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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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가수·프로듀서다. 1989년 10월 15일 1집 《B.C 603》으로 데뷔했으며, '어린 왕자'라는 별명[11] 으로 유명하다.
1990년대의 대표적인 뮤지션 중 한 명[12] 이었고, 그의 콘서트에 대한 열정, 생동감 넘치는 콘서트 등으로 '공연의 신'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한창 절정의 인기를 자랑하던 2~3집 시기(1990~1992년)에는 아이돌로 봐도 무리가 없을 정도[13] 로 10대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받았었고 대학가에서 인기가 많았던 시기였다.
2. 생애
2.1. 데뷔 이전
1965년 12월 13일 부산광역시 부산진구에서 2남 1녀 중 둘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장난감 공장장이어서 유복한 어린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이후 국민학교 4학년 때인 1975년에 서울로 이사오면서 혜화국민학교로 전학왔고, 서울에서 학창시절을 쭉 보냈다. 1년 재수하여 한국외국어대학교 용인캠퍼스에 영어영문학과 85학번으로 입학했으나 1년만에 학업을 중퇴했다.
2.2. 데뷔 과정
가수로 데뷔하기 위해 온갖 음반사를 다녔으나 데뷔는커녕 물만 먹고 다녔다. 음악을 하겠다고 부모님 속을 끓이다가, 결국 아버지가 유산을 미리 떼준다는 심보로 해보고 안 되면 그만둔다는 약속을 받고 이승환에게 음반 제작비로 쓰라고 돈을 내주었다.[14] 그 돈으로 이승환은 자기 제작으로 앨범을 만들게 되었고, 그때까지도 부모님은 앨범 낸다면서 같이 다니는 친구랑 이승환을 보면서 외려 속만 더 끓었다는데[15] 결과는 1년 동안의 장기전 후에 대박이 났다. 지상파 방송 출연도 안 하고 '''100만 장 판매'''를 해버렸다. 같이 작업했던 친구는 바로 1990년대 초중반을 풍미한 작곡가 오태호다. 오태호가 명성을 얻은 것도 이승환 1집을 통해서였다.
3. 공연의 神
데뷔 때부터 꽤 뜸했던 방송 출연[16] 은, 본격적으로 발라드가 아닌 록 등의 다양한 장르에 도전하게 된 5집 이후에는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 그와 함께 90년대 한국 대중음악의 전성기 또한 지나가버렸고, 결국 이승환은 대중 전반에 걸쳐 사랑받기보다는 매니악한 팬덤과 주로 소통하는 유형의 가수가 되었다.
라이브 밴드 출신임과 더불어, 오디오 매니아라는 점이 영향을 끼쳤는지 이승환의 라이브 무대에서 퍼포먼스와 음향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요소가 되었다.[17] 따라서 이승환의 콘서트는 국내 대중음악계에서는 선두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으며, 여러가지 새로운 기술적인 시도와 더불어 절대적인 횟수, 그리고 그 수준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국내 최초로 전국 공연 투어에 이름을 붙여 브랜드화했다. 99년 무적투어[18] , 01-02년 SSEN CONCERT, 05년 이승환의 난 '亂李'투어 등. 최초의 용산 전쟁기념관에서의 대중음악 공연[19] , 최초의 ABR(움직임 제어가 가능한 초대형 풍선 예술)의 공연도입, 국내 최초의 젠하이저 후원 가수, 게스트도 없이 '''9시간 30분'''의 공연 시간 등등의 많은 공연 관련 기록을 가지고 있다.[20] 공연 내용에서는 갖가지 이벤트가 풍성하고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발라드 레퍼토리를 주로 하는 대형/연말 공연과, 록 넘버가 주가 되고 주로 스탠딩으로 열리는 중소형 공연이 나뉘어 지는 경향을 보인다. 따라서 입문하는 사람은 연말 공연 쪽을 도전해보는 것이 좋다.
이리저리 공연 중간에 이벤트도 많은 편이며, 퀄리티를 유지하기 위해서 일부러 몇몇 공연 외주 업체에 십여년 이상 전담하다시피 외주를 주어 일관성있는 수준을 뽑아내고 있다. 과거에는 더 뛰어다니기 위해 모래주머니를 발목에 달고 점프 연습을 하기도 하였으며, 공연 도중에 맹장염이 나면 어쩌나 싶어서 병원에 가서 '''미리 짤라버리면 안 되나요''' 하고 상담했다가 '''미쳤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고 한다.
공연 기획부터 주최, 연출까지 직접 하다 보니 공연 도중에 자꾸 이런저런 손동작으로 엔지니어들과 대화하며 이런저런 것들을 조정하기도 한다. 공연장이나 라이브 영상에서도 종종 볼 수 있다. 인터뷰에서 노래 부르는 것보다 "아... 왜 여기서 조명이랑 노래랑 타이밍이 안 맞지?" 이런 생각에 더 집중하기도 한다고 하기도 했다.
평소 성격은 잘 알려진 바가 없지만, 공연 전후로 스탭들에게는 까칠 그 자체라고 알려져 있다.
탁재훈, 신정환의 컨츄리꼬꼬와 무대도용에 대한 소송이 2008년 시작되어 2009년 여름에야 끝났다. 이승환은 지난 2007년 12월 22일부터 24일 3일간 서울 방이동 올림픽공원 펜싱경기장에서 콘서트 '슈퍼히어로'를 열었고 컨츄리꼬꼬는 12월 25일 같은 장소에서 콘서트 '불후의 명곡'을 펼쳤다. 문제는 컨츄리꼬꼬가 이승환이 사용했던 무대 설비와 특수효과 등을 철거 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했던 것이다. 이승환은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상의도 없이 자신의 무대를 도용한 컨츄리꼬꼬의 공연 기획사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서 양측의 법정공방이 시작됐다.
정확히는 컨츄리꼬꼬의 공연 기획사와 이승환의 공연 기획사 간의 문제였지만, 이승환이 워낙에 공연에 목숨을 거는 스타일이라 본인이 직접 대응을 하게 되어 꽤 일이 커졌다.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 제12부(재판장 양재영 판사)는 2009년 2월 6일, "이승환 측의 저작권 침해나 소유권 침해 주장은 명시적 승낙은 없지만, 제반사정에 의해 묵시적으로 승낙한 것으로 보인다"면서 이를 기각하였으나, 컨츄리꼬꼬 측이 이승환의 명예를 훼손한 점은 인정하여 금 1,000만 원의 손해를 배상하라고 판결하였다.
훗날 탁재훈은 오빠밴드 녹화 관계로 이 펜싱 경기장을 다시 찾게 되는데 '''여기 좋지 않은 추억이 있다'''면서 몸서리치는 모습을 보여줬다. 하지만 이 문제는 "컨츄리꼬꼬 공연 기획사"의 문제이지 탁재훈과 신정환이 일으킨 문제는 아니라서 이승환과의 사이는 딱히 나쁘지 않다.
콘서트 때 모니터링 이어폰으로 B&O사의 오픈형 이어폰 A8을 주로 사용했었다. 보통 모니터링 이어폰은 외부의 소리를 차단하기 위해 커널형을 사용하는 것에 비추어 보면 의외스러운 일이기에 사람들이 호기심을 가지곤 했다. 이승환이 홈페이지에서 밝힌 바로는 첫째로 커널형은 외부의 소리를 차단해서 콘서트 중 관객들의 반응을 들을 수 없고, 둘째로는 어떤 이어폰을 사용해도 귀에서 빠져나가버리기 때문에 귀 걸개가 있는 A8을 사용한다고 하였다. 격렬하게 움직이다 두 세 개씩 고장내기도 하고, 그 중에 알루미늄으로 된 이어폰에 귀가 긁혀 그 다친 곳을 만지는 버릇이 생기기도 했다고 한다.
매번 공연 때마다 기본 2, 3개는 사용후 맛이 가버려서 쓸 수 없어 버린다고 말한 적이 있어 식호 덕후들을 열폭하게 만들었다. 정말 여담이지만, 시코 에서는 "이승환 왜 A8 같은 거 쓰나요? 별로네~" 하고 이승환과 A8을 동시에 비난했다. 게다가 A8은 일반적으로 저음부가 약하다는 게 중론인데 이승환이 A8을 쓰는 이유중에 "저음이 좋다"고 하는 부분이 있어서 비난하는 사람들은 '가수라면서 귀는 폼으로 달았네'라며 까고 옹호하는 사람들은 '니들이 음악쪽으로 이승환보다 잘났냐'며 키배를 떴다. 2015년 이후로는 DF가 쓰여진 노란색 커스텀 이어폰을 사용하고 있다. 2015년 9월 19일 빠데이공연 때 A8을 쓰지 않고 커스텀 이어폰으로보이는 노란 이어폰을 사용했다. 그 후 Westone의 엔도서로 선정되어 동사의 um pro 50 에 이어 ES 60 이어폰을 사용하고 있다.
