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궁 태령전

 


[clearfix]
1. 소개
2. 이름
3. 역사
4. 특징
5. 여담

[image]
태령전

1. 소개


慶熙宮 泰寧殿
경희궁에 있는 어진 봉안소[1], 즉 진전(眞殿)이다. 자정전의 서쪽에 있다. 정조는 《경희궁지》에서 태령전을 “자정전 서쪽에 있으며 임금님의 어진을 봉안하는 곳이다.”라고 소개했다.

2. 이름


‘태령(泰寧)’ 뜻은 ‘넉넉하고(泰) 편안하다(寧)’이다. 현재의 현판은 2001년 복원할 때 석봉 한호글씨를 모아 만들었다.[2]
‘태'''녕'''전’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의 원래 발음이 ‘녕’이기 때문에 원칙적으로는 ‘태'''녕'''전’이 맞다. 하지만 예전부터 '寧'의 앞 글자가 받침이 없는 경우 활음조 현상으로 인해 '령'으로 읽고 썼기 때문에[3] 이를 반영한 태'''령'''전으로 부르는 게 적절하다. 이 문서명은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표기인 경희궁 태령전이지만, 태녕전으로 검색해도 들어올 수 있게 했다.

3. 역사


창건 연대는 정확히 모르나 1744년(영조 20년) 8월 20일 자 《영조실록》의 기사#를 보면, 그 무렵 중수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로 미루었을 때 그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영조는 평생에 걸쳐 총 13점의 초상화를 남겼는데, 그 중 7점을 태령전에 봉안했다.#
1776년(영조 52년) 영조가 승하하자 정조는 태령전과 그 일대를 영조의 장례공간으로 활용했다. 우선 혼전을 이곳에 두었고#[4] 태령전 근처에 재실 도수연을 세웠다.#, 또한 정조 자신이 머물 여막을 태령전 남쪽 행각에 두었고# 인산 날 여기서 망곡례를 행했다.#
1786년(정조 10년)에는 사망한 문효세자의 혼궁[5]을 이 곳에 두고 일종의 위령제인 재우제(再虞祭)[6]를 지냈다.# 1836년(헌종 2년)에는 종묘의 영녕전을 증축공사하면서, 잠시 제1실 ~ 제8실에 있던 신주의 일부를 모시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이후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으며 고종 시기 경복궁을 중건할 때 경희궁건물들을 헐어다 자재로 쓰면서 사라졌다. 근거는 다음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서궐(경희궁) 내에는 숭정전, 회상전, 정심합(正心閤), 사현합(思賢閤), 흥정당만 남기고 '''그 나머지는 모두 헐었다.''' 목재를 가져오니 다수가 썩었다. 이 가운데 좋은 것을 골라서 (경복궁의) 나인간(內人間)과 각사의 건조에 사용했다.

《경복궁 중건일기》

일제강점기 이후 태령전 자리에 경성중학교[7]가 들어섰고 해방 후에는 서울고등학교로 바뀌었다. 1980년대에 서울고등학교가 지금의 서초구 효령로로 이사간 후 서울특별시문화재청에서 2001년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4. 특징


[image]
《서궐도안》을 채색한 《서궐도》의 태령전
  • 자락에 자리잡은 지형의 특성 상, 기단을 두 단으로 쌓았다. 아랫 단은 장대석을 세 벌 쌓았고 윗 단은 두 벌을 쌓았다. 계단은 정면에 윗 단 3벌, 아랫 단 3벌을 합쳐 총 6벌이 놓여있고, 측면에는 윗 단 1벌, 아랫 단 1벌을 합쳐 총 2벌이 놓여있다.
  • 지붕은 팔작지붕, 처마는 겹처마이다. 공포는 이익공 양식으로 되어있으며 공포 사이마다 화반을 두고 틈새를 으로 막았다.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는 양상바름을 하고 그 위에 취두와 용두, 잡상을 올렸다.
  • 3면이 전부 띠살 창호로 된 으로 되어 있다. 문 위엔 교창을 두었다. 뒷면의 경우만 다른데 양 끝 가장자리 칸은 문을 달았으나 가운데 3칸에는 중인방을 두고 그 위, 아래를 으로 마감했다.
[image]
태령전 뒷면
  • 정면 5칸, 측면 2칸의 총 10칸으로 실내는 전부 뚫려 한 공간으로 쓸 수 있게 했다. 영조의 진전이었던 점을 반영하여 2001년 복원 후 이 곳에 영조의 어진을 걸고 전시 중이다. 물론 모사본[8]. 훼손을 막기 위해 사방을 유리로 막았다.
[image]
태령전 내부

5. 여담


  • 태령전 뒤에 큰 바위가 있다. 정조가 지은 《경희궁지》에는 “태령전 뒤에는 암천(巖泉, 바위 )의 좋은 경치가 있다.” 고 되어있는데 바로 그 바위이다. 경희궁이 창건되기 훨씬 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이름은 서암(瑞巖)이다. 원래 이름은 기운이 서려 있다는 뜻의 왕암(王巖)이었다. 광해군경희궁을 짓게 한 새문동[9] 왕기설의 근원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10] 지금 이름인 서암은 숙종이 상서로운 기운이 서린 곳이라는 의미를 담아 지은 것이다. 자세한 것은 서암 항목 창조.
[image]
[image]
태령전 뒤에 있는 서암
서암의 샘


[1] 奉安所. 보관하고 모시는 곳.[2] 이것을 집자(集字)라고 한다.[3] 대표적인 예로, 인명으로는 무령왕(武寧王), 효령대군(孝寧大君), 이어령(李御寧) 등을, 이외에는 보령군(保寧郡), 고령가야(古寧伽倻)를 들 수 있다. 자세한 것은 '' 항목 참조.[4] 이 때 태령전에 보관 중이던 어진을 임시로 태령전 서쪽에 있는 위선당이란 곳에 옮겨 모셨다. 이후 어진경현당을 거쳐# 창덕궁 선원전으로 옮겨갔다.#[5] 왕이 되지 못하고 죽었으므로 혼‘전(殿)’으로 부르지 못하고 혼궁이라 했다.[6] 시신을 무덤에 안장한 후 신주를 만들어 혼령을 안정시키는 제사를 우제(虞祭)라고 한다. 제우제는 하관(下棺) 후 두 번째로 지내는 우제이다.[7] 현재 마포구 연남동에 있는 경성중학교와는 전혀 다르다. 그 곳은 1967년 개교했으며 한자가 ''''景''''城으로 다르다.[8] 摹寫本. 베껴 그린 그림.[9] 경희궁 일대가 돈의문(서대문) 바로 안쪽에 위치한다. 돈의문의 별칭이 새문이었기에 그 부근을 새문동이라 불렀다. 자세한 것은 돈의문 항목 참조.[10] 그래서 새 궁궐 짓는다며 원래 이 자리에 있던 정원군(광해군이복 동생)의 을 빼앗았고, 정원군은 화병으로 사망했다. 나중에 정원군의 아들 능양군이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로 즉위하면서 뺏긴 집을 도로 다시 찾은 모양새가 되었다.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