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려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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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등려군 (정체: 鄧麗君 / 간체: 邓丽君) / Teresa Teng
'''출생'''
1953년 1월 29일, 중화민국 윈린 현 바오중 향
'''데뷔'''
1965년 1집 “풍양화구“
'''사망'''
1995년 5월 8일, 태국 치앙마이 주 매핑 호텔
'''신체'''
165cm
'''종교'''
가톨릭(세례명 : 데레사)
'''가족관계'''
4남 1녀 중 넷째
1. 개요
2. 이름
3. 인생
3.1. 출생, 그리고 데뷔
3.2. 일본 활동
3.3. 중화권 활동
3.4. 사망
4. 인간관계
5. 기타
6. 추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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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白天听老邓, 晚上听小邓

낮에는 등소평(老邓)을 듣고, 밤에는 등려군(小邓)을 듣는다.[1]

1965년부터 1995년까지 중화권과 일본을 중심으로 활약했던 가수이다. 대만, 홍콩, 일본[2], 중국까지 동아시아의 대다수 국가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렸으며 '아시아의 가희(歌姬)'라 불렸다.
소위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소리'라는 표현에 딱 맞는 청아한 미성과 간드러지는 소프라노 음색으로 유명했다. 원래 중화권 전통가요는 남자든 여자든 맑고 서정적인 가사를 선호한다.
등려군의 한국 내 인지도는 중화권 국가와 일본에 비해 상당히 낮다. 그래도 '야래향(夜來香, 예라이샹)', ''''월량대표아적심'''(月亮代表我的心, 위에량따이뱌오워디[3]신)'[4], '첨밀밀(甜蜜蜜, 톈미미)'[5] 등 그의 노래는 드라마 OST[6] 등으로 쓰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알고 있고 노래는 유명하지만 정작 가수에 대해 아는 사람이 적은 특이한 경우이다. '테레사 텡(Teresa Teng)'과 등려군이 동일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극히 드물다. [7]
그녀가 부른 노래 중에는 원래 다른 가수가 먼저 불렀지만 건전가요에 가까운 노래도 있다.

2. 이름


본명은 덩리윈(鄧麗筠, 등려균)이지만, 어릴 때부터 가족들이 덩리쥔(鄧麗君, 등려군)이라는 애칭으로 불렀고 이 이름을 활동할 때 썼다. 중국어에서 '筠'과 '君'은 원래 발음이 다르지만, 종종 잘못 읽는다. 실제로 중국에서는 발음이 같은 글자로 애칭을 많이 붙여준다.
영문 이름은 '''Teresa Teng'''으로, 이 이름은 일본에서 활동할 때도 '테레사 텐(テレサ・テン)'[8]으로 계속 불렸다. 이 영문 이름 테레사는 그녀 자신이 존경한다고 이야기했던 테레사 수녀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라는 설이 있었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세례명을 사용한 것으로 밝혀졌다. 실제로 가톨릭 신자였다.

3. 인생



3.1. 출생, 그리고 데뷔


1953년 1월 29일, 중화민국윈린 현 바오중 향에서 출생했다. 양친 모두 중국 대륙 출신이다. 부친은 중국의 하북성, 모친은 산동성 출신이다. 부친은 국민혁명군의 직업군인으로, 국공내전 후에 대만으로 쫓겨왔다. 부친의 영향인지 군 위문공연에 열심히 활동하였고, 대만에서는 '군인들의 연인'이라는 별명도 있었다. 아직도 중화민국 국군 내에서는 덩리쥔이 인기다. 인기투표에서 늘 1등을 한다.
사실 등려군과 군대와의 인연이 깊을 수 밖에 없는 게, 아버지도 군인이었지만 그의 셋째 오빠 역시 아버지를 따라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해 군인의 길을 걸었고 그녀가 첫 노래를 한 장소 역시 군대였다.
1967년, 14세의 나이에 첫 스튜디오 앨범인 <鳳陽花鼓>가 발매되었고, 대만의 인기 드라마인 '징징(晶晶)'의 주제가인 '당신만 보면 웃음이 나요(아일견니취소, 我一見你就笑)'[9]를 불렀으며, 그 후 5년 정도 대만과 홍콩을 중심으로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1973년에는 홍콩에서 만난 '도라스(トーラス)'의 사장 후나키(舟木稔)를 만나 일본에서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3.2. 일본 활동


