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학길
1. 소개
前 롯데 자이언츠 소속의 투수.'''사람들은 저를 고독한 황태자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롯데 팬분들이 계셨기에 전 고독하지 않았습니다'''.
2. 플레이 스타일
염종석과는 반대로 혹사당하면서도 굉장히 장수한 타입이다.
체격 조건이 워낙에 좋았던 데다가 투구폼이 무리가 없었고 완급 조절에 능했던 것이 그 이유라고 한다. 맞춰잡는 타입이라고 하지만 실제 전성기의 윤학길은 상당한 수준의 강속구를 던졌으며 세 자리수 삼진을 어렵지 않게 기록하는 투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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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구 동작이 매우 간결하여 야구 모르는 사람이 보면 굉장히 쉽게쉽게 던진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 간결한 투구동작 덕택에 100개 이상을 투구해도 구위 저하가 거의 없었다. 선수시절 그의 독보적인 완투 능력을 뒷받침했던 비결인 셈.
플레이 스타일은 커맨드가 좋은 강속구 투수에 가까운 형태였다. 아마 시절에는 당연히 강속구로 유명했고 프로에서도 꽤나 혹사를 당하면서도 평균 140kn대 초반의 속구를 계속 뿌릴 수 있었다. 속구 최고 구속은 140km대 후반까지도 나왔고 슬라이더도 컨디션이 좋을 때에는 130km대 초중반을 찍기도 했던 파워피쳐에 가까운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절대 제구도 나쁘지 않았다. 코너웍에 능했으며 무엇보다 전반적인 공의 탄착점도 낮은 편이었다. 경기 초반부터 윤학길의 공이 낮은쪽 스트라이크와 볼의 경계로 날아가면 그 날은 분명히 호투하는 날이었다. 물론 영점이 잡히지 않는 경우도 있었고 이런 날은 어김없이 난타.
현역 시절 몸이 늦게 풀리는 투수로도 유명했다. 초반 3이닝만 잘 버티면 그날은 거의 완투나 완봉이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 역시 많은 이닝을 던지기 위한 완급조절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투구수 절약에도 굉장히 뛰어났는데 보통은 130구 이내로 완투를 하는 편이었다.
100완투는 선동열도 하지 못했던 기록[3][4] 으로, 그래서 통산 완투 부문 1위에 올랐다. 75승을 완투승으로 따냈다. 20승으로 완봉승 2위[5] 에 올랐다. 당연히 이닝도 많이 소화해서 통산 1,863⅔이닝이다.
덤으로 윤학길은 통산 308경기를 출전했는데, 이 중에 구원으로 등판한 경기도 상당수라 선발 등판 횟수는 총 231회이다. 즉 231회를 선발 등판해서 100완투를 했다는 건데 대충 때려맞추면 '''두 경기 중 한 경기는 무조건 완투'''라는 소리다. . 유난히 1회에 실점이 많지만 이닝이 지날수록 안정감이 높아지는 투수라며 '''1회만 버티면 완투'''라는 별명도 갖고 있었다.
만약 혹사의 부담에서 충분히 벗어날 수 있었다면, 선동열과 더불어 90년대 크보에서 가장 위력적인 투수로 기억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3. 선수 경력
4. 지도자 경력
은퇴 후 롯데, 한화, 히어로즈 등에서 코치를 역임했으나 처참한 기량만 보여 주며 계속 떠돌았다.
양상문, 이상군, 정민태 등의 화려한 삽질에 묻혀 있어서 그렇지, 여태껏 제대로 키운 투수가 거의 없는 크보 최악의 막장 투수코치 중 한 명이다.[6]
하지만 야구 코치의 역량을 팬들이 알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코칭 모습을 실제로 볼 수도 없고, 특별히 기사가 나오지도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20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꾸준히 여러팀을 거치며 코치 커리어를 이어가는 점을 비춰볼 때 현장에서는 코칭 능력을 어느정도 인정 받고 있다고 보는 편이 합리적이다. 프로야구단은 자선단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선수시절의 화려한 경력과 기나긴 코치 경력에도 불구하고 단 한번도 감독 물망에 오른 적이 없다는 것은 그의 코치로서의 역량이 가진 한계 역시 보여준다고 미뤄 짐작할 수 있다.
4.1. LG 트윈스 1기 시절
2009년 8월 30일 LG 트윈스의 투수코치로 영입되었다. 정작 LG의 프랜차이즈 투수였던 김용수는 스카우트로 갔다.
