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4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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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나가던 시절의 G4M 초기형 편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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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8 라이트닝 전투기의 공격을 받아 격추되는 G4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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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XY-7 오카를 투하하는 G4M
海軍 一式陸上攻撃機 三菱 G4M
Japanese Navy Type 1 Land-based Attack Aircraft Mitsubishi G4M 'Betty'
1. 제원
- G4M1 11형 기준
- 분류 : 7인승 중형 폭격기
- 전장 : 19.97m
- 전폭 : 24.89m
- 전고 : 4.9m(수평자세)
- 익면적 : 78.13㎡
- 엔진 : 미쓰비시 MK4A-11 카세이 복열 14기통 공랭식 성형엔진 2기 (1,530마력)
- 자체중량 : 6,741kg (전비중량 9,500kg/최대이륙중량 12,860kg)
- 최대속도 : 428km/h
- 순항속도 : 315km/h
- 실속속도 : 120km/h
- 항속거리 : 5,037km[2]
- 무장
- 92식 7.7mm 기총 4정 (기수 포탑 1정, 좌우 측방 1정씩, 상부 포탑 1정)
- 99식 20mm 기총 1문 (후미 포탑)
- 폭장
2. 개요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미쓰비시사에서 일본 제국 해군을 위해 제작한 육상공격기[3] 이다. 정식명칭은 G4M 1식 육상공격기이다. 원래 일본 제국 해군은 항공기에 별칭을 붙이는 관례가 없었는데,[4] 그 때문에 연합군에서 붙인 식별기호 베티(Betty)가 더 유명해졌다.[5] 지금도 세계에서 태평양 전쟁을 다룰 때, 이 기체를 베티라 부르는 경우가 많다. 더불어 제로센과 함께 일본기체는 잠깐의 사격만 받아도 불이 붙어서 추락한다는 전설을 남겨준 기체이다. 일본에서는 1식 육상공격기를 줄여서 일식륙공(一式陸攻)이라고 부르고 있다.
일본 제국 해군의 주력 중폭격기였던 만큼 파생형들도 다양하여 G6M1-L2라는 수송형태도 있었다. 해당 형태는 방어기총좌를 줄이고 20명까지 탈 수 있게 했던 기종이다.
2.1. 개발
당초 미쓰비시사는 해군에게 4발 중폭격기 떡밥을 던졌으나, 해군에서는 미츠비시에서 쌍발 중(中)폭격기는 생산한 적이 있었으나 4발 중(重)폭격기를 생산한 적이 없어 빠르게 96식 육상공격기를 대체할 폭격기가 필요한 해군으로썬 긴 시간을 기다릴 여유가 없다는 점과 같은 값이면 쌍발 폭격기 2기를 생산할 수 있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문제는 미쓰비시사에서 제시된 스펙에 감동을 받은 해군은 오히려 '''쌍발폭격기에 4발 중폭격기급 스펙을 요구'''하였고 이 때문에 개발 과정에서 간신히 해군의 요구사항에 맞출 수 있었는데, 이게 훗날 원샷 라이터의 전설을 탄생시켰다.
