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대 국회의원 선거/정당별 결과/민생당/패배의 원인
1. 개요
지난 총선에서 국민의당은 26.74%의 정당득표율을 획득하였으나 후술할 요인들로 인해 국민들은 더 이상 민생당으로 대표되는 제3지대 세력에 지지를 보내지 않게 되었다. 이에 민생당 당원들이나 지지자조차 대놓고 말만 안 했지, 민생당의 패망을 예측하고 있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기반이 탄탄한 전남 남서부[1] 의 의석을 수성하고 봉쇄조항인 3%는 간신히라도 넘기며 국회에서 방을 빼는 대참사는 벌어지지 않을 것으로 예측하였으나 민생당은 그 대참사를 기어코 '''만들어내었다'''.
2. 직접적 원인 : 2016년 국민의당 돌풍 동력 상실
2016년 4월 20대 총선 당시 국민의당의 녹색 돌풍은 두 세력의 절묘한 조화로 가능했다. 세련된 정치력은 부족하나 대중에게 어필할 수 있는 새정치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던 안철수, 그리고 닳고 닳아서 참신함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어졌으나 오랜 기간 정치를 해오며 다져진 정치 기술과 호남에서의 탄탄한 조직력을 보유한 호남 정치인들이 서로의 장점으로 상대방의 단점을 잘 메꿀 수 있는 여건이 절묘하게 마련되어 있었고, 양자의 목표가 무능한 야당 교체 및 제3지대 세력의 구축으로 같은 방향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호남 정치인들이 호남홀대론으로 비노 정서를 자극하며 호남의 지역구 의석과 높은 득표율, 호남향우회의 지지를 벌어왔고 안철수는 중도주의 세력의 희망이라는 점을 강하게 어필하며 비례대표 의석을 벌어오는 보기 드문 조화를 이루며 2016년의 국민의당은 20대 총선에서 제3당으로 국회의 캐스팅보트를 자처할 수 있는 위치까지 올랐다.
그러나 막상 20대 국회가 열리고 보니 안철수는 생각보다 훨씬 정치적으로 미숙한 인물이었고, 호남 정치인들은 생각보다 훨씬 닳고 닳은 구태들이었음이 밝혀졌다. 원래부터 서로 다른 두 집단이 결합했다는 점에서 불안한 면이 있었지만 2017년 5월 국민의당 제보 조작 사건 등의 대형 사건도 터지면서 당 지지율이 5%대로 떨어지자 본격적으로 내부 갈등이 불거지기 시작하였고 2018년 이래로 당은 쪼개지고 합쳐지기를 반복하였다. 국민의당에서 바른미래당과 민주평화당으로 쪼개졌고, 바른미래당에서 새로운보수당과 미래를향한전진4.0 그리고 新 국민의당이 떨어져 나갔으며, 민주평화당에선 또 대안신당이 갈라져 나오는 등 국민의당이 제3당으로 약진한 이후 4년 내내 처절한 계파 갈등으로 잊을 만하면 일어난 이합집산은 누가 봐도 한심하고 민망한 추태의 연속이었다. 그 사이 20대 총선으로 가져온 호남과 중도층의 지지여론은 고스란히 더불어민주당으로 되돌아갔으며 이는 민주당이 180석을 얻어가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3. 근본적 원인: 반복되는 계파 갈등과 야합
더불어민주당 이전의 민주당계 정당을 이끌던 이들이 대한민국에서 그 누구보다도 잘하는 것이 하나 있었는데, 이렇게 피튀기는 계파 간의 내전을 벌이다가도 선거가 임박하면 상대 계파에 대한 원한과 증오를 훌훌 털어버린 척 손을 맞잡고 갑작스러운 화합에 나서서 '민주'와 '통합'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정당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원래 민생당은 '''민주통합당'''이라는 당명을 3당 통합 정당의 이름으로 사용하려고 했으나 선관위에서 불허당해 현재의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으니, 지금까지 이어졌던 악습, 즉 선 계파갈등 후 졸속야합의 주동자들이 현 더불어민주당보다는 민생당에 몰려 있음을 삼척동자도 알 수 있다. 손학규와 일부 호남 의원들이 남아있던 바른미래당, 정동영을 비롯한 호남 진보계 민주평화당, 박지원, 천정배 의원 등 동교동계의 대안신당은 21대 총선을 위해 2020년 2월, 대통합을 외치며 민생당을 창당했다.
