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은군

 


<colcolor=#ffd800> '''대한제국 장조의 현손
완은군 이재선
完恩君 李載先'''
'''군호'''
완은군(完恩君)
'''이름'''
이재선(李載先)
'''호'''
산남(山南)
'''출생'''
1842년 8월 1일
'''사망'''
1881년 10월 28일 (향년 39세)
1. 소개
2. 생애
2.1. 최후
2.2. 사후
3. 가족과 후손
4. 매체에서
5. 여담
5.1. 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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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조선왕족이자 문신. 흥선대원군과 그의 첩실 계성월 사이에서 태어난 서장자(庶長子)로 흥친왕 이재면고종의 서형이며 이완용의 양형 이윤용의 처남이다.

2. 생애


1842년(헌종 8년) 8월 1일, 흥선군 사저에서 출생했다. 어린 시절의 행적은 알 수 없다.
무과에 급제하여 이복동생 고종의 즉위 후 훈련원 주부와 훈련원 첨정을 거쳐 오위장과 남양감목관, 그리고 양주 목사와 첨지중추부사가 되는 등 주요 보직들을 맡았고 최종적으로 종2품 참판에까지 이르렀다.
이렇게까지 보면 그냥저냥한 왕족의 삶이었으나...

2.1. 최후


별군직에 있던 1881년(고종 18년) 소위 ''''이재선 추대 대역 음모 사건'에 연루되었다.''' 이 사건은 흥선대원군이 실각한 후 민씨 일파가 실권을 쥐고 개국 정책을 펴자, 이에 불만을 품은 흥선대원군의 측근들인 전승지 · 안기영 · 권정호 등이 민씨 세력을 몰아내고 이재선을 추대하여 흥선대원군을 권좌에 복귀시키려는 음모였다. 이들은 거사 자금 · 군대 동원 · 요인 암살 등 세밀한 계획을 세우고 기회를 기다렸으나, 8월 28일 경기도 광주부 장교 이풍래의 밀고로 모두 체포되었다. 직접적으로 개입은 안했다해도 반란 세력의 택군 대상[1]이었던 이재선도 심문을 피할 수 없었다. 다만 잡히기 전에 먼저 의금부에 자수를 했다. 그러나 어쨌든 역모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혹독한 고문을 동반한 심문을 받았다.
결국 안기영 · 권정호 · 이두영 등 많은 관련자들이 처형되고, 이재선은 제주도로 귀양갔다. 그러나 양사와 홍문관으로부터 계속 탄핵을 받아[2] 결국 같은 해 사약을 받고 죽었다.

2.2. 사후


1899년(광무 3년) 9월 그의 족보 상 고조할아버지인 사도세자가 장종을 거쳐 장조의황제로 추존받았다. 황제의 4대 후손까지는 황족으로 대우한다는 법에 근거하여 여기에 해당하는 황족들은 저 때 군호를 받았지만[4] 역모로 죽은 이재선은 아무 작위를 받지 못했다. 1907년(광무 11년) 7월에 고종이 그를 사면시켰고 '완은군(完恩君)'으로 추봉했다.
경기도 양주군에 있었지만 후에 위치가 잊힌... 것으로 알려졌으나 현재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흥선대원군과 그 가족 일원의 묘 윗 자리에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다만, 곡장이 무너지는 등 처참한 모습이라고(...).

