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태/선수 경력
1. 아마시절
초등학교 4학년 때 타고난 힘과 근성을 알아본 대연초등학교 야구부 감독이 입부를 권했다. 초량중 2학년 때 아버지가 사망했고 어머니는 어려운 집안 살림살이를 홀로 책임지면서 야구선수 막내아들의 뒷바라지를 책임졌다. 부산의 양대 야구 명문은 부산고와 경남고. 여기에 부산상고와 경남상고가 또 다른 라이벌을 형성하고 있다. 박정태는 1984년 이들 학교가 아닌 동래고로 진학했다. 주전 2루수였지만 썩 눈에 띄는 선수는 아니었던 탓이다.
1985년 화랑기고교야구선수권대회 첫 경기 신일고 전서 박정태의 타순은 6번이었다. 고교 졸업 뒤에는 경성대로 진학했다. 박정태는 대학3학년 때까지 크게 두드려지지 않았다. 2학년이던 1988년 백호기 미기상을 받았을 뿐이다. 그러나 4학년이던 1990년 기량이 만개했다.
그후 캐나다 에드먼튼에서 열린 제31회 세게야구선수권대회에서 대표팀 4번 타자로 맹활약했다. 대회 올스타에는 뽑히지 못했지만 5할대 타율을 기록하며 스타덤에 올랐다. 9월 베이징 아시아경기대회에서 유격수 이종범, 3루수 유지현과 함께 철벽 내야진을 이뤘다.
그 해 대학야구선수권대회에서는 17타수 10안타 타율 0.588 1홈런 8타점으로 MVP에 뽑히는 등 이름을 높였다. 그리고 사람들은 경성대의 땅딸한 2루수의 별명이 악바리 라는 것도 알게 됐다.
경성대학교 졸업 후 1991년 롯데의 1차지명을 받아 프로에 입문했다.
2. 롯데 자이언츠
2.1. 1991시즌
1991년, 개막전 1번타자로 프로 첫 타석을 맞아 중전 안타를 기록하며 혜성처럼 등장한 박정태는 그 해 .285의 타율과 14홈런 74타점이라는 범상치 않은 활약으로 팀의 포스트시즌 진출에 한몫했다. 신인 첫 해부터 기존 주전 2루수였던 박영태를 밀어내고 풀 타임 주전으로 활약. 132개의 안타는 팀내 최다안타이자 리그 전체 4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고, 14개의 홈런은 김민호에 이은 팀 내 2위였다.
개막 두번째 경기까지는 1번타자로 나섰으나 세 번째 경기부터 3번타자로 이동해 그 이후 선수생활 대부분을 3번타자로 보내게 된다. 신인왕은 절친인 조규제[1] 에게 넘겨 줘야 했지만 2루수 골든글러브는 박정태의 차지였다. 1982년 창단 이후 롯데에서 골든글러브를 수상한 내야수는 원년멤버 김용희와 김용철 이후로 박정태가 처음.
이 해 처음으로 열린 한일 슈퍼게임에서도 한국 대표팀의 주전 2루수로 활약했다. 대표팀의 베스트 나인 중에서 유일한 신인이었을 정도로 박정태의 존재감은 이미 신인의 범주를 넘어선 상태였다.
2.2. 1992시즌
1992년 남두오성의 하나로 활약하며 타율 .335 14홈런 79타점, 2016시즌 전까지 한국프로야구 '''한 시즌 최다 2루타 기록'''인 43개의 2루타를 기록하여 롯데의 소총부대를 이끌며 1992년 한국시리즈 우승에 한몫하게 된다. 최다안타 1위를 한끗차로 놓쳐버리며 개인타이틀 홀더가 되지는 못했지만, 포스트시즌에서의 맹활약으로 팀 우승을 이끌며 그 한을 풀었다. 준플레이오프부터 한국시리즈를 거치며 12경기동안 44타수 17안타로 .388의 타율을 기록하며 팀 타선을 이끌었다.
한국시리즈 우승을 결정지은 마지막 아웃카운트도 박정태의 손으로 만들어냈다(2루땅볼). 땅볼을 잡아 송구하지 않고 바로 2루 베이스터치를 한 뒤 좋아서 펄쩍펄쩍 뛰던 장면은 지금 현재도 롯데의 마지막 우승 장면으로 기억되고 있다. 2루수 골든글러브 또한 당연히 그의 몫으로 2년 연속 수상.
그 해 다승왕과 구원왕을 동시에 차지했던 최고투수 빙그레의 송진우는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타자로 다름아닌 박정태를 꼽았을 정도로 박정태는 고작 2년차에 롯데의 중심선수이자 전국구 스타로 자리잡아가기 시작했다.
2.3. 1993시즌
3년차부터 등번호를 종래의 14번에서 16번으로 변경했다. 14번을 달고 2년 연속으로 홈런 14개를 쳤기 때문에 올해는 2개만 더 치자는 뜻에서 번호를 16번으로 변경했다는데, 실제로 이후 홈런 16개를 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이 번호가 마음에 들었는지 은퇴시까지 계속해서 16번을 사용했다.[2]
시즌 초반부터 타격 선두권을 질주하며 그야말로 불방망이를 휘둘렀다. 당시 LG 외야수 박준태와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타격 선두 레이스를 펼쳤는데 둘이 이름이 비슷하고 둘 다 영문 이니셜이 똑같이 PJT라서 당시 나름 화제가 되었다. 본인 말로는 야구가 너무 잘 돼 올해야말로 내가 뭔가 큰 건 하나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고.
그러나... 5월 23일, 사직 태평양전에서 1루에 나가 있는 상황에서 후속 타자의 땅볼 타구 때 더블플레이를 저지하기 위해 2루로 슬라이딩하다가 유격수 염경엽과 크게 충돌해 선수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3] 발목에 심각한 복합 골절상을 입었다. 동래구 명륜동에 위치한 대동병원에 입원하여 여러번의 수술을 받게 되었고 이로 인해 1993년~1994년 전 시즌을 날려 먹었다. 부상 당시 타율이 .359로 타격 1위를 질주하며 절정으로 달리고 있을때라 더욱 뼈아픈 시즌이었다. 부상을 안타까워 했던 롯데팬 초, 중, 고등학교 학생들이 병실에 직접 병문안도 많이 하였고 늦은 밤시간에 온 학생들에게는 박정태선수가 늦었으니 집으로 돌아가라고 다독였을 정도였다.
[image]
졸지에 팀의 핵심을 잃어버린 롯데는 이후 성적이 점점 내리막길, 투수진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전년도 우승팀이 6위로 추락하며 박정태가 팀 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줬다.[4] 롯데 홈경기 중계때 목발을 짚고 관중석에서 인터뷰하던 장면은 많은 롯데팬들의 심금을 울렸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큰 부상에서의 성공적인 재기는 박정태의 근성왕 이미지를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2.4. 1994시즌
전반기 롯데 경기 중계방송에서 하일성이 '빠르면 후반기쯤 복귀할 수도 있다'며 박정태의 근황에 대해 잠깐 언급했던 적이 있긴 했지만, 결국 발목 부위의 재수술과 방위 복무로 인해 한 경기도 출장하지 못하며 시즌을 통으로 결장하였다. 참고로 부상 부위에 총 5차례나 수술을 받았다.
