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슬리 맥네어

 



'''레슬리 제임스 맥네어'''
'''Lesley James McNair'''

[image]
출생
1883년 5월 25일
미국 미네소타 번데일
사망
1944년 7월 25일
프랑스 망슈주 생로
복무
미합중국 육군
복무 기간
1904 ~ 1944
최종 계급
육군 중장
육군 대장(사후)
주요 참전
베라크루즈 점령
판초 빌라의 급습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 코브라 작전†
서훈내역
퍼플 하트
레지옹 도뇌르
1. 개요
2. 실책
2.1. 견인식 대전차포가 좋다!
2.2. 셔먼으로 충분하다!
2.3. 모의전 조작
3. 반론
3.1. 당시 대전차 자주포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
3.2. 퍼싱의 신뢰성 문제와 셔먼의 수량 확보에 대한 노력
4. 사망
5. 평가
6.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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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군인. 최종 계급은 육군 중장이었으며 전사 후 대장으로 추서되었고, 1942년부터 44년까지 미 육군 지상군 총사령관 자리를 맡았다. 해외주둔 미군을 위한 조직, 훈련, 보충을 책임지는 자리였다. 제1차 세계 대전소령 계급이었으나 35세의 나이로 임시 준장이 되어 당시 미군의 최연소 장군이 되었다. 소령에서 장군으로 진급이라니 이상하게 생각하기 쉬운데, 미군은 전시진급으로 원래 자기 계급이 뭐든간에 필요한 직책에 맞는 계급을 받는게 가능하다. 다만 월급은 원래 계급의 월급을 받고, 전쟁이 끝나면 원래 계급으로 복귀.
1944년 미 육군항공대의 오폭으로 전사했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전사한 사이먼 버크너 육군중장과 함께 미군 내 둘 뿐인 중장 전사자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군 전사자 중 최고 계급이다.[1]
2차대전 당시 저능한 인종이라고 여겨져 비전투부대나 후방 예비부대에 몰아넣어두던 흑인들을 보병과 기갑병과에 투입하는 등 상당한 진보인사라고 할 수 있었다.
아래 항목들에서 보듯이 여러 측면의 평가가 존재하는 인물이다.

2. 실책



2.1. 견인식 대전차포가 좋다!


