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순이

 

'''인순이
Insooni
'''
<colbgcolor=#878787><colcolor=#ffffff> '''본명'''
'''김인순''' (金仁順)
'''출생'''
1957년 4월 5일 (67세)
경기도 포천군 청산면 백의리[1]
'''국적'''
[image] 대한민국
'''신체'''
166cm[2], 50kg, B형
'''학력'''
연천청산중학교 (졸업)[3]
'''가족'''
배우자 박경배, 딸 박세인[4]
'''데뷔'''
1978년 희자매 1집 앨범 <희자매>
'''소속사'''
휴맵컨텐츠
'''종교'''
천주교(세례명: 세실리아)
'''경력'''
해밀학교 이사장 (2013 ~ 현재)[5][6]
'''대표곡'''
밤이면 밤마다, 아버지, 거위의 꿈, 친구여
'''외부 링크'''
[7], [8], [9]
[10], [11], [해밀학교]
1. 개요
1.1. 성장 배경 및 개인사
2. 가수로서의 생애
2.1. 데뷔
2.2. 전성기와 슬럼프
2.3. 제 2의 전성기
3. 가수로서의 실력
4. 자기관리와 도전 정신
5.1. 나는 가수다에서 불렀던 경연곡
6. 기타
7. 사건사고/논란
7.2. 거위의 꿈 정치색 논란
7.3. 미미시스터즈 무례 질타 사건
7.4. 탈세 사건

[clearfix]

1. 개요


'''시대를 넘나드는 파워 보컬리스트'''

엠넷 레전드 아티스트 100에서의 소개문구

대한민국의 솔로 여자 가수이자 교육자이다.
1957년 4월 5일 생으로 본명은 김인순, 가톨릭 신자로 세례명세실리아다. 1978년 3인조 걸그룹 희자매로 데뷔하고 1981년부터 솔로 가수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히트곡 없는 국민가수'라는 평이 있고, 인지도나 위상, 가창력치고는 본인만의 오리지널 히트곡이 적은 것은 사실이다. <친구여#s-2>는 조PD의 곡에 피처링한 거고, <거위의 꿈>은 카니발의 노래를 리메이크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세대를 뛰어넘어 모두에게 기억될 정도의 곡이 적은 것일 뿐, 세자매 시절에도 김소월의 시에 곡을 붙인 <실버들>, 윤종신이 리메이크해 더욱 알려진 김형석의 데뷔작인 발라드 <이별연습>, 90년대박진영과 협업한 <또> 등은 상당한 인기를 얻은 히트곡이다. 나는 가수다 출연 이후로 <'''아버지'''> 역시 뒤늦게 상당한 히트곡이 되었다. 어쨌든 스탠더드에 가까워진 <'''밤이면 밤마다#s-1'''>가 있기 때문에 본인의 히트곡이 적다고 볼 순 없다.

1.1. 성장 배경 및 개인사


유명한 사실이지만, 한국인 어머니흑인 주한미군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아프리카계 혼혈 한국인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한국에서 인순이가 태어나고 나 몰라라 식으로 대처하고 떠났기 때문에 인순이는 아버지를 본 적도 없다고 한다.[12] 12살 때 미국에 있는 아버지로부터 미국행을 제안받았지만 혼자 남을 어머니를 생각해서 거절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몇번 편지를 주고 받은 적이 있지만 이후 연락이 끊어졌다고 한다. 기사 당시 홀어머니 혼자 키우는 대부분의 가정이 그렇듯 경제적으로 매우 빈곤했으며 인순이는 힘겹게 중학교를 졸업했다고 한다.
지금은 과거에 비해선 매우 나아졌지만 아직도 혼혈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 마당에, 1960년대대한민국에서 혼혈, 그것도 흑인 혼혈이고, 아버지가 없는 미혼모의 딸(인순이)에 대한 주변의 시선은 매우 좋지 않았다.[13] 어렸을 적 뿐만이 아니라 가수로 성공한 이후에도 이러한 차별은 은연중 따라다녔다. 결국 이는 인순이의 인생에 커다란 상처로 남게 되었다. 익히 알려진 사실 중 하나지만 인순이가 과거 1970년대 희자매로 활동하던 시절 흑인 혼혈 특유의 곱슬머리 때문에 방송에 나올 때에는 머리에 천을 둘러야 했다.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기까지 매우 오랜 기간 동안 정체성 혼란에 시달렸다고 하였다. 기사 방송에서 말하길 자신의 집(home, 고향)은 한국미국 사이에 있는 바다(태평양)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현재에는 자신은 한국인이며 애국심이 강한 사람이라고 말하였다. 혼혈로 자라면서 학창 시절이 힘들었기 때문에 강원도 홍천군에 다문화 대안학교인 해밀학교를 세웠으며, 대한민국 교육부에게 정식 인가받은 중학교이다.
인순이의 자녀로는 외동딸이 있는데 원정출산을 했다고 고백하였다. 만약에 딸이 자신을 닮아서 동양인과 흑인의 혼혈 외모가 두드러지게 태어난다면 한국이 아닌 미국으로 이민보내려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은 한국에서 인생을 보내기로 결심했으며 한국 가수로 쭉 살아야 하는데 만약 딸과 헤어질 수 없다면, 딸에게 외국 시민권이라도 있어서 외국인학교에 다닐 수 있게 해준다면 학교에서 자신이 받았던 차별과 놀림을 조금이라도 덜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출산 직후에 귀국하여 라디오 출연해서 자신이 원정출산을 하고 왔다고 '''“'''마음껏 욕해 달라'''”'''고 대중들에게 솔직하게 고백했지만 심지어 90년대 당시까지만 해도 흑인 혼혈에 대한 사회의 차별 의식은 어마어마했기에 대중들에게 그다지 비난받지는 않았다. 출산 이후에 딸의 외모가 아버지를 많이 닮아서 다행히 딸과 헤어지지 않을 수 있었으며 딸을 한국에서 한국인으로 키웠다고 하였다.[14] 기사1 기사2 기사3

