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역 폭발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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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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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발사고 이전의 이리역
이리역 폭발사고 혹은 폭발사건. 1977년 11월 11일 21시 15분 전라북도 이리시(현 익산시) 이리역(현 익산역)에서 발생한 대형 열차 폭발사고. 59명이 사망하고 1158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1647세대 7800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하였다.
2. 사건의 경위
당시 광주역으로 가던 한국화약의 화물 열차가 정식 책임자도 없이 다이너마이트와 전기 뇌관 등 40톤의 고성능 폭발물을 싣고 이리역에서 정차 하던 중 폭발 사고를 냈다.
수사 당국의 발표에 따르면 호송원 신 모씨가 어둠을 밝히기 위해 밤에 열차 안에 켜놓은 촛불이 다이너마이트 상자에 옮겨 붙은 것이 원인이었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안전 수칙을 무시한 일개 개인의 단순 과실 사고라고 여길 수도 있겠으나, 이렇게 되기까지 과정을 살펴보면 하나같이 총체적 난국으로 '''두말할 나위 없는 인재(人災)'''였다.
- 원래 이런 사고를 막기 위해 폭약과 뇌관은 함께 운송할 수 없게 되어 있으나 이 원칙이 무시되었다.
- 철도역의 화차 배정 직원들의 도덕적 해이가 심각한 수준이라 급행료를 챙기느라 화약을 실은 화물열차를 역 구내에 40시간 동안 대기시켰다. 당시 철도법 제61조상 화약류 등의 위험물은 역 내에 대기시키지 않고 바로 통과시켜야 한다. 뇌물 한두 푼을 얻어내기 위해 폭약을 실은 열차를 막아 세워둔 것. 뇌물 먹기 위해서 화물 열차를 막는 것도 봐가면서 해야 하는데 다이너마이트, 즉 폭탄을 실은 열차를 이렇게 했다.
- 이렇게 길어지는 대기 시간에 열받은 호송원이 술을 먹고 열차 화물칸에 들어갔다. 애초에 화약을 실은 화차 내부에는 호송원 조차 탑승할 수 없고, 호송원은 총포 화약류 취급 면허가 있어야 하며, 호송원에 흡연자, 과다 음주자를 쓸 수 없는데 이 모든 것은 깡그리 무시되었다.
- 화차 내에 화기를 들일 수 없는 규칙을 무시한 호송원 신 씨는 그 안에서 촛불을 켜고 잠이 들었다. 다시 말하지만 이 열차 화물칸에는 폭발물이 잔뜩 실려 있었다. 문자 그대로 화약고 안에서 불을 붙인 것.
- 불이 옮겨붙은 상황에서 깨어난 호송원이 침낭으로 불을 끄려 시도했으나, 오히려 불이 더 크게 번졌다. 이는 위험물을 운반하는 열차에 소화기처럼 유사시 사용할 제대로 된 소화 기구가 없었음을 의미한다.
- 화약 열차에 불이 붙은 것을 안 철도 요원들은 모두 도망쳐버렸고, 검수원 7명이 불을 끄기 위해 화차로 달려가 모래와 물을 끼얹었으나 폭발을 막지는 못했다. 역 내에도 제대로 된 소화 기구가 없었다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이 앞장서서 도망쳤을 뿐, 대피 명령을 내리는 등 제대로 된 대처를 하거나 최소한 위험을 주위에 제대로 알리는 것조차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답이 없는 상황.
3. 사건의 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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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발 사고로 이리역에는 지름 30 m, 깊이 10 m에 이르는 거대한 구덩이가 파였고, 반경 500 m 이내의 건물이 대부분 파괴되었다. 역 주변 건물들 중에서 단독주택은 싹쓸이 수준으로 전멸했고 큰 건물은 형체만 남아있는 수준으로 파괴되었다. 역에서 근무하던 철도 공무원 16명을 포함하여 59명이 사망하였고, 중상 및 경상자가 1158명에 달하였으며, 이재민 1647세대 7800여 명이 발생하였다. 이는 그때까지 발생한 폭발 사고 중 최악의 참사였다. 참고로 이전의 이리역 주변은 철인동으로 불렸는데 판자촌과 홍등가가 난립해 있었다. 이리에서 오래 거주한 사람들에게 철인동을 물어보면 혀를 내두를 정도이다. 하지만 폭발의 여파가 '''사람도 건물도 모조리 휩쓸어버려''' 역 주변이 이전과 비교가 안 될 만큼 말끔하게 정리가 되어버렸다.
