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덴만 여명 작전

 




'''아덴만 여명 작전'''
'''Operation Dawn of Gulf of Aden'''
[image]
'''[사진설명]'''
'''날짜'''
2011년 1월 18일 ~ 1월 21일[1]
'''장소'''
아라비아 해 아덴만 입구 해역
삼호 주얼리 호
'''결과'''
해적 진압
피랍 선박 탈환 및 인질 21명 전원 구출 성공
'''교전 세력'''
[image] 대한민국
[image] 다국적 지원국
[image] 미국[2]
[image] 오만[3]
[image] 파키스탄[4]
[image] 소말리아 해적
'''지휘관'''
[image] 이명박
[image] 김관진
[image] 한민구
[image] 김성찬
[image] 황기철
[image] 조영주
[image] 아브디 리스케 샤크 †
[image] 수티 알리 하루트 †
'''병력'''
대한민국 해군 300명
(소말리아 해역 호송전대)
DDH-981 최영
슈퍼링스 1대
해군 특수전전단 30여명
피랍선 1척
해적 17명
'''피해 규모'''
3명 부상
민간인 1명 부상
8명 사망
4명 실종
5명 생포
1. 개요
2. 전개
2.1. 선박 납치
2.2. 1차 작전
2.3. 2차 작전
2.3.1. 진입
2.3.2. 반격
2.3.3. 작전 직후
2.4. 석해균 선장의 용태
3. 이후
3.1. 시신 처리 및 재판
3.2. 소말리어 통역 문제
3.3. 수감 생활
3.4. 금미 305호
3.5. 석해균 선장에게 맞은 총알 관련 논란
3.6. 석해균 선장의 치료비 문제
3.7. 제미니호 피랍사건
4. 반응
5. 엠바고 요청과 무시
6. 군 기밀 유지 부실 논란
7. 기타
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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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11년 1월 15일 소말리아해적에게 피랍된 1만톤급 화물선 삼호 주얼리(SAMHO JEWELRY)호 사건에 대처하기 위해 대한민국 주도 아래진행된 대한민국, 미국, 오만, 파키스탄 해군의 연합작전. 일명 아덴만의 여명 작전이라고도 불린다. 납치 6일만인 2011년 1월 21일 청해부대 소속 UDT/SEAL 팀의 급습으로 해적 8명 사살, 5명 생포와 동시에 인질 21명 전원 구출의 성과를 낸 우리군이 해외에서 수행한 최초의 인질구출 작전이다. 한국 선원 8명을 비롯해 미얀마인 11명, 인도네시아 2명 총 21명의 선원 모두를 구출하였다.

2. 전개



2.1. 선박 납치


2011년 1월, 삼호 주얼리 호가 소말리아 해적들에게 납치당했다. 선원들은 해적의 접근을 보고 재빨리 선미의 로프 저장창고로 대피했으나 3시간 15분 만에 뚫렸고 해적들은 배를 소말리아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이를 보고 더 이상의 납치를 용납할 수 없다고 판단한 당시 대통령 이명박청해부대(당시 지휘관 해군 항해대령 조영주[5])에게 해적 소탕과 인질 구출을 명령했다.
석해균 선장은 여러차례 기지를 발휘해 작전 시간을 버는데 큰 기여를 했다. 1차 구출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선장은 조타실에 이상이 있다며 해적을 속이고 배를 멈췄으며, 해적의 명령에 따라 영어로 해운사 측과 통화하면서도 중간중간에 한국어로 상황을 전달했다고 한다.

2.2. 1차 작전


삼호주얼리호의 선장 석해균은 선박 속도를 늦추려고 해적들 몰래 "엔진오일에 물을 타라."고 지시했고 선장 석해균에게 지시받은 기관장 정만기는 해적의 감시를 피해 물을 탔다. 선장 석해균 측의 말로는 물을 타라고 지시하였으나 선원들이 겁에 질려 시도하기까지에 많은 시간이 걸렸고 그동안 속도를 레드 존에 놓는 식으로 엔진 고장을 가장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선박은 정상 운항이 어려워졌다. 엔진오일에 물이 들어간 탓에 삼호주얼리호는 자주 멈추는가 하면 속도를 제대로 내지 못했다. 이에 해적들은 근처를 지나는 몽골 선적 상선을 추가로 빼앗으려 4명이 해적선에 타고 삼호주얼리호를 떠났고, 이를 발견한 해군은 링스 헬기와 고속단정 2척을 진입시켰고 링스헬기의 K-6 중기관총으로 위협사격해 해적선을 무력화시켰다.[6]
이에 삼호주얼리호 해적들이 백기를 들어 투항의사를 표시하였고 검문검색팀이 고속단정으로 삼호주얼리호로 접근하였으나 해적들이 갑자기 링스헬기와 고속단정 2척에 사격을 가해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 사격으로 3명이 부상을 입었고 작전이 중단되었다. 해적의 기습으로 인해 부상자가 발생하였지만 해적들의 보트와 AK 소총 3정 및 실탄 90발을 빼앗아 전력을 상당 부분 무력화했다.[7] 군 관계자는 "21일 작전이 비교적 수월하게 성공한 요인 중 하나는 1차 작전으로 적의 전력이 약화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부상자들은 오만의 수도 무스카트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았다. 고속단정에 타고 있던 한 명은 허리에 3발의 총탄을 맞았고 한 명은 총알이 오른쪽 광대뼈를 스치고 지나가 찰과상을 입었다. 링스에 탑승했던 해상저격팀 사수는 오른쪽 허벅지에 2발의 총탄을 맞았다. 부상자들은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으나 세 명 모두 총상 위치가 조금만 달랐어도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었다. 부상이 가장 심했던 소령은 수술 후 일주일만에 보행이 가능한 수준까지 회복했으며 이후 완전히 회복해 9개월 뒤에는 호국보위상 수상식에도 참석했고 중령으로 진급해 해군 2함대 제5특전대대장으로 보임된 것이 2013년 국방일보 기사로 확인된다. 헬기에서 부상을 입은 대원도 부상에서 회복하였고 2018년 다시 청해부대로 파병 임무를 나갔었다.

2.3. 2차 작전


파키스탄 해군 구축함미 해군 P-3C 대잠초계기가 삼호 주얼리 호를 감시하다 해적선 모함이 다가옴을 알리자 국방부 장관이명박에게 작전을 허락받고 명령했다 한다. 부산항에서 삼호 주얼리 호와 같은 배를 대상으로 작전을 짜고 그동안 주얼리호에 링스헬기로 교란작전을 하여 해적들의 힘을 다 빼놓은 다음 현지시각 오전 4시 58분부터 9시 56분(한국 시각 오후 2시 56분)까지 진행했다.