속이 뻔히 보이는 이들의 대통합은 누가 봐도 선거용 야합에 불과했으며, 심각한 계파 갈등이 멈추리라 예상하는 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창당 직후부터 손학규계 김정화 현 공동대표와 정동영계 박주현 전 공동대표 간의 대립 구도가 지속적으로 형성되어 왔으며, 정동영계와 호남계가 최고위원회의에서 민주당 주도의 비례정당에 참여하기로 결정했을 때인 3월 18일부터 민생당이 최종적으로 비례연합정당 불참을 선언한 3월 20일까지 당내 갈등은 최고조에 달했었다.
4일 뒤인 3월 24일엔 정동영이 '''3당 합당을 사실상 철회'''한다고 밝히며 김정화 공동대표의 사임을 요구하는 등 당내 분란은 잦아들지 않았다. 또 3월 26일 손학규의 비례대표 2번 공천 논란이 일며 다시 또 극심한 내홍 속으로 빠질 뻔 했으나 3월 27일 안병원 공관위원장을 해임하고 민주평화당 출신 김명삼 신임 공관위원장을 임명하며 손학규계가 화해 제스처를 내밀어 간신히 갈등을 봉합하는 등, 당장에 이번 총선이 민생당에겐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당시 민주평화당이 했던 것처럼 당이 하나되어 호남에 상주해도 어려운 선거인데도 불구하고 '''총선이 한 달도 안 남은 시점에서도''' 계파 갈등과 공천 관련에 이권 다툼에 골몰했었다. 계파끼리 피터지게 싸운 끝에 만든 공천을 납득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차마 투표지 1번을 찍지 못해 울면서 겨자먹기로 민주당계 정당을 지지하던 불쌍한 유권자들[2] 에 의해 최소 제2당이 보장되던 시대는 이미 지났음에도, 민생당의 주요 정치인들은 여전히 그 시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3]
4. 결과: 분열과 연대 실패
계파 갈등과 반복된 분당, 탈당, 합당을 거치면서 김경진, 이용주, 이용호, 정인화 등 그나마 당에서 젊다고 할 수 있는 의원들은 이미 이 과정에서 답이 없다는 걸 깨닫고 무소속으로 나갔고[4] , 결국 당에 남은 것은 다른 당에 대비하여 상당히 노쇠한 의원들뿐이었다. 새로운 인재영입조차 기존 정치인[5] 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등 국민들에게 큰 호응을 얻지 못했고, 코로나 정국을 거치며 그나마 목포를 비롯한 경합이 점쳐지던 일부 지역구의 판세조차 뒤집어졌다.
또, 선거운동 기간 광주와 전남은 시·도당 선대위 구성도 하지 못했다. 각기 후보별로 알아서 선거를 치렀을 뿐 '''당 차원의 지원이나 전략은 없었다는 말이다.'''
4.1. 전략 실패: 통일된 선거전략의 부재
바른미래연구원(현 혁신과미래연구원)에서는 '''이념좌표는 ‘중도-중도진보’이지만 포지션은 확실한 야당'''으로 거듭나 여당을 대신할 중도-진보적 대안 정당으로 거듭날 것을 주문했다.[6] 그러나 이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따라서 민생당은 사실상 통일된 선거 전략 없이 선거를 치르게 되었다.
