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시점

 

1. 개요
2. 시점 전환
3. 시점의 종류
3.1.1. 1인칭 주인공 시점
3.1.1.1. 예시
3.1.2. 1인칭 관찰자 시점
3.1.2.1. 예시
3.2.1. 3인칭 관찰자 시점
3.2.1.1. 예시
3.2.2. 전지적 작가 시점
3.2.2.1. 예시
3.2.3. 제한적 전지적 작가 시점
3.2.3.1. 예시
3.3. 2인칭
3.3.1. 예시


1. 개요


모든 소설에는 독자에게 이야기를 전달해주는 서술자가 존재한다.[1] 작중에서의 서술자의 위치나 이야기를 전달해주는 방식에 따라 소설의 시점이 결정된다. 시점에 따라서 효과가 여러 가지로 나누어지며 소설작법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2. 시점 전환


프로소설가도 한 소설 내에서 시점을 바꿔가며 쓰는 경우가 있다.[2] 인물별로 1인칭 시점을 돌아가며 쓰는게 아니라 1인칭이었다 전지적 시점이었다 다시 1인칭으로 돌아오는 등 소설가 쓰기 나름이다. 특히나 대중성과 독창성이 중요시되는 요즘은 이런 틀의 파괴가 중요시되고 있지만 말 그대로 뉴메타라서 인칭 자체에 대한 이해가 적은 초보에게 추천되지는 않는다.
초보 작가가 시점 전환을 실수하다보면 분명히 문체는 1인칭인데 전지적으로 등장인물이 자연스럽게 독심술을 써대는 사태가 가끔 벌어진다. 그렇지만 시점 전환 실수는 독심술보다는 보통 독자가 받아들이기 힘든 문장 구조의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3. 시점의 종류



소설의 시점에는 4가지가 있다. 이 네 가지는 2개의 범주로 나뉘는데, 이에 대해서는 하단의 표를 참조 바람.
'''소설의 시점'''

이야기 속의 서술자 (1인칭)
이야기 밖의 서술자 (3인칭)
비관찰자 시점
1인칭 주인공 시점
전지적 작가 시점
관찰자 시점
1인칭 관찰자 시점
3인칭 관찰자 시점

