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포로 참사(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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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스포츠 흑역사 중 하나. 2003년 11월, 삿포로 돔에서 열린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겸 아테네 올림픽 아시아 대륙 예선에서 야구대표팀의 안습한 성적을 일컬어 부르는 말.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참사계의 시초가 되는 삿포로 참사의 후폭풍은 프로야구의 근간을 뒤 흔들 정도로 무서웠다.
2. 대회 준비
2003년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가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아시아 예선대회와 통합해서 열렸다. 상위 2팀에게는 다음해 열리는 아테네 올림픽 본선 진출 티켓이 주어졌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본선 진출 가능성은 어느 때보다 높았다. 불과 1년 전에 2002년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딴 상황이었고, 무엇보다 출전팀이 대한민국, 일본, 중국, 대만 이렇게 단 4개국가 뿐이었다. 당시 대만은 한수아래로 평가되었으며, 중국은 정말 새미프로 수준이라 무시할만했고 거의 올라간다는 것은 기정 사실화 되었던 분위기였다. '''단 2승만 하면 올림픽 본선 진출인 상황.'''당시 기사
이처럼 야구계에서는 본선 진출이 용이하다는 판단을 하고 있던 상황에서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수장 자리는 2003년 한국시리즈 우승팀 현대 유니콘스의 주역이었던 김재박 현대 유니콘즈 감독이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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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준비 과정에서의 잡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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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예비 엔트리, 2차 예비 엔트리
선수 선발에 약간의 잡음이 있었다. 국내파 선수들의 경우엔 최고 스타 플레이어들을 뽑았는데 56홈런을 쏘아올리며 아시아 신기록을 세웠던 삼성 라이온즈의 이승엽과 일본 복귀 후 최고의 모습을 보여준 기아 타이거즈의 이종범, 현대 유니콘스의 에이스였던 정민태등 초호화 멤버들이 출동했다. 이 중 심수창은 한양대 소속으로 유일하게 아마추어 선수로서 선발됐다.최종 엔트리
하지만 송진우(한화 이글스), 이상훈(LG 트윈스), 이승호(SK 와이번스), 심정수(현대 유니콘스), 김한수(삼성 라이온즈)는 부상을 이유로 엔트리에서 빼줄 것을 요구하는 등 팀 분위기가 엉망이 되어버린 상황이었고, 해외파들도 박찬호(텍사스 레인저스),서재응(뉴욕 메츠), 김병현(보스턴 레드삭스), 구대성(오릭스 블루웨이브)등 해외파들이 메이저리그 사무국, 일본야구기구의 규정과 소속팀의 사정 때문에 불참하게 되었다. 2000년 올림픽 동메달의 주역이었던 구대성의 경우는 오릭스 구단과 협의는 되었으나 부상으로 결국 합류 좌절. 코리안 메이저리거 올림픽출전 무산 게다가 조웅천의 경우엔 대회시작 4일 전에서야 급하게 합류되었는데, 부상을 달고 있었고 2003 시즌 SK 와이번스를 한국시리즈에 올려놓은 활약을 들어 예선전 때 뛴 심수창을 빼버리고 급하게 수혈한 케이스였지만 한국시리즈가 끝나고 공을 놓고 쉬던 중이었다.