2.3.1. 진입


우선 오만 해군의 고속정이 포위하고 충무공 이순신급 구축함 최영함의 위협 함포사격과 링스 헬기의 K6 중기관총 사격으로 해적의 시선을 끌었다. 시선을 끌었다는 것이 선체 본체에 어느 정도 직접 사격한 것일 수도 있다(사진상으로는 그렇게 보인다). 이 사이 고속단정 3척에 나눠 탑승한 UDT/SEAL 작전팀이 삼호 주얼리 호 함미 우현에 접현, 사다리로 승선해 해적을 제압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사다리가 어려운 작전 중에서 좋은 영향을 주었다.) P-3C가 선교에 해적 4명 갑판에 4명, 중갑판에 3명을 감지하고 통보했으며 UDT/SEAL팀은 각각 개인 카메라 '카이샷'를 머리에 부착하여 이 화면은 실시간으로 최영함과 합동참모본부, 국방부에 전송되었다.
인간이 가장 경계를 풀 때가 여명이 밝아오는 시기다. 사실 이 시간은 온도도 가장 낮고 포유류가 가장 경계심을 푸는 시간대이기도 하다. 특수부대의 작전은 적의 경계가 가장 늦추어지는 이 시간에 많이 실시되지만, 요즘은 적들도 약아져서 이 시간을 경계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다른 시간을 고를 때도 많다. 결론적으로 적이 경계를 늦추는 시간이라면 저녁이든 한밤중이든 낮이든 상관없다.
아덴만 여명 작전은 새벽 4시 58분 시작됐다. 5시 17분부터 해적의 시선에서 고속단정 강하를 감추기 위해 함수를 오른편으로 돌린 상태에서 우현 1, 3번 고속단정을 강하, 다시 왼쪽으로 변침하여 좌현의 4번 고속단정을 강하했다. 6분 뒤 K-6 중기관총으로 무장한 링스 헬기가 최영함에서 떠오르면서 모든 작전 준비가 끝났다. 최영함은 VHF 상선망으로 곧 작전이 시작된다는 한국어 경고방송을 실시해 삼호 쥬얼리의 선원들이 대비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2.3.2. 반격


최영함에서는 소나타 ECM을 삼호 주얼리 호에 직접 조사하여 레이더무전기를 먹통으로 만들었고, 5시 40분 접근한 링스 헬기가 레이더와 통신 안테나에 무력화 사격을 가해 완전히 파괴했다. 링스 헬기가 선교와 갑판에 위협사격을 가하는 동시에 최영함이 고속으로 접근해 삼호 쥬얼리호를 중기관총과 저격수 사거리 안에 넣고 선교에 사격했다. 이 시점에서 선교의 해적 한 명이 무력화됐다.
6시 9분 고속단정 3척에 탑승한 UDT/SEAL 공격조 제2팀이 선미 진입을 시작, 15분에는 2개 공격조 15명 모두가 등반에 성공한다. UDT/SEAL 대원들은 4층 선교로 통하는 계단에서 해적 한 명과 조우, 즉각 사살했다. 6시 30분, 드디어 UDT/SEAL 팀이 섬광탄을 이용해 선교를 완전 장악했다.
이때 석해균 선장은 조타실에서 해적선과 조우를 막고 구출작전을 돕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소말리아 영해로 가는 걸 막기 위해 배를 느린 속력으로 지그재그로 돌리다 복부에 해적의 총격을 받았다. 선교를 장악한 UDT/SEAL 대원들은 삼호 주얼리 호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한 팀이 데크하우스 격실들을, 다른 한 팀이 기관실을 맡아 수색하는 과정에서 해적 4명을 추가적으로 쓰러뜨렸으며, 6시 35분 선장실 근처에서 해적 두목도 사살됐다. 6시 45분, 선교에 풀려난 선원 13명이 모여있어 이곳이 점령되고 저격수 이외에 일시 사격중지 명령이 떨어졌다. 그 사이 공격조 1개 팀이 부상이 심한 석해균 선장을 최영함으로 응급이송했다.
7시 57분 UDT/SEAL 공격조 1개 팀이 다시 삼호 쥬얼리호에 복귀하면서 해적에 대한 마지막 소탕작전이 개시됐다. 이 과정에서도 저항이 있었다. 격렬한 총격전 끝에 마지막 저항을 시도하던 4명의 해적 중 2명이 사살되자 남은 2명이 항복하면서 총 4번의 총격전과 5시간에 걸친 작전은 끝났다.

2.3.3. 작전 직후


삼호 주얼리 호 석해균 선장이 해적의 총을 복부와 무릎 등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석해균 선장을 비롯하여 부상자는 응급치료 뒤 미 해군의 SH-60 헬기를 이용하여 오만 병원으로 후송됐다.
석해균 선장은 출혈이 많아 22일 오후 해군 장병 3명으로부터 급히 혈소판 수혈을 받았다. 석해균 선장은 복부에 AK 소총의 7.62mm 총탄을 5발 맞았다. 해적이 UDT/SEAL 대원들의 진압 작전이 시작되자 1발을 쐈고, 이를 목격한 선원을 잡으려다 실패로 돌아가자 1발을 더 쐈다. 다행히 생명에 별 지장이 없다고 발표되었지만 얼마 안 가 위중한 상태로 밝혀졌었다.
부상자 외에 다른 한국인 8명, 미얀마인 11명, 인도네시아인 2명 총 21명의 선원들에 대한 검진 결과 건강 상태가 대체로 양호한 편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 중 대부분은 오만에서 항공기 편으로 한국으로 돌아왔고, 삼호 주얼리 호는 석해균 선장이 시간을 끌기 위해 엔진오일에 물을 탄 결과 선체에 이상이 생겨 오만으로 향했다. 선원들은 2011년 2월 2일 귀국했으며 이후 피해자 신분으로 조사를 받았다.

2.4. 석해균 선장의 용태


오만 대학병원에서 1차 응급수술을 받았지만 위중한 상태에 빠졌고, 이에 국내에서 아주대학교 의과대학 이국종 교수팀이 현지로 급파되었다.[8]
이국종 교수가 직접 서술한 바에 따르면 석해균 선장은 이미 거의 죽어가는 사람이었으므로 한국 의료진이 가더라도 실패의 부담이 매우 컸고, 병원 내에서도 이교수가 오만행을 결정하는 바람에 "병원 윗선에서 불같이 화를 쏟아내는" 등 그야말로 사면초가의 상황이었다고 한다. 이국종 교수는 오만에 도착하여 2차 응급수술을 집도했으나 석해균 선장의 용태는 나아지지 않았고, 해답은 국내로 응급 이송하여 근치수술을 하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문제는 생사가 경각에 달린 환자였으므로 일반 여객기나 군용기로는 이송이 불가능했고 전문적 의료장비를 갖춘 이른바 '에어 앰뷸런스'가 있어야 했다는 점이다. 이국종 교수팀의 김지영 코디네이터[9]가 여기저기 전화를 돌려 독일의 에어 앰뷸런스 회사와 접촉하는데 성공했으나, 국내의 여러 정부 부처들이 미적미적하며 결정을 미루는 사이 이 에어 앰뷸런스는 다른 환자 이송을 위해 떠나버렸다. 이 교수 팀은 다시 스위스의 에어 앰뷸런스 회사 '레가(Rega)'와 급히 접촉하여 비행기를 섭외하는데는 성공했으나 이 회사는 계약금을 바로 입금하던가 아님 정부 차원의 지급보증을 요구했다. 석해균 선장의 치료를 위해 더이상 시간을 미룰수 없다고 판단한 이국종 교수는 어떤 정부 부처도 확답을 주지 않은 상황에서 자신의 책임 하에 계약서에 지급보증 서명하고 팩스를 보내버렸다.[10]
[image]
스위스 Rega 에어 앰뷸런스 봉바르디에 챌린저 604 기종. 석해균 선장을 국내 이송한 그 기종이다.
이때 에어 앰뷸런스 총 이용대금은 '''380,000 달러''', 한화 '''4억원'''이 훌쩍 넘는 거액이었다. 안 그래도 병원 내에서 눈총을 받는 와중에 일이 잘못될 경우에는 이 거액을 이국종 개인이 고스란히 부담해야 할 판이었으니 팀원들이 "교수님 미쳤어요?"라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정상이었던 상황이다. 4억이 넘는 이송료를 부담하고 환자가 사망이라도 하면 단기적으론 여론 때문에 못 하겠지만 장기적으론 병원에서 잘릴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비용은 내가 낼테니 지금 당장!!"''' 의 일화 전말이다.[11] 이러한 전문 의료설비가 탑재된 의료항공기(에어 엠뷸런스)는 2019년 현재까지도 국내에는 없으며 그에 관한 관련 인프라와 인력을 조성 및 육성해야 하지 않느냐는 여론이 조성된 바 있으나 언제나 그랬듯이 잠시 논의되다 사라진 상태이다.
이국종 교수와 중증외상센터 정책 분야에서 협조하던 당시 민주당 허윤정 전문위원[12]의 중재와 도움으로 청와대가 각 부처 조율에 나서면서 국토교통부가[13] 아주대학교 병원과 가까운 성남공항을 개방하는 등 준비 끝에 마침내 석해균 선장은 국내에 이송될 수 있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헬기로 아주대학교 병원에 이송된 석선장은 이국종 교수 집도 하에 대수술을 받고 마침내 생명을 되찾았다. 2011년 2월 3일 오전 10시 의식을 회복한 석해균 선장은 이후 상태가 악화와 호전을 오갔지만 천천히 안정세에 접어들었다.
2011년 3월 5일, 이명박 대통령은 석해균 선장을 방문하며 석해균 선장이 걸어나와야 아덴만 여명 작전이 끝난다고 위로를 보냈다. 석해균 선장은 2011년 11월 4일 퇴원하였다.

