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만수전

 




1. 소개
2. 역사
3. 구조
4. 부속 건물
4.1. 춘휘전
4.2. 양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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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궐도》 만수전 터

1. 소개


昌德宮 萬壽殿
창덕궁의 대비전(大妃殿) 중 하나이다. 인정전의 서북쪽에 있었다. 이름은 말 그대로 만수무강(萬壽無疆)하시라는 뜻이다.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2. 역사


1654년(효종 5년) 창경궁 통명전에 살던 자의대비 조씨가 아프자 효종이 창덕궁 수정당을 확장, 증축하여 모셨다. 그러나 그 곳에서도 차도가 없자 불과 1년 뒤인 1655년(효종 6년) 효종은 수정당이 좁다는 이유로# 인정전 서북쪽 옛 흠경각(欽敬閣) 자리에 새로운 대비전 공사를 계획하였다.
하지만 신하들의 반대가 극심했다. 그 이유로, 첫째, 거듭되는 공사로 백성들이 힘들어했고, 둘째, 자연재해로 공사 중단이 잦았으며, 셋째, 대비전은 대전#s-4의 동쪽에 있는 것이 원칙이나 새 대비전은 서쪽에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효종은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겠다며 경덕궁[1]승휘전, 어조당, 만상루 등을 옮겨 지으면서[2] 공사를 끝까지 밀어붙여 2년 뒤인 1657년(효종 8년) 완공시켰다. 만수전 건립 후 자의대비는 그 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만수전의 규모는 굉장히 컸다. 도총부[3]를 포함한 기존의 건물들을 없애고 궁궐의 서쪽 담장을 옮겼으며 본전과 별전 영역을 따로 두었다. 별전은 경덕궁 경화당을 옮겨 짓고 춘휘전(春暉殿)이라 하였다.
1687년(숙종 13년) 만수전은 화재로 불탔고 이후 다시 재건하지 않았다. 만수전에 머물던 자의대비창경궁 통명전으로 처소를 바꾸었고 1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4] 별전 춘휘전은 한동안 비어 있다가 1695년(숙종 21년) 역대 왕의 어진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선원전 건물으로 바뀌었으며 만수전 본전 일대에 경종이 새로운 대비전인 경복전을 세웠다. 경복전마저 1824년(순조 24년)에 불탄 후 복구하지 않아 오늘날 이 곳은 빈 터로 남아있다.

3. 구조


  • 현재 전하는 기록그림이 많이 없지만, 1657년에 지은 《만수전수리도감의궤》를 보고 추정할 수 있다. 총 36칸으로 4면 가장자리에 툇간을 두었으며 어칸은 3칸에 동익각은 9칸, 서익각은 5칸이라 적혀있다. 어칸의 천장봉황을 그려넣었고 좌우 온돌방모란을 그린 목단반자로 꾸몄다고 한다.
  • 본전 영역에는 천경루(千慶樓), 헌선합(獻線閤)을 비롯하여 곳간(庫間)과 세답방(洗踏房)[5], 사약방(司鑰房)[6]과 등촉방(燈燭房)[7]을 두었다. 또한 동익각 밖에 정홍교(井虹橋)란 다리를 놓았으며 만수전 서쪽에는 연못을 파고 서행각과 나무 으로 만든 담장을 두었다. 그리고 바깥에 월랑을 설치하고 대문은 5채, 한 칸짜리 작은 문은 12채를 두었다.

4. 부속 건물



4.1. 춘휘전


역사는 창덕궁 선원전의 역사 항목으로.
《만수전수리도감의궤》에 따르면 창덕궁으로 옮길 때의 모습은 총 20칸으로, 4면 가장자리에 툇간을 두었으며 건물 주위로 서행각과 서월랑, 북월랑을 지었고, 북월랑과 장유고 앞에는 나무 으로 만든 담장을 설치했다. 동변 화계[8]는 무려 6층으로 쌓아 아름다운 경치를 자아내게 하였다.
만수전과 춘휘전 구조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이 곳을 참조.

4.2. 양지당


자세한 내용은 양지당 항목으로.



[1] 현재의 경희궁.[2] 즉, 건물을 새로 짓지 않고 다른 데서 옮겨오면 그 만큼 부담이 덜하지 않겠냐는 뜻.[3] 조선시대, 중앙군인 오위를 지휘 감독하던 최고 군령 기관.[4] 단, 사망한 장소는 창경궁의 내반원이다. 내반원은 내시들의 처소로 왕실의 최고어른이 그 곳에서 죽을 이유는 전혀 없다. 아마 근처를 지나다 갑자기 쓰러져 사망한 듯 하다.[5] 빨래를 담당하던 곳.[6]사약을 만드는 곳이 아니고(...) 열쇠자물쇠를 관리하던 정 6품 관리들이 머무르는 곳이다.[7] 등불, 촛불을 관리하던 곳.[8] 화계는 이나 나무를 심기 위해 뜰 한쪽에 또는 뒷담 안에 계단식으로 만든 화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