A8 이전에는 인이어를 절대 하지 않고(상기된 관객 반응 캐치의 이유) 거의 메인 스피커 만큼의 물량을 모니터에 투입했었다. 덕분에 드럼은 아크릴 벽에 갇히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모니터 외에 공연시 주로 선호하는 스피커는 클레어브라더스, Adamson, 메이어사운드 등이며, 마이크는 SHURE 이승환 자체 커스터마이징 버전(젠하이저는 기간 만료)이고 마이크스탠드는 특별 주문한 빙빙 돌리기 좋은 물건이다.
4. 콘서트
- 역대 공연 목록: 이승환/콘서트 목록
- '최장 공연시간' 기록의 빠데이 등 주요 공연의 상세 정보: 이승환/콘서트
5. 이승환의 음악
5.1. 발라드와 록 사이
스스로 음악의 출발점을 들국화로 꼽고 있으며, 한국외국어대학교 재학 시절 '아카시아', '셀프서비스[SS]' 등의 '''헤비메탈 밴드'''를 결성하는 등 이승환 음악의 시작점은 록 음악이다. 이후에도 오태호와 함께 파고다 극장 언더그라운드의 여러 밴드를 거쳤다.[21]
본인의 발언에 따르면 이 시기 가죽 자켓에 쇠사슬을 매달고 무대 위를 뛰어다녔다고 한다.[22][23] 이를테면 1집의 데뷔곡 〈텅 빈 마음〉[24] 의 경우에도 분명 음악 장르적 분법으로는 발라드에 속하지만, 곡 진행과 사운드의 활용에 있어 록적인 요소를 가미하여 정통 발라드스럽지만은 않고, 같은 앨범의 다른 트랙들, 특히 〈좋은 날〉이나 〈그냥 그런 이야기〉[25] 는 아예 록적인 접근이 더 두드러진다. 그리고 데뷔 이후 계속된 음악 작업에서는 전통적인 문법에 따른 록 음악을 추구하기도 하였다.
사실 이런 록적인 본색은 본인 스스로도 《이오공감》의 앨범에서 많이 드러냈다고 고백을 한 적이 있고[26] 3집부터는 1, 2집에 비하면 록적인 접근이 훨씬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렇게 된 원인에 대해서는 당시의 이승환 본인에게 있었던 일도 어느 정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3집부터 내 이야기를 담아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할 정도다. 그래서 3집의 타이틀이 《'''My Story'''》다.
하지만 메이저 데뷔를 발라드로부터 시작했으며, 당시 큰 활약을 했던 오태호와의 콤비로 엄청난 대중성을 발휘하며 큰 인기를 얻었다. 그 후 앨범에서도 록적인 요소가 가미된 곡이나 록 음악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앨범의 타이틀 곡은 발라드였으므로, 추구하는 장르가 어떻든지 대중은 이승환을 발라드 가수로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 이승환 본인의 말로는 록 보컬로는 자신의 음색에 강한 한계를 느껴서 결국 발라드와 록 사이의 미묘한 줄타기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다른 이유로는 같은 무명 시절에 파고다 극장 무대에 선 '''김종서'''의 공연을 보고 '''쟤 때문에 난 록은 안 되겠다'''라고 느껴서 방향을 틀었다고 했고, 이문세의 〈소녀〉가 본인을 발라드로 전향하게 만든 곡이라고 했다.
그래서 팬들도 발라드 가수 이승환을 좋아하는 팬들과, 록 음악을 하는 이승환까지 좋아하는 팬들로 나뉘게 되는 경향이 있는데, '''난 이승환 옛날엔 좋았는데 요즘은 별로야'''라면 전자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다만 노래 중간중간에 나오는 메탈릭한 샤우트 보컬은 곡의 전개에 큰 의미가 없다고 느껴지기도 한다.[27]
이에 따라 4집 《Human》에서는 'Fire'와 'Water', 6집 《The War In Life》에서는 '정상'과 '비정상', 7집 《Egg》에서는 'Sunny Side-Up'과 'Over Easy' 등으로 앨범을 이분하여 앞부분에는 발라드를 위시한 팝 적인 분위기의 곡들, 뒷부분에는 록 위주의 곡들을 수록하여 양쪽 모두의 팬들을 끌어들이려 하였지만 음악적 퀄리티와는 무관하게 그다지 성공한 시도로는 평가받지 못한다. 발라드 팬들은 뒷부분을 싫어하고 록음악 팬들은 앞부분을 싫어하니 결국 불만은 그대로. 게다가 음반 자체로서의 연결성과 완결성이 떨어진다는 비판까지 나왔었다. 그래서 《Serious Day》라는 록 음악에 집중한 음반을, 《Monglong》이라는 발라드에 집중한 비정규 음반을 내기도 했다. 정규 9집과 10집은 락과 발라드를 잘 섞어서 한 장의 음반으로 발매했다. 또 발라드로만 구성되어있는 《His Ballad I》, 《His Ballad II》 앨범을 내기도 했다. 이 앨범들엔 주로 예전에 나온 노래를 다시 녹음하거나 새 곡을 넣었다.
사실 〈천 일 동안〉[28] 등의 히트 발라드곡에 묻혀 잘 드러나지 않지만, 이승환의 록 음악은 어느 수준 이상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사운드 측면에서는. 하지만 전통적인 록/메탈씬에서는 발라드 가수 출신인 이승환을 그다지 높게 평가하지 않으며, 이승환 스스로도 전통적인 문법에 따른 록 음악보다는 가스펠을 도입하고 Choir를 강조하는 등 변형된 록 음악을 추구하고 있기에 실제보다는 낮게 평가받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싱어송라이터다.''' 데뷔 앨범만 하더라도 수록곡 10곡 중 7곡을 자작곡으로 넣을 정도며, 매 앨범마다 꾸준히 자작곡을 채우는 사람이다.[29] 문제는 유명한 곡들 대다수가 다른 뮤지션 혹은 작곡가들의 곡이거나 아님 공동 작사/작곡이라는 것이다. 특히 공동 작사/작곡인 경우에는 엄밀히 말해서 일단 이승환이 먼저 곡을 쓰고 그것을 공동 작사/작곡으로 명시되는 뮤지션과 공동으로 수정, 보완하는 식으로 완성하는데 문제는 이게 그 공동 작곡가의 곡이라고만 알려진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본인도 '''내가 곡을 쓴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라고 토로하기도 했다.[30]
한편, 가수 유재하 다음으로 가수 본인이 직접 자신의 음반을 제작한 가수이다. 1집을 제작한 '우리기획'은 이승환이 아버지에게 돈을 빌려서 차린 회사다. 이후 1997년, 우리기획[31] 을 확장시켜 '드림팩토리'라는 종합 연예기획사를 만들어 휘하에 공연 스탭 양성 학교, 음반 녹음 스튜디오, 연예 매니지먼트 사업부, 캐릭터 디자인 사업 등을 하였으나 국내 음반 시장의 전체적인 부진과 더불어 그리 전문적이지 못했던 경영 등의 이유로 시원하게 말아먹고 대부분 철수 혹은 분리하였고, 직접 매니지먼트하던 박신혜, 정성미, 김시후 등은 모두 다른 기획사로 이적하게 됐다.
이후로 드림팩토리에 본인만 남은 형태를 유지하고, 인디 뮤지션들에 대한 제작과 지원의 끈은 아직도 유지하고 있는 듯 했으나, 드림팩토리클럽은 '''잠정 휴업'''에 들어갔었다. 2014년부터 2015년까지 윤상과 같은 소속사였고, 이후 오드뮤직에서 나와 1인 기획사 형태로 드림팩토리를 운영한다.
5.2. 가창력
하현우나 김경호처럼 소름끼치도록 압도적인 고음을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나, 자신의 음역대 내에서는 어마어마한 내구성을 가지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승환의 음역대가 낮다는 소리가 아니다. 이승환의 음역대는 진성으로 '''0옥타브 파♯(F♯2)'''[32] 에서 '''3옥타브 도(C5)'''[33] 까지[34] , 가성 애드리브로 '''4옥타브 도 (C6)'''[35] 까지 올라가는 등 충분히 넓고 높은 음역대를 가졌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빠데이에서 6시간 반동안 66곡을 불러댔음에도 전혀 목소리에 흔들림이 없었고, 그 다음주에 다른 공연 일정을 차질 없이 소화하였다.
뿐만 아니라 성량도 어마어마하게 큰데, 노래를 부를 때 종종 마이크를 단전에 갖다대고 노래를 부름에도 불구하고 밴드의 사운드와 어우러져 무대를 꽉 채우는 성량을 느낄 수 있다. 이런 퍼포먼스를 50대 중반이 된 현재까지도 계속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굉장히 놀랄 만한 일이다.[36]
보통 한국에서는 음역대가 넓거나, 고음이 잘 올라가거나, 테크닉적으로 뛰어난 보컬리스트를 높게 쳐주는 경향이 있는데, 이승환처럼 편하고, 오래, 흔들림 없이 부르는 창법이 발성에 있어서 가장 권장하는 이상적 형태다.