3.1. 1인칭


화자인 '나'가 주어가 되어 소설의 문장을 풀어낸다.
양대 1인칭 시점은 모두 '화자가 이야기를 자신의 주관에 따라 왜곡할 수 있다.'는 서술 트릭을 할 수 있다. 초보 작가가 실수를 하면 가끔 1인칭 시점인데 평범한 주인공이 독심술을 쓰거나, 관찰자가 상대의 마음을 읽어서 내면 묘사를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런 실수는 제쳐두더라도 1인칭 시점의 주인공이 되면 퇴폐적인 삶을 사는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자기에 대해 객관적인 묘사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자신의 상황을 정당화하거나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자신은 물론 독자까지 납득시키기도 한다. 사실 작가 입장에서는 그다지 나쁘지 않은 기법인 것이, 이렇게 자기 자신을 판단할 수 없는 어리석은 주인공을 보여주고 그의 극단적인 결말을 보여주었을 때 독자들은 작가의 의도대로 주인공에게 잔뜩 감정이입을 했다가 충격을 받고 책을 덮는 결과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서술 트릭까지 넣어서 작중에 나오고 있던 인과관계를 뒤틀어버리기라도 하면 충격과 공포와 함께 카타르시스가 뒤따르기 때문에 잘 쓰기만 한다면, 어디까지나 잘 쓰기만 한다면 괜찮은 작품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현대의 스릴러나 추리, 혹은 그 둘을 결합한 장르가 대체로 이런 식이다. 고전적인 서술기법에서 탈피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어떤 시점에 와서는 이게 클리셰가 된 경향도 있어 식상하게 보일 우려도 있지만 말이다.
또는 자기 몸 간수하기도 힘든 급박한 상황인데 주변 상황이나 등장인물들의 행동을 주야장천 상세하게 묘사해대는 어색한 경우도 나오기도 한다.
사랑 손님과 어머니처럼 화자의 심리를 이용해 독특한 상황묘사를 보여준 작품도 있다. 참고로 엔더의 게임으로 대히트를 친 오슨 스콧 카드가 쓴 작법서 '캐릭터 공작소'에서도 1인칭은 어렵다는 식으로 조언이 나온다.
초보 작가가 하는 또 다른 실수로는 '나'라는 인칭대명사를 절대 써서는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다. 이건 1인칭 시점이라 굳이 화자인 '나'를 지칭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인데, 명백하게 잘못된 논리이다. 일단 '주어'가 없으면 문장 성립 자체가 안 되는데, 화자가 자기 자신을 주어로 지칭해서 서술해야 할 때가 의외로 많다. 이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초보 작가들이 쓸데 없이 '나'를 습관적으로 반복해서 쓰곤 하기 때문에 사용을 자제시키곤 하는데, 이것이 아예 써서는 안 된다는 식으로 와전되거나, 1인칭 시점과 일기를 동일시해서 '나'를 쓰면 안 된다는 식으로 인식하는 경우다. 일기와 1인칭 시점의 소설을 동일시하는 건 크게 잘못된 인식이다.
화자의 일기나 기록문 등의 형식을 취하기도 한다.
또한 서술자를 누구로 정하는가가 또한 중요한 과제이다. 서술자를 잘 고른다면 이런 난점을 충분히 극복할 수 있지만, 잘못 고르면 상술했듯 이야기를 흥미롭게 끌고 가기가 더욱 어려워지기 때문.
이런 난점을 적절히 극복한 1인칭 시점의 캐릭터로는 셜록 홈즈 시리즈존 왓슨이 있다. 왓슨은 개성 넘치는 '''주인공''' 홈즈를 관찰하는, 평범하고 친숙한 '''화자'''이다.[3] 기본적으로 추리 소설은 특성상 프레임이 좁은 것이 재미를 주기 유용한 만큼, 1인칭 시점을 선택한 것은 작가의 신의 한 수라고 볼 수 있다.
게다가 홈즈 시리즈는 장편소설이 아니라 대부분이 짧은 에피소드의 모음이라 1인칭 시점의 단점이 두드러지기 어렵다. 요컨대 1인칭 시점이 나쁘다는 말이 결코 아니며, 다만 이야기의 성격을 많이 타는, 다루기 까다로운 시점이라는 이야기다. 그러기에 후술하는 1인칭 주인공 시점의 단점들도 거의 드러나지 않는데, 이것은 존 왓슨이 직접 행동하는 캐릭터가 아니라 관찰자이기 때문이다. 라이트노벨에서 주로 화자인 주인공은 자기가 직접 행동하기 때문에 주변 관찰보다 주인공의 감정, 행동묘사에 치우치는 경우가 많지만, 왓슨은 직접 사건을 해결하 는게 아닌 홈즈를 관찰하며 따라다니면서 서포트하는 역할이라 좋은 시너지를 낸 것이다.
여러모로 제약이 심한 시점이지만 잘 쓰인 1인칭 시점 소설은 몰입감이 상당하다. 인물이 이야기 속에서 직접 말해주기 때문에 작품을 훨씬 생생하게 읽을 수 있고 글을 쓸 때도 주인공의 심리나 처한 상황 등을 더욱 세세하고 긴장감 있게 묘사할 수 있다.[4]

3.1.1. 1인칭 주인공 시점


주인공이 서술자가 되어, 주인공 자신이 경험한 관찰을 서술한다. 이 시점은 서술자(=주인공)의 심리 서술이나 행적, 개인적인 감상이 두드러진다.
주인공이 자기의 이야기를 직접함으로써 주인공의 내면세계가 독자들에게 직선적으로 전달된다. 때문에 독자가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하여 공감과 감정이입을 쉽게 할 수 있다. 또 주인공을 페르소나로 활용하면 이야기 쓰기가 쉽고, 일기수필과 같이 작가 스스로를 중심으로 써도 시점 설정이 자동적으로 되기 때문에 초보작가들에게 추천되는 시점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소설 쓰기를 처음 시작하는 초보작가들에게 해당하는 이야기다. 1인칭 시점 소설이 초보작가들에게 추천된다고 해서 결코 쓰기 쉬운 것은 아니다. 라이트 노벨 등지에서 굉장히 자주 보이는 시점이라 만만하게 보기 쉽다.