당초에는 일본은 폭격기무적론에 힘입은 상태였지만 정작 선행기인 96식 육상공격기는 중일전쟁에서 적잖은 수가 손실되었고 결국 일본군은 방어에도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차후 서양의 주력이 될 20mm급의 기관포에 대한 방탄 성능을 내는 것은 킨세이에서 카세이로 엔진 출력을 높인 상태에서도 불가능했고 이에 개발진들은 차라리 최대속도와 고고도 성능을 높임으로써 피탄을 줄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여겨 방탄능력은 우선순위에서 뒤로 미루게 된다. 그러나 고도와 속력을 높여서 격추를 피한다는 개념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이러한 개념 자체는 일본 뿐 아니라 영국과 미국 또한 가지고 있고 냉전시기까지도 어느 정도 유효한 대응이었다. 독일 본토 항공전에서 폭격기들의 피해가 커지자 미국이 취한 조치 중 하나가 폭격기들의 작전고도를 올리는 것이었으며[6] 냉전기에 영국의 폭격기 아브로 벌칸과[7] 미국의 정찰기 U-2와 SR-71도 그런 개념이 적용되었던 만큼 개념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진짜 문제는 베티가 비행할 수 있는 고도에 베티보다 더 빠르게 날 수 있는 기종이 배치된 상황에서도 여전히 성능의 향상이 없는 베티를 운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개발이 완료된 베티는 선행기인 G3M 96식 육상공격기의 기록을 교훈삼아 이전보다 나아진 점이 크게 다섯가지가 있었는데,
- 동체 내부에 폭탄과 어뢰를 탑재할 수 있어 공기저항을 줄일 수 있었고
- 정교한 디자인으로 쌍발 중폭격기치고는 경쾌한 운동성을 가질 수 있었으며
- 96식이 쓰던 킨세이 엔진보다 진보된 카세이 엔진을 장착해 최대속도도 증가했다.
- 또한 방어화기를 증가시켰다.
- 마지막으로, 항속거리가 5,000km에 달했다.
2.2. 전성기
개발사의 의도는 아주 잘 맞아떨어져 태평양 전쟁 초기에는 여느 연합군 전투기보다 더 높은 고도를 날 수 있는 기체였다. 그 때문에 요격이 어려웠으며, 일본해군의 요구에 따라 초기 생산형은 4,000km의 항속거리, 후기 생산형은 6,000km에 달할 정도의 정신나간 항속거리로 "설마 여기까지 오겠어?"란 곳까지 나타나 공격을 하면서 연합군을 충격과 공포에 몰아넣었다. 실제로 미 항모전단도 몇번이나 뜬금없이 나타난 베티들에게 공격당한 적 있었다.[8]
또한 숙련병들이 모는 베티가 지닌 정확한 뇌격능력으로 인해 연합군 선단의 피해가 막심했으며, 그 때문에 태평양에서 활동하는 연합군 선단에는 "베티를 조심하라"는 경고문구가 있었을 정도. 그리고 이러한 베티의 활약에 노이로제가 걸린 연합군이 대규모 선단을 동원한 탈출작전을 포기하면서 바탄 반도에 고립된 미군과 필리핀군은 결국 일본군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고 바탄 죽음의 행진을 비롯한 각종 학대에 시달리며 비참한 운명을 맞이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외에 육상에서도 연합군의 주요 거점에 폭격을 가하며 육군의 진격을 도운 까닭에 초창기 동남아시아에서 일본군이 선전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하지만...'''
2.3. 몰락
베티가 높은 작전고도를 비롯한 비교적 우수한 비행성능, 특히 무엇보다 연합군을 당혹하게 만든 엄청난 항속거리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제로센을 비롯한 일본군의 여러 항공기들처럼, 기체의 "경량화"에 몰두한 결과였다.
이를테면 G4M1형은 미군의 B-25나 독일의 He 111 같은, 당시 미국이나 독일 등의 비슷한 포지션의 쌍발 중형폭격기들과 비교해보면, 익폭이나 동체길이 등 기체의 사이즈는 도리어 G4M 쪽이 좀 더 크지만, 반대로 자체중량은 거의 2톤 가까이 더 가볍다. 기체 중량으로 따지면 한 체급 아래인 영국의 보포트 등과 차라리 더 가깝다(심지어는 보포트 폭격기의 야간전투기 버전인 보파이터보다도 기체중량이 가볍다). 연료는 비슷한 양, 아니 심지어 더 많이 실으면서 기체의 중량은 다른 경쟁기종의 80% 미만이니 당연히 월등히 더 멀리 날 수 있었다.
덕분에 태평양 전쟁 초기의 화려한 전과의 주역이기도 했던 초기형 "G4M1"들은 따라서 방탄 장갑도 별로 설치되어 있지 않았고, 자동방루 연료탱크 등의 방어설비도 없었다. 그럼에도 당연히 다른 쌍발 중형폭격기들과 마찬가지로 동체 내부와 (더) 긴 주익에도 연료를 탑재하고서 말이다.
