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민(야구선수)

 



[image]
'''이름'''
이정민(李貞旼 / Jung-Min Lee)
'''생년월일'''
1979년 3월 2일 (45세)
'''출신지'''
부산광역시 영도구
'''학력'''
동삼초 - 경남중 - 경남고 - 동아대[1]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2002년 1차 지명 (롯데)
'''소속팀'''
'''롯데 자이언츠 (2002~2018)'''
'''지도자'''
롯데 자이언츠 잔류군 투수코치 (2019)
'''등장곡'''
Big Brothers Family - Yo! 어데고
1. 개요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2.2. 프로 시절
2.2.1. 2009 시즌
2.2.2. 2010 시즌
2.2.3. 호주 야구 리그
2.2.4. 2011 시즌
2.2.5. 2012 시즌
2.2.6. 2013 시즌
2.2.7. 2014 시즌
2.2.8. 2015 시즌
2.2.9. 2016 시즌
2.2.10. 2017 시즌
2.2.11. 2018 시즌
3. 지도자 시절
4. 플레이 스타일
5. 연도별 주요 성적
6. 여담


1. 개요


롯데 자이언츠 소속의 투수로, 현역시절 보직은 주로 중간계투로 뛰었다.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경남고 시절 1~2학년 때 우완 투수로 활동하다 3학년 때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타자로 출전하여 2점 홈런을 기록해 기여하였다. 실제 동아대 시절 우완 강속구 투수로 이름이 높았다.
이러한 활약으로 당시 부산 팜에서 가장 좋은 선수 중 하나로 뽑혔고 1차지명으로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했다.


2.2. 프로 시절


이정민이 처음 이름을 알린 것은 무명 시절이었던 2003년 시즌에 삼성과의 대구 원정 경기에서 이승엽의 56호 홈런을 맞은 투수로서였다. 이날 경기에서 이정민은 선발로 출전하여 호투를 펼쳤고 '''데뷔 후 첫 승리투수가 되었지만 간단하게 묻힘과 동시에 TV자막에는 단지 56호 허용투수'''로만 나왔다. 데뷔 첫 승을 축하받기는커녕 대기록의 희생양이 된 채 이승엽의 홈런 얘기만 나오고 묻혀버렸으니 그야말로 안습의 절정. 왜냐하면 이때는 2002년 한일 월드컵 열기로 인해 프로야구의 인기가 저조한 시기였기에 이승엽의 홈런 신기록에만 관심이 집중되었던 점도 있지만, '''결정적으로 이때의 롯데는 비밀번호를 써나가던 최악의 암흑기였던 탓에''' 팬들에게조차 철저히 외면받았던지라 누가 데뷔해서 첫 승을 거두든 말든 롯데라는 팀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2] 간혹 사직 구장에 만원 관중이 든 것도, 위에 언급한 이승엽의 홈런 기록을 기대하고 보러 온 관중들인지라 롯데에겐 더욱 큰 굴욕. 그리고 원래는 이정훈이 선발이어야 했는데 옆구리 부상으로 대신 나온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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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KBS 스포츠 뉴스 캡처. 덕분에 '''허용투수'''라는 별명을 얻고 말았다. 그 이후 명목상 허용투수 1호라는 꼬리표까지 따라붙었다. 그래도 원조 허용투수인 이선희보단 승리투수가 됐다는 점에선 낫다.[3]
이듬해인 2004년부터는 중간계투로 48경기를 출전하며 기회를 얻기 시작했고, 특히 2005년에는 불펜의 핵으로 활약하며 56경기동안 94.1이닝을 던져 6승 7패 4홀드 7세이브, 평균자책점 3.82, WHIP 1.41로 좋은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전년도 홀드왕을 차지한 임경완의 군복무로 인한 공백을 나름 준수하게 매우며 롯데가 4년 연속 꼴찌에서 벗어나 간만에 5위를 기록하는 데 기여했다. 2006년 시즌이 끝난후 상무로 군복무를 가서, 2008년 말에 제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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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상무 소속 당시에는 야구월드컵에 국가대표로 뽑히기도 했다.