아이돌 계열의 노래인 '오늘밤일까 내일일까(今夜かしら明日かしら)'를 취입했으나 별 성과를 얻지 못하자 곧 엔카 계열로 전환하여 '공항(空港; くうこう)'을 취입, 대히트를 하여 당시 '레코드 대상 신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일본 방송에도 활발하게 출연한다. 더 드리프터즈의 방송에 게스트로 출연한 것도 이 때의 이야기. 그러나 1979년 인도네시아 위조여권을 사용한 것이 발각되어 국외 추방당했다. 급히 일본에 가야 해서 인도네시아 출신 친구가 만들어 준 여권을 사용했다고 한다(...)
이 후 1984년까지 미국, 홍콩, 대만에서 활동하다 일본 시장에 재입성, '속죄(償還; つぐない)', '애인(愛人; あいじん)'이 각각 150여만매,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겨(時の流れに身をまかせ)'가 200여만 매가 팔리는 대히트를 기록, '전일본 유선방송 대상(全日本有線放送大賞)' 최초의 동서(東西) 유선 대상 3해 연속 대상 및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1985년 12월에는 생전 마지막이 되는 솔로 콘서트를 NHK홀에서 진행하였다. 또한 같은 1985년에는 조용필의 일본 활동 후 '돌아와요 부산항에(釜山港へ帰れ)'를 부른 가수로도 유명하다(단, 최초 취입은 1983년 아츠미 지로(渥美二郞). 이후 계은숙,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 모리 마사코(森昌子) 등이 취입/노래).
1987년 이후 일본에서 그다지 활동하지 않다가 1994년 11월 NHK '가요 자선콘서트(歌謡チャリティーコンサート)'에 출연하였다.
1995년 취입할 예정이던 '잊지마(忘れないで; Time to Say Goodbye)'는 그녀의 사망으로 취입되지 않았다가 2001년 일본 가수(幸治)에 의해 추도음반으로 발매되었다.

3.3. 중화권 활동


대만 출신이라서 대만홍콩, 마카오 등 중국어권 지역에서의 활동도 활발했다.
1979년 위조여권 사용으로 일본에서 추방된 이후 중국 여권으로 활동하였는데, 덩리쥔의 오리지널 노래도 흥행했지만, 만주국에서 활동한 이향란(李香蘭; 야마구치 요시코山口淑子)의 노래들을 다시 불러 큰 인기를 끌었다. 이렇게 유명해진 곡들로는 '夜來香', '三年' 등이 있다.
1979년 인도네시아 위조 여권 사건으로 대만 내부에서 호된 비난을 받은 후, 1980년에 귀국하여 다수의 대만군 위문공연에 출연했다. 당시 대만의 외교적 고립이 심해지는 상황에서 침체된 국내 분위기를 일신하는데 기여해달라는 요청이었는데, 간단히 말해 '대만판 군통령' 역할을 했던 셈. 덕분에 대만 내부 인기도 회복하고, 정부 표창도 받았다. 1980년대에는 중국과 인접한 진먼다오를 방문하여, (당일 하루뿐이었지만) 중국 본토를 향해 심리전 방송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만 출신이 문제가 되었는지, 이향란이 만주국 찬양, 2차대전 종전 후 일본 귀국 활동 등을 한 이유가 문제가 되었는지,[10] 중화인민공화국1983년까지 덩리쥔의 곡을 금지했다. 명목상으로는 양안관계가 해소된 1987년까지 덩리쥔의 노래를 금지했는데, 형식적인 금지였을 뿐이다. 다들 덩리쥔의 노래를 듣고 다녔고, 심지어 단속하는 공안들도 덩리쥔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다녔다고 한다.[11] 그만큼 덩리쥔의 인기는 엄청났고, 그녀의 노래들을 금지하면 금지할수록 오히려 그녀의 곡들을 더 많이 들었다. 그래서 당시에 '낮은 덩샤오핑이 지배하고, 밤은 덩리쥔이 지배한다'라는 말이 유행했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 금지곡이었던 덩리쥔의 노래는 국민들로부터 높은 인기를 얻어 수많은 소문과 유언비어, 특히 콘서트에 관한 소문이 많았다. 실제로 그녀는 평생동안 중국 공연을 추진했으나, 천안문 사건 반대집회 등 중국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사실 때문에 중공이 그녀의 공연 추진을 백지화시켰다.
1987년, 일본에서 홍콩으로 이주한 이후로는, 홍콩대만에서 간간히 활동하다가 1990년 이후 홍콩 반환 등의 문제로 프랑스파리로 거주지를 옮겼다.http://www.newyearfood.kr/board/newyearfood_pic_09/11754

