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노호/19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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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1998 방콕 아시안 게임에 참가한 대한민국 야구 대표팀. 1998년 아시안게임 야구 종목에서는 흥행을 위해 프로 선수 출전이 허용되면서, 이전과 달리 대표팀에 현역이 대거 참가했다.
당시 메이저리거인 박찬호(LA 다저스), 마이너리거였던 서재응(뉴욕 메츠 산하 AAA), 그리고 박재홍을 비롯한 프로 선수들과 대학 최고의 유망주들로 구성된 팀이었다. 다만, 이때 선발 기준은 '''병역 미필자들만 선발'''이었으므로, 당시 기준으로 한국이 구성할 수 있는 최강팀은 아니었고 그로 인해 당시 홈런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이승엽'''이 제외되기도 했다.[1]
그러나 이 대표팀은 후대의 대표팀에 하나의 악습을 남기기도 했는데 바로 '''병역특례를 노린 대표팀 엔트리 차출'''이 그것. 앞서 언급하다 시피 이 대표팀은 소집때부터 '''"우리는 박찬호를 비롯한 야구 유망주들의 군 문제를 해결."이 목표'''였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선수들이 미필자로 차출되었고 아마추어들을 상대로 압도적인 실력을 선보여 병역특례를 당당히 따낸다. 2010년 후반부터 불거진 아시안 게임 대표팀 병역 특례와 관련된 부정적인 시각들을 생각했을때 대놓고 미필 원정대를 표방한 1998년 대표팀에 대한 호의적인 시각은 시대의 변화를 드러나는 대목이기도 하다.
2. 코칭 스태프 명단
3. 최종 엔트리
- 영문은 WBSC 공식 등록명.
4. 경기 내용
경기 순서는 대만 - 일본 - 대만 - 일본 - 중국(4강전) - 일본(결승전)이었다. 한일 베이스볼 클래식도 아니고 일본과 3번 대결;;; 예선에선 대만에 16-5로 콜드게임 승을 거두었으며, 4강에서 중국과 맞붙었다. 여기서 중간에 나온 김병현이 '''8타자 연속 삼진'''을 잡아내었다.
우승을 함에 따라 참가한 모든 선수들이 병역 특례를 받게 되었다. 특히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의 '''추신수'''처럼 박찬호의 병역문제 여부가 화제가 되었고, 박찬호는 무난히 금메달을 획득해 이후로도 성공적인 메이저 리그 커리어를 쌓아 나가게 된다. 결승전 선발, 승리 투수였으니 상단 이미지의 박찬호를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야말로 스포츠 신문 대문짝만하게 박찬호 기삿거리가 많았다.
#2 여기를 들어가보면 당시의 경기 내용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다.
4.1. 예선 라운드
4.1.1. [image] 대만전 (12월 7일, 퀸 시리킷 스타디움): 16:5 승리
4.1.2. [image] 일본전 (12월 9일, 퀸 시리킷 스타디움): 13:4 승리
4.1.3. [image] 대만전 (12월 11일, 퀸 시리킷 스타디움): 5:4 승리
4.1.4. [image] 일본전 (12월 13일, 퀸 시리킷 스타디움): 9:2 승리
4.2. 준결승
4.2.1. [image] 중국전 (12월 15일, 퀸 시리킷 스타디움): 9:2 승리
4.3. 메달 결정전
4.3.1. [image] 일본전 (12월 16일, 퀸 시리킷 스타디움): 13:1 승리
아시안게임 우리나라 야구드림팀, 전승 우승
5. 개인 성적
5.1. 타자
5.2. 투수
6. 대회 이후
- 대회 종료 후 선수들 모두 기초군사훈련을 받았고 박찬호와 서재응은 MLB로 돌아가서 그에 맞는 활약을 하였고. 김병현의 경우 중국전 8타자 연속 삼진을 잡은 것에 MLB 스카우터들이 많은 관심을 받게 되자 그 중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와 계약을 맺는다. 이 후 나머지 대학 선수들은 연고지 프로 팀들과의 계약을 했다. 그리고 각 8개구단 팀에 골고루 맞게 선수 차출이 된 것으로 삼성과 롯데 선수들이 없을 수 있으나 지명권을 가지고 있던 신명철이 대학시절과 아마추어 세계 야구 대회에서 준수한 활약을 펼쳤기에 아시안 게임에 뽑혔다. 장영균은 삼성에서 지명되었으나 프로에서는 별 활약 없이 은퇴를 한다. 의외로 2002년 한국시리즈 우승 맴버에 있었으며, 이에 모르는 사람들도 있을 법 하다. 박한이는 워낙 말이 많아서 개별 항목에서 참조 하면 된다. .