3. 이후



3.1. 시신 처리 및 재판


[image]
생포된 해적 5명
사진 왼쪽부터 마호메드 아라이, 압둘라 알리, 아부카드에만 알리, 압둘라 세룸, 아울 브랄라트
해적 13명 중 두목과 부두목을 비롯해 8명이 사살되고 5명이 생포되었다. 사살된 해적들의 시신 처리 문제는 오만 주재 소말리아 대사관과 협의가 지연되면서 수장하는 방법도 고려되었다가 오만을 거쳐 소말리아로 인계하기로 결정되었다.[14]
수사 과정에서 해적들의 신원을 파악했으며 생포된 해적의 신원은 다음과 같다.[15]
  • 마호메드 아라이(Mahomed Arai): 23세. 어부. 해상에서 물고기를 잡아 식량을 조달하는 담당이었다. 선원들의 증언으로 미루어 보아 석해균 선장을 쏜 해적으로 유력시되며 인질들을 험하게 다루어서 좋지 않은 진술이 있었다.[16] 해적들 증언에도 조타실에서 내려와 총을 버리고 도망쳤다고 하니 분명하다.
  • 압둘라 알리(Ali Abdullah): 21세. 전직 군인. 아라이와 함께 해군의 2차 공격 때 석해균 선장, 김두찬, 정상현, 손재호 등을 인간 방패로 내세웠다.
  • 아부카드 애맨 알리(Ali Abukad-Aeman): 21세. 전직 군인. 전직 군인 출신인 2명은 무기류 공급, 총기사용 훈련을 맡았다. 부양해야할 가족이 7명이나 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해적이 되었다고 한다. 교도소에 수감되고 나서는 차라리 가족들도 다 같이 교도소에 데려와서 살고 싶다는 발언을 했다.
  • 압둘라 후세인 마하무드(Abdulahi Husseen Maxamuud): 예명 압둘라 세륨(Serum Abdullah). 21세. 요리사. 해적들과 인질의 식사 담당으로 다른 해적과 달리 선원들을 괴롭히지 않았고 친절하게 대해 인질들 쪽에서도 좋은 소리가 나왔다. 그리고 유일하게 모든 혐의를 인정했다.
  • 아울 브랄렛(Brallat Aul): 19세. 버스 운전 기사. 원래는 학생이였으나 중간에 때려치우고 버스 운전 기사를 했다. 해적이 된 것은 자신이 몰던 버스가 고장나는 바람에 수리비를 마련하려다 그렇게 된 것. 해군의 1차 기습 때 기관총을 쏴서 해군 특전요원들에게 상해를 입힌 장본인이다. 유일한 10대에 학생신분이고 영어에도 꽤 능통하다고 하는데 한국말로 "판사님 앞으로 두 번 다시 해적질 하지 않겠습니다."하면서 꼭 귀화하고 싶다고 강하게 읍소했다.
해적 5명은 최영함에 감금된 뒤 아랍 에미리트 왕실 전용기 편으로 석해균 선장을 오만의 병원에서 국내로 후송할 때 같이 압송되었다.[17] 잡혀온 해적들은 처분을 기다리고 있으며 한국 정부에서는 어떻게든 처벌을 하겠다는 입장이었다. 이들은 UN해양법협약 제105조 "공해상에서 해적선을 나포하고 해적을 체포할 수 있으며 해당 국가의 법원에서 형벌을 결정할 수 있다."에 따라서 대한민국으로 데려와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공해상에서 외국인 해적을 붙잡아 와서 재판한 것은 한국에서는 전례가 없는 일이지만 법무부의 검토에 따르면 국제법상 문제가 없다고.#
대한민국 국내에서 재판을 받게 될 경우, 해상강도죄로 10년 이상의 무거운 징역 형벌을 받게 된다. 부산지방검찰청해상강도살인미수·강도살인미수·해상강도상해·강도상해·특수공무집행방해치상·선박 및 해상구조물에 대한 위해행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이들을 기소했으며, 재판은 해적 5인방중에서 요리사 압둘라 세륨만 모든 혐의를 인정하여 일반재판으로 받고 나머지 4명은 국민참여재판을 요청하여 배심원들이 참석한 상태에서 재판을 받았다.
[image]
검찰청에서는 마호메트 아라이에게 무기징역, 나머지에게는 13년형 및 15년형을 구형했으며, 2011년 5월 28일 1심 판결이 내려졌다.[18] 1심 결과에 불복하여 이루어진 2심 및 대법원 판결에서 압둘라 세륨은 속죄를 사유로 징역 12년으로 감형, 나머지는 항소기각되었다.[19]
  • 압둘라 알리: 징역 13년
  • 아부카드 애맨 알리: 징역 13년
  • 마호메드 아라이: 무기징역
  • 아울 브랄렛: 징역 15년
  • 압둘라 후세인 마하무드(압둘라 세륨): 징역 15년 → 12년