3.4.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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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리쥔이 사망한 해인 1995년에 군인들과 함께 찍은 사진. 사진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당시 덩리쥔은 평범한 중년 여성이였다.
덩리쥔이 사망했다는 소문은 1990년1991년에 한 번씩 있었으나 유언비어였으며 갑자기 1995년 5월 8일 요양을 목적으로 가끔 방문하던 태국 치앙마이의 매핑 호텔에서 기관지 천식 발작으로 향년 42세에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1990년부터 동거 관계에 있었던 14세 연하 프랑스인 스테판 퓨엘이 최후의 간호를 했다고 한다.
1995년 5월 28일 타이베이에서 국장급의 장례가 치뤄져 전 세계 3만여명의 팬들이 몰렸다. 덩리쥔의 관은 중화민국 국기중국 국민당 당기로 덮였다. 묘소는 타이베이시 동북에 자리하고 있으며, 묘 앞에서는 동상과 레코드 장치가 설치되어 덩리쥔의 노래가 끊임없이 흐르고 있다. 사람들은 덩리쥔을 추모하기 위해 사체를 화장하지 않고 그대로 매장하였으며, 사후 50년 정도는 생전 모습 그대로 둘 예정이라고 한다.
공식적으로 기관지 천식으로 인해 사망했다고 발표되었지만 마약 복용설, 민주화운동 및 반정부운동에 관련한 중국 공산당에 의한 암살설 등 여러가지 음모론이 있다. 천안문 사건이 일어나자 규탄시위에도 참석했었으니 암살설도 그럴 듯하다. 하지만 음모론일 뿐 검증된 바는 없다.
한편 '''북한'''에서는 덩리쥔이 사망하자 돈 좀 벌어보려고 덩리쥔 사망 기념우표를 발행하기도 했다. 북한에서 발행한 덩리쥔 추모 우표엔 '華人歌星鄧麗君' (대만가수등려군) 라고 써져있다. 맞는 말이긴 한데 대만과 가까울리 없는 북한이 이런 걸 만드니까 어색하다는 평. 엄밀히 말하면 화인=중국인이란 얘기이니 중화인민공화국 출신으로 퉁쳐버렸을 가능성도 있다.
등려군의 사망한지 28년이 지난 지금에도 중화민국 국군과 국민들은 아직도 등려군을 잊지 않고 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등려군의 무덤을 찾아와 추모하는데 일본팬 그리고 등려군이 생존했을때 위문공연을 갔던 군부대의 장병 장교 출신들이 손자 손녀를 데리고 오기도 한다.