2. 가수로서의 생애



2.1. 데뷔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터라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진학은 꿈도 꾸지 못한 채 생계 활동을 시작해야 했다. 그때 김완선의 이모이자 프로듀서로 잘 알려진 한백희의 눈에 들어 가수 생활을 시작한다.
먼저 가수 한백희의 무대에서 백댄서로 일하다가 우연히 인순이의 노래 실력을 본 한백희가 자기 대신 인순이를 무대에 세우며 가수로서의 길을 시작했다. 인순이의 고백에 따르면 '연습생도 뭣도 아니었고[15] 그저 한백희를 따라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 시작한 가수 생활'이었다고 한다.
1978년 3인조 걸그룹 희자매의 멤버로 데뷔했다.

2.2. 전성기와 슬럼프


희자매의 첫 앨범 타이틀곡 '실버들'로 가요차트 7주 1위를 하였다. 1970년대 후반에 '바니걸스', '숙자매'와 함께 ‘걸그룹 트로이카’를 형성하며 많은 인기를 얻었다.
대히트를 친 희자매는 오래가진 못 했지만 다른 멤버들이 탈퇴한 후에도 그녀는 한백희를 따라 1981년부터 솔로로 활동하게 되었으며 지금도 많이들 부르는 '밤이면 밤마다'가 1983년에 공전의 히트를 쳤다. 또한 그 후 '인순이와 리듬 터치' (당시영상)로 활동했는데 '리듬 터치'는 한마디로 인순이의 뒤에서 춤을 추는, 지금의 백댄서 개념의 팀이었다.[16]
하지만 1980년대 후반부터 그녀에게 슬럼프가 찾아왔고 이 와중에 한백희가 김완선을 데뷔시키고 뒷바라지에 집중하게 되면서 한백희와의 관계 역시 끝났다. 이때 인순이가 무릎팍도사에서 밝힌 바로는 한백희에게 '너는 지는 해, 그 아이는 뜨는 해' 라는 말을 들었다는데 사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논란이 있긴 하지만 한백희의 생전 성격을 봤을 때 저보다 더 심한 말을 했을 수도 있다.[17]
인순이는 한백희에 대해 섭섭한 마음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그녀가 없었다면 데뷔도 할 수 없었을 거고 마지막 말이 없었다면 다시 일어설 수 없었을 거다' 라면서 그리워하기도 했는데 한백희의 조카인 김완선도 똑같은 애증을 밝힌 적이 있다.
여하튼 한백희와 헤어진 이후로 인순이에게는 긴 슬럼프가 찾아오고 이때부터 TV 활동이나 가수로서 화려한 무대는 거의 오르질 못하고 주로 야간 업소 혹은 복음성가 계열 등의 공연을 돌게 된다. 이 시기의 대표곡으로는 트로트 풍의 '착한 여자(1992)'이지만, 그것보다 더 유명한 곡은 김형석이 작사 작곡한 '이별연습(1989)'.[18] 그리고 '착한 여자' 이후 결혼과 출산으로 긴 공백기를 가졌다.

