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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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조선의 왕족이자 문신. 흥선대원군과 그의 첩실 계성월 사이에서 태어난 서장자(庶長子)로 흥친왕 이재면과 고종의 서형이며 이완용의 양형 이윤용의 처남이다.
2. 생애
1842년(헌종 8년) 8월 1일, 흥선군 사저에서 출생했다. 어린 시절의 행적은 알 수 없다.
무과에 급제하여 이복동생 고종의 즉위 후 훈련원 주부와 훈련원 첨정을 거쳐 오위장과 남양감목관, 그리고 양주 목사와 첨지중추부사가 되는 등 주요 보직들을 맡았고 최종적으로 종2품 참판에까지 이르렀다.
이렇게까지 보면 그냥저냥한 왕족의 삶이었으나...
2.1. 최후
별군직에 있던 1881년(고종 18년) 소위 ''''이재선 추대 대역 음모 사건'에 연루되었다.''' 이 사건은 흥선대원군이 실각한 후 민씨 일파가 실권을 쥐고 개국 정책을 펴자, 이에 불만을 품은 흥선대원군의 측근들인 전승지 · 안기영 · 권정호 등이 민씨 세력을 몰아내고 이재선을 추대하여 흥선대원군을 권좌에 복귀시키려는 음모였다. 이들은 거사 자금 · 군대 동원 · 요인 암살 등 세밀한 계획을 세우고 기회를 기다렸으나, 8월 28일 경기도 광주부 장교 이풍래의 밀고로 모두 체포되었다. 직접적으로 개입은 안했다해도 반란 세력의 택군 대상[1] 이었던 이재선도 심문을 피할 수 없었다. 다만 잡히기 전에 먼저 의금부에 자수를 했다. 그러나 어쨌든 역모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혹독한 고문을 동반한 심문을 받았다.
결국 안기영 · 권정호 · 이두영 등 많은 관련자들이 처형되고, 이재선은 제주도로 귀양갔다. 그러나 양사와 홍문관으로부터 계속 탄핵을 받아[2] 결국 같은 해 사약을 받고 죽었다.
2.2. 사후
1899년(광무 3년) 9월 그의 족보 상 고조할아버지인 사도세자가 장종을 거쳐 장조의황제로 추존받았다. 황제의 4대 후손까지는 황족으로 대우한다는 법에 근거하여 여기에 해당하는 황족들은 저 때 군호를 받았지만[4] 역모로 죽은 이재선은 아무 작위를 받지 못했다. 1907년(광무 11년) 7월에 고종이 그를 사면시켰고 '완은군(完恩君)'으로 추봉했다.
묘는 경기도 양주군에 있었지만 후에 위치가 잊힌... 것으로 알려졌으나 현재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흥선대원군과 그 가족 일원의 묘 윗 자리에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다만, 곡장이 무너지는 등 처참한 모습이라고(...).
3. 가족과 후손
판관을 지낸 신석완의 딸 평산 신씨와 혼인하여 슬하에 2녀를 두었다. 장녀의 이름은 이창화(李昌和, 1867 ~ 1937)이고 차녀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 부인 신씨는 한일합방 이후 1922년까지 살았다.
이창화는 3살 어린 평산 신씨 가문의 시어(侍御) 신형균과 혼인했으며 70세까지 장수했다.#
아들이 없어 실제 혈통 상[5] 7촌 조카인[6] 이관용(李'土+灌'鎔)을 입양했다.
이관용의 생몰년도는 미상이다. 그는 한때 주식에 투자했다가 재산을 말아먹는 등의 행동으로 양어머니 신씨에게 파양 소송까지 당했다. 그러나 법원에서 신씨 손을 들어주지 않아서 가까스로 파양은 면했다. 그 뒤로도 순종에게 생계 구조비를 지급받아 생활하는 등 경제적 감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7] 1926년 순종이 사망한 후 국장 전반에 걸쳐 종친들이 맡는 직책인 종척집사(宗戚執事)로 활동했다. 이후의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자녀는 1남 4녀를 두었다.
4. 매체에서
5. 여담
5.1. 오해
한 때 이 사진들이 흥선대원군의 서장자인 완은군 이재선으로 잘못 알려진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재선의 사진이 아니다.'''
