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리바야시 타다미치

 

'''쿠리바야시 타다미치'''
栗林 忠道(くりばやし ただみち

'''출생'''
1891년 7월 7일
일본 제국 나가노현 하니시나군 니시조초
(現 일본 나가노현 나가노시 마쓰시로정)
'''사망'''
1945년 3월 26일 (53세)
일본 제국 도쿄도 오가사와라 제도 이오지마 초 이오섬
(現 일본 도쿄도 오가사와라 제도 이오섬)
'''복무'''
일본제국 육군
'''복무기간'''
1914년 12월~1945년 6월 6일
'''최종계급'''
중장 → 대장[1]
'''근무'''
제106사단지휘관
오가사와라 군집단사령관
'''주요참전'''
제2차 세계 대전
이오지마 전투
'''서훈내역'''
욱일장旭日章(きょくじつしょう
서보장瑞宝章(ずいほうしょう
'''묘소'''
시신 미수습
1. 소개
2. 생애
3. 사적인 면모
4. 평가
5. 사진
6. 기타
7.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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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내가 제군보다 먼저 적진에서 사라지는 일이 있다 해도 제군이 지금까지 바친 공훈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 지금 일본은 싸움에 졌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일본 국민들이 충군 애국 정신에 불타 오른 제군의 훈공을 칭송하고, 그 영혼을 위해 눈물 흘리며 묵도할 날이 언젠가는 올 것이다. '''제군은 편안하게 나라를 위해 순교해야 한다.'''

- 최후의 야습 직전 남긴 훈시[2]

제2차 세계 대전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제국 육군 장군으로 이오지마 전투를 총지휘한 장성으로 유명하다. 이오지마 전투에서의 활약으로 일본군 장성 중에서 유능한 인물로 서구에 비교적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출생지의 변경 그가 태어났을 당시에는 하니시나군 니시조초출신으로 나오지만 현재는 니시조초가 폐지되어 역사속으로 사라진 지역명이다. 그가 태어난 니시조초는 현재 마쓰시로 정에 편입되었다. 그리하여 하니시나군에는 사카키정만 존재하고 있다.
나가노현 출신으로 1914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26기로 졸업[3]하고, 기병 소위로 임관했다. 1923년 육군대학교를 우등으로 수료하였고, 1928년 미국대사관 주재 무관으로 파견되었다. 이때 하버드 대학교에서 잠시 공부하기도 하였고, 미국 각지를 여행하면서 미국의 국력을 체험하여 "미국과 벌이는 전쟁은 절망적이다"라고 쓰기도 했다. 1931년에는 캐나다에 파견되었고, 이후 일본에 돌아와 육군참모본부에서 근무하였다. 1940년 소장으로 진급하여 장군이 되었고, 몇 개의 군가를 작사하기도 하였다.

2.2. 태평양 전쟁 초반


이후 태평양 전쟁에서 육군 제23군의 참모장으로 영국령이었던 홍콩 공략에 참전하였다. 1943년 중장으로 승진하여 예비 사단이었던 육군 제2근위사단사단장이 되었다.
참고로 근위사단은 일본 육군의 다른 정규사단들과 편성 방식 자체가 다르다. 태평양 전쟁 이전의 근위사단에는 '''덴노에 대한 충성심이 확실하다는 촌장의 추천을 받은 장병들만을 받아들였다.''' 이후 태평양 전쟁에 돌입하면서 근위사단도 편성 방식이 느슨해지며[4] 팽창하여 최종적으로는 3개 근위사단이 편성되지만, 제2근위사단만은 끝까지 기존의 방식으로 병력을 충원하는 구조를 유지했다. 그런 이유로 일본의 밀리터리계에서는 제2근위사단만을 진정한 근위사단으로 치는 경우가 종종 보인다.