2.5. 1995시즌
1995년 5월 16일 사직구장 LG 트윈스와의 홈경기에서 복귀전을 치러 4타수 3안타라는 호성적을 기록, '''부상을 근성으로 이겨내고 복귀'''했다. 1년 11개월 23일만의 복귀라 당초 대타로 나설 것으로 보였지만 3번타자 선발 2루수로 출전하여 복귀 첫타석에서 안타 포함 3안타를 기록했다. 훗날 본인은 이날 복귀전에 대해 "2년간 나의 재기를 믿고 응원해주신 분들을 위해서라도 복귀전은 무조건 안타를 많이 쳐야겠는는 생각밖에 없었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정말 3안타를 치며 복귀전을 화려하게 수놓았다. 다음날에도 변함없이 3번타자 선발 2루수로 출전해 2타점짜리 역전 적시타를 날리기도 했다.
박정태가 복귀한 3연전은 화수목 평일이었음에도 사직구장이 3게임 연속 만원관중을 기록할 정도로 롯데팬들의 반응은 그야말로 열광적이었다. 그 이후로 주루 플레이는 썩 좋지 않았으나[5] 타격과 수비에서는 A급의 활약을 해 주었다. 당시 방위병으로 복무하며 홈 경기에만 출전[6] 이 가능하여 50경기만 출전, 시즌 성적은 타율 0.337 2홈런 34타점을 기록해 롯데가 3위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는데 공헌했다.
플레이오프부터는 원정경기에도 출전하면서 팀의 한국시리즈 준우승을 함께 하지만, 치열한 플레이오프를 거치며 체력이 결국 방전. 한국시리즈에선 페이스가 뚝 떨어져 7경기동안 꾸준히 클린업 트리오로 기용되었음에도 27타수 2안타로 타율이 1할도 되지 않는 극도의 부진을 보였다. 2년간 야구를 쉬고 동계훈련도 못 한 여파가 중요한 순간에 닥친 것. 특히 7차전 3회말 2사 2,3루에서 2루베이스 방면으로 흐르는 땅볼을 달려가서 잡다가 공을 글러브에 채지 못하고 흘려버리는 바람에 2점을 헌납, 결국 롯데는 이 점수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2:4로 패배하게 된다. 이때의 임팩트로 나쁘지 않은 수비에도 불구하고 수비가 나쁘다는 인식이 강하게 박혔다.[7][8]
2.6. 1996시즌
4월 2일에 방위복무에서 소집 해제가 되어 시즌이 개막하기 전에 군복무를 마쳤다. 부상에서 복귀 후 처음으로 풀 타임을 소화한 시즌이며 시즌 내내 꾸준하게 3할 이상의 타율과 안정된 수비로 완전히 재기에 성공하였음을 알렸다. 특히 시즌 초반에는 팀내 타율, 안타, 타점 등 홈런을 제외한 공격부문 선두에 자신의 이름을 올려놨을 정도.
4년만에 첫 풀타임 시즌이다보니 이런저런 잔부상에 시달리며 결장이 잦아 94경기밖에 출전하지 못했고 시즌 후반기에는 체력 저하로 타율이 .290까지 내려간 적도 있었다. 8월 중순부터 다시 타격감을 회복하고 몰아치기를 시작해 .309의 타율로 시즌을 마쳤다. 많은 경기를 결장했지만 92년 이후 최초로 규정타석을 채웠고 3할 이상의 타율로 시즌을 마치며 골든글러브도 4년만에 다시 탈환, 지난해의 재기가 일시적인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
이 시즌 최종 성적은 94경기 출전에 .309의 타율과 5홈런 61타점. 전년도 준우승팀이 5위로 추락해 포스트시즌에 가지 못했음에도 개인 성적에서 어느 2루수도 박정태에 비빌 수가 없어 무난하게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덤으로 이 해 각 언론사에서 시상한 올해의 재기상을 독차지하다시피 했다.
2.7. 1997시즌
1997년은 입단 이후 최악의 시즌을 보냈다. 김용희 감독의 지원으로 92년 이후 5년만에 정규리그 100경기 이상을 출전했지만 타율 .229에 3홈런 40타점이라는 박정태답지 않은 저조한 성적을 기록했다. 해태와의 광주 개막전에서 2번타자로 출전했으나 개막전부터 타격감이 좋지 못했다. 유격수 쪽 깊은 땅볼로 내야안타를 하나 만들어 5타수 1안타를 기록했을 뿐, 날카로운 타격을 하나도 보여주지 못했고 팀도 연장 접전 끝에 패전. 이 좋지 못한 타격감이 단 한 차례의 반등도 없이 시즌 내내 이어졌다.
5월에 잠시 반짝했나 싶었지만 그 뿐. 성적이 영 좋지 않아 마음고생이 심한 판국에 7월 22일 사직 LG 트윈스 전에서 2루 수비도중 1루주자 박종호를 태그아웃 시키는 과정에서 충돌이 생겨 난투극으로 번져 퇴장을 당하는 흑역사까지 만들었다. 어쨌든 박정태 본인으로선 여러모로 좋지 않았던 시즌. 훗날 본인 말로는 이 시즌의 부진이 자만했었기 때문인 것 같다고 회고했는데, 실제로는 전해에 워낙 잔부상을 많이 당해 그것을 막고자 체중을 심하게 감량했던 것이 가장 큰 원인. 이 시즌 박정태의 체중은 겨우 70kg에 불과했다. 그 탓에 시즌 초반부터 타구에 제대로 힘을 실을 수가 없었고 여름에는 체력마저 급격하게 떨어지는 이중고를 겪었다. 팀 성적마저도 1989년 이후 첫 꼴찌...
2.8. 1998시즌
[image]
1998년은 전해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겠다며 체중을 10kg 이상 늘리면서도 타격폼의 밸런스가 흐트러지지 않게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흔히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키는 작지만 탄탄하고 우람한 근육을 가진 박정태의 모습은 이 시즌부터 만들어진 것. 심지어는 꿈을 꿔도 야구하는 꿈을 꿨을 정도로 노력한 끝에 시즌 초반부터 타격랭킹 상위권을 질주하며 화려한 재기에 성공했다. 특히 5월에는 .368까지 타율을 끌어올리며 타격랭킹 단독 선두를 질주했다.