거기다 포스트시즌 일정 때문에 대표팀에 선정된 선수들끼리도 손발을 맞춘 건 겨우 1주일 밖에 되지 않았던 열악한 조건이었다.# [2]
반면 대만은 일찌감치 대표팀을 확정짓고 일본 전지훈련을 하면서 당해 NPB 우승팀인 다이에와 평가전을 가지면서 철저한 준비를 하고 있었고, 일본 또한 처음으로 프로 선수로만 구성된 대표팀을 꾸리고 후쿠오카 돔에서 평가전을 가지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또한 코치진 선임에서도 조범현(당시 SK 와이번스 감독), 김성한(전 KIA 타이거즈 감독), 정진호(현대 유니콘스 수석코치)가 선임되었는데, 김재박 감독이 비슷한 나이대의 감독들이 코치로 온 것에 대해 상당히 불편해 했다는 썰이 돌기도 했다.#
4. 경기 결과
4.1. 대한민국 vs 대만 - 4:5 (패배)
이번 대회 출전 과정에서, 대만은 상당한 전력을 구축해 등장했다. 12년 만의 올림픽 본선을 위해 왕건민(왕젠민)뿐 아니라[3] 일본 세이부 라이온즈의 선발 장지가(장즈지아)[4] , 허명걸(쉬밍지에)[5] 등등 메이저리거 조금휘(차오진후이)를 제외한 해외파들을 소집해 준비했기 때문이다.[6] 문제는 김재박 감독를 비롯 한국야구계가 조금휘(차오진후이)를 제외하고는 대만의 해외파 선수들을 포함한 대만팀 전체전력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데서 이미 비극은 시작되고 있었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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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초, 선두타자 이종범이 상대 실책으로 출루한후 2루 도루를 성공 시키고 있다.
이날 경기 대만의 선발은 왕건민(왕젠민)(당시 뉴욕 양키스 산하 더블 A). 대한민국의 선발은 한국시리즈 MVP 수상자였던 정민태(현대 유니콘스)였다. 1회에 이승엽의 우전 적시타와 장성호의 우익선상 2루타로 득점, 3:2로 앞선 9회초에 이종범의 적시 2루타로 4:2로 앞섰다. 하지만 고비때 마다 도루사, 어이없는 주루플레이로 찬스들을 다 날려버렸다. 특히 6회부터 구원등판한 양건복(양젠푸)를 제대로 공략하지 못한 것이 뼈아팠다. 양건복은 4이닝 1실점으로 대만 승리의 디딤돌 역할을 담당한다.[8]
9회말, 5회부터 버티며 공을 뿌리던 임창용의 2타자 연속 볼넷, 부랴부랴 등판한 조웅천이 2아웃까지는 잘 막아냈다.[9] 하지만 진지원(천즈위안)에게 중전 적시타를 허용한 것을 포함 2안타를 내주며 2실점으로 4:4 동점이 되어 연장전을 치르게 되었다. 연장 10회초, 구원 등판한 장지가(장즈지아)가 2번 박한이, 3번 이승엽, 4번 김동주 3명의 타자를 맞아 1이닝 퍼펙트 피칭을 기록하며 막아냈다.[10] 그리고 연장 10회말, 한국은 1사후 볼넷과 안타를 내주고 뒤이은 만루작전에서 고지강(가오즈강)에게 좌익수 앞에 떨어지는 중전안타를 맞으며 4:5 패배를 맞이 했다.한국야구 뒷심 부족으로 대만에 무릎
여담으로 이날 패배는 한동안 대만에서 TV 국가 연주 배경화면으로 사용되었다고.
아울러 이 패배는 한국 대표팀에 엄청난 트라우마를 남기기도 했는데 당장 3년 후의 메이저 국제대회의 아시아 예선전 첫경기 상대로 뽑힌 것이다. 아시아 예선을 통과하기 위해선 적어도 2승을 해야하는 상황에서[11] 1차전 상대가 대만이었던지라 경계심이 높아지고 있던 상황인데다 삿포로 참사가 지난지 불과 3년밖에 되지 않아 팬들이 상당히 노심초사 했었다. 가장 중요했던것이 왕건민의 대만 국대 합류 여부였는데 소속팀이었던 양키스가 불허하는 바람에 한국에게는 '불행 중 다행'으로 한시름은 덜었었다.