그 결과는 바로 상대적으로 가벼운 피탄에도 불이 붙어 격추당하기 일쑤인 기체가 된 것. 이는 전쟁 극 초반, 일본군이 거의 완전한 제해권, 제공권 우세를 누리던 시점이 끝나고 미드웨이에서 과달카날로 이어지는 피말리는 공방전에 접어들자 마자 극명해진다.
미군이 과달카날에 상륙한 다음 날인 1942년 8월 8일, 일본군은 어뢰를 탑재한 G4M1 폭격기 23대를 동원 룽가곶의 미군 함선들에 공습을 가했다. 그러나 F4F 와일드캣 전투기들의 요격과 대공포화로 23기 중 18기가 격추당하고, 120여명의 항공 승무원을 잃었다. 이후 1942년 10월까지, 2개월여 동안의 일본군은 과달카날 인근의 전투에서만 100대 이상의 G4M1와 승무원을 잃는다.
게다가 원래 '더 높은 고도로, 더 멀리서' 날아와 공격해서 전투기의 요격이나 대공포화에 노출될 기회를 줄이는 것으로 생존성을 높인다는 컨셉(으로 방어력을 '다이어트' 한 것)이었다지만, 다른 한편으로 베티는 중고도 및 고고도에서의 통상폭탄을 사용한 폭격 뿐 아니라 뇌격기로도 널리 사용되었다. 말레이 해전때도 26기의 G4M이 G3M '넬리'와 함께 작전에 참여,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즈에 3발의 어뢰를, 리펄스에 4발 이상의 어뢰를 명중시켜 치명타를 가했다.
그러나 과달카날과 솔로몬 제도 인근의 전장은, 적 전투기 세력의 위협도 거의 없고, 상대의 대공방어도 허점이 많았던 말레이 해전 등의 상황과는 전혀 달랐다. 상대의 항공엄호 밖은 커녕 정반대로, 바다에선 쌍방의 항공모함들이 사투를 벌이고 헨더슨 비행장에 자리잡은 캑터스 항공대가 날아다니는 쌍방의 항공전력이 치열하게 맞부딪히는 한복판이었다. 또한 과달카날의 미 지상군은 물론이고 특히 미 해군 함정들의 대공방어는 영국이나 일본해군 함정의 대공방어와는 차원이 다르게 충실했다.
과달카날 등에서 베티는 단독이 아니라, 주로는 역시 기나긴 항속거리를 자랑하던 제로센 전투기들의 호위를 받으며 공격임무에 투입되었다. 하지만 일본의 항모기동부대나 라바울 '타이난 항공대'의 전투기들이 연합군 항공전력을 일소해 준 것도 아닌 이상, 베티들은 언제나 반가이 맞이해주는 F4F 와일드캣, P-40 전투기들을(나중에는 P-38 라이트닝 전투기도 배치된다) 뿌리치고, 맹렬한 대공포화를 뚫고 들어가 헨더슨 비행장에 폭탄을 떨어뜨리거나, 심지어 "대공원형진"을 비집고 들어가 함선에 뇌격을 가해야 하는 고난이도 임무를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기체의 취약한 방어력과 일본군의 자살공격에 가까운 지나치게 공격적인 전술이 겹치며 G4M은 큰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앞서 언급된 룽가곶 공습 처럼 출격했던 기체의 대다수가 살아돌아가지 못하는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는 경우도 적잖았다.[9] 당시 라바울에 주둔하며 과달카날 전역에 투입되던 일본해군 제25항공전단에 원래 처음 배치된 폭격대는 제4항공대였으나, G4M을 주력으로 운용하던 이들은 전투 개시 한달여만인 1942년 9월, 지나친 손실을 버틸 수 없어 철수하고 만다.[10]
이런 사태를 예상한 설계자는 그래도 승무원들을 배려해서 후방 사수석에 방어무장으로 20mm 기관포를 설치해 주었으나,[11] 애초에 빠르게 지나가는 전투기들에게 탄속이 느려터진 99식 1호 기관포가 먹히기는 어려웠다. 사실 이건 방어기총으로 쓰인 다른 병기들도 겪었던 문제들로, 미국의 12.7mm 기관총은 탄속, 탄도 -그리고 제어- 가 매우 우수했음에도 불구하고, 겨우 10kph의 차이가 엄청난 결과를 만들어내는 공중전에서는 맞추기가 매우 어려웠다. 방어기총을 쏘는 입장에서는 12.7mm던 20mm던 빠르고 날렵하게 움직이는 항공기를 잡는건 매우 어려웠던 것이다. 그래도 20mm는 20mm라고 맞추기만 하면 위력만큼은 확실했기에 미군 조종사들은 항상 일본 폭격기의 후방 총좌를 주의하며 접근했다고 한다.