또한 광주구장에서 열린 올스타전에서 4안타의 맹타를 휘둘러 미스터 올스타에 선정, 부상으로 당시 새로 출시된 삼성자동차의 SM520 승용차를 받게 되었다.[9] 올스타전 MVP에 뽑히고 나서 했던 인터뷰에서 올스타전이 열리기 전날 일찍 광주에 도착해서 밤늦게까지 개인훈련을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했던 말이 '''"후반기 대비가 목표였다.올스타전 휴식기라고해서 편안히 쉴 생각은 없었다."''' 흠좀무. 후반기 대비의 차원에서 의도적으로 짧게 끊어치며 정확히 맞추는데 주력해 안타를 4개나 칠 수 있었다고 한다. 참고로 이 당시 4안타는 올스타전 한 경기 최다안타 타이 기록. 특히 승부가 거의 결정난 9회초 우중월 3루타때 전력질주로 3루에 슬라이딩해서 세이프가 되었는데 이 장면은 야구팬들에게 '박정태는 올스타전마저도 건성으로 뛰지 않는 근성왕'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줬다.
좋은 타격 페이스 덕택에 후반기부터는 부진한 마해영을 대신해 한동안 팀의 4번타자를 맡아 고군분투했으며 특히 7월 23일 대구 삼성전에서 연타석 홈런 포함 4타수 4안타 5타점을 기록했던 경기가 백미. 시즌 최종 성적은 타율 .318에 13홈런 79타점. 특히 .318의 타율은 그 해 타격순위 전체 3위에 해당하는 매우 좋은 성적이었다. 팀 성적은 전해에 이어 2년 연속 꼴찌를 기록했음에도 2루수 골든글러브는 박정태의 몫이었다.
시즌 종류 후 선수단으로부터 차기시즌 주장으로 추대되었다.
2.9. 1999시즌
1999년엔 팀의 새 주장을 맡아 마해영, 펠릭스 호세와 함께 공포의 클린업 트리오를 구성, 롯데 자이언츠의 1999년 한국시리즈 준우승을 이끌게 된다. 전시즌까지 2년 연속으로 꼴찌를 했던 팀이었지만, 지기 싫어하는 근성의 박정태가 주장을 맡았을 때 또다시 루징 시즌을 보낸다는 것은 박정태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강력한 카리스마로 팀을 다잡아 이끌어가는 강한 주장의 모습을 보였다. 대표적인 에피소드가 본인이 자진해서 유니폼의 양말을 무릎까지 끌어올리는 농군패션을 시작하면서 전 선수단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지시했던 것. 그래서 이 당시 롯데 하이라이트를 찾아보면 용병과 일부 투수를 제외하면 선수들이 죄다 농군패션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팀에는 박정태보다 선배인 선수들도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박정태의 말을 거역하지 못할 정도로 박정태의 팀내 위상과 카리스마는 후덜덜한 수준이었다. 그 덕택인지 당초 드림리그 꼴지 후보였던 롯데는 개막 시작하자마자 6연승을 달리며 정규시즌 마지막 전날까지 드림&매직리그 통합 1위자리를 고수했다.[10]
이 시즌 최종성적은 타율 .329와 11홈런 83타점. 1998년~1999 두 시즌은 박정태의 최전성기(혹은 2차 전성기)로 '''2년 연속 골든 글러브'''와 '''미스터 올스타'''에 뽑히기도 했다. 1999년에 기록한 '''31경기 연속 안타 기록'''은 박정태 전성기의 최고 백미였다.[11][12][13][14]
연속경기안타에서 최고의 위기는 25경기 연속안타에 도전하던 6월 2일 대전 한화전. 이날 3번타자 2루수로 선발 출전한 박정태는 7회초 4번째 타석까지 안타를 뽑아내지 못했다. 남은 이닝은 8, 9회 두이닝 뿐이고 8회초 공격이 박정태 뒤의 4번 펠릭스 호세부터 시작된다는 점에서 박정태의 연속경기 안타 기록이 중단될 위기였다. 그러나 후배들이 “자, 정태형한테 한 타석 더 만들어주자!”며 파이팅을 외치고는, 8회초 집중 4안타를 터뜨리며 8명의 타자가 공격에 나서 결국 9회초 박정태에게 기적처럼 한 번의 찬스가 더 돌아왔다. 이 때 상대투수 김해님을 상대로 기어이 중전안타를 뽑아 연속경기 안타 기록을 이어갔다. 본인 말로는 후배들의 정성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고. 덤으로 이날 얼마나 마음이 급했는지 이전 타석에선 왼쪽 정강이에 데드볼을 맞았는데도 그 공이 마침 각도가 꺾이지 않고 포수 글러브에 원바운드로 들어가자, 공에 맞지 않은 척 하고 계속 타격을 했고 주심마저 이를 몰랐는데, 이 때 데드볼 맞은 통증을 얼굴에 내색하지 않느라 죽는줄 알았다고 한다.
어쨌든 이 날의 선전으로 기록은 계속 이어졌고, 다음날 26경기 연속안타로 김기태가 기존에 보유한 기록과 타이를 이뤘으며, 그 다음날 6월 4일 한화전에서 1회초 안타를 기록하며 27경기 연속 안타의 신기록을 작성했다. 이후 경기에선 안타를 칠 때마다 신기록이 경신되어 갔으며 31경기까지 이어졌다.
[image]
연속경기 안타 기록 외에도 이 시즌은 삼성 라이온즈와의 플레이오프 7차전에서 '''"오늘은 무조건 이기야 된다"''' 가 유명하다.[15] 이 당시 선수단을 이끌고 경기장에서 나가려고 한 것도 다름이 아닌 박정태였다. 경기는 삼성쪽으로 기울고 참조.
올스타전에서도 두각을 톡톡히 나타냈는데 1998년 7월 8일 무등야구장에서 벌어진 올스타전에서 4안타를 기록해 기자단 투표 46표중 39표로 미스터 올스타(MVP)를, 1999년에는 3-3으로 맞선 3회 2사 1,2루에서 매직리그 3번째 투수인 LG 트윈스의 김상태를 상대로 좌월 3점 홈런을 쏘아 올리고, 5회에 우전안타까지 기록하며 드림리그의 9-5 승리를 이끌며 MVP에 선정되었다. '''2년연속 미스터 올스타 기록은 박정태가 유일 무이'''.
1999년에 열린 시드니올림픽 아시아예선전을 겸한 제20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 한국 대표팀 주전 2루수로 선발되어 중국전에서 만루홈런을 날려주셨다. 또한 제 3회 한일 슈퍼게임에서도 주전 2루수로 활약. 이 두 대회에서 특유의 타격폼이 화제가 되었다. 박정태가 타석에 들어서면 상대편 선수들이 빵 터진 일화는 유명.
한일슈퍼게임 종료 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내년 시즌을 마치고 해외진출가능 연차를 채우게 되면 일본프로야구에 진출하겠다고 밝혔다. 실제로 한일슈퍼게임도 자신이 일본에서 통할 수 있는지를 테스트해보는 기회로 삼았다고. 슈퍼게임에서 .375의 타율을 기록했다.