4년 전과 다르게 여론조사에서 열세를 보이자 다급해진 호남계 중진 의원들은 지역구에서 '호남 대통령'론을 들고 나왔는데, 호남 출신 대통령을 만들어 주기 위해 호남을 위한 정당인 민생당을 뽑아 달라는 논리였다. 이낙연이 호남 지역에서 민주당 지원 유세라도 하면, 민생당 의원들이 끼어들어 자기도 사진 찍히려고 접근하면서들 뒤엉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대표적인 예로, 김동철 의원은 자신이 '이낙연과 50년 막역지기'라는 점이 세일즈 포인트이고, 천정배 의원의 구호는 "호남 대통령을 만들겠습니다."였다. 자체 경쟁력이 너무나도 없는 나머지 '''라이벌 당의 대권주자'''의 인기에 얹혀가기를 선택한, 역사에 남을 해괴한 전략이었다. 제18대 총선 당시 친박연대(2008년) 정도를 제외하면 선례를 찾기 힘든 일인데, 친박연대와는 달리 민생당은 이낙연과 아무런 인적인 연대가 없으므로 더더욱 해괴한 일이다.
그러나 호남 유권자 입장에서도 호남 대통령을 만들려면 이낙연이 있는 당에 투표하고 이낙연을 밀어주면 그만이지, 아무 상관없는 민생당에 표를 주는 것은 상식을 뛰어넘는 행동이다. 따라서 이 기괴한 전략은 당연히도 실패하고 말았다. 천정배 후보는 "민주당에 몰표를 주는 것보다 민생당 천정배에게 표를 주고 호남 지역의 경쟁구도가 유지돼야 '호남 대통령'이 탄생하고 정치력을 가질 수 있다"며 갖은 머리를 짜내 억지 논리를 펼쳐보았지만 민주당에서는 기생충이냐며 비아냥대었다.
4.2. 지지층 결집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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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국민의당의 호남 지역구 의원들은 오랜 기간 민주당 중진 의원이었고, 열린우리당 분당 이전까지 민주당계 정당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이에 정치적 성향이 민주당과 크게 다를 바 없었고, 이들은 사실상 2014~2015년 새정치민주연합 내부의 당권 경쟁 구도가 극한으로 치닫자 나온 민주당 밖 민주당 중진 인사에 가까웠다. 때마침 새정치민주연합 내부에서 "영남 패권주의" 논란이 일었고, 2004년부터 약 12년간 민주세력의 주도권을 친노 세력에 내줬다는 호남의 상실감이 폭발하여 국민의당은 호남에서 성공할 수 있었다. 정동영 대표가 '''안철수와 문재인을 하나로 다시 뭉쳐 다가올 대선에서 승리하겠다'''고 TV 토론에서 말한 부분에서 이를 알 수 있다.# 당연히 호남인들은 민주세력이 대선 전까진 화해하고 보수 세력을 향해 같이 싸우길 원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제19대 대통령 선거 때 갈 곳 없는 보수 세력의 대안으로 안철수 후보가 각광받자 선거 승리를 위해서 국민의당은 문모닝으로 불리던 문재인에 대한 네거티브 공세를 민주당에 퍼부었고, 이는 보수 세력의 환심을 약간 사긴 했지만 호남인들의 기대와는 완전히 어긋났다. 따라서 2017년 4월부터 대선 직후 호남의 여론이 민주당으로 쏠렸고, '''전북 출신''' 김이수 헌재소장 후보자 부결을 '''국민의당'''의 일부 인사가 주도한 결과 호남의 여론이 완전히 민주당으로 넘어갔으며, 민주평화당 창당으로 '''구태 이미지가 강화되었고''', 국민의당을 향한 호남의 지지가 대부분 민주당으로 향했다. 민주평화당은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모든 당력을 호남에 총동원하여 선거를 치뤘으며, '''여당 2중대'''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친정부적인 스탠스로 김이수 헌법재판소장 부결 등으로 가해진 반정부 이미지를 상당 부분 희석시켜 함평군, 고흥군, 해남군, 고창군, 익산시에서 기초자치단체장을 당선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5명의 시장/군수들마저 함평군수는 선거법 위반으로 군수직을 상실해버려 21대 총선과 동시에 실시한 재보궐에서 민주당에게 넘겨주게 되었고, 나머지 4명은 선거 패배에 충격을 받아서 그런지 시/군정 운영에 차질을 빚을 것을 감안하여 현재 탈당하여 무소속인 상태이다.
