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교황 요한나
1. 전설상의 여교황 요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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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론의 창녀로 묘사된 여교황 요한나.[1]
1.1. 개요
'''전설로 전해지는 여자 교황.''' 9세기 중반 레오 4세를 이어 교황이 되었다는 카더라 소문이 퍼졌었다.
현재의 역사학자들은 당연하지만 여러 이유로 이 전설이 전혀 사실이 아니며, 16세기 이후 개신교에서 퍼트린 헛소문도 아니라고 판단한다. 여교황 요안나 전설이 종교개혁이 일어난 16세기 훨씬 이전부터 언급되기 때문이다.
1.2. 여교황 요한나 전설 내용
여교황은 가명으로 '''요한네스 앙글리쿠스(Iohannes Anglicus)'''라 한다. 요한네스(요안네스)는 요한의 라틴어식 표현이고, 요한나(요안나)는 요한의 여성형이다. 앙글리쿠스는 잉글랜드 출신이란 표현, 그러니깐 정체를 숨기고 잉글랜드 출신 남자 요한이라고 행세했다는 것이다. 여자임을 숨기고 성직자의 길을 걸어, 마침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고 한다.
요한나는 남장을 하고 아테네로 갔다. 그곳에서 필적할 만한 사람이 없을 정도로 학문과 다양한 지식에 통달한 뒤, 로마에서 인문학을 가르쳐 많은 학생과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마침내 만장일치로 교황에 당선되었다. 하지만 교황이 된 이후 임신을 했는데 , 교황의 옷으로 배가 불러옴을 숨길 수 있었지만, 라테라노 궁전으로 행차하는 도중 양수를 지리기 시작했다. 요한나의 몸에서 새어나오는 액체를 버티지 못한 속옷과 옷에는 물이 뱄다. 끝내 요한나는 참지 못하고 하체에 힘이 풀려 길에서 아기를 낳아버렸다. 이를 보고 군중들이 성이 나서 달려 들어 요한나와 아기가 맞아 죽었다고 한다.
여교황 요한나(조안)를 다룬 현존하는 문헌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265년 도미니코회의 수사 마르티니가 저술한 <교황과 황제 연대기(Chronicon Pontificum et Impertum)>인데, '''마르티니의 저작은 당시 유럽에서 상당한 인기를 끌며 여러 필사본이 복사되어 유럽에 퍼졌다.'''
물론 마르티니가 여교황 사건을 저술한 최초의 작가는 아니다. 앞서 몇몇이 더 있었다. 마르티니 이전의 대표적인 사람은 교황청 도서관 사서로 일했던 아나스타시우스로, 그의 이야기는 마르티니 책에 나오기도 하고 삭제되기도 했다. 현재 남은 아타나시우스 여교황에 대한 사본은 14세기 버전이다. 하여튼 마르티니와 아타나시우스 출처의 이야기를 서로 섞고 서로 근거로 저들마다 상상으로 보충하는 과정에서 여러 판본들이 발생했다.
판본들의 공통점은 9세기 중반 요한나란 여자가 교황으로 2년 반 동안 있었고, 재임 중 출산했다는 것이다. 판본에 따라 요한나가 낳은 아들이 오스티아 주교가 되었다고도 하고, 여교황이 맞아 죽은 게 아니라 그 자리에서 생매장을 당했다고도 하며, 죽지 않고 수녀원에 들어가 생애를 마감했다고도 하는 등, 여러 변형이 나왔다.
13세기 장 드 메일리(Jean de Mailly)라는 도미니코회 수사가 <보편적인 메츠 이야기(Chronica Universalis Metensis)>라는 책을 썼는데, 마르티니본보다 15년 정도 빠르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여기서는 요한나의 재위기간을 850년이 아니라 1099년부터 1106년으로 기술했다. 그때는 파스칼 2세 재임 기간인데, 파스칼 2세는 1099년부터 18년이나 재임했기에 7년이나 여교황이 들어갈 시간 타이밍도 없다. 또한 여자로 7년은 정체를 숨기기엔 너무 긴 기간이다. 하여튼 여기서는 말을 타고 가다가 말 위에서 출산... 했고, 말 꼬리에 두 발이 묶인 채 2.4 km를 끌려다니며 돌에 맞아 끔살당했으며, 사제들이 여교황의 출산에 경악하여 4일 동안 단식했다는 이야기도 추가되었다.
1.3. 당시 시대 반응
종교개혁 시기 이전 15세기 초반 콘스탄츠 공의회에서도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 보헤미아의 얀 후스가 여교황 요한나 전설을 언급하며 교회를 비판했는데 교회에선 이를 부인하지 않았다. 이미 교회 안에서도 이런 괴담이 많이 퍼져 나갔다는 것.
