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합중국 해병레이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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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Marine Raiders
미 해병대의 역사에서 레이더스란 이름을 가졌던 부대는 두 개가 있다.
②: 위 ①번 부대의 이름을 본따서 2014년에 개칭된 미 해병특수전사령부(MARSOC) 산하의 특수전 연대.
이 문서는 그 중에서 '''①번, 즉 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전쟁 때 존재했던 경보병부대'''에 관한 내용이다.대체로 미 해병대는 본인들 자체가 이미 강인한 훈련을 받은 소수정예부대[2] 라는 이유로, 해병대 내에 또 따로 정예부대를 편성하는 것에 부정적인 경향이 있다. 해병대 자체가 정예부대이니 '정예부대 내의 정예부대'를 또 만드는 것은 굳이 불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미 해병대는 해병대 전투병력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보병 소총수가 바로 해병대 전력의 가장 중요한 중심이라는 인식이 깊게 자리잡고 있어서, 해병대 내에 일반보병보다 더 상위에 존재하는 정예부대라는 개념을 굳이 인정하기 싫어하는 전통이 있다. 즉 몇명씩 조용히 움직이며 치고 빠지는 특수부대니 그런것 보다는, 바로 쳐들어가서 강한 화력의 써포트를 받으며 요란하게 쳐부수고 적 영토를 점령한 뒤 깃발을 꽂는 일반보병들이 미 해병대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이자 가장 해병대다운 전력이라는 인식이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는 것.
그러나 상륙전과 지상전투들이 갈수록 기계화된 대규모 화력전 양상으로 가게 되자 해병대에서도 소규모 특수작전을 전담할 부대를 필요가 있다는 외부인들의 의견과 간섭 때문에 미 해병대 내에 특수부대 혹은 특수부대와 유사한 경보병부대들이 편성되고야 말았다.
'미 해병대 레이더스'는 그러한 미 해병대 내에 별도로 생긴 특수부대/경보병부대류의 부대 중 최초의 부대이다. 2차 세계대전 시기에 불과 2년에 불과한 짧은 존속기간을 끝으로 해체됐지만 여러 전공을 남겼고, 해체된지 70년만인 2014년에 미해병대 특수전연대의 명칭으로 다시 부활하여 정신적인 명맥을 잇고 있다.
재밌는 점은, 미 해병대 레이더스가 만들어진 1942년에 이 'Raider'(습격자)라는 단어를 사용해 이름 지어진 여러 부대들이 해병대 뿐 아니라 육군과 해군에도 비슷한 시기에 각각 생겼다는 것이다. 즉 유럽과 북아프리카에서 적의 해안지역을 기습타격하는 미 해군/육군 합동부대였던 "Scouts & Raiders"도 같은 해에 창설됐고 [4] , 한국에선 둘리틀 특공대라고 번역하는 특별 폭격부대인 "Doolittle Raiders"도 같은 해에 미 육군 항공대에 만들어졌다. 그 외에도 미 육군에서 레이더스라는 명칭을 가진 임시 부대들이 비슷한 시기에 편성되어 특수작전을 수행했었다.[5]
2. 시대적 배경
20세기 초만 하더라도, 미 해병대는 군함에 승선하여 함내 치안유지, 여차하면 보트로 상륙 후 제한적인 지상전투, 평시 해외 기지 경계와 같은 고전적인 해병대 개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해병대도 여단 규모로 확장되어 유럽 전선에 투입되었으나 육군과 특별히 다른 임무를 띠었던 것은 아니었으며, 해병대 수뇌부의 대전략 역시 주로 미국의 내해였던 카리브해 연안국가에 대한 무력개입, 그리고 여기에 개입하려는 가상적국 영국이라는 19세기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1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일본이 승전국 지위를 이용하여 마리아나 제도(미국령 괌을 제외한 티니안, 사이판 등), 캐롤라인 제도(트룩, 팔라우, 펠렐리우, 울리시 등), 마셜 제도(마주로, 콰잘린 등) 등 중부태평양에서 폭넓은 세력권을 형성하며 새로운 가상적국으로 부상하자, 해병대의 대전략 역시 기존의 카리브해와 유럽을 넘어 뉴칼레도니아에서 필리핀에 이르는 태평양 전역을 시야에 두는 일대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전간기인 1920년대는 관심있는 장교들의 개인적인 연구 차원에서, 그리고 점차로는 미 해군 전체의 차원에서 일본과의 전쟁계획이 구체화되는 시기였는데, 일본과 개전시 전쟁 초반에는 수세가 불가피하다는 것이 전반적인 결론이었다.