중요 시설물의 피해도 컸다. 이리역 역사(驛舍)를 비롯하여 구내의 객화차 사무소, 보선 사무소 및 구내에 정차 중이던 기관차/객화차 등 117량이 파괴되었고, 선로 1650 m가 파손되었으며, 주택 675 채가 완파, 1288 채가 반파되었다. 한편 당시 이리시 창인동에 위치해 있던 익산군청이 폭발의 진동으로 건물 전체에 균열이 가는 피해를 입었으며, 이는 1979년 익산군청이 함열로 신축 이전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1] 이로 인해 철도 바로 옆에 자리했던 남성여중과 남성여고가 폭발사고의 직격탄을 맞아 교사가 파괴되었고[2] 본래 이리고등학교 앞에 있던 남성고등학교의 건물 일부가 붕괴되어 1979년 현재의 소라산 자리로 옮기고, 남겨진 자리에 남성여중과 남성여고가 임시 입주하여 소라산 신교사가 완공되는 1985년 4월까지 임시 교사로 활용되다가 이후 철거되고 그 자리에 남성맨션이 들어섰다[3] . 폭발 지점으로부터 반경 4 km 이내의 건물들의 유리창이 깨지고 주변 1 km 이내로 부서진 철도 레일 및 객화차의 파편이 날아들었다. 또한 이리시와 인접한 익산군 오산면, 황등면, 삼기면 및 김제군 백구면 등에서도 창문이 덜컹거릴 정도의 진동이 느껴졌고, 20여 km 거리인 군산 및 '''백 리(40 km) 밖 논산군에서도 폭발음이 들렸다'''고 한다.
당시 이리역은 호남선, 전라선, 군산선을 연결하는 집결지였기 때문에 가장 먼저 선로 복구에 나서서 사고 다음날인 11월 12일 열차 통행을 재개하였다. 이후 11월 20일에 모든 철로와 입환선의 복구를 완료했다.
이때 폭발로 인한 파편이 당시 춘포면까지 날아갔다는 말이 있다. 현재 익산역에서 춘포까지 직선거리가 '''7 km'''인 것을 감안하면 실로 그 폭발력이 어마어마했음을 알 수 있다.
대규모의 폭발이 예고도 없이 순식간에 일어난 탓에, 이리 지역 사람들은 말 그대로 전쟁이 난 줄 알았다고 한다. 북한군의 공습으로 역이 폭발한 줄 알고, 반대로 서울에 사는 친지들의 안부를 걱정했다고 한다. 당시 이리에 주재하던 어느 기자는 서울 본사에 연락을 넣어 '''"이리는 쑥밭이다! 서울은 무사하냐?"'''라고 외쳤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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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고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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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가 발생하자 당시 한국화약그룹의 현암 김종희 회장[4] 은 즉각 대국민 사과를 하였고 그 당시 자신의 모든 재산인 약 90억 원[5] 을 모두 피해자와 이재민들을 위해 사용하였다. 그리고 당시 한국화약그룹의 모든 직원들이 피해자들을 위해 헌혈을 하였으며 이리역에 직접 파견을 나갔다고 한다. 또한 한국화약그룹의 모든 직원들이 회사에서 지급된 보너스를 다시 반납하였고, 직원들의 11월 달 급여의 2%를 재해 기금으로 각출하였다.
사고 때문에 이리역은 1년 뒤인 1978년 11월, 당시의 위치에서 떨어진 곳에 신설되었다. 후에 이리시와 익산군이 통합하여 익산시가 출범하자 역 이름도 익산역으로 바뀌었는데[6] , 이리시가 익산시로 바뀌게 된 이유가 이리하면 이리역 폭발사고가 연상되기 때문이라 카더라. 사실 1995년 2차 시, 군 통합 당시 통합에 부정적인 분위기가 우세했던 군 지역의 여론을 달래기 위한 측면이 강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면 익산군은 익산이란 명칭을 이리에 뺏긴 셈이 되어 버렸다. '익산'이라는 명칭이 붙었던 여러 기관들이 그 이름을 이리에 있는 동종 기관에 넘겨주고 새 이름을 써야 하기도 했고(예를 들자면 익산우체국은 그 명칭을 구 이리우체국에 넘겨주고 함열우체국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라든지(현 익산함열우체국), 현재는 없어진 익산등기소는 이름을 이리등기소에 넘겨주고 북익산등기소로 바뀌었다든지). 이리시와 익산군은 1994년 1차 시군 통합 당시 익산군 지역의 반대 여론이 과반이었기에 무산된 적이 있다.