웨일즈 출신 아담은 1402년부터 1406년까지 4년간 로마에서 보내며 글을 남겼다. 아담이 남긴 글에서 인노첸시오 7세의 대관식 때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라테란 성당까지 이어지는 행렬을 묘사하였다. 그 과정에 마르티니의 버전에 있던 부분을 확인하는데, 교황은 성 클레멘스 성당 길 근처에 아들과 함께 있는 여교황 요안나의 석상을 보고 혐오스럽다는 듯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고 기록.
로마에 있던 독일 대학 공동 설립자 테오도릭은 1414년 보고서에서 그 석상이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그 일에 대해 사실적으로 기록했고, 마르틴 루터가 수도사제 시절 아직 종교개혁을 선언하기 전인 1510년 로마에 출장 왔을 때도 황당하기 짝이 없는 모습의 석상이 교황청에 버젓이 세웠음을 보고 매우 당황했다는 기록이 있다. 더군다나 여교황이 아기와 홀을 들고 교황의 제의까지 입고 있었다는 것이다.
역대 교황들도 사실여부를 떠나 그 장소를 철저하게 꺼렸다고 한다. 인노첸시오 8세로부터 비오 3세 재위 시절까지 스트라스부르 대주교이자 교황청 행사진행 담당자였던 요하네스 부르크하르트는, 인노첸시오 8세가 이전 교황들이 여교황이 출산한 자리라며 돌아가던 곳을 피하지 않고 행렬로 지나갔다며 피렌체 대주교가 자신을 질책했다는 사실을 기록으로 남겼다.
한 가지 재미난 점은 당시 가톨릭교회 내부에서도 어떤 사람들은 여교황을 교회의 수치나 감춰야 할 역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16세기 작가 마리오 에퀴콜라는 "하느님이 남자와 여자가 동등함을 증명하려고, 여자가 교황의 자리까지 오르도록 허락하셨다"고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1601년 교황 클레멘스 8세는 정식으로 "여교황 전설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선언하고, 시에나 성당에 있던 여교황 흉상을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1.4. 진실은?
흥미위주의 음모론자들에겐 아쉽겠지만, 여교황의 실존 여부는 허점이 많다.
첫 번째로 콘스탄티노플의 기록이다. 9세기에는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사이가 매우 험악했다. 9세기 중반 당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폰티우스는 대표적인 로마까인데, 그쪽 기록에 당시 (여교황 재임시라 할) 교황 레오 4세와 베네딕토 3세에 대해서는 "로마교회에 연이어 나온 위대한 사제"라 칭찬하지만, '''여교황에 대한 언급은 없다.'''
2번째로 2백여 년 후 콘스탄틴노플 총대주교 미카엘 케룰라리우스는 교황 레오 9세에게 편지를 받았는데, 교황 레오 9세는 "동방교회에서 여성을 대주교로 임명하고 환관들을 무분별하게 승진시킨다"고 비판하였다. 여교황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뻔히 동방에서 그 근거를 들어 서방을 비난했을 게 뻔한데, 레오 9세의 편지에선 전혀 그런 우려가 없이 비판하였다. 즉 당시엔 여교황 전설 같은 이야기가 없었다는 것이다.
3번째로 레오 4세가 855년 7월 17일 선종했고 기록상으로도 남아있으며, 베네딕토 3세가 즉위한 것은 같은 해 9월 29일이다. 베네딕토 3세가 즉위한 지 얼마 안 될 무렵 황제 로타리우스 1세가 사망했는데, 로마에는 사망 소식이 아직 전해지지 않아서 로마 은화의 한 면엔 로타리우스 1세, 한 면에는 베네딕토 교황이 주조되기도 했다. 따라서 2년 7개월이나 들키지 않고 여교황 요한나가 들어갈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다.
또한 교황이 되려는 사람이 한둘도 아니었고, 게다가 여성의 신체적 특징은 일시적으로는 몰라도 그리 오랫동안 숨길 수도 없으니. 일단 옷을 갈아입는 자리에서 교황을 시중드는 이들이 모를 수가 없고, (직접 여성들을 상대해 온) 추기경들이 죄다 교황이 여자임을 구분하지 못하는 상황이 나오기도 어렵다.
1.5. 왜 이런 전설이 생겼나?