2.2.1. 2009 시즌


제대 후 2009시즌 초반부터 중간계투로 뛰었다. 개막전 우리 히어로즈전에 한 점 뒤진 상황에서 3번째 투수로 등판해 공 하나 던지고 병살타를 이끌어 냈는데, 바로 다음 공격에서 롯데가 역전에 성공하여 '''공 하나 던지고 승리투수가 되었다.''' 당시에도 KBO 역사상 7번밖에 없었던 진귀한 기록이었고, 그 앞에 '군 복귀 이후 첫 경기'나 '개막전' 같은 수식어를 붙인다면 이는 최초의 기록이다. 시즌 극초반에는 묵직한 구위를 앞세워 상당히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시즌 중반 이후로 털리기 시작해 5월말에는 2군으로 내려가기도 했다. 시즌 중반에 롯데팬들에게는 분식회계의 달인으로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그 후 1군에 올라오긴 했지만 이정훈, 임경완, 배장호 등에 밀려 필승조에서는 포함되지 못하고, 나승현과 함께 불펜의 추격조로만 뛰었다.
2009시즌은 1승 2패 5홀드 1세이브 2블론, 평균자책점 3.74, WHIP 1.50을 기록했다. 성적만 보면 그다지 나쁜 성적은 아닐지 모르나, 0.306의 피안타율과 승계주자 실점율 56%는 좋은 편이 아니다.
본인도 중간을 좋아하지 않고 최대성 못지 않게 몸이 딱딱한 선수인지라 불펜보단 선발이 적합하다. 본인도 선발하고 싶다고 요구한 적도 있고. 문제는 그렇게 주어진 몇 번의 기회를 죄다 날려먹어 버렸다는 거.

2.2.2. 2010 시즌


불펜이 전면 붕괴되는 와중에 2009 시즌보다 더 나빠진 모습을 보이며 롱 릴리프로 활약했다. 2010시즌 정규시즌 기록은 1승 1홀드 평균자책점 6.67, WHIP 1.89.

2.2.3. 호주 야구 리그


2010 시즌 종료후 10월 29일부로 11월 6일부터 2011년 1월 22일까지 열리는 MLB 주관의 해외 윈터리그인 호주 야구 리그의 캔버라 캘러리팀에 이승화, 문규현, 장성우, 허준혁, 진명호 등과 함께 교육 목적으로 파견되었다.
그리고 거기 가서도 털렸다. 12월 10일 기준 4경기 나와 4이닝 동안 '''평균자책점 4.50, WHIP 2.25'''의 찬란한 성적을 기록 중이었다가 갑자기 1월 9일 기준 11경기 나와서 23.1이닝 동안 평균자책점 3.47, WHIP 1.24의 성적을 기록했다.
최종 기록은 13경기 28⅔이닝 평균자책점 3.45, WHIP 1.29.

2.2.4. 2011 시즌


개막전 엔트리에는 들지 못하고 5월에서야 1군에 올라왔다. 불펜으로서 뛰고 있으며 역시 추격조로 뛰고 있다. 시즌 초만 해도 추격조로서는 쓸만한 모습을 잠시 보였었지만 가면 갈수록 1군에 있는 것 자체가 의문인 수준으로 변했다. 그리고 결국 2군으로 내려갔다.
2011시즌 최종 기록은 9경기 9⅔이닝 평균자책점 3.72, WHIP 1.66.
이 해 이정민의 등번호는 11번이었는데, 롯데의 레전드인 '''최동원'''의 번호와 같았다. 이 해에 사망한 최동원을 기리기 위해 11번을 영구결번해야 한다는 팬들의 요구가 강했지만 롯데 측에서는 검토해보겠다는 말만 늘어놓았다. 당시 롯데 사장이었던 장병수가 내놓은 논리라는게 '해당 번호를 달고 뛰고 있는 이정민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라는, 이정민 본인도 곤란해할 정도의 발언이었다. 결국 롯데는 팬들의 요구를 이기지 못하고 영구결번을 결국 수용했다. 이정민은 이후 등번호로 45번을 새로 지정받았다.

