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니비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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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아프리카에 위치한 국가. 수도는 비사우(Bissau)로 국명도 수도에서 따왔다. 비슷한 이름의 기니나 적도 기니와는 기니 만에 위치한 국가라는 공통점이 있다.[1]
국토 면적은 36,125㎢로 대만 면적과 거의 비슷하나, 아프리카에선 가장 많은 90개에 달하는 섬을 가진 국가이기도 한다. 거주 인구는 1,726,170명 (2015)이다.
2. 언어 및 종교
공용어는 포르투갈어이지만 프랑스어 역시 주요 외국어로 지정되어 있으며 포르투갈어 사용국 공동체의 회원국이자 프랑코포니의 정회원국이다. 그리고 포르투갈어 크레올도 쓰이고 있다. 그외에도 만딩카어를 포함한 소수민족의 언어들도 쓰이고 있다.
종교는 이슬람 50%, 토착 신앙 40% 기독교 10% (2012)이다.
3. 역사
포르투갈 최초의, 그리고 최초로 독립한 해외 식민지였다. 포르투갈인들은 이 곳을 기점으로 노예 무역을 했다.
그러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범아프리카 민족주의의 영향으로 아프리카 각국이 독립하면서 식민지 독립운동의 분위기가 고조되기 시작했고 1956년에 독립운동 단체 기니비사우-카보베르데 아프리카 독립당(PAIGC)가 결성되어 1963년부터 PAIGC의 지도자였던 아밀카르 카브랄과 바다 건너 포르투갈의 식민지 해외령이였던 카보베르데의 독립운동가였던 아리스티드스 마리아 페레이라(Aristides Maria Pereira)[2] 등의 지휘아래 대포르투갈 무장 투쟁을 전개하면서 장기간에 걸친 독립전쟁이 일어나 같은 시기였던 1960, 70년대 당시 식민지 독립전쟁이 전개되었던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식민지였던 앙골라, 모잠비크와 함께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의 3대 전선이 되었다.
그러나 지리적으로 인접해있었던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로디지아 등 소수 백인계 정부가 지배하던 남부 아프리카의 고립국가들이 포르투갈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을 하며 역내 외세 국가의 지원 하에 파죽지세로 식민지 독립군 단체들을 압살하던 포르투갈군과 불리하게 싸웠던 모잠비크, 앙골라의 독립전쟁과는 달리[3] 이 나라의 독립 전쟁은 모잠비크와 앙골라에서 포르투갈의 식민지 유지를 지원했던 남아공조차도 자국과도 거리가 먼 서아프리카에 위치해 있었는데다 거리가 가까운 모잠비크, 앙골라와 달리 굳이 이 곳까지 포르투갈의 식민지 체제 유지를 도와줘야 할 명분이 없었기에 남아공은 기니비사우에서는 포르투갈을 지원해주지 않고 오히려 외면을 해버리면서[4] 당시 포르투갈은 기니비사우에서는 매우 불리하게 식민지 독립군과 싸웠다. 더욱이 기니비사우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던 기니와 세네갈 등 이웃한 서아프리카 국가들과 중국, 쿠바, 체코슬로바키아, 소련 등 공산주의권 국가들이 PAIGC를 적극적으로 지원해준 덕에 PAIGC 독립군 세력들은 전쟁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고, 포르투갈군들을 대거 밀어내어 전세에서 승기를 굳히면서 1974년 카네이션 혁명으로 식민지 유지를 고집하던 포르투갈 제2공화국 정부를 무너뜨리고 수립한 포르투갈 신정부로부터 독립을 인정 받았다. 포르투갈의 카네이션 혁명과 6, 70년대 독립전쟁 당시 독립을 지원했던 세네갈과 기니 등 아프리카 이웃나라들의 도움도 얻은 편이지만, 그들 스스로의 독립 투쟁 의지 역시 크게 좌우했다. 불행히도 정작 지도자인 아밀카르 카브랄은 기니비사우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독립전쟁이 한창이던 1973년에 암살당한다. 그 뒤 같이 투쟁을 한 같은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대서양 섬나라인 카보베르데와 통합하려 했으나, 여러가지 문제들로 무산되었다.
