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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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야채를 생으로 내놓거나 간단히 조리한 음식류 전반을 일컫는 이름이다.
2. 국가별 양상
2.1. 중국
이름 그대로 잡다한 재료를(雜, 잡) 모아 볶은(燴, 회) 요리이다. 다만 고기가 잡다하게 모일 일은 많지 않았으니 거의 대부분이 채소일 뿐. 따라서 채소만 잡다하게 모여 있으면 잡채이니, 이것 말고 다른 형식의 잡채 같은 것은 없고 이에 지역별로 잡채의 정의가 다소 달라진다. 간단하게는 어떤 채소가 들어가느냐가 달라지고, 추가적으로 이걸 데치느냐 찌느냐 볶느냐 어떻게 조리하느냐에 따라서도 지역 특색을 많이 탄다. 심지어 생야채를 그대로 썰어 내어 놓아도 정의상 잡채에 해당한다. 특히 기름을 좋아하는 광둥성 지방에서는 잡채의 재료를 고르게 익힐 수 있도록 일정한 크기로 채 썰어낸 뒤 땅콩기름이나 돼지기름을 붓고 냄비에 볶아 내어 주는데 이것이 한국에서 흔히 알려진 중국 요리로서의 잡채이다.
지역색도 있지만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사용 가능한 채소의 종류가 바뀔 수 있다보니 중국에서 잡채를 달라 하면 무엇이 나올지 모른다. 우리가 잘 아는 고추 같은 것이 가득한 잡채도 있는 반면 지방에 따라서는 생 머위나 고수잎이 잔뜩 들어간 잡채가 나오기도 한다.
단순한 메뉴인 만큼 중국에서는 (비록 그 스타일은 제각각이지만) 지역을 막론하고 상당히 대중화된 반찬으로, 한국에서도 김치를 요리가 아닌 당연히 밥상에 있어야 하는 기본 세팅으로 취급하는 것처럼, 잡채 역시 중국에서는 본래 요리로서 취급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김치를 따로 메뉴에 적어두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런 반면, 한국에서도 김치 맛으로 식당을 판별하듯이 중국에서도 잡채가 식당 맛의 척도가 되기에 허투루 할 수 없는 까다로운 음식이기도 하다.
2.2. 대만
대만에서는 잡채탕(雜菜湯 / 짜차이탕)이라는 요리가 있는데, 채미탕(菜尾湯 / 차이웨이탕)이라고도 하며 각종 잡다한 채소와 고기를 넣고 끓인 일종의 찌개이다. 중국의 '잡채'가 한국식 잡채에 각종 재료를 볶은 요리라는 점에서 비슷하기라도 하다면 타이완의 잡채탕은 애초에 완전히 다른 국 요리이다. 다만 간혹 당면을 넣고 끓일 때도 있는데 이렇게 되면 대한민국의 잡채와 조금이나마 흡사해진다.
2.3. 대한민국
한국식 잡채는 위의 중국식 잡채에서 기원하였으나, 한국에서는 '잡채'라는 이름과는 달리 당면이 주가 되는 음식이다. 외국에서는 한국 잡채를 국수의 일종으로 분류할 정도. '잡채'의 '채'는 중심에서 멀어졌지만 오히려 본래 이름인 '회'(볶는다)라는 속성은 여전하다.
기원만 동일하지 완전히 다른 요리가 된 상황이라 한국어 위키백과 '잡채' 항목에 해당하는 다른 언어판 항목도 전부 한국식 잡채만을 다루고 있다. 중국어 위키백과에서는 아예 잡채 항목 - 채소로 리다이렉트됨과 조선식 잡채 항목을 따로 만들었다.[1]
쉽게 쉬어버리는 음식이므로 한번 만든 후에는 되도록이면 빨리 먹는 것이 좋다. 냉장보관을 하면 좀 더 오랫동안 먹을 수 있긴 하지만 당면이 딱딱해지고 맛이 급격히 나빠진다. 이때는 프라이팬에 기름을 살짝 둘러서 데워먹으면 좀 낫다.