그렇지만 삿포로 때의 트라우마로 인해 비시즌 휴식이 필요했던 메이저리거 서재응의 차출에 목을 맬 수 밖에 없었고 결국 차출을 이끌어낸다. 사실 직전해 국내리그 MVP였던 손민한을 비롯해서 배영수, 박명환 같은 선발자원이 있었음에도 김인식 감독 이하 수뇌부가 끝까지 서재응의 차출을 고집했던 것만 봐도, 삿포로 참사의 트라우마가 당시 기준으로 얼마나 어마어마했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실제 그 대회 첫경기 대만전에서 '서재응ㅡ김병현ㅡ구대성ㅡ박찬호'의 전원 메이저리거 투수진을 가동시키는 철저함까지 보여준다.
4.2. 중국 vs 대한민국 - 1:6 (승리)
한국의 선발투수 김진웅과 중국의 선발투수 이위양(리웨이양)의 맞대결. 김진웅은 7⅓이닝동안 박재홍의 수비실책으로 내준 1점만을 내주며 중국 타선을 꽁꽁 막아냈고, 한국 타선은 답답한 공격을 이어갔지만 6점을 쥐어짜내는데 성공하며 대승을 거두게 된다. ## 문제는 이 경기에서 톱타자 이종범이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다음 경기인 일본전에 나올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일단 1승 1패를 거두었지만, 올라가기 위해선 무조건 2승 1패를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다음 경기가 매우 중요한 경기였다. 하지만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일본 대표팀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4.3. 일본 vs 대한민국 - 2:0 (패배)
2003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결선 리그 6경기
5.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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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전적 1승 2패를 기록해, 3전 전승의 일본과 2승 1패의 대만 이 올림픽 본선에 진출했으며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은 3전 전패를 한 중국 대표팀과 함께 귀국하게 되었다.
5.1. 원인 및 후폭풍
사실 결과에 대한 팬들의 반응은 (특히 대만전 패배 직후) "올 것이 왔다"라는 반응이었다. 처음으로 프로선수의 국제대회 출전이 허용된 1998 방콕 아시안 게임/야구 첫경기 때 대만을 초토화[12] 시킨 기억이 너무 커서 그렇지, 사실 2000 시드니 올림픽/야구 지역예선 대만전(1999년)과 2002 부산 아시안 게임/야구 결승 대만전(2002년)은 모두 한국홈에서 치뤄졌음에도 1점차의 초박빙 승리였기 때문이다. 특히 시드니 지역예선 때는 무려 연장 11회까지 가는 혈투 끝에 박재홍(야구)의 끝내기안타로 겨우 이길만큼 고전해서, 당시 해설이었던 허구연이 클로징멘트 때 이를 반성해야 한다는 조의 언급을 하면서 미래에 대한 불안한 암시를 날린 바 있다. 그리고 비록 프로 1진이 출전하지는 않았지만, 2001년 야구 월드컵과 2002년 대륙간컵 때 모두 대만한테 패했던 점도 불안의 요소이자 씨앗이었다.