4. 인간관계


역시 대만 출신인 배우 임청하와는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냈던 친구 사이이며, 평생 절친으로 남았다.
(1991년 홍콩영화 종횡사해에서도 잠깐 이름이 나오는데 주인공인 주윤발, 장국영, 종초홍이 프랑스의 한 해변에 갔을 때 주윤발이 해변에 "청하~ 려군!" 이라고 외친다. 왜 그러냐고 묻자 주윤발은 그들이 이 해변에서 일광욕을 즐긴다고 말한다)
일생 동안 몇 차례 결혼을 생각할 정도의 교제 상대를 몇명 만나기도 했지만, 모두 맺어지지는 못했다. 그 중에는 동남아의 화교 재력가가 있었는데, 남자쪽에서 "결혼 후에는 은퇴하여 가정 주부로만 살아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에 등려군이 "무대 출연은 포기하되, 음반 제작은 허락해달라"고 요청했고, 상대 남자는 집안을 설득해보겠다고 약속했지만 끝내 남자측 집안에서 거절하여 결혼은 성사되지 못했다.
성룡이 처음 헐리우드로 진출했을 시기인, 80년대 초반, 미국에서 지내던 등려군과 사귄 적이 있었다. 그러나 성룡이 친구들과 밖에서 어울리는 걸 좋아하는 반면, 등려군은 집에서 조용히 지내는 걸 좋아해서 헤어졌다고 한다. 이에 대해 등려군 측에서는 "성룡과는 친구 사이였을 뿐, 연인 관계는 아니었다"고 부인하고 있다. 성룡이 여자 관계가 복잡하기로 악명이 높은데다가, 중국 공산정권에 대해서도 호의적인 인물이라서 대만의 국민가수격인 등려군과 얽히기에는 별로 좋지 못하다고 판단한 듯.
사실 성룡은 이때 삼각관계였는데 등려군을 버리고 임봉교를 택했다. 한편 임봉교는 당시 기준으로 차세대 최고의 배우 유망주였으나 성룡의 아기를 임신하는 바람에 혼인 문제에 대해 여자가 남자보다 훨씬 엄격했던 당시 연예계의 상황상 임봉교는 연예계를 떠나야 했다. 이걸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룬 적이 있다.
후일담을 보자면 성룡이 나쁘다. 임봉교와 그렇게 결혼했는데도 불구하고 '''또''' 오기리와 사통해서 득녀했는데 그게 오탁림이다.
중화권 최고의 스타인 등려군이지만 개인사는 불행하기 그지없다. 군인인 아버지를 따라 여러 지방을 돌아다녔기 때문에 친구들을 제대로 사귀지 못했고 게다가 10대에 데뷔하다보니 학업을 초등학교에서 끝내야 했기 때문에 유년시절에 친구 한 명 제대로 사귀지 못했다고 한다. 또한 20대부터는 활동으로 너무 바빠 연애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위조여권 사건으로 일본에서 추방당하고 결혼이 엎어지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 등려군의 마지막을 지킨 14세 연하의 프랑스인 남자친구는 인터뷰에서 생전에 등려군은 자신이 학업을 마치지 못한 것이 늘 후회가 되어 기회가 된다면 대만에 자기처럼 학업에 어려움을 가지고 있는사람들을 위한 학교를 짓는게 꿈이라고 했고 자신의 곁을 지켜준사람은 남자친구 본인과 배우 임봉교, 그리고 중화민국의 군인들 뿐이었다고 늘 말했다고 한다.