2.2.5. 2012 시즌


2011 시즌에 이어 2012 시즌에도 개막전 엔트리에 들지 못하고 2군에서 시즌을 시작했다. 2군에서 10경기 나와서 방어율 4.58을 기록하는 등 '''프로 11년차'''의 경이로운 관록을 보여주는 모습이었지만 어찌 된 일인지 6월 5일, 그 전날 2군 내려간 고원준을 대신해 1군 엔트리에 등록됐다.
6월 11일 기준 2경기 나와서 2⅓이닝 평균자책점 0, WHIP 1.29.
8월 29일 문학 야구장에서 열린 SK와의 원정경기에 등판, 팀 타선의 전폭적인 지원 사격을 받으며 8이닝 1실점의 생애 최고의 호투를 펼치며 승리투수가 되었다. 2003년 10월 2일 대구 삼성전, 이승엽에게 56호를 홈런을 허용했던 그날 이후 무려 9년, 3,254일만의 선발승이다. 롯데 자이언츠 갤러리를 비롯한 거의 모든 야구 커뮤니티에서 난리가 났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정민이 선발승을 따냄으로써 롯데는 시즌 '''56'''승을 달성했다.그리고 최훈은 "56"이라는 제목으로 카툰을 그렸다
9월 4일 KIA 타이거즈전에서는 노디시전을 기록했으며 9월 11일 두산전에서 제구 난조로 인해 3이닝 3실점으로 조기 강판되었다. 타선도 이날 이용찬에게 완봉승을 선사했다. 그 이후로는 불펜으로 주로 나온다.
그리고 10월 1일 경기에서 0⅓이닝 4실점이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우고 강판당했다.
두산 베어스와의 2012년 준플레이오프 엔트리에 들지 못했다가, 손용석라이언 사도스키를 대신하여 진명호와 함께 SK 와이번스와의 2012년 플레이오프 엔트리에 합류했다.
팀이 시리즈 전적 2승 1패로 이기던 2012년 10월 20일 사직 야구장에서 열린 SK 와이번스와의 플레이오프 4차전에서 스코어 0:0인 3회초에 갑자기 흔들리던 선발 투수 진명호에 이어 무사 1, 2루 상황에서 등판했는데, 모두의 예상을 깨고 3회초를 무실점으로 막으며 뜬금 호투했다. 이날 이정민은 2⅔이닝 43투구수 2피안타 1볼넷 1탈삼진 1실점 1자책점, 평균자책점 3.38을 기록하며 호투했지만, 팀이 스코어 2:1로 지는 바람에 패전투수가 되어 버려서 호투가 묻히고 말았다.
2012년 10월 20일 경기가 이정민의 2012년 플레이오프 첫 경기이자 마지막 경기였고, 팀은 시리즈 전적 2승 3패로 탈락했다.

2.2.6. 2013 시즌


시즌이 되도록 1군에 올라오지 못하다가 6월달에 팔꿈치 뼛조각 제거 수술후 재활로 시간을 보냈고 1군에는 단 한차례도 등록되지 못했다. 더 말하자면 이 시즌 항목은 2014년 2월 중순이 되도록 작성되지 않았다.