3.2. 소말리어 통역 문제


소말리아인 해적들이 무학자들이라 능력이 떨어져 정식 재판 중에는 고급 언어 구사가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정식 재판에는 호주에 사는 현지 통역사를 불러서 통역관으로 임명하였다. 문제는 한국어-영어-소말리어 통역에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데다 소말리아어 통역사가 '구속적부심 심사'나 '특신상태' 같은 복잡한 법률용어를 생전 처음 들어보기도 하고 그걸 소말리어로 통역할 능력도 안됐다. 그래서 소말리아 해적들이 있는 부산구치소는 부산 구치소장이 담당 교정직 공무원에게 소말리어 배워서 통역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어쨌든 부산구치소 교도관들은 인터넷으로 외국의 소말리어 사전을 구입해서 독학하여 소말리어를 배웠다.''' 이후 국민참여재판이 열려 교도관들이 소말리아 해적들을 데리고 재판장으로 호송해갔다.
그런데 그 소말리어 통역관이 재판장에 지각해서 안 온 것이다. 그러자 교도관들 중 1명이 해적들에게 "재판이 지연되고 있으니 조용히 앉아서 기다려라"라고 말하자 해적들이 "오케이~ 오케이~"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을 통역관이 아닌, 교도관이 소말리어로 해적들에게 말한 것이다.''' ”해적들과 상담하며 소말리아어 익혔죠"
그러자 부산고등법원 형사1부 최인석 부장판사가 통역을 요청하여 위의 기사에 나온 박흥열 교사(8급)가 대신 통역을 했다. 앞서 재판때 소말리아에서 선교활동을 해서 소말리어를 할 줄 안다던 호주인이 한국말도 할 줄 모르고 법률용어도 몰라서 버벅댔지만 소말리아가 어디인지도 모르는 박흥열 교도관은 공무원 시험볼 때 시험과목에 '형사소송법'이 들어있던 관계로 법률 용어는 빠삭하고 재판장의 한국말을 직통으로 해적들에게 소말리어로 통역한 것이다. 그러자 지각한 정식 통역관에게 빡친 재판장은 그를 해임하고 박흥열 교도관에게 즉석에서 부탁하여 차후 재판까지 계속 통역을 맡아 달라고 했다. 심지어 1심이 끝난후 해적들이 항소하여 고등법원에서 새로 재판받게 되자, 새로운 재판장은 호주인 통역관이고 선교사고 다 때려치우고 그냥 교도관이 통역하라고 하여 박흥열 교도관이 계속 통역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또 반전이 있다. '''처음 부산구치소장에게 소말리어를 배워서 통역하라고 지시받은 사람은 박흥열 교도관이 아니다.''' 박흥열 교도관은 "자신은 어깨너머로 소말리어를 공부하는 것을 본 적이 있을 뿐이고, 정말 고수는 따로 있는데 저만 주목받아서 죄송스럽다."라고 인터뷰 한적이 있다. 즉, 박흥열 교도관은 재판에 따라온 교도관일뿐이고 정말 소말리어 고수인 그 교도관은 그날 재판에 안 왔다. 그리고 이 고수의 업무는 '''일자무식인 해적들에게 소말리어 글자(라틴 문자)를 가르쳐 주는 일'''이라고 한다.
잠깐이지만 박흥열 교도관의 유창한 소말리어를 볼 수 있다. 장면은 4년만에 석해균 선장과 대면한 아라이.

3.3. 수감 생활


소말리아에 비하자면 국제기준에 맞는 인권을 존중하는 한국의 외국인 교도소는 너무나 시설이 좋기 때문에[20] 아이러니하게도 해적들 입장에서는 상대적으로 호텔이나 다름없다. 해적 중 한 명인 압둘라 세륨은 생활에 잘 적응되고 환경이 좋다보니 나온 말이라고 했다.[21][22]
2012년 11월 24일 중앙일보에서 이들이 갇혀 있는 대전 교도소에 취재를 갔다. 이들은 교도소 측과 자원봉사자들이 제공하는 한국어 교실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있으며, 대우에는 만족하고 있는 듯하다. 무함마드 아라이는 몸무게가 10kg이나 늘었고, 아울 브랄렛은 "출소하면 한국에서 일자리를 구하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게다가 수감된 해적들은 아예 대놓고 '''"대한민국으로 귀화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우리나라의 외국인 수형자는 대전과 천안 외국인 교도소에 반반씩 수용되어 있는 관계로 해적들도 역시 반은 천안에 있다.
이들 해적들은 모두 교도소내 공장에 출석하면서 각자 일하고 있는데, 공장 내에 무슬림 수감자들이 다수 있어 생활에는 불편함이 없다고 한다.
수감 4년째인 2014년 1월에도 중앙일보에서 취재를 갔다. 인터뷰 내용을 보면 소말리아가 얼마나 지옥같은 환경인지 여실히 알 수 있다. 수감된 해적들은 '''소말리아의 평범한 사회인의 생활보다 대한민국 교도소 수감자가 훨씬 풍족하게 생활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객관적으로도 그렇다.
2015년 1월에는 석해균 선장이 대전교도소를 직접 찾아가 마호메드 아라이와 면회하였다. 포옹과 악수를 나누었고, 아라이는 "가난 때문에 해적을 시작했고 그때는 그게 잘못된 지 몰랐으며 해적질 한 것이 죄송하다. 석 선장을 쏘려고 하지 않았고 많이 다쳤다고 해 많이 놀랐다."며 사과의 뜻을 밝혔다. 성실히 수감 생활을 하면 감형될 수도 있다는 석해균 선장의 말에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영상 석해균 선장은 "(자신을 납치한 해적들을) 이제 용서하게 됐다. 서로 입장을 바꿔 생각하면 그렇다."며 "나는 해적들이 대한민국을 돈줄로 생각하면서 자존심을 짓밟았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싸우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해적도 동료가 죽어나가는 것을 보면 선장인 나를 죽이고 싶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환경에 따라 어쩔 수 없었다고 이해하기로 했다고 발언했다. 기사 석해균 선장도 사건에 대한 두려움, 공포가 남아 있었는데, 아리아와 만나면서 그런 감정들이 많이 씻겨 나갔다고 했다.

3.4. 금미 305호


생포한 해적들을 얼마 전에 납치된 금미 305호의 선원들과 교환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헌데, 해적들이 워낙에 여러 세력으로 갈라져 있어서 종종 해적들끼리도 치고받고 싸울 정도다보니 금미 305호를 납치한 해적들이 이번에 소탕된 해적들과 같은 집단이라고 볼만한 근거가 별로 없다. 그리고 금미 305호는 결국 해적측에서 자진 석방하는 식으로 풀려났다. 인질이 살아있어야 하고, 그리고 때로는 붙잡은 금미 305호를 모선으로 이용해 해적질에 나서기도 했으니 기름과 식료품 값이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몸값 협상은 지지부진하고 아덴만 여명 작전도 벌어지고 하니… 금미 305호도 워낙 낡아서 모선으로 쓰기에도 부적합했고, 결국 그동안의 식비와 기름값만 받고(?) 풀어줬다고 한다. 덧붙여서 인질의 대부분은 같은 이슬람교도인 케냐 선원들이라 이 부분도 작용한게 아니냐는 추측도 있다. 다만 이슬람권 나라들도 해군을 보내 해적 소탕하고 다른 아랍권 및 동남아 이슬람 국적 배들도 납치되는 상황에서 꼭 들어맞다고 보기도 어렵긴 하다.
그런데 금미 305호의 기관장이 케냐 호텔에서 '''추락사'''하였다. 추락 원인은 현지에서 케냐 성매매 여성에게 화대 지급을 거부했다가 몸싸움이 벌어져 추락사한 것.