5. 기타


등려군이 한국에서 이름이 많이 알려지게 된 계기는 '첨밀밀'이라는 영화 덕분이지만, 덩리쥔이 동아시아권에서 유일하게 인기를 얻지 못한 나라가 한국이었다. 아마도 일본문화 금지조치 때문에 일본문화로부터 유일하게 고립된 나라가 70.80년대 한국이다 보니 하필 그 시대에 일본 활동을 많이 했던 등려군의 노래도 같이 묶여버렸던 듯. 그렇지만 홍콩 영화가 많이 들어오던 시절, 홍콩 영화의 배경음악으로 쓰인 '첨밀밀(甜蜜蜜)'이나 '월량대표아적심(月亮代表我的心)'은 등려군이라는 가수, 심지어 노래 제목을 모르는 사람들도 노래를 들려주면 한 번쯤 들어봤다고 많이 얘기하고 한국 가수들도 많이 부를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사망한 지 20년이 넘게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등려군은 많은 중국인들에게 근대 이후 역대 최고의 중화권 가수로 평가받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중국 본토의 가요계는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아예 전멸하다시피 해버렸고, 그 여파로 아직까지도 아시아권에서 이름을 알린 중국 본토 출신 가수는 왕페이를 제외하고는 하나도 없기 때문.[12] 그나마 2000년대 이후에 중국 경제와 국민들의 생활 수준이 많이 상승하면서 중국 가요계도 그 빛을 보려나 싶었으나, 동시기에 유튜브의 등장으로 인해 유럽과 영미권 지역의 뮤지션들과 한류 폭풍이 불어닥쳐서 중국 가요계를 사실상 완전히 점령하디시피 하는 바람에... 등려군 같은 가요계의 인재가 더더욱 나오기 힘들어졌다.
2012년 11월 11일, 갑자기 네이버 실시간 급상승 검색어 1위를 유지했었다.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덩리쥔의 일대기가 방영되었는데, 지도에 '일본해(동해)'라고 영문표기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2015년 응답하라 1988 9화에서 성덕선이 중국으로 떠나기 위해 짐싸는 장면에서 첨밀밀 노래가 나왔다.
이안 감독이 2011년에 탕웨이 주연의 영화를 만들려고 했는데 무산되었다고 한다. 타계 20주기가 되는 2015년에는 중국 후난(湖南) 위성TV가 대만의 덩리쥔 추모 단체와 함께, 덩리쥔의 생애를 다룬 TV 드라마를 제작할 계획이 발표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대만에서 독립 성향의 민진당이 집권하여 양안관계가 불편해지면서, 추후 소식은 없는 듯 하다.
그동안 한국에서는 덩리쥔에 관한 책이 없었는데, 2017년 7월에 <등려군 - 달빛이 내 마음을 대신해요>, <가희 덩리쥔>이라는 제목으로 2권이 동시 출간되었다. 전자는 지난 2013년(덩리쥔 탄생 60주년)에 대만의 덩리쥔 추모재단(鄧麗君文教基金會)이 승인한 공식 전기 <<絕響: 永遠的鄧麗君>> 를 번역한 책이고, 후자는 대만 전문 작가 최창근 씨가 쓴 것이다.[13]
중국의 최고지도자 시진핑도 등려군의 광팬이었다는 사실이 잘 알려져 있다. 두 사람은 동년배이다.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항상 등려군의 노래만 들었다면서, '''"내가 젊은 시절에는 등려군의 노래를 즐겨 들었다."'''라고 훗날 고백했다.
일본에서 부른 노래 중 '이별의 예감(别れの予感)'이라는 노래가 있었는데, 이 노래의 가사 중 '바다보다도 더 깊이'라는 부분을 따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영화를 만들었다. 한국판에서는 태풍이 지나가고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6. 추천곡


아래의 곡들은 추천하는 곡들이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멜로디라는 게 공통점. '원곡명(한국식 독음)'으로 작성.
  • 淚的小雨 (루적소우) - '눈물의 가랑비' 라는 뜻이다.[14]
  • 甜蜜蜜(첨밀밀)(원곡은 인도네시아 민요인 'dayung sampan' 이다.)[15]

鄧麗君(등려군) - 甜蜜蜜(첨밀밀)
  • 月亮代表我的心(월량대표아적심)[16][17][18]

