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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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제국은 1914년 9월~10월 사이 독일 제국의 속령이었던 미크로네시아[3] 를 점령하였다. 정식명칭은 '''남태평양 위임통치령'''이다. 일본에서는 남양군도(南洋群島)[4] 나 내남양(內南洋)이라고도 한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1919년 발효된 베르사유 조약에 의거하여 독일 제국의 식민지였던 남양제도는 공식적으로 일본 제국의 위임통치령[5] 이 되었다. 국제연맹이 설정한 위임통치 분류는 C형(Class C)이었다.
2. 역사
이 일대의 지역은 17세기 초부터 스페인에 의해 식민지화되어 스페인령 동인도를 구성하고 있었으나 필리핀과 달리 특별히 개발이 이루어지진 않았고 1885년에 독일 제국이 마셜 제도를 점령한 데 이어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패배한 스페인으로부터 필리핀과 괌을 제외한 스페인령 동인도 전체를 약 2500만 페세타에 사들이며 독일의 식민지가 되어 독일령 뉴기니를 구성하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본 제국은 영일동맹을 근거로 들어[6] 독일 제국에 선전포고 후 독일령 칭다오가 위치한 중국의 산둥반도와 함께 적도 이북의 독일령 뉴기니를 점령해 버렸다.
이후 1915년 1월에는 21개조 요구(二十一個條項)를 발표하였다. 21개조 요구는 일본 제국의 권익 확대를 위해 중국에 요구한 것으로, 일본 제국이 소유한 만주 남부의 이권을 확장하고, 독일 제국이 가지고 있던 산둥 조차지를 일본 제국에 이양하는 등 대단히 제국주의적인 요구였다. 그러나 당시 일본 제국에 비해 약세였던 중국은 일본 제국의 외교적 압박에 1915년 5월 이 요구를 승인하게 된다.[7]
1919년 베르사유 조약이 발효되어 패전국인 독일 제국이 가지고 있던 식민지들이 승전국들에게 배분되었다. 이에 따라 남양제도는 1919년 6월, 위임통치령의 형태로 일본 제국에게 배분되었다. 1922년 4월에 일본 제국은 이곳에 남양청(南洋廳)을 설치하였다. 그 전까지의 남양제도도 사실상 일본 해군의 군정체제나 다름이 없었고, 이는 남양청이 설치된 이후에도 다르지 않았다. 1920년대부터 일본 해군은 남양제도의 주요 섬에 군사시설을 설치하였다. 이는 미국의 태평양 진출을 견제하기 위한 것으로, 일본 해군에 의해 항만시설, 해군기지, 비행장 건설이 이루어졌다. 1930년대부터 일본인 이주민이 크게 늘어나 남양흥발주식회사(南洋興發株式會社), 남흥수산, 남양석유 등 일본의 민간기업이자 준(準) 국책기업이 남양제도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1931년 일본 관동군에 의해 만주 사변이 발발했다. 일본 제국 정부의 방침에 반기를 든 관동군이 독자적으로 감행한 이 전쟁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일본 제국은 만주를 영유할 수 있게 되었으나, 열강과의 협의 없이 이뤄진 사건이라 만주를 함부로 병합할 수 없었다. 위임통치령 형태로 소유하려고 해도 일본 제국이 독자적으로 감행한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국제연맹이 승인해줄 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일본 제국은 이곳에 만주국이라는 괴뢰국을 수립했으나, 국제연맹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1935년 일본 제국이 국제연맹에 탈퇴하였다. 이런 급격한 정세는 남양제도에까지 영향을 미쳤는데, 남양제도는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령이었으므로 '일본 제국이 국제연맹에서 탈퇴한다면 남양제도를 다시 반환해야 하는지' 여부가 국내외에서 문제가 되었다. 이는 국제연맹이 일본의 남양제도 위임통치는 계속 유효하다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일단락되었다.