특히 2001년 11월 대만에서 열렸던 야구 월드컵에서 더 큰 교훈을 얻지 못한 점이 크다. 당시 한국은 프로 올스타가 출전하지는 못했지만, 타선에는 이병규, 정수근, 마해영, 심정수, 김태균, 이영우 등의 프로주축선수들이 포진했음에도 당시 대만육군 소속의 장지가(장즈지아)[13] 한테 완봉패를 당하는 수모를 당했기 때문이다.[14] 당시 대만야구계는 1999년 한국에서 열렸던 2000 시드니 올림픽/야구 지역예선 당시, 한국의 편파판정 때문에 대만이 탈락했다는 오해와 원망으로 완전히 독이 올라있는 상태였고 급기야는 한한구천[15] 이라는 구호까지 등장한다.[16] 한한구천 구호와 함께 경기내내 한국팀을 향해 저주를 퍼붓는 등 당시 대만 야구장 분위기는 섬뜩하기까지 하다.[17]
물론 이듬해 한국은 2002 부산 아시안 게임/야구에 정예팀을 구성하긴 했지만, 이건 직전해 야구월드컵의 충격여파가 아닌, 그해 한일 월드컵에 따른 야구인기하락을 막기 위한 고육직책의 일환이었다.[18]
무엇보다 한국야구계 자체가 기본적으로 대만야구 수준 자체를 낮춰서 봤다(특히 대회 직전 SBS 뉴스에서는 한국의 우승 가능성을 99%라고 예상하는 보도까지 나왔다...). 그나마 한국홈이었니까 1점차로라도 이겼지, 만약 홈이 아니었으면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더군다나 당시 대만은 일본프로야구에서 활약중이던 장지가(장즈지아), 허명걸(쉬밍지에) 원투펀치가 대회에 불참했고, 왕건민(왕첸밍)은 준결승 일본전에서 이미 5.1이닝을 투구한 상태라 결승전 출격이 불가능한 컨디션이었다. 무엇보다 대만 자국리그(CPBL)의 내분으로 몇몇팀들은 선수차출에 불응해서 직전해 야구 월드컵 때 보다는 전력이 약화된 상태였다(상대팀의 전력이 일시적으로 약화되었다고 해서 상대팀 자체를 낮춰서 보는 것은 절대 금물이다.) 그렇게 전력이 약화된 팀을 상대로도 결승에서 시종일관 고전하다가 1점차의 진땀승을 거둔 것이 당시 한국야구의 현실이었다. 그것도 홈에서! (실제 경기 후에도 대만 코칭스태프는 심판판정에 대해 격렬히 항의한다.)
여러모로 2002 부산 아시안 게임/야구 결승 대만전은 이런저런 운도 많이 따라주었지만, 결국 한국야구계는 이런 점들을 그냥 가볍게 넘겨버린 걸로 보인다. 단적인 예가 삿포르대회를 불과 3개월 앞둔 시점에서야 비로소 대표팀감독(그나마도 프로 현역 감독이었다.)을 선임했다는 점인데, 만약 아시안게임에서라도 대만야구에 대한 위기감을 느꼈다면 절대 이따위 행태는 나올 수 없다.
물론 대만전이 너무나 아쉬웠고 중국전과 일본전에서는 할만큼 했으니 아쉽다라는 의견도 일부 있었다.[19] .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도하 참사나 타이중 참사의 경우엔 팬들의 비난과 여론의 냄비근성만으로 끝이 났지만, 이때의 삿포로 참사로 인해 프로야구의 근간을 뒤흔든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바로 이듬해에 발생한 '''2004년 프로야구 병역비리 사건'''. 이번 삿포로 대회를 통해 올림픽 메달을 꿈꾸며 병역 특례를 노렸던 몇몇 선수들이 대거 브로커에게 돈을 주고 병역 면제를 꿈꾸다 들킨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다.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금메달, 2000 시드니 올림픽 동메달,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금메달의 영광을 뒤로 하고 프로야구에 일종의 경종을 울린 참사였다. '''하지만 이 때의 실책을 고치지 않고 3년뒤 최상의 전력으로 금메달을 자신했지만 엄청난 결과를 저질렀는데...'''
5.2. 여담
2015년 11월 8일 프리미어 12 야구 대표 팀이 일본 대표 팀에게 '''0:5 완봉패'''를 당하면서 이 문서에 야구판 삿포로 참사 2탄이 작성될 뻔했지만, 4강에서 한국 대표팀이 각본 없는 드라마를 써 내면서 이 일은 잊혀졌다. 거기에다 일본의 꼼수까지 생각한다면 위의 두 참사보다는 정상참작을 할 만한 사항이 있다. 실제로 완봉패를 당한 이후 나무위키에서는 삿포로 참사에 해당 내용을 추가할 것인지에 대한 토론이 진행되었으며 결론은 '끝날 때까지 지켜보자'였고, 결국 역대급 드라마를 쓰면서 묻혔다.