2.3. 제 2의 전성기


이후 90년대 초 KBS '열린음악회'가 인기를 끌던 당시 이 프로에 자주 나와 댄스, 트로트, 재즈, 스탠다드에 민요까지 다양한 장르의 노래를 완벽하게 소화해내는 모습을 보이면서 대중의 눈에 다시 들어왔고 이에 박진영과 작업한 '또(1996)'로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녀는 여기서 '트로트 가수로 머무르는 게 아니라 소울이라는 영역에 도전할 수 있었다'고 밝혔는데 엄밀히 말해서 '또'는 정통 소울보다는 테크노 댄스 음악을 기반으로 한 노래였지만 한국 나이로 마흔에 '트로트'가 아닌 다른 장르에 도전하는 정신이 비범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 그 결과 1996년 하반기 가요 차트에서 10위권 내에 오르면서 선전했다.
그 후 2004년 조PD의 히트곡 '친구여'에 피처링으로 참여했으며 그 결과 유일하게 차트제를 운영한 음악캠프에서 3주 연속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고 지금도 친구여 노래하면 그녀의 노래라고 착각할 정도로 젊은 세대뿐만 아니라 기성 세대들까지 큰 인상을 남겨주었다. 또 2006년에 원곡이었던 Jean Roch의 Can You Feel It을 리메이크한 '열정'을, 2007년에는 이미 10년 전에 발표한 카니발의 '거위의 꿈을 리메이크[19]하는 등 리메이크곡을 연달아 활동곡으로 히트치면서 과거 '밤이면 밤마다'를 통해 그녀를 기억하는 세대뿐만 아니라 10대와 20대에게까지도 유명한 가수가 되었다.

3. 가수로서의 실력


슬럼프였던 시기 밤무대 가수로 활동하던 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실력에 대해 '''아직도''' 편견을 가지고 있으며 '밤무대 뛰다 출세했네' 라고 비꼬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는 '''인순이의 실력을 평가절하하는 것'''. 인순이는 대한민국 여가수 중 가창력에 있어서는 전설적인 존재이다. 오히려 침체기에 댄스 음악이 아닌 다른 여러 장르들을 시도하면서 인순이가 소화할 수 있는 장르의 폭이 넓어졌고 음악적 깊이도 그만큼 깊어졌다고 할 수 있다.
'거위의 꿈' 뿐만이 아닌 모든 노래에서 드러나지만 인순이의 발성은 음역대가 굉장히 넓다. 단순히 폭이 넓은 정도가 아니라 저음, 고음 모두 꽉 차있고 매우 안정적이다. 고음을 못 올린다는 트집을 잡는 사람들도 있는데 '''택도 없는 소리다'''. 한때 조PD의 '친구여' 가 유행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인순이의 피처링 부분을 쉽게 보고 도전했다가 좌절했다.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카니발이 어디 가서 쉽게 발릴 그룹이 아님에도 '인순이-거위의 꿈' 라는 공식이 생길 만큼 실력하나는 확실하다. [20]
음색이 다른 여가수들에 비해 탁하고 굵은 편이기에 그렇게 생각하는 건지도 모르지만 인순이의 고음은 다른 가수들보다 높으면 높지 낮지 않다. 보통 여가수들이 온몸에 힘을 주고 인상을 찌푸리며 내는 곡의 절정 부분에 가서야 한두 번 '찍고 내려오는' 정도로 등자하는 3옥타브 미(E)나 파(F)정도 되는 음을 춤을 추면서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불러버리니까(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고음을 못 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러니까, 고음을 참 편안하게 내기 때문에 '고음을 내면서도 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케이스. 예를 들어 이 글의 밑부분에 있는 인순이가 부른 '링딩동' 에는 미(E)가 엄청나게 자주 나온다.[21] 게다가 애초에 보컬의 자질을 고음 하나로만 따지려 드는 건 고음병 걸린 사람이나 하는 짓이다.
거기에 갖가지 장르를 넘나들고 또 그것을 훌륭하게 소화해내는 역량과 테크닉도 가히 압도적. 단순히 그녀를 트로트 가수로 평가절하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트로트라는 장르가 무시 받을 만한 장르는 아니며 또 저 나이와 저 세대에서 인순이만큼 다양한 장르를 자연스럽게 넘나드는 가수도 찾아보기 힘들다.
조선일보에서 김연우 등의 보컬 트레이너들을 대상으로 한 최고의 보컬리스트에서 여성 부분에서 80년대에 이선희에 이어서 2위를 차지했으며 또한 2000년대에도 3위를 차지하였다.# 또한 음악 전문가 20인이 선정한 '가장 노래 잘하는 가수' 에서 조용필, 이승철에 이어서 3위를, '기술적 능력이 가장 뛰어난 가수' 에서 이승철, 김범수에 이어서 3위를, '감성 전달 능력이 뛰어난 가수' 에서 역시 공동 3위에 오르면서 다양한 측면에서 뛰어난 능력을 지닌 가수로 모두가 인정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
보컬로서는 매우 좋은 평가를 받지만 뮤지션으로서의 역량은 글쎄. 상술했듯이 본인의 온전한 히트곡이나 명반이 없다. 실제로 17장의 정규 음반을 발매하는 긴 세월 동안 인순이가 대중적으로 히트한 곡은 '밤이면 밤마다', 리메이크곡 '거위의 꿈', 피처링을 맡은 조PD의 '친구여', 신중현의 리메이크 앨범 정도이다. '''2000년대 들어서는 2000년대 초반에는 <친구여>, 2000년대 후반에는 <거위의 꿈>으로 나뉠 정도.''' 34년차 가수라는 경력이 무색한 히트곡 앞에 국민가수 칭호를 붙일 수 있는지는 의문. 이선희조용필 같은 국민적 지지를 받는 가수들이 단순히 노래를 잘한다는 이유만으로 칭송받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가요계의 역사를 재조명한다고 할 때 인순이가 어느 정도의 위치를 차지할지는 다소 물음표가 남을 수밖에 없다.
때문에 나가수 출연을 아쉬워하는 팬들도 많다. 나가수 출연으로 인순이의 히트곡에 대한 대중들의 인식이 리메이크에 집중된다면 그동안 인순이가 해왔던 수많은 실험과 음악적 도전이 폄하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와 함께 인순이가 앞으로도 창작적으로 뛰어난 음반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건 아닐지 하는 우려 때문이다.
다만 이런 '예술가'로써의 역량 부족에 대해서는 본인도 일찌감치 인정하고 받아들인 부분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게 나는 가수다에서 김현철이 인순이와의 일화를 이야기한 것. '다른 가수들이 다 나는 아티스트라고 주장할 때에도 인순이는 나는 싱어라고 했다.' 라는 대목인데, 정말 인순이의 커리어를 매우 잘 요약한 일화이다. 싱어, 노래를 잘 부르는 가수로써는 최고의 경지까지 올라갔지만 아티스트, 영향력 있는 예술가로써의 위치는 그에 못 미치는 가수가 인순이다.
종합적으로 보자면 가요계에서 손가락에 꼽힐 '''보컬리스트'''라고 할 수 있다. 다양한 도전과 그에 비롯한 수많은 장르에 대한 섭렵 등 가수로서 정점에 이른 것은 분명하나, 싱어송라이터나 뮤지션으로서의 성과는 부족한 편. 이는 보컬계에서 손꼽히는 김범수를 비롯한 타 보컬리스트들과도 궤를 같이 하는 부분이다.