이 사람은 대전차 자주포보다 견인식 대전차포를 선호했기에 M10 울버린의 배치를 줄이고 M5 대전차포의 배치를 늘리려고 했다. 여기까지는 별 문제가 없다. M10 울버린이 장비한 3인치 포[2]판터티거를 상대로 하기에는 좀 부족했던 게 현실이니, 더 강력한 대전차포가 미군에 있다면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M5 대전차포는 다름아닌 M10이 장비한 3인치 포를 M2 105mm 견인곡사포 포가에 얹어 만든 물건이었다. 독일군의 88mm 대공포나 영국군의 17파운더에 맞먹는 물건을 원했던 일선 장병들에게 '''다운그레이드'''된 대전차병기를 건네준 것이다! 물론 17파운더도 초기형은 25파운더 야포의 포가를 이용했지만 그건 아직 포가가 개발되지 않아서 임시로 야포 포가와 결합한 것이며, 곧 전용포가가 개발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당장 M5 대전차포는 1문당 견인차량과 그 운전병을 포함해서 10명 가까운 필수인원이 필요했다. M10 울버린이 5명의 승무원으로 운용되는 것과 비교하면 더 불편해진 셈이고, 이 때문에 일선부대는 M5 대전차포의 배치를 격렬하게 반대했다. 플래툰 2011년 7월호와 8월호에 이 이야기가 언급되는데, 맥네어를 가리켜 "개념을 안드로메다로 보낸 상관"이라며 마구 깠다. 게다가 M5는 원래 포가가 105mm 야포인 만큼 대전차포로서는 지나치게 자세가 높고 크며 무거워서 매복 및 위장도 힘들고, 유사시 접근하는 적에게 포신을 돌리기도 힘겨웠다.
게다가 견인식 대전차포 자체는 이미 2차대전 초기부터 방어전에서나 기용하는 무기가 되어가고 있었다. 위력은 좋으나 무겁고 방열하는데 시간이 걸리며, 방어력은 0에 가깝기 때문에 적 전차가 보병과 같이 합동작전을 펼치면 추풍낙엽처럼 일방적으로 당하는 일이 많았던 것. 독일이나 소련이 견인식 대전차포도 많이 쓴 이유는 돈과 물자가 딸렸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 대가는 현장에서 병사들의 시산혈해로 돌아왔다.
물론 소련군은 참호를 파서 대전차포만 노출시키고 대전차포 운용병을 숨겨 안전하게 장전하고 사격하는 포진지를 건설하고 주변에 호위용 보병참호를 꾸미는 팍 프론트(Pak Front)전술로 사상자를 줄였다. 거기에 지원용으로 쏟아지는 스탈린의 오르간과 122mm, 152mm, 203mm 야포들은 덤이었다. 이건 독일군도 비슷하게 실행했으므로 제대로 진지를 건축하고 매복한다면 그렇게까지 불리하지는 않았지만, 문제는 '''미군은 공격자였다는 사실'''이다. 미군의 유럽전선이란 폭격만 미친듯이 한 다음 상륙해서 독일으로 무한전진!이었는데 이런 공격전에선 대전차 자주포도 유용한 물건은 아니었지만 견인식 대전차포는 그야말로 무쓸모한 물건이었다. 견인중이던 대전차포를 견인차에서 끌어내고 방열하여 전개하는건 촉박한 전투중엔 무한에 가까운 시간이 소모된다. 그럼 이미 결과는 전멸 아니면 다른 병과가 적을 격퇴한 이후가 된다. 더군다나 독일 중전차들의 주요 전략은 정직한 전면전도 가끔 있었지만 보통은 미군의 대열을 기습하여 탈탈 털고 항공대가 오기 전에 도주하는 것이었는데 이런 경우에는 독일 중전차에 의해 대전차포와 조작요원이 통째로 그냥 갈려버린다.
사실 1940년 맥네어는 프랑스 전역의 전훈을 바탕으로 견인식 대전차포를 퇴출시켰다. 그런데 나중에 그는 튀니지 메드닌 전투에서 6파운드 대전차포가 괄목할만한 전과를 올렸다는 영국군 보고서에 주목하여 견인식 대전차포의 재도입을 주장했다. 이에 일부 일선 지휘관들을 비롯한 반대파는 견인식이 공간(포외에 견인차량까지 포함하면 수송선내에서 차지하는 공간이 훨씬 커진다)을 더 많이 차지하고 필요인원도 훨씬 많아진다고 반대했지만, 맥네어 장군이 '''높으신 분'''이었기에 버틸 수가 없었다.
이는 사막이라는 개방된 곳에서 6파운더를 막아낼 방호력이 없는 3, 4호 전차가 큰 피해를 입은 것으로 지형이 전차에게 불리한 상황에서의 활약이였다. 하지만 M5 견인식 대전차포가 활약할 유럽은 시가지와 보카주 지형 등이 많아 전차가 몸을 숨기기 좋고 상대도 5, 6호 전차로 훨씬 방호력이 좋았다. 물론 전차만 숨으란 법은 없으므로 M5도 이동 중이던 티거 편대를 발견해 큰 피해를 주기도 했다.(참전병의 회고이지만 미군은 모든 전차를 티거라고 보고했기 때문에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
결국 미군은 어쩔 수 없이 견인식 대전차포를 배치해야 했고, 노르망디 상륙작전부터 아르덴 대공세에 이르기까지 미군 대전차포 부대는 '''그냥 시체'''가 되었다. 예를 들어 아르덴 대공세 때는 독일군의 공격을 한번만 받은 경우라도 대전차포 부대가 모든 견인식 대전차포를 방기 및 망실하여 그냥 보병부대로 전락해버린 경우까지 있었다. 그래도 이들은 운이 좋은 경우이고, 대전차 자주포를 장비한 부대의 몇 배나 되는 사상자를 내는 게 일상이었다. 참다 못한 지휘관들이 대전차포를 '''그냥 야포'''로 취급해서 보병지원용으로 써먹을 정도이니 설명이 필요한가?
나중에 90mm 대전차포가 개발되긴 하지만, 대공포인 물건을 만능포화해서 배치한데다가 확실하게 연합군이 제공권을 잡는 바람에 대공포 부대가 할 일이 없어서 대전차전도 할 때 주로 사용한 경우며, 성능은 좋았지만 대전차포 부대가 주력으로 쓰기에는 무겁고 복잡해서 제대로 보급되지도 않았다.

2.2. 셔먼으로 충분하다!


이 사람은 "우리 미군은 M4 셔먼의 생산에 집중해야 하며, '''M26 퍼싱 같은 전차는 필요없다!'''"고 했다. 여기까지는 별 문제가 없다. 그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말이다.
그러나 그는 '''높으신 분'''이었기에 그 주장을 실행할 권력을 갖고 있었다. 1943년 9월 13일에 M26 퍼싱 10대가 완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맥네어 때문에 퍼싱을 500대 생산하려던 계획이 무산된 것이다! 이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에게 던져진 말이 가관이다.