다만 우리에게도 행운이 따랐던 것이 지난 2017 WBC 당시 일본에서 제기되었던 것처럼 일본 대표팀 선수들이 선수/소속 구단 그리고 일본 대표팀 관계자 간에 이닝수, 출전 횟수 등 세부적인 조항에 관한 비공식 계약을 체결했다는 의혹이 있다. 실제로 2017 WBC에 참가할 것 같았던 오타니 쇼헤이가 갑작스런 발목 부상으로 출전이 좌절되었는데, 이후 구단 연습경기에서 발목 부상이 무색할 만큼의 놀라운 퍼포먼스를 보여줬기 때문에 이러한 의혹이 짙어졌으며, 실제로 WBC 이후 고쿠보 감독을 포함한 관계자들이 이같은 의혹에 대해 인정하는 듯한 뉘앙스의 발언을 했기 때문이다. 도쿄 대첩의 운명의 8회전때 오타니가 마운드에서 내려온 이후 우리나라의 타선이 폭발하고 일본 불펜이 무너졌는데, 오타니가 끝까지 던졌으면 경기 결과는 달라졌을 가능성이 높다. 이 당시에도 이러한 비공식 계약이 있었다는 의혹이 있었기 때문. 다만 이는 말그대로 추측의 영역이며, 당시 오타니가 내려간 것도 리그에서보다 더 힘을 오버해서 사용한 측면도 있기에 관리를 위해서 내려갔다는 식으로 볼 필요도 없다.[20] 또한 이후 올라온 투수들도 일본에서 내놓라던 투수들이었던 것 만큼 단순히 "운빨로 이겼다."라는 식으로 받아 들일 필요는 없다.
이렇게 아테네 올림픽에 진출한 일본은 미국과 한국 둘 다 나가지 못한 그 대회에서 최종 성적 동메달이란 시원치 않은 전과를 올리고 귀국했다. 두 강적들이 오르지 못한 대회에서 호주에게 일격을 당해 동메달을 땄던 것이다.[21] '''그리고 이는 일본이 올림픽 야구에서 올린 최고의 성적이 되었다.''' 뭐 사실 여기서 금메달을 땄어도 뭐한게 "니들은 미국과 한국이 없어야 금메달을 따지 뭐"란 조롱을 들을게 뻔했으니.
[1] 한양대를 우승으로 이끌며 국가대표팀에 발탁, 지역예선에서 뛰었지만 최종 예선에선 조웅천과 교체돼 빠졌다. 광저우 아시안게임 때의 김명성으로 생각하면 될 듯.[2] 해외파는 핑계인게 박찬호는 텍사스 레인저스에서 먹튀행각의 절정을 보여주던 중이었고 김병현은 2003년 4월 부러진 배트에 맞아 부상당한 이후 하향세를 타고 있었다. 구대성도 이해 방어율 4.99를 찍으며 부진했다. 해외파 중에 제몫하고 있던 건 서재응 정도였다.[3] 왕건민은 이 삿포로 대회와 이듬해 아테네 올림픽 본선까지 참가하고 뉴욕 양키스 로스터에 합류한 후로는 구단의 반대로 국제대회에서 뛰지 못하고 대만으로 귀국한 뒤, 2017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 참가할 수 있었다. 왕건민 개인적으로는 이미 대만 대표팀은 호구가 된 뒤였고 자신도 전성기를 지난 뒤에 국대팀에 선발된 것이라 원통할 것이다.[4] 張誌家, 우완 투수이며 2001년 야구 월드컵 3위 결정전에서 일본 대표팀에 완투승을 거두며 주목을 받았고 2002~2004년 3시즌간 세이부에서 뛰었다. 대만프로야구로 복귀했으나 승부조작 혐의로 기소되었다. 밑의 항목에서도 장지가에 대한 추가설명이 나오니 참조 바람.[5] 許銘傑, 우완투수이며 2000~2011년 12시즌은 세이부에서, 2012~2013년은 오릭스에서 뛰고 2014년부터 대만프로야구에서 뛰고있다.[6] 당시 조금휘(차오진후이)는 콜로라도 소속으로 빅리그에 막 입성해(2003년 7월) 한창 주가를 올리던 시기였다.