2.3. 이오지마 전투


[image]
전투를 대비해 방어선 구축을 지휘하는 쿠리바야시 장군 출처
1944년 5월에 근위단 영내 화재 사고로 인해 제109사단의 사단장으로 좌천당해서 이오지마의 수비대를 이끌게 되었으며, 1945년 도쿄에 속한 이오지마에 대한 미군의 공격이 임박하자 이오지마 방어군 사령관으로 부임, 이오지마의 일본 해군 측 지휘관인 해군 중장 이치마루 리노스케 제독과 함께 방어군을 지휘했다. [5]
이오지마에서 쿠리바야시가 생각한 방어 전략은 '''어차피 이기지 못 할 것, 일본 본토로 미군이 못 가게 하루라도 더 붙잡고 늘어진다'''는 것이었다. 이전까지 일본 육군의 방어 전략은 미군이 해안에 상륙하는 것을 '격퇴'하는 방향에 촛점이 맞춰져 있어서, 해안가 인근에 방어 병력과 시설을 포진하는 식이었다. 문제는 미군의 어마어마한 물량과 화력은 애초에 일본군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고, 이렇게 해안가에 포진한 일본군은 미군을 막기는커녕 미군이 상륙하기 전 항공폭격과 함포사격으로 거진 박살이 나기 일쑤였다. 이렇게 해안 방어가 무력화된 후 미군이 유유히 상륙해 진지를 설치하면 이후 살아남은 한 줌의 일본군이 반자이 어택을 하다가 기관총 앞에 거름이 되는 것이 태평양 전쟁 당시 수도 없이 벌어졌다.
때문에 쿠리바야시는 '''처음부터 질 것을 전제로 하여''' 해안에서의 저항을 아예 포기하고, 미군을 섬 깊숙히 끌어들여서 소탕전에 시간을 쏟도록 한 것이다. 이를 위해서 쿠리바야시는 이오지마 지하에 복잡하고 방대한 지하 설비와 벙커, 참호를 구축해 미군의 상륙을 기다렸다. '''유황도'''(...)의 특성상 유황 가스 발생이 매우 심해 위험했기에, 1개 조 10명이 들어가서 딱 10분씩 교대로, 그것도 바로 뛰어나오는 식으로 공사를 하였고 이 방어 진지는 전투 당시 80% 정도 완성되었다. 견고하고 미로 같은 지하 요새 덕분에[6] 일본군은 함포사격과 항공폭격을 받고도 별 피해를 입지 않았고, 해안에서의 저항이 거의 없어 의아해하던 미 해병대는 섬에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심해지는 반격에 뒤늦게 피해가 가중되기 시작한다.
2월 19일부터 쿠리바야시 장군이 전사한 3월 26일까지 일본군은 철저하게 지하 요새를 이용한 지연전을 펼쳤고 미군은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이오지마에서의 처절한 피해는 4월부터 시작된 오키나와 전투와 함께, 미국이 일본 본토에 상륙하는 몰락 작전을 감행한다면 엄청난 인명 손실을 피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했고 결국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하는 것에 일정부분 영향을 끼쳤다.
쿠리바야시 장군은 3월 26일, 남은 300여명의 일본군을 이끌고[7] 구 일본 육군의 고유 스킬인 반자이 어택이 아닌 제대로 된 공격을 취해 미군에 타격을 입히려 했으나 실패하고 전사했다고 추정된다. 추정이라고 하는 이유는 쿠리바야시 장군의 시신은 결국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8] 쿠리바야시 장군과 이치마루 제독이 전사한 뒤에도 일본군 패잔병들이 간간히 저항했으나 실질적으로는 이때에 이오지마 전투는 종결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후 대장으로 추서되었다.[9]

3. 사적인 면모


개인의 입장에선 미국과의 전쟁을 반대한 인물[10]이었으며, 가족을 걱정하여 전쟁시에도 편지를 보낸 자상한 가장이기도 했다. 이 사람과 이오지마 전투에 관련된 서적으로는, 이 사람이 가족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을 정리한『이오지마에서 온 편지』가 있으며 이 서적은 대한민국에도 정식발간 되었다. 한편 영화아버지의 깃발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오지마 전투 관련 자료를 수집하다가, 같은 전투를 일본군 입장에서 본 영화인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를 제작하여 개봉하기도 하였다. 쿠리바야시 역을 맡은 배우는 일본의 국민배우이자 헐리우드에서도 유명한 와타나베 켄.
물론 '''서적'''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가 쿠리바야시에게 우호적인 시각으로 집필되었다는 점은 감안할 점이다.