"호랑이는 별로 많지도 않을 것이고, 뭐 나머지 독일 전차들 따위는 셔먼으로도 충분히 상대가 가능하다. 적군의 전차는 대전차 자주포가 상대하면 된다."

문제는 '나머지 독일전차들' 중에 표범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통상적인 밀덕 위키러라면 잘 숙지하고 있듯이, 이 녀석은 독일군의 차기 주력전차였다! 호랑이의 수도 미군의 예상보다 많은데다가 덤으로 그 호랑이를 능가하는 더 강력한 호랑이나 다른 맹수들을 만나버려서... 재수 없는 몇몇 미군들은 레어 몬스터(?)인 4호 돌격전차 브룸베어나 히든 보스(?)인 야크트판터, 엘레판트, 슈투름티거같은 시가전용 돌격전차들을 만나서 무진장 고생하기도 했다. 슈투름티거든 브룸베어든 공통적으로 '포 한 번 쐈는데 셔먼 둘이 터져나갔다' 같은 무용담이 있는 것[3]을 보면... 안습한 건 셔먼으로는 앞에서 언급한 전차들(판터, 티거, 티거2, 브룸베어, 슈투름티거)을 잡는 게 매우 힘들었다는 점. 하다못해 레슬리 맥네어가 치하 같은 고물덩어리가 굴러다니는 태평양 방면의 지휘관이었더라면 종전까지 셔먼으로 밀고나갈 수 있었겠지만, 유럽방면에서 셔먼으로 밀고나간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리고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벌어졌고, 그 이후에 벌어진 참사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2.3. 모의전 조작


이런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조작질하는 것은 기본으로 하는 막장 행위도 저질렀다.
일단 초기에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대전차 자주포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래서 대전차부대 vs 전차부대의 대결을 통해 대전차자주포가 전차보다 우수한 무기임을 증명했다. 헌데 '''조작경기'''. 맥네어가 지지하는 청군은 사실상 한등급 높은 편제의 제병협동군으로, 항공기와 전차와 포병까지 있을건 다 있었다. 전차부대는 '''오직 전차뿐이었는데.'''
그의 조작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청군 보급차량에 '''무적''' 판정을 내린 것. 밥차가 Power Overwhelming인 것이다! 덕분에 청군은 무적 밥차로 정찰을 아주 쉽고 편하게 했을 뿐 아니라 덤으로 무적 밥차를 방패로 써서 적군 방어선을 몰아쳤다.
더 웃긴건 이렇게 조작으로 떡칠해놨음에도 청군의 주요 성과는 '''매복'''에 기인한 것이다. '''치트를 썼는데도 컨트롤을 해야 대전차포는 전차를 이길 수 있었다.[4]''' 이뭐... 그야말로 일본군의 도상연습(워게임)과 다를 바 없었다. 이렇게 해서 대전차 자주포를 억지로 킹왕짱이라고 해놓았으면서 나중에 이런저런 사정으로 그보다 견인식 대전차포가 더 낫다고 생각을 바꿔 버린다(...).