위에 자주 언급되었듯이 과거와 현재의 음악성이 좀 다른지라 창법이나 목소리도 꽤나 변화가 큰 편이다. 히든싱어에서도 보였듯이 '어떻게 사랑이 그래요'를 가장 이승환처럼 불렀다고 생각된 사람은 이승환이 아닌 모창 가수였다. 조성모처럼 아예 목이 가버려서 창법이 바뀐 수준은 아니고 본인이 원하는 음악성에 따르다보니 창법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또한 나이도 적잖다 보니 과거와 같은 목소리를 내기도 어려울 것으로 추정된다.
확실히 과거에는 고음 샤우팅을 할 때를 제외하고는 '''아주 가늘듯 떨리는 미성'''을 주로 사용했는데 앨범이 점점 뒤로 가면서 조금조금씩 굵은 목소리의 사용 빈도가 늘어나고 있다. 이 때문에 과거의 노래를 듣고 현재의 이승환 라이브를 들으면 차이를 확연히 느낄 수 있을 정도이다. 이는 음악 스타일의 변화가 매우 큰 것으로 보이는데, 1~4집 시절 불렀던 좋은 날, 악녀 탄생, 덩크 슛 등의 밝은 밴드 음악풍 곡들을 들어보면 현재 보이스, 창법과 거의 유사하다. 하지만 오태호식 발라드로 대표되던 초기 대표곡인 한 사람을 위한 마음, 세상에 뿌려진 사랑만큼 같은 곡들에서 보여준 목소리는 2010년 경 이후로는 들을 수 없는데, 이 활동 초기 발매곡들을 최근 콘서트에서는 바뀐 창법으로 부른다.
그렇다고 가창력이 줄어들었다는 평가는 거의 없다. 말 그대로 본인의 의사로 바꾼 것이고 기본적인 베이스에는 변화가 없다. 적지 않은 나이와 라이브 경력을 생각하면 괜히 억지로 목을 끌어쓰기보단 자기가 할 수 있는 선 안에서 최대한 힘을 쓰는 게 장기적으로 훨씬 유리하다.
라이브 콘서트에서 확인할 수 있지만 상기된 바와 같이 김경호 등의 초고음 가수와는 괴리가 있으나 그의 깔끔한 고음과 성량은 인터넷 상에서 떠받드는 본좌들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 오히려 출발선 문제 때문에 또 그의 타고난 미성 때문에 상당히 저평가 되었을 뿐, 이승환은 최고의 발라드, 록 싱어이다.
6. 음반 목록
6.1. 개별 문서가 있는 이승환의 노래
7. 수상 내역
8. 정치 성향
- 2010년대 들어 촛불집회와 MBC 파업 콘서트 등 사회적인 이슈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젊은 시절인 1980년대에 시대의 흐름과 함께 하지 못하고 홀로 조용히 대학 생활을 해왔던 것에 대해 모종의 죄책감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2012년 11월에 개봉한 《26년》의 제작에 10억 원을 투자하면서 그의 스탠스를 다시금 보여줬다. 영화 제작 환경이 불확실했던 데다 드림팩토리의 사세가 낙관적이지 못한 것을 감안하면 어려운 결정을 내린 셈이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 과거 《His Ballad II》 앨범에 수록되었던 곡 〈꽃〉[37] 이 삽입되었다.
- 2014년 11집을 발표하면서 노무현 대통령을 기리기 위해 헌정곡도 만들었다. 그 곡이 바로 〈함께 있는 우리를 보고 싶다〉이다. 도종환이 작사했고, 수익금은 백혈병 어린이 재단에 기부한다고 했다.
- 정치에 대해 관심을 갖게된 건 이명박 전 대통령 때문이라고 밝혔다. 《JTBC 뉴스룸》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정치 세계에 그리 큰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이명박 후보가 당선됐을 때 "조금 더 잘 살 수 있을 거라는 많은 사람들의 믿음과 허무맹랑한 공약이 만나 결국 당선이 됐는데 난 그게 참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 말에 손석희 사장이 "전임 대통령을 말씀하시는 건가요?"라고 묻자 말을 흐리는 것 없이 "네"라고 딱 잘라 대답했다.#
- 2016년 11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항의해 박근혜 퇴진 운동에 동참하여 드림팩토리 건물에 박근혜는 하야하라 현수막을 내걸었다. 구청에서 문제삼자 변호사의 자문을 거쳐 '신고된 집회를 알리는 현수막은 합법' 규정을 이용해 2016년 11월 민중총궐기 참여 독려 문구를 추가하여 다시 현수막을 달았다. 촛불집회에서 공연도 하였는데, 〈덩크 슛〉을 부를 때는 일부러 가사를 "하야하라 박근혜 하야하라 박근혜", "하야하라 박근혜는 하야하라 하야하라"[38] 로 바꿔서 불러 화제가 되었다. 참 재미있는 사실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연루된 사람 중 한 명인 차은택은 이승환의 뮤직비디오 두 편(〈당부〉, 〈그대가, 그대를...〉)을 찍었으며, 이승환의 고등학교 후배이다. 우스갯소리로 이 덕분에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오르지 않았다고 하기도 한다. 실제로 차은택은 이승환과 상당히 절친했던 사이였고 차은택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연관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이승환은 차은택에게 자수하고 죄값을 받으라 했지만 차은택이 무시하자 연락을 끊었다고 한국일보 인터뷰에서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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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술된 대로 박근혜 정권 뿐만 아니라 2017년 9월에 밝혀진 이명박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도 명단이 오르지 않았다. 이에 대해 이승환은 '내 이름은 왜 빼냐 나도 넣어라 이놈들아.'라며 매우 섭섭해 했고, "MB 국정원 퇴출 리스트에도 없는 스트레스를 먹는 것으로 풀고 있다"라는 글을 SNS에 올리기도 했다. 사실 만든 세력에서도 이승환은 방송출연으로 먹고 사는 연예인이 아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방송출연을 막는 것을 주된 공격기법으로 하는 연예인 블랙리스트에서 실질적 손해가 거의 없다는 걸 계산했을 가능성이 있다. 소속사에 대한 압력도, 이승환은 1인 기획사로 본인이 직접 소속사를 운영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압력을 넣기가 힘든 상황이다. 이를 두고 팬들은 농담삼아 '어용 가수', '적폐 가수'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했다. 혹은 국정교과서 반대 콘서트 당시에 모 트위터리안이 했던 '듣도 보도 못한' 이라는 표현 때문에 듣보 가수라서 정부가 몰라서 안 넣은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2017년 11월 16일 tvN <인생술집>에 주진우와 함께 출연했을 때는 '(블랙리스트에 없으니) 창피하기도 하고 잘못 살았나 싶기도 하다'라고 농담을 하였다.
- 대표적인 '친민주당’ 연예인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적인 문제를 이야기하는데 주저함이 없으며, 그래서 성향이 굉장히 잘 드러난다. 본인은 '그저 국민의 편' 이라고 하는데 그런 것과는 별개로 성향이 그렇다. 그래서 음악과는 별개로 이런 면의 이승환을 형평성 없는 선택적 정의심이라며 싫어하는 사람도 좀 있다.
- 2020년 12월 24일 윤석열 검찰총장이 직무 복귀하자 자신의 페이스북에 세상이 니들 발밑에 있는 것 같지??라며 윤석열을 겨냥한 정치글을 올렸다. 이로 인해 윤서인에게 저격당했다.
8.1. 정치성향 관련 사건사고
8.1.1. 살해 협박
어떤 사람한테 살해 협박을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단순한 장난이거나 근래에 들어 우리나라 정치에 대한 의견을 적극적으로 표시하기 시작하면서 그와 반대되는 정치 성향을 가진 누군가가 나쁜 방법으로 불만을 표출한 듯 싶다. 이승환 본인은 이러한 협박에 '그네들의 수준이란... 피식. 어떻게 하겠다고 말하면 정말로 어떻게 할 수 있다고 믿는 모양.' 이라며 되려 비웃었다.