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으로 미 해군의 60%의 전력을 보장받은 일본을 태평양과 대서양으로 함대가 양분된 미 해군이 저지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으며, 미일 양국의 본토에서의 거리를 보았을 때 미국의 서태평양 전초기지인 필리핀과 괌의 상실은 불가피하고, 여차하면 웨이크 섬이나 미드웨이 섬까지도 지켜내기 쉽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이었다. [6]
그러면 전시경제가 활성화되고, 물량과 인원이 충분히 증강되어 전면적인 공세작전에 나설 때까지 우리 해병대는 손가락만 빨고 있어야 하나? 하는 의문이 당연히 해병대 내에서 확산되었고,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남아도는 구형 구축함을 고속수송함으로 개조, 경무장한 정예병들을 여기에 싣고 일본이 점령한 도서지역에 소규모로 투입하여 기습과 사보타주, 나아가 현지인과 연계한 게릴라전을 펼쳐보자! 하는 계획이 구상되어, 일부 부대를 대상으로 테스트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간기 해병대 수뇌부의 전반적인 전략은 소규모 병력의 기습적인 투입보다는 함포사격 및 제대로 된 항공, 포병세력의 지원을 받는 사단~군단급 부대의 대규모 상륙작전을 지향하고 있었고[7] 위의 테스트는 말 그대로 테스트에 머물게 될... 뻔 했다.
3. 레이더스 부대 창설
그러나 이렇게 사장될 뻔한 '정예 경보병' 개념은, 해병대의 의사와 상관없이 실현될 기회를 잡게 된다.
제2차 세계 대전 개전 이후,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노르웨이, 덴마크 등이 독일의 손에 넘어가게 되자 영국 육군은 코만도라는 이름의 특수부대를 만들어서 대서양 연안의 독일 점령지에 해상으로 침투시켜 쏠쏠한 재미를 보았고, 당시 됭케르크 철수 이후 뜻대로 풀리는 일이 별로 없던 처칠이 프랭클린 D. 루즈벨트에게 이 전과를 그렇게 자랑했다고 한다(...) 이에 솔깃해진 루즈벨트는 미군에도 코만도와 유사한 부대를 만들 것을 주문했다. 그래서 미 육군에 레인저 대대가 만들어졌고, 이어서 미 해병대에도 레이더스 부대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미 해병대 수뇌부는 처음부터 이 주문이 별로 탐탁치 않았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해병대는 해병대가 이미 정예 부대인데 무슨 별도의 정예부대가 따로 필요하냐는 반응이었고, 유럽과 달리 별다른 배후지가 없는 태평양의 섬에서 소규모 병력의 히트앤드런이 거둘 수 있는 성과는 제한될 수 밖에 없으며 결국 전장의 양상은 정규전 군의 대규모 상륙작전이 결정지을 것이라고 보고 있었다. 사실 논리적 정합성으로 보나 향후 역사의 전개로 보나 이쪽이 더 맞는 의견이기는 했는데, 미국 대통령이 까라는데 까야지 다른 수가 있을리가...
전쟁을 앞두고 해병대 입장에서 매우 귀찮을 수 밖에 없는 이런 사태가 발생하는 데에는, 에반스 F. 칼슨(1896-1947)이라는 해병 장교의 역할도 매우 컸다. 후에 제2 레이더스 대대의 창설 대대장을 맡게 되는 칼슨은 1912년 육군 병으로 입대하여 육군 상사(1SG)까지 진급, 1차 세계대전 때는 육군 소위로 현지 임관하여 육군 포병 대위까지 올랐으며 전상장을 받은 바도 있는 참전용사(베테랑)였는데, 9년간 육군에 복무한 후 1921년 전역했다가 1922년 미 해병대 병으로 재입대, 입대 1년만에 해병대 소위로 임관한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였다.
