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함대
1. 개요
'''88함대'''
'''八八艦隊''' (はちはちかんたい) / '''Eight-Eight Fleet'''
일본 해군의 대규모 건함계획.
2. 상세
전함 8척과 순양전함 8척을 건함하고 예비용으로 구형 전함 8척과 장갑순양함 8척을 유지하며 이들로 이루어진 주력함대를 증강하려는 계획.
이 16척에 포커스가 주어지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이를 통해 일본해군 자체의 시스템을 재구성하는 장대한 계획이었다. 그때까지의 일본 해군은 최신예함을 꽉꽉 채워넣은 1함대, 비교적 구형함인 2함대, 청일전쟁에서 노획한 배를 포함해 어쨌건 모아둔 3함대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88함대계획을 통해 압도적인 화력과 방어력을 갖춘 1함대, 고속성과 전투력을 겸비한 2함대, 야간전 외에는 별로 생각하지 않은 대규모 어뢰투사용 구축함 전대인 3함대로 개편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배가 크면 세다는 수준이 아니라 미해군은 파나마 운하를 통과하기 위해 배의 크기가 제한된다는 점을 감안하여, 기술적 측면에서 우위를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다[1] . 특히 함대별로 미국 함대보다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전술적으로 실수를 저지르더라도 복구의 가능성이 높은 등, 대놓고 태평양 최대의 적인 미국 태평양함대를 압도하기 위한 계획이었다.
하술하겠지만 이를 위해서는 막대한 예산이 필요했고, 88함대계획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한[2] 88함대물어에 따르면 그 예산은 '''88함대를 만드는 것 만으로 끝없이 총력전'''이라고 한다.
3. 배경
당시 일본은 러일전쟁이 끝나고 반드시 배상금을 받아내야 하는 입장에 처해 있었다. 청일전쟁으로 얻은 배상금 다 날리고 빚까지 얻어 써야 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는 미국과 영국의 막대한 전쟁채권 구입이 러일전쟁 수행의 근원이었고, 이는 영미의 극동에서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세계정책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국내 사정으로 전쟁을 못 한 것 뿐이지 진 게 아니라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배상금을 얻기도 쉽지 않았다. 일본도 어떻게든지 배상금을 받아내려 했으나 러시아가 협상하기 싫으냐며 거부하자 일본도 더이상 전쟁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배상금을 받지 못해도 협상을 하라는 명령을 일본 대사에게 이르게 된다. 결국 일본 내부에서 문제가 발생한다.[3] 그 문제로 인한 폭동[4] 을 진압하고 러시아도 이긴 군부의 입김이 세졌으니, 육군의 경우는 17개 사단을 25개 사단으로 늘리고, 해군의 경우가 바로 이 88함대이다. 사실 처음은 84함대로 시작해 86함대 88함대 순으로 목표가 점점 늘었다.
4. 구성
- 예비함
- 구형 전함 - 공고급 순양전함 4척, 후소급 전함 2척, 이세급 전함 2척
- 순양함 - 아사마급 장갑순양함 2척, 야쿠모급 장갑순양함 1척, 아즈마급 장갑순양함 1척, 이즈모급 장갑순양함 2척, 텐류급 경순양함 2척
5.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1차 대전 이후 영국은 각국에 해군 군축을 제의하게 되고 여기에 미국이 동참하고 각국의 이해 관계가 맞아 떨어져[5] 해군 군축조약이 체결되게 된다. 그리고 조약에 의하여 88함대의 계획은 끝나게 된다. 카가와 아카기는 항공모함으로 개장되었으며 아마기, 토사, 타카오, 아타고는 해체되었고 이중, 타카오와 아타고는 이름을 타카오급 중순양함에 넘겨주었다. 키이급 전함과 13호급 순양전함은 공중분해됐다...[6] 그저 안습.
6. 현실성
전함과 순양전함을 합쳐서 16척이라는 전력은 분명히 강력한 전력임은 사실이다. 그러나 일본의 국력은 이러한 대규모 함대를 건조, 운용하기에는 무리가 많았다. 이전부터 군사력을 키운다고 국가예산의 30~40%를 군사비로 밀어넣는것이 현실이었다. 참고로 미국이 Naval Act of 1916에서 전함 10척+순양전함 6척을 건조하는 계획을 세웠는데[7] 이것도 부담스럽다고 그나마 감당할 만한 수준으로 줄인거다. 이것도 미국이어서 16척이 감당할 만한 수준이지, 재정난에 허덕이던 일본이 주력함 16척을 온전히 확보할 수 있었을까?