폭발 사고의 당사자인 호송원 신 모씨는 사고 직후 도망쳤다가 검거되어 이듬해 2월 법원은 부작위에 의한 폭발물파열죄(개정형법에 따르면 부작위에 의한 폭발물사용죄)를 인정해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았고[7] 1987년 만기 출소하였다. 시민들은 신 씨로 말미암아 많은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재판장에게 선처를 호소하고 이후 복역중인 신 씨를 면회하는 등 의외로 우호적인 모습을 보였다.[8]
불행 중 다행이라면 사고 시각 당시 '''승객 600여 명이 타고 있던 여객열차'''가 김제 부용역에 정차 중이었는데 '''이 열차가 제 시간대로 운행되었다면 사고 시각에 이리역으로 들어왔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관사가 폐색구간 진입시 통표를 분실하는 바람에[9] 폐색구간 통과를 할 수가 없어 부용역에 계속 정차했고, 통표 회수 누락을 무전으로 보고하던 중 "이리역에 화재 발생, 들어오지 말라"는 답변을 받았다. 운행이 늦어진 탓에 초조해진 기관사가 "화재 정도가 심하지 않으면 진입해도 되지 않느냐" 라고 했지만 이리역의 역무원은 "상황이 심각하니 무조건 대기하라"고 답하여 그대로 부용역에 머무른 덕에 해당 열차 승무원과 승객들은 무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통표 분실로 열차가 이리역에 들어오지 못하고 꼼짝없이 묶여버린 게 더 큰 인명피해를 막은 새옹지마가 된 셈이다. 안타깝게도 이 메시지를 전해준 역무원은 결국 순직했다고.
또 한 가지 천만 다행으로 '''사고 당시 이리역 구내에 석유를 가득 실은 유조열차가 정차 중'''이었는데, 마침 이리역 인근에 살던 기관사가 화재가 일어났다는 연락을 받고 부랴부랴 달려나와 열차를 대전역 방면[10] 으로 몰고 가 인근의 황등역으로 신속히 대피시켰다. 만일 열차가 구내에 계속 남아 있었다면 그것마저 폭발하면서 완전히 불바다가 되었을 것이다.
이리역 폭발사고로 집을 잃은 이재민들을 수용하기 위하여 이듬해(1978)에 이리시 최초의 주공아파트인 모현주공아파트를, 또 이듬해(1979)에 창인주공아파트를 건설했다. 이중 모현주공1단지는 재개발 공사로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는 대림산업에서 익산 e-편한세상 아파트가 들어섰다. 창인주공아파트도 재개발 승인이 난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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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역 앞 삼남극장
한편 폭발 사고가 일어났을 당시 가수 하춘화가 이리역 앞 삼남극장에서 공연 중이었는데, 공연을 시작한 지 약 15분 만에 폭발사고가 일어났다. 폭발사고가 일어난 직후 극장 지붕이 무너져 내리고 정전이 되어 사방이 암흑 천지였는데, 이때 같이 있던 코미디언 이주일이 본인도 피를 흘리면서 하춘화를 업고 뛰어, 가까스로 사고 현장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당시 이리 시내에는 종합병원 규모의 의료 기관이 없었던지라[11] 이들은 군산으로 이동하여 도립 의료원에서 응급 치료를 받고 나서는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는데, 이 때 외부와의 연락이 두절되어 있던 관계로 언론에서는 한바탕 하춘화가 실종되었다는 속보를 내보냈고, 그로 인해 한때 하춘화의 생사 여부가 국민적 관심사로 떠올랐던 적이 있었다. 사고 다음날 현장에 내려온 박정희 대통령도 하춘화의 생사 여부와 관련된 보고를 수시로 받았다고 한다. 하춘화의 당시 인기는 요즘의 어지간한 톱가수들 이상의 '국민 가수'급이었다. 하춘화는 6살때 데뷔했는데 '''그때부터 이미 스타'''였고 이 시점에는 이미 '''데뷔 16주년'''이었다. 하춘화의 생존이 언론을 통해 공식 확인된 것은 사고 다음날(12일) 저녁 때였다. 한편 상경한 이후 한양대 병원에서의 정밀진단 결과 하춘화는 다행히 큰 부상이 아니었지만 오히려 이주일이 두개골이 함몰되는 중상으로 4개월 이상 치료를 받아야 했다. 이후 이주일은 '하춘화를 구한 남자'로 유명해져서[12] , 1980년대 들어서 전성기를 맞았다.