2.10. 2000시즌
2000시즌 전 선수협 파동으로 인해 해외전지훈련을 하지 못했다. 선수협 창립 핵심멤버들은 구단들의 담합 덕택에 한 명도 해외전지훈련에 참가하지 못했던 탓. 그럼에도 정작 박정태는 시즌에 돌입하자마자 4할 언저리의 맹타를 휘둘렀고 무려 6월 말까지 .370을 넘나드는 고타율을 자랑하며 역시 박정태라는 찬사를 받았다. 같은 선수협 핵심멤버였지만 시즌 초반에 열심히 삽을 펐던 마해영과 비교되어 박정태가 더 주목받게 되었으나 정작 본인은 동계훈련을 체계적으로 하지 못해 체력적으로 힘들고 몸상태도 좋지 않다고 호소. 특히 4월초에 이미 오른손 손목 인대가 늘어나는 부상을 안고 있는 상태에서 그 정도의 타율을 기록했다는 것은 경기에 대한 집중력이 그야말로 경이적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본인의 우려대로 결국 장딴지 근육 파열이라는 부상을 당하면서 한 달이나 전열에서 이탈했고, 이 부상과 더불어 동계훈련을 하지 못해 떨어진 체력이 시즌 끝까지 박정태의 발목을 잡게 된다. 전반기 종료 시점에서 .349였던 타율은 후반기 시작부터 귀신같이 하락세를 타며 결국 시즌은 .285의 타율로 마무리. 후반기의 극도의 부진 덕택에 따놓은 당상으로 여겼던 시드니 올림픽 국가대표팀 승선도 탈락했으며[16] 포스트 시즌에서도 뚜렷한 활약을 하지 못해 팀을 패배에서 구해내지 못했다. 지난해보다 하락한 개인 성적과 팀의 포스트시즌 조기 탈락의 여파로 전해에 공언했던 일본 진출도 없었던 일이 되고 말았다.
2.11. 2001시즌
2001시즌은 마해영이 삼성으로 트레이드되어 중심 타선이 크게 약화된 팀 사정상[17] , 좀더 장타 생산에 집중하겠다고 선언했다. 본인 표현으론 타구의 비거리를 늘리게 되면 홈런이나 2루타 수가 늘어나는 것은 물론, 평소 내야수 플라이로 잡힐만한 타구도 내야수 키를 넘는 안타로 만들 수 있다는 것. 이를 위해 동계훈련 때 전성기보다 무려 7kg나 늘리는 벌크업을 하고 타격폼도 손의 위치를 뒤로 가져가면서 타구의 비거리를 늘리는 장타자로의 변신을 꾀했다.
하지만 결과는 그야말로 최악. 개막전에서 투런홈런 포함 2안타를 치는 산뜻한 출발을 보이며 장타자로의 변신에 성공했나 싶었지만 그게 끝이었다. 그 다음날부터 팬들도, 코칭스태프도, 본인 스스로도 이해를 할 수 없었던 극악의 부진이 시작, 13게임 연속으로 무려 44연타석 무안타라는 끝모를 부진에 빠졌다. 과도한 벌크업으로 인해 순발력이 저하되어 스윙 스피드가 느려진 탓.
당시 김명성감독이 계속해서 타순 조정을 해줘 클린업에서 6번타자로, 이후 7번, 심지어 8번타자로 기용된 날이 있을 정도로 부진이 심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명성 감독은 박정태를 라인업에서 빼지 않고 계속해서 타격감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줬다. 5월을 기점으로 다시 타격감이 살아나기 시작했고 5월 22일 인천 SK전에서는 5타수 5안타를 치며 사이클링 히트까지 기록할 뻔 하며[18] 완전히 타격감을 찾은 모습을 보였다. 6월에는 .266까지 타율을 끌어올렸으나 결국 과도한 체중으로 인한 후반기 체력저하로 인해 다시 부진에 빠져 .247이라는 저조한 타율로 시즌을 마쳤다. 몸 상태도 그랬지만 당시 갈등을 빚었던[19] 김명성 감독이 시즌 중 급작스럽게 별세한 데 대한 심리적인 충격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 시즌에 프로통산 1천안타를 달성했다.
2.12. 2002시즌
2002시즌은 전해의 실패를 거울삼아 체중을 다시 전성기때로 가볍게 되돌렸고, 떨어진 순발력을 끌어올리는데 초점을 맞춰 시즌을 준비했다. 하지만 의욕과는 달리 시즌 초반부터 부진에 허덕여 결국 커리어 역사상 최초로 성적 부진으로 2군에 강등되는 수모를 겪는다. 만루홈런을 치며 반짝하기도 했지만 1할대의 저조한 타율이 개막후 한달 내내 지속되었고, 5월 들어서도 간신히 2할을 넘기는 부진이 계속 이어지자 5월 말 어쩔 수 없이 2군에 내려가게 되었다. 이 와중에 LG와의 트레이드설에도 연루되어 마음고생이 심했다.[20]
백인천 감독 부임 후 8월 중순부터 새 감독의 조언을 따라 기존의 타격폼에서 약간 수정을 본 것이 엄청난 효과를 보게 되어[21] 다시 전성기의 안타머신 모드를 회복했다. 8월 중순때까지만 해도 1할대였던 타율이 수직상승하기 시작했고 9월 한달간 .386 3홈런 15타점이라는 무시무시한 활약을 보이며 형편없는 꼴지였던 팀 성적과 별개로 월간 MVP를 수상. 타율도 .262까지 끌어올리면서 시즌을 마감했다.
이 시즌에 프로통산 1천경기 출전을 달성했다.