미국은 몇 번 상대해본 결과 탄환이 스치기만해도 불이 붙는다면서[12] '''"원샷 라이터"''' 또는 '''"날아다니는 지포 라이터"''', 모양이 시가랑 비슷해서 '''"날아다니는 시가"'''란 별명을 붙였다. 일본해군에서는 담배를 닮았다고 해서 '''''하마키(葉巻, 시가)'''''라 불렀다.
방어력이 좋다는 연합군의 중폭격기들도 많이 격추되기는 했지만 적어도 '원 샷 라이터' 또는 '플라잉 지포'라는 별명이 붙은 수준은 아니었다. 게다가 그 연합군의 중폭격기를 격추하기 위해서 독일은 20mm 기관포도 모자라서 30mm MK 108은 물론이고 MK 103도 탑재하려고 시도했으며 공대공 로켓까지 사용해야했다.
게다가 다른 일본의 비행기처럼 베티도 숙련된 조종사가 필요했으며, 신참 조종사가 조종하는 경우 대형폭격기의 특성을 넘지 못해 뇌격같은 어려운 임무를 할 경우 뇌격을 하기도 전에 연합군의 대공포에 쳐맞고 추락하는 일이 많았다.
결국 견디다 못해, 1943년 3월, 663번째 생산기부터는 주익 외판 안쪽에 30mm 두께의 고무시트를 붙여 연료탱크 아랫면의 방호력을 강화한다. 또한 동체 내부 연료탱크 주변에도 적층된 고무시트와 스폰지를 대는 조치를 취한다.# ## 그러나 이 시기의 대책은 완전한 자동 방루식 연료탱크를 설치한 것은 아닌, 연료탱크를 부분적으로 보강한 임시조치에 가까웠고, 제대로된 자동 방루식 연료탱크가 적용되는 것은 1944년, 후기형인 "G4M3"형에 가서야 이뤄진다.
또한 동 663호 생산기부터 후방 총좌 사수석에 방탄장갑을 설치하기 시작한다. 다만 5mm로, 후방 총좌와 같은 피탄위험이 높은 부위의 방어장갑으로는 다소 얇은 편이다. 그러나 임시방편에 가까운 이 정도 개수만으로 속도는 9km, 항속거리는 315km가 감소했다.
이후 1943년 후반 생산되기 시작한 G4M2에서는 기체 상부에 20mm 기관포탑을 증설하는 등, 방어무장을 강화하고, 비행고도를 8,950m까지 높인다. 그리고 1944년부터 생산된 G4M3에 이르러서는 앞서 말한 것처럼, 드디어 온전한 자동방루식 연료탱크를 장비하고 방어 장갑도 증설한다. 이 시점이면 사실상 설계 컨셉 자체가 바뀌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과달카날 전투 이후 G4M이 어찌어찌 허술한 방어력 등 취약점을 개선하려 안간힘을 쓰던 시점엔, 이미 미국은 신형 전투기들을 대거 양산, 태평양 전역에 본격적으로 투입하기 시작하였다. 전쟁 초반 몇 대 없던 육군항공대의 P-38 라이트닝들도, 이미 과달카날 전투 후반부엔 헨더슨 비행장에 배치되기 시작하며, 이어서 F4U 콜세어, F6F 헬캣이 해병대와 항모기동부대의 와일드캣을 교체한다.
