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하 협주곡
한자: 黃河協奏曲
영어: Yellow River Piano Concerto
중국에서 작곡된 피아노 협주곡으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이념이 버무려진 독특한 작품이다. 중국 협주곡 중 바이올린 협주곡 '나비 연인'과 함께 가장 많이 연주되는 곡. 들어보기
원곡은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39년에 작곡가 시안싱하이(冼星海, 1905-1945)가 옌안에서 작곡한 칸타타인 '황하 대합창(黄河大合唱)'이었는데, 비록 전쟁 중의 어려운 상황이라 기악과 성악 모두 상당히 축소된 형태로 초연되었지만[1] 청중들은 애국심을 강조한 이 곡을 듣고 환호할 정도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시안도 이 칸타타 한 곡만으로 중국에서 베토벤 급의 대작곡가로 추앙받게 되었다.
이 칸타타는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에도 여러 차례 개작되면서 계속 연주되었지만, 문화대혁명이 터지면서 졸지에 금지곡이 되고 말았다. 이 곡 뿐 아니라 서양 작품 모두를 포함해 연주할 곡이 갑자기 팍 줄어든 연주자들은 정부가 시키는 대로 공연장 외에 광장이나 집단농장, 공장 등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혁명가요라든가 중국 정부가 연주를 허가한 극소수의 작품 만을 줄창 연주해야 했다.
이들 중 천안문 광장에 트럭으로 피아노를 싣고 와서 혁명가요 합창을 반주하던 피아니스트 인청쭝(殷承宗)이 마오쩌둥의 부인이자 4인방의 수장 장칭의 눈에 들었는데, 장칭은 인청쭝에게 기존 작품들을 피아노용으로 편곡할 것을 요구했다. 이 작업 중에는 경극 '홍등기'의 피아노 반주용 편곡과 '황하 대합창'의 피아노 협주곡 편곡이 있었고, 전자의 경우 인청쭝 자신이 직접 편곡을 맡았다. 그리고 인청쭝은 당국의 압박 속에 낮에는 황하 협주곡을 치고, 밤에는 사과 궤짝에 그린 피아노로 차이콥스키와 라흐마니노프를 연습했다 한다. 당시엔 서양 음악은 어떤 것도 공개적으로 연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협주곡의 경우 피아니스트 교육만 받았던 인청쭝이 관현악 작법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던 탓에 중국 중앙악단(현 중국국립교향악단) 소속의 몇 안남은 작곡가들이었던 류좡(劉莊), 추왕화(儲望華), 셩리홍(盛礼洪), 시수청(石叔誠)과 쉬페이싱(許斐星)이 공동으로 편곡에 참가했고,[2] 원곡 칸타타의 노래 선율들을 주요 주제로 사용한 4악장 짜리 피아노 협주곡이 만들어졌다.
장칭은 이 편곡 작업에 상당히 자주 간섭했는데, 특히 마지막 4악장 후반부에 시안의 칸타타와 전혀 상관이 없는 마오쩌둥 찬가인 둥펑홍(東方紅)과 인터내셔널가의 후반 소절을 넣으라고 강요했다. 덕분에 민족주의풍 원곡에 마오쩌둥과 공산주의 이념에 대한 찬미가 더해진 거창한 선전용 작품이 탄생했고, 이 협주곡은 1970년에 인청쭝의 독주와 리더룬(李德伦)이 지휘한 중앙악단의 협연으로 초연된 이래 중국 정부의 정략적인 푸쉬 속에 국내외에 널리 보급되었다.
하지만 중국 바깥의 시선은 대부분 곱지 않았다. 일본의 대표적인 현대 작곡가 타케미츠 토루는 이 곡을 들어본 뒤 "그렇게 위대한 나라라는 중국에서 이런 작품이 나올 줄이야!"라고 탄식했고, 다른 음악인들도 '라흐마니노프와 중국 선율의 어설픈 이종교배'등의 혹평을 쏟아냈다.