2.13. 2003시즌
2003시즌은 박정태에게 있어서 정말 다사다난한 한 해였다. 어렵사리 FA자격을 갖췄지만 구단과의 FA 협상이 지지부진해 해를 넘길때까지 도장을 못 찍고 버티고 있었는데, 롯데가 최종안으로 제시한 계약조건은 2년에 6억으로 보장금액은 4억에(계약금 1억, 연봉 1억 5천 x 2년치) 옵션 2억이 포함된 금액이었다. 문제는 이 옵션의 조건이 '''한 시즌 130경기 이상 출전에 .320의 타율과 80타점 이상'''이라는 말도 안되는 조건이었다는 것. 참고로 이 때 한시즌 경기수가 133경기였고, 전년도 기준으로 타율 .320이상을 찍은 선수가 당시 최전성기를 보내던 장성호, 이승엽, 마해영, 심정수 단 4명에 불과했다. 최전성기의 최고 타자에게도 쉽지 않은, 당시 노장인 박정태로선 현실적으로 달성이 불가능한 조건.[22] FA 계약협상 마감 기간이 얼마 안남은 시점까지도 도저히 도장을 찍지 못하고 버티자 롯데구단에서는 괘씸죄 명목으로 협상기간 마감까지 1주일여 남았음에도 박정태와의 계약을 포기한다고 공식 발표 후 보도자료를 돌려버렸고, 졸지에 박정태는 소속팀을 찾지 못해 강제은퇴를 당할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였다.#
하지만 롯데구단이 간과한 것은 야구팬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격렬한 저항. 박정태와의 계약 포기는 어느 정도 여론의 악화를 감수한 결정이었지만 그 후폭풍은 롯데 구단이 상상한 그 이상이었다. 롯데를 위해 12년을 뛰어온 프랜차이즈 스타를 이런 식으로 홀대하는 모습에 롯데팬들은 엄청나게 분노했고, 여기에 이건 아니다 싶었던 타 구단 팬들까지도 합세해 구단 사무실과 홈페이지를 완전히 마비시켜버릴 정도로 전화와 게시글을 쏟아내며 격렬하게 항의했다.[23] 특히 앞서 전술했듯이 롯데구단에서 박정태에게 말도 안되는 조건의 옵션을 제시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당시 PC 통신과 인터넷의 프로야구 팬덤이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롯데팬들은 말할것도 없고, 이건 남의일이 아니다 싶었던 타 구단 팬들까지 힘을모아 대동단결해서 롯데구단을 성토하고 항의했다.[24] 결국 팬들의 상상을 초월한 민중봉기를 견디다 못한 롯데구단은 기존의 입장을 번복하고 FA 계약협상기간 종료 하루 전에 박정태와 2년 6억에 FA 계약을 맺었다.[25]
늦어진 FA 계약 덕택에 스프링캠프에 뒤늦게 합류하지만 뒤쳐진 몫을 따라잡으려 오버페이스를 하다가 부상을 당하면서 바로 귀국 조치. 그럼에도 워낙 약했던 선수층 덕택에 개막 엔트리에 포함되며 개막전 대타 출장 후 바로 선발라인업으로 승격되어 한동안 팀의 '''4번타자'''로 활약했다.[26] 그렇게 시즌 초반을 보내던 중 주루플레이를 하다가 어깨와 다리에 큰 부상을 입고 전열에서 이탈해 몇 달간의 재활을 하게 된다. 3개월 후 다시 복귀했고 이후엔 수비부담으로 인한 부상 후유증을 우려해 대타&지명타자로만 활약했다. 50경기에 출전해 .278의 타율과 2홈런 17타점을 기록.
2.14. 2004시즌
2004년은 젊은 선수를 중용하는 신임 양상문 감독의 방침으로 개막이후 줄곧 2군에 머무르게 된다. 사실 양상문이 일부러 박정태를 쓰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는데 자세한 내용은 양상문 항목 참조. 팀 내 2루수 자원들이 하나 둘도 아니고 넷이나 부상으로 쓰러져나가는 상황에서도 양상문이 끝끝내 박정태를 쓰지 않자[27] 뿔난 롯데팬들이 몇 개월에 걸쳐 구단 홈페이지 갈매기마당에서 '박정태 1군 등록 릴레이'를 펼치고 심지어 외야에 '우리는 악바리 박정태를 원한다' 는 대형 플랜카드까지 내걸며 시위를 한 끝에 8월초[28] 가까스로 1군에 콜업할 수 있었다.[30]
8월 3일 한화 이글스와의 홈경기에서 1군 복귀를 했으며, 그 날 관중이 평소보다 두 배가 더 들어왔다.(...) 찬스에서 대타로 나가 볼넷을 골라내고 후속타로 득점까지 올렸는데, 이례적으로 후배선수들이 홈런타자를 맞을 때처럼 모두 덕아웃 바깥에 일렬로 서서 홈인하고 들어오는 큰형님을 맞이하는 훈훈한 장면을 연출했다.
[image]
주로 클러치 상황에서 대타로 기용되었으며 타율은 전년도와 같은 .278였지만, 노장선수의 건재함 정도를 측정하는 지표인 출루율이 무려 5할이 넘는 .519였을 정도로 매우 좋은 타격감을 보였다.[31] 박정태가 등장음악[32] 을 깔고 나타나면 엄청난 환호가 나왔으며 혹 삼진이나 범타를 기록하고 덕아웃에 들어올때도 팬들은 여전히 박수와 환호로 맞이했다. 소위 말하는 박정태 효과에 구단 관계자들도 은근히 놀랐다고.
현역 마지막 경기였던 10월 5일 잠실구장 LG전이 유지현의 은퇴식과 겹친 날이었는데, 5회 종료 후 치러진 은퇴식에서 유지현이 마이크를 잡고 은퇴 소감을 밝히다가 가장 존경하는 선수로 박정태의 이름을 호명한 후 원정팀 덕아웃에 있던 박정태에게 달려가 자신이 받은 꽃다발을 나눠주고는 둘이 포옹하며 눈물을 흘리는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했다.[33][34] 박정태는 이 날 7회초에 대타로 출전해 총알같은 우전안타를 날리며 현역 마지막 타석을 유종의 미로 장식했다.[35]
2.14.1. 은퇴
2004년 10월 11일 공식 은퇴를 발표하면서 14년의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은퇴 시점이 하필이면 롯데의 8888577 암흑기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전무후무한 4년 연속 꼴지를 기록한 시점이었던지라 후배들에게 큰 짐을 안겨주고 떠나는 느낌이라며 은퇴 발표 당일에도 자신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팀과 후배들 걱정을 많이 하는 짠한 모습을 보여줬다.
은퇴 발표 후 구단의 지원 하에 캐나다로 코치 연수를 떠났으며 2005년 홈 개막전 현대 유니콘스전을 앞두고 일시 귀국, 홈팬들 앞에서 구단이 마련해 준 은퇴식을 치렀다.
3. 선수시절 총평
3.1. KBO 역대급 2루수
정근우 등장 이전까진 사실상 비교대상이 없었던 KBO 리그 역대 최고의 2루수라 할 수 있다. 흔히 최고의 2루수 논쟁에 김성래, 강기웅, 안경현, 박종호가 함께 거론되던 편인데, 단일 시즌의 임팩트로는 1987년 홈런왕 시절의 김성래가 최고로 꼽히지만 김성래는 본인의 커리어 동안 2루수로 활약한 기간이 극히 짧을 뿐더러 커리어 전체를 놓고 보면 1루수로 많이 뛴 김성래는 박정태와 비교 대상 자체가 아니다. 강기웅은 이미 전성기가 지난 시점에서 프로에 입단해 연차나 누적, 비율스탯 모든 면에서 박정태에 뒤진다. 박종호도 뛰어난 활약을 보이긴 했지만 비율스탯에서 밀리는 감이 있다.
이후 정근우가 장기간에 걸쳐 좋은 활약을 보인 덕에 박정태를 뛰어넘을 거라는 의견이 다수 있었고 실제로 정근우는 2013 시즌까지 통산타율 0.301[36] , 통산 OPS 0.779를 기록하는 등 누적스탯에서나 비율스탯에서나 박정태에 뒤지지 않는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2011년 시점에서 정근우가 이미 박정태를 뛰어넘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었지만 정근우가 2012년에 부진했고 스탯도 많이 까먹었기 때문에 정근우의 한화에서의 성적을 봐야 결판이 날 것으로 보인다. 물론 두 선수 모두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훌륭한 선수들임은 분명하다.