2.2.7. 2014 시즌


한 차례 1군 등록되었지만 엔트리 운용상 말소되었다가 7월말 불펜 부진을 틈타 콜업, 31일 두산전 8회 1사 1, 2루에 이명우를 구원 등판하여 병살로 막아냈다. 이후 9회에 1실점했지만 다시 병살 유도하며 경기를 끝냈다. 149km에 육박하는 직구가 시원하게 꽂히는 투구가 인상적이었다.
8월 28일 팀이 1점차로 쫒기고 있을때 등판하여 3이닝을 무실점으로 막고 위기상황 때 김주찬을 삼진으로 돌려세우는 등 불펜 에이스 역할을 해주고 있다. 사실상 정대현과 함께 롯데의 불펜 원투펀치를 맡고있는 중.
10월 15일, 199안타를 치고 있던 서건창의 마지막 타석 때 승부, 유격수 플라이로 잡아내며 200안타 허용투수 타이틀을 불허했다. 덕분에 '''불허갑''', '''저지갑'''이라는 별명이 새로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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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경기 최고의 클라이맥스였던 서건창과의 대결. '''24세의 신인투수 이정민도, 35세의 노장투수 이정민도, 결코 상대를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승부했다.'''

2.2.8. 2015 시즌


2015 시즌 초반 롯데 불펜의 마당쇠 역할을 잠깐 했었다. 선발이 흔들려 일찍 내려갈 때 롱릴리프 역할도 수행하는 등 전천후로 구르고 있다. 때문에 혹사지수도 꽤 높은 편. 실점도 꽤 하고 있어서 욕도 좀 먹고 있지만 조금씩 더 나아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올 시즌의 암울한 불펜 사정을 볼 때 이정민이라도 없었으면 정말 아찔하다.
시즌이 시작되고 나오기만 하면 얻어맞으면서 팬들에게 까였다. 압권은 4월 18일 두산과의 경기에서 최주환에게 끝내기포를 맞으면서 8이닝이나 던진 린드블럼의 승리를 날려버렸다.[4] 물론 이것은 이정민 뿐만이 아니라 그 전에 1이닝도 버티지 못하고 강판된 홍성민이명우의 책임도 있다.
5월 2일 한화와의 경기에서는 5실점하면서 부진했던 레일리의 뒤를 이어 등판해서 간만에 무실점으로 호투했다. 이후로도 적당히 던져 주었다. 실점할 때는 화끈해서 문제였지만...
5월 31일 LG 트윈스와의 경기에서 이승엽이 홈런을 치지 못했기 때문에 다음 시리즈 롯데 대 삼성전에서 바로 이승엽과의 재대결이 임박했다.
그러나 제 15대 허용투수는 구승민이 되고 말았다...
7월 3일 '''투수''' 박세웅에 이어 정훈을 대신하여 '''대주자'''로 출전하였다.[5]
7월 5일 SK전에서는 델동의 종잡을 수 없는 투수교체에 염종석 코치에게 "왜 바꿉니까?"라고 묻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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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5일에는 9회 2사에 등판하여 연장 10회 1사에서 폭투를 범했으나 재빠른 대처로 주현상을 홈에서 아웃시키고 타자 장운호를 땅볼로 아웃시켜 승리투수가 되었다.