3. 반론



3.1. 당시 대전차 자주포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맥네어 준장과 앤드류 브루스 중령은 대전차 부대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다. 그런데 문제는 각 군종별로 상이한 요구가 나왔다는 것이다. 보병부대는 방어적 용도로, 기갑부대는 기동부대로, 포병은 중포로 운용해야 한다는 식이었다. 맥네어와 브루스는 나름대로의 교리 연구를 통해 대전차 부대는 "적대적 전차의 격멸"을 목표로 해야 한다는 교리를 세웠다. 그를 위해서 대전차 부대는 군단이나 군 사령부 직할의 독립 대대로 편성되어 사령관의 결단에 따라 적 전차부대를 공격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이를 위하여 대전차 자주포는 강력한 기동성을 갖춰야 했다. 위의 모의전 조작에서 보여지듯 맥네어도 처음에는 대전차 자주포 지지자였다. 그래서 나온 게 M3 하프트랙에 프랑스제 75mm 야포를 얹은 초기형 대전차 자주포였다. 이후 1942년 9월 본격적으로 M10 울버린이 양산되기 시작해 이탈리아 전선에 투입되었다.
그런데 미군의 졸전으로 유명한 카세린 협로 전투에서 제2군단장 로이드 프레덴덜 소장은 위와 같은 대전차 자주포 운용 교리를 전혀 지키지 않고 대전차 자주포 대대들을 중대 단위로 쪼개어 분산하여 매복시켜 버렸다. 이에 노련한 독일군 지휘관들은 대전차 자주포의 사거리 밖에서 관측경으로 매복한 대전차 자주포들을 발견하면 포격 지원을 요청했고, 장갑이 빈약한 M3 하프트랙이나 장갑이 아예 없는 M6 닷지 트럭을 바탕으로 제작한 초기형 대전차 자주포들은 큰 피해를 입고 만다. 게다가 미국의 대전차 자주포로는 공격적으로 나서기도 무리였다. 회전포탑이 달려서 독일의 비슷한 차량보다는 전술적 유연성이 좋았지만, 종이장갑과 상부가 오픈된 포탑은 사실상 매복작전 외에는 해당 차량을 사용하기 힘들게 하는 주 원인으로 작용했다. 독일의 구축전차의 경우 기동성을 포기한 대신 장갑이 두터운 편이어서 매복에 실패한다고 해도 그 자리에서 버틸 수가 있었다. 다만 이것도 3호 돌격포 이상의 물건 한정이고 마르더 시리즈 같은 물건은 걸리면 삭제당하는 것은 동일.
그 후 전투 평가를 통해 대전차 자주포의 한계를 느낀 것은 맥네어 뿐만이 아니라서, 이탈리아 전역의 제6군단장 존 포터 루카스 소장은 대전차 자주포는 공세적 병기로 실패작이니 퇴출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올렸고 오마 브래들리도 이에 동의했으며 조지 S. 패튼까지 대전차 자주포에 불만을 표한데다 본래 전차는 전차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던 전차 신봉자 제이콥 데버스 장군[5]은 대전차 자주포를 전차와 견인식 대전차포 조합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견인식 대전차포의 재도입은 맥네어 혼자 주장한 것이 아니었다.
위에서 독일군의 88mm나 17파운더급의 물건을 주지는 못할망정 3인치 포나 줬다는 지적은, 애시당초 그들과는 역할이 다르기 때문에 부당한 지적이다. 독일군과 영국군, 소련군도 보병부대의 주력 대전차포는 75mm, 57mm, 76.2mm 정도로 이들에 비해 3인치 포는 부족하지 않은 무기였다. 88mm나 17파운더같은 중대전차포는 그 크기와 무게덕분에 사단 급 큰 규모의 부대에 보급해야했다. 때문에 소부대에 지급하기에는 PaK 406파운더와 비교해야 한다. 물론 이들과 비교해도 포가의 성능이 떨어지는건 분명했지만 이들보다 강력한 화력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소련군은 강력한 야포지원을 받는다고 서술했는데, '포병은 전장의 신이다'로 대표되는 널리 퍼진 이미지와는 달리 소련군 사단포병 화력은 상당히 부실했다.[6] 소련군이 독일군에게 전략적 승리를 달성하여도 도리어 큰 사상자를 내던 주요 원인은 항공, 포병 지원세력의 부실함이었다. 오히려 화력덕후는 미군이었는데, 미군 사단은 어느 군대와 비교해도 압도적인 포병전력을 보유했으며 포병부대는 전차부대를 최우선 목표로 삼고 분쇄하는데 적극적이었다. 위에서 예로 든 참패인 카세린 협곡 전투에서도 전차를 앞세운 독일군의 역공을 압도적인 포병화력으로 갈아버렸다.
또한 미국식 대전차자주포 개념의 탄생 배경도 고려해봐야 한다. 대전 초기 폴란드와 프랑스 전역에서 독일군의 대규모 전차 집중 운용에 보병들은 전차에게 무력함만을 보여주며 전격전 신화의 희생양이 된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각국은 그에 대응하는 전략을 수립했으며, 미군은 집중된 전차 앞에서 보병은 무력하며, 기동화된 대전차병기로만 상대할 수 있다고 보고, 적 전차에게서 보병은 몸을 숨기고 보전하며 집중된 전차 전력의 돌파 시도를 기동화된 대전차부대의 집중 반격으로 맞서는 전략을 수립한 것이다. 뒤이어 동부전선이 열리고 소련군 보병부대는 전차부대에 무력히 당해 독일군의 포위섬멸에 몇번이고 재앙적인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대전차총, 대전차포, 대전차 장애물, 대전차 지뢰, 대전차 수류탄 등 보병의 대전차 역량은 날이 다르게 강화되었고, 독일군에게 전처럼 전차만으로 보병을 짓밟을 수 없다는 걸 깨닫게 하였으며, 그에 따라 독일군도 보전협동을 중시하여 대규모 전차 집중 운용보다 보병과 함께 분산 운용하도록 바뀌었고, 소련군 보병부대가 구축한 깊은 종심을 가진 겹겹의 대전차 방어선은 대전 초기와 같은 포위섬멸 시도를 번번히 저지했다. 이러한 전훈을 받아들인 미군은 다시 보병의 적극적인 대전차 전투를 강조했고, 그를 뒷받침할 견인식 대전차포와 바주카, 총류탄 등의 보병 대전차화기를 확보하기 시작했다. 반면 대전차 자주포는 독일군의 전차집단을 상대하려 만들었으나 독일군이 전차집단을 안굴리게 되었으므로 존재 의의를 의심받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막대한 전비부담으로 인한 국방부의 압력을 수시로 받고 있던 맥네어로선 일선 야전 지휘관들부터 싫어하고 전차와 비교해 가격도 큰 차이 없는[7] 대전차 자주포 배치를 줄이고 견인식 대전차포를 재도입하는게 어쩌면 당연한 결정이었다. 상식적으로 육군 고위 장성 다수와 국방부가 다 같이 입을 모으는데 그걸 어떻게 무시하란 말인가? 또한 비난 항목에서 견인식 대전차포의 운용 인원이 대전차 자주포의 2배라고 비효율적이라고 주장하지만 사람만 있다고 무기가 준비되는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인력이 있어도 장비가 없어 싸울수 없는것이 더욱 현실적인 문제다. 고가의 대전차 자주포 1대를 생산할 비용이면 견인식 대전차포는 몇문은 족히 생산할 수 있다. 당장 독일군이 산업력도 자원도 인력도 부족하지 않았지만 중구난방한 생산체계로 만성적인 장비부족에 시달리며 노획품까지 닥닥 긁어모아 정식 명칭까지 붙여가면서 대전 내내 운용했으며, 소련군의 경우 기존 보병부대의 대전차 전력 부족의 중요성을 통감하여 대폭 증강한 대전 후기에도 소련군 보병사단의 대전차포 편제수량이 미군 보병연대 대전차포 편제수량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3.2. 퍼싱의 신뢰성 문제와 셔먼의 수량 확보에 대한 노력