여전히 제로센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던 일본 해군항공대 전투기 세력은 삽시간에 몰락했고, 베티보다 더 높이 날 수 있으며, 훨씬 고속 성능을 가진 기체들의 등장으로 인해 결국 제로센과 함께 야라레메카로 전락했다.
애초에 베티는 방어력이 우수한 게 아니라 높은 상승 고도와 기동성에 긴 항속거리를 더해 적기가 쫓을 수 없어 활약할 수 있던 기체이지만, 그 장점 세 가지 중 두가지가 의미없어진 것이다. 거기에 만만찮은 항속거리까지 지닌 P-38 라이트닝에 의해 이루어진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거 작전은 전쟁 후반기 G4M의 신세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결국 태평양 전쟁 후반부에는 카미카제 공격에 투입되거나, 유인 자살폭탄으로 유명한 MXY-7 오카를 견인해주기 위해 투입되기도 하였으며, 개조를 하여 B-29를 요격하기 위한 요격작전에도 투입이 되었다. 그래봤자 전쟁 전에 개발된 기체를 큰 개조없이 쭈욱 쓰고 있었으니 될 리가... 제로기보다 피탄면적이 훨씬 넓고 방어력은 더 떨어지며 훨씬 느린 G4M으로 반자이 어택을 하려는 것은 당시 미군의 방공망을 고려했을 때 너무 무모한 짓이었다. 별의 별 기체들을 총동원해야 했던 일본군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짓이었지만.
전후, 일본에서는 퇴역을 하였지만 인도네시아는 일본이 버리고 간 기체를 입수하여 1949년까지 운용을 하였다. 그런데 네덜란드와 독립문제로 다투면서 다 깨먹었다고.
앞서 언급되었듯, 일본제국 해군 연합함대 사령장관인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부건빌 섬의 일본군 전선 시찰을 위해 이 기체를 탔다가 일본군의 암호를 해독하고 출동한 P-38 라이트닝 편대의 기관포탄에 맞고 밀림에 격추되어 죽었다. 자세한 사항은 야마모토 이소로쿠 문서 참고.
무게중심이 기체 중앙에 있어서 이착륙 시에는 조종사를 제외한 나머지 승무원 6명이 기체 후미에 몰려있어야 했다. 문제는 승무원이 비행중 죽어서 승무원이 모자랄 경우. 이 경우에는 랜딩 기어의 브레이크를 풀로 밟았다가 툭 떼면 그 반동 때문인지 기체가 후미쪽으로 살짝 가라앉아서 그렇게 착륙했다고 한다.
2.4. 평가
제로센과 같은 운명을 지닌 군용기다. 철저히 공격성능 위주로 설계되어 다른 여러 것을 희생할 수 밖에 없었으니, 그렇기에 우수한 공격성능과 그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약점을 보이면서 전쟁 초부터 전쟁 말기까지 쭉 하늘을 날아다닌 군용기인 것이다.
단점만 있는 물건은 아니다. 연합국과 추축국을 통틀어 탑클래스에 들어가는 5,000km를 넘기는 무지막지한 항속거리[13] 는 그 자체만으로도 전략적인 가치가 상당한 것이었다. 여기에 능숙한 승무원이 있으면 상황에 따라서는 상당한 위협이 될 수 있는 것도 사실이긴 하다. 그래서 태평양 전쟁 말기까지 가끔씩이나마 단독이나 소수로 갑자기 습격하는 베티를 막기 위해 미군이 신경을 쓰긴 했다.
하지만, 결국 문제는 그들이 상대한 것은 '''물량과 질에서 넘사벽인 미국'''이었던 것이다.