사고 당시 한국과 이란의 아르헨티나 월드컵 아시아 예선전[13] 이 TV를 통해 방송되고 있었고, 폭발이 일어난 후 이 경기를 중계하던 KBS에서는 자막으로 이리역 폭발사고를 속보로 알렸다. 그리고 한국 VS 이란전 덕분에 목숨을 건진 학생도 있었는데, 사고 직전 자기 방에서 공부를 하던 중 그 학생의 아버지가 축구중계를 보고 공부하라며 권유하여 안방으로 건너가 TV를 보던 중 폭발이 일어났고, 굉음과 함께 학생의 방 쪽에서 진동이 느껴져 달려나와 보니 이리역에서 날아온 집채만 한 기차 화통이 학생의 방을 덮쳤다고 한다. 만약 그 학생이 계속 공부를 하고 있었다면 그 자리에서 즉사했을 것이다. 그 학생 입장에서는 천년감수를 한 셈이다.
이 사고로 최경록 교통부장관이 경질되고, 후임에는 민병권이 임명되었다.
씁쓸한 후일담이지만, 사고 이후에 이리역 주변 아이들 사이에서 '보물찾기'가 유행했다고 한다. 폐허가 된 집 근처에서 목걸이나 반지같은 패물을 주워 횡재한 아이들이 나오면서 아이들이 너도나도 보물을 찾겠다고 폐허를 뒤적거렸는데 보물뿐만 아니라 사람의 조각도 발견되었다고 한다. 훗날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에서도 재현된 풍경이다.
이 사건을 소재로 한 장률 감독의 영화 이리가 2008년 개봉했다. 참고로 재난 영화는 아니다. 작중 주인공의 출생 직전에 이 사건이 있었다는 '설정' 정도. 가을로에서 삼풍백화점 붕괴사고가 다뤄지는 것보다도 더 적게 다루는 수준.
대재해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위험이 진정되자, 동네 어르신들이 진두지휘 하고 청년들이 군말 없이 따르며 각 가정에서 경황 없는 사람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등, 혼란이 빠르게 수습되었다고 한다.
임시 대피소 건설을 위해 군은 물론이고, 인근 공업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징발'''하여 전기 공사 등을 시켰다고 한다.
당시 상황을 다룬 소설로 기찻길 옆동네의 1부가 있다.
과거 MBC 프로그램 타임머신 122회에서도 이 사건을 방영해줬다.
이 사건 이후로 익산역에는 이 사고의 희생자 추모비가 세워졌다.
2017년 11월 11일 이리역 폭발 당시 군의관으로서 현장에 달려간 윤장현(전 광주광역시장)이 '이리역 폭발사고 40주년 추모행사’에서 익산 명예시민증을 받았다. # 당시 윤장현은 다급한 마음에 파견 명령도 받지 않은 채 인원과 장비를 챙겨서 독단적으로 이리시에 가서 의료활동을 하였다. 사실상 탈영아닌 탈영인 셈인데, 오히려 당시 서종철 육군참모총장이 훌륭한 초동출동이라며 크게 칭찬하고 격려를 받아서 넘어갈 수 있었다고.
5. 관련 문서
- 룡천역 열차 폭발사고 - 이리역의 북한판. 게다가 이리역의 경우 역무원들의 목숨을 건 대피 활동과 행운까지 따라주며 최악의 상황은 피했지만 이쪽은 운도 지지리도 없어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 모두 일어났다. 질산암모늄 수송열차와 유류 수송열차가 충돌하였고 거기에 전신주가 엎어지면서 튄 스파크가 뇌관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결과 룡천군 중심부가 폐허로 변해버렸다.