그럼에도 이 기간 동안 진행된 미국이나 일본 등 과거 적성국들과 관계 개선이 이루어지면서 문화예술 교류도 재개됐는데, 문화대혁명 말기에 방중한 해외의 관현악단들도 중국 정부의 (강요에 가까운) 요청으로 이 곡을 공연 프로그램에 넣어야 했다. 덕분에 거장 지휘자들과 관현악단들이 이 곡을 정치적 이해 관계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로 공연해야 했고, 유진 오먼디가 지휘한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경우 미국 피아니스트 다니엘 엡스타인의 협연으로 진행한 중국 공연 후 1974년에 RCA에 LP를 취입하기도 했다. 또 같은 해에 영국에서는 이스라엘 피아니스트 일라나 베레드가 엘가 하워스 지휘의 내셔널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만든 녹음이 데카에서 출반되기도 했다.[3]
거의 10년 동안 몰아친 문혁의 광풍이 마오의 사망과 4인방의 몰락으로 잠잠해지자, 이 협주곡은 장칭의 극좌 노선에 의해 강요된 작품으로 단죄되어 금지곡이 되었다. 하지만 이미 해외에까지 퍼진 (악명을 포함한) 명성은 돌이킬 수 없어서 국외 공연까지 막을 수는 없었고, 1980년대 후반에 가서는 다시 이념적으로 보수화되기 시작한 중국 사회의 분위기 속에 리바이벌되기 시작했다. 한 때 4악장에서 둥펑홍과 인터내셔널가를 삭제한 개정판이 쓰이기도 했지만, 이것도 얼마 가지 않아 폐기되고 원판 악보가 그대로 쓰이고 있다.
일단 음악적으로만 보면 그렇게까지 괴악하지는 않다. 나름대로 논리적으로 구성되었고, 통속성을 강조했기 때문에 듣기에도 편하다. 특히 피아노 독주 파트에 상당한 힘과 기교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의 거장풍 협주곡과도 맥을 같이한다. 전악장에 표제가 붙어 있어서, 해당 표제가 상징하는 방향으로 음악이 흘러감을 암시하는 표제음악 성격도 띄고 있다.
1악장은 '전주: 황하 뱃사공의 노래(前奏:黄河船夫曲)'로 되어 있고, 연속되는 크레센도(점점 세게)가 황하의 거센 물결을 묘사한다. 이어 피아노가 짧은 독주 악구를 연주한 뒤, 원곡 '황하 대합창'의 1악장에 나오는 뱃노래 선율을 관현악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연주한다. 중간부에서는 목관악기들과 중국 전통 발현악기 비파에 의해 서정적인 노랫가락이 제2주제 격으로 연주되며, 이어 다시 뱃노래 선율의 추임새가 재현되며 박력있게 끝맺는다.
2악장은 원곡과 같은 악장의 소재를 사용한 '황하송(黄河頌)'으로, 바리톤 독창의 서정적인 중국 민요풍 노래가 여기서는 첼로의 연주로 등장한다. 이 노래 선율은 피아노에 의해 반복되고, 이후의 전개도 통절 형식인 원곡 노래의 충실한 편곡으로 진행된다.
3악장은 '황하의 분노(黃河憤)'라는 제목으로 되어 있는데, 처음에는 바이올린의 여린 트레몰로를 배경으로 중국 전통 가로피리인 디즈(笛子)에 의해 민속 선율이 잠시 연주된다. 이어 피아노 독주가 원곡 4악장에서 여성 합창으로 시작되는 '황수요(黃水謠)'의 선율을 차분하게 연주하는데, 중간에 노래가 단조로 바뀌는 부분에서 잠시 긴장된 움직임을 보여주고 이후에도 완급 조절이 계속 반복되는 극적인 구성을 취하고 있다. 1악장에 나왔던 비파가 중간부에 다시 등장하는 것도 특징.