4. 자기관리와 도전 정신


사실 이 제 2의 전성기가 찾아온 인순이의 진정 위대한 점이라고 한다면 '''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다른 장르에 도전하는 도전 정신과 철저한 자기 관리라 할 수 있다. 래핑, 댄스, 소울, 미디엄 템포, 발라드, 트롯, CCM 등등.
운동과 식이요법을 통한 건강 관리와 철저한 연습, 목 관리는 존경받아 마땅하다. 인순이와 동년배의 여가수들이 모두 활동을 접거나 디너쇼 등 특정 세대만을 공략하는 데에 비해 인순이는 여전히 넓은 연령대를 대상으로 다양한 도전을 펼치고 있다.
유희열의 스케치북에 나와 샤이니의 링딩동을 '''혼자 부르고 춤추며 소화하기도'''. 팔팔한 10대 20대 청년 다섯명이 합동으로 부르고 춤추는 무대를 당시 50이 넘은 가수가 혼자 소화해내는 모습은 상당한 임팩트였다.

2016년 상반기에는 머슬퀸 프로젝트에 출연했는데, 같은 팀으로 나온 후배 유정연은 "연세가 많으신데 나보다 운동도 잘하시고 몸도 정말 좋으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참고로 정연은 96년생으로 인순이와 약 마흔살 차이가 난다.

