체 단위는 물론이고 시군구 단위에서도 단 한 곳에서도 1위를 하지 못했고 연령별 출구조사에서도 전 세대에 걸쳐 20% 내외의 고른 득표율을 보여주긴 했으나 어느 세대에서도 1위를 하지 못했다.
안철수는 고른 득표율로 일부 지역 및 세대에서는 2위를 기록하기는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어느 지역이나 세대에서도 1위를 할 만한 확고한 지지를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영남 농촌 및 부촌 지역, 60대 이상 세대에서라도 확고한 지지를 받으며 1위를 기록한 홍준표, 김문수 등에게 밀리며 3위를 기록하는 결과가 나온다는 것이다. 안철수가 양당 정치를 불신하는 20% 정도의 정치 불신층의 지지는 확보하고 있지만 그들 이외의 지지까지 끌어내는 확장성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지역별로 보자면 부산 출신임에도 대학 입학 이후에는 줄곧 서울에서 활동해 온 데다가 정치 입문 이후 호남계와 손잡으며 부울경, 영남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이 너무 약하고 거기다 호남계와도 갈등을 빚고 갈라서면서 그나마 가능성이 있었던 호남에서도 이제는 이전과 같은 지지를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노원구를 지역구로 하기도 했고 서울시장 후보에 출마하는 등 정치적 활동 무대인 수도권의 경우 19대 대선에서 22-23% 정도의 득표율에 그치고 7회 지선에서는 그나마 19.6%로 떨어져 3위로 떨어지는 등 이곳에서조차 경쟁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세대별로는 대선과 지선에서 공통적으로 가장 높은 지지를 보낸게 50대 세대인데 중도성향이 강하기 때문에 안철수에게 기대를 걸었다고 볼 수 있으나 이 세대에서도 홍준표와 김문수에게 근소하게 밀린 3위에 그쳤다. 한편 자유한국당을 불신하면서도 30-40대만큼 더불어민주당 지지세가 강하지 않아 무당층이 많은 20대의 경우도 가능성이 있었지만 대선 기준으로 전 세대 중 가장 낮은 득표율에 그쳤다. 이는 토론회에서 비친 안철수의 여러 모습들이 후보의 개인적 이미지를 중요시하는 이들에게 부정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나머지 30-40대와 60대 이상의 경우 각각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의 지지 세대들이기 때문에 일부 정치불신층을 제외하면 안철수 쪽으로 이동할 가능성은 더욱 낮다. 결국 안철수는 현재로서는 어느 지역, 세대에서도 1위를 할 만한 여건이 못 되는 셈이다.
2019년에는 총선을 앞두고 바른미래당의 내홍이 심해지면서, 한동안 조용했던 안철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12. 정계복귀


2020년을 맞이하면서, SNS를 통해 정계복귀를 선언하였다. #1 #2 1월 29일 바른미래당탈당하였다.

12.1. 국민의당(2020년) 대표


2020년 2월 25일 자신이 창당한 국민의당(2020년)의 대표 자리에 취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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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3월 1일부터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가 대유행 중인 대구광역시계명대학교 대구동산병원을 찾아가 선별진료소에서 의심 환자를 진료하는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기사 부인인 김미경 서울대학교 교수도 같이 참가하였다. 기사 안철수는 당분간 자원봉사 형식으로 대구광역시에서 의료 활동을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 때문에 안철수의 개인 정치 일정은 모두 취소하였다. 링크
안철수에 대해 일부 인사들이 의사 면허를 제대로 보유하고 있는 것이 맞냐, 의사 면허 갱신은 제대로 했느냐 하면서 의혹을 제기하였다. 기사 그러나 대한의사협회에서 안철수, 김미경 부부는 대한의사협회의사 관련 교육 프로그램을 매년 30평점 이상 이수하는 모범 의사라며, 의사 면허에 문제가 없다고 발표하였다. 기사
의료봉사를 마치고 돌아간 후에는 규정에 따라 아내와 2주간 자가격리를 실시했고 바이러스 검사 역시 음성으로 나왔다.
4월 27일 아내와 다시 무기한 의료봉사를 위해 대구로 내려갔다.
7월 9일 박원순 서울특별시장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면서 벌어질 2021년 재보궐선거에 서울시장 야권 주자로 유력하게 꼽히고 있다. 안 대표 입장에서도 지난 지선에서 서울시장에 출마했었고 서울시장이라는 자리가 대한민국 선출직 No.2인만큼 제20대 대통령 선거 출마 대신에 이번 보궐선거를 선택할 수도 있다.
7월 23일, 내년 4월 열리는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야권 단일후보로 나설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본 적도 없고 앞으로 생각할 계획도 없다”고 밝혔다.기사 다만 친안계 최측근인 권은희 의원이 “안철수 서울시장 출마, 진지하게 생각 중“이라고 밝히며 여전히 서울시장 출마를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민의힘 출범 이후 주호영 원내대표의 러브콜을 받고 있지만 김종인 비대위원장은 부정적인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종인 비대위원장은 더불어민주당 탈당 이후 국민의당에 합류한 바 있는데, 당시 안철수가 보여준 정치적 역량을 보고 부정적인 입장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2020년 9월 24일 한 포럼에선 "국민의힘이 국민의당과 통합을 한다고 해서 무엇을 달성할 수 있겠느냐. 별로 큰 효과가 없을 것" 이라고 선을 그었다. #
2020년 12월 20일 202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 출마를 선언하였다. 범야권 단일경선을 치르며 국민의힘과 국민의당은 사실상 범야권 통합플랫폼 형태로 갈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후의 행보는 안철수/2021년 참조.