그리고 윤학길은 결국 투수 한 명도 제대로 못키우고 2010 시즌 후 LG와 재계약에 실패했으며, 박종훈 감독과 나름 인연이 있는 최계훈을 새로운 투수코치로 불렀다.
4.2. 롯데 자이언츠 2기 시절
2010년 10월 21일, 롯데의 새 코치를 맡는다는 기사가 나왔다. 롯데팬들은 기껏 양상문을 피해서 좋아라 했는데 그렇게 사람보는 눈이 없나라고 생각했는데 맡은 직책은 투수코치가 아닌 수석코치였다.
선수 시절만 해도 미칠듯한 완투 퍼레이드와 미친 존재감으로 각인되었는데 코치로서는 영 실적이 없다. 양상문, 이상군처럼 대형 사고를 친 적은 없지만 딱히 키웠다 할 선수가 없다. 한마디로 딱 욕먹지 않는 수준의 코치라고나 할까? 거기가 코치로서의 존재감은 오로지 공셔틀로만 기억되고 있다. 빵셔틀이 일진한테 빵 갖다주듯이 투수 교체할 때 공들고 셔틀노릇하는게 별명으로 남을 정도. LG코치일 때는 완투 능력이 병신인 LG 투수진 좀 이닝이터 만들어줬으면 하는 기대도 컸다. 윤학길 자신이 KBO 최고의 이닝 이터였으니 말이다.
2011년 새로 LG의 투수코치가 된 최계훈 투수코치의 성과 덕분에 2010년 LG의 투수코치였던 윤학길은 더더욱 비교가 돼서 까였다.
2012년에는 롯데 자이언츠의 2군 감독으로 보직을 옮겼다. 롯데 2군이 퓨처스 리그에서 막장 성적을 찍으며 역시 고도칸이라는 평가를 받다가, 박준서, 이정민 등 2군에서 콜업된 선수들의 포텐이 뻥뻥 터지며 재평가 분위기가 슬슬 돌았다.
그러나 역시 시즌 종료 후 롯데와 재계약하지 못했다. 이유는 2군 리그 꼴찌라는 성적 때문인 듯하다. 하지만 애초에 롯데 자이언츠 2군에 야수가 너무 부족했던 것과 NC 다이노스의 약진을 생각하면 다소 아쉬운 부분.
4.3. LG 트윈스 2기 시절
2014년 9월 30일 LG 트윈스의 2군 투수코치로 복귀하였다.
대부분 팬들의 반응은 노찬엽과 마찬가지로 왜 또 실패한 사람이 돌아왔느냐 하는 반응과, 이번에는 다르겠지라는 반응이 공존하고 있다.
하지만 역시나 2군이 주목을 못 받는 상황에 가려져서 그렇지, 비상식적인 투수 운용으로 인해 2군까지 가서 보는 몇몇 골수 팬들에게 비판받고 있다.
유원상의 경우 부상으로 인한 1군 말소임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 21명의 타자를 상대시켜서 삼진0, 볼넷0, 10안타로 피안타율 0.611의 환상적인 기록을 남긴 채 재활군으로 보내 버렸다.
이외에도 양상문 감독이 굴려서 관리가 필요하던 김선규도 환상적인 운용으로 결국 2군의 평범한 불펜 투수로 만들었다. 심지어 김선규의 경우 작년에 2군에서 0~1점대 방어율을 왔다갔다 하면서 2군을 씹어먹던 걸 생각하면 두 감독 코치의 행태는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김선규 2군 등판 기록 결국 2015 시즌 후 김선규는 2차 드래프트로 NC 다이노스에 끌려갔다.
물론 가장 이해가 안 되는건 이렇게 실패했던 전적이 있는 사람을 등용하는 프런트의 인사가 더 문제지만.
결국 2015 시즌 후 장광호 배터리코치와 함께 LG에서 해임됐다.
4.4. 한화 이글스 2기 시절
2017년 5월 30일 한화 이글스의 육성군 투수코치로 부임했다.
6월 14일 정민태와 자리를 맞바꿔 1군 투수코치로 승격되었다. 허나 부임 후 투수진의 성적과 팬들의 평가는 바닥을 치고 있다. 휴식을 주어도 불을 지르는 걸로 봐서 코치로서의 능력은 도저히 써먹을 수준이 여전히 아닌 듯. 롯데 팬들도 왜 굳이 가서 욕을 먹냐며 안쓰러워하고 있다.