8.1.2. 명예 훼손 집단 고소
2019년 7월 2일 김반장[39] 을 비롯한 악플러 50명을 모욕죄로 고소 고발했다. 이승환이 본인 페이스북에 오늘의 추천곡이라며 도시아이들의 노래인 〈'''달'''빛 '''창'''가에서〉를 올렸는데,[40] 저격한 이를 주어가 없다며 누구를 향한 언급이냐는 이야기가 오갔다. 그 후에 이승환은 페이지에 "경직된 사고로 폭력적 언사를 행하며 증오를 부추기고 편가르기를 하는 사람이 설마 너니?", "바보들. 풉. 찔리니?"[41] , "정말 바보들이었어... 앜ㅋㅋㅋ 바보한테 바보라고 하면 안되는데... 막 또 쌍욕하고 그럴 텐데."라며 여전히 누구를 지칭하지 않은 채 조롱을 했으며, 이에 따라 이들의 비난도 거세졌다. 이승환은 이 후, 자신의 팬들이 환창이라고 모욕을 당했단 내용과 팬까지 비난하는 것은 참지 못한다며 고소 예고글을 작성했다. 고소 예고글을 작성한 뒤에 가장 수위 높은 욕설을 했다며 김반장의 욕설을 캡쳐한 뒤론 김반장이란 트위터리안이 아닌 본명을 들어 꼬박꼬박 선진 군으로 부르며 문재인 지지자의 멸칭인 똥파리를 연상하는 개똥 무덤이 집이란 멘션, 9시간 반동안 93곡을 부르는 내 절제와 관리를 보고 용서를 구하려면 스스로 궁리를 구해라, 네 글을 읽는 게 고역인데 다음 주부터 녹음인데 감성 조절에 문제가 생긴다, 쪽팔리게 글이나 지우지 마라, 소심한 줄 알았는데 꽤 버티네? 법정에서 나한테 발리지나 마라. 나는 운동하러 간다 같은 내용의 조롱을 했으며, 그 와중엔 밴드 드러머의 결혼식 기념 콘서트 홍보 포스터에 인생도 결혼도 실전이란 문구를 적고 김 선진 군에게 감사드린다는 과격한 멘션을 남기기도 했다.멘션을 정리한 스샷 이후 욕설을 한 사람들을 고발했단 내용을 기사화했고[42] , 이후 소속사를 통해 명예훼손 고소를 밝히게 된다.### 이에 김반장도 고소에 맞대응하겠다고 밝히고 어째서 이승환이 비난의 대상이 되었는지에 대한 입장문을 남긴 상황#이고, 이에 대해 이승환은 '내가 나경원을 옹호하고 문대통령과 지지자를 조롱한 것인지 5월 11일 게시물 확인. "이 게시물은 문파를 조롱한 것이 아닙니다" 라고 써야 함? 외계인도 텔레파시로 알아먹을 듯. 혹시라도 전략 짜고 지시하는 거면 교체해라. 무능하다'라고 게시물을 올렸는데, 작전세력[43]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며 비판을 받았다. 또한 고소글에 자신이 광장에 선 첫 가수란 언급[44] 을 한 것, '노파, 문파면 날 응원해야죠. 읭? 뭐지?'이라고 한 것도 비판을 피하지 못했다.
1년이 지난 2020년 10월 15일 김반장에 대한 판결이 선고되었다. 검찰에서는 약식명령을 청구하여 벌금형을 구형하였으나, 법원에서 죄질이 매우 불량하다고 판단하여 공판절차에 회부하였고 징역형 집행유예와 상당 시간의 사회봉사를 명령했다.
9. 여담
9.1. 동안
- 연예계의 대표적인 동안으로 유명하다. 현재 58세다. 같은 남자 가수 중 절친 신승훈도 동안으로 유명하지만, 이승환이 신승훈보다 생일이 4달 빠르다. 각종 토크쇼에 나와서 이야기하길 본인은 실버보험이 가입되는 나이라고 한다.[45] 보험비를 받을 수 있는 조건이 사망 밖에 없다는 자학개그를 열심히 밀고 있다. 자신의 별명인 '공연의 신'을 팬들이 이제 50세가 되었다며 '공연의 쉰'이라고 바꿔 부른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최근 매체에서 등장하는 모습에서 스타일과 별개로 나이가 든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지만, 아직도 본인 나이보다 훨씬 어려보인다는 사실엔 큰 변함이 없다.
- 여성 연예인 중에 동안으로 이승환과 비교될 만한 인물로는 이선희가 있는데, 이선희는 젊을 때부터 무대 이외의 장소에서는 조용하고 점잖은 성향과 스타일 때문에 잘 안 드러났고, 데뷔 초에는 나이보다 더 들어 보였다. 심지어 20대 시절에 시의원으로도 활동하였다. 40대 초반부터 당시 신인스타 이승기의 스승이었다는게 매스컴에 많이 어필되고 이승기가 "선생님"[46] 이라고 부르는 모습도 방송에 꽤 많이 나와 선생님 이미지까지 생기며 실제 외모에 비해서는 이승환처럼 많이 어려 보인다는 이미지는 꽤 약해졌다. 이에 비해 이승환은 본인이 나이를 초월하여 '영원한 오빠', '영원한 형' 기믹을 원하기도 하고 후배들에게도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말아달라고 하는 등 젊은 이미지에 노력하는 부분도 있어 이미지 차이는 많이 난다.
- 하지만 알고 보면 동안 때문에 불편함을 많이 겪었다고 한다. 젊은 시절 단골 미용실에 머리를 자르러 가면 언제나 아줌마가 머리를 짧게 잘라버렸는데 이승환 본인이 약간 길게 해달라고 하면 학생이 그러면 못 쓴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결국 저 가수인데요라고 말을 하고나니 그제서야 머리가 강제로 짧게 잘리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것 외에도 동안 때문에 겪었던 일화를 들어보면 꽤 나오며, 한창 절정의 인기를 누렸던 1990년대에도 동안으로 유명했다. 60년대 후반에 태어난 수많은 연예인 동생들에게 초면에 동생 취급 당해서 억울했던 에피소드들이 있다. 그래서 본인이 그냥 자신과 5살 미만으로 차이 나는 연예인들에게는 그냥 최대한 깍듯하게 존대했다고.
- 사실 2014년을 기준으로 20여 년전의 지상파 출연 당시와 지금의 패션을 비교를 해보면 코디의 힘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47] 검색을 해보면 코디 때문에 웃긴 동영상이 꽤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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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박근혜 퇴진 운동에 공연자로 등장, 야당에게 "저는 야당 편이 아니라 시민편이다. 야당 정치인분들 재지 말고, 국민의 요구대로 행동하시길 바란다"며 발언을 하던 중 청중 맨 앞자리에 앉아있던 국회의원 표창원을 향해 "표창원 동생, 잘 아셨나?"라는 농담을 날려 이승환의 동안이 또다시 주목받았다. 표창원은 이에 바로 단상으로 다가가서 악수를 청했고, 이승환도 웃으며 악수를 받아줬다. 표창원은 그 이전에도 이승환을 만난 적이 있다는 얘기를 방송에 한 적이 있고, 그때도 '가수 이승환씨가 저보다 형님이다, 형이라고 부른다'라고 한 적이 있었고, 이후 이승환 역시 다른 방송에서 이에 대해 언급하면서 '표창원 교수가 나보다 동생인 게 부담스럽다'고 농담한 적이 있었다. 표 의원이 실제 한 살 동생인데 자꾸 형님이라 불러서 가수 이미지를 깎아먹는다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 이후 배우 김의성도 이승환과의 나이가 동갑이라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서 충격을 주기도 했다.
9.2. 오덕끼
일반인에게는 '''동안 가수''', 혹은 김종서, 김태원과 동갑으로, 서브컬처의 오덕력 충만한 사람들에게는 '''님도 우리들 동지''', '''오덕 가수''' 등으로 평가되는 경우가 있다. 실제로 확인된 오덕계열 취미로 피규어 수집, 게임 등이 있다. 피규어의 경우는 본인이 말하길 약 1,000여 점이 넘게 소지하고 있으며 그중에는 홍콩 쪽 유명 아티스트의 고가 제품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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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야 놀자 등 방송 등지에서 확인된 바로는 오! 나의 여신님의 베르단디, 파이널 판타지 10의 유우나 피규어도 있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 캐릭터 피규어도 있었다. 물론 그런 류의 피규어만 수집하는 것은 아니며 아메리칸 코믹스의 히어로 피규어나 이소룡 피규어 같은 것도 있었다. 피규어 수집의 경우, 애완견을 키우고 난 뒤로 접었다고 본인이 언급했다.
십수 년 전에 방영한 라디오 스타에서는 동갑인 김국진과 말놓기로 하다가 당시엔 서로 이혼하고 혼자라 김국진이 곰 인형 남는 거 없냐고 물었는데 이승환은 "난 곰돌이 인형 같은 건 취급 안 해."라고 답했다.
발매된 거의 모든 게임기를 소유하고 있다. 과거 콘서트 전국투어때 메가드라이브를 갖고 다니면서 밴드들과 내기를 하기도 했으며, 방송에 나와서 유명해졌듯이 지상파 방송에서 MC 들과 Wii 닌텐도 위스포츠를 즐기는 모습을 보이는 등의 파격적인 오덕행보를 보였다. Wii 정발 전에 방송된 것이라 정발 전까지는 Wii가 통칭 '이승환 게임기'로 불리기도 했다.