1인칭 주인공 시점은 서술자인 주인공의 입장에서만 이야기가 전달된다. 이 때문에 시각이 좁아, 독자들이 주인공이 보고 느낀 것만을 알 수 있다는 한계를 갖게 되어 주인공을 제외한 인물들의 감정을 묘사하거나, 극적 아이러니를 조성하는 것이 어려워진다.[5]
그리하여 1인칭 주인공 시점에서는 상대의 심리를 직접적으로 묘사할 수 없기 때문에 상징물이나 동종주술을 이용한다. 그러나 이는 지나치게 기호적이며 간접적이기에, 작가가 의도한 바를 독자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경우가 많다. 현대의 서브컬처에서는, 주인공에게 둔감, 착각 속성을 부여하거나 믿을 수 없는 화자인 주인공을 설정한다.
1인칭 주인공 시점을 쓸 때 주의해야 할 점은 크게 두 가지로, '주인공과 작가의 분리'와 '주인공 스스로 매몰되는 일'이다. 1인칭 주인공 시점은 작가 스스로를 중심으로 써도 완성되는 시점이다. 그러나 소설 속 주인공을 작가와 동일시하여 써내려 간다면, 독자가 제대로 이해하고 공감하지 못할 가능성이 커진다. 작가 자신에게는 당연하더라도 독자에게는 그렇지 않은 선택이나 감정표현 따위를 서술한다면, 당연히 독자는 주인공에게 공감하지 못한다.
물론 주인공을 이해할 수 없다는 인물들의 반응을 기술하면 독자들은 '주인공이 어딘가 이상하구나.' 하고 이해할 수 있긴 하다. 그러나 1인칭 주인공 시점은 주변인물들의 감정을 묘사하기 어렵다. 나아가 주인공에게 지나치게 애착을 품어 메리 수가 되거나, 주인공 이외의 것들도 충분히 묘사하지 않는 경우가 빈번하다. 주인공의 강함과 멋있음을 보여주는데에만 과몰입하거나, 주인공의 묘사와 설정에 공을 과도하게 들인 나머지, 주변 인물들은 대충대충하는 것. 그런 까닭에 작품을 계획하는 단계에서 분명히 작가와 주인공을 분리해야 한다.
주인공 스스로 매몰되는 경우란 다른 인물들과 상호작용하는 일마저 적은 주인공이 스스로의 내면에 갇히는 것을 말한다. 주인공 또한 다른 인물들과 상호작용하여 어떤 인물인지 독자에게 선보여야 하는 인물이다. 그저 내면의 묘사만으로 독자에게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보여주기만 한다면, 그 소설은 독자에게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날 받아들여라.' 하고 명령하는 꼴이다. 예컨대, 하나의 특종 기사를 봤다면 그것만으로 판단하지 않고 의 입장에서 후속 기사와 사실 확인을 기다리듯, 주인공 또한 그렇다.
이를 반대로 이용한 소설은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과 날개[6]가 대표적이다. 서술 트릭으로 확장할 수 있지만 초보 작가가 다룰 수 있는 기교가 아니다.

