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7년식 75mm 야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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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원
2. 개요
3. 역사
4. 기타 운용 사례
5. 여담
6. 둘러보기


1. 제원


  • 구경: 75×350mm
  • 중량: 1,544kg
  • 포신장: 2,700mm(36구경장)
  • 부앙각: -11°~+18°
  • 좌우선회각: 6°
  • 운용인원: 6명
  • 발사속도: 15발/분(최대)
  • 사정거리: 8,550m(유탄) / 6,800m(유산탄)
  • 포구초속도: 500m/s
  • 생산기간: 1897년 ~ 1940년?
  • 생산수량: 21,000문 이상
  • 사정거리: 고폭탄 사용시 8,500m

2. 개요




프랑스가 1891년부터 1896년까지 개발하고 1897년에 제식화한 '''세계 최초의 현대적인 야포'''이다. 대포의 기본적 구성은 현재까지도 이 대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정도로 시대를 앞서간 물건이자 현대 포병의 아버지라 해도 좋을 무기. FT-17 전차, 미니에 탄과 더불어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 프랑스발 군사사를 바꿔놓은 대혁신 발명품 중 하나이다.

3. 역사


프랑스는 독일의 신형 야포 정보를 입수한다. 주퇴복좌기를 채택한 야포가 개발 중이라는 것이었다. 당시 야포는 가장 중요한 전술 병기였기에 프랑스는 선수를 치기로 하고 1891년 개발 시작, 1896년 개발 완료하고, 1897년에 제식화한다.
'''세계 최초의 현대적인 야포'''라는 별칭이 붙게 된 이유는 여러 선진적인 요소들이 구현되었기 때문이다. 세계 최초로 유기압식 주퇴복좌기를 사용하여 포탄 발사시의 반동을 최소화함으로써 분당 발사속도를 10발 이상으로 올렸다. 또한 발사 후 표적을 새로 조준할 필요도 없었다. 이전의 전장식야포는 물론이거니와, 새로 개발된 후장식야포조차 표적을 조준하면 분당 2발 발사가 고작이었다. 발사시의 반동으로 인해 야포가 대폭 후방으로 이동하면서 대포의 위치 자체가 바뀌어버려 새로 목표를 조준해야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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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세계 각국은 이 주퇴복좌기를 채택한 야포로 자국의 포병장비를 일신했다. 예외적으로 일본군은 주퇴복좌기가 없는 31식 야포를 포병의 주력야포로 채용한다. 그 결과 러일전쟁에서 심각한 화력 부족에 시달리게 된다. 만성적인 포탄 부족에 시달렸던 일본군이 구식화된 후장포로 분당 2발 꼴로 야포를 사격하면, 러시아군은 넉넉한 야전 보급을 바탕으로 주퇴복좌기가 달린 프랑스제 야포로 무려 분당 15발을 퍼부어 댔다.[1] 쓴맛을 본 일본군은 전쟁중에 곧바로 독일에 신형 화포를 여러개 발주했고, 전쟁이 끝나고 나서 제식채용했다.
제식명인 "Canon de 75 modèle 1897"에서 직잠할 수 있듯이, 19세기식 포병교리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다. 아군 보병의 돌격을 포병이 직사로 엄호하며 적군 보병 진형의 격파에 주안점을 두었던 것이다. 이는 M1897에게 일장일단의 효과를 가져왔다. 제1차 세계 대전 초기 벨기에 방면에서 독일군의 진격 저지와 프랑스군의 후퇴 엄호하는 임무에서는 큰 효용을 보였다. 19세기식 선형진을 짜고 공격해오는 독일군에게 포탄의 비를 퍼부어 진격을 효과적으로 저지하였고, 마른강의 기적을 만들어 내는데 일조했던 것이다. 반면 이후의 참호전에서는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 참호를 건설한 독일군을 상대하기에는 부앙각과 포탄 위력이 낮아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사례들은 이전과는 매우 판이한 제1차 세계 대전의 전장환경을 잘 보여준다 하겠다. 이러한 문제점 때문에 프랑스는 Canon de 155 L modèle 1877/14 Schneider 같은 야포를 배치하게 되고 이들은 현대 155mm 곡사포의 시초가 된다.
생산은 1897년부터 시작하여 1940년에 종료되었다고 추정되며 총 생산문수는 21,000문에 이른다. 다양한 파생형이 등장했는데, 기본인 야포형뿐 아니라 전차포 모델, 대공포 모델도 등장했다. 영국군은 1915년부터 대공포 모델을 수입하여 영국제 대공포가 개발될 때까지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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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 대전때에 등장한 프랑스군의 중형전차 생 샤몽(St. Chamond)의 주포로도 활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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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때 프랑스는 이 포의 개량형을 경야포 및 대전차포로 애용하였다.