여교황의 전설은 아마도 카롤루스 대제부터 이어지던 교황청의 강력한 후견인이었던 카롤링 왕조가 멸망하면서 교황청의 권위가 약해지기 시작한 데다, 이 당시 교황의 선발 때 교황을 출산에 쓰이는 구멍 뚫린 의자에 앉히는 기괴한 의식[2] 이 있었던 것이 더해지면서 만들어진 것일 거라는 추측이 현재의 대세이며, 추측이야 어쨌든 사실은 아니라는 것으로 1647년 칼뱅파의 역사가 데이비드 브론델에 의해 결론이 났다.
여교황이 아이를 낳았다는 이유로 교황들이 돌아갔다는 길도, 처음에는 큰 행렬이 지나가기엔 좁아서 피했던 것일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나중에야 여교황 전설이 퍼지면서 이를 의식하게 되었을 뿐.
어쨌든 이 전설은 오랫동안 사랑받았(?)고, 16세기 이후 개신교에서 퍼뜨린 게 아니라 중세 중기 이후 로마 시민이든 수도자든 소설을 썼고, 당시 사람들이 재밌어하며 또한 교회를 조롱하며[3] 확대 재생산된 것으로 본다. 특히나 10세기 창부정치 시절 마로치아라는 여성이 교황 세르지오 3세의 첩이 되어 후임들 시대까지 거의 수렴청정 식으로 권력을 누려 '여교황'이란 비판을 들었기 때문에 그런 시점에서 이야기가 만들어지지 않았나 본다.
2. 창작물
사실 여부가 어쨌든 간에 매우 매력적인 소재였던 탓인지 여러 차례 관련 창작물이 나왔다. 2009년에는 유럽 4개국 합작으로 여교황 조안이란 영화가 제작되었다.[4] 또 이 소재에서 모티브를 얻은 화관의 마돈나라는 일본의 순정만화도 있다. 시오노 나나미도 저서 사랑의 풍경에서 후반에 이 소재를 다뤘다.
또한 미국 작가 도나 울포크 크리스가 쓴 소설 <Pope Joan>도 있다. 이 소설은 당시의 종교, 풍습 등에 대한 고증이 치밀하고 이야기 짜임새도 좋은 수작이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한국에서는 예담 출판사에서 같은 해(1999년)에 겨우 몇 달 차이로 <라테란의 전설>과 <여교황 조안>이란 다른 제목으로 2차례 출판되었다. 현재는 양쪽 모두 절판되었다. 관심 있는 이는 헌책방을 알아보자.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에서는 8세기 중후반의 교황 요한 8세를 여교황 요한나로 지목하고 있다. 실제 요한 8세도 의문의 암살로 선종한 인물이기도 하고.
페르소나 5에서 니지마 마코토의 초기 전용 페르소나로 등장한다.[5] 페르소나 역사상 전무후무한 오토바이 형태의 페르소나.[6]
2.1. 11eyes의 등장인물 교황 요한나
우측의 여성. 좌측은 전 툴레의 일원 질투의 소피아 미즐리.
教皇ヨハンナ. 성우는 시노자키 후타바.
모티브는 1번 항목의 여교황 요한나.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마술 조직이자 동시에 반마술 조직인 교황청 금서목록성성의 설립자이자 수장이다. 금서목록성성은 세계를 이단의 위협으로부터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기관으로, 그 내부에서는 전투 집단인 사도와 마도서를 봉인하는 금서 도서관, 이 2개의 부서가 실세로 군림하고 있다.[7] 그 중 사도들은 교황 요한나가 직접 하나하나 임명하고 있으며, 그들의 리더인 14성은 교황 요한나의 직속이다. 또한 금서도서관의 사서 일족들은 마도서의 저주로 인해서 금서 목록 성성의 도움이 없으면 제대로 살아나갈 수 없으니, 실질적으로는 금서 목록 성성에 완전히 목줄이 메여진 상태나 다름없다.
즉 이 둘을 완전히 휘어잡고 있는 요한나는 금서목록성성 내에서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이다. 거기다 금서목록성성은 상명하복이 철저한 경직된 조직이기 때문에, 아무도 그녀의 명령을 거스르거나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금서목록성성 내부에선 그녀를 '어머니 요한나'라고 부르며 절대적으로 복종한다. 그들은 배신자를 죽일 때도, 이단을 처형할 때도 하느님의 이름이 아닌 교황 요한나의 이름을 입에 담는다.
다만 일부 사도들은 마음 속으로는 그녀를 의심하고 있는 듯 하지만 공론화되는 일은 없는 듯하다. 실력만 있으면 적이었더라도 가리지 않고 스카웃하는 금서목록성성의 특성상, 모든 사람이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충성을 하진 않는 것이다.