하나 있는 누나의 자식들인 조카들과 사이가 좋은데, 매번 게임기랑 게임이 나올 때마다 재밌어 보이면 무조건 사서 조카들에게 선물해주는 게 취미라고 한다.
이외에도 하이파이 오디오, 홈시어터 구축, DVD 수집 등의 매니악한 취미를 갖고 있다. 무릎팍도사에서도 취미가 오디오비주얼[48] 이라고 밝힌 바 있으며, 용산 전자상가 수입음향기기 코너에 가끔 안경 벗고 돌아다닌다고 전해져 있다. '''맨날 츄리닝 입고 구경하러 다니니까 점주들이 돈 없는 사람인 줄 알고 상담을 잘 안 해주더라, 주문해서 집에 배달된 거 보니까 이승환이라고 이름이 적혀 있더라''' 하는 전설적인 괴담을 남기고 있다.
어느 기사의 인터뷰에서 자기 스스로 '''"중년 오덕후"'''라고 인증을 했다.
9.3. 그 외
- 공연에 대한 사항은 따로 한국어 위키피디아의 이승환 문서에 기술되어 있다.
- 4집 《Human》 녹음 때문에 미국에 체류할 때 동양에서 왕자가 왔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이유가 녹음비에 돈을 하도 많이 투자를 해서[49] 다만 본인은 이것을 그 당시에 들은 것이 아니고 윤상에게 들었다고 한다. 이 앨범의 제작비는 공식적으로 밝힌 바로는 5억 원. 1994~95년 당시의 물가를 생각하면 집안 기둥뿌리 몇 개는 뽑았을 액수이다.[50] 그리고 결과는 해피엔딩이었다.[51]
- 가장 친한 뮤지션으로 015B의 정석원을 자주 언급한다. 정석원과는 서로를 갈구면서도 오랜 기간 친분을 유지하고 있을 정도다. 실제로 정석원과도 정규 앨범 작업을 많이 했고, 1995년에는 Human 앨범의 공동 프로듀서로서 활약했다.[52] 그리고 이승환도 015B 6집에 객원 보컬로 참여했으며[53] , 이 앨범의 수록곡 중 하나인 〈독재자〉에서 말 그대로 독재자의 샤우팅을 선보인다.[54] 사실 015B의 정석원, 장호일 두 사람 모두와 친해서 이 그룹의 사정을 아주 잘 알고 있고, 그래서 015B와는 뗄레야 땔 수 없는 윤종신과도 지금까지 오랜 친분을 유지하는 중이다. 1995년 사이에 발매된 015B, 윤종신, 이승환 이 세 사람의 정규 앨범[55] 속지를 보면 Thanks To에 서로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
- 믿기 힘들겠지만 만화가 이은혜의 인기작 중 하나인 《JTA+》에서 남주인공 중 하나가 이승환을 모델로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그 만화에서는 이오공감의 노래 자체가 상당히 중요한 요소들 중 하나다. 만화상에 등장하는 스쿨밴드도 아예 이오공감의 노래로 카피 연주를 한다.[56]
- 2003년 5월 24일 탤런트 채림과 결혼식(사실혼)을 올렸으나 2006년 3월 31일, 부부의 결별이 공식으로 확인되었다. 결혼과 이혼에 관해서는 수많은 루머가 있으나 사실 확인이 되지 않았다. 7집에 실린 〈...사랑하나요!?〉의 MV에는 채림과 이승환이, 그것도 결혼을 테마로 등장하는데 둘 사이가 이혼으로 끝난 만큼 이승환은 그 MV를 매우 불편해한다. 그런데 문제는 TJ미디어에서 〈...사랑하나요!?〉를 선곡하면 그 MV가 꼭 나오며 이승환의 웬만한 곡을 골라도 높은 확률로 이 MV가 나온다(〈그대가, 그대를...〉 MV와 함께 반반의 확률). 이것에 관한 비화는 이승환이 방송의 적에서 밝혔는데, 엠넷에서 그 MV를 노래방에 파는 바람에 그렇게 됐다고 한다.[57] 물론 엠넷이야 그 둘이 이혼할지 알았을 리 없으니 이승환 - 채림 - 엠넷 삼자에게 큰 흑역사인 셈이다.
- 공연 중 팬들이 휴지 폭탄을 던지는 경우가 있고, 워낙 화려하니 이승환 본인도 좋아하곤 했었다. 하지만 2008년 진행한 '슈퍼히어로 콘서트 전국투어' 의 테마가 환경보호인데 휴지 막 버려서 쓰겠냐 하는 논쟁이 팬덤 사이에서 발생했다. 결국 소속사인 드림팩토리가 2008년 9월 27일, 종로구 청운동 인왕산 청운공원에 '종로구 1사(社) 1공원 운동'에 참여하여 소나무를 심음으로서 일단락되었다. 결과적으로는 좋은 취지의 행사에 참여하게 됐지만, 이 행사로 인해 드림팩토리는 2,000만 원을 지출했다.
- 뮤직비디오에도 꽤나 신경을 쓰는데[60] , 김남주, 김현주, 장혁, 임상효, 김남진, 신민아, 김정화, 박신혜, 김시후는 모두 이승환의 뮤직비디오로 데뷔한 연기자들이다. 그리고 그 노력이 인정을 받았는지 1999년 엠넷 영상음악대상에서 〈당부〉가 대상을 받는 이변을 일으켰다. 당시의 가요계가 HOT와 젝스키스로 대표되는 10대 취향의 댄스 음악이 대세였던데다 이들의 뮤직비디오의 수상을 다들 유력하게 보던 상황에서 이승환의 대상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61] 뮤직비디오는 스토리텔링 방식보다는 이미지 위주로 나가는 것을 선호한다고 한다.#
- 2000년에 발매된 김현정 3집 〈멍〉의 후속곡 〈너 정말?〉은 이승환이 직접 작사, 작곡한 노래로 당시 엄청난 인기를 얻어 지상파 1위를 기록한 노래다. 이를 계기로 김현정 4집에도 참여한 바 있다.
- 앨범 자켓에 꽤 신경쓰는 편인데, 1997년에 나온 5집 《Cycle》은 CD 자켓이 3D였다.(테이프는 그런 거 없다) 1999년에 나온 6집은 2CD가 아닌 주제에 CD 케이스가 2층식으로 나왔고 앰풀을 연상시키는 녹색 또는 빨간색의 액체가 담겨 있다. 94년 발매됐던 더클래식과 함께한 캐롤앨범은 크리스마스 카드에 꼽힌 미니 CD 형태로 발매되었는데, 수작업이라 구입 예약한 사람들에게 소량 판매 되었음에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었다. 당시 콘서트에서는 전 직원이 달라붙어서 포장했다고.
- 5집 수록곡 〈애원〉의 뮤직비디오에 지하철 기관사의 옆에 정체불명의 하얀 소복을 입은 여성의 모습이 담겨 귀신이 찍혔다고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에 서술되어 있다.
- 2001년부터 매년 자선 공연인 '차카게 살자'를 진행하고 있다. 이승환 외 친분이 있는 여러 가수/DJ 를 초대하여 펼쳐지며, 모든 출연자들은 개런티 없이 출연한다. 공연 상의 최소 경비를 제외하고 모두 한국 백혈병 어린이 재단등의 사회단체에 기부한다. 상기 공연 외에도 이승환의 공연장 한 켠에는 항상 모금함이 준비되어 있다. 이승환 개인은 한국 백혈병 어린이 재단의 홍보 대사이기도 하다(홍보를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맡게 된 홍보 대사라고 본인 입으로 얘기한 바가 있다).
- 가장 감명 깊게 본 만화책으로 이나중 탁구부를 꼽는다. 9집 앨범 부클릿에 보면, 잔뜩 분위기 잡고 있는데 손에 들고 있는 책은 이나중 탁구부 일본 원판이다.
- 6집의 노래 〈애인간수〉가 《EZ2DJ The 1st TRACKS Special Edition》에 〈My Honey〉라는 이름으로 수록되었다.
- 디시인사이드 에 남자 솔로 가수로는 최초로 개인 갤러리가 생겼다. 그리고 갤러리 생긴지 하루 만에 와서 본인이 인증글(현재는 삭제)을 올렸다. 갤러리가 생긴 이유는 디시뉴스 인터뷰에서 가수 본인이 갤러리를 만들어달라 해서. 하지만 DC 특유의 비아냥 등에 상처 받은 몇 가지 일들로 드림팩토리 팬덤은 DC 쪽과 크게 갈라졌다. 이승환 본인도 갤러리에 가지 않는다고 드림팩토리 게시판에 글을 쓴 적이 있다. 지금은 '환느 까면 사살!'을 외치는 갤로 갱생했지만 지나친 찬양 일색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 〈착한 내 친구〉 라는 노래의 뮤직비디오에서 여장을 했다. 드림팩토리 소속 가수 편집 앨범인 《Long Live Dreamfactory》에도 같은 여장 사진이 들어가 있다.
