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봉규
1. 개요
前 두산 베어스, 삼성 라이온즈의 외야수, 등번호는 24번이지만 2006년에는 1번을 단 적이 있다. 1번을 단 적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성의 1번라인에 끼어들지 않는 이유가 두산 베어스 시절때부터 24번에 대한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이라고 한다.[4]
기본적인 포지션은 좌익수이나 1루수도 겸한 적이 있다. 우승경력은 2001년 두산 시절, 2006년, 2011년, 2012년 삼성에서 했다. 여담으로 삼성 외야수 중 몇 안되는 우타자이다. 웬만한 외야수들이 전부 좌타자이기 때문에 강봉규의 희귀성(?)이 부각되는 부분. 그러나 타격코치로선 엉망이다.
2. 선수 생활
경남고, 고려대 체육교육학과 재학 시절 3루수에 4번 타자로 활약했으며 고려대 재학 시절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대표팀에 뽑혀 병역 특례를 받았다. 아마추어 시절에 상당히 좋은 기량의 3루수로 인정받았다. 경고 시절에는 투수로도 활약했으나 대학 진학 후 타자로 정착했다. 박재홍과 같은 경우.
프로에 데뷔하자 마자 삼진을 당하는 굴욕을 당했다. 또한 하필이면 지명받은 팀인 두산 베어스의 3루수가 국가대표 3루수인 김동주였던지라, 이 때문에 기회를 얻지 못하고 외야로 전향해 1,2군을 나도는 생활이 계속되었다.[5][6]
결국 프로 데뷔 이후에는 아마 시절만큼만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며 두산에서 설 자리를 잃었고, 2006년 시즌 개막 직전에 김창희와 함께 강동우를 상대로 삼성 라이온즈에 트레이드됐다. 김창희와는 두산으로 이적한 뒤에 한솥밥을 먹기 시작했으며 친한 선후배 사이. 2009 시즌 종료 뒤 김창희가 은퇴한 뒤로는 홀로서기에 서 있다.
두산 시절에는 비중이 없었으나 삼성으로 이적하고 와서는 비중이 늘었다. 이적 첫해 류현진을 상대로 홈런을 친 후로는 좌완투수 상대로 출장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여담으로 이 시기 강봉규는 나름 특이한 기록을 하나 가지고 있는데, 2007년 7월 13일 수원 현대전에서 연장 12회에 대주자로 투입된 뒤 그 이닝에 타석에 서서 홈런을 기록한 것. 이는 1982년 프로야구 출범 이후 역대 4번밖에 없는 기록이다.[7]
2009 시즌 김상수에게 응원가를 빼앗겼지만, 정작 김상수보다 타석에 들어서는 횟수가 더 많다. 라기보다 김상수의 간염으로 인해 2군행으로 오히려 타석에 있는 비중이 늘어 났다. 그리고 2010 시즌에는 노라조의 고등어를 응원가로 정했다고….
2.1. 2009 시즌
2009년 6월 28일 현재 타율 0.320으로 팀 내 안타 1위를 기록하며 3번타자로 맹활약하고 있다. 한때 양준혁과 함께 팀내 둘뿐인 3할 타자로서 팀 타선에 없어서 안 될 존재로 부각되었으며, 양준혁이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하고 나선 완전히 개화하여 삼성의 신진 타자 3인방과 함께 막강한 폭풍 타선을 구축했다.
마침내 2009 시즌에 19홈런을 넘기면서 데뷔 후 9년 동안 친 18홈런을 한 시즌 만에 추월했다.
그리고 9월 25일, 20-20 클럽에 가입했다. 신명철과 함께 한 시즌에 한 팀에서 두 명의 20홈런-20도루가 나온 것. 동갑내기 신명철과 함께 화려하게 커리어 하이를 찍었다. 원래는 김창희와 파트너였지만, 2009 시즌에는 신명철과 쌍두마차 중 파트너가 되었다.
불암콩콩코믹스의 영향 탓인지 강쩌리라는 별명이 튀어나온적도 있다. 실제로 상당한 2군 무명 쩌리 생활을 극복하고 2009년도 골든 글러브 수상도 유력시되었던 인간승리의 선수. 거기에 성실함과 순박한 인간성까지... 그 덕에 작년부터 꾸준히 '봉느님'으로 불렸다.
나가시마 기요유키 타격코치의 지도가 꽤 잘 먹혔던 시즌이기도 하다.
2.2. 2010 시즌
2009년의 활약까지 더해져 2010년도 새 주장을 역임하게 되었다. 그 덕에 '''봉주장'''이라는 새로운 별명이 생겼다. 그리고 시즌초 추위를 막기 위해 복면을 하고 수비를 하다 실책을 해서 '''강복면'''이라고도 불린다.
