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리 니폼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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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의 축구선수 출신 감독. 2014년부터 2016년까지 FC 톰 톰스크 감독을 맡았다. 애칭은 '''니포'''.
2. 축구인 생활
2.1. K리그에 오기 전까지
선수 시절은 무명의 수비수였지만,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에서 카메룬의 8강 신화를 이끌면서 주목받았고[2] , 이후 중국 축구 국가대표팀 등의 고문을 맡다가 1994년 K리그 팀 유공 코끼리 감독으로 내한해 부천 SK로 팀명을 변경한 1998년까지 감독을 지낸다.
2.2. K리그에서의 모습
당시 그가 보여 준 축구는 그 동안 대한민국에서 볼 수 없는 신선함 그 자체였다. 확실한 스트라이커가 없다는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당대 최고의 플레이 메이커 윤정환을 중심으로 헝가리 출신의 쇼모지 요제프(Somogyi József), 윤정춘, 김기동, 이을용 등 뛰어난 미드필더들을 중용하여 물수제비 뜨듯 깔끔한 패스로 여러 차례의 득점 기회를 만들었고, 조윤환 수석코치[3] , 최윤겸 수비코치에게 직접 스타팅 멤버를 짜게 하면서 후진들의 양성에 앞장섰다. 그 때문인지 PC통신상에서는 '유공의 축구는 패해도 표값이 아깝지 않다'는 칭찬이 쏟아졌고, 비슷하게 4-4-2 기반의 패싱 축구를 구사하던 수원 삼성 블루윙즈와 붙는 날이면 당시 팬들에겐 '명경기 보증수표'로 통할 지경었다. 지금도 올드 팬들은 이 두 팀의 매치업을 다시 보고 싶어하는 경기로 꼽고 있다.
감독감을 키우는 감독으로도 유명해서 니포 밑에서 코치 생활을 했던 조윤환과 최윤겸 제주 유나이티드 FC 감독은 물론 선수들 중에도 지도자가 여럿 배출되었다. 조성환 제주 유나이티드 FC 감독, 남기일 성남 FC 감독, 송선호 부천 FC 감독, 윤정환 무앙통 유나이티드 감독, 강철 前 FC 서울 수석코치, 이임생 수원 삼성 감독, 김한윤 前 제주 유나이티드 FC 코치, 김기동 포항 스틸러스 감독 등 이다. U-23 감독을 맡았던 이광종 감독도 (니폼니시 감독 밑에서 선수 생활을 한 건 1995년 한 해뿐이지만) 니폼니시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승권과 거리가 멀었다. 1996년 아디다스컵 우승을 제외하고는 매번 우승 문턱에서 주저앉았고, 1997년 정규 시즌에서는 최하위의 수모까지 겪었다. 속공을 통해 게임을 풀어 가는 유공의 축구 스타일상 몸싸움을 잘 하고 100m를 11~13초대에 끊을 타깃형 스트라이커가 필요했지만 1996년 K리그 베스트 11이었던 세르게이 부르딘 정도를 제외하고는 좋은 타깃형 스트라이커를 구하지 못했고, 또 구단의 모기업이 스포츠단 운영에 있어서는 '''막장으로 유명한 솩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SK라고 다 같은 SK가 아니었다. 축구단의 모기업은 SK에너지고, 야구단과 농구단은 SK텔레콤을 모기업으로해서 같은 SK그룹이라고 해도 계열이 달랐는데 후자는 오너의 관심을 받으며 꾸준히 투자받은 반면 전자는 서자취급이었다. SK그룹은 서울연고공동화 정책으로 서울에서 쫒겨나 연고도 없는 부천으로 강제이전 당한뒤 축구단에 투자 의욕을 잃었다. 심지어 SK에서 낙하산으로 내려온 축구단 단장이라는 사람이 대놓고 '전국에 보면 SK 주유소 간판이 얼마나 많은데, 그게 축구단보다 홍보효과가 더 크다' 라는 헛소리를 하기도 했다.[4] 그래서 1997년에 최하위를 했을 때도 니폼니시 감독을 비판하기보다 SK그룹 수뇌부를 비판하는 네티즌들이 많았다. 그리고 이 당시에는 조직력 축구보다 에이스에게 몰아 주는 축구가 주류였기 때문에, 국가대표급 선수진을 갖춘 포철, 일화, 대우[5] 에 밀리는 경우가 많았다.
여담으로 수원은 1998년과 1999년 2년 연속 리그 우승을 차지하면서, 1993년부터 1995년까지 K리그 3연패를 달성한 동대문 일화, 1997년 리그 전관왕을 달성한 부산 대우와 더불어 1990년대의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 팀으로 남았다.[6]
2.3. K리그 감독 사임 이후
1998년 퇴임 후 J리그 산프레체 히로시마를 거쳐 2003년 중국 산둥 루넝의 감독을 맡아 FA컵 우승을 따내며 한국 시절 이루지 못한 우승의 한과 AFC 챔피언스리그 진출의 한을 풀었다. 이후 고향 러시아의 톰스크 팀 감독으로 재임하다가 2011년에 물러나 2014년까지 PFC CSKA 모스크바의 기술고문으로 일했고, 이후 다시 톰스크의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2017년 6월 7일, 부천 FC 1995의 재창단 10주년 기념으로 10살인 외손녀[7] 와 함께 부천 FC 1995 구단의 초청으로 방한했다. 6월 10일에 열린 부천과 서울 이랜드 FC의 K리그 챌린지 경기를 참관했다.기사1 기사 2 기사 3 당시 축구선수는 '극장'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영화'를 좋아해야 한다는 명언을 남겼다. 니폼니시 인터뷰
K리그를 한단계 발전시킨 감독으로도 평가 받기도 했다.
[1] '혈통 미상'을 의미하는 러시아어 성씨이다. 실제 발음은 '니폼니시[nʲɪˈpomnʲɪɕːɪɪ̯\]'에 가깝다.[2] 카메룬의 경제적 사정은 차치하더라도, 선수들과의 커뮤니케이션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국가대표팀 통역은 카메룬 주재 소련 영사관에 고용된 운전기사였다고 하니, 말이 필요한지?[3] 니폼니시 이후 부천의 감독을 지냈고, 이후 전북 현대 모터스의 감독을 맡기도 했다.[4] 당시 드래프트 4라운드는 구단과 자매결연을 맺은 대학의 에이스를 지명하는 시스템이었는데, SK는 동아대학교 - 인천대학교 이런 식으로 자주 자매결연 대학을 옮겼다.[5] 각각 現 포항 스틸러스, 성남 FC, 부산 아이파크[6] 1999년 수원은 K리그 30년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팀을 꼽으라 해도 후보로 명함을 내밀 수 있을 만큼 압도적인 위용을 뽑냈다. 이 해 컵대회(슈퍼컵, 아디다스컵, 대한화재컵)와 K리그를 모두 제패했으며, 2위 부천과 승점 차이가 12점이었다.[7] 참고로 니포의 외손녀는 방탄소년단의 팬이다. 방탄소년단의 앨범이나 물품을 구매하기 위해 할아버지를 졸라서 같이 방한했다고 한다.