마지막 4악장 제목은 '황하를 지키자(保衛黃河)'로, 마오쩌둥 찬가인 둥펑홍의 첫머리 선율을 따온 거창한 관현악 전주에 이어 피아노의 짧은 카덴차[4] 가 등장한다. 이어 짧은 관현악 이행부를 거쳐 원곡의 7악장에서 남성합창과 여성합창이 카논 풍으로 주거니 받거니 하는 노래 선율이 피아노에 의해 강한 행진곡 풍으로 등장하며, 이 선율은 셈여림과 관현악 편성을 다르게 하면서 수 차례 반복된다. 중간부에서는 해당 선율의 첫머리 단편을 가지고 작은 발전부를 이루며, 1악장과 3악장에 나왔던 비파도 다시 짤막하게 등장한다.
이 대목이 차츰 고조되면서 피아노와 전체 관현악에 의해 둥펑홍 선율이 커다랗게 부각되어 클라이맥스를 이루며, 이어 첫 번째 카논풍 합창 악구의 재현으로 돌아온다. 둥펑홍의 첫머리 선율이 여기에 합쳐지고, 인터내셔널가의 마지막 소절이 금관악기에 의해 크게 연주된 뒤 화려하고 짧은 종결부를 거쳐 마무리된다.
관현악 편성은 피콜로/플루트 2/오보에 2/클라리넷 2/바순 2/호른 4/트럼펫 2/트롬본 3/팀파니/트라이앵글/서스펜디드 심벌/하프/현 5부(제1바이올린-제2바이올린-비올라-첼로-콘트라베이스)로, 플루트족 악기만 세 대를 쓰는 변칙 2관 편성이다. 여기에 상술한 대로 중국 전통 악기들인 비파와 디즈가 들어가는데, 악기나 연주자를 구하기 힘들 경우 비파는 생략하고 디즈는 플루트나 피콜로 등 다른 가로피리의 독주로 대체할 수 있다.
일단 정치적인 선전 목적은 달성했다지만, 이후 중국 음악계에서 이 곡은 양날의 검이 되었다. 특히 문혁 이후 등장한 작곡가들은 이 곡의 구티나는 구식 어법을 탈피해 서구의 현대음악 기법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하려고 했고, 작곡자 자신의 개성이나 견해에 따른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이렇게 노골적인 정치적 작품을 쓰는 경우는 많이 줄었다.
다만 후임자인 니키타 흐루쇼프한테 사후 미친듯이 까인 강철의 대원수와 달리, 마오쩌둥은 비록 덩샤오핑에 의해 약간 격하되기는 했어도 여전히 국부로서 강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는 현실이 이 곡이 아직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 가장 강한 원동력으로 여겨진다.
초연자인 인청쭝을 비롯해 그 후로 계속 배출되고 있는 수많은 중국 피아니스트들은 이 곡을 거의 반드시 연주 곡목에 넣고 음반도 제작하고 있으며, 2000년대 들어 서구에서 눈에 띄게 주목받고 있는 랑랑이나 리윈디 같은 피아니스트들도 각각 'Dragon Song(위룽 지휘의 중국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협연. 도이체 그라모폰 제작)'과 'Red Piano(천쭤황 지휘의 중국 국가대극원 관현악단 협연. EMI 제작)'라는 타이틀의 앨범에서 이 곡을 녹음했다.
한국에서도 중국과 수교한 이후 이 곡이 상당히 드물기는 하지만 연주되고 있다.[5] 북한에서는 심지어 자국 피아니스트 김근철이 김병화 지휘의 조선국립교향악단과 협연한 음반까지 냈고, 2011년 2월에 북한에 주재하는 중국의 높으신 분들을 위해 개최된 은하수관현악단 음악회에서는 북한이 피아노 신동으로 선전하고 있는 박건의가 축약판 형태로 연주한 바 있다.