2010 시즌에는 태평양 존으로 바뀐 스트라이크 존에 적응하지 못해 애를 먹었다.[8] 2010년 3월 31일 광주 KIA전에서는 도저히 일반 상식으로는 납득되지 않는 스트라이크 존에 의한 삼진을 당하고 덕아웃에 헬멧을 벗어 던지는등 심판에게 강하게 어필, 2010 시즌 첫 퇴장을 당했다. 여태껏 한번도 항의하지 않았을 정도로 순한 성품인 강봉규가 퇴장을 당했을 정도.
견제도 많이 받고 해서 타격이 엉성해져서 2010 시즌 초중반 결국 2군행. 이후 복귀하였으나 역시나 계속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양준혁의 은퇴 건과 관련하여, 엠엘비파크의 삼성팬들에게 선동열과 함께 죽어라 까였다. 양준혁과 포지션이 겹치는 다른 선수들은 나이가 젊다거나 성적이 좋다는 이유로 덜까인데 비해 강봉규는 젊지 않은 나이에 성적도 최악이었던 만큼 폭풍처럼 까였다. 그런데 못해서 까이는 거야 할말없지만 사실 양준혁과 강봉규는 전혀 상관이 없다. 당시 양준혁의 자리를 차지한 것은 이 해 각성하면서 지명타자와 1루에 번갈아 출장한 조영훈과 조동찬이며 강봉규에게 진짜로 자리를 뺏길 뻔 한건 당시 FA를 빌미로 선동열이 팀에서 쫒아내려고 했던 '''박한이'''다.[9]
강봉규는 두산 베어스와의 2010년 플레이오프에서 7타수 1안타 1득점, 타율&장타율&출루율 .143를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3승 2패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강봉규는 SK 와이번스와의 2010년 한국시리즈에서 5타수 2안타 1홈런 1볼넷 1타점 2득점, 타율 .400, 장타율 1.000, 출루율 .500을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4패로 준우승에 그쳤다.
강봉규는 2010년 포스트시즌에서 12타수 3안타 1홈런 1볼넷 1타점 3득점, 타율 .250, 장타율 .500, 출루율 .308를 기록했다.
2.3. 2011 시즌
2011년 3월 23일 시범경기 중 김상수와 충돌로 왼쪽 엄지 골절로 7월 12일에 1군에 올라왔다. 하지만 강봉규가 올라오기 전까지 모두 그를 잊고 있었다. 안습
SK 와이번스와의 2011년 한국시리즈에서 16타수 5안타 1홈런 1볼넷 2사구(死球) 1도루 1타점 3득점 타율 .313, 장타율 .500, 출루율 .421을 기록하여 삼성의 한국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특히 잠실 야구장에서 열린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SK의 선발 투수 고든을 상대로 4회말 1사 상황에서 결승 솔로 홈런[10] 을 쳐서 팀의 0:1 승리와 팀의 우승을 확정지었고 5차전 MVP로 뽑혔다.
2.4. 2012 시즌
4월엔 주춤했으나 5월부터 방망이가 조금씩 터지기 시작. 이따금씩 홈런도 터뜨리며 외야진의 한 축을 담당하였었다. 다만 사실상 외야~지명타자 라인이 배영섭 - 정형식 - 박한이 - 최형우로 고정된 상황이라 좌투수 상대로 정형식이나 박한이를 대신해 나오는 정도로 출전하였는데....
조영훈이 KIA 타이거즈로 이적하고 채태인과 모상기는 부진에서 헤어나오질 못하는 상황에서 이승엽의 1루 백업이 없는 상황에서 '''1루수 백업'''으로 선택되었다. 처음 1루에 섰을때는 1루수의 기본적인 수비에서 실책을 하는 등 불안한 모습을 노출하였으나 점점 적응하며 훌륭한 1루수 백업 역할을 수행했다.
팀이 시리즈 전적 2승 1패로 앞선 10월 29일 문학 야구장에서 SK 와이번스와의 2012년 한국시리즈에 4차전에 상대 선발 투수인 좌완 김광현을 상대로 선발 좌익수 겸 6번타자로 출장했지만, 2타수 무안타를 기록했고 6회초에 대타 정형식으로 교체되었다.
이날 팀은 스코어 1:4로 패했다.
강봉규는 2012년 한국시리즈에서 2, 3차전은 대타, 4차전은 선발 좌익수 겸 6번타자로 출장하여 4타수 무안타, 타율&장타율&출루율 0을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4승 2패로 우승하여 2년 연속 페넌트레이스&한국시리즈 우승을 달성했다.