유럽의 식민지배에서 독립한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들이 그렇듯이, 독립 이후에 무수한 쿠데타에 시달렸다. 1980년에 사회주의자 주앙 베르나르두 비에이라(João Bernardo Vieira)의 군사 쿠데타로 초대 대통령이었던 루이스 카브랄(Luís Cabral)이 축출되었다. 1998년에는 비에이라 정권에 불만을 품은 군 참모총장 안수마느 마네(Ansumane Mané)의 반란으로 아예 내전이 발발하였다. 내전은 1999년 2월에 끝났으나 이에 책임을 지고 비에이라가 하야하면서 사회주의 세력이 주도하던 시대가 끝나게 된다.
이후 2003년에 군 참모총장이었던 베리시무 코헤이아 세아브라(Veríssimo Correia Seabra)의 쿠데타가 일어나 당시 대통령이었던 쿰바 얄라(Kumba Yalá)는 축출. 2009년에는 축출되었다가 2005년에 재당선한 비에이라가 군부 세력에게 피살되기도 했다.
2008년 5월에 기니비사우에서 콜레라가 발생해 1만2천220여명이 감염됐고, 그 가운데 201명이 숨졌다고 유니세프가 밝혔다.#
2009년 6월 5일에 대선 후보가 피살되는 일이 발생되었다.# 2010년 4월 1일에 쿠데타 시도가 발생되었다.#
2012년 4월에 또다시 쿠데타가 일어나 정부 요인들이 구금되기도 했다. 정치적인 혼란 때문인지 이 나라는 현재 코카인 밀수의 근거지로 여겨진다.
2012년 1월 9일에 기니비사우의 말람 바카이 사나 대통령이 파리의 한 병원에서 사망했다.#
2012년에 쿠데타가 일어나자 아프리카 연합 회원국 자격이 정지되었다.# 쿠데타가 일어나자 서아프리카평화유지군이 파견되었다.#
쿠데타가 일어난지 2년만에 기니비사우의 새 대통령에 호세 마리오 바즈 전 재무장관이 당선됐다.#
2015년 3월 8일에 기니비사우에서 어린이를 납치해 세네갈로 보낼려고 했던 인신매매조직이 체포되었다.#
2015년 8월 3일(현지시각) 기니비사우 북부의 카충고에서 건물이 붕괴돼 11명이 사망했다.#
2020년 1월 1일에 기니비사우 선거관리위원회는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 지도자인 우마로 시소코 엠발로가 당선되었다고 발표했다.#
4. 인구 및 종족
종족구성은 만딩카족을 포함한 아프리카 흑인이 대부분이며 그 외 포르투갈 식민시절 후손격의 포르투갈계 백인과 물라토 등의 인종이 거주한다. 인구는 1,628,603명 정도로 추산되었다.
포르투갈의 식민지 지배를 겪었던 앙골라, 모잠비크와 마찬가지로 포르투갈 식민지배 시절까지는 포르투갈인들 일부가 이 곳으로 이주하였으나 독립 이후 대부분 모국으로 돌아가게 되어서 현재 백인은 극소수에 불과한 편이다. 그나마 앙골라와 모잠비크는 석유와 천연가스를 기반으로 경제 성장을 하여 과거 식민지 독립 이후 포르투갈로 떠났던 포르투갈계 백인들이 옛 식민지배국이었던 포르투갈이 경제위기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하면서 다시 이들 국가들로 일자리를 찾으러 취업 이민을 오기라도 하고 있지. 여전히 경제적으로 가난한 최빈국인 기니비사우에는 이민을 오지 않고 있다.
5. 행정구역
기니비사우는 8개 주와 1개 자치구로 구성되어 있다.