5. 나는 가수다 출연


나는 가수다의 원년 멤버 YB, 김범수, 박정현이 무대를 떠나면서 2011년 8월 21일 방송분을 통해 윤민수, 바비킴과 함께 합류했다. 인순이의 나는 가수다 합류에 대해 자문위원단 사이에서도 논란이 있었는데 인순이 같이 ''''레전드급 가수가 나는 가수다에 출연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게 논란의 원인. [22]
나는 가수다 데뷔 무대인 가수 선호도 조사 공연에서 마지막 순서로 등장하는데 무대 등장부터 '''나가수를 정리하겠다'''[23]는 듯한 모습으로 최종보스의 포스를 뿜어내더니 본인의 17집 수록곡 '아버지'를 열창하며 27.7%의 압도적인 지지율로 1위를 차지했다. 임재범의 '여러분'에 이어 역대 득표율 2위. 임재범이 '여러분'을 불렀을 때와 마찬가지 분위기로 관객들도 가수들도 매니저들도 그리고 인순이 본인도 모두 눈물을 흘리는[24] 폭풍감동의 무대가 연출되었다.
나는 가수다에 합류한 이유는 ''''인순이가 나가수에 출연하면 하차하겠다''''는 박명수의 발언을 듣고 박명수를 하차시키기 위해 출연했다고... 결국 박명수를 하차시키는 대신 자신의 매니저로 삼아 '''끝까지 고통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는 건 반 농담이고 "이렇게 가수마저 긴장시키는 무대를 언제 또 해볼 수 있을까, 놓치면 후회할 것 같다"라는 진짜 이유를 인터뷰에서 밝혔다. 또한 자신은 나이에 얽매이게 되면 결국은 아무것도 못하게 될 것 같다며 계속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싶다는 의욕을 보였다.
그 이후 1차 경연에서 진주의 '난 괜찮아' 를 부르게 되었다. 자문 위원단은 최적화된 공연, 즉, 인순이에게 맞는 곡이 인순이에게 맞는 스타일로 인순이에게 맞게 불러졌다고 평가했고 비록 3등을 했지만 모든 매니저가 다들 그녀가 1등을 할 것이라 예상했다.
2차 경연에서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 를 불렀다. 할 말이 없다. 직접 들어보자. 관중석에서 눈물을 흘리는 이들이 속출할 정도. 중간에 자신의 인생살이를 나레이션으로 읊는 대목이 곡을 한층 더 끌어올렸다.[25] 1위를 예상했지만 1차 경연까지 성적이 저조했던 자우림이 '''이번에 실패하면 탈락이니까 장렬하게 전사할 각오'''로 노래를 불러 1위를 가져갔고 자신은 2위.
7라운드 1차 경연에서 박정운의 '오늘 같은 밤이면'을 불러서 또 2등을 했다. 계속 상위권에만 머무르는 셈이다. 이런 장르의 미디엄 템포의 곡은 처음으로 해본 것이었다는 게 흠좀무. 자문위원단 중 한 명은 브로드웨이에서의 공연을 본 것 같다고 평가하였다.
조용필 스페셜로 치러진 7라운드 2차 경연에서는 조용필의 '그 겨울의 찻집'을 불렀다. 애절한 무대를 선보이긴 했지만 탈세 논란 등으로 인해서인지 컨디션이 다소 떨어진 듯 평소만큼의 당당함은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순위는 4위.
이후 나가수 첫 듀엣 경연으로 펼쳐진 8라운드 1차 경연에선 가수 김도향과 함께 그의 명곡인 '바보처럼 살았군요'를 명쾌한 분위기로 풀어내는 모습을 보였으나 자문 위원단으로부터 "꼭 신나게 갔어야 했는가가 아쉽다"라는 평가를 받으며 나가수에 들어온 이후 첫 하위권인 5위를 기록하면서 위기에 빠졌다.
하지만 호주에서 펼쳐진 2차 경연에서 뉴욕 공연에 의한 컨디션 난조를 이겨내고 도입부에 애국가를 가미해 '봄여름가을겨울'을 강력한 에너지로 풀어내 무대를 장악하면서 '''선호도 조사 이후 첫 1위'''를 차지했다. 다만 애국가 사용에 대한 문제 등 청자에 따라 호불호는 심하게 갈렸다.
호주 경연 1위 이후 파워풀한 가창력과 변화로 꾸준히 상위권을 유지했지만 시즌 2 10라운드 1차 경연에서 어쿠스틱 언플러그드라는 '''대중의 취향과는 엇나간 변화를 한 끝에'''[26][27] 최초로 7위로 굴러떨어졌다. 2차 경연이었던 산울림 특집에서 산울림의 '청춘'을 자신의 스타일로 잘 소화했으나 5위를 기록하면서 최종 7위를 받음으로 나는 가수다에서의 종지부를 찍었다.

5.1. 나는 가수다에서 불렀던 경연곡


'''경연'''
'''가수'''
'''매니저'''
'''노래'''
'''순위'''
시즌 1 2번째 공연
인순이
박명수
아버지
'''1위'''
6라운드 1차 경연
인순이
박명수
난 괜찮아 - 진주
3위
6라운드 2차 경연
인순이
박명수
서른 즈음에 - 김광석
2위
7라운드 1차 경연
인순이
박명수
오늘 같은 밤이면 - 박정운
2위
7라운드 2차 경연
인순이
박명수
그 겨울의 찻집 - 조용필
4위
8라운드 1차 경연
인순이
박명수
바보처럼 살았군요 - 김도향[28]
5위
호주 특집 1부
인순이
박명수
봄여름가을겨울 - 김현식
'''1위'''
9라운드 1차 경연
인순이
박명수
토요일은 밤이 좋아 - 김종찬
3위
9라운드 2차 경연
인순이
박명수
금지된 사랑 - 김경호
3위
10라운드 1차 경연
인순이
박명수
나만의 슬픔 - 김돈규
7위
10라운드 2차 경연
인순이
박명수
청춘 - 산울림
5위, 탈락

6. 기타


  • 1982년 강대선 감독의 '흑녀'라는 영화에서 주연을 맡은 바 있다. #
  • 뮤지컬 시카고에서도 출연한 적이 있다.
  • 대한가수협회 협회장 선거에 출마했으며 2015년 8월 26일 목동 방송회관에서 투표가 진행된 결과 김흥국이 당선되었다.
  • 2015년 9월에[당시] 보디빌딩에 도전해서 나바 코리아에 참가했으며 스포츠 모델에서는 입상하지 못했지만 퍼포먼스에선 2등을 차지하면서 그야말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 보수층 지지자로 유명하다. 선거 때는 전 한나라당부터 새누리당까지 유세현장에 자주 모습을 비췄다.
  • 광고에도 출연했었다.
    • 스카이라이프
    • 미미론, 뿌티크림 - 신창약품[29]
  • 유튜버 Raon Lee와 콜라보를 진행했다.