2.2.9. 2016 시즌


4월 24일 기준 롯데 불펜진인 윤길현, 손승락, 박세웅(1995), 정대현(1978), 김성배, 이명우 중 불펜 에이스를 맡고 있다. 작년과 다르게 준수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나오면 불만 지르는 불펜들의 뒤치다거리를 하는 중이라 고생하고 있다.
이명우, 강영식, 정대현, 김성배와 비슷한 나이대임에도 불구하고 직구 구속이 145km/h까지 나오고 있고 작년에 비해 볼넷 삼진 비율이 많이 줄었다. 제구가 눈에 띄게 좋아진 것은 아닌데 영점은 확실히 잡힌 듯 하다. 슬라이더도 좋고 스플리터도 때때로 던지는 데 재미를 보고 있다.
4월 19일 한화전에서는 3이닝 투구로 세이브를 기록하였다.
4월 29일 NC전에서는 드디어 필승조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2:0 리드 상황에서 6회 한 이닝을 1피안타로 깔끔하게 막아 주며 홀드를 기록했다. 그러나 그 날 팀은 첫 블론세이브를 기록하며 졌다.
5월 19일 SK전에서는 2-3으로 역전당한 8회말 투아웃 1,2루 상황에서 등판해 고메즈를 삼진으로 잡으며 이닝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타선이 9회초에 극적으로 역전하고 뒤를 이어 등판한 손승락이 9회말을 잘 막아주며 삼진 하나 잡고 승리투수가 되었다.
5월 21일 두산전에서는 7회에 등판하여, 2이닝동안 2안타를 허용했으나 무실점으로 2이닝을 마무리했다. 5월 22일 경기에 또 등판했다. 이로써 시즌 43경기 중 벌써 21경기 등판.
전반기 종료이후 평가는 최고의 불펜 마당쇠. 정대현, 이명우, 김성배가 부진하면서 무너질 지경이였던 불펜을 지탱해낸 건 이정민의 공이 컸다.
하지만 뜬금없는 2군행을 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콜업됐다.
8월 중순 기준으로 ERA가 3.20으로 롯데 투수진들 중에서 3이닝도 안 던진 배장호를 제외하고 '''가장 낮은 방어율'''을 선보이고 있다. 또한 이닝도 50이닝을 넘어선 '''52.2'''이닝으로 '''윤길현보다도 많은 이닝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8월 22일 사직 SK전에서 손승락[6]을 대신해 마무리로 등판해 삼자범퇴로 처리하며 시즌 2세이브째를 했다. 참고로 이 날 이정민은 '''4연투'''였다. 4연투 상황에서 묵묵히 제역할을 한 것이다.
8월 23일 kt전에서는 4대3 한 점차로 리드하고 있는 6회초 2사 1,3루 역전 주자까지 출루한 상황에서 '''5경기 연속'''으로 등판하여 1.1이닝 동안 무실점으로 막아내며 박시영의 첫 선발승을 지켜냈다.
5경기 연속 등판 이후 6일간 휴식을 가졌다. 8월 30일 구위 점검차 LG전에 등판해 2/3이닝동안 피안타 셋, 볼넷 하나, 몸에 맞는 볼 하나로 3실점했다.
9월 1일 NC전에서 1과 2/3이닝을 삼진 하나 곁들여 무실점으로 막아냈고, 9월 4일 기아전에서는 3:3 동점 상황에서 선발 박세웅이 김주찬에게 3루타를 내주자 구원 등판했으나 투낫씽에서 바깥쪽으로 던진 슬라이더를 이범호가 기술적으로 받아치는 바람에 승계주자 득점을 허용했고 이는 그 경기의 결승 실점이 되었다. 그러나 이후 본인 몫의 타자들은 잘 막아내며 역시 1과 2/3이닝간 무실점했다. 9월 4일 현재 ERA는 3.43.
9월 16일 한화전에서 7대5 2점차 무사 1,3 루 동점주자까지 출루한 상황에서 등판 하여 2이닝을 퍼펙트로 막아내며 시즌 6홀드를 기록하였고 방어율이 어느새 3.19가 되었다. 최근에는 불안한 모습을 보이는 중인 윤길현이 먼저 나오고 이정민을 나중에 낼 정도로 현재 롯데 불펜의 믿을맨이라고 할 수 있다. 9월의 ERA는 무려 0.84.
이후 1번 털리긴 했지만 9월 27일, 9월 29일 kt전에서 8회에 무실점 호투하며 두 경기 연속 승리투수를 기록하며 시즌 5승째를 기록했다.
9월 30일 kt전에서는 5대4 1점차 리드 상황에 등판하여 첫 두타자에게 안타를 맞으며 위기를 자초했으나 이후 타자에게 병살타, 땅볼을 만들어 내어 8회 1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내며 박진형의 시즌 6승 요건을 지켜냈고 본인은 시즌 7호 홀드를 기록했다.
10월 1일 린드블럼이 박석민에게 투런을 허용해 4대 0까지 점수가 벌어진 7회초 등판하여 김준완을 1구만에 2루수 땅볼로 잡고 이 날 등판이 3연투라 바로 박한길과 교체되었다.
10월 7일 사직 넥센전에서는 7회초 2사후 배장호, 박진형의 제구난조로 5:4까지 쫓긴 상황에 등판했다. 상황은 윤석민 상대로 박진형이 볼카운트 투볼 노스트라이크에서 등판했는데 풀카운트 승부끝에 우익수 뜬공 처리하며 최대 위기를 넘겼다. 그리고 8회초에도 마운드에 올라 두 타자를 삼진으로 잡고 2사후 안타를 허용했지만 도루자가 나오며 이닝을 끝냈다. 이 날 야구친구에서는 MVP로 선정될 정도로 위기 상황을 완벽하게 막아내는 피칭으로 팀 승리를 지켜냈다.