3.5. 석해균 선장에게 맞은 총알 관련 논란


석해균 선장의 몸에서 나온 탄환에 대해서 논란이 있었고, 결국 그 중 하나는 '''아군'''의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곳곳에 총알이 날아다니던 상황이었던만큼 작전에 참여한 군인들에게 그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는게 대세이다. 하지만 책임 추궁 차원이 아닌, 작전의 평가와 보완 차원에서도 진상 조사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의견들도 대두되고 있다.
그리고, 석해균 선장의 몸에서 발견된 AK-47 소총탄 1발도 조준탄이 아닌 튕겨져 맞은 유탄(流彈)[23]으로 분석된다는 기사도 등장했다.(수사본부 "해적 총알 1발도 튕겨져 맞은 것") 물론 그렇다고 해적들의 죄가 감해진다거나 정상 참작을 해야한다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해적이 석 선장에게 총을 난사했다는 그동안의 정부 발표에 대한 신뢰도가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그런데 미디어오늘의 보도라 타 언론에 의한 검증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거기에 선원, 해적, 도합 6명의 증인도 있으니...검찰 측에서도 이와 유사한 내용을 발표했다.그리고 뒤에서 서술하다시피 해적들의 사격으로 인한 총상은 유탄이 아닌 직접적인 사격으로 밝혀졌다.
위 보도와는 달리 오히려 아군의 탄이 유탄으로 예상된다는 보도가 있다. 그리고 아군의 탄이 유탄이라는 것은 사실로 밝혀졌다.
일단 지금까지는 총알 4발 중 AK-47 소총탄 1발, 총격으로 부서진 선박 파편 하나, 그리고 권총탄 1발이 확인되었다. 나머지 1발은 현지에서 분실. 뒤에서 서술되는 내용에 따르면 그 분실된 총알은 처음부터 총알이 아니라 선박 내부의 파편이였다고 한다.
사실 총알이 체내에서 발견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처음에 '관통상'을 입었다는 군과 정부 발표가 거짓말이라는 것인데, 거기다 '생명에 지장이 없다'는 물론 '석해균 선장이 있던 자리에서 교전은 없었다' '절대 UDT/SEAL 대원 총에 맞은 것은 아니다'라는 말까지 모두 거짓으로 밝혀지게 되었다.
국가 소송을 제기할 수 있을지의 여부도 문제. 이것은 국내에서도 발생할 수 있는 문제로, 가령 경찰관이 강도를 제압하기 위해 적법절차에 따라 권총을 발사하였는데 우연히 인근의 무고한 시민이 총알에 맞은 경우를 들 수 있다. 이때 시민이 국가배상을 청구할 근거가 없다. 이것은 행정법 교수들을 괴롭히고 있는 문제이다.
그런데 현재 석해균 선장 포함 선원 가족들은 오히려 UDT/SEAL 대원들에게 감사를 표명하고 있다. 과거에 군사 전문가들은 일반적인 인질 구출 작전에서 인질범들의 공격만이 아니라 교전에 휘말려드는 등 성공적인 작전이라도 인질의 30% 가량은 피해를 입을 것을 감수해야 한다고 했다. 다만 근 30여년 간의 인질 구출 작전 대부분이 점점 정교해지면서 인질의 희생이 크지 않은 경우가 많았을 뿐...
그 후, 최종적으로 부산지법 301호 법정에서 열린 해적재판에서 이국종 교수의 증언과 수사결과가 나왔다. 결론은 해적들은 직접사격으로 쏜게 맞았으며 석선장에게 치명상을 입혔고 해군의 탄환은 튕겨나간 유탄이라 근육층을 뚫지 못하고 가벼운 상처로 남았다는 것.[24]
부산지법 301호 법정에서 열린 해적재판에서는 해군의 탄들은 유탄이며, 해적들이 사격한 탄들은 직접사격에 의한 총상으로 판명되었다. 해적들의 총알은 위에서 아래쪽으로 발사됐으며 당시 석 선장은 몸을 피하면서 피격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석 선장의 주치의인 이국종 아주대병원 교수가 25일 오후 부산지법 301호 법정에서 열린 해적재판에서 증언했다. 이 교수의 이 같은 증언은 해적 마호메드 아라이가 엎드려 있는 석 선장을 향해 총을 난사했다는 검찰의 주장을 상당히 뒷받침했다.
반면 석 선장의 오른쪽 엉덩이 위쪽과 오른쪽 무릎 위쪽에서 각각 발견된 해군의 유탄에 대해서 이 교수는 "직사화기에서 발사된 총알이 근육층을 뚫지 못했다는 것은 직사(직선으로 발사)된 것이 아니라 어디에 맞고 튄 유탄으로 비교적 가벼운 상처를 입혔다"고 밝혔다. 분실된 총알 한발에 대해서는 "석 선장의 오른쪽 하복부에서 나왔으나 오만 현지에서 분실한 것은 탄환과 다른 은색이었고, 얇은 것으로 미뤄 철판 같은 게 튀어서 구부러진 것처럼 보였으며 탄환이라기보다는 파편이었다"고 설명했다. 이는 오만 현지에서 빼냈던 것이 처음부터 총알이 아닌 파편이였다는 뜻이다.
결론으로는 총상을 분석해보았을때 해적들의 총알로 입은 총상은 직접적인 사격으로 인한 총상, 대장과 간일부를 손상하는 치명상과 뼈가 몸밖으로 튀어나오는 상처를 입혔고 해군의 유탄들은 애초에 오조준으로 인한 직접사격이 아닌 어딘가에서 튕겨나서 맞은 도비탄이기에 근육층조차 뚫지못하고 몸속에 박힌 비교적 가벼운 상처인 것이였다. 재판의 자료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애초에 해군의 총상은 엉덩이쪽과 다리쪽에 있었고 부딪혀서 튕겨나간 유탄이 근육층을 뚫지 못하고 발견됐지만, 해적들의 총상은 몸 중심부에 사격했고 관통상에 장기를 손상시키고 뼈를 돌출시켰다. 눈먼 총알인 유탄과 직접적으로 사살하기 위해 사격한 총알의 차이이다.

3.6. 석해균 선장의 치료비 문제


석해균 선장이 아주대학교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면서 약 2억 원 정도의 치료비가 발생했다. 이 중 국민건강보험 측에서 지불한 약 8,800만 원 정도를 제외한 액수를 미지급하였다. 치료비를 내야 할 삼호해운이 법정관리에 들어가고 결국 파산하면서 치료비를 낼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2015년 2월, 아주대병원을 운영하는 학교법인 대우학원은 치료비를 받기 어렵다고 보고 이를 회계상 손실[25]처리했다. 대우학원의 추호석 이사장은 이사회에서 "정부에서 조치를 해줄 수 없다면 추후 다른 국가적인 재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좋지 않은 선례가 될 수 있다"고 발언했다. 관련 기사 이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정부가 석 선장을 영웅으로 추켜세울 땐 언제고, 정작 치료비 문제는 뒷짐지고 있느냐는 등의 비판이 일었다. 6년이 지난 후 정부에서 치료비의 대납을 검토하기로 했다.
2017년 12월 26일. 이낙연 국무총리의 주재로 열린 국무회의에서 석 선장을 치료한 의료 기관이 받지 못한 치료비를 일반예비비에서 지출하는 안건을 의결했다. 정권이 두 번 바뀌고 나서 완납한 셈.

3.7. 제미니호 피랍사건


2011년 4월 30일 케냐로 이동하던 싱가포르 선적의 제미니호가 소말리아 해적에 의해 납치되었다. 이들은 아덴만 여명 작전 당시 사살당한 8명에 대한 보상과 체포된 해적의 석방을 요구했다. KBS는 "사촌 중 한 명이 대한민국 특공대로부터 살해됐다. 한국 정부의 대응이 없다면 선원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우릴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해적의 인터뷰 내용을 보도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한국인 선원 4명이 총 582일 동안 납치되었고, 이 기록은 역대 최장 기록으로 남아있다. 이들은 2012년 12월 1일 석방되었다.