아무튼 전간기에 해병대에 재입대한 칼슨에게는 두 가지 유별난 점이 있었는데, 하나는 1933년에 대통령 별장 경호차 파견된 해병 분견대에 근무하다가 프랭클린 D. 루즈벨트 일가와 친분을 쌓게 되었다는 점이고, 나머지 하나는 중국에서 독특한 이력을 쌓았다는 점이었다.
중국에서 총 세 차례나 근무하여 중국어와 중국문화에 익숙했던 칼슨은 1937년의 세 번째 중국 근무 때 매우 독특한 경험을 하는데, 다름아닌 중국 공산당과 접촉하여, 대장정 이후 공산당의 본거지였던 연안을 방문하게 된 것이다. 베스트셀러 <중국의 붉은 별>의 저자였던 에드거 스노우를 통해 줄을 댄 칼슨은, 연안에서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등 공산당 지도부를 접견하는 한편으로 홍군의 전술(게릴라 전술)에 깊은 인상을 받게 된다.[8]
중국 근무를 마친 칼슨은 17년간 해병대에 복무한 후 1939년 평소 좋아하던 강연과 집필을 위해 해병대 대위로 전역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2년만에 다시 해병대 현역 소령으로 자원 입대했다. 칼슨 소령은 해병대판 '코만도' 부대의 창설을 중국에서 목격한 홍군의 전술을 해병대에 도입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겼다. 칼슨은 대통령 일가와의 개인적인 친분을 이용, 프랭클린 D. 루즈벨트의 아들이자 당시 미 해병대 상근예비역[9] 대위로 복무 중이던 제임스 루즈벨트 대위와 함께 미 해병대 사령관에세 편지를 보내 레이더스 부대 창설을 건의했고, 대통령 아들의 건의를 무시할 수 없었던 해병대 사령관은 이를 받아들여 1942년 2월, 기존 해병대 내 지원자를 중심으로 제1레이더스 대대와 제2레이더스 대대를 창설하였다. 이에 따라 칼슨은 중령으로 진급하여 제2레이더스 대대의 창설 초대 대대장이 되었고, 대통령의 아들 제임스 루스벨트는 부대대장으로 취임한다.
4. 화려한 전공을 세우다
이 레이더스 부대는 각종 지원과 보급 면에서 해병대 내에서 최우선 순위 대접을 받았다. 마치 요즘의 특수부대들마냥 요청만 하면 각종 신무기가 보급되었고, 해병대 내 타 부대 정예 인원 차출에도 우선권을 가졌다. 심지어 칼슨 중령은 2레이더스 대대 내에서 기존에 없던 새로운 편제(기존 9인 편제 대신 10인 편제의 새로운 분대 구성, 2개 해병소대로 구성된 중대 6개로 대대 재편 등)를 테스트하기도 했다. 진주만 기습 이후 엄청난 속도로 규모를 확장하느라 눈코뜰새 없이 바쁜 해병대의 입장에서 보면, 단일화된 프로세스로 공장처럼 부대를 찍어내야 하는 상황에서 한땀 한땀 공들여 수공업 명품을 만들고 있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인 셈.
해병대의 심정이 어쨌건간에 숙련된 정예병 위주로 강훈련을 통해 공들여 키워낸 이 경보병대대는 확실히 쓸모가 있었다. 가벼운 편성으로 잠수함을 통해서도 손쉽게 적지 한가운데 투입할 수 있는 이들 레이더스 부대는 사령부에게 매우 간편하고 쓰기 편한 옵션이었다. 미드웨이 해전 당시 2대대의 일부 중대들을 미드웨이 섬 방어에 투입하는 한편으로, 일본령 길버트 제도의 마킨 환초에 잠수함을 통해 2대대를 투입시켜서 소규모의 주둔 일본군을 전멸시키고 성공리에 회수하기도 하였다. 이 때 2대대의 마킨 기습은 영웅적인 전공으로 언론에 대대적으로 홍보되었고, 1943년에는 전시 홍보영화로 영화화도 되었다.
