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박/선수 경력
1. 개관
성인무대에서 모든 포지션에서 뛴 적이 있으며, 역대 최고의 유격수 중 하나로 손꼽힌다. 그야말로 공격, 수비, 주루 삼박자를 모두 갖춘 선수라는 찬사를 받았다. 77년 니카라과 슈퍼월드컵 대회에서의 활약 이후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킨테츠 버팔로즈 등 일본프로야구팀에서도 영입 움직임이 있었을 정도. 특히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대 일본전 8회말에 시전한 일명 '''개구리 번트'''는 야구인들이라면 누구나 봤을 명장면으로 김재박의 야구센스를 보여주는 장면. 1분 40초부터 보자.
흔히들 말하는 김재박 - 류중일 - 이종범 - 박진만 - 강정호로 이어지는 대한민국 국가대표 유격수 계보의 첫 번째 선수. 야구 오래 보신 어르신들은 김재박 이후로 그만한 유격수는 없다며 계보 같은 거 인정 안 하시는 분들도 많다.[1] 20년이 넘게 지났는데도 그만큼이나 인정받고 있는 셈이다. 대체로 이 시기 김재박에 대한 회고는 '''아예 수준이 다른 유격수.''' "다른 선수들이 고교야구 수준의 수비를 하고 있을 때 혼자 프로야구 유격수처럼 플레이했다"는 기록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수비 하나때문에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도 통했을 거라는 이야기도 있다. 특히나 한국실업야구 특성상 시즌이 끝난후엔 한국화장품 선전과에서 근무하는 직장인으로써도 활동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더욱 대단한 것들이다.
2. 유소년 시절
중-고교 시절 김재박의 커리어는 생각보다 좋은 편은 아니었다. 당시 키도 작았던 데다 어깨도 좋은 편이 아니었고 이러한 체격조건 때문에 번번히 입학을 거절당했다. 대광고등학교에 입학할수 있었던 것도 경북고등학교에 입학하길 희망했지만 무산 되면서 오갈데가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막 창단한 신생팀이었던 대광고등학교에 갈수 있었던 것은 때마침 서울로 이사를 가게 되었던 데다, 대광고등학교는 신생팀으로 선수가 부족해 자리가 났기에 입학할수 있었던 것.
고등학교 시절에는 2루수로 활약했고 선수층이 얇았던 팀 사정상 투수로도 뛰었다.[2]
1972년에 처음으로 결승에 진출했으나 결승전에서 뼈아픈 실책을 기록하며 1:0 패배에 일조하기도 했다. 하필 상대 팀이 다른 팀도 아닌 경북고였다. 별다른 성적을 내지 못하고 졸업했지만 대학팀에서도 받아주는 곳이 없었고, 때마침 영남대학교에서 받아주어서 영남대로 진학하게 되었다. 이당시 영남대도 야구부를 창단했을 때였다.
1학년 때에는 왜소한 체격으로 몸을 불리는데 중점을 두고, 서킷이나 웨이트를 통해 1년 6개월 동안 몸을 단련했다고 한다. 그리고 2학년부터 출전해 대학 리그 수위타자가 되었고 대학 연합팀에 선발되어 일본으로 원정하게 되었다. 이 때의 활약으로 대표팀에 차출되어 대만으로 가게 되었다고 한다.[3] 3학년이 되어서 대학 리그 우승과 MVP t선정의 위엄을 이루고 제 11회 아시안 게임에 차출되었으며, 마지막 4학년 시절에도 영남대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3. 한국실업야구
대학 졸업후 한국실업야구팀 한국화장품 야구단에 입단했다. 한국화장품도 이 해에 창단해 창단 멤버로 활약했다고 한다. 데뷔시즌이던 1977년 엄청난 포스를 보여주며 팀을 전기리그 통합 결승전까지 이끌어 올렸으며 결승전에서도 환상의 플레이를 보이며 우승을 이끌기도.[4] 데뷔시즌이던 1977년 한해동안 그가 이뤄낸 기록은 다음과 같다.
무려 타율, 홈런, 타점, 도루, 출루율[7] 1위에 등극하며 최종 '''8관왕'''을 기록한 것이다.[8][9]
실업야구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1977년에는 최동원과 함께 니카라과에서 열린 대륙간컵 우승을 만들어내며 대한민국 야구대표팀 최초의 국제대회 우승컵을 들어올리는데 일조한다. 이때 김재박의 기록은 54타수 23안타 .426으로 타격왕, 최다안타왕, 도루왕을 기록해 세계대회 3관왕이라고 한다.. 또한 81년 대륙간컵에서도 대회 베스트9에 선정되는 등 국제대회에서도 자신의 진가를 어김없이 드러냈다.