- 평강역 폭발사고 - 이리역의 북한판 그 두번째. 아니, 이 사고가 룡천역의 선배격이라 할 수 있다.
- 톈진 항구 폭발 사고
- 베이루트 항구 폭발 사고
- 철도 사건사고
- 안전불감증
[1] 이후 군청을 익산군 관내로 이전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당시 함열면과 금마면, 황등면 등이 군청 유치 경합을 벌였는데, 금마면은 철도가 통과하지 않았고 황등면은 이리시와 너무 가까워서 결국 함열면이 군청을 유치하게 되었다. 또한 이 무렵에 전국의 군청 소재지가 일괄적으로 읍으로 승격되면서 군청을 유치한 함열면도 함열읍으로 승격되었다.[2] 비교적 피해를 덜 입었던 남성여고 구 교사는 남성여고가 남중동 구 남성고 교사로 이전된 이후 이리서초등학교로 변경되어 현재까지도 남아 있으며, 피해가 컸던 남성여중 교사는 붕괴, 균열된 부분은 철거되고 남겨진 일부분이 상가 용도로 활용되고 있다.[3] 남성맨션이 지어진 건 훨씬 뒤인 1980년대 중반이다. 그 자리에 남아 있었던 남성여중고의 소라산 이전과 남성국민학교의 폐교 전후 시점에 있었던 일.[4]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의 부친이다.[5] 물가 상승을 고려하면 지금 돈으로는 무려 '''5000억원'''에 이른다.[6] 통합은 1995년 5월 10일, 역명 변경은 9월 1일[7] 오늘날이라면 부작위에 의한 살인죄가 성립할 가능성도 있지만, 당시에는 살인의 기준을 굉장히 엄격하게 잡았기에, 과실이나 결과적 가중범일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살인죄로는 처벌하지 않았다. 당시 사건 경위 및 판결 내용은 1978. 9. 26. 선고 78도1996 판결문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대법원은 신 씨에게 "폭약호송"을 선행행위로 인한 보증인지위 인정, "쉽게 진화 가능했음에도 도주한 것"을 폭발물 파열과 같은 작위행위와 동가치하다고 봐, 부작위에 의한 폭발물파열죄를 인정하였다. 그런데 1995년도 개정형법은 제172조 제1항의 죄의 죄명을 폭발물파열죄에서 폭발성물건파열죄로 바꾸면서 화약을 그 객체에서 제외시켰다. 따라서 개정형법에 의하면 본 사건에서는 부작위에 의한 폭발물사용죄(제119조 제1항)가 성립한다.[8] 사고의 근본적인 원인은 신 씨가 아니라 부패 직원이기 때문에 우호적인걸로 보인다.[9] 사고 당시인 1977년까지만 해도 호남선은 전 구간 단선+통표폐색 구간이었다. 호남선 복선화 사업의 경우 이리역 사고 이듬해인 1978년 대전조차장~이리 구간이, 1988년 송정리까지 복선화되었고, 송정리~목포 구간은 차일피일 미뤄지다가 2003년에야 완공되며 전 구간 복선화되었다.[10] 당시 호남선의 기점역은 대전역이었다.[11] 원광대학교에 의과대학이 설립되고 원광의료원이 개설된 것은 1980년대 일이다.[12] 거기다 이때 이주일 덕에 목숨을 구한 하춘화가 이후 자신의 공연에 사회자로 항시 이주일을 지목하면서 인지도가 더 높아졌다.[13] 이날 이영무가 2골을 기록하는 맹활약에도 결과는 2대 2로 무승부로 아쉽게도 이란에 밀려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덧붙이자면 한국 축구 대표팀은 그 다음 대회인 스페인 월드컵이 마지막 예선 탈락이 되었고 멕시코 월드컵 부터는 본선 진출 단골국가로 자리잡았다). 참고로 이란 대표팀은 본선에서 네덜란드에게 0-3, 페루에게 1-4로 털리며 1무 2패로 조별 리그에서 탈락했는데 페루는 2라운드에서 아르헨티나에 0-6으로 대패하며 탈락하고 네덜란드는 결승까지 진출했지만 아르헨티나에게 우승을 허용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