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비아-차드 분쟁

 

1. 개요
2. 전쟁
2.1. 발단
2.2. 전개
2.3. 절정
2.4. 결말
3. 여담


1. 개요


1986~1987년에 걸쳐 일어난 리비아차드 간의 분쟁. '''토요타 전쟁'''이라는 이명으로 더 유명하다.

2. 전쟁


배경은 사실 간단하다. 서구 열강으로부터 독립한 아프리카 국가들간의 국경선 문제. 2차대전 이후에 그 경계선 그대로 독립을 한 것이다. 즉 법적인 국경과 실제 사람들이 느끼는 경계선이 전혀 맞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나마 인구 밀도가 낮은 사막이나 사바나 초원지대에서는 반쯤 무시하고 넘어가면 그만이지만 인구 밀집도가 높은 중남부 아프리카에서는 이 때문에 내전 혈투를 벌이는 지역들이 엄청나게 많다.
이처럼 불확실한 국경으로 인해 곳곳에서 문제가 일어났는데, 리비아차드 국경도 그 중의 하나였다. 문제가 된 곳은 차드 북부 리비아 접경 지대에 위치한 아우주 지대(Aouzou Strip)이라는 곳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는 협상국으로부터 독일의 아프리카 식민지 등의 콩고물을 노리고 기존의 삼국 동맹을 배신하면서까지 협상국 편으로 참전을 했는데 전쟁이 끝나고 정작 기대했던 보상은 제대로 얻지 못하자 이탈리아 내에서 여론이 폭발했다. 이 기회를 노리고 이탈리아에서는 베니토 무솔리니파시스트 정권이 집권을 했는데 1933년 바이마르 공화국이 무너지고 아돌프 히틀러나치 독일이 들어서자 프랑스는 프랑스의 우호국인 이탈리아가 적국인 독일과 밀월하는 것을 막기 위해 1935년 프랑스 총리 피에르 라발이 무솔리니와 우호조약을 체결하면서 국경을 조정해 프랑스령 차드의 일부였던 아우주 지대를 이탈리아령 리비아에 귀속시키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1년 후 이탈리아가 나치 독일과 동맹 조약을 체결하면서 이 조약은 승인이 되기도 전에 무효가 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이탈리아령 리비아의 국체를 인수한 리비아 왕국은 1955년 프랑스와 국경을 확정하면서 아우주 지대를 차드의 일부로 인정하였다. 하지만 쿠데타로 리비아의 정권을 장악한 무아마르 알 카다피는 아우주 지대에 대규모로 묻혀있을 것이라고 추정된 우라늄을 탐내고 아우주 지대의 영유권에 대해 차드에게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물론 차드는 이런 리비아의 행태에 불만이 꽤 많았지만 당시나 지금이나 파탄국가 중에서도 톱 클래스를 차지하던 상황이라 어쩔 수 없었다.

2.1. 발단


그러나 이런 상황이 언제까지 지속될 리는 없었다. 1983년, 차드에서 내전이 종식되고 신정부가 수립되며 리비아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자, 카다피는 신정부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고 차드 북부를 침공하여 점령한 뒤 파죽지세로 남하했다. 그러나 프랑스령이었던 아프리카 지역과 그 주변에서 현재진행형으로 종주국 노릇을 하는 프랑스가 전투기를 동원해 공격하면서[1] 남하는 중단되었고, 리비아의 차드 강점은 북위 16도선에 그치고 말았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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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드라는 글자 위의 위도선이 북위 16도선이다. 차드의 반절쯤을 함락한 셈이니 사실 굉장히 많이 내려간거다.