그러나 '''실상 전체 전황에 미친 영향이 미미한데다가, 막상 기습 과정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전멸시키고도 칼슨 중령의 오판으로 일본군에 항복할 뻔 하는 등, 들여다보면 좀 허술한 구석이 많다.''' 아무래도 아직 초창기이다 보니... 그래도 다들 영웅과 승리에 목말라하던 개전 초라 흡사 미 육군 둘리틀 특공대의 도쿄 공습과 비슷하게 많은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일본군이 미드웨이 공략에 나서는데 일정부분 기여하면서 전황에 긍정적인 영향을 약간이라도 미친 둘리틀 특공대에 반해, 제2레이더스대대의 마킨 기습은 그 작전 자체만으로는 성공적이었을지 몰라도 일본군이 외곽 기지의 취약점을 깨닫고 방어를 본격적으로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일본군이 마샬 제도, 길버트 제도의 방어를 강화하여 이후 타라와 전투에서 상륙부대가 큰 피해를 입게 된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는 것. 마킨 기습의 상세한 내용은 대사의 태평양전쟁 블로그의 관련항목 1편, 2편 참조.
아이러니한 일은 레이더스부대 최대의 전공이 이러한 기습작전이 아닌 방어전에서 세워졌다는 점이다. 과달카날 전역 초기, 메릿 에드슨 중령이 이끄는 제1레이더스 대대는 툴라기 섬 점령에 투입되었다가 이후 과달카날 섬으로 재배치되었는데, 과달카날 전역 지상전 최대의 격전이자 승부처였던 42년 9월 13일 피의 능선 전투에서 가와구치 기요타케 소장이 이끄는 일본군 주공을 패퇴시키면서 명성을 떨치게 된다.[10] 그리고 마킨 환초 기습 이후 이런저런 소규모 작전에 동원되었던 칼슨 중령의 제2대대 역시 과달카날 전역에서 무려 29일간(1942. 11. 6 ~ 1942. 12. 4)의 연속된 적지 강행정찰을 수행, 정찰기간 동안 500명 이상의 일본군을 사살하면서 전사자 16명, 교환비 30:1이 넘는 놀라운 전과를 세워 워싱턴 D.C.의 높으신 분들을 기쁘게 했다.
미 해병대 수뇌부로서는 여전히 교리상 존재의의가 불분명한 레이더스 부대의 존재 자체가 마뜩찮았지만, 어쨌건 아직 본격적인 미군의 쇼미더머니가 시전되기 전 일본군과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이던 시기에 레이더스부대가 큰 활약을 보인 것은 사실이고 대통령이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에 따라 제3, 제4레이더스 대대가 잇달아 창설되어, 1943년 3월에는 이 4개 레이더스대대를 묶어 제1레이더스연대로 확대 재편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레이더스 부대의 산파이자 해병대에 홍군식 전술을 도입하고자 애썼던 에반스 칼슨 중령은 과달카날 전역 이후 말라리아와 황달에 걸려 본토로 후송되는 바람에 레이더스 부대를 떠나게 된다. 이후 칼슨 중령은 다시 전투부대 지휘관으로 복귀하지 못하였고, 칼슨이 공들여 육성한 2레이더스대대 역시 그 후에 전통적인 일반 보병부대의 임무와 편제로 복귀하게 되었다. 그래도 칼슨 중령은 해병대에 겅호, 그리고 본인이 도입한 분대 편제(분대장+3인1조의 화력팀 3개조로 구성된 10인 분대)를 유산으로 남겼다.
미군이 호주와 뉴칼레도니아가 지척인 뉴기니와 남부솔로몬 제도에서 일본군의 공세를 막아내느라 그야말로 사생결단을 벌이던 1942년~1943년 중반까지, 레이더스부대는 애초의 의구심을 불식시키는 빛나는 전공을 세우며 존재가치를 뽐냈지만, 1943년을 기점으로 태평양 전쟁은 전혀 다른 양상으로 바뀌고 있었다.
5. 짧은 역사의 끝
1943년, 제1레이더스연대는 다시 두 개의 단위부대로 나뉘어(제2,3레이더스대대가 제2레이더스연대로 임시편성) 중부 솔로몬제도 진공에 투입된다. 제1레이더스연대는 뉴조지아섬 작전에, 제2레이더스연대는 부갠빌 섬 상륙작전에 투입되어 훌륭하게 임무를 완수하였으나, 태평양 전쟁에서 레이더스부대의 역할은 여기까지였다. 일단 솔로몬제도와 뉴기니에서 일본군의 예봉을 꺾은 미군은 1943년 하반기를 기점으로 본격적인 반격작전을 준비해나갔고, 일본군 역시 예상되는 미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적극적으로 전방 기지들의 요새화에 매진했다.