https://youtu.be/bNjp_4jY8pY?t=13m32s
M26 퍼싱은 고위층의 오판이 아니라 너무 많은 결함으로 늦어졌다고 워게이밍 고증자문 니콜라스 모란이 TankFest Northwest 2015에서 강연한 내용이다.
퍼싱은 1945년 1월 전까지만 해도 결함 투성이에 전투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퍼싱의 프로토타입인 T26의 최초 시제차량은 노르망디 상륙으로부터 4개월 전에야 나왔다. 그 사이에 모든 테스트를 통과하고 신뢰성 있는 양산형 모델을 대량생산하는 건 누가 해도 무리다.[8]
퍼싱의 조종계통 자체는 우수한 편이었지만 M4A3의 포드 GAA엔진을 개량한 포드 GAF 엔진의 출력이 500마력에 불과한 것이 문제였다. 판터와 비슷한 중량에 출력이 200마력 딸리는데 최고속도는 판터와 비슷하게 조정되었으니 당연히 엔진과 구동계통 전반에 무리가 컸다. 이 신뢰성 문제는 두고두고 발목을 잡아서 양산된지 한참 후인 한국전때에도 해결이 안되었으며 이에 미국은 M4A3E8 셔먼을 재등판시키고 퍼싱의 문제점을 개선한 M46 패튼을 전쟁중에 배치하여 퍼싱을 대체한다.
퍼싱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했다고 비난받는 미군 수뇌부는 실제론 퍼싱이 전투 합격 판정을 받자마자 셔먼의 생산 라인을 즉시 퍼싱의 생산 라인으로 전환해 짧은 기간에 대규모 양산을 시작했다. 미군이 정말로 퍼싱 무용론에 심취했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미군은 아프리카에서 티거가 튀어나오기 전에도 76.2mm 주포를 탑제한 셔먼을 테스트할 만큼 강력한 주포와 관통력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90mm 주포를 탑재한 M36 잭슨이 일선에서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 생각해보자. 미군은 90mm 주포를 장착한 전차 퍼싱을 서둘러 배치하고자 하였다. '''퍼싱의 결함 문제에 발목을 잡혔을 뿐''' 맥네어를 비롯한 미군 수뇌부가 무능해서 배치를 늦춘게 아니다. 독일의 판터를 예로 들면, 결함을 싸그리 무시하고 생산한 결과 쿠르스크 전투에서 엄청난 양의 비전투 손실이 일어났다.
다만 90mm 포 탑재에 관해서는 맥네어 장군을 필두로 한 AGF의 오판이 있었던 것은 사실로, 기갑국은 셔먼(전차)에 90mm를 달아서 내놓으라고 요구했는데, 병기국은 76mm에 만족하면서 T25(전차)에 90mm를 탑재할지 말지(90mm가 필요한지)로 논쟁 하다가 90mm를 대전차자주포에 장착하여 생산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길어진 논쟁으로 1944년 4월부터 생산이 시작되어 76mm 셔먼과 마찬가지로 D-Day를 놓쳤고, 실전에 투입하니 90mm를 장착하였어도 대전차자주포의 한계로 인해 전선에서는 90mm를 장착한 전차의 요구가 쇄도하게 된다. 결국 90mm를 장착할 역량이 충분했던 셔먼은 90mm 장착 전차의 전선수요가 발생한 다음에 다시 고려되었으나, 퍼싱의 양산준비 시간이나 90mm 셔먼의 양산준비 시간이나 비슷하고, 퍼싱의 양산에 방해될 수 있단 판단이 나와버려 포기해버렸다.
또한 레슬리 맥네어가 퍼싱 대신 셔먼을 더욱 생산하려고 했던 것은 나름대로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셔먼의 손실량이 비록 막대했지만, 생산량은 그 이상으로 추축군에게 죽여도 죽여도 더 많은 수가 몰려나오는 공포를 느끼게 했으며, 전차의 손실량의 비해 전차병의 인명 손실은 미미한 수준이었다. 오히려 레슬리 맥네어에겐 막대한 보병 손실이 더욱 큰 문제였고, 그는 기갑사단을 감축하면서까지 보병사단에 독립전차대대를 배속시켜 적극적으로 보병 손실을 줄이고자 하였다.[9] 만약 퍼싱을 x대 생산하려 한다면, 해당 생산 라인의 전환 기간 동안 셔먼의 생산은 중단되었을 것이고, 단가 역시 셔먼에 비해 퍼싱이 높을 것은 뻔하며, 지금까지 셔먼 생산에 쌓아올린 숙련도를 전혀 활용하지 못해 생산성 역시 떨어질 것이다. 또한 퍼싱의 대규모 배치는 셔먼에 비해 떨어지는 연비만큼의 연료, 새로운 탄약, 퍼싱의 중량을 감당할 수 있는 구난전차 등의 장비, 완전히 새로운 수리용 부품의 추가적인 보급까지 뒷받침되어야 하는, 방구석 밀덕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만만한것이 절대 아니었다.[10] 즉, 퍼싱의 생산을 포기하는 것으로 그 배 이상의 셔먼 수량을 확보해 보병을 보호할 수 있다고 계산한 것이다.