2.5. 2013 시즌
시즌이 시작하기도 전에 오른쪽 어깨와 손목부상으로 인해 재활군에서 시즌을 시작하게 되었다. 시즌 초반에 삼성이 또 부진하자 수많은 삼팬들이 강봉규를 찾으러 다녔을 정도. 심지어 채태인이 선발 출장한다는 소리에도 반응이 민감하여 제발 채태인 넣지 말고 강봉규 1루 세우라는 말도 많이 돌았었으나, 채태인이 2013년 초반 각성한 모습을 보이며 공수에서 맹활약하는 모습을 보이자 자연히 묻혔다.
4월 30일부터 2군 경기에 출장하기 시작했고, 5월 23일 2군으로 내려간 채태인을 대신해서 1군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5월 26일까지 9타석 무안타 행진 중(…)이었으나 5월 30일 SK와의 경기에서 1회초 승부에 쐐기를 박는 좌중간 2루타를 기록함으로서 본인의 시즌 첫 안타, 첫 타점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다시 6타석 무안타를 기록하였고 6월 2일에 다시 2군으로 내려갔다.
8월 20일 채태인이 어깨 통증으로 2군으로 내려가면서 대신 1군으로 올라왔다.
2.6. 2014 시즌
윤성환, 안지만 등과 계약을 매듭짓지 못하면서 스프링캠프에 따라가지 않게 되었다. 근데 두 사람 때문에 기사나 팬들이나 언급을 거의 안하는 상황이다. 안습.
# 기사에 의하면 구단과 플레잉코치냐 현역이냐의 문제로 아직 미계약인 상황이었다. 일단 1월 23일 자 기사에 의하면 5천만원 삭감된 1억 원에 재계약을 체결했다고 한다. 어깨 통증 탓에 스프링캠프는 못 가고 국내에 남아 재활훈련을 하고 있다고 한다.
정규시즌 개막 후 2군 경기에도 안 나왔는데, 4월 15일에 오른쪽 팔꿈치 뼛조각 제거 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경기에 출장하지 못해 시즌 후 방출설이 나돌기도 했지만, 팀에 잔류하였고 15년 1군 스프링캠프에 합류했다.
2.7. 2015 시즌
채태인이 부상을 당한 공백 + 1군 엔트리 1명 확대 메리트를 입어 우타자 대타 요원으로 엔트리 한 자리에 합류했다. 간혹 가다 구자욱이 수비가 불안한 면이 있어 몇몇 팬들은 강봉규를 1루에 세우자는 이야기도 하고 있는 중.
4월 9일 롯데 자이언츠전에서 팬들의 바람대로 구자욱이 빠지고 강봉규가 1루수로 선발 출장했는데, 수비는 그럭저럭했지만 타석에서는 완전히 빠지는 공에 스윙하면서 삼진만 2번 당했다. 결국 4월 10일 채태인이 복귀하면서 대신 2군으로 내려갔다.
2군에서는 주로 지명타자로 출장하면서 66경기에 출장해 48안타 6홈런 26타점 29득점 .318의 타율을 기록했다. 9월 초만 하더라도 류중일 감독은 우타 대타감으로 언급했지만, 이후 제대하는 배영섭을 제대 직후 등록하겠다고 말했다. 2군에서 수비를 거의 보지 않았다는 점이나 1군에서도 실망스런 모습만 보였기에 더 이상 강봉규를 1군 전력감으로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올해도 몇 경기 못나온데다가 나이가 나이인지라 은퇴, 방출되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결국 2015시즌 이후 본인이 방출을 선택했다. 불러 주는 팀이 없을 경우 해외로 지도자 연수를 떠날 생각이라고 한다.
최근 근황이 올라왔는데, 독일 야구 리그에 진출한다고 밝혔다. 삼성 시절 팀 동료였던 릭 밴덴헐크(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추천으로 독일 레겐스부르크를 연고로 하는 베이스볼 분데스리가의 부흐빈더 레지언나레팀에입단하게 되었다.
2.8. 2016 시즌
4월 2일 베이스볼 분데스리가 첫 개막전 슈투트가르트 레즈와의 경기에서 5타수 무안타를 기록했지만 희생타로 1타점을 만들었고 그 다음날 경기에서는 5타수 1안타 1타점을 기록해 데뷔 첫 안타와 타점을 신고했다. 4월 9일 튀빙겐 호크스 경기에서는 데뷔 첫 2루타와 볼넷 2개 득점 하나를 만들었다.