2015년을 기점으로 정근우가 독주하고 있다는 평가다. 전반적인 타격에서 특히 타점을 생산하는 클러치 히팅에 있어서는 박정태가 약간 우위이지만, 정근우 역시 클러치능력은 박정태에게 뒤지지 않는다. 또한 박정태에게 거의 없다시피한 주루플레이에서 압도적인 강점을 나타내고 있으며, 무엇보다 10년 연속 100안타-20도루의 기록을 달성했다. 현역시절 박정태도 '영원한 3할타자'라고 불릴 정도로 꾸준함을 보여줬지만, 최전성기에 당한 큰 부상으로 2시즌을 통째로 날려먹었고, 이후 2년도 군복무와 부상 후유증 탓에 정상적으로 뛰지 못하는 등 4년을 정상적으로 뛰지 못한 탓에 100안타 이상을 기록한 시즌은 의외로 6시즌에 불과하다. 정근우의 연차가 쌓여가면서 어느덧 누적스탯에서도 박정태를 넘어선 상태. 다만 정근우가 여태껏 타격 주요부문에서 개인타이틀을 따지 못한 탓에[37] 골든글러브 수상 횟수에서 2루수 부문 역대 최다 수상자인 박정태의 5회를 넘을 수 있을지 여부가 관건.
역대 최고의 2루수 논쟁에서 박정태의 메리트는 '''14년의 선수생활동안 단 한 차례도 포지션을 변경하지 않고 2루수만을 지켜왔다는 것.'''[38] 그 덕택에 역대 2루수 골든글러브 최다수상 기록을 보유하고 있고 비율스탯 또한 경쟁자들보다 상대적으로 우위[39][40] 에 있는 점 때문에 박정태의 손을 들어주는 사람들이 가장 많은 편이다. 실제로 프로야구 20주년 및 30주년 기념 역대 베스트10 선정에서도 압도적으로 경쟁 후보들을 제치고 역대 최고의 2루수로 선정되었다.
야구에서는 센터 라인, 즉 포수, 2루수, 유격수, 중견수가 강한 팀이 이긴다. 수비가 중요한 포지션에 강타자가 포진한다면 전체적으로 팀 공격력이 높아진다. 전통적으로 타격이 약한 팀에 속하는 롯데에서 3번타자 2루수 박정태의 가치가 높다고 평가받은 이유이기도 하며, 결정적으로 '''2루수 포지션을 맡고 있으면서 한 팀의 3번타자&클린업트리오 자리를 10년 이상 지켜온 선수는 KBO리그 역사상 박정태가 유일 무이하다.'''
3.2. 플레이 스타일
한 시즌 10개 이상의 홈런과 3할 타율이 보장되는 전형적인 컨택 좋은 중거리형 타자이다. 특히 2루타 생산 능력이 탁월하여 현역 시절 2루타와 관련한 기록을 여럿 갈아치웠다.
타석에서는 공을 많이 보는 스타일. 특히나 초구는 절대로 치지 않은 것으로 유명했다. 통산 볼넷이 삼진보다 많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선구안도 준수했고 커트를 하면서 상대 투수를 괴롭히는 데에도 능했다. 대표적으로 1999년 플레이오프 5차전에서 9회말 임창용과 10구까지 가는 끈질긴 승부끝에 볼넷으로 출루해 이후 펠릭스 호세의 역전 끝내기 쓰리런홈런의 발판을 놓은 것이 좋은 예.
수비는 그리 잘 하는 편은 아니었다. 유연성이 다소 떨어지는 편이었던데다가 포구 자세도 좋지 않았고 송구도 그닥 뛰어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호수비를 많이 보여줬는데, 악바리라는 별명에 걸맞게 수비에서도 끝까지 타구를 추적하는 모습을 자주 보였기 때문이다. 스포츠서울에서 1990년대 중반 8개구단 코칭스태프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을 때 당시 해태의 김응용 감독이 2루 수비를 가장 잘하는 선수로 박정태를 꼽은 적이 있다.[41] 하지만 전술했듯 통산 실책 수가 87개로, 2루수 출장이 거의 없던 1994년과 2003~04년을 제외하면 11시즌 평균 1년에 7.9개의 실책을 기록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부상 여파가 있던 1993년과 95년을 제외해도 9시즌 평균 9.6개의 실책을 기록한 셈이 되는데, 2루수라는 보직이 특성상 실책이 많이 나오는 점을 고려하면 의외로 준수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게다가 통산 수비율은 정근우보다도 높다.
지도자로서의 평가는 좋지 않지만 선수로서 박정태는 최동원과 더불어 롯데 자이언츠의 상징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이다. 비록 김명성 감독과의 마찰이나, FA 계약 당시의 잡음 등에서 불미스러운 모습이 다소 드러나기는 했지만, 14년을 롯데라는 한 팀에서만 선수 생활을 했고 부산 야구팬들이 종종 지적하던 근성의 부족과는 거리가 먼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부상 이후의 성공적인 복귀도 인간승리의 귀감으로 회자되곤 했다.