4. 사망


1944년 7월 25일, 노르망디 교두보를 돌파하기 위한 코브라 작전에 앞서 미군은 전선의 독일군에게 타격을 주기 위해 융단폭격을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문제는 당시 폭격 정밀도란게 정밀 폭격 수단인 급강하 폭격으로도 전차만한 표적에 대한 명중을 기대할수 없었다.[11] 하물며 대규모 수평폭격은 말할것도 없다. 게다가 당시의 연합군과 독일군은 상당히 근접거리에 있어서 조금만 실수하면 오폭당하기 딱 좋았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융단폭격이 없으면 돌격하는 셔먼 전차는 다 불덩어리가 될 판이므로 예정대로 폭격은 감행되었으며, 결국 예상했던 대로 오폭이 발생하고 말았다. 더욱 사태가 악화된 것은, 일단 융단폭격에서는 선도기나 선두의 폭격기가 폭격을 하면 거기서 발생되는 연기를 따라서 다른 비행기들도 폭격의 목표를 삼는 버릇이 있는데, 때마침 풍향이 연합군 진지쪽으로 바람이 흘러가는 상태라서 폭발연기가 연합군 진지 방향으로 움직였다는 것이다. 결국 사태를 파악한 연합군이 황급히 폭격정지명령을 내렸지만, 때마침 전장시찰을 나온 맥네어 장군 이하 130여명의 사상자가 나고 말았다. 이 때 얼마나 폭발이 심했는지 폭격이 끝난 후에 맥네어 장군을 식별할 수 있는 단서는 계급장뿐이었다고 한다.
비록 오폭사건이 일어나긴 했지만 다음날 다시 융단폭격을 재개하기로 결정이 난데다, 전날의 폭격이 조금 하다 만 수준이라 독일군이 잠시 동안은 폭격이 없을 것으로 생각해서 낚인 것까지 합쳐진 덕에 다음날의 융단폭격은 매우 성공적으로 끝났다.
참고로 2주 후에 맥네어 장군의 아들인 더글러스 맥네어 육군 대령[12]에서 일본 육군저격을 당해 전사했다. 한마디로 말해 대가 끊어진 것이다.[13]