이로인해 국제연맹에서 일본 제국이 탈퇴하였음에도 국제연맹은 일본 제국의 남양제도 통치를 계속 감시할 수 있었고, 한편으로 일본 제국은 남양제도를 사실상 다른 식민지와 동일하게 취급할 수 있게 되었다.
1936년에는 일본의 국책회사(國策會社)인 '남양척식주식회사'가 설립되었다. 1939년에는 남양제도에 제4함대를 설립,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1941년 일본군이 진주만 공습을 시작하면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뒤에는 연합군과의 격전지가 되기도 하였다. 1944년 6월 15일 미군은 남양제도 사이판에 상륙했고, 동년 6월 19일 마리아나 해전이 발발, 일본 해군은 여기서 패배함으로써 사이판의 일본 해군은 섬멸되었다.
6월 말에는 대본영이 사이판을 포기함으로써 일본의 전선은 더욱 더 후퇴하였다. 1945년 8월 6일 미국은 남양제도의 티니안 섬 하고이 비행장에서 리틀보이를 실은 B-29를 발진하였고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되었다. 이미 전쟁은 일본 제국의 패배로 결정되었고, 8월 15일 마침내 일본 제국이 항복함으로써 전쟁은 종결, 남양제도는 미국이 점령했다. 1947년 유엔에서 남양제도의 미국의 신탁통치를 결정해 미국의 신탁통치령인 태평양 제도가 되었다. 1952년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통해 공식적으로 이곳의 영유권을 포기했다.
태평양 제도에서의 신탁통치가 종료되면서 이 지역들은 자치정부 수립을 거쳐 마셜 제도, 미크로네시아 연방, 팔라우로 독립하였으며, 북마리아나 제도는 주민투표에 따라 독립을 포기하고 아예 미국령으로 편입되었다. 현재 마셜 제도, 미크로네시아 연방, 팔라우에는 일본대사관이 설치되어 있으며, 북마리아나 제도의 중심지인 사이판에는 괌 주재 일본총영사관에서 관할하는 영사사무소가 설치되어 있다.
2.1. 지청과 행정 구역
1922년 초기 지청과 행정구역은 다음과 같다.[8]
- 사이판 지청(サイパン支庁, Saipan)
- 사이판 섬(サイパン島)
- 티니안 섬(テニアン島, Tinian)
- 로타 섬(ロタ島, Rota)
- 야프 지청(ヤップ支庁, Yap)
- 야프 섬(ヤップ島)
- 팔라우 지청(パラオ支庁, Palau)
- 바벨다옵 섬(バベルダオブ島, Babeldaob)
- 앙가우르 섬(アンガウル島, Angaur)
- 트루크 지청(トラック支庁, Truk → Chuuk)
- 하루시마(春島, Moen → Weno)
- 나츠시마(夏島, Dublon → Tonowas)
- 스이요시마(水曜島, Tol)
- 포나페 지청(ポナペ支庁)
- 포나페 섬(ポナペ島, Ponape → Pohnpei)
- 쿠사이 섬(クサイ島, Kusaie → Kosrae)
- 얄루트 지청(ヤルート支庁)
- 얄루트 섬(ヤルート島, Jaluit)
- 동부지청
- 트루크, 포나페, 얄루트
- 북부지청
- 사이판, 로타, 티니안
- 서부지청
- 팔라우, 야프
3. 인구
남양제도는 1939년 12월 말 기준으로 인구가 총 129,104명이었으며 원주민의 숫자는 51,723명, 일본인[9] 의 숫자는 77,257명으로 일본인의 숫자가 더 많았는데 이는 남양제도가 일본의 위임통치령이 된 이후 일본인의 지속적인 정착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이주 일본인은 오키나와 출신이었으며 당시 경제적으로 낙후되었던 도호쿠 출신의 일본인들도 많았다. 사이판의 경우 인구의 90% 가량이 일본인이었다. 일본인들은 패전 이후 대부분 일본으로 돌아갔으나 일부가 남아 여전히 지역의 주요 민족으로 남아 있다. 예를 들어 팔라우를 보면 사토, 타나카와 같은 일본 성씨를 쓰는 주민들이 여전히 많고 미크로네시아 연방에서도 일본계 대통령이 둘이나 배출된 바가 있다. 이 지역들의 주민의 10~25% 가량이 일본계거나 혼혈이라는 얘기가 나돌 정도. 그 외에 한 때 스페인과 독일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극소수(124명)의 백인들도 있기는 했다. 원주민들은 당시 대만인, 조선인과 다르게 일본인 국적이 부여되지는 않았고 식민지 조선과 마찬가지로 원주민들은 불평등한 노동 조건과 임금을 받으며 일을 했다. 원주민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는데 첫째는 차모로인, 둘째는 차모로인을 제외한 나머지인 카나키인이었다. 차모로인은 스페인어 어휘를 일부 구사하고 생활 수준도 더 높아서 카나키인보다 우대받았다.