그런데 한화가 코치진 22명 중 절반을 정리했는데도 정민태와 함께 살아남은 듯 하다.
사실 윤학길 코치가 시즌 중 할 수 있던게 많지 않았다. 5월 30일 영입되어서 6월 14일에 1군 투수코치로 빠르게 승격했는데 이 사이에 1군 선수단 전원과 2군 선수단에 대한 분석을 하기에는 역시 쉽지 않다, 마무리캠프와 스프링캠프를 모두 겪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선수가 어떤 스타일인지 파악을 못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비난의 화살이 윤 코치로 몰리는 이유는 역시 6-7-8월 투수진의 대붕괴 때문이다. 투수코치는 무엇을 했느냐 하는 것. 그때의 한화 투수는 누가 나와도 좋지 않은 모습을 보였을 것을 감안하면 까이는 강도는 상당했던 편. 물론 답이 없던 투수진의 1차 원인을 아는 일부 팬들은 딱히 까지 않고 그저 재계약 불가 정도의 입장.
정확한 능력 평가는 2018시즌에 본격적으로 들어갈 것이다. 항간에 의하면 2년 계약을 했다는 이야기. 그 추측이 맞았는지 2017 시즌이 끝난 뒤 보직이 육성군 총괄코치로 강등됐다.
5. 고독한 황태자
5.1. 최동원과의 비교
면면히 살펴보면 통산 기록, 92 한국시리즈 우승에 기여한 업적 등, 최동원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 면모를 가지고 있다. 장기간의 팀 기여도 측면에서는 오히려 최동원을 능가한다고 평가할 수 있을 정도. 통산 WAR는 최동원이 윤학길보다 조금 더 높긴 하지만.
FIP 랭킹으로 봤을 때 통산 FIP가 500이닝 기준 15위, 1,000이닝 기준 8위, 1,500이닝 기준 3위다. ERA 랭킹은 그보다 훨씬 떨어지는 것을 생각해보면 수비의 도움을 별로 받지 못했지만, 투수 자체의 실력은 굉장히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FIP+ 랭킹도 상위권. 그렇다고 최동원보다 높다는 얘기는 아니다. 최동원의 FIP은 500이닝 기준으로도 3위.
최동원과 비교될 때 결정적으로 차이가 나는 것은 한국시리즈 우승 과정인데, 1984년 우승을 최동원 거의 혼자서 책임지다 시피했다면 1992년 우승은 윤학길과 염종석, 박동희 세 명이서 골고루 나눠서 책임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1984년과 92년 한국시리즈는 구조적으로 차이가 있는데, 84년의 경우 전기리그와 후기리그 우승팀이 바로 7전4선승제로 맞붙게 되어있다. 즉 한국시리즈 7경기가 포스트시즌의 전부라는 얘기다. 게다가 당시에는 정규리그가 끝나고 무려 한달 이상의 충분한 휴식을 취한 후 한국시리즈가 시작되었다.
반면 92년의 경우 시즌 종료와 함께 시작된 포스트시즌에서 롯데는 준플레이오프부터 한국시리즈까지 단계적으로 올라오며 포스트시즌을 치뤘다. 때문에 92년의 경우 84년과 같이 단 한사람의 활약만으로 우승하는 것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했다. 92년의 경우 최동원처럼 하루 걸러서 등판하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주력 투수들은 두경기 정도 휴식 후 등판하는 경우가 많았다.
5.2. 당대 롯데 마운드의 한계와 윤학길의 가치
프로야구 초창기인 1980년대의 롯데는 페넌트레이스 1위를 못 해서(…) 포스트시즌이나 한국시리즈를 못가서 그렇지 성적은 나쁜 편이 아니었고, 당시 롯데는 '''투수 왕국'''[7] 이라는 별명이 붙어있었다.
선동열을 제외하면 80년대 중후반의 국가대표 우완 에이스 계보는 거의 롯데 투수들이 이어받았다. 최동원은 말할 것도 없고, 윤학길도 선동열에 가린 면이 있으나 국가대표 에이스였다. 박동희는 아마 시절의 재능이 선동열, 최동원을 넘어선다는 평가를 들었던 선수이니 당연히 국가대표 에이스다. 이 계보는 90년대에까지도 일정 부분 이어져서 문동환, 손민한등도 국가대표 우완 에이스였다.