5. 평가


레슬리 맥네어는 미육군 지상군 구성군 사령관으로서 미육군의 보병사단을 비롯한 기본 조직구조를 구성하고, 총사령부 직할 독립전차대대, 대전차자주포대대, 전투공병대대, 독립포병대대를 비롯한 지원부대 Pool의 시스템을 구축함으로서 3류 소규모 군대에 불과했던 미군의 재조직을 부족한 실전경험 하에서도 이뤄낸 '''2차대전 기준으로 비견할 만한 대상이 없는 조직가'''라고 할 수 있다. 레슬리 맥네어가 주도한 미군의 조직 및 편제개편은 실전경험이 풍부했던 독일군이나 소련군을 오히려 능가하는 이상적인 제병협동 조직으로서의 보병사단 및 이를 지원할 수 있는 독립 대대를 구축했다. 이런 제반 부분에 대한 이해를 먼저 하고 나서야, 레슬리 맥네어의 오류에 대한 부분적 지적이 가능하다고 본다.
레슬리 맥네어는 1차 대전 수준의 미 보병사단을 연대전투단에 기반한 제병협동조직의 구성과 증강이 가능한 보병사단으로 개편했고, 강력한 미군 포병을 가능하게한 군단포병 및 야전포병단 편제를 도입했다. 또한 표준화되고 자립가능한 대대단위 총사령부 직할 지원부대 Pool을 구축했다. 전차 도입여부나 대전차 자주포의 운용과 같은 항목들은 레슬리 맥네어를 비롯한 미육군 수뇌부의 기적적인 성과에 비해서 그 공을 비하할 만큼 치명적이지 못했다. 게다가 이 모든 성과는 독일이나 소련과 달리 실전경험이 아니라 파견장교와 해외의 전훈에 대한 보고서의 분석, 그리고 기동훈련을 통한 검증의 결과였다. 레슬리 맥네어를 비롯한 미육군 조직가들은 거의 비어있는 3류 육군을 도상에서의 토의와 분석, 벤치마킹을 통해 현대 미육군으로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었다. 즉 레슬리 맥네어를 필두로 한 미 육군 수뇌부는 독일군과 소련군이 병사들의 막대한 피를 댓가로 얻은 전훈을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흡수해낸 것이다.
대전기 미군 기갑사단 및 기갑병과의 운용에 있어서 M26퍼싱의 도입여부나 대전차자주포의 운용 및 교리문제는 핵심적인 사항이라기보다는 지엽적인 항목이다. 레슬리 맥네어의 역할에 대한 평가를 객관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실제 그가 미군의 증강 및 개편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전반적인 과정과 이해가 필요하다. 레슬리 맥네어는 기갑부대가 제대로 대전차 역량을 갖춘 보병의 방어를 대전 초반기처럼 쉽게 돌파하거나 교전할 수 있다고 믿지 않았고, 이 견해에 따라 기갑사단의 규모를 감축하면서까지 보병사단에 전차대대를 배속하려고 했고, 이 판단은 독소전과 서부전선에서의 전반적인 과정을 관측했을때 옳은 결정이었다.
대전차 자주포 교리의 실패 역시,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독소전에서 소련군은 사단/군단급 방어에서 적극적으로 차량화된 대전차포 예비대, 그리고 대전차자주포 연대를 종심상에서 운용했으며, 이는 레슬리 맥네어를 비롯한 미육군 수뇌부에서 생각한 관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또한 이는 1940년까지의 독일군 기갑사단이 기갑여단-연대 단위의 집중운용, 그리고 그 이전까지 독일 주재무관 트루먼 스미스를 통해서 획득한 독일군 기갑운용 교리에서 볼 때 적합한 관점이었다. 문제는 1944~1945년까지 독일군이 미군을 상대로 적극적인 공세를 취할 수 있는 여건을 상실한데다, 독일 기갑사단의 부대운용 교리가 기갑집중운용에서 보다 전차를 분산시켜 운용하는 형태로 전환되었다는 점이었다. 이런 과정이나 전례들을 복합적으로 이해하고 분석한 후에야 레슬리 맥네어를 비롯한 미육군의 오판이 있었는가에 대해서 개략적이나마 논의가 가능하다.
레슬리 맥네어가 한 실수나 오판을 열거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지만 그를 미군 지휘관으로서 총체적으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굉장히 많은 조사와 노력이 필요하며, 위와 같이 단편적인 관점으로는 제대로된 이해가 불가능하다. 적어도 지금까지의 결과에서 레슬리 맥네어는 대전기 미군의 급격한 증강과 조직개편을 주도한 걸출한 인물이다. 그가 정말로 1차대전의 기억에 갇혀 독선과 아집에 갇힌 인간이었다면 2차대전에서 조직의 대 개혁을 해낼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고성능의 대전차 자주포와 중전차 대신 견인식 대전차포와 셔먼만을 배치하였다고 비난받지만, 반대로 저렴한 견인식 대전차포를 대량으로 보급해 전선의 대전차 병기 수요를 충당했으며 셔먼의 생산량을 최대한 확보해 보병 손실을 최대한 줄이고자 한 의도가 있었다. 정말로 그가 일선 병사들의 목숨을 가벼이 생각했다면 나올수 없는 정책이다.