2.4.1. 도움 될 글
G4M 베티를 타고 종전까지 살아남은 베테랑 파일럿 '타카하시 쥰'의 인터뷰 링크
3. 미디어 등장
워썬더 에서 일본 해군 중형폭격기로 등장한다.
쌍발기 답지않게 뛰어난 운동성능이 돋보이지만 방어무장이 빈약하며 한번 불이붙으면 절때 꺼지지 않는 매우 심각한 단점이 있다.
또한 급선회를 할시 허약한 몸체탓에 항력을 이기지못하고 날개가 부러진다.
히어로즈 인 더 스카이 에서는 오카를 장착한 프리미엄 폭격기 버전과 추축군 중형폭격기 20레벨 기체로 등장한다. 프리미엄 버전 항공기는 정규트리 기체에 비해 도색이 훨씬 더 화려하고 기체 디자인도 후기형 G4M을 모델링 하였다. 하지만 둘다 비행성능은 별로 안좋기에 초보자들이 정규트리 기체만 조금 탑승할뿐 공방에서 거의 안보인다.
배틀스테이션 시리즈에서 일본 폭격기로 등장한다. 특이한 점으로는 '''오카를 적재한 사양'''도 나온다는 것.
함대 컬렉션에서 1식 육공, 22형甲, 34형과 노나카대가 구현되어있다.
툼 레이더(2018)에서 잔해가 등장한다. 트리니티로부터 탈출하다가 강에 빠져 폭포 아래로 떨어질 뻔한 라라 크로프트가 잔해의 날개를 잡는다. 이후 부서지는 날개에서 가까스로 동체로 들어가나 이내 동체도 무너진다. 무너지는 동안 라라는 손에 묶인 밧줄을 잘라 포박을 푼 후 잔해에 있던 낙하산을 가까스럽게 잡아, 큰 부상은 입었지만 무사히 내려온다.
모바일 전투 비행 시뮬레이션 게임인 Gunship Sequel WW2에 일본 육군항공대 전투기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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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래에 겹쳐 보이는 비행기가 오카처럼 보이지만 다른 베티다.[2] 후기형으로 갈수록 길어진다.[3] 일본 제국 해군의 육상공격기는 육상기지에서 운용을 하며 적 선박에 대한 뇌격, 주요 거점에 대한 폭격, 주요 요인 및 물자의 수송 등의 다양한 임무를 수행하였다. 현대의 기준으로는 사실 '공격기'가 아닌 '폭격기'로 분류되며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다른 국가들이나 일본 제국 육군의 기준으로 보아도 역시 '폭격기'로 분류할 수 있는 기종들이었지만, 뇌격기로부터 발전하였다는 점(덧붙여 일본 제국 해군에서는 뇌격기를 '공격기'라고 호칭하고 있었다)이나 급강하폭격기로서는 쓸 수 없었던 점을 이유로 일본 제국 해군에서는 이러한 기종들을 '폭격기'가 아닌 '공격기'로 분류하여 '육상공격기'라 호칭하고 있었다.[4] 이후 수정되어 J1N 겟코부터 항공기에 별칭이 붙었다.[5] 히스토리 채널의 다큐멘터리 'SECRET JAPANESE AIRCRAFT OF WORLD WAR II'에 의하면 이 이름은 정보부 직원중 한명의 여자친구 이름이었다고 한다.[6] 당시 독일 공군의 주력 기종들은 3만 피트까지 올라오면 성능이 많이 저하돼서 요격에 어려움이 생기고 대공포도 유효한 피해를 주기 어렵기 때문이다. 다만 대전 초중기의 연합국 폭격기는 승무원 공간에 여압설비가 없었기 때문에, 히말라야 능선과 비슷한 조건을 버텨야 했다.[7] 이쪽은 아예 방어무장을 장착하지 않았다.[8] 엔터프라이즈 역시 42년 2월에 베티 편대의 공격을 받았으나 다행히 전부 피하는 데 성공하고 되려 베티 1기를 격추하는 데 성공한 기록이 있고,(정보 출저 'Battle 360') 렉싱턴은 베티 편대에게 공격당했으나 역관광하고 미 해군 최초의 에이스를 만든 바 있다. 