하지만 윤학길이 데뷔했을 때에는 황제 최동원이 아직 선수생활을 하고 있었고 1988년, 다승왕에 올랐지만 최동원급의 위력을 보이지는 못 했기 때문에 당시 롯데팬들에게 에이스로는 어딘가 모자라다는 평가를 받았다. 최동원의 은퇴 이후에는 박동희가 역대 신인 최고 계약금을 받고 데뷔했고, 당연히 롯데팬들의 관심도 박동희에게 쏠렸다.
게다가 선수 시절 내내, 윤학길은 한용덕, 이강철등과 더불어 선동열에게는 결코 미치지 못 하는 2인자 그룹에 있었다. 2년 연속 17승을 올리면서 팀을 우승으로 이끈 1992년에도 팬들과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는 신인 염종석에게 돌아갔다. 별명대로 줄곧 고독한 황태자였던 것.
이 부분은 윤학길의 비극이자 롯데의 문제점이었다. 많은 이들이 롯데와 투수왕국이라는 표현이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는 이유중 대표적인 것은, '''롯데의 팀 투수력 전체가 강한 것이 아니라 롯데의 에이스가 강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롯데에 있어서 굉장히 이질적인 존재인 제리 로이스터 감독[8] 이 취임하기 이전의 롯데 자이언츠 에이스 계보는 최동원 - 윤학길 - 박동희 - 염종석 - 주형광 - 문동환 - 손민한으로 이어진다. 이중에서 선동렬과 함께 역대 최강으로 꼽히는 최동원을 제외하더라도 나머지 투수들의 전성기 활약상은 리그의 지배자라고 하긴 힘들어도 그 누구에게도 밀리지는 않았던 투수들이다. 문제는 '''윤학길을 제외하면 이 선수들의 전성기가 겹치는 시기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최동원이 롯데를 떠날 때가 되어서야 윤학길이 빛을 봤고, 박동희와 염종석, 특히 문동환[9] 은 전성기가 극히 짧았다. 손민한은 부상과 여러 사정으로 전성기가 미뤄졌고, 그 사이에 문동환이 급격한 하락세에 들어가고 주형광이 방전되고 만다. 참고로 염종석, 손민한, 주형광은 부산고에서 각 1년씩의 선후배다. 즉, 염종석이 3학년일 때 손민한이 2학년, 주형광이 1학년이었다. 그런데 이 세 선수가 롯데에서 동시에 제 실력을 같이 발휘한 해는 단 1년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전성기가 겹치는 유일한 인물이 윤학길이다. 윤학길만이 최동원과 1년을 뛰어봤고, 박동희와 염종석의 전성기와 하락세를 목격했고, 이후에는 주형광이 에이스로 올라왔다.[10]
이 부분이 답이 없는 것으로, 윤학길과 쌍두마차를 이룰만하다 싶은 투수가 나오면 이내 혹사의 후유증으로 성적이 떨어졌고, 다시 윤학길만 믿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런 투수들 중에서 3명 이상이 동시에 전성기급 기량을 선보인 유일한 시즌이 1992년으로 롯데의 마지막 우승이 있었던 시기이다.[11]
그리고 이 배경은 당연히 투수를 혹사시킨 것도 원인이지만, 롯데의 불펜진이 대대로 약했던 것도 원인이다. 과거 롯데의 계투라고 하면 기억나는 선수가 거의 없을 것이다.[12] 그나마 유명한 인물이 마무리 투수로 전업했던 시절의 박동희, 그리고 삼성에서 건너온 노장진이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불펜투수가 나눠서 이닝을 소화해야 하는 것을 선발 투수, 그것도 대부분은 에이스가 감당해야 했던 것이 롯데의 특징이다. 이것 역시 최동원 이래 반복되어 왔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롯데의 역대 코칭스태프, 특히 투수코치들이 책임을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윤학길이 많은 이닝을 소화해야 했던 것도 이런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친 윤학길을 내리고 대신 올릴 마땅한 계투가 없으니, 그냥 선발투수 윤학길이 끝까지 던진 사례가 많은 것이다.