[1] 여담으로 박정태 문서 기타에서 나와있듯, 박정태 스스로 자신이 가장 잘쳤던 투수로 절친 조규제를 꼽았다. 조규제를 상대로 너무 잘치다보니 나중에는 조규제가 아예 포기하고 박정태만 나오면 그냥 가운데로 살살 던져주고 박정태도 알아서 단타만 치고 나갔을 정도라고[2] 이 16번이 롯데 팬들에게는 박정태의 번호로 각인된 바람에 그 이후 16번을 물려받은 후배들이 하나같이 박정태와 비교되어 까이는 웃지 못할 상황을 초래했다. 가장 많이 욕을 얻어먹은 선수는 박정태가 은퇴하고 난 뒤 박정태를 졸라서 16번을 물려받은 박기혁.[3] 당시 의사가 앞으로 선수 생활을 할수 있을지 모른다는 소리를 듣고 하루종일 울었다고 한다.[4] 덤으로 김민재는 박정태가 이탈한 후 주전 2루수로 발탁되어 주전급 선수로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5] 부상 이후 부상당한 쪽의 다리 길이가 짧아졌다고 한다. 부상 전 도루도 곧잘 기록할 정도로 발이 느린 선수는 아니었으나 부상 이후 도루를 거의 기록하지 못했다.[6] 당시 단기 사병으로 복무시 정규시즌엔 홈 경기만 출전 가능했다. 다만 포스트시즌에는 홈 원정 가리지 않고 출전 가능.[7] 박정태의 통산 실책 수는 87개. 이는 2013년 기준으로 200여 경기를 적게 소화한 정근우보다도 적은 수치다.[8] 2012년 KBS N SPORTS에서 방영된 프로야구 30주년 기념 자신을 다룬 다큐멘터리에서 당시 구단 버스기사였던 손경구씨가 자신의 실책 때문에 준우승 했다는 이유로 술을 떡이 될 정도로 마신 뒤에 겨우 차에 탔었고 대전에 내린 뒤에 "아이고 내 죽겠네" 라는 얘기를 밝힌 바가 있다.[9] 이 해 올스타전 이후 한동안 올스타전 MVP에게 자동차 부상을 주지 않았다가 11년이 지난 2009년에야 올스타전 MVP에게 자동차 부상을 주게 된다. 이는 한국시리즈 MVP도 마찬가지.[10] 시즌 마지막 경기가 두산과의 전체승률 1위 결정전 단두대매치였는데 여기서 패하는 바람에 2위가 되어버렸다.[11] 이후 박종호의 39경기로 깨졌다. 다만 단일 시즌 연속안타 기록은 박정태가 가지고 있다. 박종호는 2시즌 걸쳐서 이룬 기록.[12] 32경기째 마지막 타석때 3루수쪽 안타성 타구를 날렸으나 당시 두산 3루수 홍원기가 다이빙 캐치로 잡아내면서 아쉽게 막을 내렸다. 그리고 다음날 안타를 쳤다.....[13] 경기가 끝나고 기자들이 안타성 타구를 잡은 홍원기가 밉지 않냐고 질문했을때, 오히려 너무 고맙다고 했다. 홍원기의 호수비로 인해서 자신의 연속안타 기록이 짜고친 것이 아니라 서로 최선을 다하는 상황에서 힘겹게 달성한 기록이라는 것이 증명되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14] 다만 이때의 골든글러브는 조금은 논란이 있었는데, 홍현우가 2루수로서 3할 30홈런 30도루 100타점이라는 위업을 달성했음에도 박정태가 수상한 것. 이는 당시 팀성적의 차이와 연속경기안타 신기록의 화제성, 그리고 박정태라는 이름값이 불러온 결과였다. 박정태도 이를 의식했는지 골든글러브 수상소감 중 "홍현우 선수한테 너무 미안합니다."란 말을 했을 정도.[15] 김민재 kt 코치의 말에 따르면 풀 버전은 이거라고 한다. "오늘 무조건 이기라. 안그르면 다 지기삔다! 알긋나?"(안 그러면 다 죽여버린다! 알겠어?) 라고...[16] 전반기 성적만 놓고볼때는 박정태가 2루수에서 0순위였으나, 이 당시 올림픽 직전에 확정된 대표팀 멤버 선정 기준은 '현 시점에서 컨디션이 좋은 선수'가 1순위였다. 그래서 후반기에 슬럼프에 빠진 박정태가 선발되지 못한 것. 결국 박정태가 빠지고 현대의 박종호와 삼성의 김태균이 선발되었다. 다만 현 시점의 컨디션이라는 게 그야말로 추상적인 기준인지라 타격왕이던 박종호를 제외하고는 멤버 구성을 놓고 다소 잡음이 있었으며, 타격 상위권에 있던 양준혁도 석연치 않은 이유로 대표팀에서 탈락하는 등 선수협 주동자들에 대한 길들이기 차원이 아니냐는 여론도 일부 존재했다.[17] 당시 호세와 박정태를 빼면 중심타선을 맡을 선수가 없었다. 다행히 조경환이 포텐을 터뜨리며 중심타자가 되었다. [18] 3루타가 있으면 되는 상황에서 3루타가 되고도 남는 타구가 나왔는데 본헤드성(?) 플레이로 2루에 멈췄다가 3루로 빨리 오라는 말을 듣고 3루로 달렸지만 한끝 차이로 아웃.(기록은 2루타)[19] 박정태가 워낙 카리스마 있고 강한 성격이다보니 온화한 성품의 김명성 감독과 종종 트러블이 있었다고 한다.[20] 박정태 임경완을 LG로 보내고 안병원, 안상준을 받아오는 트레이드였는데 당시 LG의 김성근 감독이 박정태를 무척 원해서 추진되었던 트레이드였으나 팬들의 반발과 구단 자체 검토 끝에 결국 백지화되었다[21] 당시 백골퍼는 박정태가 부진하자 2군을 보내놨는데, 백인천 항목에 '특이한 폼의 박정태는 2군에 쳐박아두었다'라고도 나와있다. 특이한 타격폼이 부진한 원인이라고 오판한듯.[22] 애초에 은퇴가 얼마 안남은 30대 중반의 베테랑 선수에게 130경기 이상 출전에 .320의 타율과 80타점 이상을 옵션 달성 조건으로 들이밀었다는 자체가 당시 롯데구단이 얼마나 개념없이 프랜차이즈 스타를 홀대했는지를 보여준다. 훗날 박정태 본인도 차라리 처음부터 2년 4억이라고 했으면 기분이라도 덜 나빴을거라고 이 당시를 회고했을 정도였다. 옵션 조건이 객관적으로 봐도 아예 받아갈 생각은 꿈도 꾸지말라는 수준이라 이 부분을 놓고 계속해서 대화를 나눴지만 구단은 요지부동이었고 이 때문에 마음의 상처도 컸다고 한다.[23] 당시 갈매기마당(일명 갈마)는 지금의 DC인사이드처럼 비회원도 자유롭게 글을 남길 수 있었다. 그 덕택에 박정태를 홀대하는 롯데구단에 항의하고 성토하는 글들이 지금의 DC 야갤 수준으로 폭풍 리젠될 정도였다.[24] 롯데팬 뿐만 아니라 타 구단 팬들까지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은 박정태가 이런식으로 어이없게 은퇴하게 되면 나중에 자신들의 응원팀 프랜차이즈 스타들의 마지막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얼마 지나지 않아 LG 트윈스의 유지현이 사실상 반강제로 은퇴를 당하고 김재현과 이상훈과도 좋지 못한 모습으로 결별하는 바람에 LG팬들 또한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았다.[25] 구단에선 위로의 뜻으로 박정태와 구단 간의 갈등에 있어 가장 큰 원인이었던 말도 안되는 조건의 옵션을 대폭 완화해 줬다. 총액 6억은 종전과 같은 조건이었지만 계약금을 1억에서 2억으로 인상해 보장금액을 5억으로 올려준 대신, 옵션 액수는 2억에서 1억으로 반을 깎고 달성조건도 규정타석과 .280에 50타점으로 대폭 낮췄다. 