4. KBO 리그
김재박은 실업야구 시절 이선희, 최동원 등과 함께 강한 임팩트를 남겼던 선수였다. 이 때문에 1982년 MBC 청룡은 OB 베어스에 박철순을 넘기면서까지 그를 1차 지명했는데 한국프로야구 출범 당시 1차 지명은 원칙적으로 구단의 해당 연고지역에서 고등학교를 나온 모든 선수를 지명할 수 있었다. 다만 서울특별시 지역은 연고팀이 MBC였지만 OB 역시 5년 후 서울로 연고를 이전하기로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MBC와 OB가 2:1 비율로 서울권 선수를 지명하는 방식을 택했다. 박철순은 이 해 OB 베어스의 지명으로 프로무대에 데뷔했고, MBC 청룡은 박철순을 포기한 대가로 김재박과 함께 이해창을 얻게 된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김재박은 고등학교만 제외하고 초등학교[10] , 중학교[11] , 대학교를 모두 대구·경북지역에서 다닌 대구토박이다. 그런 그가 고등학교만 서울에서 다녔던 것은 당시 영남야구의 자원이 하도 좋아서 자신이 도저히 그 안에서 경쟁할 수 없었던 까닭이라고 한다(…)[12][13] . 실제로 이 시대 경북고와 대구상고의 황금세대는 삼성 라이온즈 출범 멤버로 흡수되어 강력한 선수진을 구성하게 된다.
프로야구 출범 당시 김재박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 대회에서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선수로 선발[14] 되어 있었기 때문에 1982년 시즌 대부분을 뛸 수는 없었다. 하지만 1982년 시즌을 아주 못 뛴 건 아니다. 세계야구선수권대회가 끝나고 나서 바로 청룡에 입단하였다. 그해 잔여경기 3경기에 출전하여 13타수 무안타의 성적을 남겼다.
그래서 다른 국가대표 멤버들과는 달리 김재박은 프로야구 원년 멤버로 인정받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3년 정식으로 프로무대에 등장한 김재박은 실업야구 시절에 비해 노쇠한 상태였다. 실업야구 시절이 그의 전성기였고 김재박의 프로야구 통산 성적은 생각만큼 그리 대단하진 않다. 김재박이 프로에 데뷔했을 때 만 28세-29세였기 때문. [15] 그래도 그 이름값이 아깝지 않은 플레이로 유격수의 중요성을 대한민국 야구팬들의 뇌리에 깊이 새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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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명성에 걸맞게 자존심도 셌기 때문에 당시 MBC 청룡의 실질적인 리더 역할을 했고[16] 1983년 한국시리즈에서는 감독이었던 김동엽과 대립각을 세우기도 했다. 이후 MBC가 LG로 바뀔 때까지도 선수생활을 계속했다. 그러나 기량이 쇠퇴했음에도 불구하고 주전기용과 연봉문제에서 양보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LG는 부득불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그를 태평양 돌핀스로 트레이드하였다. 김재박도 약 100개 정도 남은 프로에서의 개인 통산 1000안타 달성에 대한 미련이 있었다.[17] 이 때 입단동기이자 팀의 또 다른 리더였던 이광은은 순순히 유니폼을 벗는다. 당시 LG그룹의 최고위층에서 "대스타인 김재박을 돈 받고 파는 것은 LG라는 팀에 어울리지 않고 김재박에 대한 예의도 아니다. '''돈을 받지 말고 그냥 풀어주라'''"라고 지시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15년 후 한 야구 전문기자는 이 트레이드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선수 김재박은 별 볼일 없는 노장이었다. 그러나 '''감독 김재박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물론 김재박이 LG에서 볼 꼴 못 볼 꼴 다 보기 직전이라 이런 말이 나오긴 했지만.
5. 여담
LG 트윈스 선수시절 세제 광고에도 나오기도 했다... 광고에 나온 성우가 사오정 성우이다.
선수 시절의 눈부신 활약 덕분에, 그의 등번호 7번은 대한민국 야구계에서 유격수라면 누구나 달고 싶어하는 번호가 되었다. 이종범, 박진만, 이범호[18] , 김상수 등이 그의 영향을 받아 등번호를 7번으로 달았다.
1985년 투수로 경기에 등판한 기록이 있고, 1990년에는 포수를 보기도 했다. KBO 리그에서 포수와 투수 포지션을 동시에 경험해본 야수는 김재박 외에도 최동수와 최정, 강백호, 노시환이 있는데, 김재박은 이 중 유일하게 '''승리투수''' 기록까지 세웠다!
경향신문에 따르면 1984년 어린이들의 좋아하는 운동선수 1위에 오르기도 했다. 그의 인기와 명성을 실감나게 하는 대목.
6. 연도별 주요 성적
- 한국야구위원회 기록실에 표기되는 리그 TOP 10위 이내 기록은 순위가 등재. 붉은 글씨는 1위 입상 성적. 진한 표시는 리그 5위내 입상성적.