3.1.1.1. 예시


3.1.2. 1인칭 관찰자 시점


주인공이 아닌 작품 속에 등장하는 부수적 인물[8]로서의 서술자가 주인공을 관찰하여 이야기를 전달한다.
서술자는 관찰자 이상의 역할은 하지 않으며, 사건의 중심은 주인공이 된다. 다만 주인공의 내면이 드러나지 않아 독자들이 주인공에게 신비감을 가질 수 있다.
사랑 손님과 어머니가 1인칭 관찰자 시점의 대표적인 예시로 참고서에서 자주 언급된다. 셜록 홈즈 시리즈 또한 이 케이스. 주인공의 생각을 독자가 추측하는 것이 재미인 작품은 이 시점을 차용하곤 한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 중 아서 헤이스팅스가 나오는 작품들도 이 시점으로 전개된다.
3인칭 관찰자 시점과 달리 관찰자의 추측이나 감상 등의 사견이 들어갈 수 있다. 심지어 이러한 관찰자의 사견이 '''틀릴 수도 있고,''' 이 점을 서술 트릭으로 사용하는 작품도 있다. 예컨대 서술자가 속았다던가, 가치관이 일반인들과 다소 다르다던가 등이 있다.
그러나 1인칭 관찰자 시점이면서도 서술자에게 전지성을 부여하는 경우가 있다. 대표적으로 영혼 서술자가 있다. 죽은 이의 영혼을 서술자로 설정해, 물리적인 한계를 뛰어넘고 서술자의 주변 인물이나 서술자와 관련한 사건 따위를, 서술자의 경험과 더불어 서술하는 것이다.
드라마에서도 1인칭 관찰자 시점이 나타났다. '왔다 장보리!'에서 장비단이 1인칭 관찰자 역할을 하고 있다.
서브컬쳐 계열에서는 이 '관찰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존재도 간혹 등장한다.

3.1.2.1. 예시

  • 위대한 개츠비
  • 배따라기
  • 사랑 손님과 어머니[9]
  • 화랑의 후예
  • 리타 헤이워드와 쇼생크 탈출
  • 셜록 홈즈 시리즈[10]
  • 장마(소설)[11]
  • 장미의 이름
  • 이상한 선생님
  • 길모퉁이에서 만난 사람
  • 달과 6펜스
  • 유자소전[12]
  • 병신과 머저리[13]
  • 화수분
  •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14]
  •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 명두 (구효서)
  • 어느 피씨주의자의 종생기 (구병모)[스포일러]

3.2. 3인칭



3.2.1. 3인칭 관찰자 시점


'3인칭 관찰자 시점'은 작가 소멸 시점, 무비 카메라 시점, 작가 관찰자 시점, 3인칭 객관자 시점 등등의 다른 명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작품 밖의 서술자가 주관을 배제하고 관찰자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서술한다. 인물의 내면을 서술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만을 객관적으로 서술하므로, 독자가 상상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다.
일반적인 영화나 드라마를 생각해보면, 관객이나 시청자는 영화, 드라마와 전혀 관계없는 사람이고 관객이나 시청자가 어떠한 시공간에 있더라도 영화나 드라마의 내용이나 진행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또한 관객이나 시청자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직접 보고 들은 것만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3인칭 관찰자 시점이다. 그러므로 소설에서도 3인칭 관찰자 시점을 잘 활용한다면 소설 자체가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극적인 느낌을 독자들에게 줄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비단 3인칭 관찰자 시점이 보이는 표면상 것만 기술하는 것은 아니다. 이따금 관찰자의 입장으로만은 알 수 없는, 독자의 이해나 내용 전개 등에 필요한 것을 기술하기도 한다. 이를 '''선택적 전지'''라고 한다. 다시 말해, 특정 범위를 정해 잠깐 동안 전지적으로 기술한 것이다.
이런 요소는 시점 연구를 어렵게 만드는 주원인이기도 하다. 당연히 시점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메타픽션적인 요소도 거의 이 시점에서 발생한다.