그러나 하나로 합쳐도 선거에서 이기기 어려워진 호남계가 바른미래당 창당 때 한 번, 정동영 대표 체제 하에서 민주평화당이 급격한 진보화를 거치며 또 한 번 총 셋으로 분열되어 버렸고, 재보궐선거에서 민주평화당 후보가 민주당 후보를 꺾고 당선되는 것을 지켜본 호남계 의원들은[7] 선거 직전까지 지난 지방선거보단 나을 것이라며 '''"또 통합하면 이길 수 있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화학적 결합을 시도했다. 그러나 "친문 패권 견제"와 "야당 내 영남 패권주의 말소"등 그럴 듯한 명분이 존재했던 지난 2016년 국민의당 창당과 민생당 창당은 결이 달랐으며, 이미 추태를 지켜본 호남인들의 환심을 사기엔 너무나도 어려웠다. 이에 '''호남인들의 민생당을 향한 지지는 완전히 거두어졌다'''.
5. 마이너스 통합
국민의당 출신 바른미래당 내부 반문계 인사들이[8] 新 국민의당과 미래통합당으로 빠져나가는 것도 제어하지 못했다. 이들은 바른미래당에서 그나마 '네임드'였고, 지역주의와 구태 이미지가 적어 이들은 당의 귀중한 자산이었다. 이들만 빠져나간 게 아니라 변지량 전 춘천시장 야권단일후보 등 지역의 영향력 있는 인사가 함께 빠져나갔고, 이는 당 조직에 큰 위기로 작용하였다. 영남 지역 인사들은 대체로 민주당으로 빠져나가는 경우도 있었다.
또 정동영 대표 체제의 민주평화당이 상당히 공들였던 소상공인과 택시기사·재건축 조합원 등 사회적 약자 계층의 민생당 참여가 정동영계가 당권을 장악하지 못한 관계로 난항을 겪으며 끝내 참여가 성사되지 못했으며,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과의 협력 관계도 크게 영향을 주지 못했다.
[1] 목포시 등 전남 서부와 고흥군·보성군·장흥군·강진군 등 전남 남부는 동교동계의 정치적 기반이라 지지율이 높다.[2] 여기에는 '''호남권을 포함하여''' 전국 유권자들이 모두 해당된다. 어떻게 보면 민주당의 기존 지역주의 공고화가 아니라 민생당의 기존 지역주의 붕괴일 수도 있겠다.[3] 그나마 박지원은 김어준의 뉴스공장 4월 23일자 방송에서 "선거 직전까지 계파 갈등 등 분란이 워낙 많아서 민생당이라는 말을 쓰지도 못했다"라고 하며 아울러 "우리는 원체 잘못 했으니까(지는 게 당연하다)"라고 밝히는 등# 그나마 상황 파악은 하고 있었다. [4] 그러나 이들마저도 이용호를 제외하면 모두 민주당 후보들에 밀려 모조리 낙선했다.[5] 김성제 전 의왕시장, 양승숙 전 국회의원 후보, 임한솔 전 서대문구의원[6] 단 이 전략에도 문제가 있었다. 친정부 성향이 강한 호남 지역구 선거의 판세를 인물론이 아닌 정권 찬반으로 갈라버릴 수 있는 위험한 전략이었고, 만약 이러한 계획이 실현되었으면 선거 중반까지 경합 구도를 이어오던 전남 서남부권의 판세가 당장에 여당 쪽으로 넘어가 버릴 수 있었다. 이에 당의 실권을 쥔 호남의 중진 의원들에게 당연히 먹혀들 리 없었다.[7] 사실 이기지 못하면 이상한 선거였다. 민주당이 모든 당세를 통영시·고성군에 결집했듯 정동영계가 '''서신동에 상주하다시피 하며''' 열성적으로 선거운동을 했고, 민주당 후보는 지역에 알려지지 않았던 신인인 데 비해 최명철 당시 후보는 전북도의원을 지냈던 비교적 거물 인사였다. 또 민주평화당이 창당한 지 1년이 넘어가며 지방 조직도 안정되었었다.[8] 대표적으로 구 손학규계인 이찬열 의원, 장진영 변호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