다만 외국 피아니스트들이 이 곡을 녹음한 사례는 위에 쓴 다니엘 엡스타인이나 일라나 베레드, 김근철, 이탈리아 피아니스트 리카르도 카라멜라 정도를 제외하면 전무한 실정이라, 적어도 음반 업계에서는 앞으로도 계속 중국 음악인 전용 작품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또 마오쩌둥 개인과 공산주의 이념에 대한 찬미라는 메시지가 강조되는 곡이라, 1812년 서곡 같은 곡들과 마찬가지로 정치적인 이해 관계에 따라 흑역사급 작품 또는 불세출의 걸작이라는 크게 엇갈린 평가도 계속될 듯.
또 이 곡은 알게 모르게 북한의 음악 창작 방식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이는데, 이 곡의 초연을 전후해 김정일이 자신의 저서 '음악예술론'을 통해 "기악곡을 창작할 때 기존의 노래 선율을 활용하라"는 '교시'를 내린 바 있다. 그리고 이 교시는 김정일이 죽은 뒤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어서, 북한 작곡가들을 계속 편곡자 수준으로 옭아매는 부작용을 남기고 있다.
영어: Yellow River Piano Concerto
중국에서 작곡된 피아노 협주곡으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이념이 버무려진 독특한 작품이다. 중국 협주곡 중 바이올린 협주곡 '나비 연인'과 함께 가장 많이 연주되는 곡. 들어보기
1. 창작 경위
원곡은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39년에 작곡가 시안싱하이(冼星海, 1905-1945)가 옌안에서 작곡한 칸타타인 '황하 대합창(黄河大合唱)'이었는데, 비록 전쟁 중의 어려운 상황이라 기악과 성악 모두 상당히 축소된 형태로 초연되었지만[1] 청중들은 애국심을 강조한 이 곡을 듣고 환호할 정도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시안도 이 칸타타 한 곡만으로 중국에서 베토벤 급의 대작곡가로 추앙받게 되었다.
이 칸타타는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에도 여러 차례 개작되면서 계속 연주되었지만, 문화대혁명이 터지면서 졸지에 금지곡이 되고 말았다. 이 곡 뿐 아니라 서양 작품 모두를 포함해 연주할 곡이 갑자기 팍 줄어든 연주자들은 정부가 시키는 대로 공연장 외에 광장이나 집단농장, 공장 등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혁명가요라든가 중국 정부가 연주를 허가한 극소수의 작품 만을 줄창 연주해야 했다.
이들 중 천안문 광장에 트럭으로 피아노를 싣고 와서 혁명가요 합창을 반주하던 피아니스트 인청쭝(殷承宗)이 마오쩌둥의 부인이자 4인방의 수장 장칭의 눈에 들었는데, 장칭은 인청쭝에게 기존 작품들을 피아노용으로 편곡할 것을 요구했다. 이 작업 중에는 경극 '홍등기'의 피아노 반주용 편곡과 '황하 대합창'의 피아노 협주곡 편곡이 있었고, 전자의 경우 인청쭝 자신이 직접 편곡을 맡았다. 그리고 인청쭝은 당국의 압박 속에 낮에는 황하 협주곡을 치고, 밤에는 사과 궤짝에 그린 피아노로 차이콥스키와 라흐마니노프를 연습했다 한다. 당시엔 서양 음악은 어떤 것도 공개적으로 연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협주곡의 경우 피아니스트 교육만 받았던 인청쭝이 관현악 작법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던 탓에 중국 중앙악단(현 중국국립교향악단) 소속의 몇 안남은 작곡가들이었던 류좡(劉莊), 추왕화(儲望華), 셩리홍(盛礼洪), 시수청(石叔誠)과 쉬페이싱(許斐星)이 공동으로 편곡에 참가했고,[2] 원곡 칸타타의 노래 선율들을 주요 주제로 사용한 4악장 짜리 피아노 협주곡이 만들어졌다.