윤학길은 포스트시즌이건 정규시즌이건 항상 로테이션을 지키면서 등판하여 충분한 이닝을 소화했던 투수다. 다만 1984년 한국시리즈의 최동원처럼 특정 대회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보여줄 정도는 못되었고, 그 결과 잦은 등판만큼 많은 패전을 당하기도 했다. 특히 포스트시즌에서 많은 패전을 뒤집어 쓴 덕택에 '윤학길은 큰 경기에 약하다'는 이미지가 박히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1991년 준플레이오프 최종전에서 구원등판해 역전 홈런을 두들겨맞으며 패전투수가 되어 팀의 탈락과 운명을 같이 했고, 1992년 한국시리즈 2차전에서는 9회말 구원등판해 막판 위기속에 간신히 승리를 확정짓는가 하면, 3차전에서 선발 등판해서 9이닝 5실점 완투패를 당하며 그 해 한국시리즈의 유일한 패전을 기록했다. 심지어 1995년 한국시리즈 최종 7차전에선 선발등판해서 아웃카운트 하나 못잡고 연속 3안타를 맞고 바로 강판되는 굴욕을 맛보며 팀의 우승 실패에 대한 책임을 통감해야 했다.
하지만 이러한 실패의 이면에 있었던 윤학길의 활약과 헌신을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1991년 준플레이오프 2차전에선 8이닝 무실점으로 선발승을 거두어 팀을 탈락 위기에서 구해냈고, 1992년에는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비가 내리는 가운데서도 호투해 팀의 선승에 공헌했으며, 최종 5차전에서는 승리투수로 롯데의 한국시리즈 진출을 견인했다. 1995년 한국시리즈의 경우 롯데 선발진이 전반적으로 큰 역할을 못 한 편이었지만, 윤학길은 3차전에서 9이닝 2실점으로 버텨냈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윤학길이 포스트시즌에서 패전을 기록한 경기들은 포스트시즌 탈락이나 한국시리즈 우승 실패 등 너무나 아픈 순간들이었기에, 그 이전에 윤학길이 보여준 호투는 묻히고 실패만 부각되어 '큰 경기에 약하다'는 편견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1984년 전설을 써내린 최동원, 1992년 시즌은 죽쒔으나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해낸 박동희, 그리고 마찬가지로 그 해에 데뷔하여 염라대왕이란 별명까지 얻을 정도로 맹활약한 신인 염종석, 1995 플레이오프 MVP였던 주형광에 비해 윤학길이 큰 무대에서 남긴 족적이 다소 미미할 수는 있지만, 대부분 자신이 맡은 경기에서 많은 이닝을 소화해 주었기 때문에 결코 약했다고 폄하할 수준은 아니다. 오히려 정규 시즌에서의 수많은 완투와 다수의 경기 출전 등을 감안하면, 포스트시즌에서도 변함없이 로테이션을 지키며 충실히 여러 이닝을 소화해준 것만으로도 그는 대단한 역할을 해낸 것이다.
윤학길 이후 시즌 최다 이닝을 경신해낸 롯데의 투수는 2015년의 린동원. 그것도 무려 22년 만이다.
6. 여담
- 슬하에 1남 1녀를 두고 있다. 이들 중 둘째인 딸 윤지수는 펜싱(사브르) 국가대표 선수로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 출전했으며 아시안 게임 단체전 금메달리스트(2연패), 세계선수권 단체전 은메달리스트, 아시아 선수권 개인전 금메달리스트이다.
- 울산 장생포 출신이었고, 그의 아버지가 포경선의 선주였었다. 윤학길은 이러한 배경으로 인하여, 어린 시절부터 고래고기를 즐겨 먹었다.
- 성적에 비해 상복은 없어서 1988년 최다승(18승)으로 다승왕을 따낸 정도가 최고의 기록이다. 심지어 구단으로부터의 대우도 인색했는데, 일례로 1993 시즌에 203이닝 12완투 4완봉 12승 12패, 평균자책점 3.01이라는 호성적을 올렸음에도 구단에서는 윤학길이 7,800만 원의 고액 연봉자로서 성적 부진을 이유로 연봉 재계약시 연봉을 깎으려 들었다. 윤학길은 12승 투수의 연봉을 깎는다는게 말이 되나며 항의했고 결국 2백만 원 인상으로 마무리했다. 1993년의 윤학길은 저 엄청난 이닝과 완투 횟수, 그리고 훌륭한 평균자책점에 비해 승운이 정말 따르지 않았던 시즌이었지만, 당시 외적으로 드러나는 성적만을 기준으로 이닝 소화 등의 팀 공헌도는 무시하며 연봉 삭감의 트집을 잡으려 했던 당시 프런트의 근시안적 태도에 부딪힌 결과였다.