외국에서도 인기가 많은 한국 음식 중 하나이다. 특히 파독 광부 간호사들 에피소드에서도 보면 파독 광부 간호사들이 독일인을 대접할 때 가장 좋은 반응과 가장 먼저 빈 접시가 나가는 게 잡채일 정도로 해외에서도 아주 인기 많은 한식이다.
여러 가지 채소와 버섯, 고기를 잘게 썰고 당면을 따로 불려서 준비하는 등 만들 때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인데, 그런 것에 비하면 보조 반찬이기 때문에 특별한 날에만 먹는 경우가 많다. 만들기는 엄청 번거로운데 취급은 애매한 조연에 불과하고 보관도 어려우니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는 효율성이 떨어진다.
그런데 중국집 잡채 하듯이 불린 당면과 재료들을 한데 넣고 같이 간을 해서 볶으면 사실 훌륭한 메인메뉴가 된다. 심지어 업소용 고 화력도 필요 없다. 잔칫날 잡채가 맛이 애매한 이유는 대량생산을 위해 재료를 따로 익혀서 버무려 주기 때문인데, 그냥 작정하고 메인으로 하면 당면까지 간이 잘 배어서 딱히 조연도 아니다. 애초에 중국집에서 한국식 잡채를 안주로 팔고 잡채밥이 인기 메뉴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물론 수고가 들어간다는 것은 똑같지만, 메인메뉴를 만드는 거라 생각하면 딱히 더 수고롭지도 않은 음식이다. 당면이 쌀이나 밀(밥, 빵, 파스타 등)과 같은 주식용 탄수화물 역할을 하고 다양한 고명재료와 양념이 맛을 내준다고 생각하면 딱 파스타 비슷하게 한 끼가 되는 일품요리(한 그릇 요리)로 완성되며 여기에 피클(김치 등) 정도면 곁들이면 된다. 외국(특히 서구권)에서 비교적 인기가 좋은 요리지만 잡채를 먹는 외국인들은 보통 '파스타 비슷한 메인디쉬' 로 생각하고 먹지 한국처럼 반찬으로 생각하고 빵이나 밥과 곁들여먹는 경우는 드물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북한에는 없는 음식이다. 선박 조난으로 넘어온 북한 병사와의 인터뷰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음식이 뭐냐"고 물었을 때 "마른 국수(잡채)"라고 답했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없는 음식이라고.
2.3.1. 역사
2.3.1.1. 조선시대
흔히 잡채에 대하여 단순히 재료를 각각 구별하여 썰어 넣는 요리로만 치부하는 경향이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으로, 본래 잡채라는 요리는 대동법이 보편화되기 이전에 전국 팔도에서 진상#s-3된 재료를 각각의 특성에 맞게 다듬어 올리던 요리이다.
잡채는 조선시대에 한반도로 전해졌는데, 잡채가 대중적인 요리였던 중국과는 정반대로 조선에서는 진귀한 궁중요리의 하나로 정착했다. 당시 중국과의 교류는 사실상 '''사절단'''이 대부분을 차지했는데, 이 과정에서 중국에 파견된 사신들을 통해 상류층에 소개된 것이 계기인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에서의 잡채는 대중식이자 생활식이라 '''있는 재료를 대충 다 집어넣는''' 요리였는데, 조선에서는 수랏상에 오르다 보니 아무 재료는커녕 '''각종 특산물을 종류별로 다 투입하는''' 스타일이 된 것이 차이점. 궁중요리의 법도 자체가 팔도의 다양한 식재료를 고루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조선 팔도의 무수한 식재료를 다 집어넣는 식으로 잡다해지진 않았지만, 다채로운 나물, 채소, 고기 등을 각기 따로 손질하여 준비해야 했기 때문에 요즘 흔한 당면잡채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난이도의 진미였다고 전해진다.