4. 반응


대체로 환영하는 분위기다. 군 당국에게는 사건 1년 전 천안함 피격 사건, 연평도 포격 도발으로 크게 실추되었던 국내외적인 신뢰를 회복하고, 사기를 고양시키는 전환점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당사자인 해군은 영토에서 1만km 넘게 떨어진 아프리카 해역에서 피랍된 선박 구조를 성공시키면서 천안함 피격사건 직후 위축되었던 대양해군 건설의 효용성을 부각시켰고, 이후 이지스함 추가 건조와 대형화된 차기 독도함 등의 후속 전력증강에도 힘을 얻게 되었다.
물론 댓글을 어느 정도 선별한다는 점은 있지만 당연히 한국이 잘했다는 주장이 주류이다. 미국 야후만 해도 순식간에 1만 6천개의 댓글이 달렸고 대부분이 한국을 잘했다고 평하고 부정하는 댓글들에는 집단 린치를 가했다.
작전이 실패한다면 이명박 정부에 엄청난 비난이 가해졌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군부만이 아니라 청와대 쪽에서도 나름의 큰 각오를 하고 결정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작전이 성공하긴 했어도 정치권에서는 정치적 견제등을 이유로 말이 많기도 하였다.
작전 성공 이후 업계에서는 해적과 돈을 주고 협상하는 것을 계속할 수는 없고 타협하지 않는 선례를 만든 점을 크게 환영하고 있다. 일부 관계자는 해적의 보복을 우려하지만 성공적인 구출 작전이 된 점을 감안하면 반대로 해적들이 한국선박의 납치를 기피할 가능성이 크다.[26]
한겨레는 이 사건을 완전히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다. '해적들의 인명피해 적지 않아'라는 기사로 간추리면, 해적들이 인명피해가 발생할 경우 인질무사주의를 포기하고 인질에게 상해를 입힐 가능성이 있으니, 예방이 중요하다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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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는 나아가 2011년 1월 31일 박노자'어쩔 수 없이 해적이 된 가난뱅이 8명을 “성공적으로” 죽였다고 기뻐서 난리 치는 우리를 과연 계속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가?' 라는 내용의 칼럼을 실었다.[27]

상식적으로 알려져 있듯이, “해적”이라고 하는 집단들은 붕괴된 국가가 더 이상 외국 어선으로부터 지키지 못하게 된 어장들을 빼앗겨 생계 곤란에 빠진 해안지구의 어민들이다. 이들의 인질 범죄를 당연히 합리화할 생각은 없지만 외세에 시달려본 한국인들은 과연 그들의 아픔을 약간이나마 이해해줄 만한 아량마저도 없는 것인가?

이런 구절이 나오는데, 문제는, 대다수 국민들은 해적들의 죽음에 기뻐한다기보다는 인질의 구출에 기뻐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는 도덕성과는 무관한, 전적으로 인식과 관계의 문제다. 우리가 평소 전혀 알지 못하고 관심도 없던 해적이 몇 죽었다 한들 그것이 어떤 기쁨이나 슬픔으로 이어지기는 힘들지만, 최소한 인질들은 생업에 종사하며 살아가는 무고한 일반인, 거기다 우리 국민이라는 점에서 직관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쉬운 대상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해적들은 사정과 동기야 어쨌건 무고한 이들을 상대로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이고, 이 사건의 인질이 된 선원들은 그저 생업에 종사하다가 졸지에 생사의 기로에 서서 끔찍한 일을 겪게 된 '''피해자'''다. 그러니 해적들의 죽음에 대해 도덕적 반성을 요구하는 것은 더더욱 무리한 주장이다. 상식적으로 저 배에서 고난의 시간을 겪었을 선원들이 아닌 그들을 납치한 해적들에게 더 인간적인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다 저 기사의 내용은 인질로 잡혔던 선장과 선원들의 가족들을 기만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당장 자신의 가족들이 죽을 위기에서 살아났는데 해적들을 옹호하는 칼럼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어떠한 감정이 생길지는 불보듯 뻔하다. 또한 작금의 상황에서 해적들의 인권을 존중하면서도 모두가 만족할 수 있게끔 해적 문제를 해결할 '실현 가능하면서 이상적인'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28] 어쨌거나 칼럼의 내용과는 무관하게 국민의 도덕성을 질타하는 듯한 모양새로 올린 한겨레의 저 타이틀은 누가 봐도 헛소리, 아무리 좋게 봐줘도 선정적이라는 비판은 면하기 어렵다.
정치권 반응을 모은 기사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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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작전을 계기로 다시 해군 헬기 떡밥이 나왔다. 링스로는 대규모 인원을 나를 수 없어서 위험하게 사다리를 타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며 더 큰 헬기를 도입하자는 이야기가 YTN에서 나왔다. 실제로 K-6 기관총을 장착하는 공간도 모자라서 대잠 장치들도 모두 제거했다. 조종사 2명과 기관총사수등을 제외하면 고작 1~2명이 더 탈 수 있다는 이야기다. 애초부터 헬기를 통한 강습따위는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삼호 주얼리호가 1만톤급이고, 삼호 드림호와 같은 초대형 상선은 30만톤을 윗돈다. 해적들도 사다리를 통해 피랍하기 때문에 이런 초대형 상선들은 대개 잘 피랍되지 않는다. 하지만 해적들은 시리우스 스타호(31만톤급) 같은 덩치 큰 배도 납치하는 데 성공했다. 이런 점을 고려해보면 더 큰 배가 납치되었을때, 사다리를 통한 선상진입은 지금보다 더 어려울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 일을 핑계삼아서 한국인을 상대로 보복을 감행하겠다는 해적들이 나왔다. 사실 해적들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보면 저런 엄포가 위협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그들로서는 더 이상 충돌을 피하는 것이 상책일 것이다. 해적의 목적은 국가를 상대로 배짱을 튀기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돈과 이권을 챙기는 것이니까 고분고분 몸값을 갖다 바치는 나라를 상대로 해적질을 하는 게 더 이득인 것이 당연하다.
물론 배짱 넘치는 해적들이 한국을 '길들여' 보겠다고 몇 번 더 시도할 가능성은 있다. 몇 번 더 뜨거운 맛을 보면 생각이 바뀌지 않을까?
다만 EU 해군에서 이번 작전에 대해 비슷한 우려를 공식적으로 발표하기도 했고, 소말리아 해적들에 당한 나라들 대부분이 무력 대응보다는 협상을 통한 해결을 선호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위 협박을 무시할 수만은 없다는 반응도 나온다. 그러나, 한국도 처음부터 무력대응을 한 것은 아니다. 삼호드림호 피랍사건 때 해적들에게 한국 정부가 협상을 위해 지급한 금액은 언론사마다 다르지만 '''대략 950만 달러'''로 알려져 있다. 해적들의 목적은 결국 납치한 배를 풀어주는 대가로 거액의 협상금을 받아내는 한탕주의인데, 한국 정부가 지급한 해당 금액은 상당한 거금이고, 그 결과 한국 선박이 해적들의 주요 타겟이 되는 역효과를 낸다는 점에서 협상이 최고의 정답은 결코 아니다.
한편 비슷한 시기 억류상태였던 금미 305호의 선원들은 의외로 2011년 2월 9일 오후 9시에 석방되었다. 몸값을 받지 않고 그냥 풀어준 것인데, 정확한 이유는 미상이지만 여러 정황과 증언으로 추측해볼 때 선장이 빚을 지고 있어 몸값을 받을 가능성이 없어보이고 선원들을 먹일 식량이 없어서 억류를 풀어준 것이며, 나아가 아덴만 여명 작전에 연관된 해적 단체간의 알력이 영향을 미쳤다고 판단되고 있다. 아마도 이 근거가 현실성을 인정받게 되면 해적들에 대한 강경 대응방침이 보다 탄력을 받게 될 것으로 예상되기도 하지만, 만약 다른 해적에게 인질을 넘겼다면 모두 끔살되는 참극이 일어났을 수도 있다.