- 데뷔 당시에 기획사의 횡포에 질려서 아버지 돈을 빌려서 최초로 1인 기획사를 세우고 앨범을 만들었다. 이미 그 전에도 당시 아마추어로는 흔치 않게 홈스튜디오 장비가 있어서 김종서를 비롯한 당시의 아마추어들이 자주 녹음하러 다닌, 명물이었다고 한다. 또한 최초로 보너스 트랙이란 것을 도입하기도. 2집 《Always》의 수록곡 중 하나인 〈이 세상은〉은 CD에만 수록된 곡이다. 즉 카세트 테이프에는 수록되지 않았다.
- 《스타 오디션 위대한 탄생》 시즌2의 멘토로 확정 되었다. 네티즌과 팬들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승환의 성질머리가 드디어 지상파에서 어떤 식으로 폭발할지에 대한 기대 반 우려 반이었으나, 방영 이후의 활약은 무난한 모습이었다.
- SBS에서 선배 가수와 후배 가수가 협동 공연을 하는 프로그램인 《슈퍼매치》를 파일럿으로 제작했는데 거기서 CL과 함께 엄정화의 〈D.I.S.C.O〉를 불렀다.[63] (출연자 중 개코가 '거의 시상식 무대 수준이다.'라는 발언을 했는데 실제로 이승환 공연의 모든 퀄러티가 집약된 무대였으며 시상식 무대 중에서도 이만한 퀄러티를 보여주는 무대는 없었다.)
- 운동도 철저하다고 한다. 평소 1주일에 2~3번 전문 트레이너가 지켜보면서 2시간이 넘는 운동을 한다고. 술은 좋아하지만 공연이 있다면 공연 있기 한두달 전부터 철저하게 금주하고 잠도 일찍자고 몸관리도 엄청 열심히 한다고 한다.
- 매니지먼트를 할 때 소속 연예인들에게 항상 존댓말을 했다고 한다. 심지어 박신혜와 김시후와는 나이차도 많이 나고, 서로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인데도 계속 존댓말을 한다고 한다.(박신혜에게는 2016년 2월 7일 15년만에 말을 놓았다고 박신혜가 자신의 인스타그램에서 밝힌 바가 있다.)
- 위에서 언급했듯이 음향 쪽에 워낙 신경을 쓰다 보니 《황금어장-라디오 스타》에서는 "나는 방송국들의 음향설비를 믿지 못한다."라 말하며 확고한 의지로 립싱크를 한 적이 있다. 오덕계에선 꽤나 화제가 되었던 일. 하지만 립싱크는 잘하지 못 한다. 특히 예전의 가요 프로그램 출연시의 립싱크, 뮤직비디오상의 립싱크를 보면 어색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64]
- 2014년 5월호 패션잡지 아레나 인터뷰에서 야동을 6테라 가지고 있다고 언급했다.
- 2014년 10월 25일자 《히든 싱어 시즌3》에 출연, 모창 능력자들과 경쟁을 펼쳤는데 다른 가수들처럼 MR을 쓴 게 아니라 밴드를 데려와서 연주를 하고, 일부 공연 시설까지 갖다놓는 차원이 다른 무대를 보여줬다. 1라운드 탈락자를 제외하는 게[65] 아니라 1라운드 탈락자도 광팬이었고 이승환 본인이 말했듯 오히려 3라운드 탈락자인 예비 과장인 사람이 다른 출연자에 비해 아닌 듯 싶었지만, 모두가 이승환 광팬이라 훈훈한 무대가 펼쳐졌다. 비록 이승환이 1표 차이로 우승을 놓치긴 했으나[66] , 4라운드 경연이었던 '어떻게 사랑이 그래요'는 히든 싱어 역대급 무대였다는 평이 많았다. 말 그대로 누가 우승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닌, 스타와 팬이 하나되는 무대였다. 우승은 놓쳤지만 방송 이후 '어떻게 사랑이 그래요'가 온라인 음원 차트에서 예토전생하고 콘서트 예매율이 올라가는 등 이승환 본인에게는 좋은 결과를 낳았다.
- 히든 싱어 방송 이후 페이스북에 대기실에서 모창 능력자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올리며 왕중왕전에서 우승자인 김영관을 응원한다는 메시지를 남겼고, 홍대 모처에서 모창 능력자들과 같이 모여 히든 싱어 본방을 시청하는 사진도 남겼다.
- 2015년 설 연휴 특집으로 2014년 연말 라이브 실황이 지상파를 탔다. 데뷔 26년 만이라고 광고가 95% 팔린 것을 봐서는 반응[67] 이 나쁘지 않았던 모양이다.
- 제12회 한국대중음악상에 올해의 음악인, 최우수 팝 음반, 최우수 팝 노래 등 3개 부문에 수상 후보로 노미네이트되었다. 그리고 올해의 음악인 부분 수상했다. 수상 직후 2015년 3월 5일 SBS뉴스 중 하나인 《SBS 나이트라인》 초대석에 출연하였는데, 이 상을 꼭 받고 싶었다고 인터뷰했다. 인터뷰 영상
- 페이스북을 활발하게 하고 있으며 개인 근황이나 사진 등이 자주 올라오는데 본인의 정치 성향이 드러나는 포스트도 많이 올라오고 있다.
- 2015년 9월 19일 《빠데이 26년》 공연을 'V앱'에서 생중계했으며, V앱 최종 시청자 기록은 382,766명이었다. 오후 4시부터 11시 직전까지 7시간 가까이(공연시간을 측정했던 스톱워치 캡쳐샷을 페이스북에 올렸는데, 기록은 6시간 21분 27초) 66곡에 달하는 곡을 게스트 없이 치러내 38만 시청자들을 경악케 했다. 중간에 20분 가량 인터미션이 있어 휴식 시간이 있긴 했으나, 그걸 고려하더라도, 몇 시간 내리 노래를 부른 것인데 성대는 한 점 흔들림도 없어 나이는 거짓말에 불과하다는 댓글이 나올 정도였다.[68]
- 2015년 9월 28일, 팬들의 빠데이 26년 생중계 풀 영상을 유료로라도 공개해달라는 요청에 힘입어 네이버 뮤직 스페셜에 올라오는 빠데이 영상들의 총 조회 수가 100만을 넘으면 <빠데이 26년> 6시간 21분짜리 풀영상을 네이버 V앱을 통해 공개하기로 했다. 결국 2015년 10월 11일 오전 00:13, 기적적으로 1,001,012뷰를 찍었다. 빠데이 공연 풀영상은 2015년 10월16일부터 여기에서 72시간 동안 공개되었다. 그 후 네이버에서 유료 판매가 시작되었고 그 수익금은 전액 'free from all'에서 홍대클럽과 밴드들의 상생 프로젝트를 위한 기금으로 쓰이고 있다. 매달 5개팀을 선정한다. 각 클럽의 대관료와 밴드의 연습비용을 지불하고 입장료의 수익금은 밴드들이 전액 가져가는 홍대 클럽 활성화와 밴드들의 수익을 위한 선배 이승환의 큰 뜻으로 1년 가까이 계속 이어져오고 있다.
- 2015년 11월 4일, 홍대 롤링홀에서 7시부터 15~29세 청소년과 청년들을 대상으로 "한쪽 눈을 가리지 마세요"라는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반대 콘서트를 열었다. 이 콘서트는 10cm, 가리온, 데이브레이크, 피아, 로큰롤라디오, 타틀즈, 강풀, 주진우와 함께했다. 공연장 외부의 화이트보드에 교과서 국정화에 대한 의견을 적고 무료로 입장할 수 있었다.
- 2016년 4월 21일, 정규 12집 《Fall To Fly 後》의 선공개곡 〈10억 광년의 신호〉'가 공개되었다. 이승환 스스로도 이곡을 좋아한다고. 또한 역대 최고의 음향 수준을 보여주는 곡이었다. 같은 날 오후 8시에 '10억 광년의 신호 Showcase' 공연을 진행하였고 그중 8시부터 9시까지 진행한(20분 추가된 9시 20분에 끝났다.) 쇼케이스 1부는 네이버 V앱을 통해 생중계되었다. 1부에서 이승환은 〈10억 광년의 신호〉를 처음에 한 번, 마지막에 또 한 번, 총 2번씩이나 부르는 상상도 하지 못할 모습을 보여주었다.
- 2016년 4월 23일 방송된 《유희열의 스케치북》에 출연해서 〈10억 광년의 신호〉를 부르면서 신곡이 지상파를 타게 되고 이승환이 잠시나마 실검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 OST를 제외하고 방송 매체에서 이승환의 곡이 사용된 사례로는 KBS 《개그콘서트》 코너 〈고집불통〉의 오프닝(9집의 〈소통의 오류〉), JTBC뉴스중 <정치부 회의의 오프닝(10집의 〈단독전쟁〉) 등이 있다. 특히 정치부 회의에는 〈단독전쟁〉을 직접 추천하여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 2017년 9월 20일 tvn의 《알바트로스》라는 예능에 나왔으며 유병재와 함께 빵집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는데 빵 이름을 잘 못 외워서 고생하는 모습이 방송되었다.