애초에 잡채는 당면이 아니라 꿩고기를 가늘게 찢어서 만들던 요리였다. 여기다가 조리법도 간편하게 몽땅 한번에 볶는 식도 아니고 고생 많이 들어가는 찜이나 삶음 과정을 거친 후 젓가락으로 잡기 좋게 가늘고 길게 썰어내어 그 모양을 가지런히 내어 놓는 등 모양새 내는데도 상당히 정성이 많이 가는 음식이었다. 사실 지금 현재의 한국 잡채인 당면 잡채도 만드는게 상당히 번거로운 음식이다.
2.3.1.2. 현재
현대의 당면 잡채는 일제강점기에 등장했다. 잡채의 핵심이 되는 당면과 일본식 간장부터가 일제강점기에 들어왔다. 당면 잡채는 일본식 간장 없이는 절대로 맛과 색을 낼 수 없다. 일제강점기 신문에서도 오늘날과 유사한 잡채 제법이 확인된다. # .만두와 순대에 당면을 넣게 된 것과 유사한 경로로 보인다.
여기에 더해 원조 한국식 잡채는 원래 간을 하지 않고 대신 수라간에서 준비한 간장과 초장#s-1[2] 을 이용해 알아서 찍어 먹는 방식이었으나, 지금의 당면을 이용한 잡채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당면 특유의 텁텁한 맛이 강하기 때문에 소금이나 참기름 간을 하여 오늘날의 "무침"의 형태가 되었다.
지금도 면이 없는 잡채가 남아 있다. 대표적으로 전주시의 콩나물잡채를 들 수 있다.
2.3.2. 전설: 잡채로 국정을 살폈다?
'''민간 속설에 따르면''' 잡채에 다양한 재료가 들어가는 특성상 잡채가 수라상에 오르지 않거나 질이 나쁨을 보고 그 형편을 짐작게 하기 위하여 즉, 공무 시간이 아닌 밥을 먹는 중에도 국정을 살피고자 하는 의미가 있었다고 한다. 수라상에 오른 잡채 중 문제가 발생한 재료를 담당하는 지방에 대해서는 자연히 임금의 관심이 돌아가도록 하는 장치라는 것. 하지만 탐관오리들이 잡채만 열심히 만들어서 실상이 잘 전해지지 않았더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하지만 잡채 때문에 방납의 폐단을 막을 수 없었다는 것은 당연하게도 근거 없는 이야기다. 조선의 중앙집권형 관료제 시스템은 당시로서는 깜짝 놀랄 만큼 체계적으로 짜여 있었으며[3] 팔도의 작황과 상태는 각 고을 수령들과 관찰사들이 올리는 장계와 보고서를 통해 정리되는 것이지, 이 무슨 청동기 시대도 아니고 왕의 밥상에 오르는 음식의 질로 전국 상황을 알아야 할 만큼 주먹구구이지 않았다.
또한 실제 방납의 역사를 살펴봐도 이는 현실성이 매우 떨어진다. 지방 수령으로서 무엇을 특산품으로 상납해야 할지 정해져 있는데, 그것이 현재 작황이 좋지 않거나 더 나아가 아예 나지 않는다고 해서 보내지 않는다? 최악의 경우 불충으로 형벌을 받을 일이고, 좋게 풀려도 파직을 각오해야 할 일이다. 때문에 지방 수령들은 더 이상 그 품목이 자기 고을에 나지 않아도 어떻게든 쌀과 포로 대가를 지불하고 다른 지방에서 사서 상납을 했으며, 이는 고등학교 교과서 '방납의 폐단' 파트에도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이런 것이 방납의 진짜 폐단이지, 잡채 때문에 임금의 눈이 가려지고 지방에서 비리가 판쳤다는 이야기는 지나치게 허무맹랑한 썰에 불과하다.
잡채에 팔도의 온갖 재료가 들어가게 된 이유가 '팔도의 사정을 살피기 위해서'라는 것일 수는 있으나, 실제로 그랬다고 해도 이는 어디까지나 '''명분'''에 불과한 것이다. 진짜로 밥상머리에서만 민심을 살피는 나라는 없으니 안심하자.