2.2.10. 2017 시즌


시즌 초반, 작년의 모습과는 달리 부진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그로 인해 2군으로 내려가있다가 7월 8일 다시 1군으로 콜업되었다. 이후 좋은 피칭을 선보여주고 있었으나, 7월 13일, 전반기 마지막 경기에서 폭투를 하며 실점을 했고, 팀이 지는 데 일조했다.
후반기는 더욱 안 좋았다. 첫 7번의 구원 등판에서 5번이나 실점을 기록하였고 이후 1승 1홀드를 따내며 안정세를 보이는가 했으나 8월 12일 삼성전에서 2.1이닝 3실점으로 또 다시 무너지며 결국 이 날이 올 시즌 1군 마지막 경기가 되었다. 이날 자신의 커리어 마지막 탈삼진을 이승엽한테서 뽑아냈다. 놀랍게도 이 삼진이 통산 이승엽을 상대로 뽑아낸 유일한 탈삼진이였다..

2.2.11. 2018 시즌


KBO 리그 전체 선수 중 박정진, 임창용, 박한이에 이어 4번째로 나이가 많은 선수가 되었다.[7]
해당 시즌엔 1군에 등록된 적은 없으며, 퓨처스리그에서 ERA 6.35 2홀드의 성적을 기록하였다.
이후 소식이 없다가 8월 4일.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팔꿈치 인대 수술을 받고 은퇴를 결심했다고 한다. 남은 기간 동안은 전력분석원으로 활동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리고 8월 7일 임의탈퇴 공시되면서 공식적으로 은퇴했다.

3. 지도자 시절


2019 시즌부터는 롯데 자이언츠의 코치로 활동했지만 시즌 종료 후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았다.

4. 플레이 스타일


183cm/83kg라는 단단한 체격을 갖춘 우완 정통파 투수. 선수 생활 초기에는 최고 150km/h에 달하는 강력한 포심과 슬라이더를 주로 던지는 파워피쳐였으며, 나이가 들면서도 구속 하락은 없다시피 해서 선수 생활 말년에도 최고 140km 중후반대의 포심을 뿌렸다. 로케이션은 주로 직구, 슬라이더, 커브 정도를 구사했으나 말년에는 스플리터도 적지 않게 던졌다.
다만 제구력은 그다지 좋지 않아 영점이 잡히지 않으면 볼질을 많이 하기도 했으며, 볼이 가운데로 몰리는 경향이 있어 피안타율도 꽤 높았다. 그나마 영점이 어느 정도 잡히면 묵직한 구위를 밑바탕으로 제법 위력적인 투구를 했으며, 여기에 한계 투구수가 많아 롱 릴리프나 임시 선발 등 다양한 보직을 오갈 수 있었던 점도 선수 생활을 오래 지속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5.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기록
연도
경기
이닝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2002
롯데 자이언츠
8
11
0
0
0
0
3.27
8
1
7
1
2003
2
9
1[8]
0
0
0
6.00
10
3
3
1
2004
48
78⅓
2
2
0
3
5.51
94
4
54
60
2005
56
94⅓
6
7
7
4
3.82
86
6
52
63
2006
29
39
0
1
0
4
3.46
43
8
12
21
2007
군복무(상무 피닉스 야구단)
2008
2009
31
43⅓
1
2
1
5
3.74
52
3
14
26
2010
20
29⅔
1
0
0
1
6.67
42
3
15
11
2011
9
9⅔
0
0
0
1
3.72
12
3
4
6
2012
14
33
1
3
0
0
5.18
44
2
13
14
2013
1군 기록 없음
2014
25
33⅓
1
1
0
8
2.43
42
1
15
25
2015
34
44⅔
1
4
1
5
5.84
59
4
33
36
2016
67
77
5
2
2
9
3.16
83
6
26
60
2017
24
26⅔
3
1
0
2
5.40
32
5
11
11
2018
1군 기록 없음
<color=#373a3c> '''KBO 통산'''
(14시즌)
368
529
2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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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7
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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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9
335