[7] 실제 삿포르대회를 대비해서 2003년 한국야구계의 촉각은 오직 조금휘(차오진후이)의 대만대표팀 차출여부에 쏠려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좀 더 추가하자면 감독 선임 자체도 늦었다. 대회를 불과 3개월 앞둔 8월초에야 김재박을 감독으로 선임(...) 그나마도 현역 프로팀 감독이었다. 정말 대만야구에 대한 위기감이나 경계감을 느끼고 있었다면 절대 나올 수 없는 행태이다. 참고로 일본은 그해 1월에 이미 나가시마 시게오를 대표팀 전임감독으로 선임한 상태였다.[8] 양건복은 2008 베이징 올림픽/야구 본선 한국전에서는 선발투수로 등판하지만 1이닝 7실점의 뭇매를 맞기도 한다.[9] 사실 9회말 임창용과 조웅천에게 변명거리를 말해주자면 9회부터 갑자기 심판의 판정이 병맛이 되어버렸다. 임창용의 볼넷도 사실 스트라이크성 공까지 볼 판정을 내주며 볼넷을 내준 셈이었고..[10] 김동주를 삼진 처리하고 포효하는 장면은 압권이다(...)[11] 일본이 3전 전승을 한다는 가정하에 내린 계산이었다. 한국의 전문가들 역시 일본에 지는 것으로 예상하고 대만전과 중국전을 이겨야 한다는 의견이었다.[12] 16대5 콜드게임승[13] 이듬해인 2002년에 일본프로야구 세이부 라이온즈에 입단해서 데뷔 첫해 10승을 기록한다. 이미 위에 한국vs대만 항목에서도 소개된 것처럼 2003년 삿포로대회 한국전에서는 연장 10회에 등판해서 1이닝을 무실점으로 막고 승리투수가 되기도 한다. 그 후 2008 베이징 올림픽/야구 대륙별예선 한국전, 본선 한국전(강민호에게 결승타 허용)에도 모두 구원등판하는 등 한국과는 질긴 인연.[14] 투수진도 선발 이용훈(야구)이 1회부터 대만 4번타자 천진펑에게 홈런을 허용하는 등 고전 끝에 0대5 패배.[15] 한국은 한을 품고 지옥으로 떨어져라![16] 네이버 지식 등에서는 '한한구천' 용어가 2003년 삿포로 아시아선수권 때 처음 등장했다고 설명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2001년 당시부터 대만 현지에서 사용되었던 용어이다[17] 게다가 이 대회에서 한국의 몇몇선수들은 무성의한 플레이와 태업, 심지어는 항명까지 있었고 이는 대회내내 대만언론의 집요한 먹이거리가 되기도 한다.[18] 원래 한국야구계는, 2001년 야구월드컵을 시작으로 해서, 야구월드컵 출신 포함 유망주들 중심으로 부산 아시안게임까지 멤버들을 이끌어가기로, 2001년부터 이미 계획을 잡았었다. 결국 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지만...[19] 대만전은 아쉬웠고, 중국전은 잘했지만 결과에 크게 영향을 미칠수가 없었고, 일본은 진짜 강력했다[20] 당시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에서 뛰던 이대호가 경기중 "오타니가 원래 저렇게 던지냐?"는 오재원의 질문에 "저렇게 처음부터 강하게 던지는 경우는 본적이 없다."고 답한 것도 오타니가 처음부터 몸을 끌어 올린거 아니냐는 추측에 힘을 실어준다.[21] 이것도 우리나라와 미국이 없는 대회에서 당연히 쿠바와 결승에서 만날것으로 예상이 되었으나 4강에서 호주에게 지는 바람에 우승이 무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