1930년대부터 일본인의 수가 원주민들보다 늘어났고, 특히 중심도시인 코로르나 사이판 등은 일본인이 원주민보다 훨씬 많아서 일본어가 주로 쓰였고, 원주민들도 학교에서 일본어를 필수적으로 배우기도 했고 좋은 직장을 얻는데 능숙한 일본어가 필수적이었다. 또 오키나와 출신이 많아서 오키나와어도 흔하게 쓰였다. 팔라우어를 비롯한 원주민들의 언어는 학교에서의 사용은 금지됐지만 일상생활에서의 사용까지 막은 건 아니여서 원주민들의 일상 생활에선 여전히 쓰였다. 또 트루크 제도(추크 제도)와 같이 일본과 거리가 멀었던 섬에선 일본인들의 수도 적어서 일본어가 잘 쓰이지 않고 여전히 원주민들의 언어가 주류였다.
4. 교육
교육에 있어서 원주민과 일본인은 대우가 달랐는데 일단 원주민들을 대상으로도 만 8세~ 15세 아이들에게 무상 교육이 이루어졌으나 일본인과 같은 학교에 다닐 수 없었고 학교 교육에서는 신토를 의무적으로 배워야 했으며, 1학년까지는 팔라우어를 사용해도 되나, 2학년부터는 학교 내에서 팔라우어 사용이 금지되고 일본어 사용이 강제되었다. 교육의 질에 있어서도 차이가 큰 편으로 일본인 아이들은 일본 본토와 큰 차이 없는 교육을 받을 수 있었으나 원주민들의 교육은 상당 부분 제한되었다. 1926년에는 목공 도제 양성소가 세워져 기술자 양성에 초점을 맞추는 교육이 이루어졌다.
학교는 일본인과 구분됐지만 일본인 아이들의 운동회에는 원주민들이 참가하는 경우도 있었고, 주판 대회 등에도 원주민이 참여해 일본인과 경쟁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대체로 체육대회에선 일본인들보다 팔라우인들이 더 성적이 좋았고 주판대회에선 밀렸지만 일본인 아이들과 경쟁 가능한 수준의 원주민들도 있었다.[10]
한편 원주민들은 용변을 변소에 누지 않고 모래 사장 등에 싸는 경우가 많아서 위생 교육도 이루어졌다. 풍토병도 돌아다니던 지역이라 진료소와 병원의 숫자도 증가했다.
5. 산업
사실 남양제도는 태평양에 널리 분포해 있다는 점 덕분에게 군사적 가치는 높았으나 원주민의 인구가 매우 적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시장을 제공할 수도 없었고 때문에 경제적으로는 어업 외에 별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스페인과 독일의 식민 통치를 거치는 와중에도 이렇다 할 산업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으나, 일본의 기업가인 마쓰에 하루지[11] 는 남양제도가 사탕수수 재배에 적합한 땅이라 판단하여 사탕수수 재배 중심의 산업으로, 일본 정부의 지원금 없이도 재정적인 자립을 이뤄낼 수 있었고 일제의 설탕 자급에 공헌했다.