2.3.3. 대한민국의 중화요리점
대한민국의 중화요리점에서는 고추잡채를 주로 취급한다. 고추나 피망 등의 야채 + 야채와 결을 맞추어 썬 돼지고기를 기름에 볶아내는 중국 요리 '청초육사'가 그 원형이다. 한국식으로 맛이나 형태가 다양하게 재구성되곤 하지만, 원 요리인 청초육사의 핵심은 '푸른 야채 + 고기의 볶음조리'에 있으므로 의외로 원형의 틀을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 영업하는 중화요리점에서 잡채밥을 주문하면 당면이 들어간 잡채밥을 내놓는다. 상기하였듯 한국의 70~80년대에는 당면 잡채도 명절날 아니면 먹기가 힘들었는데, 잡채밥이 유행한 시기도 그 즈음이기 때문이다.[4] 당면이 싫다면 고추잡채밥을 주문해야 한다. 잡채밥은 1987년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주범 김승일의 최후의 식사로 유명해지기도 했다.[5]
군산 지역에는 지역 명물로 매운 잡채가 존재한다. 고추잡채와는 다른 음식으로 지역 분위기상 분식으로 분류된다.
미국식 중화요리의 일종인 찹 수이는 이 잡채가 미국으로 건너가서 변형된 것이라고 한다.
2.4. 그 외 국가의 지역
그 외 오키나와의 참프루도 채소가 주가 되어 여러 가지 재료를 볶아 만드는 요리이다. 오키나와식 잡채라고 할 수 있는 요리로 고야(여주)나 스팸을 재료로 쓰는 경우도 있다.
필리핀 요리 중에 판싯(Pancit)이라는 게 있는데, 한국의 잡채와 제법 흡사하다고 한다.
3. 기타
- tvn 윤식당 시즌1과 시즌2에서 메뉴로 등장했다.
- 금붕어 주의보의 더빙에서 야키소바 빵을 잡채빵이라고 한다.
- 영화 데드풀2 한국판 포스터에서 칠면조 대신 잡채가 등장하였다.
- 김준호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다. 1박 2일(시즌 3)에서도 나왔는데 멤버들이 김준호의 집을 방문했을 당시 김준호의 어머니께서[6] 점심식사를 대접해주셨는데 잔치상 수준으로 많이 차려주셨으며 촬영에 함께한 스태프들에게도 직접 나눠주셨다. 그리고 김준호를 위해서 특별히 잡채를 준비해주셨으며, 김준호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잡채!"라고 굉장히 좋아했다(...). 그 반대로 윤시윤이 싫어하는 음식이다.
- 배구선수 송희채의 별명이기도 한데, 2018 제천에서 열렸던 KOVO컵 대회에서 엄청난 활약을 보여주며 팔보채로 진화했다.
- 먹으면 기분이 잡친다(...)는 말장난이 있다.
4. 관련 문서
[1] 중국은 전통적으로 한국을 조선으로 부른다.[2] 본래 조선 시대 임금에게 진상되는 수라에는 두 종류의 밥 뿐만 아니라 임금의 기호에 맞게 간장과 초장이 동시에 진상되었다. 다만 대부분의 경우 초장은 물리시고 결국 세자가 잡곡밥과 함께 먹는 경우가 많기는 했지만.[3] 조선왕조실록에 적힌 기록을 보다 보면, 지방고을의 수령뿐만 아니라 세금을 덜 낸 도민의 이름이나 신분도 하나하나 기록되어 있고, '''심지어 특정지역에 가뭄이나 자연재해가 일어날 때엔 피해를 입은 농민들의 이름까지 기록되어 있다.'''[4] 참고로 더불어 유행했던 중국집 메뉴는 갈비탕이었다.[5] 이는 공범인 마유미의 증언에 의한다.[6] 참고로 김준호의 아버지는 오랜 지병으로 인해 상태가 좋지 않으셨다. 그래도 다행히 살아 계셔서 소파에 가만히 앉아 계셨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