鄧麗君(등려군) - 月亮代表我的心(월량대표아적심, 달빛이 내 마음을 대신해요.)
  • 美酒加咖啡(미주가가배)[19]
  • 我心愛的小馬車(아심애적소마차)
  • 我只在乎你(아지재호니)[20]
  • 相思淚 (상사루)
  • 忘記他 (망기타)[21]
  • 何日君再來(하일군재래)[22]
  • 南海姑娘(남해고낭)[23]
  • 留不住你的心(류부주니적심)
  • 好夢太匆匆(호몽태총총)
  • 小城故事 (소성고사)
  • 但願人長久 (단원인장구)[24]
  • 愛你一萬倍(애니일만배)
  • 你可知道我愛誰(니가지도아애수)
  • 再見我的愛人(재견아적애인)
  • 江水悠悠淚長流(강수유유루장류)[25]
  • 夜來香(야래향)[26][27]
  • 絲絲小雨(사사소우) - 이슬비라는 뜻이다. 후렴구의 애절함이 아주 인상적.
  • 高山靑(고산청) - 阿里山的姑娘(아리산적고낭)이라는 제목으로도 불린다.[28]
  • 逍遙自在(소요자재)[29]
  • 一水隔天涯 (일수격천애)[30]
  • あなたと共に生きてゆく (아나타토토모니이키테유쿠)[31]
  • 情人的黃襯衫(정인적황친삼)[32]
  • 往日的時光(왕일적시광)[33]
[1] 우리나라에서는 의역하여 "낮에는 등소평이 지배하고, 밤에는 등려군이 지배한다"로 알려진 말. udn tv《大而話之》"白天聽老鄧 晚上聽小鄧" 唱進大陸人心裡네이버 중국시사문화사전 - 덩리쥔 참조.[2] 일본에서의 활동명은 테레사 텐(テレサ・テン). 다만 일본에서는 그녀가 원톱이었던 것은 아니다. 등려군이 활동하던 당시 일본은 마츠다 세이코나카모리 아키나를 대표로 하는 아이돌 전성 시대였다. 등려군 나름 팬덤도 있고 방송 1위도 거머쥐지만, 일본인 1급 가수의 인기에 미치지 못 했던 듯 하다. 다만 등려군의 명곡들은 그녀 사후 명곡으로써 꽤 재조명되는 편이다.[3] 대만에서나 본토에서나 的의 발음이 일반적으로 '더'이지만 노래를 부를때는 的가 ‘디’로 발음된다.[4] 우리나라에서는 화교 출신 가수 주현미가 번안 및 원곡을 불러 많이 알려진 곡이다. 최근에 홍진영도 '기다리는 마음'이란 제목으로 리메이크해서 부르기도 했다.[5] 한국 가수들도 많이 리메이크를 해서 불렀던 곡이다. 대표적으로 드라마 사랑해 당신을 O.S.T를 부른 두리안이 있다.[6] MBC 주말연속극 사랑해 당신을(1999), MBC 미니시리즈 네자매 이야기(2001)[7] 한국에서 활동한 적이 아예 없기에 당연한 결과[8] 중국식으로 읽으면.’테레사 텅’이 맞으나, 일본에는 ㅓ발음이 없으므로 ㅔ발음을 사용했다.[9] 등려군은 이 곡을 1968년에 녹음하였는데, 이 곡을 최초로 녹음한 가수는 등려군이 아니라 195-60년대 홍콩의 유명 가수 배뢰(蓓蕾)다. 배뢰는 이 곡을 1966년에 녹음하였다.[10] 이향란(李香蘭)은 예명. 본명은 야마구치 요시코(山口淑子)로 일본인 히키아게샤이다. 항목 참조.[11] 덩리쥔 노래의 열렬한 팬 가운데는 나중에 중국의 주석이 된 인물도 있었다. 불법복제한 녹음테이프가 다 늘어져서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들었다고... 참고로 시진핑과 덩리쥔은 똑같이 1953년생으로, 동갑이다. 만약 덩리쥔이 지금까지 살아있었다면 시진핑이 덩리쥔을 초청했을 수도 있겠다.[12] 왕페이도 본토 출신이지만 홍콩에서 커리어를 시작했다. 애초에 대만출신, 본토출신을 따지지 않고 아시아권에서 인지도가 있는 중화권 가수는 등려군과 왕페이밖에 없다.[13] 대만 국립정치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고, 2011년부터 다수의 대만 관련 저서를 출간하고 있다.[14] 마에카와 키요시(前川清)라는 가수가 녹음한 유명한 엔카인 '長崎は今日も雨だった(나가사키엔 오늘도 비가 내리네)' 라는 곡의 번안곡. 원곡은 일본에서는 국민가요 수준으로, 나가사키를 상징하는 대표곡 중 하나이다.