- 가부 주
- 바파타 주
- 볼라마 주
- 비사우 자치구
- 비옴부 주
- 오이우 주
- 카셰우 주
- 키나라 주
- 톰발리 주
6. 경제
기니비사우는 세계 최빈국에 속하는 나라 중 하나이다. 경제의 대부분을 1차 산업인 농업 및 어업[5] 에 의존하고 있다. 주요 생산물은 땅콩, 캐슈넛, 어류이며 땅콩과 캐슈넛은 주요 국외 수출품으로 수출하여 로열티 획득에 기여한다.
7. 국내 상황
기니비사우는 포르투갈의 식민지였고 1956년 기니비사우·카보베르데 독립아프리카당이 결성되어 무장 게릴라전을 전개하여 1974년 9월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하고 유엔에 가입했다. 쿠데타와 내전의 역사가 반복되면서 마약 밀매 거점 국가로 전락한 상태이다. 세네갈 출신 난민들도 여기에 거주하고 있다. 현재 기니비사우군과 경찰을 총동원하여 마약 밀매단들과 전쟁을 선포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게다가 작년부터 목초지 파괴가 급격하게 심해져, 사하라 확장의 첫 피해국이 될 것으로 예상되고, 바닷가 어류도 빠른 속도로 감소중이다.
8. 외교
9. 국가
우리의 사랑스러운 조국(포르투갈어: Esta É a Nossa Pátria Bem Amada)는 기니비사우의 국가이다. 초대 대통령이었던 아밀카르 로페스 카브랄(Amílcar Lopes Cabral)이 작사했고, 중국인 작곡가인 샤오허(晓河)가 작곡을 하였다.
10. 스포츠
포르투갈의 영향으로 축구가 그나마 인기 있다. 기니비사우 축구 국가대표팀 문서 참조.
유로 2016에서 프랑스를 무너뜨린 포르투갈 축구 국가대표팀의 에데르는 기니비사우 출신이다.
우리나라의 K리그 클래식의 울산 현대와 제주 유나이티드에서 활약한 공격수 프레데릭 멘디 또한 기니비사우 출신이다.
현 바르셀로나 최고 유망주인 안수 파티가 이 나라 출신이다.[6]
11. 언어별 명칭
[권위주의] 2.63점[코로나19]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인한 여행경보[1] 역시 비슷한 이름의 국가인 파푸아뉴기니는 단지 그 곳에 진출한 유럽인들이 기후와 사람이 기니 지역과 비슷해보인다고 뉴기니로 부른 게 시초.[2] 후일 카보베르데가 포르투갈의 식민지 지배에서 독립하자 카보베르데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3] 심지어 앙골라는 당시 내부적으로 앙골라인민해방운동(MPLA), 앙골라민족해방전선(FNLA), 앙골라전면독립연맹(UNITA) 등 독립운동을 주도하던 독립운동 저항군 단체들마져도 분열되어 있었다. 결국 앙골라가 1974년 카네이션 혁명 이후 포르투갈로부터 독립을 하게 되자 이들은 신생국가의 정치적 주도권을 잡기 위해 3개 파벌들로 나뉘어 피 흘리는 내전을 벌였다.[4] 모잠비크와 앙골라는 남아공과도 거리가 가깝고 포르투갈 식민지에서 독립할 경우 흑인들이 주도하는 흑인계 정부가 들어서 남아공내 다수 흑인들이 더더욱 격렬하게 저항하여 소수 백인들이 지배하는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에 악영향이 미치게 될 가능성이 높아 백인계 국가인 포르투갈의 식민지 지배를 도와주는 것이 이득이었지만(결국 1970년대 말과 80년대 초에 모잠비크와 앙골라가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하고, 로디지아의 백인 정권마져 권력을 잃고 흑인국가인 짐바브웨로 독립되자 아파르트헤이트 흑백 차별 정책을 통한 남아공의 백인 정권 체제는 1980년대에 가면서 빠르게 약화되었다.) 기니비사우는 거리가 먼 서부 아프리카에 위치해 있었기에 남아공으로서는 미치는 악영향이 거의 없었다.[5] 아프리카에서는 흔치 않은 열도(섬 개수 88개)를 가진 국가로 식생활에 수산물 의존도가 높은 편이다.[6] 국가대표팀은 스페인을 선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