1921년 11월에 마쓰에 하루지가 설립한[12] 남양흥발주식회사는 남양청으로부터 사탕수수 독점권을 부여받아 사탕수수를 재배했으며, 전분, 인광, 수산물 등을 생산하였다. 남양청의 전폭적인 후원아래 남양흥발은 세계상품인 설탕의 주요 생산지가 될 수 있었다. 설탕 외에 바나나, 파인애플, 코코넛, 커피와 같은 다른 열대 작물도 재배했고 어업 또한 성행하였으며 생선 가공 공장들도 세워졌다. 코프라 역시 특산품. 남양무역은 해운업, 야자 재배를 수행했다. 또한 섬에 따라 각각 다른 가축을 키우며 축산업도 이루어졌는데 당시 남양제도의 대부분은 돼지를 사육했으나 사이판에서는 '소'가, 팔라우에서는 '염소' 등도 길러졌다. 또한 앙가우르 섬을 비롯한 남양제도의 몇몇 섬들은 인광석이 풍부하여 인광석 채굴이 이루어졌다. 그 외에 공장들도 들어서서 숯 제조 공장, 가다랭이 제조 공장, 파인애플 통조림 생산 공장 등도 나타났다. 무역도 활발했는데 흑자를 기록했으며 1942년쯤 남양흥발은 동남아 지역까지 사업을 확장했고 20여개의 방계 회사를 거느렸으나 1944년 미국의 공격으로 망했고, 이후 1954년 폐쇄 기관 지정이 해제되었으나 사업을 재개하진 못했다. 다만 방계회사 중 남양무역은 1950년부터 사업을 재개하여 현재까지 활동 중으로 주로 태평양 지역의 수출 대리점 역할을 하는 모양이다.
한편 1914년 점령 이후 일본의 위임통치가 공인되기 이전인 1919년에는 조선인들의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때는 아직 남양청과 남양흥발주식회사가 세워지기 이전인데, 어떻게 조선인이 이 곳으로 흘러들어왔는지에 대해 확실히 밝혀진 바는 없다. 일본인 이민회사의 알선에 의해 일본인과 함께 흘러들어왔을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지는데 남양농업이민은 1938년 8월부터 1940년 2월까지 총 13회에 걸쳐 수행되었고, 1,266명(285호)의 조선인이 농업이민을 떠나서 당시에 남양흥발이나 남양청에 의해 끌려간 것은 시기상으로 맞지 않는다. 아무튼 1919년 당시 남양제도에서 조선인들은 열악한 음식과 주거환경, 무더위로 인해 생활수준이 매우 낮았고, 이 때문에 폭동이 일어난 것이다. 이 폭동은 일본 제국이 남양제도 통치 방식을 전면 재검토해야할 정도로 파장이 컸는데, 일본의 남양제도의 위임통치가 공인되기 직전에 일어나 일본이 태평양까지 확장하는 것을 경계한 서방(미국, 영국, 네덜란드 등)은 일본 제국의 통치를 유심히 주시하던 상황이라 조선인들의 폭동은 자칫 일본제국의 통치력이 부족하다는 인상을 주어 위임통치령 허가가 떨어지는 것을 좌절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세워진 것이 남양흥발주식회사이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한국 고전 소설 중에 "남양제도"라든가 "열대 섬으로 강제 징용" 이런 이야기가 종종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여기다. 대표적으로 하근찬 작가의 수난이대같은 소설이 그 예. 작품에 나오는 한국전쟁으로 한쪽 다리를 잃은 군인의 아버지인 한쪽 팔이 없는 주인공이 한쪽 팔을 잃게 된 젊었을 시절 일제에 의해 배타고 태평양을 건너 강제로 끌려간 곳[13] 이 바로 이곳이다. 아무튼 1919년 이후에는 특별히 독립운동 분위기나 폭동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워낙 원주민의 숫자가 적었고 오히려 일본인의 숫자가 더 많았던 데다가 섬들이 워낙 널리 흩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6. 종교
스페인 식민지배를 받으면서 그리스도교가 널리 퍼졌지만, 이후 이주 일본인이 증가하자 일본식 불교 사찰과 신사들이 우후죽순 늘어났다. 가장 유명한 신사는 1940년 창건된 난요신사(南洋神社)[14] 로 전쟁 중 파괴되었으나 1997년에 재건되었다. 일본어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본디 난요신사에서 모시던 신체(神体)[15] 는 1946년에 일본 궁내부로 이송되었고, 97년에 '재건'된 난요신사는 별개의 신체를 모셨기 때문에 신토적인 의미에선 '구 난요신사의 재건'이 아니라고 한다. 게다가 말이 재건이지 구 난요신사 신전과 배전 터만 현지인 소유주에게 '임대' 형식으로 빌려 작은 사당을 세운 정도에 불과하다. 개인 주택의 부지의 일부가 된 관계로 집주인에게 허락을 받지 않으면 참배조차 하기 힘든 위치라고.