3. 가족과 후손


판관을 지낸 신석완의 딸 평산 신씨와 혼인하여 슬하에 2녀를 두었다. 장녀의 이름은 이창화(李昌和, 1867 ~ 1937)이고 차녀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 부인 신씨는 한일합방 이후 1922년까지 살았다.
이창화는 3살 어린 평산 신씨 가문의 시어(侍御) 신형균과 혼인했으며 70세까지 장수했다.#
아들이 없어 실제 혈통 상[5] 7촌 조카인[6] 이관용(李'土+灌'鎔)을 입양했다.
이관용의 생몰년도는 미상이다. 그는 한때 주식에 투자했다가 재산을 말아먹는 등의 행동으로 양어머니 신씨에게 파양 소송까지 당했다. 그러나 법원에서 신씨 손을 들어주지 않아서 가까스로 파양은 면했다. 그 뒤로도 순종에게 생계 구조비를 지급받아 생활하는 등 경제적 감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7]1926년 순종이 사망한 후 국장 전반에 걸쳐 종친들이 맡는 직책인 종척집사(宗戚執事)로 활동했다. 이후의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자녀는 1남 4녀를 두었다.

4. 매체에서




5. 여담



5.1. 오해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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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이 사진들이 흥선대원군의 서장자인 완은군 이재선으로 잘못 알려진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재선의 사진이 아니다.'''
사진의 주인공은 완은군과 족보 상 8촌이자 철종의 생가 누동궁의 사손인 '''청안군 이재순'''이다. 그런데 왜 잘못 알려졌을까.
추정하자면 아마 당시 외국인들이 이재순의 '''순'''을 ''''Sun''''과 ''''Soon''''을 혼동해서 표기했고 이 와중에 ''''Sun''''을 '''순'''이 아닌 ''''선''''으로 잘못 읽어 오해가 빚어진 듯 하다.
하지만 두 번째, 세 번째 사진 아래 설명을 보면 확실하게 ''''Soon''''으로 적혀있다. 그리고 첫 번째 사진 설명문에는 1890년에 촬영했다고 하는데 완은군 이재선은 1881년에 죽었기에 사진을 찍을래야 찍을 수 없다. 그리고 조선에서 조선인이 직접 찍은 첫 번째 사진은 1880년대 중반에 가서야 나타난다.[8] 즉 이재선 생전에는 조선에 사진을 촬영할만한 곳도 그런 기술을 가진 사람도 없었기에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다.
또 하나, 밑에서 첫 번째 사진에 해당 인물에 대한 설명이 'Cousin of King' 으로 적혀있다. 비록 이복형제라 해도 엄연히 아버지가 같은 형제를 'Cousin' 으로 쓰는 것은 말이 안 된다. 'Cousin'은 4촌 뿐 아니라 다른 방계 혈족의 형제 뻘을 이르는 단어로도 쓰이며, 족보 상 고종과 8촌인 청안군 이재순은 이에 해당한다. 그래서 이 사진들 속 사람은 청안군 이재순이 맞다.[9]
즉, 실제 완은군의 남아있는 사진은 '''없다'''.


[1] 擇君. 왕으로 선택 된 대상.[2] 큰아버지 흥인군 이최응 역시 그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3] 작위 수여 당시 고인.[4] 은언군계 : 증(贈)[3] 덕안군 이재덕, 경은군 이재성, 청안군 이재순.
은신군계 : 증(贈) 완림군 이재원, 완순군 이재완, 증(贈) 완영군 이재긍, 완흥군 이재면.
은전군계 : 증(贈) 인양군 이재근, 의양군 이재각, 예양정 이재규.
[5] 완은군의 가계는 원래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후손이나 완은군의 할아버지 남연군정조의 이복동생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했다.[6] 인평대군파보에 따르면, 이관용은 남연군의 친동생 이휘중의 아들이자 흥선대원군의 생가 사촌동생인 형조판서 이명응의 손자이며 군수를 지낸 이재택의 둘째 아들로 나와있다.[7] 그의 아들도 경제적 감각이 없었다고 한다. [8] 조선에서 처음으로 사진을 찍은 시기는 1871년도이긴 한데, 그 때 찍은 사진은 신미양요 때 미국 해군이 조선군 포로를 촬영한 것이다.[9] 아랫 사진을 보면 'Fat Prince' 라고 적혀있는데 번역하면 '뚱보 공(公)'. 외국인들 사이에서 그의 별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