4. 평가


쿠리바야시에 대한 평가는 크게 갈리는 편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유년학교-육군사관학교-육군대학의 정규 코스를 밟은 장교들에게서는 매우 평가가 좋지만, 정규 코스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난 사람에게는 굉장히 까칠한 레벨을 넘어서 같은 군인으로 보지도 않았다. 심지어는 같은 코스를 밟았더라도 상관이 아닌 사람은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아서 최전선에서 예하 부대장과 현피를 뜰 뻔했던 데다가 구 일본군의 병폐인 파벌 놀이에 제법 적극적이었다는 말이 있다. 때문에 사실은 어느 정도 능력이 뒷받침됐을 뿐, 실제 인격은 당시 평균적인 일본군 장성과 별다르지도 않다고 볼 수도 있다.
심지어 이오지마의 방어 계획을 수립한 자가 쿠리바야시가 아니라고 주장했던 사람이 있을 정도. 이 주장에 따르면 쿠리바야시 자신이 원래 근위사단장이었다가 영내 화재 사고로 인한 문책으로 이오지마로 좌천된 것이니만큼 불평 불만이 많았고 일도 제대로 안 했다고 한다. 참모들과의 관계도 냉엄한 정도를 초월해서 사적인 이야기도 전혀 안 했다고... 물론 그 본인과 참모들 모두 살아나오지 못했으니 실제로 어땠을지는 모른다.
육군대학을 우등을 졸업하고 주재무관으로 미국캐나다를 돌고 하버드에서 교육도 받은 당시로는 드문 미국통이었다. 하지만 당시는 육군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하면 군사 강국인 나치 독일프랑스로 연수를 가는 것이 보통이던 시절이라 미국으로 연수를 가는 것은 떨거지의 증명이었다고 하고, 오히려 미국물을 먹었다는 이유로 배척당해 이오지마 같은 비중이 낮은 곳의 사령관으로 부임했다는 주장도 있다.[11]
하지만 이오지마의 방어 계획이 그동안의 일본군의 일반적인 방어 계획과 많이 다른만큼[12] 사령관인 쿠리바야시 본인 외에 다른 사람이 수립했다고 보기 어렵다. 특히 이오지마의 양쪽 진지를 잇는 지하 벙커 등 대공사가 오랫동안 이어진 것처럼 방어 계획에 대한 사령관 본인의 의지가 강했다. 설령 그 자신이 작전을 수립하지 않았더라도 최종적으로 이를 적용한 것은 그의 공이다.
이오지마 전투에서 미군에 큰 피해를 입히면 본토 결전 때 미국이 큰 인명 피해를 우려해 강화를 맺을지도 모른다는 미국통 쿠리바야시의 판단은 옳았을지도 모르지만. 실제로는 이오지마와 오키나와 전투에서 막대한 인명 피해를 입은 미국은 더 큰 피해를 우려하긴 했지만, 강화가 아니라 원자폭탄선택했다.
당시의 일본 장군들이 가졌던 병폐를 그도 가졌으리라는 것은 시대가 시대인 만큼 당연한 것이지만,[13] 어쨌든 무조건적인 옥쇄를 주장하며 헛되이 인간 백정질이나 한 대부분의 장군들보다는 한 차원 높은 인물이었다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5.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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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병대 대좌 당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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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광동에 파견됐을 당시 사진. 옆의 개와 같이 가운데 앉아 있는 인물이 쿠리바야시. 이 사진에는 일화가 있는데, 평소 친분이 있던 군속이 촬영장소에 지각했음에도 군말 없이 기다려주었다는 것. 장성급 장교의 권위, 그것도 제국시대임을 감안한다면 드문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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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지마에서의 사진.

6. 기타


  • 이오지마 전투를 다룬 다큐멘터리에 쿠리바야시 장군의 아들 '쿠리바야시 타로'가 등장하여 증언을 했다.

7. 매체에서



[1] 사후 추서[2] 이오지마 전투에서의 생존자가 증언하여 세상에 알려졌다. 사실상의 유언[3] 한국 광복군지청천 장군과 동기다. 지청천은 일본 육사를 졸업한 후 일본군의 교범을 갖고 만주로 망명하였다.[4] 2사단을 제외한 1, 3 근위사단은 도쿄와 그 주변의 장정들로 동원, 충원되었다.[5] 육해군 대립이 심한 그 일본군 작전중 몇 안되는 육해군 합동작전이였다. 다른작전으론 키스카섬 후퇴작전 정도.[6] 아래 다큐멘터리에서는 이 지하 요새를 가리켜 '일본군은 지하 도시를 만들었다. 이들은 이오지마 '''안'''에 숨어 있던 것이다'라고 평가했다.[7] 3월 26일 당시 이오지마에 남은 일본군이 300여명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러나 대부분 복잡한 동굴 속에 흩어져 있어 많이 모을 수가 없었다. 대략 2000여명이 더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8] 일설에 따르면 쿠리바야시 장군은 군도를 뽑아 들고 공격의 선봉에 섰다고 한다. 이는 대단히 특이한 일인데, 일본군 지휘관들은 거의 대부분 부하들에게 자살 돌격을 명해 놓고 자기 스스로는 할복 자살을 했지 쿠리바야시처럼 몸소 공격을 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9] 시신을 찾지 못했다는 점에서, 민간인으로 변장하고 탈출하려 했다는 루머도 있다. 그러나 애초에 바다 한가운데 섬에서 도주할 방법이 없으니 가능성은 낮은 이야기다. 고폭탄에 직격당해 형체도 없이 사라졌을 공산이 크다.[10] 비슷하게 연합함대 사령관으로 있던 야마모토 이소로쿠도 미국과의 전쟁을 반대했다.[11] 당시만 해도 이오지마가 일본 폭격을 위한 비행장으로 이용될 걸 예측 못했다.[12] 이렇게 선제, 옥쇄 돌격을 금하고 철저하게 지연전으로 선회하는 전술은 펠렐리우 전투 당시 일본군 지휘관이었던 나카가와 쿠니오 대좌가 먼저 생각해 냈지만 펠렐리우 전투의 인지도 자체가 워낙에 낮아서 쿠리바야시 장군이 최초로 해당 전술을 입안한 것처럼 알려져 있다.[13] 섬을 무덤 삼아 사실상 2만명의 일본군을 미군과 동반자살을 시키는 계획을 입안하고, 종래에는 사실상 저항의 의미가 없는 상황에서 부하들을 항복이 아닌 순교 운운하며 자살이나 다름 없는 공세에 참여시킨 점을 보면 쿠리바야시를 이마무라 히토시 같은 덕장이었다거나 기무라 마사토미처럼 일본군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노력한 장성으로 보기는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