6월 18일 바트 홈부르크 호넷츠의 경기에서 독일에서의 첫 대활약을 펼쳤는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친 홈런을 포함하여 안타 3개 타점 4개 볼넷 1개 득점2개를 기록해 대승을 거두는 토대를 마련했다.
하지만 프로 출신으로 세미프로리그인 독일에서조차 성적은 좋지 않아 내년을 기약할 수 없기에 시즌 후 베이스볼 분데스리가를 마지막으로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2.9. 연도별 성적
3. 지도자 생활
2016년 11월 22일, 삼성 라이온즈의 코치직을 수락했다. 3군 타격코치를 맡고 있다가 1군 타선의 부진으로 4월 25일 1군 보조 타격코치로 보직이 바뀌었다.
3.1. 2017년
2017년 5월 21일 한화전 벤치클리어링에서 주먹과 발로 선수를 폭행하려 하는 장면이 잡혔으나, 퇴장당하지는 않았다. 결국 김재걸 코치와 함께 5경기 출장정지와 벌금 300만원의 징계를 받게됐다.
3.2. 2018년
1군 메인 타격코치였던 김종훈이 2군 타격코치가 되면서 단독으로 1군 타격코치를 맡게 됐다.
3.3. 2019년
'''김태한조차 능가하는 무능한 철밥통 코치'''다. 5, 6월 근래 대구FC보다도 못한 득점력을 보여주는 삼성의 타자들, 이 사태의 1순위에 강봉규 코치가 있다.
7월 17일 드디어 2군으로 내려갔다. 반대급부로 조동찬 코치가 등록되었다.
시즌 후 일부 코치들이 팀을 떠난 것과 달리 팀에 남았는데, 오주승 전력분석원[11] 에 따르면 시즌 중 세이버메트릭스에 대해 알려달라고 했다고 한다.# 허삼영 신임 감독이 데이터를 중시하는데, 코치로서 성과는 별로였다지만 나름대로 데이터에 대해 공부하는 모습이 있어 팀에 잔류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4. 여담
정준하의 매니저였던 최종훈과 닮았다. 그래서 한때 별명이 강코디(…).
2010년 12월 26일 고려대학교 교우회관에서 자신의 팬과 결혼했는데, 신부가 삼성전자의 해외 영업 팀에 재직 중이라고 한다. 방출 후 심경을 밝힌 기사에도 나와 있지만, 비 시즌 중의 거주지는 경기도 광교인 듯하다. 2013년 1월 2일에 득녀했다.
2016년에는 독일에서 다시 현역생활을 하기도 했었다. 유럽에서 야구를 하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서 진출한 거라고 한다. 인터뷰 영상
[1] 2012년부터 이승엽의 백업으로 1루를 보게 되었다. [2] 빛과 그림자 OST. 강봉규 안타 강봉규 안타 최강삼성 강봉규 안타 오오~로 부른다...[3] 여담이지만 김상수에게 전에 썼던 응원가를 뺏긴 적이 있다(...)[4] 삼성의 1번라인은 황규봉 - 류중일 - 강동우 - 윤성환[5] 재밌는 건 이 김동주도 데뷔시즌에는 3루에 안경현이 있었기 때문에 외야수로 뛰었다는 점. 1999년부터 안경현이 2루로 이동하며 김동주가 3루수를 맡게 되었다.[6] 그래도 2001년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백업 멤버로 승선하며 두산에서 우승반지를 하나 획득했다.[7] 나머지 셋은 전상렬, 박용근, 김준완.[8] 거의 1980년대 수준인 이 일관성 없는 태평양 스트라이크존은 역대 KBO 정책 중 손꼽히는 병크가 되었다.[9] 다행인지 불행인지 강봉규가 폭망하면서 선동열이 어쩔수없이 오정복과 함께 박한이를 기용했지만, 타격감이 좋은 데도 억지로 7번 타순에 박는 등 홀대는 여전했다. 시즌 후반 당시 상위타순과 클린업에서는 뇌진탕의 후유증으로 채태인이 고전했으며 경험 부족으로 이영욱, 조영훈은 밑천을 드러냈고 조동찬이 부상을 당했다는걸 생각할때 이는 명백한 선수 죽이기이다. 류중일이 장타력있는 "강한 2번"을 천명하며 14년까지 박한이를 2번에 기용, 배영섭 or 안타-박한이 2루타로 경기초반을 풀어나간것과 대비되는 셈이다.[10] 2011 시즌 강봉규의 홈런 개수는 '''단 하나였다!!''' [11] 비선출로 통계 관련 데이터를 전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