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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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이태영(李兌榮)
직업
사회운동가, 변호사
본관
광주 이씨#
출생
1914년 8월 10일
평안북도 운산군 북진읍 진동#
사망
1998년 12월 17일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봉원동
사인
알츠하이머
1. 소개
2. 학력
3. 상훈
4. 저서
5. 참여 운동
6. 일생
7. 기타 이야깃거리
8. 관련 문서


1. 소개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이자 항일운동, 인권운동, 민주화운동에 큰 기여를 한 사회운동가이다.
이화여자전문학교 가사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도산 안창호의 연을 통해 남편 정일형과 결혼한 후 일제를 상대로 모진 고문을 받는 등 광복 당시까지 항일활동을 했다.
해방 이후 법 공부를 원했던 본인의 뜻을 이뤄 1952년 제2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홍일점으로 합격하여 최초의 여성 판사가 될 뻔 하였으나 남편이 야당의원이라는 이유로 인한 이승만의 반대로 결국 판사로 임용받지 못하고 변호사가 된다.[1] 이후 한국가정법률상담소를 설립하여 가정 내의 법적 분쟁 해결에 힘썼으며, 가정법원설립청원, 호주제폐지운동, 동성동본결혼가능운동 등을 직접 주도하며 당시 전국에 만연해있던 유교질서에서 비롯된 성차별과 불평등의 해소를 위한 수많은 사회운동들을 이끌었다.
뿐만 아니라, 3.1 민주 선언 서명에 적극 참여하고 민주화 운동가들의 변호에도 활발하게 참여한 덕에 이태영을 반독재 민주화운동가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실제로 1980년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 때는 김대중의 증인으로 출석해 '''군 검사'''를 향해 호통을 치는 패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
사후 5만원권 인물 선정작업이 한창 이루어질 즈음 국회 여성의원을 상대로 한 여성인물 적격성 설문에서 여성의원들의 선호 후보로 신사임당을 이어 2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결국 신사임당이 5만원권의 인물로 채택되었지만, 이태영이 '''근현대'''의 산 증인[2]인 것을 감안하면,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알 수 있다.

2. 학력


  • 1932년 평양 정의여자고등보통학교[3] 졸업
  • 1936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가사과 졸업
  • 1949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학사
  • 1957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법학 석사
  • 1969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법학 박사

3. 상훈


  • 1971년: 제1회 법을 통한 세계평화상
  • 1975년 막사이사이상
  • 1982년: 유네스코 인권교육상
  • 1984년 국제변호사협회 국제법률봉사상
  • 장한어머니상
  • 법률문화상
  • 1989년 브레넌 인권상
  • 1990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 1990년 3‧1문화상
  • 제3회 세계법률구조상
  • 세계감리교 평화상
  • 1991년 제1회 자랑스런 서울대인으로 선정

4. 저서


  • 《여성을 위한 법률상식》
  • 《가정법률상담실기》(1958)
  • 《한국 이혼제도 연구》(1969)
  • 북한의 여성생활》
  • 《여성으로 태어나서》
  • 《여성운동사》
  • 《현대여성의 모럴》
  • 《여성을 위한 법률상식》(1972)
  • 《쪽박으로 한강물을》(1985)
  • 《차라리 민비를 변호함》
  • 《나의 만남 나의 인생》(1991)
  • 《가족법개정운동 37년사》(1992)
  • 《북한 여성 연구》
  • 《정의의 변호사가 되라 하셨네》

5. 참여 운동


1970년 서울가정법원 조정위원, 국제법률구조연합회 이사가 되고 같은 해 국제법률구조연합회 부회장에 선출 되었다. 1971년 가정법원 조정위원으로 재직 중 신민당에 입당하였다. 또한 1971년 '법을 통한 세계평화센터'로부터 '법을 통한 세계 평화상'을 받았다. 1973년 세계여자변호사회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남편인 정일형과 함께 1974년 11월 민주회복 국민선언에 참여하였다. 1976년 3.1 민주선언 서명에도 적극 참여했다고 한다. 또 수많은 민주화 유공자들을 법적으로 변호했다. 1970년대 중반부터 여성인권, 여성운동에 주력하여, 1989년 가족법 개정의 발판을 마련했다. 가족법 개정운동을 추진하여 이혼녀의 재산분할 청구권 인정과, 기존의 친척 관계를 모계·부계 혈족을 모두 8촌 이내로 축소할 것을 요구했다. 그 밖에 '''호주제 폐지'''[4], 부모친권, 동성동본 결혼금지 제도의 폐지 운동을 주관하였다. 이와 같은 운동 때문에 남존여비적인 성리학자들은 "인간관계와 질서를 어지럽힌다"고 그녀를 맹비난했다.
또한 1976년 국내외 여자 정치인 및 여자 지식인 100명의 서명·동의 지원을 얻어 서울에 여성운동가들의 회관인 여성백인회관 건물 부지를 매입, 마련하였다. 그러나 이 해에 3월 3·1 민주선언에 참여 하다가 이듬해인 1977년 실형을 받아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했다. 그뒤 여성운동에 전념하고 있었는데 1980년 복권해 변호사 자격을 돌려받았다.