3.2.1.1. 예시


3.2.2. 전지적 작가 시점


서술자가 작품 밖에서 사건을 서술하는데, 3인칭 관찰자 시점과의 차이는 마치 신처럼 인물의 내면이나 인물 간의 관계, 과거나 미래의 사건 등을 전부 파악하여 서술한다는 것이다. 3인칭 관찰자 시점과 비교하면, 등장인물들의 생각이나 신상 따위를 분석하고 논할 수 있다는 점이 다르다. 흥부와 놀부를 예로 들어보자. 전지적 작가 시점에선 서술자가 "흥부는 착하고 성실하고 또 어떻고... 놀부는 심술궂고 게으르고 또 어떻고..." 하고 설명할 수 있지만, 3인칭 관찰자 시점에선 그럴 수 없다.
이러한 특징 덕에 읽으면서 캐릭터 등장과 상황 파악 등이 쉽지만, 독자의 상상을 많이 제한하여 자칫하면 소설이 '''지루해지기 쉬운 시점'''이다. 심지어 에서는 서술자가 '''스포일러를 저지르기도 한다.'''
스토리 안에서 아예 서술자의 자리가 아예 없는 시점이기에 '서술자'를 나타내거나 묘사하는 문장이 없다. 게다가 시공간의 제약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 어떠한 상황에 빠진 등장인물이라도 생생하게 묘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여주인공이 길을 가다 갑자기 튀어나온 괴물에게 통째로 잡아먹혔는데 먹히자마자 기절했고, 이 광경을 옆에 있는 남자친구가 목격하다고 가정해보자. 1인칭 관찰자나 주인공 시점에선 단지 그때와 그 이후의 상황을 추측하거나 상상해서 기술할 수밖에 없고, 주변 사람의 심리나 행동 묘사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전지적 작가 시점에선 여주인공이 기절하여 어떤 일을 겪는지, 그리고 옆에 있는 남자친구는 뭘 하는지 완벽하게 서술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서술하는 상황의 폭이 넓고 묘사도 세세하게 할 수 있다.
'전지적 작가 시점'은 '3인칭 전지적 시점'과 같은 말이다. 소설과 같은 서사갈래에서 작가와 서술자는 다른 개념이기에 혼동하지 말자. 작가는 작품을 쓰는 사람이고, 서술자는 작품 내부에서 이야기를 말해주는 가상의 화자이다. 작가는 항상 작품 외부에 있으며, 서술자가 작품 안에서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이 될 수도 있고, 이야기 밖에서 이야기를 서술할 수도 있는 것이다. 전자가 1인칭(관찰자, 주인공)시점이고, 후자가 3인칭(관찰자, 전지적)시점이다. 따라서 전지적 작가 시점이나 3인칭 작가 시점이라는 용어는 엄밀히는 3인칭 전지적 시점과, 3인칭 관찰자 시점이 맞는 용어인 것이다.[15]
서로 비슷한 시기에(약 2010~2012년경) 사커라인에서 이 용어를 패러디하여 전지적 꾸레시점이라는 말을 썼다.

3.2.2.1. 예시


3.2.3. 제한적 전지적 작가 시점


선택적 시점이라고도 한다. 전지적 작가 시점의 하위 갈래이다.
일반적인 전지적 작가 시점과는 달리 등장인물들 중에서 '시점자'를 선정하여 오로지 시점자의 관점에서 바라본 사건과 시점자의 내면만을 서술하는 방식이다. 시점자에 한해서는 1인칭 시점과 같은 서술 규칙을 따르지만[16], 1인칭 대명사(나) 대신 시점자의 이름이나 3인칭 대명사(그, 그녀)를 주어로 사용하고, 작가가 시점자들을 교체해 가며 보다 넓고 다양한 관점으로 이야기를 진행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1인칭 시점의 특징을 공유하기 때문에 3인칭 시점임에도 시점자의 지식이나 성숙도, 의식 유무에 따라 서술에 제약을 받는다. 예를 들어 시점자가 어린아이일 경우 목격하는 일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가 동반되지 않은 피상적인 내용만이 묘사가 되는 식이다.[17][18] 혹은 상술한 괴물에게 먹히는 상황에서 시점을 희생자의 입장에서 서술할 경우 먹힌 이후 의식을 잃은 희생자의 상황만 잠시 묘사하고 서술을 끝내버려 주위 사람들의 행동과 운명은 추측에 맡길 수도 있다.[19]