5. 엠바고 요청과 무시


1차 교전 당시 대한민국 국방부엠바고를 요청했으나 국방부 기자단에 포함되어있지 않던 부산일보가 독자적으로 떡밥을 물어 보도한 탓에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고 후에 부산일보가 기사를 철회했으나 노컷뉴스미디어오늘이 부산일보를 인용하여 기사를 지속적으로 쓰면서 문제가 되었다. 덕분에 작전팀의 부상자만 나온 것처럼 전해서 사람들을 낚는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다.
특히 미디어오늘'''국방부가 엠바고를 요청한 사실까지''' 기사로 내면서 동시에 나포된 상태에서 군사작전 위험천만, 해적 소탕 군사작전 보도 이상하다 등의 기사를 올려 작전 자체를 위험하게 했다. 해적 사업이 점차 규모가 커지고 경험이 축적되면서 무슨 동네 어부들이 AK들고 WAAAGH!!를 일으키는 게 아니라, GPS 등의 장비까지 싣고 다니는데다가 해적들은 해외 언론들을 모니터링 하며 작전까지 짠다고 한다. 해적들 중에 한글을 아는 자가 있을지 없을지, 그리고 미디어오늘 등의 엠바고를 어긴 뉴스가 외신으로 번역되어 퍼졌는지 알 수는 없으나 여튼 언론으로서 매우 경솔한 행동이었음은 명백하다.[29] 첨언하자면 해적들은 이제 런던의 범죄조직과 연줄이 닿아 있고, 부족장들이 조직을 운용하면서 해외의 호텔에서 돈세탁을 하는 등 체계화된 범죄 조직의 성향을 띠고 있다.
심지어 일부 진보성향 인터넷 매체에서는 미디어 오늘의 실패 소식 보도만을 보고 정권의 실패...이제 '''북한'''과의 관계도 다시 생각해야 하는 등, 정치적인 이슈로 몰고 가기도 했다. 거기에다가 미디어오늘은 작전이 성공한 후에도 자신들이 엠바고를 깨뜨린 행위에 대한 반성은 전혀 없이 '''구출 군사작전 이명박 대통령 작품?''', '''막후서 진두 지휘 …공격 명령·대국민 발표에 보도통제까지?''' 같은 기사를 냈다...
그리고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아시아 투데이라는 인터넷 매체도 작전 성공 발표 몇 시간 전부터 네티즌들의 트위터에 단편적으로 올라온 작전 진행을 근거로 기사를 올리면서 엠바고를 깨뜨렸다. 덕분에 아시아 투데이는 국방부 출입이 금지되었고 이에 앙심을 품고 국방부의 전근대적인 언론탄압이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올려 징징댔다. 덤으로 미디어오늘 또한 긴급조치 이후 최악의 언론탄압이라며 기사를 써댔다.
또한 국방부의 엠바고는 사실을 은폐, 왜곡하기 위한 것이므로 엠바고를 깬 언론사들이 언론의 자유를 지킨 것이다 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엠바고는 '''보도금지가 아닌''' 단지 '''보도지연'''일 뿐이다. 엠바고가 해제되면 바로 기사가 나온다. 보도지연인 엠바고와 달리 (묵시적인) 보도금지는 오프 더 레코드라고 한다. #네이버 백과사전
그 외에 일각에서는 1차 작전 실패 때문에 국방부의 엠바고는 작전 기밀성 보존이 아닌 작전 실패를 가리기 위한 것(쪽팔림, 또는 사기문제 때문에)이라는 주장까지 나왔다. 물타기로 아무 말이나 막 해 본 것.
기어이 부산일보, 미디어오늘, 아시아투데이는 국방부 상대로 소송까지 걸었다.

6. 군 기밀 유지 부실 논란


해적들에게서 인질들을 구출해냈다는 기쁜 소식의 열기가 어느 정도 식어가면서 군의 홍보에 치중한 무차별적 공개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각종 작전 동영상 공개에 의해 작전 뿐만 아니라 각종 장비들(특히 무전 장비 등)이 공개되고, 일반적으로 특수전력은 얼굴까지 꼼꼼하게 가리는 것이 추세인 데도 불구하고 얼굴이 일부 노출되었다. 당장 구글에서 SAS델타 포스를 검색해보면, 얼굴은 전부 꼼꼼하게 모자이크하거나 두건과 선글라스로 완전히 가린 사진들이 즐비하다. 이는 전력 노출뿐만 아니라 대원과 그 가족, 주변 인물들의 안전 문제, 특히 보복 테러에 대한 안전 조치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얼굴이 드러난 대원은 크게 두가지 경우가 있는데, 한 가지는 해당 대원이 이미 언론에 노출된 유명인이라 고의적으로 일부러 유출하는 경우. 두 번째는 '''이미 전사했거나 전역해서''' 공개해도 상관없는 경우다. 그런데 얼굴이 드러남은 물론 소속 부대, 실명까지 마구 거론되었다. 과거 국지도발 등의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군과 정치가들의 마구잡이식 발표에 의해 군 기밀이 술술 새어나왔던 일이 다시 벌어질 판이었다.
이게 진짜 잘못인 이유는 따로 있다. 군이 한창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 마찬가지로 소말리아 해적에게 납치되었던 금미 305호는 '''아직도 억류 중이었다'''. 즉, 홍보를 통해 유출된 군 기밀 때문에 금미 305호의 구출 가능성이 더 흐려졌다는 말이다. 나중에 결국 금미 305호는 안전하게 풀려나긴 했지만, 당장의 성과에 환호하기에 바빠서 역시나 대한민국 국민인 금미 305호 선원들의 안전을 경솔하게 생각했다는 비난을 피하기 힘들게 되었다.
결국 국방위원회에서 여야 의원들의 군 보안 소홀에 관한 질타가 이어졌고, 국방장관은 앞으로 주의하겠다는 요지의 답변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고 한다. 마침내 기무사에서 조사에 나섰다. 최영함의 위성좌표와 헬기의 대응, 미 해군의 협조 등은 유사 작전을 위해 보안을 유지했어야 한다는 게 기무사의 판단이라고 한다.

7. 기타



국방부 제작 다큐멘터리

국방TV 본게임 24회 푸른 바다의 전설. 아덴만 여명작전

아덴만 여명 작전 4주기 기념 영상[30]
해군 관계자는 "팀장이 다치자 남은 대원들 사이에선 '반드시 작전을 성공시키자'는 분위기가 형성됐다."며 "오히려 이것이 남은 대원들의 투지를 불사르게 만든 것 같다."고 말했다.
청해부대는 이번 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 16일 출동 이후 매일 수차례 구출작전을 위한 모의훈련을 벌였다. 부산에 정박한 삼호해운 소속 삼호 주얼리 호와 동일한 선박의 내부 구조를 국내에서 화상으로 전달받아 연습에 활용했다고 한다. 또 국내에서는 구출작전에 알아둬야 할 선박의 특징을 면밀히 분석해 청해부대로 보냈다.
작전 1년 전 천안함 피격사건 당시 실종 장병을 구조하다가 순직한 한주호 준위가 이 작전에 참가한 UDT/SEAL의 교관이었다고 한다. 한 준위 역시 청해부대 1진에 최고령 대원으로 합류해 2009년 8월 바하마 선박 노토스스캔 호에 접근하는 해적선 퇴치 작전에 참가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작전에 사용된 사다리를 직접 만들었다고 한다.
한겨레에선 작전 성공 직후 찍은, 작전에 참가한 UDT/SEAL 대원들의 사진이라 해군이 공개한 사진이 사실은 2010년 말에 찍은 자료사진이라고 밝히며 큰 껀수라도 되는 양 대문짝만하게 1면에 올렸다 욕만 먹었다. 보통 특수부대 등의 사진은 보안 문제로 날짜와 인원을 실제와 다르게 조작해 발표하는 경우가 흔하다. 별 문제가 되지 않음에도 단지 정부를 깔 건수 하나 찾았다며 부풀린 것이다.
2019년 1월 이환경#s-2 감독이 아덴만 여명 작전을 영화화하기 위한 시나리오를 작업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개봉 예정 시기는 2021년 1월쯤이라고 한다. #
이 사건을 소재로 한 문제가 제7회 변호사시험 형사법 선택형에 출제되었다.(문제 36번)