6. 일생


2살 때 광산업을 하던 아버지가 사망하고 어머니와 두 오빠 밑에서 어렵게 자랐지만, '''"아들이든 딸이든 공부만 잘하면 대학에 보내주겠다"'''는 어머니의 말에 용기를 얻어 이화여자전문학교 가사과를 졸업한다. 결혼 후 남편의 응원으로 1946년, 30대 시절에 서울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하여 1952년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한다.
하지만 이승만 당시 대통령이 야당 의원 정일형의 아내라는 것을 트집 잡아 판사 임용을 거부하자 1954년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한다.[5] 최초의 여성 변호사이자 야당 국회의원의 아내라는 프리미엄 때문에, 소박맞은 아내, , 시국사범들이 그녀의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오게 되었다. 이태영은 이들을 변호하면서 법률이 남성에게 유리하도록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서는, 가족법 개정과 호주제 폐지운동에 앞장서며 1994년까지 활동하다가 은퇴한다.
1996년에 당선을 장담했던 아들 정대철이 9시 뉴스 앵커 출신의 신한국당 박성범 후보에게 패해 낙선하자 정신적 충격이라도 받았는지, 그에 따른 악영향으로 노환까지 겹쳤는지는 몰라도 치매에 걸려 2년간 가족도 못 알아보고 지내다가 1998년 12월 17일에 사망했다. 향년 84세.
장면, 남편 정일형과 함께 김대중의 최대 후원자이자 정치적 선배로 꼽을 수 있는 사람이다.
정일형이 김대중과 같은 계보에서 활동한 인연도 있었겠지만, 민주당 대변인으로 활동하다가 5.16 군사정변으로 의원직을 상실해 폐인처럼 지내던 김대중에게 자신의 후배이자 비서 이희호와의 결혼을 주선한 사람도 바로 이태영.
1998년 사망 후, 서울특별시 국립서울현충원 국가유공자 묘역에 남편과 함께 합장되었다. 사실 단독안장 자격도 충분히 되었으나 본인의 유언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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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8월 10일에 올라온 탄생 101주년 기념 구글 두들. 좌측에는 호주제 폐지 및 가족법 개정을 위해 애쓴 법조활동을, 우측 상단에는 저술 및 학문활동을, 우측 하단에는 가정법률상담소를 운영하며 여성 및 가정문제 관련 상담활동을 하던 장면을 담았다. 여담으로, 생전에는 아직 여성 변호사가 증가하기 이전 시기라 사법시험 여성 합격자들이 사법연수원 입소 전후로 단체로 인사드리는 일이 잦았다.

7. 기타 이야깃거리


가족법 개정안 진정서를 들고 당시 대법원장김병로를 찾아가자 김병로가 "1,500만 여성들이 불평 한마디 없이 다 잘 살고 있는데, 법률줄이나 배웠다고 건방지게 법을 고치라고 나서다니!"라고 말했다고 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승만이 판사 임용을 거부할 당시 이태영을 임용할 것을 건의한 사람이 김병로였다는 것이다. 판사 임용을 건의할 권한이 대법원장에게 있긴 했지만 말이다.

8. 관련 문서



[1] 참고로 여성 최초로 판사에 임명된 인물은 제3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한 황윤석이다. 1954년 서울지방법원 판사에 임명되었다. 한편 여성 최초의 검사는 1980년 22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조배숙(임명 당시 서울지방검찰 검사), 박숙경(당시 인천지방검찰청 검사)이다.[2] 근현대 인물들은 특유의 정치 노선과 과실로 인해 평가가 크게 상반되는 경향이 있어, 지폐 후보자에서 쉽게 탈락하곤 한다.[3] 미국인 감리교 선교사가 세운 미션스쿨.[4] 남편인 정일형이 운동에 같이 참여했다[5] 1958년에는 김흥한, 장대영 변호사와 함께 국내 최초의 로펌인 김장리 법률사무소를 설립했으며, 김장리는 현재까지 법무법인 양헌(영문명 김장리)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