간단히 비교를 해보면 당시 대영제국, 독일 제국, 미국이 경제력이 좋았는데,[8] 영국과 독일의 건함 경쟁은 경제에 큰 부담을 주었다.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을 기준으로 취역한 군함의 수를 따져봤을때, 영국의 경우 드레드노트급 10척, 슈퍼 드레드노트급 12척(+5척)[9] 에 순양전함 10척[10] 로 프리 드레드노트를 세지 않아도 가장 규모가 큰 해군을 보유하고 있었다.[11] 한편 제2의 해군국이었던 독일 제국은 드레드노트급 13척(+4)[12] , 순양전함 4척(+3)[13] 으로 슈퍼 드레드노트급은 부재하지만 튼튼한 방호력을 자랑해서 영국과 맞설 수 있었다.[14] 마지막으로 뒤늦게 전쟁에 참여한 미국의 경우 드레드노트급 8척, 슈퍼 드레드노트 6척(+3)[15] 으로 제일 수가 적지만, 전쟁에 늦게 참여해서 상대적으로 더 우수한 설계를 가진 전함을 보유하고 있었다.
한편 일본은 드레드노트급 2척, 순양전함 2척을 보유하고 슈퍼 드레드노트급 2척과 순양전함 2척을 건조하고 있던 상황이었다.[16] 당시 프랑스가 제1차 세계대전때 해군 전력이 드레드노트급 4척에 슈퍼 도레드노트급 (+3)척[17] 을 보유하고 있는 수준이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일본 해군의 주력함 수는 결코 적은 것이 아니였다. 이 숫자마저도 제1차 세계대전에 적극적으로 참전은 안해서 느긋히 건조 가능했다는 것도 잊으면 안된다. 러일전쟁때 일본 해군보다 규모가 컸던 러시아 제국 발트 함대를 생각해보면 러시아가 일본보다 가난해서 대전(大戰) 전에 드레드노트급 7척만 보유했겠는가?(물론 전쟁으로 재정이 악화되긴 했다.)
당시 일본의 경제는 이미 한계에 도달했다. 러일전쟁으로 엄청나게 큰 빚을 가지게 되었고 과거 프리드레드노트급과 다르게 드레드노트, 슈퍼 드레드노트급의 건조 비용은 너무나 비쌌다. 그와중에 나가토급 전함으로 시작해서 88함대를 건조하는 것은 이미 국가역량을 벗어났다. 막 근대화를 한 일본은 서유럽과 같은 부유한 나라도 아니였고 일본의 식민지는 부를 늘리기 좋지 않았다. 타이완 경영은 성공적으로 나름 짭잘한 돈을 벌긴 했지만, 타이완의 경제규모는 작고 조선은 34년 11개월동안 '''단 한번도''' 흑자를 내본적이 없는 곳이었다.
어떻게보면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으로 건함을 제한되었기 때문에 일본 제국이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일으킬 수 있을 능력이 생긴걸지도 모른다. 실제로 1920년 일본의 총군사비/GDP의 수치는 5.86%로 정상적인 국가에서 나올 수치가 아니다. 정말 88함대를 강행했으면 일본이 건조비용 + 유지비용으로 전쟁을 수행하지 못했을지도.
6.1. 해상자위대의 명칭 계승
거함거포주의에 입각한 88함대 개념 자체는 거함거포주의의 몰락과 함께 완전히 사장되었지만 현 일본 해상자위대는 현대적인 개념의 88함대 개념을 정립하고 이를 기반으로 각 호위대군의 전력을 구축하고 있다. 이전의 8척의 전함과 8척의 순양전함 8척 개념에서, 호위함[18] 8척과 대잠헬기 8기 개념으로 변모하였다. 구성만 바뀌었을 뿐 88함대라는 명칭 자체는 계승된 것이다. 현재 일본 해상자위대 1개 호위대군은 1척의 헬기모함(DDH), 2척의 이지스구축함(DDG), 이하 호위함 5척(DD)에 8기의 대잠헬기 운용을 목표로 전력을 구축했거나 구축하고 있는 중이다. 궁극적으로 이지스급 방공망을 갖춘 4개의 호위대군과 대잠헬기 10기 이상의 대잠전력을 갖춘 지방대 4개를 확보하여, 일본의 국익이 관련된 어느 해역에라도 자위대를 파견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정책의 일환.
