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니노미야 아사히코
久邇宮 朝彦親王[1][2]
생애 : 1824년 3월 27일 ~ 1891년 10월 25일(만 67세)
에도시대 말기부터 메이지 초기까지 살았던 일본의 황족.
후시미노미야 구니이에 친왕의 4남이며, 이방자 비와 고준 황후의 할아버지. 할아버지와 아버지 못지않은 정력가.[3]
1. 생애
1824년 3월 27일 생. 아명은 도미노미야(富宮). 초명(初名)은 '나루노리'(成憲)이었으나, 후에 아사히코로 고쳤다. 이복형인 아키라 친왕과는 대립관계였다.
20대 중반에 가마쿠라 막부 시대 말기에 건립되어 대대로 황족이 주지승려[4] 을 맡았던 교토의 절 쇼렌인(青蓮院)[5] 의 주지승려가 되었으며, 법명은 손유우(尊融)로 명명받았다. 그래서 처음의 궁호(宮號)는 구니노미야가 아니라 쇼렌인노미야(青蓮院宮)이다.
일단 여느 황족들처럼 승려가 되긴 하였지만, 원체 경건한 사원의 분위기와는 맞지 않는 활발하고 장난기 많은 성격이었기 때문에, 많은 말썽을 일으켰다고 한다.
미국의 흑선(黑船, 구로후네)이 일본에 내항했을 때, 에도 막부는 교토 조정에 이를 알리지도 않은 채 미일조약을 일방적으로 체결해버렸다. 그래서 교토 조정의 수많은 보수, 수구 적인 성격을 지닌 왕족, 구게(公家)들이 조약 체결에 반대하고 항의했으며, 이 흐름의 중심에 바로 아사히코 친왕이 있었다. 한편으로는 당시 에도 막부의 13대 쇼군(將軍) 도쿠가와 이에사다(德川家定)가 죽었기 때문에 후임 쇼군을 선출해야 했는데, 막부의 다이로(大老)인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를 비롯해 그 외 막부의 여러 인사들은 기슈 번(紀州藩)의 도쿠가와 요시토미(德川慶福)를 지지했고, 아사히코 친왕을 비롯한 여러 존왕양이(尊王讓夷)파들은 미토 번(水戶藩)의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를 지지했다.
이 와중에 막부의 실세였던 이이 나오스케는 아직도 교토 조정에 비해 강하기 그지없었던[6] 막부의 권력을 이용, 요시토미를 밀어붙여 14대 쇼군으로 만들고[7] '안세이(安政)의 대옥(大獄)' 사건을 일으켜 조정의 구게들, 강력한 존왕양이를 주장했던 조슈 번(長州藩)의 여러 무사들을 비롯한 수많은 존왕양이파들이 처형, 투옥, 유배형에 처해졌다.[8] 아사히코 친왕도 이 피바람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대신 그는 방계 황족이라는 신분을 참작하여, 조정에서의 발언권을 박탈당하고 은거하는 것으로 끝났다.
그러나 1860년에 이이 나오스케의 폭정에 강한 불만을 품은 존왕양이파들이 사쿠라다 문 밖의 변을 일으켜 이이 나오스케를 암살함으로써 아사히코 친왕도 관직에 복귀할 수 있었다, 이후 궁호를 나카가와노미야(中川宮), 가야노미야(賀陽宮)[9] 를 거쳐, 1875년 최종적으로 구니노미야로 고쳤다. 그후 천황의 조언자로 활동했다.
2. 많은 자식들
부친 구니이에 친왕과 마찬가지로 상당한 정력가였다. 젊었을때는 신사(神社)의 무녀(巫女)를 임신시킨 일화도 있을 정도. 환속해서도 자식을 많이 낳았다. 그는 고준 황후의 할아버지인 관계로 현재의 황족들 가운데 미카사노미야 계통을 제외한 황족들은 모두 그의 후손이기도 하다.
아래는 9남 9녀 가운데서 성년까지 살아남은 아들만 들었다. 웃기는 건, 정작 그는 정식으로 결혼을 한 적이 없어서 슬하의 9남 9녀 모두 서자라는 것.
2.1. 2남 가야노미야 구니노리
賀陽宮 邦憲王
1867년 7월 2일 ~ 1909년 12월 8일(만 42세)
상술했듯이 실질적인 장남이었으나 병약한 고로 구니노미야의 후계자가 되지는 못했다.
다만 그가 따로 창설한 가야노미야는 구니노미야의 옛 이름.