6.1. 타자 성적
6.2. 투수 성적
[1] 1960년대 실업야구 시절부터 야구를 봐온 하일성 해설위원도 역대 최고의 유격수로 김재박을 꼽았다.[2] 프로에서는 딱 한 경기에 구원투수로 나왔다. 이 경기의 승리투수(결승타점 역시 타자로 나온 본인이 기록. 결승타점은 '''연장 끝내기'''였다.). 그래서 프로 통산 투수기록은 1승 무패 방어율 0.[3] 김재박은 이 당시 국가대표팀에 뽑힌게 신기하다는 회고를 했다. 고등학교도 대학교도 받아주는 곳이 없었기 때문인데, 모두 창단팀에 들어갈 정도로 미래에 대한 기대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영남대 시절에도 국가대표보다는 서울의 대학팀을 이기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을 정도였다.[4] 당시 결승전에 대한 내용은 이곳 항목을 참조.그때 인터뷰.[5] 148타수 65안타.[6] 2위인 한일은행 투수 김윤규의 방어율이 3.21이었다.[7] 확인결과 출루율 1위도 하였다. 따라서 8관왕이며 당시 기사를 보면 현재 7관왕이라 부르는것과 달리 8관왕이라고 부르는것을 확인할수있다.당시 기사.[8] 다만 현재 기준으로 볼때는 타율, 홈런, 타점, 도루라는 클래식 스탯에 MVP, 신인왕, 3관왕상이라는 타이틀이 더해져서 완성된 것으로 지금 기준으로는 관 수로 치지 않는 상들이 들어가 있지만 저 상들을 수상했다면 예상할 수 있는 출루율, 장타율, 최다안타 등의 수상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 분야도 단지 수상을 안 했을 뿐 실제로는 1위였을 개연성은 존재한다. 여하튼 현재 기준으로 최대 몇 관왕인지는 의문.[9] 다만 김재박 본인도 이 당시 기록을 7관왕이라고 회고한다[10] 대구초등학교, 1974년을 끝으로 야구부가 해체되었다.[11] 당시 경북중학교, 1970년 경운중학교로 교명 변경.[12] 그 당시 대구 출신 야구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역시 대구·경북의 야구 명문인 경북고등학교에 진학하기를 희망했으나, 당시 경북고등학교 감독이었던 서영무 감독이 테스트해보고는 몸도 작고 실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퇴짜를 놓았다. 때마침 집이 서울로 이사를 가게 되었고 이사간 곳 근처에 대광고등학교 야구부가 신설되면서 대광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된다. 그런데 야구 때문에 대구에서 서울로 전학 간 그가 대학교는 다시 대구에 있는 영남대학교로 오게 된 것도 이유는 비슷한데, 대광고를 졸업한 김재박은 한양대학교를 가고 싶어했으나 그 당시 한양대 감독이 경북고에서 그를 받아주지 않았던 서영무 감독이었고(...) 같은 이유로 한양대에서 퇴짜를 맞은 그는 당시 야구부가 창설된 영남대학교로 진학하면서 다시 대구로 내려오게 된다. 대구경북지역의 아저씨 팬들은 그때 경북고에서 김재박을 받아줬거나 영남고나 대건고라도 갔다면 삼성이 훨씬 일찍 더 많이 우승했을 거라고 안타까워 하기도 한다.[13]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만약 김재박이 대건고라도 갔다면 역대 삼성 라이온즈 최고의 프랜차이즈 스타가 되었을 것이다. 기량도 역대급이었을 뿐만 아니라 지역성으로 볼 때도 의외로 삼성 레전드 중에서 드문 순혈 대구 토박이다.[14] 이 대회가 그 유명한 개구리 번트가 나온 대회다.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당시에 2:1 런아웃 상태에서, 벤치에서 사인은 없었지만 베테랑들이 작전이 필요하면 주도할 수 있도록 해주었는데 당시 안타가 2개밖에 없었을 정도의 일본 우세의 원사이드 경기였고, 3루에 김정수가 있어서 일본에서는 스퀴즈를 경계했다. 그래서 김재박은 번트를 준비했지만 일본도 공을 높게 던지며 경계하자, 점프로 번트를 대게 되는데, 점프로 번트한건 생각한게 아니라 본인이 생각해도 운이 좋게도 몸이 반응했던 것이라 한다. 이후 한대화가 쓰리런을 날려 5:2로 승리하게 되었다.[15] 2018년 기준 만 28세면 한창 나이지만 프로야구가 갓 출범한 1980년대 초반만 해도 은퇴를 할 시기였다. 실제로 당시 실업야구 선수 중 서른을 넘어서 뛴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90년대까지도 만 30세 전후에 많은 선수들이 은퇴를 했다. [16] 1983년 유격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는데 최초 중고신인 골든글러브 수상자로 기록됐다[17] 하지만 김재박은 결국 통산 1000안타를 기록하지 못하고 은퇴한다.[18] 프로 초년기에는 유격수로 나왔다. 그러나 무수한 실책을 범하자 5년차 때 김인식감독이 부임하면서부터 3루수로 고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