3.2.3.1. 예시



3.3. 2인칭


실험적인 문체로 2인칭 시점이 있다. '너' 또는 '당신'이 주체.[20]
그러나 2인칭 시점을 시점이라는 개념으로 인정하는 것은 매우 어폐가 많으며 학술적으로 이는 용인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교과서에 괜히 2인칭 시점의 존재가 없는 것이 아니라 '''2인칭 시점은 본질적으로는 1인칭이나 3인칭 시점에서 주어를 '나/그/그녀'에서 '너'로 바꾼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엄밀히 따져, 작품의 주인공이 1인칭이라면 이를 관찰하는 모든 '너'는 3인칭이 된다.
2인칭이란 하이퍼링크를 통해서 할 수 있듯, 대화에서 상대방을 가리키는 대명사인 '너'나 '당신'과 같은 말 이전에 한 개인이 먼저 존재한다. 2인칭이란 개념은 타인을 인식하고 그 타인이 개인과 상황 따위의 맥락을 공유해야지만 개인이 사용 가능한 일종의 생략과 같다. 제아무리 술자가 2인칭 대명사로 지칭된들 독자에겐 제 3 인물이며, 그 시점을 가진 주체는 스스로를 1인칭으로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2인칭 시점은 성립 자체가 불가능하다. 요컨대 주체와 객체 이외에 시점이 적용되는 것은 없다.
즉 2인칭 시점 자체의 특징이 분명히 있기는 있지만 어디까지나 스타일이나 기교일 뿐이지 별개의 시점으로 구분하기는 어렵다. 아래는 그 예시다.

'''너는 교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는 너에게 첫눈에 반했다.

가령 위와 같은 글에서 첫번째 문장은 분명히 주어가 '너'이지만, 어디까지나 1인칭 시점이다. 왜냐면 '네가 교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는 사실은 '나'가 목격하고 나의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너는 배가 고프다. 그래서 치킨을 시켜먹는다.'''

이런 글이 대표적인 2인칭 서술 방식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본질적으로 불안정한데 왜냐면 '너'라는 대명사는 '나'가 있어야 성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굳이 2인칭 시점에서의 '나'를 억지로 상정하자면 신이나 전지적 존재, 혹은 작가가 될 것이다. 즉,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단순히 '그/그녀' 대신 '너'라는 대명사를 사용했을 뿐이지 별개의 시점은 아닌 것이다. '그녀는 배가 고프다. 그래서 치킨을 시켜먹는다'로 바꾸어도 뉘앙스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근본적인 차이는 없다.

'''독자 여러분께서는 이 책을 읽고 무엇을 느끼셨는지요?'''

위와 같이 독자를 '너'로 설정한다면 작품 내의 서술자가 작품 밖의 독자에게 말을 건네는 것으로 제4의 벽을 허물게 된다. 작품이 이중구조를 띈다면 서술 트릭이나 메타픽션이 될 수도 있는 등 상황에 따라 복잡하다. 특별한 연출의 예.
편지의 형식을 빌리는 서간체 소설 중에도 일종의 2인칭 시점으로 된 것이 있다. 다만 서간체는 어디까지나 본질적으로 1인칭 주인공 시점이며 서간체에서 2인칭 시점이 사용된다면 위에 설명했듯 본격적인 2인칭이 아니라 1인칭 '나'의 시점에서 관찰한 '너'의 이야기를 '나'의 시점에서 쓰는 것이 된다.

너는 엄마에게 너에 대해서 말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꼈다. 네가 하는 일이 엄마의 삶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듯이 여겨졌다.