[1] 미래통합당은 당시 극우와 손절하지 못한 행보로 실망감이 있었고, 그렇다고 민주당은 종합부동산세 문제 때문에 지지하길 꺼려하였다.[2] 정확히는 1980년대 후반~1990년생이다. 이들은 알다시피 정치혐오 무당층이 가장 많은 세대다.[3] 2003년 박원순 변호사 주도의 시민단체 '아름다운 가게' 참여로 처음 만난 뒤 지금까지 8년 동안 적극적으로 활동에 참가하고 있다.[4] '이 때문에 이후 박원순 변호사가 단일 후보가 된다고 하더라도 공무원 신분이라 지원 유세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정당법 22조에서는 대학총장과 교수에 대해서는 정치 활동 금지의 예외 대상으로 정해놨다. 따라서 정당 가입과 선거 운동은 할 수 있다.[5] 물론 395억 원도 만만치 않게 큰 돈이다.[6] 이 때문에 안철수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안철수는 스스로 문재인 후보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미국으로 출국했다고 밝혔고 문재인 후보도 이를 감사하게 생각했다고 하였다. 사실 당시 안철수는 문재인 후보가 낙선할거라 예측하지 못했다고 한다.기사참조[7] 최근 민주 계열 정당의 약진이 돋보인다고는 하지만, 부산은 3당 합당 이후 명백한 야권의 사지이다. 특히 영도구는 단독 선거구가 된 1988년 이래 단 한 차례도 민주계 정당들에게 의석을 내준 적이 없었다. 더군다나 당시 상대 후보는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였다.[8] 심지어 진보정의당 내에서도 이런 비판이 있었다.[9] 그래도 지방선거의 경우 안 전 대표 덕분에 선방할 수 있었다는 평가가 당 내부에 많다. 다만 일각에서는 야권에 유리한 세월호 정국에서 좋게봐도 무승부정도의 성과밖에 못 냈다고 비판한다.[10] 야권에서 거론되는 3대 성장론 중 하나이기도 하다. 나머지 2가지는 문재인의 소득주도성장론, 박원순의 복지성장론[11] 이후 문재인 지도부 때 치뤄진 2015년 상반기 재보궐 광주 서구 을 선거구에서 반친노, 반문 정서로 인해 새정연 후보는 30% 득표에도 미달하며 참패했다.[12] 다만, 이정현 의원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정현 의원이 해당 지역의 지역 일꾼으로서 여론이 좋았던 건 감안해야 한다. 해당 지역에선 오히려 예상보다 적은 득표수 때문에 화제가 됐다고. 당연한 얘기지만 그렇다고 여론이 안 좋은 서갑원 후보를 공천한 어리석음이 정당화되는 건 절대 아니다. 최소한의 관심만 보였어도 분명히 이길 수 있는 지역이었다. 이러니저러니해도 '호남권'이었으니까.[13] 《화성남자 금성여자》라는 유명한 베스트셀러의 제목을 따서 둘을 비유하는 말.[14] 보수 정권 연장을 막기 위해 똑같이 출마했었지만 양김은 단일화가 무산되었고, 문/안은 단일화를 하였다. 그렇지만 똑같이 보수 정권이 연장된다. 그리고 똑같이 같은 당에 있었다가 양김은 김대중이 대선을 앞두고 탈당하였고 문/안은 안철수가 총선을 앞두고 탈당하였다. 이후 양대 민주정당이 공존하다가 양김은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이 3당합당으로 보수 계열 쪽으로 이동하였고 문/안은 안철수의 국민의당이 바른정당과의 합당을 통해 똑같이 보수 계열 쪽으로 이동했다.[15] 그런데 단순히 지지기반에 따른 불화(?)라기엔 문재인과 김무성의 사적으로 친밀한 관계가 설명이 안 된다. 문 김 관계는 지지기반이 아예 정반대인데.[16] 20~40대까지는 노무현에 대한 선호도가 높거나 같고 50대는 차이가 조금 나기 시작하고, 60대 이상부터는 박정희의 압승 참고 자료 마찬가지로 젊은이들에게 상대적으로 지지율이 낮은 이명박은 퇴임 시 김대중의 기록을 깨고 역대 최고 지지율로 퇴임했다. 심지어 넷상에선 굉장히 험한 말까지 나오는 박근혜 대통령은 30%의 탄탄한 지지율을 자랑했다.[17] 21대 국회 기준으로 전현직 모두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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