6. 외부 링크


[1] 전시 사망한 중장은 이들 외에도 프랭크 앤드루스 육군항공대 중장, 밀라드 하몬 육군항공대 중장이 있다. 이 둘은 각각 아이슬란드와 태평양에서 항공기 사고로 사망했는데, 공교롭게도 사고 당시 탑승기가 모두 B-24 리버레이터였다. 아군 오사를 제외한 순수한 적 포화에 의한 전사자로는 버크너 중장이 미군의 유일한 중장 전사자이자 최고위 전사자이며, 유럽전선으로 한정하면 제3기갑사단장 모리스 로즈 소장이 최고위 전사자이다. 101사단 부사단장 돈 프랫 준장 또한 노르망디 상륙작전 중 전사한 기록이 있다. 연합군 전체로 범위를 넓히면 말레이 해전에서 전사한 영국 해군의 톰 필립스 제독이다.[2] 1918년에 나온 구식포였기 때문에 성능에 비해 무겁고 컸다. 때문에 이 포를 경량화하여 전차 장착형을 만들어 셔먼과 헬캣에 장착한다.[3] 380mm 고폭탄은 직격시 현대의 3세대 전차도 고철로 만들기 충분하지만 이 녀석의 거지 같은 장전 속도와 형편없는 탄도와 사거리, 느려 터진 기동성과 막장 구동부 신뢰도를 생각하면 일반적인 전차 입장에서 야전이라면 큰 위협은 아니었을 것이다.[4] 대전차 자주포는 수비에 적합한 차량으로 단순히 전차와 1:1로 붙는다면 이길 수 있을리가 없다.[5] 제6집단군사령관으로, 서열이 그 패튼보다 높고 브래들리와 동격인 유럽전선의 최고위 지휘관 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정작 이 양반의 병과는 기갑이 아니라 포병이었다. 포병 장교가 봐도 대전차 자주포는 영 아니었다는 것이다.[6] 이는 전쟁 초반 소련군이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고 이 과정에서 소련 포병의 인적, 물적 피해 또한 극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족한 포병 전력을 그나마 효과적으로 운용하기 위해서 사단포병을 감축하는 대신 군단포병으로 배속하였다. 숙련된 장교가 부족하여 주요 참전국중 유일하게 ToT 포격이 불가능했으며 정찰, 연락 자산이 매우 부실하여 공세시에 적재적소에 화력을 지원하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공격 전에 미리 포격 스케쥴을 수립하고 현장에서 필요한 화력은 76.2mm 사단포를 포병이 직접 끌고다니며 자급하도록 하였다. 이는 독일군이 진형을 변경하였거나 예상 외의 요소로 작전 스케줄이 틀어지면 전체 작전이 틀어지게 되며 직접 76.2mm 포를 끌고다니던 포병의 사상자를 보병 못지않게 낳게 되었다.[7] M10 울버린의 가격이 40906달러인데 M4A4 셔먼의 가격은 46467달러에 불과했다.[8] 미군의 신뢰성에 대한 기준은 T-34(엔진)과 판터(변속기)를 절망적인 구동계 신뢰성에도 불구하고 양산한 독일, 소련보다 엄격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미군은 대서양을 건너 병기를 실어날라야 했으므로 당연히 엄격한 기준을 적용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수리 부속도 배로 날라야 한다![9] 미군은 유럽전선에서 7000여대의 전차를 손실했지만 전차병 손실은 1600여명에 불과했다. 보병이 14만명 이상 전사하는 동안![10] 셔먼의 차체를 유용하고 포도 기존과 동일한 75mm, 76mm 주포를 써서 퍼싱보다 보급이 용이했어야 할 점보 셔먼의 총 생산량이 254대에 그친 것과 정확히 같은 이유이다. 점보 셔먼의 공방 능력은 일개 전차병부터 아이젠하워까지 모두 칭찬할 정도로 뛰어났지만, 중량이 8톤이나 늘어난 전차의 보급을 뒷받침하고 기존 전차의 생산 라인을 유용하는 데 그만큼 행정적인 부담이 컸던 것이다.[11] 괜히 독일군이 전차 잡아보겠다고 폭격기에 대전차포 달고 생쇼를 한게 아니다.[12] 당시 맥네어 2세는 괌 전투에 신규 투입된 미 육군 77보병사단의 참모장으로 있었다.[13] 다만 아들 더글러스 맥네어에겐 딸이 하나 있긴 했다. 후손이 완전히 끊어지진 않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