사진의 주인공은 완은군과 족보 상 8촌이자 철종의 생가 누동궁의 사손인 '''청안군 이재순'''이다. 그런데 왜 잘못 알려졌을까.
추정하자면 아마 당시 외국인들이 이재순의 '''순'''을 ''''Sun''''과 ''''Soon''''을 혼동해서 표기했고 이 와중에 ''''Sun''''을 '''순'''이 아닌 ''''선''''으로 잘못 읽어 오해가 빚어진 듯 하다.
하지만 두 번째, 세 번째 사진 아래 설명을 보면 확실하게 ''''Soon''''으로 적혀있다. 그리고 첫 번째 사진 설명문에는 1890년에 촬영했다고 하는데 완은군 이재선은 1881년에 죽었기에 사진을 찍을래야 찍을 수 없다. 그리고 조선에서 조선인이 직접 찍은 첫 번째 사진은 1880년대 중반에 가서야 나타난다.[8] 즉 이재선 생전에는 조선에 사진을 촬영할만한 곳도 그런 기술을 가진 사람도 없었기에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다.
또 하나, 밑에서 첫 번째 사진에 해당 인물에 대한 설명이 'Cousin of King' 으로 적혀있다. 비록 이복형제라 해도 엄연히 아버지가 같은 형제를 'Cousin' 으로 쓰는 것은 말이 안 된다. 'Cousin'은 4촌 뿐 아니라 다른 방계 혈족의 형제 뻘을 이르는 단어로도 쓰이며, 족보 상 고종과 8촌인 청안군 이재순은 이에 해당한다. 그래서 이 사진들 속 사람은 청안군 이재순이 맞다.[9]
즉, 실제 완은군의 남아있는 사진은 '''없다'''.
[1] 擇君. 왕으로 선택 된 대상.[2] 큰아버지 흥인군 이최응 역시 그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3] 작위 수여 당시 고인.[4] 은언군계 : 증(贈)[3] 덕안군 이재덕, 경은군 이재성, 청안군 이재순.
은신군계 : 증(贈) 완림군 이재원, 완순군 이재완, 증(贈) 완영군 이재긍, 완흥군 이재면.
은전군계 : 증(贈) 인양군 이재근, 의양군 이재각, 예양정 이재규.[5] 완은군의 가계는 원래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후손이나 완은군의 할아버지 남연군이 정조의 이복동생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했다.[6] 인평대군파보에 따르면, 이관용은 남연군의 친동생 이휘중의 아들이자 흥선대원군의 생가 사촌동생인 형조판서 이명응의 손자이며 군수를 지낸 이재택의 둘째 아들로 나와있다.[7] 그의 아들도 경제적 감각이 없었다고 한다. [8] 조선에서 처음으로 사진을 찍은 시기는 1871년도이긴 한데, 그 때 찍은 사진은 신미양요 때 미국 해군이 조선군 포로를 촬영한 것이다.[9] 아랫 사진을 보면 'Fat Prince' 라고 적혀있는데 번역하면 '뚱보 공(公)'. 외국인들 사이에서 그의 별명이었다.(...)
은신군계 : 증(贈) 완림군 이재원, 완순군 이재완, 증(贈) 완영군 이재긍, 완흥군 이재면.
은전군계 : 증(贈) 인양군 이재근, 의양군 이재각, 예양정 이재규.[5] 완은군의 가계는 원래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후손이나 완은군의 할아버지 남연군이 정조의 이복동생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했다.[6] 인평대군파보에 따르면, 이관용은 남연군의 친동생 이휘중의 아들이자 흥선대원군의 생가 사촌동생인 형조판서 이명응의 손자이며 군수를 지낸 이재택의 둘째 아들로 나와있다.[7] 그의 아들도 경제적 감각이 없었다고 한다. [8] 조선에서 처음으로 사진을 찍은 시기는 1871년도이긴 한데, 그 때 찍은 사진은 신미양요 때 미국 해군이 조선군 포로를 촬영한 것이다.[9] 아랫 사진을 보면 'Fat Prince' 라고 적혀있는데 번역하면 '뚱보 공(公)'. 외국인들 사이에서 그의 별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