박정태는 팬들이 자신의 현역생활 연장을 이뤄줬다면서 지금도 이 부분을 팬들에게 진 빚이라고 표현한다.[26] 노장 박정태가 4번타자를 맡아야 할 정도로 이때당시 롯데 전력의 뎁스는 그야말로 습자지 수준으로 허약하고 빈약했다. 다른팀이었다면 백업이나 2군급 선수들이 선발 라인업 가득 채운데다 그나마 하나있던 용병타자 보이 로드리게스마저 딸랑 7경기에서 1할대 타율을 치고 퇴출되었으니... 당시 개막 후 최다연패 기록인 12연패 기록을 세웠다.[27] 당시 주전 2루수 조성환이 사구를 맞고 손등 골절로 시즌아웃되었고 그를 대신했던 신명철, 박준서가 줄줄이 부상으로 쓰러져나가 2루수 자원이 바닥이 난 상태에서도 끝끝내 박정태를 콜업해 쓰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주전 2루수를 맡긴 선수가 1군경기 경험이 전혀 없던 신인 박진환이었으니 누가 봐도 너무나 노골적이었던 상황. 이미 시즌이 개막하기 전 양상문은 박정태에게 은퇴를 권유했으나 박정태는 팬들 때문에 연장된 현역 생활이기 때문에 팬들 때문에라도 계약기간 종료 까지는 현역으로 뛰고 싶다며 거절했다고 한다.[28] 실제로는 플랜카드 사건까지 터지고 난 6월 중순 양상문 감독이 팀 분위기 쇄신 차원으로 박정태를 1군에 올리려 했었다. 그런데 하필 그시점 2군경기에서 박정태가 2루 수비도중 상대팀 주자와 충돌해 늑골 타박상을 입어 늦어지게 된 것. 당시 관전자의 말로는 2군에서도 1군처럼 너무 열심히 플레이하다가 입게된 부상이라면서 안타까워했다.[29] 다만 이병규는 이미 양상문이 감독이던 2014, 2015년에 꽤 출장했으나 모두 실망스런 성적만을 기록했었다. 특히 2015년에는 2할대 초반의 타율로 극도로 부진했었고, 실제 이 당시 LG 관련 커뮤니티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이병규 좀 빼라는 성토가 빗발쳤었다. 오죽하면 쥐갤에서 지게뱅이라는 멸칭으로 조롱했을까. 이후 2016년 2군을 4할 타율로 폭격했다지만 1군과 2군의 수준 차이와 직전 2년간 이병규의 성적, 고령의 나이를 생각해보면 16년 1군에서 잘 할 확률은 냉정히 말해서 높지 않았다. 거기에 2016년엔 LG가 포스트시즌 경쟁까지 했으니 그에게는 더욱 기회가 없을 수밖에. 양상문이 그를 제외하는 과정이 매끄럽지 않았던 건 맞지만 이병규의 성적이 실망스러웠던 것도 사실이기에 박정태와는 케이스가 조금 다르다.[30] 물론 이는 양상문 감독이 박정태를 기용하지 않은 것을 세대교체 차원이라고 해도 대놓고 홀대한 행위이다. 그 뒤 2010년 삼성 라이온즈에서 똑같은 일이 일어났고, 양상문이 이후에 맡은 팀에서도 똑같은 일을 저지른다.[29][31] 타석수가 적어 표본이 적긴 해도 5할이 넘는 수치는 타격감 유지가 힘든 대타 위주로 기록한 것임을 감안시 무시할만한 수치가 아니다. 당시 롯데의 물방망이 타선을 고려한다면 더더욱.[32] 당시 WWE 프로레슬러 커트 앵글의 테마음악을 사용했다.[33] 박정태는 14년의 선수생활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으로 한국시리즈 우승이나 연속경기안타, 1999년 플레이오프 등이 아닌 바로 이 순간을 꼽았다. 사전에 전혀 얘기가 되지 않은 유지현의 돌발 행동이었던지라(점심때 둘이서 짬뽕을 같이 먹었는데 그때까지도 아무말이 없었다고;;) 당시의 놀라움과 감동이 그만큼 컸다고 한다. 유지현의 훈훈한 돌발 행동은 자의보다 타의에 의한 은퇴를 앞두고 있던 두 프랜차이즈 스타의 동병상련의 감정 때문이었으리라. 박정태는 이 날 이후 유지현을 친동생처럼 여기고 아낀다고 한다.[34] 사실 두 사람은 원래 사이가 좋다고만은 볼 수 없는 관계였는데, 박정태가 선수협 창단 멤버이지만, 유지현은 선수협 5적으로 까이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건 이 날을 계기로 두 사람이 상당히 친해졌다는 것이다. [35] 상대팀 LG 트윈스 선수들도 어쩌면 이것이 박정태의 현역시절 마지막 안타가 될 수도 있어서 공을 따로 챙겨줬다고 한다. 실제로 롯데는 이날 후 홈경기 하나가 더 남아있었지만 박정태는 출전하지 않았고 결국 10월 5일 잠실 LG전이 박정태의 현역 마지막 경기이자 마지막 안타를 때려낸 경기가 되었다.[36] 2012년에 많이 까먹고도 이정도.[37] 박정태의 경우 타격 2위와 최다안타 2위가 최고이며, 정근우는 두 번의 최다안타 2위와 득점 1위를 기록한 바 있다.[38] 김성래, 박종호, 안경현 등이 모두 타 포지션 유경험자이다. 이는 현역에서 첫손에 꼽히는 정근우도 마찬가지. 2루수로 정착하기 전 3루수와 유격수, 외야수를 왔다갔다 했다. 한화 이글스 시절 마지막 2년동안은 정은원에게 2루수 포지션을 내주고 1루수와 외야수를 병행했다. 그러나 박정태는 프로에서 2루수 외 타 포지션을 소화한 적이 전혀 없다.[39] 통산타율 .296는 박정태가 은퇴한 시점을 기준으로 KBO 리그 은퇴선수 가운데 무려 역대 5위에 해당하는 고타율이다. 당시 박정태보다 앞섰던 선수는 장효조, 이정훈, 김종모, 이만수까지 불과 네 명 뿐이었다. 게다가 여기서 통산 1천안타 이상을 기록한 선수로 기준을 상향하면 여기서 이정훈과 김종모가 빠지고 박정태가 3위로 뛰어오른다. 참고로 박정태는 이정훈보다 통산 타수가 800이상이 높으며 김종모보다 무려 1100타수 이상을 더 많이 소화했다.[40] 지금의 KBO 리그는 144경기 체제와 타고투저 성향으로 인해 통산타율 3할 이상을 유지하며 은퇴하는 선수들이 자주 나오고 있지만, 저때만 해도 지금보다 시즌당 경기수가 훨씬 적었고 투고타저의 흐름으로 인해 전체적으로 타자들의 타율이 지금보다 훨씬 낮았던 시기였다. 이 탓에 박정태가 은퇴한 시점이 KBO 리그 출범 20년이 훌쩍 넘은 시점이었음에도, 통산타율 3할 이상을 유지한 채로 은퇴한 선수는 장효조 단 한 명 뿐이었다. 또한 2루수는 수비의 비중이 큰 특성상 보통 포수, 유격수와 함께 공격력이 가장 약한 선수들이 많은 위치이기도 하기 때문에 당시 박정태가 기록했던 3할에 준하는 통산타율의 가치는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41] 실제로 수비력이 최고였다기보단 근성있는 모습을 높게 평가했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이 때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선수는 OB의 이명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