7. 사건사고/논란


가수로서의 실력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탑 디바지만, 사생활과 태도에 대한 논란과 더불어 무려 3차례나 탈세에 관련된 논란이 있어서 평판이 좋지 않다.

7.1. 예술의 전당 대관 보이콧 사건


2008년, 데뷔 30주년을 맞아서 예술의 전당 오페라 하우스에서 공연을 하기 위해서 대관 신청을 했으나 오페라 하우스가 클래식에 맞게 음향설비 등이 갖춰져 있고 대중음악을 위한 기관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했다면서 자신은 관객들에게 제대로 예술의 전당 공연을 추진했는데 섭섭하다며 기자회견을 했다. 결국 30주년 콘서트는 금강산을 비롯한 전국 투어 콘서트로 진행되어 흥행했다.
하지만 실상 이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의견이 더 많았다. 안그래도 기초문화 영역이 부실한 한국인데 그나마 유일하게 있는 클래식 공연장을 왜 그렇게 못써서 안달이냐는 말이 많았다. 이미 대중가수들은 세종문화회관도 있고 체조경기장을 비롯해 다양한 루트가 존재하는 데, 왜 하나 뿐인 클래식 공연장을 가지고 비난을 하냐는 게 주된 내용이다.
문제는 예술의 전당 측에서 대중음악을 대한 태도에 일정한 기준이 없고 갈팡질팡했다는 점이다. 이미 조용필의 경우 1999년부터 2005년까지 매년 콘서트를 열었고, 조영남, 조관우 등도 콘서트를 진행했던 상태인데, 유인촌이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되어 “예전에는 (대중가수 공연을) 했다. 그러나 그 원칙을 새로 다시 정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니까 원래 안 해주던 게 아니라 해주다가 갑자기 안 해준다고 태도를 바꾼 것.
하지만 이는 당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지적이다. 당시 예술의 전당은 예산, 운영비 부족으로 심난한 자금난에 놓여 있었다. 이 때문에 클래식 공연장 임에도 불구하고 어쩔수 없이 기성 가수들에게 문호를 열어 준 것이고, 유인촌 장관이 임명 된 뒤로 원래 공연장의 취지를 다시 재정립 한 것 뿐이다. 그리고 이렇게 된 배경에는 당시 클래식 음악계가 이들의 공연을 좋지 않게 보던 것도 큰 이유였다. 안 그래도 클래식 음악은 수익성이 낮다고 대관신청만 하면 거절당하고, 그나마 유일하게 대관을 받아주는 공연장은 예술의 전당 뿐인데 그 마저도 신청이 밀려서 자신들도 공연을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마당에 수익성 좋다고 자신들이 설 자리를 빼앗냐는 게 당시 클래식 음악계의 주된 여론이었다. 그러니까 이는 시기의 문제일 뿐 예술의 전당 측이 누구를 차별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7.2. 거위의 꿈 정치색 논란


거위의 꿈 참조. 2007년 대선 당시 인순이가 리메이크한 '거위의 꿈'이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데 사용되어 논란이 일자 '써도 상관없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하지만 정작 원곡자 카니발(김동률, 이적)은 이 노래가 정치적으로 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표한 바 있다. 이후 이 사건에 대해서 인순이가 원곡자의 입장도 살피지 않은 채 왈가왈부한 것은 매우 적절하지 못한 대처였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애초에 원곡자가 아닌 인순이는 이 곡의 저작인접권자(가창자)일 뿐 저작권자가 아니기 때문에 써라마라 허락할 자격이 없다.
참고로 중간에 혼선이 생겨 '인순이가 거위의 꿈을 무단으로 리메이크 했고 카니발이 불쾌해했다'는 잘못된 정보가 퍼졌는데, 이쪽은 이은미의 경우와 정보가 뒤섞인 것으로, 김동률은 '자신의 곡을 리메이크할 때 한참 선배임에도 유일하게 직접 연락해서 허락을 받은 인물이 인순이'라고 밝힌 바 있다.

7.3. 미미시스터즈 무례 질타 사건


2009년 7월 24일 MBC 라디오 '오늘 아침 이문세입니다' 에 장기하와 얼굴들과 함께 출연했는데 대선배인 인순이가 장기하와 얼굴들의 미미 시스터즈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지만 평소 무표정하고 무심한 컨셉을 유지하고 있는 '미미 시스터즈' 는 선글라스를 쓴 채 고개만 까딱했고 이를 인순이가 불쾌하게 여겨 방송을 펑크낼 뻔했다고 언급해서 장기하의 미니홈피가 털리는 일이 있었다.
이에 인터넷에서는 '아예 인사를 안한 것도 아니고 무표정이 컨셉이라 고개만 까딱한 건데 인순이가 너무 속이 좁다', '방송중도 아니었고 컨셉보다 선배를 존중하는 게 우선이다' 는 의견들로 키배가 벌어졌다. 결국 그녀도 미미 시스터즈의 컨셉을 이해하고 서로 화해했다.