하지만 모든 함선이 그런 것은 아니라서 랭글리 같은 경우엔 이 베티들에게 격침당하고 말았다.[9] 유럽전선의 미 육군 항공대가 B-17을 동원한 주간폭격을 중단하게 만들었던 일련의 대규모 손실의 대표적 사례의 하나였던 "검은 목요일" 즉, 1943년 10월 14일의 슈바인부르크 폭격 당시 격추당한 폭격기의 숫자는 전체 공습 참여 기체의 1/3 정도였다. 나아가 애초 거의 '자살임무'를 각오하고 수행되었다고 할 수 있던 "플로이에슈티 공습"에서 격추당한 B-24 폭격기의 숫자는 공습에 동원된 기체의 30% 정도, 기타 손상으로 귀환하지 못한 기체를 포함 작전 중 손실을 모두 합하면 약 절반 정도의 기체를 잃었다. 앞의 독일 상공에서 격추당한 B-17들은 호위 전투기 없이 폭격기 단독으로 수행된 주간폭격 과정에서 잃은 기체들이었다. 이를 비교해보면 - 비록 전투에 동원된 기체의 숫자가 훨씬 적어서 덜 크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손실 비율을 따져본다면 - 일본군의 베티들이 과달카날 전투를 치르며 입은 피해가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는지 알 수 있다.[10] 그런데 사실 제4항공대는 이미 그 이전, 1942년 2월 20일 부건빌 인근에서 항모 렉싱턴과 새러토가가 포함된 미 해군 제11기동부대를 공격하다, 투입된 17기의 G4M 중 15기를 잃는 큰 피해를 입은 바 있었다. 이 전투는 호위전투기 없이 공격하다, 미군 전투기들에 일방적으로 당한 전투이기는 했지만. 그리고 바로 이 전투에서, 미해군 최초의 에이스로 기록된 에드워드 오헤어 소령이, 하루에 G4M 5대를 격추시키며 에이스로 등극한 날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후 제로센의 호위를 받으며 이뤄진 과달카날 전역에서의 전투에서도 역시 큰 손실을 입는다.[11] 굳이 일본기에 한정하지 않더라도 방어기총으로 20mm면 상당히 좋은 편이다. 미국의 경우 12.7mm 기총을 사용했고 영국은 아예 7.7mm 기총이 방어무장이었다. 일본제 20mm의 성능이 많이 나쁘기는 했지만 그래도 20mm는 20mm라서 아주 무시할 물건도 아니다.[12] 많은 국가의 전투기들이 대부분 그렇지만 미군의 전투기들 역시 탄환의 궤도를 확인하면서(예광탄) 파괴력도 높이려는(소이탄) 의도로 '''소이탄과 예광탄을 철갑탄과 섞어서 쏘는''' 경우가 적지 않았었는데, 이것이 일본군의 폭격기들을 상대할 때 예상 이상으로 좋은 전과를 올리는 결과를 낳았다. 이를 알게 된 미군은 전훈을 반영하여 이후 대부분의 장탄을 소이탄으로 도배해 버리는 끔찍한(?) 짓을 하기도 했다. 특히나 G4M은 쌍발폭격기여서 피탄면적도 넓고 날개도 상대적으로 컸기에 피탄 확률이 더 높아서 많은 피해를 봤다고 한다.[13] 전략 폭격기 개발 자체가 지지부진한 독일은 말할것도 없고 영국의 아브로 랭커스터의 항속거리가 4,000km를 간신히 넘기는 수준이며 B-17은 3,300km 수준이다. 이보다 항속거리가 긴 기체는 B-24나 B-29 정도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둘리틀 특공대가 일본 본토를 때릴 당시 선정된 폭격기도 항공모함에서 발함이 가능하면서 폭장량도 좀 된다는 이유로 중형 폭격기인 B-25를 선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