2.2. 3남 구니노미야 구니요시
久邇宮 邦彦王
1873년 7월 23일 ~ 1929년 1월 27일(만 55세)
구니노미야의 2대 당주. 무엇보다도 그는 고준 황후의 부친으로 쇼와 덴노의 장인이자, 아키히토 상황의 외조부이다. 육군 대장을 지냈으며 대만 주둔군 특명검열사로 대만을 방문했다가 1928년 5월 14일 대만에서 조명하 의사에게 칼에 찔렸고 이 때 패혈증에 걸려 이듬해 1월 사망한다. 화족 시마즈 치카코(島津俔子)와 결혼, 고준 황후를 포함하여 3남 3녀를 낳았다. 구니노미야의 당주 자리는 장남 아사아키라(朝融)가 이었다.
2.3. 4남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梨本宮 守正王
1874년 3월 9일 ~ 1951년 1월 1일(만 76세)
영친왕비 이방자의 부친으로 영친왕의 장인이다.
본래 이름은 다다(多田)였으나, 그의 작은할아버지 모리오사(守脩) 친왕이 창설한 나시모토노미야를 계승하면서 모리마사(守正)로 개명했다. 화족 가문의 딸 나베시마 이츠코(鍋島伊都子)와 결혼하여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이방자 비와 히로하시 노리코(廣橋規子)를 낳았다.
히로히토의 황태자비가 처음 예정되었던 고셋케가 아닌 후시미노미야의 분가 구니노미야 쪽에서 논의가 되자 본인의 딸이 황태자비가 되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당시 겉으로는 일본 왕실로 취급되었다지만 대한제국 황족 출신인 영친왕과 결혼하라고 해서 청천벽력이었다고 하며, 협박 전화가 걸려오는 등 나름대로 고생한 모양.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후, 황족 가운데서 유일하게 전범으로 기소받았다.
2.4. 5남 다카
多嘉王
1875년 8월 17일 ~ 1937년 10월 1일(만 62세)
독자적인 궁호도 받지 않고, 신적강하도 않은 희한한 경우였다. 니시쿠니노미야(西久邇宮)를 창설하기 위해 그랬다는 썰이 있긴 하다. 1947년 신적강하할 때까지 그의 가족들은 모두 본가인 구니노미야의 일원으로 보았다. [10][11]
2.5. 8남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
朝香宮 鳩彦王
1887년 10월 2일 ~ 1981년 4월 12일(만 93세)
링크를 타고 가면 알겠지만 인간 쓰레기란 말이 아깝지 않은 작자다.
2.6. 9남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東久邇宮 稔彦王
1887년 12월 3일 ~ 1990년 1월 20일(만 102세)
훗날 내각총리대신을 지냈다. 나루히코 본인이 100살 넘도록 장수하기도 했고, 구황족 가운데서 그의 가문이 가장 번창했다. 지금도 황적복귀를 논할 때면 가장 먼저 오르내릴 정도. 특히 그의 장남 모리히로(盛厚)는 히로히토 덴노의 장녀 데루노미야 시게코 내친왕과 결혼했기 때문에 그의 적장계 자손들은 쇼와 덴노의 외손자이기도 하다.
3. 일화
- 죽을 때까지 서양 문물과 거의 접촉하지 않으며 살았다. 동시대의 다른 황족과 달리 양복을 입은 모습이 남아 있지 않다.
- 좌막파로 8월 18일의 정변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12]
- 메이지 유신 전후의 일들 때문에 신정부의 중심에는 들지 못하고 도쿄로 이주하는 일도 없었다. 이러한 사연 및 그가 받은 푸대접은 훗날 구니노미야 구니요시(久邇宮 邦彦),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東久邇宮 稔彦)와 같은 그의 자식들이 황족으로서는 별스런 행위를 하는 등 정서적 영향을 끼친 원인이라는 견해도 있다.
- 훗날 이세신궁(伊勢神宮)의 제주(祭主)로 근무하면서 신토와 불교 양쪽의 요직을 거치는 흔치 않은 사례를 만들어 냈다. 드물게도 신직(神職)을 육성하는 황학관대학(皇學館大学)의 창건자로도 알려져 있으며 그가 남긴 일기는 <아사히코 친왕 일기(朝彦親王日記)>로, 당시를 알려주는 중요한 사료로 남아 있다.