7.4. 탈세 사건


2008년에 거액의 탈세로 인한 추징금을 받은 사실이 2011년에 드러나 논란이 일었다. 당시 같은 논란을 겪었던 연예인으로는 강호동, 김아중이 있다. 당시 인순이는 MBC의 나는 가수다에 출연 중이었는데, 논란이 일자 다음과 같은 공식입장문을 발표하였다.

많은 분들의 사랑을 받아 온 공인으로서 본의 아니게 큰 실망을 끼쳐드린 점에 대해 매우 송구스럽게 생각 합니다. 2008년 당시 소득분에 대해 세무조사를 받아 누락부분에 대한 세금을 납부한 바 있습니다. 세무 관계에 대한 저의 무지로 인해 발생한 일로서 의도적인 누락은 아니었음을 말씀드립니다. 2008년 이후부터 현재까지는 성실신고를 하고 있습니다.

지난 며칠 동안 최선을 다해 방송 등의 일정을 소화하고 있으나, 과정이 어떠하였든 저의 불찰로 인해 결과적으로 저를 사랑해 주시는 분들께 큰 실망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제가 출연하고 있는 프로그램들과 동료 가수들에게 누가 되는 것은 아닌지, 팬 여러분들이 제 노래를 편한 마음으로 들어 주실지 착잡한 마음을 가눌 수가 없습니다. 제 일과 연관된 관계자 분들과 논의를 통해 앞으로의 방향을 정하고자 합니다.

다시 한 번 고개 숙여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

한편, 논란 당시 한국납세자연맹 측은 '''"인순이 씨는 피해자일 수도 있다"'''면서 '''"고의적 탈세인지 세무사 쪽의 과실로 인한 피해인지도 불분명한 상황인데 인순이 씨를 범법자인 냥 몰아가선 안된다"'''고 입장을 밝힌 바 있다. #
참고로 '''조세포탈죄는 고의로 탈세한 경우만 형사처벌한다.''' 세법을 잘 몰라서, 혹은 세무사의 실수 등으로 탈세를 하게 된 경우에는 미납된 세금액만 추징할 뿐, 형사처벌을 하진 않는다. 한편 조세포탈죄의 경우엔 국세청의 고발이 있어야만 검찰이 기소할 수 있다. 탈세 논란이 일었던 인순이, 강호동, 김아중, 송혜교 등이 미납된 세금을 납부한 것으로 사건이 마무리되고, 형사처벌을 받지 않았던 것은 국세청은 해당 연예인들이 고의로 탈세한 것은 아니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그래서 국세청은 검찰에 고발조치 하지 않았고, 따라서 형사처벌도 없었다.
2016년 8월 또 세금을 누락시켰다는 보도가 나왔다. #
고의 탈세라는 지인들의 증언도 보도되었다. #
12월 4일 국세청에서 그녀에게 수 억원의 추징금을 받았다.
그녀의 이의제기로 재조사를 하던 중 새 탈세 혐의가 발견되어서 2017년 11월 검찰에 고발당했다.# 이에 대해 인순이는 이미 지난 3월 무혐의로 종결된 사안이라고 주장했으나 이같은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는 반박 기사가 나왔다. 분당세무서는 2005년부터 소득을 수년간 현금 또는 차명계좌로 받아 수십억원의 세금을 탈루한 혐의(조세범 처벌법 위반)로 2017년 초 인순이를 검찰에 고발했으나 검찰은 공소시효가 지나 '공소권 없음' 처분을 내렸을 뿐이다. #
이에 따라 그녀는 혐의는 있되 공소시효가 지나 처벌만 피한 것이다. 이번 건은 그녀가 지난해 탈세 혐의로 국세청으로부터 세금 추징을 통보받자 '소득 일부는 과소 신고하지 않았다'며 분당세무서에 이의 제기를 하면서 진행됐다. 분당세무서는 인순이의 이의 제기를 받아들인 뒤 세금 포탈 부분을 재조사했고, 그 결과 새로운 탈루 혐의가 드러나면서 처음보다 더 많은 세금을 내게 될 수도 있다. 현재까지 그녀의 탈세액은 무려 60억원이 넘는 것으로 전해졌다. #
평창올림픽 성백유 대변인은 "갑자기 불거진 문제에 대해 민감하게 받아들일 필요없다"고 전제한 후, "월요일 간부회의에서 이 문제를 안건으로 삼아 논의를 시작하겠다"고 밝혔다. #
이후 평창올림픽 홍보대사 활동도 문제없이 진행했다.#