8. 관련 문서




[사진설명] 배 선체에 있는 자국은 UDT 대원들이 피랍된 선박에 성공적으로 승선하기 위한 엄호 사격의 흔적으로,
사전에 인질들에게 피해가 없는 지역과 탄이 뚫을 수 있는 두께를 파악하여 목표로 삼은 곳이다.
[1] 이명박 이 2011년 3월 5일 수원 아주대 병원에 입원해 있는 석해균 선장의 병실을 병문안 차 찾아가 "(석 선장은) 함대사령관을 해야 될 사람이다. 선장이 걸어 나와야 작전이 끝난다."고 발언하여 언론에 보도된 바 있으나, 여기에 어떤 '군통수권자로서의 작전일정에 관한 명령' 같은 전술적인 의미는 부여되어 있지 않다. 당시 석해균 선장은 수술이 잘 끝나 의식을 회복한 상태였으며, 마호메드 아라이를 비롯한 생포 해적 피의자들이 미결수로 구속되어 있는 상태였다.[2] 미 해군 구축함 USS Shoup(DDG-86) 및 항구적 자유 작전에 참가 중인 전투・의료 병력 지원.[3] 오만 왕립 해군 미사일 고속정 파견 및 의료 지원.[4] 구축함으로 해적 탐지 및 작전 지원.[5] 해사 40기, 현재 준장[6] 중기관총 사격을 받자 네명 모두 배를 버리고 헤엄쳐서 삼호주얼리 호에 복귀한 것으로 확인되었다[7] 해적들은 보트 2척과 총 6정, 30발 탄창 6개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8] 이국종 교수가 펴낸 골든아워 1권에 따르면, 당초에는 서울의 모 대형병원 중환자의학 전공팀이 파견된다고 하여 이국종 교수는 현지로 갈 생각을 접었으나, 한밤 중에 외교부로부터 그 의료진이 갈 수 없게 되어 이국종 교수팀이 가줄 수 있겠는가라는 부탁을 받았다고 한다.[9] 이국종 교수와 함께 아주대학교 중증외상센터 설립부터 함께 해온 초 베테랑 간호사이다.[10] 이국종 교수가 계약서에 서명하고 보내려하자 김지영 코디네이터가 교수님 미쳤냐며 종이를 갈기갈기 찢어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국종 교수는 몰래 팩스를 다시 받아 사인해서 기어코 보내버렸다. 잠시 뒤 이 사실을 안 김지영 코디네이터는 얘기를 듣다 말고 그냥 방을 나가버렸다고.[11] 자세한 경위는 이국종 교수의 저서 골든아워 1권에 서술되어 있다.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국종 교수가 맞닥뜨린 당시 상황은 절체절명의 연속이었다. 국내 의료계의 질시, 정부부처의 무관심과 소극적 협조 등 온갖 상황에 짓눌려야만 하는 이국종 개인의 심정이 생생히 묘사되어 있다.[12] 이국종 교수가 여러차례 '중증외상센터' 정책은 그의 것이다 라고 표현할 정도로 중증외상센터 설립과 운영 정책에 공이 큰 사람이다. '골든아워' 책에 허 위원 이라고 표현하는 사람이 이 분이다. 제20대 국회의 종료를 4개월 앞두고 김성수 전 의원의 국무총리비서실장 임명으로 인해 궐위된 비례대표 의원직을 승계 받았다.[13] 당시 국토해양부[14] 관련기사(한국경제신문)/관련기사(세계일보)[15] 연합뉴스기사[16] 생포 당시 선원들은 "저놈이 가장 악질이다. 저놈만큼은 여기서 죽이고 가지 왜 살려서 데려가느냐?"고 UDT/SEAL 대원들에게 항의하기도 했다.[17] 아랍 에미리트 왕실 전용기가 쓰인 까닭은 이명박 의 아이디어로 UAE 무함마드 왕자에게 부탁한 것으로, 왕실기는 대통령 전용기와 마찬가지로 '군용특별기'로 간주돼 민항기나 군수송기가 지켜야 하는 국제규정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편이어서 시간 단축이 가능했기 때문이다.[18] 2011고합93[19] 2011노349 2011도12927[20] 이전에 네덜란드 해군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은 한 해적 역시 '''난생 처음으로 하루 3끼 식사와 침대에서 잠을 자는 호강'''을 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가족까지 데려다가 감옥에서 살고 싶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21] 현 시대에서는 인터넷과 사회에서 단절되는 것 자체만으로 큰 징계나 다름없지만, 저 해적들이 모국에서 인터넷 같은 걸 썼을 리가 없으니...[22] 대한민국의 국적법상 강력범죄자의 귀화나 망명을 불허하고 있다. 법무부 관계자에 의하면 전과자라고 모두 귀화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지만, 죄질이 심하고 고의성이 강하면 통과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형기가 끝나게 되면 강제추방 형식으로 쫓아낼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익히 알려져 있듯이 해적들의 모국인 소말리아가 악명높은 무법천지라 실제로 쫓아낼지는 석방까지 두고 봐야 알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23] '''유탄발사기'''의 그 '''유탄(榴彈)'''이 아니다. 발음만 같고 한자도 뜻도 전혀 다른 단어이다. 인터넷에서 이 두 단어를 혼동하여 잠시 논란이 있었다. 애초에 유탄발사기의 유탄(榴彈)에 사람이 맞으면 시체도 못 찾는다.[24] 기사 제목 '이국종 "석해균 선장, 해적 탄환에 치명상"'[25] 돈을 받아낼 기대를 포기한다는 뜻으로, 사실상 병원 측에서 비용을 대신 부담한 셈이 되는 것이다.[26] 실제로 소말리아 해적은 러시아는 잘 안건드리는데 그 이유는 러시아는 해적들이 건드렸다 하면 자국민이 있건없건 강경하게 나오기 때문 해적들이 무슨 군벌도 아니고 잘해봐야 먹고 살 길이 없어서 해적질에 뛰어든 만큼 인질을 잡아봐야 인질째 날려버리는 걸로 화답하니 차라리 다른 국적의 배를 노리는게 낫다.[27] 물론 박노자의 본국인 러시아는 그런거 없고 해적이 아닌 불법 조업 어선도 폭파시켜버린다.[28] 일단 해적들을 아무도 안 족게 하고 우리 역시도 아무 희생자도 내지 않고 일을 해결하는건 거의 불가능하다. 해적들이 순순히 투항한다면 이게 가능하겠지만 자기네들 잡으러 온 사람을 보고 잽싸게 투항한다? 그런게 가능할까? 사례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게 대세일 정도라면 해적질보다 더 가벼운 위법행위들을 저지른 사람들은 바보라서 자수 안하는 것일까?[29] 엠바고가 군사적으로 얼마나 중요한지는 당장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영국에서도 몇 천 명의 생명을 살린 사례에서 알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V2 문서 참조.[30] 카이샷으로 촬영된 것으로 링스헬기의 총격 장면과 UDT요원들이 보트를 타고 선박에 진입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