본격적인 반격작전을 앞두고 이제 해병대는 레이더스부대와 같은 소수의 경무장 정예 보병보다는 제대로 된 지원화력을 갖춘 정규전 편성의 일반 해병부대가 훨씬 더 많이 필요하게 되었다. 해병사단을 6개로 증가 시키기 위해서는 레이더스대대, 낙하산대대, 방어대대 등 각종 독립대대들을 말 그대로 갈아넣어야만 간신히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태평양 전쟁의 본질이 변화하고 있었다. 1942년 전쟁 초기에는 수세적인 상황에 있었기 때문에 해안 기습 타격 부대가 필요했지만, 실제 이런 작전에서 경무장 한 기습부대는 지원화력의 부족으로 고통을 겪었고, 성과도 시원치 않았다. 또, 연합군이 공세로 전환하고 대규모 상륙전 위주로 전쟁이 전개되자 해안 기습부대들도 결국은 일반 부대처럼 운영되어 결국 재능낭비만 유발했다. 그래서 차라리 일반 보병부대로 기습 작전을 하는게 더 효과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마지막으로 가장 결정적이고 중요한 문제는 이미 정예 부대인 해병대 안에 다른 해병대보다 우대받는 별도의 정예 부대가 존재하면 기존 해병들이 소외감을 느끼고 자존심이 무너져 군에서 가장 중요한 사기가 꺾이는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보수적인 해병대 수뇌부는 레이더스 같은 비정규전적인 부대의 존재 자체를 무척 싫어했고. 자신들이 선호하는 정규전적이고 전통적인 부대로 되돌리고자 노력했다. 다수의 해병대 고위 장성들이 이들 부대를 해체하려 한 이유는 안 그래도 부족한 인적 물적 자원을 이런 엘리트 부대가 마구 가져다 쓰니 빈익빈 부익부 양극화가 심해져서 다른 해병부대들이 더더욱 궁핍해지는 문제도 있었다. 엘리트 부대는 모든 보급에 최우선 순위를 가지고 있어서 우수한 인력도 먼저 다 빼갔고, 잠수함이나 수송기 지원 등 모든 자원을 다 끌어다 썼다.
그리고, 레이더스 부대는 원래 해병대가 필요해서 만든 부대도 아니고 대통령의 아들이 부탁해서 만들어 준것인데 마침 의욕 넘치던 제임스가 질병으로 인해 레이더스 대대를 떠나 사령부 참모부서로 전근을 가게 되고, 칼슨도 말라리아로 후송을 가게 되자 호시탐탐 적당한 시기만 노리고 있던 해병대 지휘부는 그 즉시 해병대 내 엘리트 부대의 해체를 위한 작전에 돌입했다.
미 해병대 사령관 토마스 홀콤(Thomas Holcomb) 해병 중장은 이런 엘리트 부대를 해체할 구실을 찾기 위해 연구용역을 맡겨 놓고 있었는데, 연구 결과는 해병대 안의 엘리트 부대가 자원을 독점해서 다른 해병부대의 사기가 땅에 떨어지는데 반해, 엘리트 부대가 수행하는 작전은 다른 해병부대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해병대 수뇌부가 원하는 바대로의 결론이었다. 1943.12월 중순, 임기를 며칠 안 남긴 시점에 해병대 사령관은 이 결과를 상급 지휘관인 미 해군 참모총장에게 전달했고, 해군참모총장은 해병대가 요청한 엘리트 부대 해체 안을 승인했다. 1944.1.1일자로 취임한 신임 해병대 사령관 알렉산더 반데그리프트(Alexander Vandegrift) 해병 중장은 취임 직후인 1944.1.8일 기다렸다는 듯 엘리트 부대인 레이더스 부대와 낙하산 부대(속칭 Paramarines)를 일반 해병대대로 전환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결국 1944년 2월, 제1레이더스 연대는 제4해병연대[11] 로 개편되었고, 제1,4,3레이더스 대대는 각각 4연대 1,2,3 대대로, 제2레이더스 대대는 연대 화기중대로 재편되면서, 해병레이더스 부대의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어쨌거나 제4해병연대도 베테랑 레이더스 부대원을 기간으로 구성된 만큼 이후 투입되었던 괌 탈환전(제1임시 해병여단 예하연대로 참가), 오키나와 전투(해병 제6사단 예하연대로 참가)에서도 맹활약하였고, 21세기 현재까지도 현역으로 활발히 활동 중이다. 현재는 해병대 제3사단 예하이다.