[1]경기도 연천군 청산면 백의리.[2] 네이버 프로필은 163cm[3] 이전에는 포천여자종합고등학교를 졸업했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실제로는 청산중학교까지만 졸업한 중졸임이 확인되었다.[4] 서울에 있는 한국켄트외국인학교를 다녔다. 미국 스탠포드대 수석 졸업생으로 뇌섹시대 문제적 남자 126회에 출연했다. 마이크로소프트사에 입사했다가 퇴사했으며 현재는 한국에 거주하고 있다. 기사[5] 강원도 홍천군에 있는 다문화가정 대안학교[6] 사단법인 인순이와 좋은 사람들 소속학교임.[7] 주로 사용하며, 개인적인 일상을 많이 담고 있다.[8] 2020년 5월 4일 첫 동영상.[9] 일정이나 공식적인 오피셜 정보가 많이 올라온다.[10] 업데이트가 전혀 되지 않는다.[11] 글은 올라오지만 카페는 전반적으로 관리가 안 된다.[해밀학교] [12] 당시 미군기지 인근에서는 이런 일이 상당히 흔하게 벌어지곤 했다. 운이 좋은 경우 미군을 따라가 미국에 정착할 수 있었지만, 이 경우에도 사귀던 미군과 가정을 이루고 정착한 케이스는 손에 꼽을 정도로 극히 드물었으며, 미군과 사귀었던 대부분의 여성들은 아이가 생기자마자 한국에 버려지거나,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아이를 남편에게 일방적으로 빼앗긴 채 미국에 버려지거나 그대로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대표적으로 하인스 워드의 어머니는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남편에게 아이를 일방적으로 빼앗겼다가 수년간의 노력 끝에 간신히 되찾은 케이스이다.[13] 당시 한국사회에서는 서구 제국주의 열강들의 인종관을 그대로 받아들인 부분이 커 다른 인종보다 흑인을 더 안 좋게 보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에 흑인 혼혈아들은 더 많은 고생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14] 사실 2세대 혼혈부터는 대부분 김수정, 리키 김의 세 자녀처럼 사실상 동양인에 더 가까운 외모로 태어나는 경우가 더 많다. 유튜버 영국남자도 동양인 혼혈 2세대인데 사실상 백인이나 다름없는 외모로 태어났다. 간혹 이현재처럼 이국적인 외모가 유독 두드러지게 태어나는 경우도 있지만 드문 경우이다.[15] 애초에 프로듀서가 가수를 발굴해서 키운 다음에 내보낸다는 발상 자체가 한국에서는 한백희가 김완선을 기른 것이 처음이다. 그리고 연습생 개념은 이수만이 한백희에게 조언을 받으면서 시작된다.[16] 이 리듬 터치 출신의 스타로 김완선이주노가 있다.[17] 훗날 김완선 역시 무릎팍 도사에 출연했을 때 그 이야기를 꺼내며 “이모가 그런 얘기를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인순이 언니가 많이 서운해 했을 것 같다”고 말했다.[18] 윤종신(2집, 1994년), 박미경(2집, 1995년)에 의해 리메이크되기도 했으며, 나는 가수다에서 신효범이 불러 다시 한 번 화제가 된다.[19] 원곡자와 인순이 간의 논란이 다소 존재한다. 거위의 꿈의 '여담으로~' 부분 참조.[20] 2004년에 모 종교 단체의 단합대회에 나와서 노래를 부른 적이 있는데 무대에서 조PD의 '친구여' 를 부르다 갑자기 운동장 트랙을 돌기 시작했다. 그런데 '''뛰어서 한 바퀴(약 500미터)를 도는 동안 숨도 안 차고 노래를 전부 소화했다'''.[21] 참고로 윤도현소녀시대의 'Run Devil Run' 을 부를 때는 그냥 원키로 불렀다. 춤추면서 노래 부르는 것이 그만큼 어려워서 남가수에 비해 음역대가 높은 여가수들이 노래를 불러도 고음역대를 많이 내지 못하는 것이다.[22] 어떤 평론가는 이를 레전드급 소울의 여왕 아레사 프랭클린아메리칸 아이돌 같은 쇼에 나온 격이라고 비유. 적절한 비교다.[23] 김태현의 표현.[24] 후일담으로 인순이는 '이때 감정을 놔버렸었다' 는 말을 하기도.[25] 의외로 호불호가 제법 갈린다. 이 나레이션에 공감할 수 있는 이들은 몇 배의 감동을 받는 반면 나레이션이 뜬금없고 그다지 공감되지 않아 오히려 감동이 반감된다고 평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26] 인순이도, 다른 가수들도, 그리고 매니저들이나 자문위원들도 이 점을 염려했다. 언제나 변화를 추구한 것은 높이 샀지만 대중의 호응을 얻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고 결국...[27] 나가수에서는 제아무리 평소 높은 인기를 유지하던 가수들이라도, 너무 낯선 스타일을 시도하거나 대중의 취향에 맞지 않는 경연을 하면 등수가 굴러떨어지는 경우가 왕왕 있기는 했다. 박정현의 소나기가 대표적인 예.[28] 듀엣 경연이라 김도향과 함께 불렀다.[당시] 59세이다[29] 광고정보센터에서 삼화비디오를 검색하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