6. 여담


  • 상당히 운이 없다. 2014년 피BABIP가 0.380, 2015년 7월 15일 현재 피BABIP는 무려 0.395. 미친 듯이 높다.
  • 팬 서비스가 좋기로 유명하다. 사인을 요청하면 사인만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꼭 이름을 물어서 이름까지 같이 써준다고 한다.
  • 야구 내적만큼 야구 외적으로도 안습한 이미지가 강하다. 나무위키에 등재된 동명이인만 해당 인물을 포함해 5명, 대중에 알려진 인물만 셋인데 하나같이 커리어가 쟁쟁하고, 투수 이정민이 주춤하는 사이 나머지 두 동명이인들이 떠버렸다.
  • [image]
    그리스 조각상, 석고 데생을 연상시키는 선굵고 이국적인 외모를 자랑한다. 동아대 재학 시절에는 탤런트 제의를 받은 적도 있다.
  • 박찬호 선수와 얼굴/체형 및 투구폼이 비슷하다고 해서 짭찬호라 불린다.
  • 또한 이승엽의 56호 홈런을 맞고 인터뷰할 당시 '56호 허용투수' 라는 자막이 뜨는 바람에 허용투수, 56호 홈런을 만들어 줬다 하여 기록의 사나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2010년 7월 29일 KIA가 한 이닝 팀 사이클링 홈런이라는 새로운 홈런 기록을 세우는 데 일조하며 기록의 사나이라는 별명이 무색하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 2014년 10월 15일 시즌 199안타를 친 서건창의 200안타 기록 달성을 정면승부 끝에 저지한 뒤로는 불허갑이라는 별명이 새로 생겼다.


[1] 1998학번[2] 이 당시 롯데는 홈 구장인 사직 구장에 고작 69명의 관중만이 관람을 한 적이 있었을 정도로 인기가 바닥을 치던 시기였다.[3] 한국프로야구 원년 처음(1982년 개막전이자 프로야구 최초 공식전)과 끝(한국시리즈 6차전)에 만루홈런을 얻어맞은 투수로 그 만루홈런을 얻어맞은 2경기에서 전부 패전투수가 되었다. 심지어 처음 맞은 건 프로야구 제 1호 끝내기 안타였고, 끝에 맞은 건 그 경기를 지면 한국시리즈 패전이 결정되는 경기에서 맞았던 것이었다. "한국프로야구의 원년을 빛낸 비운의 투수"라고 오르락내리락하면서 80년대 "허용투수"로써 야구사에 남게 되었다.[4] 이 날 9회초까지 5:1로 리드하다가 불펜의 난조로 9회말에만 6실점하며 5:7로 대역전패를 당했다.[5] 당시 정훈이 부상 탓에 주루플레이가 불가능했던데다가(타석에 선 것도 투수의 대타였다.)엔트리에 남은 야수가 아예 없었다.[6] 팔에 뻐근함을 호소해 보호차원에서 휴식을 취했다.[7] 바로 아래인 박용택보다 생일이 한 달 빠르다.[8] 이승엽에게 56호를 허용한 '''그 날 거둔 승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