- 강혁은 아마시절 최고의 타자로 군림했으나 연고지 팀인 OB와 한양대학교 사이에 이중계약을 맺자 영구제명을 당하는 처사에 프로에 입단을 못했으나, 이 후 활약상을 보고 지명권을 가지고 있던 OB 베어스 및 KBO 관계자는 제명을 철폐하였고 결국 프로에 입단을 했다. 그러나 천재 라는 실력을 보여주지 못했고, 2004년 프로야구 병역비리 사건 때 방콕 아시안 게임 전에 병역 면탈을 시도했던 사실이 드러나 병역특례를 박탈당한 뒤 공익요원으로 입대했고, 복무를 마치고 소속팀 SK 와이번스로 돌아갔으나 과거 기량을 찾지 못한 채 은퇴를 한다.
- 여담으로, 이 때 드림팀의 멤버 가운데 강산이 두번 바뀔때까지 꽤 많은 선수들이 현역으로 뛰고 있었다. 병역 미필자들만 선발했기 때문에 팀 평균 연령이 20대 초중반으로 요즘의 국가대표팀에 비해 굉장히 낮았기 때문이다.[6] 하지만 현재 기준으로는 2019년에 은퇴한 박한이를 마지막으로 공식적으로 방콕 대표팀 멤버들 모두 은퇴를 한 상황이다.
- 과거 OB들 중 요즘 젊은 국대 선수들을 보면 과거 선수들만도 못한다는 증평을 내렸다. 근데 이 대회는 보다시피 어린아이들이 노는 대회에 어른이 난입했던 거라...
- 일본은 이 대회가 준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올림픽 출전권이 달린 대회였던 99년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부터는 프로선수들을 참가시키기 시작했다.[7]
[1] 고교 때 당한 팔꿈치 부상으로 인해 일찌감치 신검에서 병역 면제. 흔히 이승엽이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동메달로 인해 병역 특례를 받은 줄 알려져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2] 하지만 주 감독은 추후 비리 문제로 인하대 감독 자리에서 불명예 퇴진하게 된다. 2008년 히어로즈의 프런트로 들어왔으나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사실 서재응, 장영균, 황우구의 선발은 그의 입김이 상당 부분 들어갔다는 의혹을 받은 바 있다. 일단 서재응은 저 둘 보다 실력은 괜찮았다.[3] 실제로는 연고지 팀인 해태 타이거즈 기지명이 있었다.[4] 일단 피칭은 우사우타에 가까운데 KBO 공식 홈페이지에는 우언우타로 등록되어 있다.[5] 원래는 강동우가 뽑혔으나, 준플레이오프 때 플라이 타구를 잡다가 펜스에 부딪히며 입은 중상으로 공익 입대 예정이던 심재학이 대신 참가. 강동우는 이 부상으로 때문에 결국 군 면제를 받기는 한다.[6] 당시 72년생이었던 김원형과 심재학, 73년생 박찬호와 박재홍 등이 이 대표팀에서 노장이었다. 그중 고졸신인이였던 김원형은 무려 프로 8년차... 물론 그때까지도 미필이었기 때문에 모두 병역특례를 받았다.[7] 前年に行われた、1998年アジア競技大会においてオールプロで固めた韓国に大敗を喫し、アマチュア野球の選手だけでは勝てない目算となり、日本もプロ野球選手の力を借りて挑むこととなっ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