신경숙 소설 '엄마를 부탁해' 中

가장 유명한 2인칭 시점의 소설은 역시 베스트셀러인 신경숙엄마를 부탁해라고 할 것이다. 여기서의 1챕터는 '나'에 대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2인칭 시점으로 되어 있다. 3인칭으로 바꾸어 써도 전혀 무리가 없는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이나, 이 소설에서 2인칭의 사용은 묘하게 강한 임팩트를 주는데 다름 아닌 각각의 독자들 '너'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느끼게 해서, 모든 자식들이 응당 가지고 있는 '부모에 대한 죄의식'을 자극하는 것이다.
서사 장르가 아닌 게임북이나 매뉴얼, 노래 가사 등 독자를 이입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면 2인칭 시점이 유용하다. 대표적으로 둠 시리즈의 스토리나 앤드류 허씨의 작품들, 언더테일의 다이얼로그 박스의 중립 서술은 2인칭 시점이다. 과거 머드 게임이 현역이던 시절에는 시청각적인 효과가 전무하여 텍스트로 모든 것을 서술하는 게임 장르라는 특수성 덕에 2인칭이 보편적이었으며[21] 1인칭은 꽤 드물었고(예: 나는 동쪽으로 갔다. 슬라임이 나를 공격한다!), 3인칭은 아예 없었다. 현대의 시각화된 게임에서는 당연히 1인칭과 3인칭 시점만 표현 가능[22]하다는 것을 보면 특이한 케이스이며 완벽하게 2인칭에 들어맞는 드문 경우이다.

3.3.1. 예시


  •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
  • 성석제의 '경두'
  • 김영하의 '당신의 나무', '도드리'
  • 정이현의 '1979년생'이나 카를로스 푸엔테스의 '아우라'
  • 하일지의 '그는 내게 지타를 아느냐고 물었다'
  • 무협작가 진산의 단편 중 잠자는 꽃
  • 한강의 '소년이 온다' 중 1장 '작은 새'
  • 가오싱젠의 '영혼의 산' - 2000년 노벨문학상 수상작.
  • 시게마츠 기요시의 '친구가 되기 5분 전'
  • 거의 모든 MMORPG게임[23]