- 롯데 팬덤에서 영구 결번 떡밥이 돌 때마다 아무런 논란 없이 모두가 인정하는 영구 결번 후보이다.
7. 연도별 주요 성적
8. 관련 문서
[1] 당시 경상남도 울산군.[2] 상무 입대와 1984 LA 올림픽 참가로 인해 입단을 보류한 듯.[3] 선동열은 통산 146승 중에서 절반인 73승이 구원승이다. 이는 선동열을 조커처럼 활용했던 김응용의 기용법 덕분이기도 하다.[4] 100완투가 대단해 보이지 않는 분들을 위하여 설명하자면, 10시즌 만에 100완투를 했으니 1시즌에 평균 10완투를 했다는 것인데, 이는 데드볼 시절에나 나올 만한 기록이다. 랜디 존슨이 22시즌만에 100완투를 했다는 걸 기억하자. 투수 분업화가 이루어진 이 시점에서는 나와서도 안 될 기록이다. 2000년대 후반에 그 이닝 잘 먹는다는 류현진도 한 시즌에 6완투가 최다 기록이다.[5] 1위는 선동열의 29승. 한참 후에 정민철이 20승을 거두며 공동 2위가 되었다.[6] 다만 정민태는 18시즌 직전 3시즌 연속 6점대(...)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한 송은범을 필승 셋업맨으로 고쳐내면서 평가가 조금 좋아졌고, 이상군과 양상문은 감독대행/감독으로서는 그래도 평은 괜찮은 편.[7] 부산 지역은 예부터 꾸준히 특급 투수들이 무더기로 나온 지역이다. 다만 롯데 에이스 계보를 보면 알수 있듯이 혹사로 인해서 선수 생활을 길게 이어가지 못한 경우가 많다. 이 외에도 레전드의 고향 충청도, 현재 초강세를 보여주는 인천 경기, 메이저리거들의 고향 호남지역을 빼놓을 수 없겠다.[8] 로이스터 감독을 통해서 롯데 팬들이 된 이들은 과거 롯데의 역사를 뒤져보면 당황할 수밖에 없다. 로이스터 감독 시기처럼 장타가 펑펑 터진 적도 없고, 손민한을 제외하면 에이스가 마땅치 않았다고 하지만 10승대 투수가 3, 4명씩 나온 적도 없다.[9] 1998년에 이어 1999년의 17승-ERA 3.28로 다승 3위-평균자책점(방어율) 4위의 반짝 활약을 했다. 이후 2000년 선수협 문제로 구단과 갈등을 빚어 성적이 하락한 후 이후 롯데에서 더는 예전의 위력을 보여주지 못했다.[10] 로이스터 감독이 부임해 롯데가 8888577을 탈출한 2008년 시즌에는 손민한, 송승준, 장원준이 시즌 10승을 거두면서 이번에야말로 뭔가를 보여주는가 했지만, 바로 다음 해인 2009년부터는 손민한이 내리막길에 들어섰고, 2009 시즌 14승으로 공동 다승왕에 올랐던 조정훈 역시 2011년 이후 부상으로 기나긴 재활을 하게 되었으며, 장원준 또한 군복무와 FA 자격으로 두산 베어스로 이적하게 되었다. 그나마 라이언 사도스키, 쉐인 유먼이 시즌 10승을 올리기도 했지만 이들은 어디까지나 외인 투수라는 점에서 원투펀치 이상의 선발진이 나오는 듯 하다가 꼭 누군가가 쇠락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11] 윤학길, 박동희, 염종석이긴 한데, 이때도 박동희는 전반기를 날리고 후반기부터 등판했기 때문에 정규시즌 성적은 결코 좋다고 하기 어려웠다. 단지 그 해 한국시리즈 MVP로 대표되는 포스트시즌의 대활약으로 인한 것이었다.[12] 박석진, 기론, 강상수 등이 있긴한데 모두 전성기가 짧았으며, 매년 4~5점대 방어율을 찍던 가득염이 그나마 유명한 편이었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을 생략한다. 그런데 강상수는 가끔 사람같이 던질때도 있었고, 2000년엔 커리어하이를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