[15] 한국의 듀오 그룹 두리안#s-2'I'm Still Loving You'라는 제목으로 번안해서 불렀다.[16] 중화권에서는 위의 '첨밀밀'과 더불어 등려군의 대표곡을 넘은 세대를 초월한 명곡이다. 한국인들에게도 첨밀밀과 함께 덩리쥔의 손꼽히는 대표곡으로 잘 알려져있다. 제목은 "달빛이 내 마음을 대신 표현하네"라는 뜻.[17] 2016년 6월 홍진영이 원곡과 번안곡을 리메이크한 앨범을 발표했다. 반응은 나쁘지 않은 편이다.[18] 장국영 혹은 그 외 여러 가수들 역시 이 노래를 커버했는데 커버한 사람들마다 음원에서 的을 원곡처럼 'di(디)'로 부르거나 'de(더)'라고 부르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한국인 입장에서는 느낄 수 없지만, 대만 등 남부 중화권에서는 的를 '더'가 아니라 '디'로 발음하면 좀 더 여성적인 느낌이 난다고 한다. 장국영은 남자여서 굳이 '디'로 발음할 필요가 없었던 것.[19] 중국인들에게 '첨밀밀'과 함께 가장 많이 알려진 곡.[20] 일본에서 테레사 텡 명의로 발표된 '時の流れに身をまかせ'의 번안곡이다.[21] 왕가위 감독의 영화 타락천사의 삽입곡으로 유명하나, 영화에 삽입된 음원은 등려군의 곡이 아닌 관숙이(關淑怡)라는 가수가 리메이크#s-2.6한 곡이다.[22] 1930-40년대 상해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주선(周璇) 이라는 가수의 노래를 리메이크한 곡으로, 그녀의 노래들은 수많은 가수들에 의해 리메이크 되었는데, 주선의 대표곡으로 '夜上海(야상해)', '天涯歌女(천애가녀)', '花樣年華 (화양년화)', '永遠的微笑(영원적미소)' 등이 있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 화양년화가 그녀의 노래에서 영화 제목을 따왔으며, 그 곡이 영화에 삽입 되기도 하였다.[23] 姑娘 시리즈에서 가장 유명한 노래. 덩리쥔의 노래들 중 제목이 '姑娘'으로 끝나는 노래들을 팬들이 '姑娘 시리즈'라고 부르기도 한다.[24] 소식인 水調歌頭(수조가두)에 곡을 붙였는데, 왕비#s-4의 리메이크로도 유명하다.[25] 중국적인 느낌이 강한 곡. 중국에서는 줄여서 '江水悠悠'라고 표기하기도 한다.[26] 영화 댄서의 순정에서 문근영이 부른 OST인 '그댄 몰라요'의 원 버전이다. 극중에서 중국어로 부르기도 했다. 원곡은 이향란(李香蘭)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만주국, 일본의 배우 겸 가수 야마구치 요시코의 곡이다.[27] 자세히 들어보면 여래향이 예라이 샹 으로 들린다.[28] 영화 감독 장철이 가사를 쓴 곡으로, 그의 첫번째 영화 아리산풍운의 삽입곡으로 쓰였던 곡을 리메이크하였다. 노래는 대만 원주민 민요를 약간 편곡했다. 참고로 아리산풍운은 대만 원주민에 대해 다룬 영화로, 대만 광복 후 최초의 극영화라 알려져 있고, 또한 장철의 첫 번째 영화, 즉 감독 데뷔작이다.[29] 渡哲也(와타리 테츠야)의 'くちなしの花(치자나무의 꽃)' 의 번안곡으로, 원곡은 후카사쿠 킨지 감독의 'やくざの墓場(야쿠자의 무덤)' 이라는 영화의 주제곡으로 사용되었다.[30] 森森(삼삼)이라는 여가수의 곡을 리메이크.[31] 위의 제목 규칙에 따라 한국어 독음으로 기입. 오다 테츠로가 작곡하고 ZARD가 작사했다.[32] 한명숙의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의 번안곡, 이 곡은 동남아에서도 상당한 인기를 끌었으며, 대만에선 1967년에 사뢰(謝雷)라는 가수가 1967년에 최초 녹음하였고, 등려군은 10대 시절인 1968년에 녹음하였다.[33] 'Those were the days(by Mary Hopkins)'의 중국어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