[1] 의외로 착각하기 쉬울 수 있는데, 작가와 서술자는 일치하는 개념이 '''아니다'''.[2] 대표적인 작품이 오상원의 유예나, 원작 소설 프랑켄슈타인.[3] 즉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이라고 보기엔 어렵다. 더불어 왓슨은 작가의 페르소나이기도 하다.[4] 창은의 프래그먼츠는 1인칭 시점으로, 각 챕터마다 주인공을 변경해 여러 시각을 볼 수 있도록 심리 묘사와 상황전달을 효과적으로 해결했다. 단, 사건에 대한 왜곡 혹은 누락 등 시점의 한계도 있다.[5] 물론 불가능하거나 선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주인공의 자폐증이나 성적 지향을 이용한 소설은 이미 숱하다.[6] 특히 의식의 흐름을 이용한 자폐적인 기술.[7] 주인공 다움이의 시점 부분을 의미한다.[8] 인물이란 게 반드시 사람일 필요는 없다. 서술자를 길고양이나 호텔 로비의 행운목으로도 얼마든지 설정할 수도 있다.[9] 소설의 주인공은 옥희의 어머니인 과부와 옥희 큰외삼촌과 아버지의 친구인 사랑 손님으로 옥희라는 어린이 관찰자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10] 단, 셜록 홈즈의 사건집에 수록된 '탈색된 병사', '사자의 갈기'는 1인칭 주인공 시점, '마자랭의 다이아몬드'는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쓰였다.[11] 화자 동민의 관점으로 외할머니와 할머니의 대립과 화해 속에 있는 남북한의 대립과 화합을 무속이란 공통 주제에 담고 있다.[12] 주인공 유재필의 이야기를 화자 이문구가 얘기해준다.[13] 해당 작품은 한국 근현대문학의 고전이라 불리기도 하며, 국어국문학과문예창작학과에서는 1인칭 시점의 특징을 설명하기 위해 읽게 하곤 한다. [14] 다단계 액자식 구성을 하고 있지만, 1단계 액자에서는 소설가가 과거에 만났던 사람이 해줬던 이야기를 전달하는 내용으로 것으로 보이는데, 그 과거에 만났던 사람이 2단계 액자에서 사실은 본인이 벨보이 시절에 호텔의 콘시어지(스토리 진주인공)였던 사람의 이야기를 3단계 액자 이야기로 내레이션 하고 있어 일종의 1인칭 관찰자의 관찰자시점이다. [스포일러] 본래는 1인칭 주인공 시점이 맞으나, SNS를 소재로, 주인공이자 서술자인 본인의 행적에 대한 객관화를 선보여 주관자와 객관자의 경계를 허문 문제적 작품이기에 여기에 기술한다.[15] 고등학교와 입시학원에선 그냥 전지적 작가시점이라 가르치는 경우가 많지만 이는 용어의 문제이고, 수능에서도 작가가 아니라 '''서술자'''를 중심으로 문제를 구성한다. 그러니 꼭 구분하도록 하자.[16] 시점자의 감각 바깥에서 일어난 사건들이나, 시점자 이외의 등장인물들의 속마음은 서술되지 않는다.[17] 조지 R.R. 마틴얼음과 불의 노래를 쓰면서 어떤 시점자를 다룰 때 가장 어렵냐는 독자의 질문에 브랜 스타크를 언급한 적이 있다. 작중 나이가 10살도 안 된 어린아이이기 때문에 하나의 사건이 미성숙한 시점자의 관점에서는 어떻게 비춰질까를 매번 고민하면서 작업해야 되는 부분이 까다롭다고 한다.[18] 얼음과 불의 노래에서 브랜 스타크가 시점자로서 남녀의 성교를 목격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때의 서술은 다음과 같다. ''"방 안에서는 어떤 남자와 여자가 드잡이질을 하고 있었다. 둘 다 벌거벗은 몸이었다. 브랜은 그들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드잡이질은 '서로 머리채나 멱살을 움켜잡고 싸우는 짓'을 뜻한다. 즉, 어린아이인 시점자가 성교 장면을 남녀가 부둥켜 싸우고 있는 것으로 이해를 했기 때문에 소설의 서술도 이를 따라간 것이다.[19] 이 경우에는 긴장감을 조성하기에 좀 더 유리하다.[20] 편지글과 같은 서간체 소설은 대상이 '너/당신'이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나'가 주체이다.[21] 예시: "당신은 동쪽으로 갔다. 슬라임이 당신을 공격한다! 슬라임이 당신의 피부를 살짝 녹였다.(-4) 당신은 얼어붙은 폭풍을 날려 슬라임을 박살냈다.(-157) 슬라임이 죽었다. 당신은 300의 경험치와 100의 골드를 얻었다."[22] 텍스트를 이용한 서술로는 당연히 위의 언더테일처럼 쉽게 표현 가능하지만, 시각적으로는 도저히 이걸 표현할 수가 없다.[23] 사실 MMORPG의 시점은 모두 1인칭(거울 같은 오브젝트가 없는 한 인게임 시점에서는 플레이어 얼굴을 절대 볼 수 없으며 기껏해야 손이나 손에 든 무장, 가끔 내려다보는 시점 한정으로 신체 앞부분이 보임)이나 3인칭(카메라가 플레이어 등 뒤, 측면, 또는 머리 위에 존재)이다. 그러나 MMORPG의 원류인 머드게임에서는 '당신이' 무엇무엇을 했다고 서술하는 방식이 압도적 다수였으며, 소수의 1인칭(나는 무엇무엇을 했다)이 존재했다. 이들 머드의 정통 후예들인 MMORPG는 원래의 머드게임 포맷에다 시각적 스킨을 씌운 것으로 볼 수 있고, 무엇보다 머드게임 형식의 텍스트로 표시되는 스크립트창을 지원하는 게임에서는 여전히 '당신'이라고 적어 두는 게임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서술방식이 텍스트인 경우 1/2/3인칭 모두를 선택할 수는 있지만 3인칭만은 플레이어 몰입감을 크게 해치므로 잘 선택되지 않았던 반면, 현대의 게임처럼 시각적 묘사에 의존할 경우 '2인칭' 서술이 매우 난감해져 1/3인칭만이 쓰인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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