2.2. 전개


그리고 1986년, 리비아의 차드 점령지에서 대대적인 무력봉기가 일어나자 카다피는 이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차드군이 영토수복을 위해 병력을 동원하면서 전쟁이 발발했다.
일단 외관상으로는 리비아군의 압도적 우위였다. 그도 그럴 것이 리비아군은 소련에서 수입한 전차장갑차도 매우 많았으며, 병력도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반면 차드군은 제대로 된 전차와 장갑차도 없었고, 보병을 토요타 랜드크루저픽업트럭에 태워서 돌아다니는 판국이니 패배하는 게 당연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2.3. 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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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는 전혀 달랐다. 차드군은 리비아군의 강력한 기갑전력에 맞서기 위해 민간차량에 기관총, 대전차미사일, 로켓포 같은 무기를 탑재하고, 방어판을 대는 정도의 개량을 가한 일명 테크니컬을 대거 동원했다. 그리고 테크니컬의 기동성을 이용한 치고 빠지기 전술로 리비아군을 각개격파했다. 리비아군은 당시 각 지역의 점령지에 분산되어 있었는데 차드군은 이 점을 이용해서 격멸-기동-격멸 전술을 구사한 것이다. 게다가 프랑스군제공권을 장악한 상태라서 리비아군은 적의 움직임을 파악할 방법조차 없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차드군은 신출귀몰하게 토요타 랜드크루저를 타고 사하라를 종횡무진하며 리비아군을 각지에서 격파했다. 차량탑승형 기동 게릴라들은 리비아 기갑부대를 강습하여 대전차미사일로켓포를 날려 궤멸시킨 뒤 다시 기동하기를 반복했는데, 소규모로 분산된 리비아군은 곳곳에서 와해되어 분산 격파당하고 보급로가 두절되었으며, 막강하다는 기갑부대는 트럭 타고 다니는 차드군 보병의 대전차화기에 파괴당하거나 패닉에 빠진 리비아군이 버리고 도망가면서 순식간에 전멸당했다.
1987년에는 아예 차드군이 총공세로 전환하여 트럭을 타고 국경을 넘더니, 리비아 남부의 공군기지 한 곳을 기습해 수비중이던 1개 여단을 제압하고, 기지에 있던 모든 전투기를 파괴해버리는 기염을 토했다. 이 시점에서 사실상 리비아군은 패배한 것이었다.
그리고 차드군이 노획한 무기들은 소련제 구식 무기가 아니라서 대부분 미국, 이집트, 프랑스 등 리비아와 사이가 좋지 않은, 그리고 차드를 지원했던 국가들로 보내졌다. 1987년 4월에는 11대의 L-39 경공격기와 9대의 SF-260, 2대의 Mi-24를 노획했고, 이렇게 노획된 항공기의 대부분은 미 공군 C-5로 차드의 수도 은자메나로 옮겨졌다. 이중에서 Mi-24와 다른 곳에서 노획된 상당한 수의 구소련제 대전차미사일들은 미국과 프랑스로 보내졌다. L-39 제트훈련기 10대는 이집트가 가져가서 이집트 공군이 운용중이다.
리비아와 적대 관계였던 미국 또한 이 전쟁을 매우 관심있게 주시했으며 1988년 6월에 마운트 호프 3(Mount Hope III) 작전을 실시해서 차드에 유기된 리비아군의 소련제 Mi-24 공격헬기를 입수하고 구조와 성능을 파악하는데 성공했다.

2.4. 결말


무기를 수출한 소련은 그런 리비아가 참패하면서 자기들 무기가 미국으로 흘러가 분석되는 것에 대하여 무척 분노했고 리비아에 대한 무기 수출을 재검토할 것이며 나아가 주변 나라들에게도 리비아의 간섭을 놔두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게 된다. 이쯤되니 리비아도 전쟁을 더 끌었다간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 되었고, 차드도 잃어버린 영토를 다 회복하고 큰 승리를 거두어 만족한 데다 리비아군이 재반격에 나설 경우에는 중과부적으로 패할 가능성이 높아 극단적으로 자극할 필요성은 없다고 생각했는지 결국 양측은 1987년 9월에 휴전협정에 조인했다.
이 전쟁으로 리비아는 1만명에 달하는 사상자와 1,000여 대에 달하는 전차 및 장갑차와 기타 군용 차량, 그리고 30여 기의 항공기를 잃었다. 이 전쟁에 투입된 리비아군이 약 90,000명이라는 걸 감안하면 손실률 10% 이상. 반면 차드군의 사상자는 1,000명 안팎에 머물렀다. 테크니컬 특성상 한 번 맞으면 끝이지만 리비아군이 워낙 오합지졸이라 잘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후 무아마르 알 카다피는 패전책임을 물어 군부인사들을 숙청하고 내부독재를 더 강화했으며, 전쟁에 아무런 관련이 없던 토요타는 졸지에 전쟁때문에 광고효과를 톡톡히 보았다.
물론 카다피가 차드 침공을 단념했다고 해서 보복하는 것까지 잊지는 않았다. 나중에 차드와 갈등관계인 투아레그족을 지원했는데, 이번에는 이들이 차드군을 상대로 테크니컬 차량을 타고 정반대로 차드군을 골탕먹인 것. 그도 그럴 수 밖에 없는 게 사하라의 터줏대감인 투아레그족에 무기와 차량을 지원하니 차드군 이상으로 더 강해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들 투아레그족은 현재도 건재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카다피는 지옥행 열차를 탄 지 꽤 됐지만 대신 수단 공화국의 독재자 오마르 알 바시르가 차드를 교란하기 위해 투아레그족에게 상당한 지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2011년, 리비아 내전에서도 시민군이 토요타 트럭을 동원해 카다피군에 맞섰으며 서방, 특히 미국이 방공망을 제공하고 카다피군을 괴롭혔고 카다피는 시민군에게 박살나기를 반복하다가 2011년 가을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서방이 개입하기 전까지만 해도 카다피군은 전열을 정비하고 반격에 나서서 키레나이카 재정복 목전에 있었으나 서방 국가들이 시민군을 본격적으로 지원하면서 패퇴하게 된다.