요한나는 사실 마녀 리제롯테 베르크마이스터처럼 미셸 맥시밀리앙에게 취옥비의 조각을 받은 사람이다.[8] 게다가 알려진 취옥비의 조각 중에서도 제일 커다란 조각인 신명비의 소유자이다. 나이도 엄청 많아서 리제롯테가 800살인데 비해 요한나는 1200살로 무려 400년 정도 더 살았다.[9] 리제롯테는 요한나에 비하면 계집애에 불과하다. 금서목록성성의 설립년도는 기껏해야 800년이 채 안 되니, 사실은 요한나가 사실 나이 수백살 먹을 대로 먹은 이후에야 느지막하게 시작한 사업이다. 여러모로 가장 나쁜 놈의 이미지를 풀풀 풍기는 인물. 게다가 성우도 흑막 역으로 많이 나오는 오리카사 아이 여사다.
마술사들 사이에선 혈창의 요한나라는 이명으로 불린다. 혈창이란 동굴처럼 생긴 지하 창고라는 뜻이다. 마술 조직이면서 다른 마술사들을 종교의 힘을 빌려 탄압하고, 마술적 도구들을 빼앗아서 지하 창고에 봉인해두는 요한나를 좋게 보는 마술사는 거의 없는 듯 하다. 말로는 세상을 지키기 위해서 위험한 마술적 도구들을 봉인해야 한다면서 정작 그것들을 마치 자기 것인 것마냥 부하들에게 하사하는 꼴을 보면, 확실히 평판이 좋을래야 좋을 수가 없을 것이다.
팬디스크에서 어릴 적의 리젯트가 다니던 교회의 수녀인 마리아라는 여자는 사실 바로 이 사람이다. 마리아가 베라드를 만났을 때 중얼거린 "이것도 취옥비의 조각들의 운명 중 하나인가" 라는 투의 말은 요한나가 사건의 흑막이라 한 말이 아니라 실제 뜻은 "어라? 어째서 이런 사람이 이 곳에 있는 걸까? 이것도 취옥비의 조각 때문인가?"라는 순수한 의문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게임 내용에서 추측할 수 있는 이 사람의 정체는 마리아 막달레나이다. 리젯트가 다니던 교회의 수녀인 마리아는 에페소에서 왔다고 하는데, 에페소는 마리아 막달레나가 죽은 장소이다. 요한나의 크로스비전에선 스승이 죽은 후 떠돌아다니다가 죽음을 맞이했는데, 하느님의 의지에 의해 되살아나서 하느님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스승은 이름은 안 나왔지만 예수 그리스도일 것이고, 마리아 막달레나는 에페소에서 죽은 후 원인을 알 수 없게 되살아났는데, 이것이 아마도 죽은 자를 소생시킨 예수의 기적이 자신에게도 일어난 것이라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지금까지 나온 정보대로라면, 요한나의 생각과는 달리 요한나를 살아있게 하는 건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미셸 막시밀리앙의 뜻일 확률이 높다. 단, 여전히 미셸 막시밀리앙과 요한나의 관계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1] 위키백과 출처.[2] 요한나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은, 이것이 고환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3] 중세 당시엔 모든 사람들이 교회에 순명하며 교회에서 절대 권력을 누렸다는 편견이 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건 비슷했다. 평신도들도 세속적으로 집안이 잘 나가는 집안이면 성직자들과 파워 게임을 벌였고, 군대나 강도들이 교회나 수도회를 약탈하거나 사제 폭행이 빈번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종교개혁이니 뭐니 가능했을 리가. 애초에 초기 로마 시대부터 세속적 문제를 둘러싸고 주교끼리 다투면서 분열을 거듭했고, 이게 당시 왕권/정치권과 맞물리면서 교회 내부가 어지러웠던 게 현실이다.[4] '''당연하게도 이 영화는 한국에서는 공식개봉되지 않았다.'''[5] 이번 작의 고유 페르소나들은 픽션에 등장하는 영웅이나 악인, 마도서가 모티브다.[6] 심지어 초각성을 하면 휴머노이드 로봇 형태로 변하기까지 한다.[7] 단, 금서도서관과 사도는 동등한 관계가 아니다. 권력 관계에선 금서 도서관장인 성필의 히에로니무스가 사도 14성보다 더 위쪽이라고 한다.[8] 라 생각되었으나, 사실 미셸은 요한나가 자신의 최고의 작품이라고 했지 취옥비의 조각을 주었다는 말은 안 했다. 즉 취옥비의 조각이 없을 수도 있다.[9] 서기 850년에 살았다는 설을 채용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