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봉모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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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모당

문화재청에서 제작한 3D 영상

1. 개요
2. 이름
3. 역사
4. 구조
5. 향나무


1. 개요


昌德宮 奉謨堂
창덕궁 궐내각사 구역에 있는 건물이다. 규장각의 부속 건물이다.
역대 임금들의 글씨, 어진, 도장, 족보, 고명, 유고, 장지 등을 보관하던 곳이었다.

2. 이름


'봉모(奉謨)' 뜻은 '모훈(謨訓) 자료를 봉안(奉)한다'이다.# 모훈은 ‘후대 임금들에게 귀감을 줄만한 교훈’이다.

3. 역사


정조는 즉위 직후인 1777년(정조 1년)에 창덕궁 후원에다 주합루를 짓고 그곳에 규장각을 두었다. 그리고 부용정 서북쪽에 있는 옛 열무정의 이름을 봉모당으로 바꾸고 선대왕들의 유품을 보관했다. 규장각의 규모가 커져서 1781년(정조 5년)에 옛 오위도총부 자리에 규장각을 옮겼을 때도 봉모당은 자리를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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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궐도》의 봉모당. 열무정 시절의 모습이다.
그러나 공간이 좁아 많은 유품을 보관하기 힘들어지자, 1857년(철종 8년)에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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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궐도》에 나온 현재 봉모당 일대. 붉은색 원 안이다.
1908년(융희 2년) 규장각 기구를 분과별로 나누면서 봉모당 관련 일은 전모과(典謨課)에서 담당했다.# 일제강점기인 1911년에는 기존의 건물을 헐고 옛 소유재 터에 일본식 건물을 새로 지어 족보 종류를 뺀 왕실 자료를 보관했다.[1] 8.15 광복 이후 1969년 7월에 일본풍 전각을 철거하고 자료를 분산 배치했는데 그 중 일부는 창경궁 장서각에 두었다. 그리고 1981년에 한국정신문화연구원[2]으로 옮겼다.#
2000년 ~ 2004년에 복원했고 2005년부터 일반에 개방하여 오늘에 이른다.

4. 구조


  • 1층[3] 목조 건물로 남향(南向)이다.
  • 장대석 2단으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다. 기단 상부에는 전돌을 깔고 기단 앞에는 댓돌을 3개 두었다.
  • 지붕은 팔작지붕, 처마는 겹처마, 공포는 초익공[4]이다. 창방과 장여 사이에 소로를 두었다.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는 기와로 마감했다. 용두는 용마루 위에 2개, 추녀마루 위에 2개 올렸다. 지붕 측면의 합각은 나무판으로 마감했다.
  • 정면 5칸, 측면 3칸, 총 15칸이다. 전체 실내 바닥에 마루를 깔았다.
  • 정면 외면에는 띠살을 달았다. 교창과 머름은 없다. 나머지 칸 외면은 전부 중인방을 두고 위, 아래를 으로 마감한 형태이다.
  • 봉모당 서쪽과 북쪽에 각각 을 보관하던 책고가 있다. 책고는 맞배지붕에 홑처마, 민도리 양식이며 출입문과 교창을 제외하고 전부 붉은 나무판으로 벽을 마감했다. 고막이벽 가장자리에는 구멍을 뚫어 환풍 기능을 하게 했다. 《동궐도형》을 보면, 두 책고 다 6칸이었으나, 지금은 서쪽 책고가 5칸으로 한 칸 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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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모당 북쪽 책고#

5. 향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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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모당 향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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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궐도》의 봉모당 향나무. 초록색 원 안이다.
봉모당 마당에 향나무가 있다. 그러나 현재 일반인이 봉모당 마당으로 들어갈 수 없는 관계로, 창덕궁 후원 관람의 마지막 코스로써 볼 수 있다.
수령을 무려 700년 ~ 750년 정도로 추정한다고 한다. 추정이 맞다면 무려 '''조선 건국 이전부터 살아있는 나무'''이다. 그래서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1968년 3월 4일에 천연기념물 제194호로 지정한 후 보호하고 있다.
나무의 모양이 일반 나무들처럼 곧게 뻗지 않고, 구부러져있다. 높이는 6m, 뿌리부분 둘레는 5.9m, 가슴높이 둘레는 4.3m이다.[5] 가지 역시 위가 아닌 수평으로 뻗어있다. 동서남북으로 1개 씩 뻗었는데, 동서길이 11.5m, 남북길이 5.5m이다. 단, 북쪽 가지는 현재 죽었고 남쪽 가지는 잘렸으며##, 동쪽 가지는 꼬불꼬불하다.
2010년 태풍 곤파스의 영향으로 손상을 입었다. 향나무의 윗부분이 반 정도 꺾이고 가지 일부도 부러졌지만, 다행히 나무 자체는 죽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있다. 부러진 가지는 왕실 제사 때 향피우는 용도로 사용한다고 한다.#


[1] 족보는 새 건물 보각(譜閣)을 지은 후 그곳에 보관했다.[2]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3] 보통 전통 건축에선 단층으로 표현한다.[4] 창방과 직접 만나 보를 받치는, 쇠서(소 혀 모양의 자재)를 두 겹으로 낸 공포.[5] 원래는 높이 12m, 뿌리부분 둘레는 6.8m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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