[1] 朝彦이란 한자를 아사히코 대신 토모요시라고 읽는 경우도 있다[2] 일본어는 한자 한 글자에도 읽는 방법이 많게는 십 여개다. 예를 들어 '옳을 의'(義) 자를 이름에 쓰면 읽는 방법이 아키(あき), 이사(いさ), 시게(しげ), 타케(たけ), 타다시(ただし), 치카(ちか), 쓰토무(つとむ), 토모(とも), 노리(のり), 미치(みち), 요시(よし), 요리(より)까지, 총 12가지에 달한다. 이름이 한 글자인 경우에 주로 쓰는 세 글자의 타다시, 쓰토무를 제외해도 10가지다. 그래서 일본인은 '타로'(太郞)같은 읽는 방법이 거의 정해져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름을 밝힐 때 한자 뿐만 아니라 읽는 방법(요미가타, 読み方)도 가르쳐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반면 한국인의 이름은 한글로 쓰기 때문에 읽는 방법이 항상 한 가지라 문제될 일이 없다. 가끔 이름을 한자로 쓰면 '흰 백'(白) 같이 음이 '백'도 있지만 '배'로도 읽는 경우도 있으나, 이러한 경우는 흔치 않기 때문에 적어도 통성명을 하는 상황에서는 일본인보다 한국인이 더 수월할 것이다. 일본어를 사용하는 데 애로사항이 꽃피는 중 하나.[3] 어린 무녀와 검열삭제해서 임신시켰다는 일화도 있다.[4] 승려라지만 모두 대처승이라, 아내와 자녀를 둘 수 있다.[5] 하필 많고 많은 교토의 절들 중에서 왜 쇼렌인인가 하면, 사실 이 쇼렌인을 실질적으로 관리하고 있는 사람 이 바로 아사히코 친왕의 외할아버지였기 때문이었다. 아사히코 친왕의 어머니는 구니이에 친왕의 첩 노부코(信子)였으며 쇼렌인의 관리자 도리이코지 쓰네치카(鳥居小路経親)의 딸이었다. [6]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만 해도 막부의 쇼군 허락 없이 천황이 혼자서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예를 들어, 119대 천황이였던 고카쿠 덴노는 천황의 자식이 아닌 방계 황족(간인노미야)의 자식이었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인 스케히토(典仁) 친왕에게 덴노의 칭호를 추존(追尊)하려고 했으나, 막부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고카쿠 덴노는 칭호를 올리지 못했고 이는 막부가 없어진 후인 증손자인 메이지 덴노 시기에 스케히토 친왕에게 '교코(慶光) 덴노'라는 칭호를 올림으로써 이루어졌다. 이처럼 천황은 막부의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로, 마치 허수아비와도 같았다.[7] 요시토미는 쇼군이 되고 나서 역대 쇼군의 통자(通字)인 '가(家)' 자를 써서 이름을 '이에모치'(家茂)로 바꿨다. ('통자'란 일본에서 자손 대대로 이름에 넣는 한자이다.)[8] 존왕양이파의 사상적 지도자, 일본 우익사관의 창시자라고도 할 수 있는 조슈 번의 무사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은 이 때 막부의 군대에 붙잡혀 처형당했다.[9] 거처 주위에 비자나무(榧)가 많이 자라서 '榧'의 독음인 'かや'를 음독으로 바꿔서 길한 말인 '賀陽'으로 바꿨다고 한다. 뒤에 구니노미야로 바꾼 후 차남인(장남은 요절) 구니노리(邦憲) 왕이 궁호를 가야노미야로 칭했다. 이때 왜 실질적으로 장남인 구니노리 왕이 구니노미야의 차대 당주가 되지 못했냐면, 그는 건강이 영 좋지 않아 40대에 죽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로 아래의 이복 남동생인 구니요시(邦彦) 왕이 구니노미야의 차대 당주가 되었다. [10] 장남 가히코(賀彦)는 요절했고, 차남인 이에히코(家彦)는 1942년 10월 5일에 우지(宇治)라는 성씨를 받고 백작으로 신적강하하여 황족에서 이탈했고 3남 노리히코(徳彦)도 1943년에 신적강하를 해서 이미 그의 가족 들 중 실질적으로 신적강하 대상이 된 사람은 부인 시게코가 유일했다.[11] 이에히코는 '''1920년생'''으로 2020년 현재 '''104세'''라는 나이로 장수하고 있으며 부인 다카쓰카사 카즈코(鷹司量子, 다카쓰카사 가즈코의 셋째 시누이로, 동명이인이다.) 사이에서 두 아들을 두고있지만 이미 아버지가 전쟁 중 백작으로 신적강하해서 복권 대상이 아니며, 노리히코는 아키히토 상황의 외사촌누나인 구니노미야 마사코(久邇宮正子) 여왕과 결혼하여 1남 2녀를 두었다. 1966년 백모인 나시모토 이츠코(梨本伊都子)에 의해 나시모토노미야로 입적하면서 1976년부터 2007년에 죽을 때까지 당주를 지냈다. 하지만 1980년경 부인과 이혼하면서 외아들을 포함하여 자녀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졌고 2002년에 혈연 관계가 없는 한 종교인을 양자로 들였다. 현재 외아들은 세상을 떠났고, 손자가 있지만 이쪽도 복권 대상이 아니며, 노리히코의 뒤를 이어 아들과 손자가 나시모토노미야를 이었어도 복권될지는 의문이 들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의 두 아들들이 전쟁 중 신적강하를 했기에 그의 자손 중 황실에 복귀할 인물이 없게 되었다.[12] 사실 고메이 덴노가 실 주모자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