[1] 1966년 1월 13일은 주민등록상의 생일이다. 데뷔 초에는 1967년 1월 13일 생으로 활동했었지만(1992년 일밤 몰래카메라 때 언급) 그건 매니저가 나이를 2살이나 속여 소개했기 때문이라고 TV 프로그램에서 밝힌 바 있다. 또 2007년 라디오스타 출연 당시 1965년생 김국진과 동갑이라고 밝힌 적이 있었다.[2] 어머니는 1993년 3집 제작 이전 별세. 3집에 어머니를 기리는 곡 '내 어머니'가 수록되어있다.[3] SBS TV 프로그램 고쇼에 출연했을 당시 자신이 직접 말한 키와 몸무게다.[4] 국민학교 4학년때 전학왔다. [5] '우리기획'으로 시작된 이승환의 1인 기획사로, 2014년 재정난으로 일단 문을 닫았다.[6] 윤상이 소속된 그 기획사 맞다.[7] 오드뮤직과의 계약만료로 다시 드림팩토리로 복귀했다. 현재는 매니저와 계산직공만 근무하고 있다.[8] 〈드림'''팩토리'''〉의 '''장'''[9] 토이 3집과 5집에 객원 보컬로 참여할 당시에는 '이철민'이라는 가명으로 참여한 바 있다. 비슷한 예로 신경필이 있다.[10] 이승환이 DC인사이드 이승환 갤러리가 생겼을 때 인증글을 남겼던 유동닉 '아쟐랑께롱'에서 유래했다. 현재는 많이 사용하지 않는 편이다.[11] 2008년 12월 2일 타블로와 꿈꾸는 라디오의 코너 꿈꾸라이브에 출연하여, 고등학교 후배인 기자가 첫 인터뷰 때 쓸 말이 없어서 붙인 별명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본인은 이런 예명이 스스로에게 '''음악적인 면에서 족쇄가 된다'''고 생각해서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12] 조규찬의 표현대로 한국 대중음악사의 황금기를 떠올리게 하는 인물이다. 그 시절은 TV 출연을 열심히 안 해도 라디오 방송 횟수와 공연, 입소문으로도 100만 장 판매가 가능한 음반들이 있던 시기였다.[13] 비슷한 시기에 데뷔했던 신승훈, 윤상, 신해철 등도 1990년대 초반엔 지금의 아이돌 포지션에 가까웠다. 이후 밴드, 프로듀싱 등에 전념하면서 이들을 아이돌로 보는 시선은 줄어들었다.[14] 정확히 말하면 계속 퇴짜를 맞다가 열일곱 번째로 갔던 서울음반(현 카카오M)에서 드디어 성사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기획사에서 3년에 3장의 앨범을 내야하고 매년 홍보비 2000만 원을 가지고 오라는 황당한 조건을 내밀었었다. 이에 이승환은 좀 아닌 것 같다 생각은 하면서도 여기에 응해서 녹음 시작을 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영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결국 아버지에게 상황이 이렇다는 것을 말한 후에 그때까지 소비한 녹음비 800만 원은 다 지불하고 계약을 파기했다. 결국 유산으로 받은 500만 원으로 본인이 직접 데뷔 앨범을 제작했다. 계산하면 1300만 원으로 데뷔 앨범을 제작한 셈이다.[15] 아버지의 반대가 엄청 심했다고 한다. 하지만 1집이 대성공을 거둔 다음에는 적극적으로 후원해주었다고 한다. 아들이 가수인 것을 아버지 친구들이 모른다고 하면서 TV 활동은 안 하냐고 했다고. 수입 관리도 해줬을 정도니 나름 전략도 세워준 셈이다. 그래서 본인 명의의 도장과 통장은 39살에 처음 가졌다고 한다.[16] 초창기 시절의 TV 출연 영상을 보면 시선 처리를 엄청 못 한다. 본인 스스로도 TV에서 라이브는 공연 시보다 무척 못한다고 스스로 말하고 다닐 정도다. 하지만 TV 출연을 안 하면 영업이 불가능한 시대가 돼서 이전보다 TV에 자주 나오기는 한다.[17] 라디오스타에선 아예 "방송국 음향스태프를 믿지 못해서 방송국에선 라이브를 안 한다." 라고 하기도 했다. 항상 음향 엔지니어를 데리고 다니는데, 방송국에서도 그러면 스태프들이 싫어해서 그냥 방송국에선 립싱크를 한다고 한다.[18] 97~99년 사이의 투어를 3CD 형태로 99년 무적전설이란 타이틀로 발매했다. 이 앨범은 패키지 디자인부터 시작해서 여러가지로 극찬을 받은 앨범이다.[19] 이 실황은 끝장 라이브로 DVD 발매되었다.[20] 국내 단독 공연 시간 기록 1~7위 모두 이승환이다. 03년 '끝장' 공연에서 5시간 33분 기록을 세웠고, 12년 '한번더 빠데이'에서 5시간 40분으로 경신, 15년 '빠데이 26년'에서 6시간 21분으로 경신, 16년 '빠데이 7' 에선 무려 8시간 27분으로 경신했다. 18년 '빠데이 X2 너만 오면 돼'는 8일은 6시간 2분, 9일에는 6시간 15분 공연했다. 마지막으로 2019년 6월 16일 '라스트 빠데이:괴물'에서 9시간 30분으로 이전 기록을 경신했으며, 이는 최장 공연 기록이다.[21] 이 시절 오태호는 기타리스트였다.[22] 이 시절 파고다 극장 공연에서 온몸에 쇠사슬을 감고 무대에 멋지게 등장했는데 제일 앞자리 여자 관객이 '''어머 여기는 중학생이 보컬인가 봐!'''라고 이야기하는 걸 듣고 좌절했다고 한다.[23] 또한 이 시절에 가수를 꿈꾸는 아들이 재능은 있는 건지 궁금한 아버지가 평소 알고 지내던 작곡가 길옥윤에게 평을 듣고자 밴드 공연에 온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 당시 욕 들어간 외국 메탈곡을 한국화해야 한다며 걸쭉한 욕을 쩌렁쩌렁한 샤우팅으로 내뱉는 바람에 어르신들이 당황했다고 한다. 어찌 됐든 이 공연을 계기로 첫 음반을 위한 부친의 지원금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24] 다만 본인은 이 앨범, 특히 이 당시 본인의 보컬톤을 상당히 부끄러워 하는 듯하다. 스스로 '''바람난 중딩'''이라면서 디스한다.[25] 그래서 라이브에서는 아예 록으로 싹 뒤엎어서 부른다.[26] 그래서 이오공감의 앨범은 오태호의 발라드 곡 때문에 많이 팔렸다고 스스로 인정했다.[27] 4집의 '너의 나라'와 6집의 '나의 영웅'을 들어보면 된다. 골수팬들이야 좋다고는 하지만 발라드 가수로만 아는 사람들에게는 충격으로 느껴질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4집에서 다수 수록된 록적인 트랙을 듣고 '''변절자'''라면서 돌아선 팬들도 상당수 있었다. 이와는 반대로 1, 2집 시절의 이승환을 낯설어하는 사람들도 예상 외로 많은 편이다.[28] 많은 사람들이 이 곡을 김동률이 작사하고 작곡까지 한 노래로 알고 있는데 이 곡은 이승환이 가사를 쓰고 김동률이 멜로디를 쓴 곡이다. 두 사람은 고등학교 9년 선후배 사이다. 김동률은 본인이 고등학교 2학년 때 당시 학교 가요제의 손님으로서 이승환을 본 기억이 있다고 회상했다. 〈천 일 동안〉은 김동률이 이승환 집에 놀러와서 피아노로 멜로디를 연주해줬을 때 이승환이 그 자리에서 〈다만〉이랑 함께 이 곡을 수록하겠다'고 바로 알려줬다고 한다.[29] 5집 이후부터 작곡 부분은 공동으로 하는 비중이 많이 늘고 있다.[30] 유희열의 인터뷰에 의하면 '''전체적인 아이디어의 대다수는 해당 뮤지션(이승환, 윤종신)이 하고 본인은 그 아이디어를 구체화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31] 불후의 명곡으로 알려진 더 클래식의 마법의 성, 그게 이 양반이 제작한 것이라고 한다. 