4. 기타 운용 사례


개발자인 프랑스는 물론 러시아, 미국, 영국, 폴란드, 일본, 나치 독일, 그리스까지 즐겨 사용했다.
폴란드 침공프랑스 침공의 승리 후 독일은 이 포를 대량으로 노획하여 대전차포로 개량했다. 개조 수량은 3712문. 동부전선에서 PaK 40이 대량배치될 때까지 운용했고, 그 이후에는 대서양 방벽 등의 방어진지로 재배치하여 종전시까지 운용하거나 동맹국들에게 매각했다. 그래서 고폭탄도 재생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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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국방군이 2차대전 중 사용한 75mm PaK 97/38의 사진. M1897의 포신을 50mm PaK 38의 포가와 결합한 형식이다. 높은 관통력의 대전차고폭탄을 사용하여 PaK 40이 등장할 때까지 pak 36(r), pak 38과 함께 독일군이 보유한 소중한 대전차수단으로 사용되었다.
핀란드군은 보유한 M1897 야포를 독일과 동일한 형식의 대전차포로 개수하여 전쟁 내내 운용했다. 전후에도 장기간 예비치장물자로 보관하다가 1986년에 퇴역했다.
미군은 이 포를 프렌치 75라 부르며 제1차 세계 대전 때부터 애용했다. 전간기에도 계속 사용하다가, 전차포 버전을 개발하여 M3 리 전차의 주포로 사용했다. 이후 M4 셔먼에도 조금 더 장포신화하여 성능이 강화된 M3 전차포로 운용했으나, 견인식 대전차포로는 활용하지 않았다. 미군 포병의 경우 사단포병용으로 계속 사용하다 2차대전 참전 직전인 1941년에 개발된 M101 105mm 곡사포를 장비하면서 1943년이 되면 완전히 사용을 종료한다.
B-25 미첼 폭격기의 기수에 M3 대전차포를 개수한 M4 대전차포를(B-25G), 그리고 이를 경량화한 M5 대전차포를(B-25H) 장착하여 건쉽으로 활용해서 재미를 보기도 했다. G형은 420대, H형은 약 1000대가 생산되었다. 75mm M5포는 개량을 거쳐 M6라는 제식 명칭으로 M24 채피에 장착되었다.
해당 75mm M3 ~ M6 전차포는 종전 때까지 같은 체급인 3호 전차4호 전차의 모든 파생형을 표준 교전 거리 내에서 여유있게 격파할 수 있었고, 속사 능력과 고폭탄 화력이 우수하여[2] 보병이나 비장갑차량, 벙커 등을 상대하는 데에도 충분한 위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이후 모습을 드러내는 독일군호랑이표범에게는 이빨이 먹히지 않았다. 게다가 미군 포탄 좀 받아쓰겠다고 같은 규격의 탄환을 쓰는 Ordnance, QF, 75mm 포를 개발해서 전차포를 거의 통일했던 영국군도 같은 신세로... 하지만, 대전차전보다 대보병전이 훨씬 많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훌륭한 무기였음은 틀림없다.
일본군은 1차 세계대전후 이 포의 개량형을 라이센스 하여 90식 75mm 야포로 사용하였다. 90식 야포를 개조하여 개발된 3식 전차포는 1식 포전차 호니와 3식 치누 중전차의 주포로 활용되었다. 다만 당시 공업능력의 한계로 동일한 계열의 주포를 사용하던 미국보다는 성능이 뒤떨어졌다.

5. 여담


프렌치 75라는 칵테일은 이 대포에서 따온 이름이다.

6. 둘러보기







[1]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군은 주요 전투마다 일본군을 상대로 연패해야했는데 러일전쟁의 전투양상은 부정기적인 조우전이 다수였고 이러한 환경에선 소총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러시아군의 개인화기는 그 유명한 모신나강이었지만 총사령관이었던 크로파트킨의 회고에 의하면 일본군의 제식소총이었던 30년식 보병총과 비교해 명중률이 떨어졌다고 한다.[2] 별로 주목받지 않는 사실이지만, 2차대전 당시 고폭탄은 설계의 한계로 인해 작약량과 위력이 탄속에 반비례하는 경향이 강했다. 해당 75mm 포는 야포 기반이라서 필요한 작약량을 확보하면서도 탄속도 적절한 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었고, 따라서 4호 전차처럼 단포신/장포신 주포를 떼었다 붙였다 하며 파생형을 만드는 삽질을 할 필요가 없었다. 후기형 셔먼이 사용한 76mm M1 주포의 고폭탄 역시 작약이 75mm 고폭탄의 2/3에 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