팔라우는 반일 감정이 적은 지역이라 재건된 난요신사에 있는 비석 중 태평양 전쟁에서 죽은 일본군을 기리는 문장도 있다. 그 외 천리교 등도 남양제도에서 선교 활동을 활발히 한다.
7. 참고 자료
- 조성윤, '제국 일본의 남양군도 지배와 연구동향', 2010.
- 조정우, '제국일본의 식민지 개발 구상과 군사주의', 2015
- 조선총독부 기록물 데이터베이스, 남양농업이민관계철
8. 관련 문서
- 남양청 - 일본제국이 남양제도를 통치하기 위해 세운 기관. 남양제도 지청, 행정구역, 장관, 행정 등은 이 문서를 참고.
- 제1차 세계대전
- 제2차 세계대전
- 위임통치
- 포츠머스 조약
- 베르사유 조약
- 만주사변
- 라바울 속요
[1] 이미지 출처[2] 현재 팔라우의 최대도시이다.[3] 마리아나, 트럭, 팔라우 제도[4]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에서 남양군도라는 표현이 자주 쓰였다. 현재 한국에서도 가끔씩 이 일대를 남양군도나 남양제도라 부르는 사람이 있다.[5] 위임통치령(mandate)은 국제 연맹이 해당 통치 지역의 복지, 개발을 위해 위임국에게 위탁한 지역을 말한다. 즉 남양제도는 일본의 다른 식민지들과는 그 위치가 달랐다. 예를 들어 일본은 남양제도에 대한 위임통치 상황을 매년 국제연맹에 보고, 심사를 받아야 했다. - 조정우, "제국일본의 식민지 개발 구상과 군사주의", 2015, p. 81[6] 실제론 상대국의 자동 참전 의무같은 조항은 없었다.[7] 이 21개조 요구가 원인이 되어 훗날 중국판 3.1 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5.4 운동이 중국 전국에서 일어난다.[8] 우측의 영어 명칭은 당시 명칭 → 현재 명칭.[9] 조선인과 대만인을 포함한다.[10] 교토대학 인문과학연구소 まなざしの呪縛 : 日本統治時代パラオにおける「島民」 と「沖縄人」をめぐって/三田, 牧/2011-03-24[11] 설탕왕으로 불리고 사이판에 일제 통치 시기에 세워진 동상이 여전히 남아 있다.[12] 남양청이 1922년에 설립되었으므로 남양청의 설립보다 빨랐다.[13] 형식상으로는 남양흥발주식회사가 소작농 등을 상대로 꼬셔서 데려온 것이라 강제로 끌고 온 것은 아니었다.[14] 일제시대 사격으로는 관폐대사(官幣大社)로, 모시는 주신은 아마테라스였다.[15] 신토에서 신령의 영위가 깃들어 사람들이 경배하는 물건. 보통은 거울이지만,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신체가 있다. 미타마시로(御霊代)라고도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