장칭은 이 편곡 작업에 상당히 자주 간섭했는데, 특히 마지막 4악장 후반부에 시안의 칸타타와 전혀 상관이 없는 마오쩌둥 찬가인 둥펑홍(東方紅)과 인터내셔널가의 후반 소절을 넣으라고 강요했다. 덕분에 민족주의풍 원곡에 마오쩌둥과 공산주의 이념에 대한 찬미가 더해진 거창한 선전용 작품이 탄생했고, 이 협주곡은 1970년에 인청쭝의 독주와 리더룬(李德伦)이 지휘한 중앙악단의 협연으로 초연된 이래 중국 정부의 정략적인 푸쉬 속에 국내외에 널리 보급되었다.
2. 완성과 보급
하지만 중국 바깥의 시선은 대부분 곱지 않았다. 일본의 대표적인 현대 작곡가 타케미츠 토루는 이 곡을 들어본 뒤 "그렇게 위대한 나라라는 중국에서 이런 작품이 나올 줄이야!"라고 탄식했고, 다른 음악인들도 '라흐마니노프와 중국 선율의 어설픈 이종교배'등의 혹평을 쏟아냈다.
그럼에도 이 기간 동안 진행된 미국이나 일본 등 과거 적성국들과 관계 개선이 이루어지면서 문화예술 교류도 재개됐는데, 문화대혁명 말기에 방중한 해외의 관현악단들도 중국 정부의 (강요에 가까운) 요청으로 이 곡을 공연 프로그램에 넣어야 했다. 덕분에 거장 지휘자들과 관현악단들이 이 곡을 정치적 이해 관계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로 공연해야 했고, 유진 오먼디가 지휘한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경우 미국 피아니스트 다니엘 엡스타인의 협연으로 진행한 중국 공연 후 1974년에 RCA에 LP를 취입하기도 했다. 또 같은 해에 영국에서는 이스라엘 피아니스트 일라나 베레드가 엘가 하워스 지휘의 내셔널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만든 녹음이 데카에서 출반되기도 했다.[3]
거의 10년 동안 몰아친 문혁의 광풍이 마오의 사망과 4인방의 몰락으로 잠잠해지자, 이 협주곡은 장칭의 극좌 노선에 의해 강요된 작품으로 단죄되어 금지곡이 되었다. 하지만 이미 해외에까지 퍼진 (악명을 포함한) 명성은 돌이킬 수 없어서 국외 공연까지 막을 수는 없었고, 1980년대 후반에 가서는 다시 이념적으로 보수화되기 시작한 중국 사회의 분위기 속에 리바이벌되기 시작했다. 한 때 4악장에서 둥펑홍과 인터내셔널가를 삭제한 개정판이 쓰이기도 했지만, 이것도 얼마 가지 않아 폐기되고 원판 악보가 그대로 쓰이고 있다.
3. 곡의 형태
일단 음악적으로만 보면 그렇게까지 괴악하지는 않다. 나름대로 논리적으로 구성되었고, 통속성을 강조했기 때문에 듣기에도 편하다. 특히 피아노 독주 파트에 상당한 힘과 기교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의 거장풍 협주곡과도 맥을 같이한다. 전악장에 표제가 붙어 있어서, 해당 표제가 상징하는 방향으로 음악이 흘러감을 암시하는 표제음악 성격도 띄고 있다.
1악장은 '전주: 황하 뱃사공의 노래(前奏:黄河船夫曲)'로 되어 있고, 연속되는 크레센도(점점 세게)가 황하의 거센 물결을 묘사한다. 이어 피아노가 짧은 독주 악구를 연주한 뒤, 원곡 '황하 대합창'의 1악장에 나오는 뱃노래 선율을 관현악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연주한다. 중간부에서는 목관악기들과 중국 전통 발현악기 비파에 의해 서정적인 노랫가락이 제2주제 격으로 연주되며, 이어 다시 뱃노래 선율의 추임새가 재현되며 박력있게 끝맺는다.