2000년대 열심히 해군을 강화하던 한국도 이걸 모방해서 66함대라는 개념을 자주 들고나왔고 이시기 나온 밀리터리 소설들에도 그 흔적이 짙게 남아있다. 2000년대에 바라보던 것과 안보환경이 크게 달라지고 해군력이 증강된 2010년대 후반부터는 거의 잊혀졌다.
7. 기타
기동전사 건담 시리즈 역습의 샤아에서 지구연방군의 우주 주력군인 88함대도 여기서 명칭을 따온 걸로 보인다. 샤아의 반란 시기에는 각 콜로니의 반정부 폭동 및 진압을 의식해서 분산 배치 되어 있어, 5th루나가 지구연방군의 총사령부가 있는 라싸에 떨어지는 와중에도 주력군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이렇다할 활약을 못하고 있었다. 이후 작 종반 첸 아기의 죽음과 동시에 그녀의 의지와 사념이 우주로 퍼지면서, 론도 벨을 돕기 위해 출격, 액시즈의 낙하를 막는데 도움을 준다.
8. 둘러보기
Z 계획- 나치 독일의 대규모 건함 계획이다.
[1] 가공전기 중에는 루즈벨트 대통령이 대공황 대책으로 뉴딜을 하면서 파나마를 확장한다는 작품도 있다. 그것만으로 일본 해군이 멘붕하고 기존 계획이 몽땅 날아가 군의 정치력이 꺾인다는 이야기.[2] 개인이 연구한 내용이기는 하다[3] 당연하다. 막대한 군비를 들이고 수많은 사상자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승리했다고 떠들던 일본 정부와 군부가 발표했지만, 배상금도 없고 영토할양도 고작 북위 50도 이남의 사할린과 연해주 연안의 어업권에 불과한 극히 일부였다.[4] 이 폭동은 뒤에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근원이 되기도 했다.[5] 일본의 경우 당시 총리였던 하라 타카시가 군부를 견제하기 위하여 받아들였다.[6] 그나마 키이급 전함은 이후 야마토급 전함 4번함 111번함 계획으로 부활하지만, 그마저도 예산부족으로 건조 중에 취소되어 버렸다.[7] 콜로라도급 전함 4척, 사우스다코타급 전함#s-1 6척, 렉싱턴급 순양전함 6척.[8] 프랑스도 경제규모가 크지만 해군은 작은 편이어서 제외.[9]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 1번함 퀸 엘리자베스를 제외하면 슬슬 전시체제에 들어가는 1915년~16년에 취역한다. 아예 전쟁중에 건조한 리벤지급 전함은 제외[10] 리벤지급과 마찬가지로 전쟁중에 건조한 리나운급 순양전함은 제외[11] HMAS 오스트레일리아(Australia)-1911-와 같은 영연방 소속 군함도 포함했다.[12] 쾨니히급 전함. 쾨니히급은 전쟁 직후 취역하게 된다.[13] 데르플링거급 순양전함. 다만 3번함 힌덴부르크는 설계 변동으로 취역이 1917년에 이루어져 유틀란트 해전에도 참가하지 못했다.[14] 참고로 독일은 14인치 이상의 거포 개발이 늦어져서 독일 최초의 슈퍼 드레드노트급은 바이에른급 전함이다.[15] 뉴멕시코급 전함. 테네시급 전함과 콜로라도급 전함은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이후에도 완공이 안되었으니 제외[16] 카와치급 전함 2척, 공고급 순양전함 공고, 히에이. 건조중이었던 함들은 후소급 전함과 공고급 순양전함 하루나, 기리시마. 이세급 전함은 1915년부터 건조했다.[17] 브르타뉴급 전함. 프랑스의 고질적인 느린 건조 속도로 전쟁 후반에 취역한다.[18] 사실상 구축함 및 헬기항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