3. 여담


성능 좋은 민수용 트럭에 소규모 인원이 탑승하여 종횡무진하며 적진을 들쑤셔놓는 전법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군 LRDG와 SAS가 북아프리카에서 사용하던 전법이다. 미군 특수부대도 이라크 전쟁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그렇게 활동하고 있다. 물론 이 리비아-차드 전쟁에서 양측이 사용한 병력과는 차원이 다르지만.
이 전쟁 이후 트럭이 척박한 환경에서의 기동성과 각종 기관총 및 대포의 반동에도 견고하다는 사실이 입증되자 아프리카 제3세계 국가들과 보코 하람이나 알 카에다, ISIS 등 아랍권 테러리스트들도 즐겨 쓰게 되었고 심지어 미군도 아프간의 사막지역에서 사용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토요타제 트럭은 미국 정부가 직접 토요타 측에 해명하라는 요구까지 할 정도로 여전히 제3세계 전장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IS가 타는 도요타차 다 어디서 구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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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이 마개조한 6세대 토요타 하이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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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IS 소속 토요타 부대 14년형 하이럭스에 15년형 랜드크루저까지 섞여 있으니 미국이 의심할 만하다.

이에 대한 토요타 광고 패러디[3]. 마지막 코멘트 "The neighborhood will never be the same."이 대단히 적절하다.
이후 토요타 트럭들의 값이 조금씩 올라서 예전처럼 싸게 구하기 힘들어지자, 과적이 일상이라 내구도가 엄청난 한국제 트럭들을 대체제로 선택했다. 그중 가장 애용되는 것이 기아 봉고현대 포터인데, 정작 리비아 내에서 토요타보다 인기가 많다.[4]
그러나 정작 리비아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한국산 중고차는 엑센트, 포르테 등의 준중형 및 소형차들 위주이고, 따라서 봉고나 포터와 같은 트럭들이 토요타 트럭의 대체제로 선택되고 있다는 해석은 성급한 판단이다. http://autopostkorea.com/?p=13151 애초에 중동 및 서아시아의 테크니컬 차량들은 토요타 이외에도 닛산, 이스즈, 쉐보레 등 다양한 메이커들의 차량들로 구성되어 있고, 그 중 상대적으로 구하기 쉽고 부품 수급이 쉬우며 내구성이 좋은 토요타 차량이 특히 인기를 얻었으며, 최근 중동시장에 한국산 차량들의 수출이 늘어나면서 자연히 한국산 트럭에 대한 수요도 증가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1] 카다피는 이후 2011년에 또 프랑스에게 전투기로 엄청나게 두들겨 맞는다.[2] 프랑스는 지금까지도 아프리카 지역에서는 상당한 위세를 떨치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일례로 2012년 말리 내전때도 프랑스 공군과 지상군이 투입되어 정부군과 함께 싸웠고, 2011년 코트디부아르에서 대선 불복으로 내전이 벌어졌을 때도 프랑스군이 유엔 평화유지군과 함께 적대 정치인의 거처를 쓸어버렸다. 포르투갈이나 영국 지배를 받은 아프리카 지역도 비슷한 일을 겪으며 해당 군대가 옛 식민지에 연루되던 바 있다.[3] 원본 광고는 이거다.[4] 한국제 중고차 수입 순위 압도적인 1위가 연간 21만 대인 리비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