이름을 감춘 이유는 그 당시 '가수가 왜 제작을 하느냐'는 주변의 눈총(그 시절에는 가수가 제작은 하는 것에 대해서 시선이 고운 편이 아니었다고 한다.) 때문에 숨긴 것이라고 밝혔다. 소속 가수로 따지면 더 클래식이 바로 우리기획 소속 가수 1호다.[32] 〈꽃〉[33] 〈그냥 그런 이야기〉 라이브 버전[34] 너의 나라와 변해가는 그대 라이브에서는 3옥타브 레(D5)도 올라가지만 샤우팅에 가깝게 부른다.[35] 〈천 일 동안〉 라이브 버전 마지막 애드리브 가성 한정[36] 2020년 《놀면 뭐하니?》 방구석 콘서트에서 〈어떻게 사랑이 그래요〉를 부를 때는 아예 마지막 부분을 마이크 없이 부르면서 무대를 울리는 기량을 보여주기도 했다. 콘서트에서도 동일하게 자주 보여준다.[37] 이 곡 뮤비의 주인공이었던 박신혜의 연기 데뷔작으로 유명하다.[38] 원래 가사는 "야발라바히기야 야발라바히기야", "야발라바히기야모 하이마모하이루라"다.[39] 드러머 김반장이 아니라, 김반장의 극딜스테이션이라는 팟캐스트를 진행하는 김선진을 뜻한다.[40] 나경원의 달창 해명이 뜬 날과 노래를 업로드한 날이 같다.(2019년 6월 20일) 후에 이승환이 나경원의 달창 해명으로 내놓은 '''달'''빚 '''창'''문 발언이 우스웠단 이유였다고 밝혔다.[41] 두 게시물에 대해선 문파들을 향한 게시물이 아니라 팬 커뮤니티를 향한 게시물이라고 하나, 팬 커뮤니티를 제외한 이들에게는 이해되기 어려웠다.[42] 단, 이에 있어서 김반장이 맞고소를 하면 자연스레 연예면에 기사들이 나오므로 법무법인에 보도자료 내려던 걸 자신이 중지시켰단 언급을 남겼는데, 이미 소속사인 드림팩토리클럽이 SNS로 이를 고지하면서 기사화 되었기에 쓸모없는 이야기가 되었다. 이 후 이런 기사화에 대해서 법무법인과 소속사는 보도자료를 배포하지 않았다는 입장문을 공유하며 '매를 번다'며 조롱을 했으나 사실상 SNS에 이를 고지한 드림팩토리클럽이 보도자료를 간접적으로 내놓은 것이나 다름 없긴 하다.[43] 진보층에서의 작전세력 논의는 2018년 중순에 김어준을 기점으로 반짝했으나 정작 증거를 찾긴커녕 헛발질만 했고, 이 후 진보층 커뮤니티의 토론문화를 '너 작전세력' 하나로 모조리 붕괴시킨 주범이 되었다.[44] 해당 원문은 "영화 '26년'의 첫 투자자 였듯이, 광장에 서는 첫 번째 대중가수 였듯이, 그들을 향한 소송의 첫 번째 고소인일 뿐."이다. 참고로 이승환이 본격적으로 활동한 이명박 정권 전부터도 광장에 나선 신해철이나 YB가 있고, 그가 광장이라고 말하는 것이 박근혜 탄핵 집회였다면 그보다 먼저 나선 가수들도 많다.[45] 사실 실버보험이라는게 말그대로 실버 세대(노년기)일 때를 대비해서 만든 보험이라 연령 기준이 높지는 않다.[46] 이선희와 함께 출연한 방송도 꽤 있었고 혼자 출연하는 방송에서도 꽤 언급을 했었다.[47] 이후 본인과 공연팀의 의상을 본인이 코디하고 있다. 그래서 스스로를 코듸lee라고 부르기도 한다.[48] Audio/visual. 음향과 영상을 합친 시스템을 의미하며, 줄여서 A/V라고도 한다. 무릎팍 도사에 출연했을 때 올밴이 AV가 야동 아니냐고 물어보면서 공격하기도 했다. 힐링캠프에서도 이 이야기가 나왔는데 당시 MC중 한 명인 한혜진씨가 다른 뜻으로 오해했다가 '''"난 썩었어"'''라고 당황해하는 모습이 방송에 나오며 그대로 짤방감이 되고 말았다.[49] 세션에 참여한 사람들이 음악 좀 듣는 사람들이라면 어머나!!!를 외칠 이런 사람들이 다수였다고 그래서 발매 당시에 화제가 되기는 했었다. 하지만 시행착오도 많아서 생각보다 지출액이 많았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당시 한국 경제 부흥으로 달러 환율이 낮았던 이유도 한 몫 하기도 한다. 게다가 이승환 본인이 스스로도 말하듯이 꽤나 잘 살았던 집안 출신인 것을 감안하면...[50] 당시 최신 준중형차였던 현대 아반떼의 가격이 800만 원 정도였다. 당시 분양된 1기 신도시인 일산신도시 32평형이 1억 5천만 원, 현재 해당 아파트 가격은 4억 원에 이른다. 즉 당시 5억이면 현재 10억 이상이다.[51] 더불어서 앨범 자체가 후배 가수들에겐 하나의 지표가 될 정도로 잘 만들어진 앨범이었고, 이승환의 보컬톤도 이 앨범에서 두드러지는 변화가 있다. 또한 4집을 좋아하는 팬들도 많으며 무엇보다 타이틀곡이 〈천 일 동안〉이다.[52] 그리고 또 한 사람은 데이빗 캠벨, 뮤지션 벡의 아버지인 그 양반 맞다.[53] 나의 옛 친구. 편곡은 유희열[54] 들어보면 숭배하라! 하고 외치는 목소리가 이승환의 목소리다. 처음에는 몰랐다가 사실을 알고 놀란 사람들도 있었다.[55] 순서대로 《The Big 5》, 《공존》, 《Human》 [56] 다만 이 만화는 많은 사람들이 어린 시절에 보고 설레었다가 나이가 다시 들어서 보니 현실과의 엄청난 괴리를 느껴서 별로였다는 평도 많다.[57] 이 뮤직비디오를 간접적으로 언급하고, 그때 짧은 뮤직비디오 클립이 나오는데, 채림은 아예 블러 처리했다.[58] 지상파에서 공개한 어린 시절의 사진을 보면 MC인 유재석이 놀랄 정도로 마른 체구였다. 사실 위에도 언급되었지만 그 이전부터 운동을 하고 있기는 했으나 지금처럼 근육이 눈에 띄지 않았다. 본인도 여기에 대한 일종의 컴플렉스가 있었는지 우리의 체형을 적들에게 알리지 마라를 신조로 삼고 다녔다.[59] 힐링캠프에서 운동을 시작하게 된 동기를 밝혔는데 이것은 직접 보는 것을 권한다.[60] 신인이 아니면 출연시키지 않는다는 얘기를 한 바가 있다.[61] 당시 PD들이 최고로 꼽았다면 어느 정도 수상 가능성은 있던 셈이다.[62] 당시 공연 실황이 담긴 DVD가 바로 이승환의 첫 공연 DVD 《끝장》이다.[63] 이 영상에는 CL의 인기 때문인지 외국인들의 댓글이 많은데, 그중에 "who is the boy, i like his voice"라는 댓글에 다른 유저가 친절하게 "He is a MAN not a boy but a MAN that is 47 years young"라고 답글을 달아주었다.[64] 이런 립싱크를 못하는 가수들 꽤 많다. 당장 아이돌 중에도 김희철 같은 경우는 립싱크할 때 싱크가 엇나가는 듯한 립싱크로 대충한다고 욕을 먹기도 했고, 노라조는 립싱크할 거면 때려치라는 말에 자기들끼리도 입이 안 맞아서 립싱크를 못한다고 한 적이 있다. 실제로 일종의 자존심 문제 때문에 립싱크에 신경 안 쓰거나 라이브를 고집하다보니 막상 뮤직비디오 촬영 같은 립싱크를 해야하는 상황에서도 잘 못하는 가수들도 많다.[65] 본인은 아니고 아내가 이승환 광팬이라고 했으나 본인도 상당한 팬임이 드러났는데, 모창능력자들이 이승환을 위해 가족을 불러줄 때 사랑스러운 눈빛을 쏘는가 하면, 팬 카페에 팬심을 드러내는 글도 작성했다.[66] 우승자인 김영관이 90년대 초중반 이승환의 목소리와 창법을 소름끼칠 정도로 잘 재현했다. 어떻게 사랑이 그래요 후반부에서 보여주듯 성량의 차이가 좀 있긴 했다.[67] 라이브를 갔다온 사람들은 3시간이 넘는 공연이 90분으로 짤리고 카메라가 별로라고 비판했지만 일단 지상파 타는 것만 해도 어디냐 라면서 좋아하는 모양새였다.[68] 실제로 49세(15년 당시)에 이렇게 할 수 있는게 쉬운 일이 아니고 나이와 상관 없이 대부분의 다른 가수들은 6시간 21분 동안 66개의 곡을 부르라고 해도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