2악장은 원곡과 같은 악장의 소재를 사용한 '황하송(黄河頌)'으로, 바리톤 독창의 서정적인 중국 민요풍 노래가 여기서는 첼로의 연주로 등장한다. 이 노래 선율은 피아노에 의해 반복되고, 이후의 전개도 통절 형식인 원곡 노래의 충실한 편곡으로 진행된다.
3악장은 '황하의 분노(黃河憤)'라는 제목으로 되어 있는데, 처음에는 바이올린의 여린 트레몰로를 배경으로 중국 전통 가로피리인 디즈(笛子)에 의해 민속 선율이 잠시 연주된다. 이어 피아노 독주가 원곡 4악장에서 여성 합창으로 시작되는 '황수요(黃水謠)'의 선율을 차분하게 연주하는데, 중간에 노래가 단조로 바뀌는 부분에서 잠시 긴장된 움직임을 보여주고 이후에도 완급 조절이 계속 반복되는 극적인 구성을 취하고 있다. 1악장에 나왔던 비파가 중간부에 다시 등장하는 것도 특징.
마지막 4악장 제목은 '황하를 지키자(保衛黃河)'로, 마오쩌둥 찬가인 둥펑홍의 첫머리 선율을 따온 거창한 관현악 전주에 이어 피아노의 짧은 카덴차[4] 가 등장한다. 이어 짧은 관현악 이행부를 거쳐 원곡의 7악장에서 남성합창과 여성합창이 카논 풍으로 주거니 받거니 하는 노래 선율이 피아노에 의해 강한 행진곡 풍으로 등장하며, 이 선율은 셈여림과 관현악 편성을 다르게 하면서 수 차례 반복된다. 중간부에서는 해당 선율의 첫머리 단편을 가지고 작은 발전부를 이루며, 1악장과 3악장에 나왔던 비파도 다시 짤막하게 등장한다.
이 대목이 차츰 고조되면서 피아노와 전체 관현악에 의해 둥펑홍 선율이 커다랗게 부각되어 클라이맥스를 이루며, 이어 첫 번째 카논풍 합창 악구의 재현으로 돌아온다. 둥펑홍의 첫머리 선율이 여기에 합쳐지고, 인터내셔널가의 마지막 소절이 금관악기에 의해 크게 연주된 뒤 화려하고 짧은 종결부를 거쳐 마무리된다.
관현악 편성은 피콜로/플루트 2/오보에 2/클라리넷 2/바순 2/호른 4/트럼펫 2/트롬본 3/팀파니/트라이앵글/서스펜디드 심벌/하프/현 5부(제1바이올린-제2바이올린-비올라-첼로-콘트라베이스)로, 플루트족 악기만 세 대를 쓰는 변칙 2관 편성이다. 여기에 상술한 대로 중국 전통 악기들인 비파와 디즈가 들어가는데, 악기나 연주자를 구하기 힘들 경우 비파는 생략하고 디즈는 플루트나 피콜로 등 다른 가로피리의 독주로 대체할 수 있다.
4. 여파
일단 정치적인 선전 목적은 달성했다지만, 이후 중국 음악계에서 이 곡은 양날의 검이 되었다. 특히 문혁 이후 등장한 작곡가들은 이 곡의 구티나는 구식 어법을 탈피해 서구의 현대음악 기법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하려고 했고, 작곡자 자신의 개성이나 견해에 따른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이렇게 노골적인 정치적 작품을 쓰는 경우는 많이 줄었다.
다만 후임자인 니키타 흐루쇼프한테 사후 미친듯이 까인 강철의 대원수와 달리, 마오쩌둥은 비록 덩샤오핑에 의해 약간 격하되기는 했어도 여전히 국부로서 강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는 현실이 이 곡이 아직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 가장 강한 원동력으로 여겨진다.