이런 역사 때문에 '''2차대전 레이더스부대의 역사를 실질적으로 계승하고 있는 부대를 굳이 꼽아야 한다면 해병 특수전연대보다는 오히려 이 제4해병연대가 그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제4해병연대는 1944년에 레이더스 부대를 4연대로 개칭한 것이라 레이더스의 인적자원과 혈통을 직접 이어 받았지만, MARSOC 레이더 연대는 먼 훗날 새로 창설된지 8년 후인 2014년에 '레이더'라는 '''이름만''' 따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4연대는 일반보병부대로서의 임무를 수행했기 때문에 혈통만 계승했을 뿐 경보병 특공부대의 임무와 정신은 계승하지 못한 반면, 새로 창설된 현재의 레이더 연대는 혈통을 계승하지는 못했지만 2차 대전 당시의 레이더스 부대가 가졌던 비정규전적인 성격을 계승하기 때문에 '정신적이고 상징적인' 계승자는 새로 창설된 레이더 연대라고 볼 수 있다.
위 내용을 포함한 더욱 상세한 레이더스의 역사가 궁금한 밀리터리 매니아들은 미해병대 공식출간물 FROM MAKIN TO BOUGAINVILLE : Marine Raiders in the Pacific War을 참조.
6. 관련 문서
[1] 참고로 'raid'는 습격, 급습, 침략 등의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이고, raiders는 한국어로 '습격자들', '침략자들'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데, 이를 군대용어식으로 의역하면 습격부대, 기습부대, 강습부대 등으로 번역할 수 있다.[2] a few good men[3] Naval Combat Demolition Units[4] 참고로, 이후 육/해군의 Scouts & Raiders는 해군의 NCDU[3] 와 함께 해군 UDT로 흡수통합되었고, 이 UDT를 바탕으로 해서 1962년에 창설한 부대가 바로 네이비 씰이다.[5] 2차 세계대전 뿐 아니라 한국전쟁 때에도 Raiders라는 이름의 부대들이 미 육군에 존재했었다.[6] 반대로 같은 이유에서 일본의 공세도 하와이까지 미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예상 역시 지배적이었다. 이러한 전황 예상은 퍽 잘 짜여진 것으로, 실제 2차세계대전의 전개와 비교해봐도 큰 차이가 나지는 않는다. 단 하나 진주만 공습만 빼고. 그만큼 전간기의 10여년 사이에 항공력의 발달이 초월적이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7] 이 전략은 실제로 반영되어 진주만 기습 직전 미 해병대는 사단급 부대를 신설했고 태평양 전쟁 중기에는 군단급 부대 창설로 군단급 상륙작전과 관련 교리를 종전까지 펼쳤다.[8] 이런 경력이 있다보니 매카시즘이 창궐하던 시기에 고초를 겪었을만도 한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칼슨은 사이판 전투에서 입은 부상 후유증으로 종전 직후인 1947년 세상을 떠났다. 한편, 칼슨은 해병대에 겅호 구호를 최초로 도입한 인물이기도 하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9] 원문은 예비역(Reserve)인데, 미국의 예비역은 현역에서 제대한 군인이 아니고, 우리나라의 상근예비역처럼 처음부터 예비역으로 입대하고, 연중 30~60일 정도 출퇴근 하며 8년 복무하는 부업 일자리라서 예비역으로 번역하기보다 상근예비역으로 번역하는게 좀 더 의미에 부합하고 이해가 빨라 초월번역하였다. 미국 예비역은 복무기간 중 최대 24개월까지 동원소집 될 수 있다.[10] 일개 대대가 하룻밤의 전투로 대대장 에드슨 중령을 포함 2명이 명예 훈장을 수여받았으니 이 전투의 중요성과 그 격렬함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11] 본래 China Marines로 널리 알려진 연대로, 상하이에 주둔하다가 중일전쟁 발발 이후 필리핀으로 이동, 이후 필리핀 함락 당시 소멸한 연대의 단대호를 물려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