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노호/1999년
1. 개요
1999년 제 20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 참가하는 대표팀.
시드니 올림픽 아시아 지역예선은 1999년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와 겸해 치루어졌으며, 예선 엔트리는 드림팀 II라 하여 또 다르다. 한국 잠실 야구장에서 1999년 9월 11일부터 9월 17일까지 개최되었다. 대회기간 동안인 9월 9일부터 9월 17일까지 KBO 리그 중단이 있었다.
처음으로 나무방망이가 사용되는 대회[1] 였으나 압축배트가 허용되어 논란이 꽤 있었다.##, ##
2. 코칭 스태프 명단
방콕 아시안 게임에 이어서 이 대표팀에도 프로-아마 혼합 대표팀을 꾸리기로 결정한다.##, ## 그리고 감독은 1998년 대표팀을 성공적으로 이끈 주성노 감독이 재임명되었다.##
그리고 대표팀 최종 엔트리 발표후 4일후에 코치진 선임도 완료 되었다.
3. 최종 엔트리
선수 명단은 8월 5일 발표할 계획이었으나, 도핑 테스트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이를 감안 8월 2일로 3일 앞당겨서 발표하기로결정되었다. 그리고 최종 명단이 발표 되었다.##
중장거리 타자로 이름을 떨치던 양준혁, 떠오르는 강타자였던 이승엽[4] , 대도 정수근이 처음으로 참가한 A대표팀이다.
4. 대회 준비
도핑 테스트가 진행되었고 전원 통과되었다. ##
일본 언론에서 상당한 관심을 가졌다. 일본 대표팀은 마쓰자카 다이스케, 후루타 아츠야등 프로 소속이 8명 뿐인데 비해 한국대표팀은 2배가 넘는 18명이 프로 선수이기 때문. ## 일본의 에이스 마쓰자카 다이스케(세이부 라이온스)와 한국의 에이스 이승엽(삼성 라이온즈)간의 맞대결을 기대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
9월 9일부터 합숙훈련에 들어갔다. ##
5. 제20회 아시아야구선수권
한국 대표팀은 예선 2승, 결선 3승 무패의 괴력을 보여주었으며, 최종적으로는 예/결선 5승 무패의 한국과 4승 1패의 일본이 시드니 올림픽 출전권을 얻게 되었다.
5.1. 예선 1차전 Vs 중국
약체 중국을 상대로 콜드승리를 거두었다. 조용준은 1피안타 5K, 정민철과 진필중은 각각 4K, 1K를 기록했다.
5.2. 예선 2차전 Vs 태국
A조에서는 태국이 탈락했으며 B조에서는 필리핀이 탈락하며 한국, 중국, 일본, 대만 4개국이 경합하게 되었다.
5.3. 본선 1차전 Vs 중국
5.4. 본선 2차전 Vs 대만
양팀 선발투수는 한국은 정민태, 대만은 곽원치(궈위안즈).[5]
5회까지는 2대2의 팽팽한 접전. 한국은 6회 이승엽의 홈런과 김동수의 적시타가 나오면서 4대2로 앞서나간다. 그렇지만 8회 구원투수 임창용이 대만 4번타자 천진펑에게 2타점 적시타를 맞으면서 동점 허용. 결국 연장 11회 박재홍의 끝내기안타로 경기를 마무리한다.[6] . 한국은 이 경기를 이기면서 올림픽 출전권을 획득하였다.
다만, 이 경기는 연장 11회 접전으로 갔기 때문에 하마터면 홈에서 예선탈락을 하는 망신을 당할 뻔 했다. 특히 당시 해설이었던 허구연이 클로징멘트에서 이 부분에 대한 일침을 가하면서 훗날 삿포로 참사(야구)에 대한 암시를 주기도 한다.
5.5. 본선 3차전 Vs 일본
양팀 선발투수는 한국은 정민철, 일본은 고이케 히데오.[7]
한국은 4회초 선발투수 정민철이 먼저 2실점하지만 4회말 이병규와 박재홍의 안타로 한점을 따라붙는다. 그리고 6회말 박재홍과 김동주의 연이은 적시타로 역전에 성공. 7회말에도 이병규의 쇄기타로 5대3까지 앞서나간다.
한편, 4대3 한점 리드 상황에서 7회초부터 올라온 구대성은 3이닝 동안 6연속 탈삼진 포함 무실점으로 경기를 마무리한다.[8]
경기 결과, 올림픽 출전권은 대회 1등 한국과 2등 일본이 따내게 된다.
6. 여담
- 대한야구협회와 한국야구위원회 사이의 알력싸움이 상당했던 대표팀이었다. 대표팀 선발까지는 문제 없이 이루어 졌으나 스폰서 문제, 아마야구 지원문제 등으로 고성이 오가는 등 팀 성적이 나오지 않았으면 엄청난 비판을 받을 행돌들이 나왔다.
[1] 방콕 아시안 게임부터 프로선수가 참가함에 따라, 프로 소속 선수가 1명이라도 참가하는 대회의 경우 무조건 나무방망이를 사용하는 것으로 확정되었다.[2] 취소선이 그어진 것은 비리 문제로 인하대 감독 자리에서 불명예 퇴진했기 때문이다. 2008년 히어로즈의 프런트로 들어왔으나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3]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 대표팀 코치.[4] 이승엽,"대표팀 뽑혀 기쁘다".[5] 1988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리그 MVP 출신으로 당시기준 나이 만43세. 1999년에는 일본에서 귀국한 상태로, 대만프로야구에서 뛰고 있었다.[6] 이때 끝내기안타를 맞았던 허명걸(쉬밍지에)은 이듬해인 2000년에 일본프로야구 세이부 라이온즈에 입단해서 무려 2011년까지 세이부 한팀에서만 선수생활을 한다(2012~13년 오릭스 버팔로즈를 거쳐 대만 복귀). 허명걸은 세이부에서의 초기인 2004년까지는 나름 준수한 활약을 했고, 2002년 팀의 퍼시픽리그 우승에도 힘을 보탠다.[7] 당시 긴테쓰 버팔로스 소속으로 1997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리그 다승왕.[8] 사실 이전부터 일본에서 구대성에 대한 관심은 늘 있어왔지만, 이 대회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일본 스카우트들의 집중 타켓이 된다. 반면 이미 해외진출 자격요건(7년)을 획득해 대회직전까지 스카우트들의 관심 1순위였던 정민철은 상대적으로 부진한 모습과 떨어진 직구구속으로 실망감을 주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