초연자인 인청쭝을 비롯해 그 후로 계속 배출되고 있는 수많은 중국 피아니스트들은 이 곡을 거의 반드시 연주 곡목에 넣고 음반도 제작하고 있으며, 2000년대 들어 서구에서 눈에 띄게 주목받고 있는 랑랑이나 리윈디 같은 피아니스트들도 각각 'Dragon Song(위룽 지휘의 중국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협연. 도이체 그라모폰 제작)'과 'Red Piano(천쭤황 지휘의 중국 국가대극원 관현악단 협연. EMI 제작)'라는 타이틀의 앨범에서 이 곡을 녹음했다.
한국에서도 중국과 수교한 이후 이 곡이 상당히 드물기는 하지만 연주되고 있다.[5] 북한에서는 심지어 자국 피아니스트 김근철이 김병화 지휘의 조선국립교향악단과 협연한 음반까지 냈고, 2011년 2월에 북한에 주재하는 중국의 높으신 분들을 위해 개최된 은하수관현악단 음악회에서는 북한이 피아노 신동으로 선전하고 있는 박건의가 축약판 형태로 연주한 바 있다.
다만 외국 피아니스트들이 이 곡을 녹음한 사례는 위에 쓴 다니엘 엡스타인이나 일라나 베레드, 김근철, 이탈리아 피아니스트 리카르도 카라멜라 정도를 제외하면 전무한 실정이라, 적어도 음반 업계에서는 앞으로도 계속 중국 음악인 전용 작품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또 마오쩌둥 개인과 공산주의 이념에 대한 찬미라는 메시지가 강조되는 곡이라, 1812년 서곡 같은 곡들과 마찬가지로 정치적인 이해 관계에 따라 흑역사급 작품 또는 불세출의 걸작이라는 크게 엇갈린 평가도 계속될 듯.
또 이 곡은 알게 모르게 북한의 음악 창작 방식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이는데, 이 곡의 초연을 전후해 김정일이 자신의 저서 '음악예술론'을 통해 "기악곡을 창작할 때 기존의 노래 선율을 활용하라"는 '교시'를 내린 바 있다. 그리고 이 교시는 김정일이 죽은 뒤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어서, 북한 작곡가들을 계속 편곡자 수준으로 옭아매는 부작용을 남기고 있다.
[1] 성악가는 그냥 노래 좀 하는 사람들을 뽑아 급조하면 되었지만, 정규 편성 관현악단은 꿈도 못꿀 정도의 현시창이라 결국 입수 가능한 온갖 잡다한 전통악기와 서양악기를 뭉뚱그려 소규모 기악 합주단을 만들어야 했다. 심지어 타악기가 부족해 석유통과 세숫대야를 대신 쓸 정도였다.[2] 이런 여러 창작가들에 의한 집단 창작 방식을 집체창작(集體創作)이라고 부르며, 소련이나 북한 등 공산권 국가에서 자주 이런 식으로 곡이 만들어졌다.[3] 다만 이들 녹음의 이후 재발매 움직임은 상당히 더뎠는데, 오먼디와 필라델피아 콤비가 남긴 거의 모든 녹음은 훗날 본사를 통해 CD로 재발매되었지만 이 협주곡만은 낙소스의 전신 격인 홍콩 레코드를 통해 한정적으로 재발매되었다. 데카 녹음의 경우에도 1970년대 LP 출반 후 같은 음반사에서 공식적으로 CD 복각판이 나오기까지 40년 가까이 걸렸다.[4] 협주곡이나 협주풍 작품에서 관현악 반주 없이 연주하는 화려한 독주 악구[5] 2007년 5월 11일에 한중 수교 15주년 기념 공연을 겸한 수원시립교향악단의 정기연주회에서 임미정의 독주와 박은성의 지휘로 연주된 바 있다. 다만 이 공연이 한국 초연은 아닌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